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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필 만록, 『조선솔의 바람소리』, 그루, 2002.
園丁 河榮弼 선생 약력
생년월일 : 1926년 5월 5일
출생지 : 경남 거창군 고제면 봉곡리
포항대신초등학교 교장 정년퇴임
시조문학 천료
三國遺事
귀여운 손자놈의
사랑스런 돌잔치에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선물로 줘야겠다고
토실한 고사리 손에
유사 한 권 쥐어 줬다.
반만년의 내력이며
아사달의 햇살이며
이 세상 이롭게 할
인간살이 등불이며
골라도 또 골라 봐도
이보다는 더 없었다.
大王巖
세상에서 가장 낮고
가장 작은 능침에서
세상에서 가장 높고 큰 말씀
퍼렇게 출렁이데
“내 시신 동해에 묻어
호국룡이 되게 하라”
한 점 바다 바위
우러나니 수미산이네
동방의 일엽편주
동아줄로 붙드시고
판파도 고요로워라
우리 님 계신 둘레
조선솔의 바람소리
홍익과 광명의 나라
아사달을 꾸미던 솔
그 뿌리 면면히 내려
내 안에도 내려 주어
안총이 흐리던 날은
독경소리 내어 주데
백두에서 한라까지
삶을 함께 누리면서
바람은 얼이 되고
얼은 바람이 되어
겨레 속 정기로 살아
억겁으로 흐르데.
출출할 때
내 뱃속 출출할 때야
맑은 샘물 고이는가
드높게 트인 하늘
유연히 흐르는 구름
심연에 가려진 조약돌
극명히 눈을 뜬다.
이로 사는 때라야
가는 소리[細音] 들리는가
쓸쓸히 이우는 영역
가랑잎 구르는 소리
이 적야 풀벌레 울음
내 금선에 물결 인다.
湖月
끝내 끈이 풀려
달려온 호반일레
팔매치면 돌아보리
지척에 자리한 님
그 몸살
다시 일까봐
돌아서네 무거운 발
Ⅱ 散稿
檀君은 神이 아닌 사람이며
사람인 國祖로 숭앙돼애 한다
우리 조상들은 단군은 사람인 국조이지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환인과 환웅의 설화는 신화라고 했으나 단군의 건국사는 신화라고 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손자이고 곰이 낳았다는 설화가 있다고 해서 단순하게 사람이 아니고 신화 속에서 꾸며서 낸 허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석가나 예수 박혁거세 등이 모두 그 출생이 기이해도 사람인데 단군만이 그 출생이 기이하다고 해서 예외인가.
단군에 대한 기록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일연 스님이 말하기를 “제왕이 나라를 이루고 큰 업을 일으키며 대기(大器)를 잡을 때는 범상치 않는 서상(瑞祥)이 있는 법이니 (중략) 요(堯)는 뱃속에서 열넉 달을 지났으며 패공(沛公)은 용의 새끼라는 등 기이한 바를 다 들어 말할 수 없다. 그런지라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에서 나왔다할지라도 괴상히 여길 것이 아니다. 이 기록도 그런 줄 알고 읽을 것이다.”라고 하여 출생이 기이해도 신이 아니고 사람인 국조라고 명백히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왕검(임금, 신성) 아사달(아침, 양달, 광명의 딸) 이런 어휘들은 고려 때에는 이미 소멸하고 없는 고대어이다. 이런 고대어를 그 이전의 고전이 없었다면 어떻게 고려 때의 사람인 일연이 그런 말을 알고 기록했겠는가. ‘이롭게 할 뜻’ ‘아사달 도읍’ 이 두 이념과 사실은 그냥 말로만 전래한 것이 아니라 각종의 계, 두레, 오늘날 극성을 부리는 부조 문화 등으로 우리 문화 속에 깊게 체질화되어 면면히 계승되어 오고 있다. 단군 ‧ 동명성왕 ‧ 박혁거세 ‧ 부여 ‧ 서라벌 ‧ 서울 등 이런 임금이나 서울의 이름 등도 고금 여일하게 밝은 임금 밝은 땅으로 이름 지어져서 아사다의 음과 뜻을 그대로 표현하여 계승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고래로 사람의 인품을 평할 때에 군자보다는 대인(大人)을 가장 으뜸으로 삼았는데 대인이란 다름 아닌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사람을 일컬은 말이니 그 홍익인간과 광명이세의 사상은 저 태고에서부터 일관하여 오늘에까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고조선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분명한데 그 고조선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 나라를 건국한 시조왕도 반드시 있었을 것이니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단군을 국조로 지칭하고 숭앙한 일이 다 위와 같은 근원이 있는 일이고 중간에 갑자기 조작한 것이거나 허구가 아님은 명백한 일이다.
만물은 다 하느님의 창조물인데 우리의 국조를 환인(하느님) 손자라고 한 것어 너무나 합리적이고 고상한 사고가 아닌가. 그 천자천손의 신념은 이 민족은 고귀한 자손이며 문화 민족이란 자존심과 긍지를 심어 주어 우리 민족이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늘까지 명맥을 이어오게 한 원동력이다. 모든 생성의 운행과 원리가 사랑이라면 홍익인간 이념은 그 사랑의 적극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며, 생명의 원기와 희망, 정의, 화평 이러한 희구와 실현이 바로 광명이 아니는가. 천자천손, 홍익인간, 광명이세, 이 세 가지 원천적인 계보와 원리적인 문화는 인류가 구축한 문화 중에서도 가장 차원 높은 가치인 것이며 이런 고귀한 보물을 유산으로 받았음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왜 그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인하고 버리려고 하는가. 아무래도 어떤 독소에 감염되어 이상이 된 것이 아닌가?
구심과 집중이 없는 몸은 바로 환자이다. 그 환자의 몸으로서는 문화의 쓰레기통과 부평초의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에 일어나고 있는 부정과 부실, 저질, 오념 등의 모든 부정적인 근본 원인은 애족 애국하는 정신의 결여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크다란 병의 치료는 법이나 돈만으로는 치료되지 않으며 우리의 민족, 국토 문화를 사랑하고 지켜 나가겠다는 얼이 각자의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을 때에 비로소 치료가 될 것이다.
나[我]라는 자아는 하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적인 나, 씨족적인 나, 민족적인 나, 인류적인 나, 종교적인 나 등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민족 속의 대아(大我)가 무너지면 여타의 자아도 다 무너지고 존립할 터전을 읽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시조를 달리하는 잡다한 성씨로 구성되어 있고 또 그중에는 외래적인 자손도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단일 혈통은 아니다. 그러나 유구한 세월 속에서 이미 단일민족으로 통합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인이나 각 씨족이거나 각자의 소속된 곳에서 자아를 잘 살리어 나가되 한 민족으로서의 대아의 성취에도 한 구심을 중심으로 집결 단결하여 헌신 봉사해 나가는 데 우리의 살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데는 단군을 신이라고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이 아니라 사람이신 국조를 종교의 교주로 삼으려 하니 종교계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는 비극이 연출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와 같은 다종교 국가에서는 어떠한 종교도 종교의 힘으로서는 민족을 단결시킬 힘은 없는 것이다. 그런 현실에서 신이 아닌 안군을 신격화해서 교주로서 민족의 구심점으로 삼곘다는 것은 애초게 불가능한 부질없는 일인 것이다. 각 종교계에서도 종교적인 신앙을ㅇ 초월해서 신이 아닌 사람인 국조로서 숭앙할 때에 신앙과는 배치도 아니 되고 마찰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직 교육 특히 국사 교육을 강화하여 우리 문화의 뿌리를 깊이 인식시키고 민속절과 민속 문화 등의 행사를 통하여 홍심과 애정을 앙양케 하여 무형문화제를 존중하고 우대하여 나라의 조상과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는 정신을 계승 발전해 나가도록 하는 방법 등이 좋을 것이다.
단군을 국조로서 숭앙하고 민족의 구심점으로 하여 집결하자는 이런 주장을 세계화를 지향하는 오늘에 있어 국수 고립으로 흘러서 시대에 맞지 않는 발상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으나 우리와 같은 약소국의 애국주의는 자아 생존의 방패이지 배타의 힘은 되지도 않으며 그것은 기우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 이웃의 누구를 침략하고 해롭게 한단 말인가. 또 그런 힘이 있겠는가. 오직 우리의 주체가 바로 설 때에 그럿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길이 되는 것이지 남을 해롭게 하는 길은 아닌 것이다. 우리의 문화는 원래 인류 평화공존의 지향성이다. 안으로 주체가 바로 선다면 그 주체성은 반드시 세계 평화의 인류에게 도움을 주는 등불이 될 것이다.(284~288쪽 전문)
「三國遺事」에서
나는 우리 나라의 文化財 國寶 第1號는 마땅히 三國遺事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三國遺事가 없었다면 2000년 전의 우리 나라는 이 지상에서 소멸되었을 것이고, 민족의 뿌리도 문화의 근원도 없는 아주 허탈하고 비천한 겨레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살려서 물려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귀중한 보물이 달리 또 있겠는가. (298쪽) (중략)
우리 民俗에서 돌잔치상에는 실과 붓 돈을 얹어 놓고 壽와 富貴를 빌고 또 그 물품을 아기가 쥐는 것을 보고 장래를 점치기도 하는 뜻 깊고 흥미로운 인생 처음의 수연인데, 나는 그 위에다 三國遺事를 더 올리고 다음의 拙詩로서 祝賀하였다.
귀여운 손자놈의 사랑스런 돌잔치에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선물로 줘야겠다고
토실한 고사리 손에 유사 한 권 쥐어 줬다.
반만년의 내력이며 아사달의 햇살이며
이 세상 이롭게 할 인간살이 등불이며
골라도 또 골라 봐도 이보다는 더 없었다.
내 代를 이을 소중한 孫子가, 조상을 조국을 하늘을 알고 공경하여, 빛은 내는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이 나라의 내력과 문화를 알게 하고 이어 준 그 三國遺事가 가장 적합1하고 고귀한 스승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92쪽)
洛江의 배를 타고
+
嶺南과 洛江 그 風土도 文學도 내 心身을 낳으시고 길러 주신 母鄕이고 母土이다. 그 母를 버리고 어찌 길을 갈 수 있으며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얼마 남지 않는 시간이지만 피가 마를 때까지 그 애정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洛江은 그 山河가 엄연하고 태연하고 청아하고 유연하듯이 그 모양 그대로 흘러갈 것이다. 嶺南과 洛江이 여원하듯이 그 이름 嶺南과 洛江의 時調도 영원할 것이다.(336쪽)
아사달의 빛살
白水 鄭岏永(時調詩人)
여기 河榮弼 詩人이 六十의 高樓에 올라 첫 詩集울 펴낸다. 우리가 알기로는 이 분은 校長이 天職이지 詩가 全業이 아니다. 하기 때문에 첨 시집을 내겠다고 원고 뭉치를 싸서 들고 나를 찾아왔을 때는 필시 文壇이란 市場을 별반 의식하지 않은, 말하자면 하나의 手工藝品(?) 정도겠거니 하고 별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그랬었는데 그게 그렇지를 않았었다. 어느 날 이 원고 뭉치를 펴 들었을 때, 생각했던 거와는 달리 태깔 고운 작품들이 쏟아져 나와 내 눈길을 당혹하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요즘 저 잘못 구어낸 경양식 같은, 자유시도 아니고, 時調도 아닌, 곤혹스런 작품들에 식상해 있었는데, 이 시인의 典雅한 작품들은 나로 하여금 어느 날 저 仁寺洞과 寬勳洞의 李朝 古木物店쯤으로 이끌어 가는 듯 閑遊를 즐기게 했던 것이다.
내 뱃속 출출할 때야
맑은 샘물 고이는가
드높게 트인 하늘
유연히 흐르는 구름
심연에 가려진 조약돌
극명히 눈을 뜬다.
이로 사는 때라야
가는 소리[細音] 들리는가
쓸쓸히 이우는 영역
가랑잎 구르는 소리
이 적야 풀벌레 울음
내 금선에 물결 인다.
-「출출할 때」
時調란 비단 그 唱法에서 뿐 아니라 詩作法에 있어서도 擧聲과 置聲이 따로 있는 법인데, 이 시인은 이미 이 ‘드는 말’과 ‘놓는 말’에 잘 길들어 있는 것을 본다.
첫 수 初章을 잘 들어올렸는가 하면 中章은 짐을 부리듯 슬쩍 내려놓고 있다. 이것은 時調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앞서는 기본이 되는 문제이다.
하필 時調뿐이겠는가, 人生百般의 길에 설 자리, 앉을 자리가 따로 있고, 나갈 자리, 멎을 자리가 따로 있다. 이것은 어쩌면 止觀으로도 통한다.
아무튼 장석 잘 물린 무게로운 반닫이를 본 듯한 品性의 작품이다.
(중략)
詞藻 날로 빛나시기 빌며 붓을 놓는다.
八月, 丁卯 二月 下浣
望黃岳 詩室에서
白水 志
詩의 뿌리, 그의 가슴
-河榮弼 詩人의 『아사달의 빛살』
金夢船(時調詩人)
평소 바위 같은 몸짓으로 모든 이들에0게 푸근함을 안겨주며 세상을 둥글게 살아온 河 시인의 근 20년에 가까운 詩作을 한데 모아 처녀시조집 『아사달의 빛살』을 내놓는다. 참으로 귀하거도 반가운, 그리고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河시인은 투철한 조국애와 겨레 사랑, 찬란한 문화 계승의 절실한 사명감을 바탕으로 향토의 풋풋한 세시풍속을 되살리며 빛 바래 가는 경조사상을 일깨우는 뜨거운 애정을 민족사의 도도한 가락에 눈치 보지 않고 서슴없이 표출해 내고 있다. 특히 시조에서는 종장 처리가 그 생명이다. 河시인의 전 작품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종장이 무게 있게 그리고 감칠맛 나게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河시인의 첫 시조집 『아사달의 빛살』은 확실히 우리 시조시단에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後識
올해는 우리 집으로서는 아버지의 喜受가 되시는 즐거운 해입니다. 그 기쁨을 무엇으로 경축해 드려야 할까를 의논한 끝에 文集을 上宰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1987년 첫 詩集 『아사달의 빛살』을 出刊하시고 그 후 15년을 경과하면서 詩集을 더 내실 수 있는 原稿가 쌓여 있었으나 江湖의 紙價만 올린다고 하시면서 出刊을 꺼려 하셨는데 이번에 저희들의 앙청을 받아들이시서 햇빛을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이고 기쁜 일이라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이 천지간에 가장 귀하게 태어났으니 그냥 가서는 안 되는 것이고 이 세상을 위한 이로운 돌 한 개라도 얹고 가야 한다고 하시고, 그렇게 하는 데에는 먼저 自身이 바로 서야 하며, 自身이 바로 서는 길을 위로 하늘을 조국을 조상을 알고 공경하며, 아래로 後世를 잘 기르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縱으로 立身이 확립되면 橫으로 出世를 하여 만물을 사랑하고 육성하는 創造의 營爲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理想을 실현하는 데는 힘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며 그 힘의 原泉은 正直이라 하시고 正直한 사람은 心身이 健實하고 心眼이 밝아서 活力이 솟아나오며 판단이 명철하여 선택이 바르고 추진에 힘이 실려서 의로운 방향으로 성취를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중략)
아버지께서는 20전후에 家事를 맡으시고 父母奉養과 兄弟友愛에도 매우 돈독하셨으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저희들 5남매를 모두 최고학부까지 이수케 하셨습니다.
(중략)
아버지 더욱 강령하시고 만수무강하시기를 伏祝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