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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긴 봄
‘둔터니’로 이사 온 지 20여 일이 지나면서 봄기운이 주변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했고, 기로의 시골 생활 역시 다소 안정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골치 아팠던 크고 작은 문제가 해결되면서 조금 여유가 생기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실 기로는 ‘夢想?’으로 올 때, 따사로운 봄에 이사하는 것보다는 조금 미리 가서 어느 정도 현지에 익숙해진 상태로 봄을 맞고 싶었다. 그래야만 조금씩 다가오는 봄을 통째로 직접 겪어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그래서 일부러 어중간했던 막바지 겨울을 이사 시점으로 잡았던 것인데, 어찌 보면... 결과적으로 고생만 한 꼴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본인 스스로 후회를 한다거나 전혀 가치마저 없다고 불평을 하지 않았던 건,
설사 따뜻한 봄철에 이사를 왔다고 해도, 어차피 새로운 환경에 대한 초반 고생은 피할 수 없었을 거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원래 그가 봄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상대적으로 가을에 비해 싫어하기까지 했던 그다.), 그 해만큼은 유난히 봄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아무튼 그랬던 그에게 바야흐로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차피 겨울 끝에서 맞이하게 된, 긴 봄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일기의 양이 눈에 띄게 길어지고도 있었는데, 그건 그만큼 시골 생활에 적응해나가고 있었다는 뜻이자, 물론 새로운 일도 자꾸 생긴 것도 무시 못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시골 생활을 알차게 보내고자 하는 의지의 소치이기도 했던 것이다.
가, 봄 기운
*
새벽에 일어나 오줌을 누려고 나가다 고무신을 신는데,(‘夢想?’ 자체엔 화장실이 없다.)
“어구!”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고무신 안에 찬 물이 고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간밤에 비가 들이치면서 내린 빗물이 신발 안에 고여 있었던 것으로,
‘궂은 날 변소 가는 게 속 썩인다’더니, 정말,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도록 추웠고 걱정스런 순간이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지...... 시원한 시야를 원했기 때문에 여기 ‘夢想?’ 의 앞을 확 트이게 해 놓은 것이니(그 전부터 내가 상범에게 그 주장을 펼쳐왔었고, 상범이 내 뜻을 따라 그렇게 해놓았던 것이다.),
더구나 처마가 그리 길지 않은 상태라, 이런 현상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근데, 다른 건 몰라도, 앞으로라도 신발을 다 적시거나 먼지에 뒤집히는 걸 방지할,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런데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 뒤의 흙무더기에 소변을 보고 마루에 올라오는데, 젖은 발을 닦을 걸레도 없었다.
정말, 걱정스러웠고 한심했다.
사방은 밤처럼 조용한데(새벽 다섯 시경) 기온은 떨어져서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래서 손을 대지 않은 선 채로, 어제 벗어 놓았던 마루의 양말에다 젖은 발을 몇 번 문지른 뒤 방으로 들어왔다.
방바닥이 식어 있어서, 다시 보일러를 난방의 위치에 놓자, 금방 따뜻해지는 것이었다.
집 바로 뒤 언덕의 수선화가 요 며칠 사이에 부쩍 자라 있는데, 더 커지기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 심기로 했다.
그 이쁜 꽃들이, 사람이 보지도 않는 곳에서 뭉치로 모여 꽃을 피운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말이다.
굳이 사람들에게 보라고 꽃을 피우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음지에 모여서 꽃을 피다가 지면 봐 줄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니, 그리고 너무 한 곳에 뭉쳐있어서 솎아내 주는 의미로라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 내 행동이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짓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들을 햇볕도 많고 또 사람들의 시선이 갈만한 곳에 옮겨 심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내가 매일 같이 보면서 정을 그만큼 더 많이 줄 수도 있을 테니까.
아무튼 이 집에 있는 화초니 내가 조금은 인위적으로 옮겨놓아야겠는데, 집이 공사를 해야 하는 어수선한 상황이라... 어디에 갖다 심을지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 보니, 그사이에 훌쩍 자라난 것인데,
아무튼 오늘 비가 내린 땅에 몇 포기라도 옮겨 심으려는데, 어디가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수선화는 감나무 뿌리와 엉킨 곳에서 오물조물 뭉쳐서 어느덧 싹을 10cm나 키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들을 옮기는 작업에 들어가야만 했는데,
'쉬운 일은 없다.' 더니, 이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가 온 땅이라 흙을 파기는 쉬웠으나 깊숙히 박혀있던 수선화 뿌리를 찾아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나무 뿌리 사이에 들어있던 작은 양파 같은 뿌리를 상처 내지 않고 끄집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정말, 그 뿌리에 상처 하나 없이 옮겨 심으려고 애를 했지만, 어느새 깨끗이 자라난 연하디 연한 잎 몇 개가 잘려나가서, 순간적으로,
“아이! 미안하다!”는 말을 해댈 수밖에 없었다.
3 . 16
사실 낮에 쓴 일기는 그렇게 마감을 했지만, 실제 상황은 이랬다.
그때 저 아래서,
“뭐하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보니 어제 큰 일(산신제)을 치렀던 '반장'이었는데,
“아, 반장님! 마침 잘 오셨네요. 지금, 수선화를 옮겨 심는데, 잎이 잘려나갔어요. 이거 죽나요?” 하고 기로가 반갑게 물으니,
“그대로 옮겨도, 잘만 자랄 거요.” 했다.
“그런데... 잎이 너무 웃자란 거 아닙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그 정도면 괜찮아 보이는데요, 뭐......” 하는 반장의 대답에 기로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고 용기를 내어, 20여 뿌리가 옹기종기 뭉쳐서 나오던 수선화를 갈라내어 양지바른 언덕에 간격을 맞춰 심어주었다.
'죽지 말고 살아야 할 텐데...... 만약, 얘들이 모두 살아난다면, 여기는 수선화 언덕이 될 거야......'
그건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다.
기로는, 노란 수선화가 언덕에서 팔랑팔랑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그건 그가 중학생 시절 어느 봄 날 군산 '내흥리'의 한 친구 집에 놀러 가면서 보았던 기억으로,
따사로운 봄언덕에 평화롭게 노란 꽃 무더기를 이룬 수선화들의 아름다운 광경이 기로의 뇌리 속에 각인된 대표적인 봄의 이미지로, 늘 그런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동경이 있었기에,
'아, 이제야 말로 바로 그럴 가능성이 활짝 열린 것이고, 나도 수선화가 핀 언덕의 집에서 살게 된 거야!' 하는 희망에 젖기도 했다.
그러면서 위로 올려다보니, 비를 맞은 매화 꽃망울들도 이제 곧 필 것처럼 툭 불거져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 이제 매화까지 피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꽃을 피워 대겠지?'
그렇게 수선화를 옮겨 심은 뒤, 큰 맘먹고 기로는 마을 밖으로 한 번 나가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사 온지 20여 일이 지난 뒤였던 것이다.
우선은 집 앞 호숫가 둔덕을 한 바퀴 돌았다. 마당과 마을 위 정자에서 볼 때와는 달리 상당히 넓은 터였다. 물론, 여름에 물이 불면 물속에 잠길 땅이긴 하지만.
그렇게 호수를 등지고 기로가 서서 ‘夢想?’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안녕하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보니, 제법 멀리서... 엊그제 수도 개통식에 참석했던 이 동네 출신의 119 대원이 건넨 인사였다. 그래서,
“예, 근데, 어쩐 일로?” 하고 기로가 소리치자,
“나무를 심으러 왔습니다.” 큰 소리로 대답을 하며 비탈에 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래서 기로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쪽으로 다가간 뒤, 이번에는 호수 외곽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도로에서 바라다뵈는 마을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아늑했다.
'저 마을 속에서 내가 1 년을 살 거란 말이지?'
장화를 신어서 걷기에 다소 둔탁하긴 했지만,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가한 도로는 역시 조용했다.
'나에게 차가 있다면, 이런 길에서 운전 연습을 하다가 조금씩 복잡한 도로로 나가면 될 텐데...... 그리고 개가 한 마리 있다면, 같이 산책을 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지난 번에 ‘夢想?’에 들렀던 군산의 형님이,
“이런 산골의, 더구나 이렇게 담도 없는 집에 살면서... 개 한 마리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 아무래도 누가 오더라도 개가 있으면 일단 그런 건 알아차릴 수 있으니, 어느 한 순간 누군가 방문을 확! 열어젖히는 일은 없어야 하는 거니까......” 하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건 형님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혼자 방에 있거나, 잘 때, 어느 한순간 누군가 방문을 열지 젖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는 요즘이니까.
시골 생활이란 게 그런 것이었다......
'어쨌거나 정말 내가 개를 키우게 될까?'
여태까지 개를 키워 본 경험이 없던 기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반장 집 막다른 길과 연결된 산 쪽으로 난 소로가 보였다. 그러니까, 기로가 걷는 호수 외곽도로와 만나는 소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을길과 반장 집 소로 그리고 마을 외곽 순환도로까지를 합한 코스로 산책하기에는 손색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기로는, 나중에 반장에게 물어, 보다 자세한 지리 파악을 한 뒤,
'이 마을에서 나만의 산책로도 만들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해두었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오는데, 따로 사시는 산장 주인집 할머니가 마을 길 아래 텃밭에서 밭일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기로가 인사를 하자,
“예, 근디 어디 갔다 오셔?” 하고 물었다.
“예, 이 근방 한 바퀴 돌아보느라고요. 근데, 뭐 하세요?”
“예, 밭을 고르고 있지라.”
“할머니, 저한테 말씀 낮추셔도 되는데요......” 하고 멋쩍어 하니,
“그려도, 그럴 수 있남?” 하는데,
기로는 그 말과는 상관없이, 밭의 끝에 나란히 서 있는 대 여섯 그루의 나무를 가리키며,
“저기에 있는 게 대추나문가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예.”
“다나요?”
“예......”
“그럼, 올가을에 대추가 많이 열리면, 저에게 조금 파세요. 제 형제들과 나눠 먹게요.” 하면서 계속 길을 내려가는데,
“아 참! 조금 기둘려 봐.” 하고, 산장 할머니가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왜요?” 하고 기로가 물으니,
“접대(지난번에) 봉게(보니까), 곶감을 아주 맛있게 먹든디...(지난 '산신제' 때 식사시간에 기로는 제사가 끝난 뒤 곶감 몇 개를 집어서 먹었었는데 그 모습을 눈여겨보셨던가 보았다.) 내가 곶감 서너 개 줄 게......” 하시더니, 갑자기 연장을 내려놓으며 바쁘게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곶감하고 대추 한 주먹 정도의 두 봉지를 내밀며,
“여기저기 다 나눠주고, 이제 남은 게 별로 없어......” 하셨다.
“그렇겠지요. 이제 봄인데, 작년 가을 것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으려구요? 근데, 이 귀한 것들을...... 아무튼,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자,
“응, 내 막둥이 아들 같어서 그려......” 하시는데,
어느덧 산장 할머니는 존칭은 빼고 말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왔던 기로는 바로 편지를 썼는데,
# 곶감과 대추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우연히 밭을 정리하던 산장집 할머니께서, 먹어보라며 곶감과 대추 한 주먹씩을 주시기에,
마치 소중한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고맙고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막둥이 아들 같아서 그려......" 하신 그 말씀이,
(그 산장집도 아들이 셋이라는데, 막둥이가 내 동갑이라네요.)
나를 잡았습니다.
순간 나는 멈칫,
“예, 저도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지금쯤... 여든다섯 정도는 되시는데요......" 하고 쓸쓸하게 말하다, "그러고 보면, 할머니 보다 조금 위시겠네요. 근데, 저는... 어머니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파요......” 하고, 고개를 좌우로 몇 차례 흔들자,
“그렇지, 그렇고 말고... 그러는 것여... 사는 게, 다......” 하고 맞장구를 쳐주시드라구요.
그런 말씀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신 할머니는 마치 꼬깃꼬깃 보관했던 아끼고 아끼던 본인의 용돈을 살짝 막둥이 아들이나 손자한테 주듯이, 그렇게 나에게 곶감과 대추를 건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저러고도 남으실 텐데......
제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쓸쓸했지만, 그래도 나는 곶감과 대추를 받아 가지고, 다소간 푸근한 마음으로 ‘夢想?’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런데, 보답으로 내가 드릴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시내에 나갈 일이 있으면, 부드러운 카스테라 같은 걸 사다가 드리면 좋아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두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으니까요.
저녁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문득 그 곶감과 대추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얼른 그 것들을 꺼내 먹기 시작했지요.
시장에서 파는 것 같이 매끄럽거나 볼품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맛이었습니다.
하얀 분이 많은 예닐곱 개의 곶감은 고르지 않은 크기와 모양에도 한결 같이 달았습니다.
이 마을 감은 표면에 까만 자국이 있는 ‘먹감’이라 매우 달거든요.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이 마을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 할머니 큰 아들인 산장집 주인이 먹어보라며 감 한 봉지를 준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서울로 가져가서 먹어 보니 어찌나 달던지... 그 때, 나는 이 마을의 감이 매우 달다는 것을 알았었지요.
바로 그런 감으로 만든 곶감이니 달지 않을 수 없었겠는데요,
곶감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 듯 해치운 나는 대추도 집었습니다.
단 곶감을 먹은 뒤라 웬만해선 대추의 단 맛이 느껴지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웬걸?
역시 볼품없고 그리 크지 않은 대추도 상당히 달드라구요.
그렇게 곶감과 대추를 먹으며,
포근하고 흐뭇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 어쩐지 허전하고 아쉽기까지 한 기분에 젖어...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했답니다.
곶감 대추는 달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라... 혼자서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던 겁니다.
3 . 17
*
어제 옮겨 심은 수선화가 오늘 해가 났는데도 시들지 않았다.
나는 해가 나면 잎이 시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그 잎이 강한가 보았다.
그래도 그들이 새 땅에 새 뿌리를 내릴 때까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건 분명한데......
그래서 나는 오늘도 몇 차례 뒤 언덕 쪽으로 가서 그들의 동태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인터넷으로 '춘란배' 바둑 대회 결승 2국을 보느라 방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결국 이 창호가 승리해서,
그는 '모든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기사'가 되었다는 기사도 떴다.
그런 그가 우리나라 사람이란 게 자랑스럽기조차 하다.
게다가 아직은 20 대로 젊어서, 당분간 그의 아성에 도전할 사람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을 거라고도 하던데,
아무튼 나도 기쁘기 그지없었다.
사실, 오늘은 전주에 나가 스케치북을 사오려고 했다.
그러나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내일 나들이를 할 생각이다.
그리고 반장이 여기 임실군의 '강진면'에 5일 장이 매 2일과 7일에 선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여기서는 강진장에 가는 게 가장 가깝기도 하고 또 마을을 벗어난 도로에서 바로 버스를 타면 쉽게 갈 수 있다고 해서,
또 장에 가면 지서 옆의 손으로 만드는 짜장면이 맛있다고도 하기에,
나도 한 번 장에 가보려 한다.
여기서 아침 8 시 40분 버스를 타고 장에 가서 일을 보고, 짜장면까지 사먹고 한 시 반엔가에 버스를 타면, 이 마을 입구에서 내릴 수 있다고 하니......
3 . 18
그동안 상범이 틈틈이 가져다 쌓아놓았던 돌로,
어제는 통나무집 쪽에 축대가 쌓였고, 오늘은 기로가 사는 흙집 ‘夢想?’에 어제 보다 높은 축대가 쌓이기 시작했다. 마을길이 그 쪽으로 조금 낮아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夢想?’의 마당은 높아진 꼴이다.
아침부터 포크레인이 와서 땅을 고르고 파고, 주변에 널려 있던 돌을 집 마당 주변에 쌓기 시작했는데,
요란한 포크레인 소음과 함께 어제부터 조금씩 정리되는 건 좋아보였지만,
화가인 기로의 시각에서는 이런 시골에 그런 큰 돌로 축대를 쌓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미 제법 오래 전부터 기로는 그런 의견을 상범에게 피력했지만, 마땅히 축대를 쌓을 다른 돌이 없을뿐더러 사람을 사서 없는 돌을 구해다가 이 지형과 어울리는 잔돌로 축대를 쌓는 일은 엄청난 비용이 소요될 터라...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이 집은, 상범의 집인데......'
그런 생각만을 했을 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축대 쌓기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일이 끝나자,
이제 ‘夢想?’의 마당을 고르는 일은 기로의 몫으로 남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 동안 사이사이 기로가 따로 모아 두었던, 일부 땅 속으로 묻혀갈 납작납작한 돌들을 계단부터 흙집까지 징검다리 식으로 열 지어 배치를 해놓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범이,
"야, 넌 징검다리 만드는 선수(?)구나!" 하고, 이미 몇 개의 돌을 마당에 박아 놓는 걸 보면서 기분 좋다는 듯 말을 했다.
"야, 선수거나 말거나... 일기예보론 내일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데(반장이 그랬다.), 그러면 마당이 질어서 난리일 텐데... 그냥 있으라고? 우선, 걷는 길이라도 이렇게 해 놓아야, 그나마 걷는 데 흙이라도 안 묻지." 하고, 기로가 별 뜻도 없이 얘길 하자,
내내 축대 쌓는 걸 구경하고 있던 반장과 키큰 아저씨가,
"그럼, 저렇게 놓아 두어야지, 그 달라붙는 흙을 어떻게 하겠어?" 하거나,
"그건 잘 하는 짓이요!" 하고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그렇게 기로의 마당 고르기 역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곧 포크레인 소리가 멈추면서 일이 끝나자,
"아,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다." 고 푸념처럼 기로 입에서 나온 말에,
언제 들었는지 상범이,
"야, 니가 언제는 남 보란 듯 떠들썩하게 살았냐? 남들이 들으면, 진짜 요란하게 산 사람 같다고 하겠네, 참내!" 하자,
그 옆의 반장도 키득키득 참는 듯 웃는 것이었다.
그러니 기로 스스로도 좀 머쓱하긴 해서,
"며칠 안으로 매화가 필 것 같고, 나도 조금씩이나마 여기저기에 꽃들을 심어야겠어." 하고 혼잣말처럼 하면서 돌을 마당에 심기 위해 쇠스랑과 괭이를 챙기러 부엌 쪽으로 갔다.
*
어제는 통나무집에 오늘은 ‘夢想?’에 축대가 쌓였다.
이렇게 마당이 정비가 되면, 큰 틀이 잡히게 된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서서히 뭔가 채소를 심기도 하고 꽃을 가꾸기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도 바빴다.
친구 상범을 도와야 했고, 축대 쌓는 걸 지켜봐야 했고,
'어떤 모습이 더 좋을까?' 하고 연구까지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그 일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몇 차례 뒤 언덕 쪽으로 가서 며칠 전에 옮겨 심은 수선화의 동태를 살펴 보니,
오늘 해나 났는데도 시들지 않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매화나무의 꽃망울은 정말 통통하게 부풀어 올라 있어 일주일 내로 꽃이 필 것 같았다.
그래설까?
새들이 벌써 나무에 오가면서 지저귀는 모습도 눈에 들어오곤 했다.
책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쓴 편지' 1 쇄가 인쇄된 뒤,
나에겐 백여 만 원의 돈이 인세로 들어왔나 보았다.
가뭄에 단비를 만난 기분이다.
허지만 생활비에 보태 쓰면 남는 게 없을 정도다.
드로잉을 했으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업을 한 족족 다 좋을 수는 없겠지만, 기분이 찝찝하다.
내 생각과 그림이 일치하지 않았기(다르게 나왔기) 때문이다.
3 . 19
홈페이지에 금전적인 일에 대해선 거의 거론을 하지 않는 기로가, 더구나 공식적인 일로(출판사와의 관계로 치면 ‘공식적’일 수 있기 때문에) 돈 문제를 언급한 것은,
더구나 정확한 액수까지 거론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렇지만 기로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이젠 책을 냈기 때문에, 책을 낸 사람의 생활이거나 입장에 대해 밝혀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간략하나마 인세를 받은 일을 소개했던 것이다.
왜냐면, 그의 생각으로는,
누군가,
"책을 낸 사람이, 왜... 그리 가난하게 살지?" 하고 물어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어쨌거나 기로의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받아 보는 인세였다.
물론 기대했던 액수보다는 너무 큰 차이가 난 작은 액수였지만.
어쨌거나 책을 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돈이 들어온 것이라, 기로에겐 신기한 점도 없지는 않았다.
'글쎄, 화가가 그림을 팔아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림이 팔릴 가능성은 없고, 어떻게 다른 일에서 먹고 살라고 돈이 들어오다니... 아, 내 그림은 언제나 팔릴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허기야 내가 그림을 팔려고 시도나 하면서 하는 말인가? 내 스스로 그런 일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무슨 헛소리? 그러니까 마치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자책이거나 자신의 신세타령으로도 이어졌다.
그러니까 돈이 생긴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 문제로 돈에 대한 걱정은 더 늘어난 기분이기도 했다.
아무튼 책을 냈다는 일로 수입이 들어온 건 사실이지만, 그 돈이 책이 얼마나 팔려서 들어온 것인지는 전혀 모르는 상황이라... 기로는 기회를 내어 언제 출판사에 전화는 걸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해 두었다.
그렇게 집의 외관이 조금씩 정리가 돼가면서, 기로는 틈틈이 마당을 고르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흙을 파는 일이라, 일을 해보지 않았던 그로서는 금방 힘이 부쳐서... 허공에서 별이 반짝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기로에겐 한 가지 계획이 있었다.
‘夢想?’ 마당의 제일 끝이면서 마을길에서는 제일 높이 솟아나온 마당 귀퉁이에 '조그만 쉼터'를 만들어 놓는 일이었다.
옆집 할머니네 사랑채 스레트 지붕 하고 거의 비슷한 높이까지 올라온 곳이라, 마을길을 지나면서도 ‘夢想?’은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이기도 해서, 거기서 바라다 보이는 호수 풍경이 제일 좋을 것이고 또 한갓진 맛도 있을 터라서,
축대가 쌓여질 때부터 계산해 놓은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마당을 고르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기로에겐 우선 그 쪽에 쉼터를 만들어놓는 일에 더 마음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후에는 역시 미리 계산해 두었던, 통나무 집 뒤안에 굴러다니던 몇 토막의 오동나무 잘라 놓은 것을 의자용으로 심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우선 세 개 정도의 의자를 심자, 뭔가 재미있는 분위기가 그 주변에서 풍겨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는,
"나중에, 누군가 반가운 손님이 오면... 여기에 앉아 막걸리를 마셔야지!" 하고, 벌써부터 꿈에 젖어보기기까지 했다.
# 나물국
이제 확실히 봄 기운이 완연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나물을 뜯어 된장을 넣고 국을 끓여먹기로 했습니다.
사실, 며칠 전에 산장 할머니가,
"'나숭개(냉이)'랑 쑥이랑 조금 캐다가 국끓여 먹어 봐. 요새는 그런 게 맛있어......" 하시기에,
"아, 그렇겠지요?" 하고 대답은 했었는데,
나 스스로는 썩 자신이 없었답니다.
쑥은 나도 알지만, '나숭개(냉이)'는 어떤 건지 몰라서요......
물론, 내가 여기로 와서 살겠다니까,
친구 상범이 ‘야생초 편지’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줘서,
그걸 읽은 영향도 없지는 않은 행동이긴 했지만요.
어쨌거나 이렇게 시골까지 와서 사는데 봄에 나물 구경도 못해본다는 것도 우스꽝스런 일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나에겐 지금 눈앞에 널려진 것들이 봄나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최소한 한두 번이라도 나물국을 끓여 먹어야 할 것 같기도 했던 거지요.
그런데 어쨌거나 나물을 잘 모르니, 어떤 게 먹는 거고 어떤 게 못 먹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책에는 웬만한 야생초는 다 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여기야 지천에 널린 게 야생초라... 그래도 어쨌거나 골라 먹어야할 건 분명하다는 생각은 들더라구요.
그래서 때마침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들렀던 반장에게 물어보니,
"그냥, 쑥이나 뜯어잡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길에 서 있던 반장 어머니는,
"이제 나숭개(냉이)가 벌써 꽃을 피우고 있어서, 그런 건 못 먹어!" 하시드라구요.
그리고 생각보다 요즘엔 냉이가 많지 않다고도 했구요.
그래서 나는 쑥을 한 주먹쯤 뜯고, 민들레 잎도 약간은 칼로 도려냈는데, 잎이 따로따로 분리가 되더군요.
그런 다음에도 여기 호숫가에 자라던 '돌미나리'(집 앞 둔덕엔 자생하는 돌미나리가 있습니다.)도 몇 개 정도 뜯었더니,
금세 제법 많은 양의 나물이 되더라구요.
혼자 먹는 건데,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습니까?
그래서 그 정도로 멈추고는,
마침내 점심은 나물국을 끓여 먹었답니다.
그런데 쑥이 들어가서인지 쌉쌀한 맛이 있었지만, 느낌은 상큼하드라구요.
그것 역시 시골에 사는 맛이기도 할 터라,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난생 처음으로 내 손으로 ‘나물국’을 끓여 먹어보았답니다.
이것 역시 이렇게 시골로 내려와 살면서 해보는 또 하나의 경험 아닐까요?
3 . 21
아무래도 이 즈음의 기로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이 시골 생활의 색다른 면을 부각시키면서 본인이 겪는 새로운 경험과 그에 따른 얘기로 풀어나가고 싶었다.
어차피 자신은 지금 그런 소재의 한 복판에서 지내고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굳이 애써 뭔가 '얘깃거리'를 찾을 필요도 없이, 그저 이 '둔터니 마을'에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소재는 충분하다는 인식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