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나트는 바라나시 시가지와 10키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사르나트는 불교의 4대 성지 중의 하나로 부처님이 제일 먼저 설법을 행한 곳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녹야원(鹿野園)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참고로 불교의 4대성지는 태어난 곳인 룸비니(誕生)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成道) 그리고 최초의 설법을 행한 사르나트
(初轉法輪) 그리고 입적에 드신 쿠시나가라(涅槃)이다.
28세에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 남행을 하여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혼자만의 깨달음으로 간직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와 같이 수행하던 다섯 비구(比丘)에게 제일먼저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르나트로 간 그들을 찾아가서 최초로 설법
을 하여 그들이 제자가 되어 비로소 불교가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던 탑이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고 다메크 스투파는 일부가 복원되어 있는데 진
리를 보는 탑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아쇼칸 필러는 아쇼카왕의 석주가 발견된 곳이다.
스투파의 의미는 알이라는 뜻이며 그 안에 사리를 모시는 것은 자궁과 같은 곳에 들어있는 사리가 깨어나서 부처님의 말씀이 사방
으로 퍼져나가기를 기원하기 위해서 스투파(탑)에 사리를 모신 것이라고 한다.
사르나트가 녹야원(鹿野苑)으로 된 유래....
옛날 사르나트 숲 속에는 각각 500마리로 이루어진 두 패의 사슴 떼가 있었다. 이중 한 사슴 떼의 왕이 바로 전생의 부처였다.
당시 바라나시의 마하라자(왕을 지칭함)는 사냥과 사슴고기를 즐겼는데 매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사슴왕은 마하라자를 찾아가
사슴들이 순번을 정해서 매일 한 마리씩 죽을 테니 사냥을 중지해 달라고 부탁한다. 감동한 마하라자는 그러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사슴 중 한 마리가 죽을 차례가 되었는데 새끼 밴 사슴이었다. 자비심 많던 사슴왕은 어미를 위해 자신이 죽기로
결심하고 마하라자를 찾아가서 자신이 온 사연을 전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하라자는 자신이 사슴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후 사르나트에 있는 사슴을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
렸다.
그래서 사르나트의 한자 이름은 녹야원 즉 사슴정원이 되었다.
사르나트는 폐허 속에 있던 것을 1835년 영국의 왕립협회가 발굴하면서 사르나트가 불교의 유적지라는 것은 발견했지만 결정적
인 했지만 프레드릭 와르텔이라는 사람이 1905년 아쇼카왕의 석주와 4머리 사자상 그리고 설법하는 붓다상(像) 등 500여점 이상
의 유물을 발굴하여 사르나트가 최초의 설법을 한 곳이라는 것을 밝힌 셈이다.
프레드릭 와르텔이라는 사람이 발굴한 1905년 아쇼카왕의 석주와 4머리 사자상
그러나 인도는 국교가 힌두교이다시피 하고 또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면서 불교는 잊혀진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불교는 과거에 있
었던 종교일 뿐 현재 자신들의 종교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사르나트의 이런 유물들도 그냥 유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는 하지만 참배하는 사람들도 없고 종교적인 의미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외국의 불교인들이 찾아와서 참배
를 하고 갈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쇼카왕의 석주의 머리에 있던 4사사상이 인도의 국장(國章)이 되고 인도의 국기에 법륜이 들어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아쇼카왕에 대해서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아쇼카왕은 기원전 3세경의 사람으로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왕이다.
인도의 국장인 아쇼카왕의 사자상과 인도의 국기
황색은 용기와 헌신을, 하얀색은 진리와 평화를, 초록색은 믿음과 번영을 의미하며, 파란색 법륜은 마우리아 제국의 왕이었던 아
소카의 사자상에 새겨져 있는 법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쇼카왕은 인도역사에서 가장 많은 영토를 확장한 왕으로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서 아프카니스탄과 인도대륙의 대부분을 자신
의 영토로 만들었던 왕이다. 그러므로 인도의 입장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인 셈이다.
성격도 강인하고 잔인하여 자신의 형을 비롯하여 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불교를 접하게 되고 자신의 무자비함을
뉘우치면서 불교의 전파에 온 힘을 기울였던 왕이다.
현재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가 아닌 불교를 융성시키고 전파한 왕이지만 인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기 때문에 아쇼카왕
의 석주가 국장(國章)이 되고 국장의 법륜(法輪)이 인도의 국기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어디까지나 본인의 추
측일 뿐 사실을 알 수는 없다.
인도에서 불교의 유적지가 철저하게 파괴되어 없어지게 된 것은 불교의 유적지를 파괴하여 후세인들이 찾지 못하도록 땅 속에 묻
었던 이슬람 국가의 등장 때문이라고 한다.
불교유적지를 대포로 파괴하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아프가니스탄의 텔레반 들의 행위를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라
는 생각이다.
본래는 석주가 이렇게 생겼으나 힌두교와 이슬람교에서 파괴하여 위의 모습이 되었다(바이살리 사원의 아쇼카왕의 석주로 다른
곳에서 빌려 온 사진임 아쇼카왕은 불교를 위해서 이런 석주를 많이 세웠다고 함)
사르나트가 발굴된 것이 불교인들이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자신들과 상관이 없는 종교가 되어버린 인도인
의 입장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곳이며 과거의 유적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곳 사르나트에서 발굴된 유물과 다른 곳에서 발굴된 불교의 유물을 사르나트의 녹야원 옆에 있는 사르나트 박물관에
전시해 놓았다.
현재 인도에서 불교 인구는 2% 불과하지만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이 불교에 귀의 하면서 부처님의 진
신 사리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 곳을 일일이 답사를 하여 그곳에 석주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의 포교에 힘을 써서 인도 전역은 물론 서양에 까지 선교사를 파견하였는데 그리스 이집트까지 불교의 선교사가 파견
되었다고 한다. 그 때가 기원전 270~230년경으로 불교에서 아쇼카왕이 한 역할은 기독교에서 사도 바울이 한 역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180년경에 마우리아왕조가 멸망하면서 불교는 인도에서 힌두교로부터 핍박을 받고 나중에 이슬람으로부터 유적이 파괴
당하면서 인도에서는 불교가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았다고 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다른 종교가 정교가 일치되거나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반변은 불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힌두교와 경쟁관계 비슷하게 있었던 불교는 힌두교를 믿는 왕권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 힘이 없던 불
교는 주변 나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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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고즈넉한 사르나트는 각국에서 온 순례객들과 가이들이 중요한 유적지 앞에서 설명을 하는 광경과 유적지를 돌면서 묵
상을 하는 사람 그리고 조용히 앉아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시끄러운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은 없다.
유적지와 주변을 둘러보는데 동남아의 불교국가인 태국 사람들과 미얀마 그리고 대만 사람들이 사르나트에 순례를 와 있고 인도
사람들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외국인들만 찾는 불교의 유적지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과 더불어 신기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그렇게 까맣게 잊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유적지마다 각 나라에서 온 그룹들이 법회를 보고 있다.
동남아 쪽에서 온 사람인 듯
주변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아직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고 있고 고즈넉하다.
아쇼카왕의 석주..이슬람이 파괴하여 땅속에 묻어버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했다고 하니...
아쇼카왕의 석주에 대한 영어설명문
녹야원....탑 하나만 남아 있는 폐허를 보면 만감이 교차하게 된다
비록 종교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과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못하는 종교의 편협과 잔인함 등
종교는 인간이나 인류에 있어서 어떤 것인가 등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