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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 50년 전에 왼씨름으로 통일되었다.
‘씨름’을 ‘가래’라고도 한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씨름판이 자주 열렸다. 설, 보름, 추석, 단오와 같은 명절 때라든가, 지방의 인구가 늘어나고 교통이 좋아지면서 군 단위는 물론 면 단위에서도 시장 목이 좋은 곳에 5일장을 세울 때는 어김없이 씨름판(난장 亂場)이 섰다. 씨름대회의 명칭도 최고 상품의 종류에 따라 황소가래, 소 가래(소이가레, 쇠가레), 돼지가래와 같은 이름도 있었고 동네마다 힘깨나 쓰는 장사들이 선수로 나오는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었다. 교통이 좋아지면서 먼 거리에서도 직업적 씨름꾼이 드나들면서 상품을 싹쓸이하는 형상도 나타났다.
여기서 나타나는 씨름대회의 이름이 재미있다. 황소가래, 송아지가래 같은 이름에서 ‘가래’가 사투리가 아니냐? 그런 말이 있는가 알아보니 우리의 고유어 이었다. 우리말에 몹시 가난한 것을 말할 때 ‘가랑이(가랭이)가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가랑이(가랭이는 사투리)는 ‘하나의 몸에서 끝이 갈라져 두 갈래로 벌어진 부분’이나 ‘바지 따위에서 다리가 들어가도록 된 부분’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은 ‘가랑이’라고 한다. 가랑이와 관련된 몇 가지 단어를 보자.
가래톳(허벅지 쪽에 임파선이 붓는 증상)
가리쟁이, 가래쟁이(‘가랑이’의 방언)
덧가래(씨름에서 상대편의 오른쪽 다리에 자기의 오른쪽 다리를 대고 상대편의 몸을 위로 띄워서 넘기는 기술).
속가래(씨름에서 상대편의 다리 사이에 오른쪽 다리를 집어넣고 뒤로 활짝 잡아 젖혀서 넘어뜨리는 기술)
위에서 덧가래, 속가래에서 보이듯이 가래는 씨름을 말한다. 따라서 황소가래, 소가래, 돼지가래는 분명히 최상의 경품 이름에 씨름이란 말인 가래를 붙인 씨름판을 말하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가래’는 ‘갈해’의 변음으로 볼 수 있는데 옛말의 ‘갈해’는 여럿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는 것’으로 '가래'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씨름에서의 ‘가래’는 ‘이기는 선수를 고르는 시합’으로 볼 수 있다. ‘가레’가 들어간 단어에 ‘헹가래’가 있는데 필자는 ‘가래(가리쟁이)를 휑하게 벌리는 것’, 또는 ‘가래질 하듯이 활개를 당겼다 밀었다 하면서 선수를 휑하게 띄었다, 내렸다 하는 짓’, 또는 선수가 허공에서 가리쟁이를 벌이고 헤엄치듯 버둥거리니까 ‘헤염(游)가래질’⇒ ‘혬가래’⇒‘헹가래’이라고 볼 수도 있다.
씨름의 종류
씨름의 종류에 왼씨름, 오른씨름, 바씨름, 띠씨름 등 다양하다. 오른씨름이냐 왼씨름이냐는 샅바를 매는 위치에 따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왼씨름은 주로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유행했고, 오른씨름은 경기도와 전라도에서 유행했는데 1972년에 씨름협회에서 경기방식을 왼씨름으로 통일했다( ‘샅바’는 씨름을 할 때 허리와 다리에 걸어 상대편의 손잡이로 쓰는, 무명으로 만든 바를 말한다. ‘샅’은 ‘삿치기, 삿치기, 삿뽀뽀’, ‘샅치기 샅치기 샅뽀뽀’에서처럼 넓적다리 윗부분, 두 다리가 갈린 곳의 사이인 허벅지(股間)를 말하는데 '사타구니'라고도 한다). 고구려 각저총 씨름도에서 고개를 돌린 모습을 보아 역사(씨름군)의 자세는 '왼씨름'이다(김홍도의 씨름도에서의 '오른씨름'과 비교된다).
왼씨름
* 샅바 고리(다리샅바)를 오른쪽 허벅다리에 낀 다음 허리에 돌려 매고 오른쪽 어깨를 상대방 왼편에 어깨에 맞댐
* 오른손으로는 상대방의 허리샅바를, 왼손으로는 상대방의 다리에 낀 샅바를 잡고 또는 상대방의 왼손이 오른쪽
넓적다리에 위치한 샅바 고리(다리샅바)를 잡고
* 동시에 허리를 펴고 일어나서 경기를 시작하는 씨름
* 다리샅바를 왼손으로 잡기 때문에 왼씨름이라 함
오른씨름
* 샅바를 왼쪽 허벅다리에 낀 다음 허리에 돌려 매고 고개와 어깨를 오른쪽으로 돌려대고 상대방의 왼쪽 어깨를 맞댄 뒤 왼손으로는 상대방의 허리샅바를, 오른손으로는 다리에 낀 샅바를 잡고 동시에 허리를 펴고 일어나서 경기를 시작하는 씨름.
* 다리샅바를 오른손으로 잡기 때문에 오른씨름이라 함
씨름방식은 지역마다 달랐다.
유숙(劉淑)의 ‘대쾌도(大快圖, 1846)’에 그려진 씨름은 오른씨름이다.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에 묘사되어 있는 씨름은 왼씨름이다. 김홍도(金弘道)의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에 있는 씨름은 바씨름(띠씨름)이다. 손목에 샅바를 둘렀다. 이처럼 전래 씨름은 왼씨름, 오른씨름, 바 씨름 등 여러 가지 형식의 씨름이 있었다. 지방에 따라서도 종류가 다른데 ‘오른씨름(바른씨름)’은 주로 경기도, 충청, 전라 지방에서 주로 했고, 왼씨름은 함경, 평안, 황해, 경상, 강원 등에서 했고, 충청도에서는 띠씨름(허리씨름, 통씨름), 경기도에는 '바씨름'을 만이 했다. 이렇게 지방마다 다른 씨름을 1931년 제2회 전조선씨름대회부터 ‘왼씨름’으로 통일한 바 있었지만, 1972년부터 대한씨름협회에서 공식적으로 왼씨름으로 통일하였다.
일제강점기의 기록에( 중앙일보, 1990.04.22.) 의하면 함경도에서는 오른 다리에만 샅바를 감아 상대가 왼손만으로 잡는 왼 걸이(고리) 씨름, 평안도 일부와 황해도 지방에서는 오른 걸이 씨름, 강원도, 경기도 일부에는 허리띠만을 둘러 양손으로 잡는 띠씨름(허리씨름, 통씨름), 호남지방에서는 머리가 상대 왼쪽으로 가고 왼손으로 허리를, 오른손으로 다리샅바를 잡는 오른씨름, 영남지방에선 오른씨름과 반대인 왼씨름이었다. 대체로 백두대간을 축으로 한반도를 세우면 왼쪽은(東) 왼씨름이, 오른쪽은(西) 오른씨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광복 후까지도 서울에서 큰 씨름판이 열릴 때면 오른씨름과 왼씨름이 함께 개최되었다. 그러나 대한씨름협회는 ‘각종 대회의 두 가지 방식 개최가 번거롭고 최고 강자를 가릴 수 없다’는 것과 당시 ‘왼씨름을 하는 씨름인이 많다’는 이유에서 1972년에 왼씨름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였다.
왼씨름으로 통일되었지만, 오른씨름도 전통 씨름이므로 복원되어 전승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김정호, 채널코리아뉴스, 2016.03.10). 전통 씨름이 전국 대회의 모습을 갖춘 때는 일제강점기인 1927년 9월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제1회 ‘전조선씨름대회’가 열리었고, 1936년에는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를 열었다. 광복후 1948년에 열린 제29회 ‘전국체육대회’ 때 처음으로 경기 종목으로 씨름이 채택되었다. 당시 씨름은 오늘날 획일화된 왼씨름은 물론 오른씨름도 따로 있었다. 이처럼 두 가지 방식의 씨름이 25년 만인 1972년 전국체전 때 경상도 씨름이라 할 왼씨름으로 획일화되어 경상도 주도시대가 되었고 오른씨름은 역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왼씨름으로 통일시킨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씨름 실태조사 결과 오른씨름은 경기도와 호남에 국한되어있고, 왼씨름이 다른 모든 지역에서 행해졌다는 잘못된 보고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기억에도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인 충청도 씨름판에서는 어디서나 오른씨름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민의 대다수가 오른손잡이여서 오른손 재간을 십분 활용할 수 있기에 오른손 씨름이 바른씨름(正, 옳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 속의 씨름 그림
고구려 각저총 벽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묘사된 씨름도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씨름이 발달했던 것으로 볼수 있다. 요즘의 씨름 방법처럼 서로의 허리춤을 잡고 있는 모습(각저 角觝, 角抵)을 보인다.
두 역사(力士 씨름꾼)의 허리에는 줄이 매어져 있고 다리에는 줄이 없는 것으로 봐서 줄씨름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개를 상대의 오른쪽 어깨로 향하는 모습은 왼씨름에서 잡는 자세이다. 고개를 돌린 모습만 보면 씨름무덤의 역사 자세는 '왼씨름'이다. 역사의 오른쪽에는 심판관이 서 있는데 얼굴은 아쉽게도 떨어져 나갔다. 다행히 수염과 구부정한 허리, 오른손에 든 지팡이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일 것이다. 씨름이 국제적인 경기였다는 사실은 '씨름도'의 두 역사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고개를 좌측으로 향하고 있는 앞쪽 인물은 고구려 사람이다. 반면 뒤쪽 인물은 고구려 사람으로 보기에는 이목구비가 특이하다. 눈은 크고 옆으로 찢어졌고 코는 콧등이 높고 매부리코이다. 골격으로 보면 고구려 사람은 아니고 흔히 서역 사람이라 부르던 중앙아시아 계통의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게 추정하면 4~5세기에 고구려와 서역간의 활발한 대외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고구려에 온 서역 사람들이 씨름 경기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고구려 씨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조정육의 숨은 그림 찾기Ⅶ].
김홍도의 풍속화
기산의 각희도(脚戱圖)
씨름의 중흥과 인류무형문화유산
광복 이후 1946년, 기존의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의 명칭을 '전국씨름선수권대회'로 바꾸어 씨름 경기를 개최하기 시작했고, 1956년 열린 ‘제12회 전국씨름선수권대회’부터 체급제를 도입하여 씨름도 현대 스포츠로 발전하게 된다. 그 후 1983년 4월 13일부터 4월 17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를 계기로 씨름 중흥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프로 씨름 시대가 정착될 즈음인 1997년 외환 위기의 영향으로 씨름단이 다수 해체되면서 씨름의 인기는 떨어지게 된다. 나아가 프로씨름이 1990년대 중후반 들어 급격히 위축하게 된다.
그래도 씨름은 다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씨름’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2017.1.4)되었고, 2018년 11월 26일 남북 공동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기 때문이다. 공식 명칭은 ‘씨름’, ‘Ssireum’, 한국의 전통 레슬링이다. 사실은 2016년 6월과 12월 남북한이 따로 등재 신청을 했었지만, 남북한의 씨름 문화가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공통점이 있고 평화와 화해를 위한 차원이라며 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전문가들은 씨름의 중흥과 세계화를 위해 새로운 전략을 세우고 있다. 씨름도 레슬링처럼 왼씨름, 오른씨름은 물론 새로운 형태의 씨름도 개발하고 체급과 기술을 세계화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레슬링을 벤치마킹하여 씨름을 현대화시키고 국제화시키어 발전시키자는 얘기다. 레슬링 종류는 크게 레슬링 자유형과 레슬링 그레코로만형으로 나뉘어 있다. 레슬링 자유형은 말 그대로 상・하체 공격이 가능하여 자유롭게 온몸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방식을 말한다(고대 그리스형에 유사). 레슬링 그레코로만형은 로마인들이 그리스식 레슬링을 발전시킨 것으로 상대의 다리를 걸고넘어지는 것이 반칙이며 오직 상반신만을 사용하여 다투는 경기이다. 레슬링처럼 한국의 씨름도 국제 스포츠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씨름과 세계의 씨름
세계 곳곳에 한국의 씨름과 비슷한 유사 씨름이 많이 있다. 인간의 공존과 질서의 형성에서 자웅(雌雄)의 다툼은 필연이다. 자웅은 ‘암컷자 雌’자와 ‘수컷웅 雄’자를 쓰고 있다. 흔히 수컷과 암컷을 가리키는 말로 알고 있는 자웅은 주역에서 나온 말로서, 자(雌)는 밤을 나타내고 웅(雄)은 낮을 나타내는 말이다. 낮과 밤의 지배권을 말한다. 당연히 지배권의 다툼은 자웅의 겨루는 것이고 결과는 성을 불문하고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로 질서가 형성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계 어디서나 언제나 자웅의 다툼은 있다. 이러한 자웅의 1:1의 겨룸을 평화적이고 축제로 승격시킨 것이 씨름이다. 시간과 장소가 다르지만, 당대와 현지에 맞게 나타나는 것이 세계도처에 있는 유사 씨름이다.
세계에는 한국의 씨름과 유사한 스포츠가 많음으로 서로 간에 합종연횡하면서 한국의 씨름이 자타가 공인하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이므로 시대적 역할을 주도할 것을 기대하고 싶다. 한국의 씨름(Ssireum; Traditional Korean Wrestling)이 UNESCO 인류무형문화재산으로 등재된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부터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해야 하고 레슬링과 같이 다양한 종류와 체급으로 발전해야 한다. 한류열풍에 동참하여 세계 각 지역에서의 개최되는 한인사회 씨름대회를 현지 특화하고, 현지의 다양한 씨름도 포용하면서 현대적 스포츠로 접목하여 ‘월드컵 씨름’이라든가 레슬링처럼 올림픽 공식 경기종목으로까지 발전시켜야 한다. 올림픽 경기종목으로 들어가는 것은 물론 ‘씨름 월드컵’도 개최하면 국격과 동반 상승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 심의섭, 곰곰이 생각하는 수상록 2, <집콕, 방콕, 폰콕 단상>, 한국문학방송, 2021.02.25: 70~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