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단원(18-19)
부르심,
기업,
능력을
알기를
구함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18),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근본적인
기도를
한
사도는,
이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신
3가지
축복을
알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18절 한
절
안에는
두가지 기도 제목이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첫째는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는
간구요,
둘째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절을
나눌 때에,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에서
절을 바꾸었더면 더 좋을 뻔 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망”이라는
말
때문에,
“부르심의
소망과,
그
기업의
풍성”을
혼동하는
잘못에 빠질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감사와 감격에 대한 소망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옥중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말씀하는데, 현대교회
성도들은 어찌하여 옥 밖에서도,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자”(계 3:17)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가? 첫 째는 “부르심의 소망”을 알아야 할 만큼 알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알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소망
1
첫
기도
제목이
“부르심의
소망”인데
사도는
4장에서도,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4:1)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로마서
8:30절에서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고
“부르심”을
독립
된
구원
서정으로
말씀하고 있음을 대하게
됩니다. 인생여정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인생 일대에 있어서
참으로 경이로운
전환점인
것입니다.
ㄱ
모세는
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심을
받은 이것이 전환점이
되어
이드로의
양을
치던 목동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목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ㄴ
부모의
슬하를
떠나 하나님의 궤가 있는 성소 낭실에 누워 자던
어린 사무엘은,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것이 전환점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사사가 되었습니다.
ㄷ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바울에게는,
“부르심”에
대한
남다른
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멕섹
도상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서, “사울아
사울아”
하고
불러주신
시간은
“정오”쯤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정오의 부르심이
전환점이
되어
오전(午前)과 오후(午後),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삶은 180도 전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이런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사도는
로마
성도들을 향해,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롬 1:7)라고 말씀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창조주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부르심”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달리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황공한 은총을
입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부르심을,
소망”이라고
말씀하는가?
4:4절에서도,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4)고
“부르심과, 소망”을
결부시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망”(所望)이라는
단어만을
보고 장차 받을 기업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소망”이라 함은 우리가 현재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질 영광은 아직 “소망”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고 말씀합니다.
마음 눈을 밝히사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18)
합니다.
영적인
일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고,
마음의
눈,
신령한
눈으로
만이
바라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알기를”
구할
때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알게 해달라 한 사도가 “부르심, 기업, 능력”을
알기를 구할 때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18)
알게
해달라고 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도 의도성이 있는데 사도는 성도들의 “귀”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바라보게 해달라고 “귀를, 눈”으로
바꾸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도,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 볼 수 있도록 그들
눈 앞에 펼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의 눈에는 스데반이 돌아 맞아
죽으면서도,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한 스데반 집사의 모습과 음성이 녹화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계시록에는 “내가
보니”
하는
대목이 54번이나 등장합니다. 보여주셔야만 볼 수가
있는데, 현재는 고난이나 장차는 영광이라는 점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계 1:11) 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을 보느냐 하는 관점(觀點)은 사활을
좌우할 만큼 중요합니다. 12명의 정탐꾼은 꼭 같은 것을 보았는데 어찌하여 멸망과 구원이 갈라지게 되었는가? 불신앙의
눈은 환경을 보았고 신앙의 눈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시어,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대로 알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은 활기가 넘칠 것이며,
우리의
눈빛은
달라질
것입니다. 환난과 역경 중에서도 기뻐할 것이요,
범사에
감사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4:18절은
이에 빛을 비춰줍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에게는 본래 지혜와 총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눈이
멀어 볼 수 없게 된 맹인(요 9:40)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불신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하십니다. 벌거벗은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눈이
멀어 이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실상이 이러했다면
2천년이 지난 현대교회에는 이런 교회가 없다고 안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갓난 아기는 눈은 떴으나 보지를 못합니다. 자라감에 따라 그는 점차 밝히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가 이와 같은 어린 아이 상태여서는 평생을 가련하고 가난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그에게까지
자랄지라”(4:14,
15)
하십니다.
어찌하여 알기를 구하고 있는가? 사도는
3: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患難)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합니다. 환난 중에서도 “부르심의
소망”을
깨달아 낙심하지 말고
가슴 설레이는 감격 속에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을
역사
속에서
불러주셨다는,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
감사와
감격을
간직하고만
있다면 환난 중에서도 넉넉히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