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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미국이 싹 틔워주는 것
- 세계연방정부의 헌법을 상상한다 -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충격의 지구촌
충격이다. UN은 꿔다놓은 보리자루였다. 트럼프는 곧 본색을 드러냈다. "베네수엘라 지하에서 엄청난 양의 부를 끌어낼 것이며, 세계 최고의 미국 석유 회사들이 들어가 이를 관리할 것"이란다. 게다가 지금 그린란드 합병도 선언한다. 유엔의 다수 기구로부터의 탈퇴도 선언했다. 1945년 이후 유지되어 온 국제 질서를 사실상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경찰'이 아닌,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동맹을 압박하고 관세를 무기로 사용하는 '거래적 행위자'로 남겠다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위에 깡패의 자세도 서슴치 않겠다는 것도. 마치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제국주의 국가들과 비슷하다.
그동안 거창한 기세로 딥스테이트 및 금융자본세력과 대립하며 워싱턴과 세계의 식자들에게 색다른 비전으로 기대를 주었던 4인방(피터틸 일론머스크 알렉스카프 JD밴스)에게도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기술우선의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그들에게 둘러싸인 트럼프가 하는 짓이 고작 이런 수준이었다니. 물론 이들이 베네수엘라 정책을 직접 설계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주창해온 '효율성', '결단력', '주권 행사'라는 수사가 결국 이런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을 보면,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민중의 삶을 압도하는 양대세력의 갈등으로 미국은 ‘불안정한 무정부적 질서'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크다. 마치 로마시대 말기 같다. 지구촌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렇게 빨리 미국이 추락할 줄은. 이스라엘의 가자학살에 암묵적 동조를 하고 있을 때부터 실망을 주더니 이젠 지구촌은 미국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밖에 없다.
이미 세계가 한 지붕이고 순식간에 소통하는 일이 가능해진 이 시대에도 아직 평화가 정착되고 있지 않은 게 이상하기 짝이 없다. 과거에 전쟁을 많이 해온 것은 맞지만 지금은 다른 대안이 많지 않은가. 아무리 적대적인 관계일지라도 소통이 가능한 만큼 파괴와 살상을 피할 길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이를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미국도 이해할 수 없다. 러-우전쟁이 이토록 오래 끄는 것도 너무 이상하다. 그들 사이에 ‘인명이 아무리 많이 살상되어도 좋으니 무기를 남김없이 소진하자’는 협정이라도 맺어진 것일까? 의심만 쌓인다.
그동안 미국의 경찰력에 무임승차해온 것처럼 보이는 지구촌도, 이젠 ‘미국이 빠진 지구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게다가 그 미국이 문제아로 등장할 가능성도 대비해야 한다.
'데이터 약탈'이라는 또다른 위기
그런 가운데 단순히 검은 액체를 탐내는 자본가들처럼, 인류 문명의 운영 체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려는 '뉴 아메리카'의 설계자들도 의혹의 대상이다. 기존의 글로벌 관료주의를 파괴하고 결단력 있는 주권 행사를 주장해온 피터 틸의 탈자유주의 철학, 화성 개척이라는 초장기적 야망을 위해 지구의 자원 패권을 거침없이 재편하려는 일론 머스크의 초가속주의, 그리고 팔란티어의 AI 기술을 통해 주권 국가 수장의 위치를 정밀 추적해 생포해낸 알렉스 카프의 기술적 위력 등 모든 요소가 결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우리는 이제 목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J.D. 밴스는 이러한 힘의 행사를 '디지털 제국'의 정당한 정치적 행위로 포장하며 뒤를 받친다.
이들에게는 인류가 피 흘려 쌓아온 '보편적 가치'가 교묘하게 생략되거나 다른 키워드로 대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천부인권이나 민주적 절차는 종종 '비효율적인 노이즈'로 취급된다. 가자지구의 비극을 보며 인도주의적 슬픔을 느끼기보다, 그 땅을 어떻게 '최적화'할 것인가를 먼저 계산한다고 느껴진다. 이는 인간을 존엄한 주체가 아닌, 관리해야 할 '데이터 포인트'나 '물적 자원'으로 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테크 기업들은 우리가 매일 생산하는 일상의 데이터라는 공유부를 소리 없이 침탈하고 있다. 메타, 구글, 아마존 등이 우리의 검색 기록, 구매 이력, 위치 정보, 대화 내용을 수집하여 자사의 알고리즘을 훈련시키고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동안, 정작 데이터를 생산한 시민들에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는다. 이들은 주권 국가의 수장을 자국 법정에 세우듯, 이제 시민의 일상을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포섭하며 인류 전체를 기술 권력에 종속된 '디지털 농노'로 전락시키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내버려 두면 정교한 '감시자본주의'로 심화할 우려도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후문제가 있다. 이쪽은 지구촌 모두가 급박하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미국만 따로 논다. 파리협정 탈퇴, 화석연료 확대 정책, 환경 규제 철폐—이 모든 것이 지구 전체의 생존을 담보로 한 도박이다. 지구환경이라는 공유부를 일관성 있게 관리하려면 적절한 통제가 불가피하다. 미국 혼자서 깡패짓을 하게 내버려두면 안된다. IAEA가 원전마피아의 하수인처럼 처신하고 있는 현실도 타파해야 한다.
공유부(共有富)를 지키지 못한 문명은 몰락했다
보편적 가치와 공유부를 존중하지 않는 권력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인류사가 말해준다. 로마제국의 전성기는 포용성에 있었고 공유부를 중시하는 마인드에 있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그냥 등장한 것이 아니다. 로마는 공유지(Ager Publicus)를 소수 귀족이 독점하면서 자영농이 몰락했다. 공동의 노력으로 획득한 공유지를 소수 귀족의 사유지로 변질시켰을 때, 로마는 안으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중국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교훈은 선명하다. 당나라가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토대는, 왕토사상에 입각하여 농민들에게 경작의 기회를 골고루 나누어주었던 균전제에 있었다. 땅이 곧 생존의 기반이자 공유부라는 인식이 살아있을 때 제국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하지만 권력자들이 토지를 사유화하자, 땅을 잃은 농민들의 난과 제국의 쇠퇴를 불러왔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공유부의 위대한 사례가 있다. 바로 해방 직후 단행된 농지개혁이다. 1950년 농지개혁법에 따라 3정보 이상의 농지를 국가가 매수하여 소작농에게 분배했다. 땅이라는 공유부의 혜택을 누리게 된 농민들은 6.25를 견뎌내었을 뿐 아니라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을 갖게 되었다. 평범한 농민의 자제들이 배움을 통해 인재로 성장했고, 이들이 훗날 대한민국의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성숙한 민주사회를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만약 그때 공유부가 소수 지주에게 묶여 있었다면, 지금의 인재 강국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건강한 시장경제와 함께 공유부를 국민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야말로 문명의 도약을 가능케 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다른 길로 가고 있다. ‘견제되지 않은 권력은 반드시 남용된다’는 법칙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폭주하면서 추락하는 미국 그리고 러시아나 이스라엘 같은 깡패국가들이 지구촌을 위협하고 있다. 이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유명무실한 유엔이 아니라 실질적인 구속력을 가진 장치가 필요해진 것이 아닐까.
유엔의 실패를 넘어서는 세계연방정부를 상상한다
유엔부터 살펴 보자. 왜 유엔은 실패하고 있는가?
첫째,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이다. 5개 상임이사국이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결의안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국의 이라크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모두 거부권의 벽에 막혀 제재받지 않았다.
둘째, 독자적 재정과 강제 집행권의 부재다. 유엔은 회원국의 분담금에 의존하며, 군사력도 없다. 평화유지군조차 회원국의 자발적 파견에 기댄다. 칼 없는 법은 종잇조각일 뿐이다.
셋째, 주권국가 체제의 근본 한계다. 유엔 헌장 제2조 7항은 "회원국의 국내 관할권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즉, 독재자가 자국민을 학살해도 "내정 간섭"이라는 방패로 막아낸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떤 새로운 기구도 유엔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연방정부는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미국이 건국초기에 했던 역사가 떠오른다. 지금은 어쩌면 대영제국과 손절하고 아메리카대륙이라는 새로운 신세계를 건설하던 시기와 구조적 국면이 비슷해보인다. 당시 나라를 세우기 전에 헌법부터 만들었다. 1787년 필라델피아 헌법회의가 그것이다. 국가가 출범하기 전에 헌법부터 만들었던 사실도 흥미롭다. 그러니까 가칭 세계연방정부를 상상하기 전에 그 헌법부터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구촌 전체의 연방정부라니, 흥미롭다. 과연 어떠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까. 당시 헌법을 만들었던 이들이 세계연방정부라면 어떤 조언을 할까, 궁금하다. 세계연방정부를 상상하는 일에 도움될 3인에게 지혜를 구해본다.
미국 헌법의 기틀을 잡은 토머스 제퍼슨의 생각을 들여다 보자. 그는 "헌법은 19년마다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만큼, 죽은 세대가 산 세대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는 "아이디어는 본질적으로 만인의 소유"라며 지식재산권의 과도한 독점을 경계했다. 제퍼슨은 아이디어나 지식은 공유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그이기에, 아마도 인공지능의 원천인 데이터를 사회적 공유부로 책정하는 아이디어를 "자유로운 공화국의 기초"라고 평가할 것이다. 공유부에 대한 생각은 당시 미국사회를 풍미했던 토머스 페인도 ‘토지개혁’ 주장에 담은 바 있다.
미국 헌법의 설계자인 제임스 매디슨이라면 세계연방정부 구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는 '야심으로 야심을 막아야 한다(Ambition must be made to counteract ambition)'고 했다. 아마도 그의 조언은 "어떻게 하면 거대한 지구촌을 하나의 정부로 묶으면서도, 각 지역의 개별성을 말살하지 않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일찍이 미국이 채택했던 '이중 주권(연방정부와 주정부의 분권)' 모델을 제안하며, 세계연방정부는 오직 전쟁과 평화, 범지구적 경제 문제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할 것이다.
국가운영의 기틀을 세운 실용주의자 알렉산더 해밀턴이라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는 "법은 칼이 없으면 종잇조각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연방정부에 직접 세금을 징수하고 군대를 보유할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UN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강제 집행권과 독자적인 재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할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그는 세계연방정부가 '자체적인 세금 징수권(데이터세 등)'과 '단일한 군사력'을 갖지 못한다면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것이다. 1790년 그가 재무장관으로서 국립은행 설립을 주도했듯, 아마도 그는 '은행 시스템'을 먼저 설계하라고 조언할 것이다.
'공유부(Commons)' 기반의 자산 통화와 ‘세계연방은행’
이 가운데 제퍼슨과 페인의 생각이 보편적인 사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그 헌법에는 기본적으로 깔려야 할 것은 공유부에 대한 규정이다. 그것이 보장되는 바탕위에 메디슨의 주권기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안 그리고 사법적 규율기관에 대한 규정 등 다양한 형태의 체제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해밀턴의 얘기처럼 경제적인 중심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즉 뼈와 살이 있어도 피가 순환되어야 몸이 움직인다. 화폐는 가장 중요한 공유부다. 피를 순환시키는 심장과 혈관의 시스템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기초에 해당한다.
지금 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고장이 나있다. 화폐발권력(Seigniorage)이 공공의 통제를 벗어나 민간은행시스템인 연방준비제도와 시중은행의 신용창출에 종속됨으로써, 부의 창출이 곧 부채의 증대로 이어지는 모순에 빠져 있다. 미국병은 잘못된 금융체제 탓이 크다. 1913년 연방준비법이 통과되면서 화폐 발행권은 사실상 민간 은행 컨소시엄에 넘어갔다. 2008년 금융위기가 보여주듯, 은행들은 파생상품을 무한 증식시켜 거품을 키우다 터뜨렸고, 그 대가는 시민들의 세금으로 메워졌다. 어째서 이런 시스템이 되었을까? 의문이다.
케인즈가 내놓았던 ‘세계중앙은행’ 개념
케인즈가 일찍이 해답을 내놓은 적이 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1944년 달러체제의 대안으로 '방코르(Bancor)'라는 가상 화폐을 내놓으면서 국제 무역 결제를 위한 장부상의 화폐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각국 통화의 가치를 방코르에 고정하여 환율의 급격한 변동을 막는 효과가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일종의 '세계중앙은행'인 국제청산동맹(International Clearing Union)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모든 국가는 이 동맹에 계좌를 개설하고, 수출입에 따른 대금 결제를 방코르로 처리하자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달러체제가 병들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유효하다.
세계연방정부의 금융 시스템은 새로 짜야 한다. 이러한 '부채 기반의 화폐 체제'를 넘어, '인류의 공유부와 생명력에 기반한 새로운 통화 모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발권력의 완전한 회수가 필요하다. 화폐 발행권을 민간 은행의 대출(신용창출)에 맡기지 않고, 세계연방 중앙은행(World Federal Bank)이 직접 행사하는 것이다. 돈을 찍어낼 때 누군가의 빚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공공 지출과 시민의 기본소득으로 시장에 직접 공급하는 것이다. 세계연방은행이 직접 발권력을 가지는 것이 요체다.
금(Gold)이나 달러(Debt) 대신, 인류가 공동으로 소유한 가치를 담보로 통화를 발행한다. 가령 인류가 생산하는 데이터의 총합이 화폐의 가치를 뒷받침하도록 한다. 또 다른 가능한 개념은 생태적 가치를 연동해서 지구 생태계의 복원력과 탄소 흡수량을 화폐 발행의 근거로 삼는 것이다. 혹은 '공동으로 소유한 토지의 지대'도 통화발행의 담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연을 파괴하면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자연을 살리면 통화가 안정되는 구조로 가는 것이다. 알고리즘 기반의 투명 거버넌스도 필수적이다. 현재 금융 시스템이 고장 난 이유는 밀실에서의 결정과 불투명한 파생상품 때문이다.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의 공공화로 모든 화폐의 흐름을 투명하게 공개하되,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암호화 기술로 보호한다.
세계연방정부는 거시적인 질서를 잡고, 실물 경제는 지역 공동체가 주도하게 한다. 범지구 통화(Global Credit)는 국가 간 무역, 거대 인프라 투자, 기후 위기 대응 등에 사용되는 보편 화폐를 활용하고 지역 통화는 각 지역의 문화와 생명력을 살리기 위해 발행되는 상호부조 성격의 보완 화폐라는 식으로 전개도 가능할 것이다. 세계연방정부 헌법에 금융 조항을 넣는다면, "화폐는 자본의 증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 생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존재한다" 라는 식이 될 것이다.
세계연방정부, 실현 가능한가?
하지만 이 모든 논의에 앞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세계연방정부는 과연 실현 가능한가?
첫째, 주권 양도의 문제다. 어떤 국가가 자국의 군사권, 화폐 발행권, 사법권을 초국가 기구에 넘기겠는가? 특히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유럽연합조차 회원국들의 주권 갈등으로 통합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점진적 통합'과 '기능별 접근'이다. 한 번에 완전한 연방정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 팬데믹, 사이버 안보 등 '공통의 위협'에 대응하는 기능별 기구부터 만드는 것이다. 기존의 국제기관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세계보건기구(WHO)에 독자적 재정과 강제 집행권을 부여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위기가 심화될수록 부분적 주권 양도의 필요성은 커질 것이다.
둘째, 이해관계의 충돌이다. 선진국과 개도국, 자원 수출국과 수입국, 채권국과 채무국—이들의 이해는 첨예하게 갈린다. 데이터세를 거두면 테크 기업을 보유한 미국이 반발할 것이고, 탄소세를 부과하면 산업국들이 저항할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공정한 분배 메커니즘'이다. 가령 데이터세 수입의 50%는 데이터 생산국에, 30%는 개도국 발전 기금에, 20%는 세계연방 운영비로 배분하는 식이다. 탄소세도 마찬가지로, 수입의 대부분을 저개발국의 재생에너지 전환에 투자한다. 강대국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모두가 이익을 보는 구조를 설계한다.
셋째, 문화적·종교적 다양성의 문제다. 서구의 개인주의와 동양의 집단주의, 세속주의와 종교 국가, 자유민주주의와 권위주의 등 이 모든 가치관을 하나의 헌법 안에 담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최소 합의의 원칙'이다. 세계연방정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규정하지 않는다. 오직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만 규정한다. 대량학살, 핵무기 사용, 생태계 파괴, 데이터 독점 등 이런 '인류 공통의 금기'만 헌법에 명시하고, 나머지는 각 지역의 자치에 맡긴다. 보편성과 다양성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넷째, 기술적 독재의 위험이다. 알고리즘 기반 거버넌스, AI 의사결정, 디지털 화폐 감시 등 모든 것이 오웰의 ‘1984‘를 현실로 만들 수 있다. 투명성이라는 이름으로 전체주의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한 답은 '권력의 분산과 감시'다. 기술은 중앙집중이 아니라 분산형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블록체인처럼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는 구조, 암호화 기술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장치, 그리고 무엇보다 '추첨제 시민위원회'가 기술 권력을 감시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기술은 도구일 뿐, 결정은 인간이 해야 한다.
다섯째, 전환의 경로 문제다. 지금의 UN 체제에서 세계연방정부로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 혁명적 변화는 현실적이지 않고, 점진적 개혁은 너무 느리다. 이에 대한 답은 '위기를 계기로 한 도약'이다. 역사적으로 큰 변화는 위기에서 왔다. 1차 대전 후 국제연맹, 2차 대전 후 UN, 2008년 금융위기 후 G20 체제 등 인류는 파국을 겪고 나서야 변화했다. 안타깝게도 다음 변화의 계기는 기후 재앙이나 핵 위협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일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설계도를 그려놓아야 한다. 미국이 이상증세를 보이며 지구촌을 위협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이런 현실적 난관들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상상을 멈출 수 없다. 100년 전 사람들도 UN을 꿈꿀 때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하지만 2차 대전이라는 참극 후,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 세계연방정부도 지금은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인류가 더 큰 위기 앞에 섰을 때, 이 상상이 청사진이 될 수 있다.
다섯 가지 대안 모델
이상과 같은 개념을 정리하면서 세계연방정부 체제의 유형에 대한 상상을 다음과 같이 펼쳐본다. 인류가 그동안 고민해온 정치체제의 지혜를 망라해보면 대략 5가지의 모델이 떠오른다.
대안1. 보충성 원칙에 기반한 '중첩적 연방제'
미국 연방제의 확장판으로, "가장 낮은 단위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만 상위 단위로 넘긴다"는 보충성 원칙(Subsidiarity)을 극대화한 모델이다. 마을-도시-지역-국가-대륙-세계정부로 이어지는 다층 구조로서 세계정부는 전쟁 억지(군사권 독점), 기후 위기 대응, 우주 자원 관리 등 인류 전체의 생존이 걸린 사안만 담당한다. 인구 비례로 선출된 '인민 의회'와 각 국가(또는 대륙)의 대표가 모이는 '지역 의회'의 양원제를 택해 권력의 균형을 맞춘다. 매디슨이 강조하는 방향의 대안이다.
장점은 각 지역의 자치권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전지구적 문제에 공동 대응할 수 있다. 단점은 층위가 너무 많아 의사결정이 느리고,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위험이 있다.
대안2. 기능 중심의 '지구촌 거버넌스 연합'
지리적 경계(영토)가 아닌 기능(이슈) 중심으로 권력을 분산하는 모델이다. 환경청, 보건청, 경제협력청 등 각 분야의 전문 기구들이 독립적인 입법·행정권을 가진다. 영토 기반의 정치인 대신, 해당 분야의 이해관계자(전문가, 활동가,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주권을 행사한다. '국가'라는 개념이 희미해지고, 사안별로 최적의 합의를 도출하는 분산형 네트워크 구조다.
장점은 전문성이 높고, 각 분야별로 최적화된 정책을 신속하게 실행할 수 있다. 단점은 전체를 조율하는 중심이 약해 분야 간 이해 충돌 시 해결이 어렵다. 또한 민주적 정당성이 약할 수 있다.
대안3. 기술 민주주의 기반의 '직접 참여 연방'
대의제(대표 선출)의 한계를 IT 기술로 극복하려는 시도다. 모든 시민은 세계 주요 현안에 직접 투표하거나, 자신이 신뢰하는 특정 분야의 대리인에게 투표권을 실시간으로 위임/회수할 수 있다(유동 민주주의, Liquid Democracy). 고정된 임기의 정치인 대신, 안건별로 가장 지지를 받는 '일시적 집행위원회'가 정책을 수행한다. 블록체인을 활용해 투표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AI가 전 세계의 여론을 실시간으로 분석하여 의제를 설정한다.
장점은 시민의 직접 참여가 극대화되고, 대표의 부패나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다. 단점은 포퓰리즘에 취약하고, 복잡한 정책을 일반 시민이 판단하기 어렵다. 또한 디지털 격차로 인한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
대안4. 미래 세대와 생명권을 포함한 '지구 법정' 중심의 체제
지구와 생명을 중시하는 모델로, 현재 살아있는 인류뿐 아니라 미래 세대와 지구 생태계 전체를 주권의 대상으로 본다. '지구 법정'이 최상위 기관이 된다. 헌법 제1조에 '인간의 권리'뿐 아니라 '지구 생태계의 존속권'을 명시한다. 모든 정책 결정 시 가령 '7대후손(200년후)의 관점'에서 검토하는 미래 세대 대표들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다. 인류의 욕망을 조절하고 지구촌 전체의 생명력을 보존하는 것을 헌법의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장점은 기후위기 시대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며,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지속가능성을 우선시한다. 단점은 너무 이상주의적이며, 현재 세대의 현실적 필요와 충돌할 수 있다. '미래 세대 대표'를 누가 어떻게 선출할 것인가도 문제다.
대안5. 통합형 '지구법정-인민의회-기능위원회' 삼원체제
이상의 대안들의 장점을 조합하는 또 다른 대안이다. 가치를 수호하는 지구법정을 최상위에 두고 연방경찰력을 배속하고 배심제로 운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입법기관인 인민의회를 둔다. 추첨제로 선출될 짧은 임기의 의원들은 블록체인 기반의 실시간 의제 설정 및 직접 투표가 가능하다. 그리고 행정부에 해당하는 기능별위원회를 두고 데이터, 에너지, 물, 보건 등 분야별 전문 기구를 운영하는 것이다. 지역상원을 두어 각 대륙/국가의 고유성과 자치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지역상원의 선출방식과 운영은 지역별로 결정하도록 한다.
장점은 법정(사법), 의회(입법), 위원회(행정)의 삼권분립이 명확하고, 전문성과 민주성, 지역성을 동시에 확보한다. 단점은 구조가 복잡해 운영 비용이 높고, 각 기관 간 권한 충돌 시 조정이 어려울 수 있다.
‘지구법정’은 물리력을 넘어선 구속력을 갖춘다
어떤 대안이든 공통되게 자리잡을 ‘지구법정’에는 경찰력이 포함되도록 한다. 이들은 일반적인 치안이 아니라, '헌법 제1조(생태와 생명권)'를 위반하는 무력 전쟁, 대량 학살, 기후 파괴에 대해서만 즉각적인 강제 집행권을 가진다. 상시 군대가 아닌, 지구 법정의 판결이 내려지는 즉시 소집되어 집행하고 해산하는 '사법 집행 기구'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지구법정에는 물리적 경찰력을 넘어선 '디지털·금융 구속력'도 보유해야 한다. 알고리즘 기반의 강제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지구 법정에서 특정 세력(국가나 기업)의 반인륜적 행위를 유죄로 판결하면, 세계연방의 금융망과 데이터 망에서 해당 세력을 즉시 차단(Blackout)하는 방식이다. 무력 대신, 그들이 가진 '데이터 자산'과 '발권력'을 몰수하여 사회적 공유부로 즉각 귀속시킴으로써 전쟁 수행 능력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물리력보다 더 강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지구법정이 '침략 전쟁'으로 판결하면 러시아의 모든 국제 금융 거래가 즉시 중단되고, 러시아 정부와 연계된 데이터 서버가 세계 인터넷망에서 격리된다. 석유 수출 대금도 세계연방은행이 동결하여 우크라이나 재건 기금으로 전환한다. 전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지구법정은 전문가-시민 '혼합 합의체' 모델이다. 법률적 전문성과 인류의 보편적 상식을 결합하는 방식이다. AI시대이므로 법률적 전문성은 평범한 시민도 뒷받침을 받을 수 있다. 각 대륙에서 추첨된 시민법관들이 다수로, 국제법 전문가인 직업법관들이 소수로 참여한다. 직업법관이 법리적 검토를 수행하면, 시민법관들은 해당 사안이 '인류의 생명력'과 '공동선'에 부합하는지를 최종 판결하는 것이다. ‘법대로만 한다’는 차가운 논리를 넘어, 가자지구 사태와 같은 비극에 대해 인류의 양심에 기반한 '회복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추첨제 기반의 '지구 대배심(Global Grand Jury)'도 필수다. 경찰력이라는 강력한 칼을 뽑기 전, 그 정당성을 검토하는 시민 기구다. 전 세계 인구 중 무작위로 추첨된 시민들이 일정 기간 '지구 대배심원'으로 활동한다. 세계연방의 경찰력이 무력을 사용하거나 특정 국가의 자산을 동결하기 위해서는, 이 지구 대배심의 '집행 승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권력의 독점을 막고, 경찰력이 강대국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원천 봉쇄한다.
지구법정은 세계연방정부의 가장 핵심조직이다. 대통령을 두지 않는 대신 거악을 적극적으로 제재할 역할을 한다. 현행 '국제사법재판소'와 전혀 다른, 구속력 있는 조직이다.
디지털 직접 참여형 '지구 공론장'
지구법정과 인민의회와 관련되는 디지털 직접 참여형 '지구 공론장'도 운영한다. 기술 민주주의를 활용하여 시민법정의 범위를 전 지구인으로 확장하는 모델이다. 인류 전체와 관련된 중대 사안(가령 핵문제, 생태계파괴, 전쟁과 인명살상)에 대해서는 전 세계 시민이 디지털 투표를 통해 배심원으로 참여한다. AI가 수백만 명의 의견을 분석하여 쟁점을 정리하고, 시민들은 이를 바탕으로 '지구 법정'에 권고안을 제출하거나 판결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도출되는 판례가 인민의회에서 다룰 입법의 기초가 된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에 대한 의사결정을 위해, 전 세계 100만 명의 시민이 무작위로 추첨되어, 양측의 주장과 증거를 검토한 후 "전쟁범죄 여부"에 대해 투표한다. 80% 이상이 전쟁범죄로 판단하면, 지구법정은 이를 근거로 이스라엘 정부의 국제 금융 접근을 제한하고, 팔레스타인 재건 기금을 조성하는 판결을 내린다.
반론에 답하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이렇게 다음 질문들을 물을 것이다.
문1) "세계정부는 전체주의로 귀결되지 않겠는가?"
이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면 전체주의가 되지만, 권력이 법정-의회-위원회로 분산되고, 추첨제와 직접 투표로 시민이 직접 감시하며, 지역 자치가 보장된다면 오히려 지금의 강대국 패권보다 덜 전체주의적일 수 있다. 미국 한 나라가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
문2) "강대국이 세계정부를 지배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1국 1표'가 아니라 인구 비례 의회와 지역 상원의 양원제가 필요하다. 또한 추첨제 시민법관이 직업 법관과 동수로 참여하여, 강대국의 법률 전문가들이 판결을 독점할 수 없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디지털·금융 구속력은 물리적 군사력과 달리, 약소국도 강대국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다.
문3) "이상주의적 공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200년 전,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비현실적'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100년 전, 여성 참정권도 '공상'으로 치부되었다. 75년 전, UN 창설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역사는 '불가능'이 '필연'이 되는 과정의 기록이다. 기후위기와 핵 위협 앞에서, 세계연방정부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될 것이다.
맺음말: 미국 침몰이 새로운 싹을 틔운다
먼 우주에서 본다면 지구는 80억의 인간이라는 생명체들이 모여서 개미와 같은 협업을 하고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동안 사실상 꿀벌이나 개미보다 못한 협업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던가. 이제 미국이 적나라한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지구촌을 핍박하는 현대판 봉이 김선달은 더 이상 방치되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중국과 같은 통제형 체제는 답이 아니다. 지금 미국 초기와는 달리 대통령제 같은 대리운전 체제는 고려조건이 아니다. 순식간에 수억 명이 소통하는 BTS 아미는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대만이 선보인 오드리탕 디지털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침몰은 비극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침몰이야말로 새로운 질서의 씨앗을 틔울 기회일 수 있다. 로마제국이 무너진 자리에서 중세 유럽의 다양한 문명이 꽃피었듯,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은 인류가 진정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평상시에는 유연하고 다소 느슨하면서도, 유사시에는 세계 인민의 뜻과 지혜를 쉽게 모아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세계연방정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 상상은 하나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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