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한 호수에 걸려 온 전화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저장되어 있지 않은 낯선 번호가 떠 있었다.
받지 말까 잠시 망설였다. 요즘은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오는 전화가 반갑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혹시 옷 수선을 맡기려는 고객일지 몰랐다. 급하게 고쳐야 할 옷이 있거나 맞춤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은 종종 낯선 번호로 전화를 걸어 오기 때문이다.
나는 짧은 망설임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가 처음 입에 올린 것은 현재의 내 이름이 아니었다. 개명하기 전, 아주 오래전에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을 일도 거의 없는, 지난 세월 속에 묻어 둔 이름이었다.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히지 않았다. 내가 목소리만 듣고도 당연히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오래전의 내가 얼마나 똑 부러지고 야무진 성품이었는지까지 이야기했다. 잊고 있던 과거의 나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혹시……?”
나는 마음속에 떠오른 이름 하나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야?”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오랫동안 지금의 평온을 얻기 위해 애써 왔다. 크고 작은 풍파를 지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혼자 견뎌야 했던 시간도 건너왔다. 이제야 겨우 내 삶은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날마다 미사에 참석하고,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옷을 고치며 사람들을 만나고, 글을 쓰면서 조용하지만 부족하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래전의 한 사람이 예고도 없이 나타나 그 고요한 호수 한가운데 돌 하나를 던졌다. 작은 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돌이 만든 파문은 생각보다 넓고 깊게 번져 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취기가 묻어 있었다. 그는 한때 누구보다 나를 사랑했다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수십 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뛴 고백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지금에 와서 누가 감히 내 마음의 고요를 이렇게 쉽게 건드릴 수 있을까 싶었다. 한편으로는 원망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외로움이 느껴져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때, 숨이 잠시 멎는 듯했다.
그 이름은 오랫동안 내 마음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지만, 다시 꺼내 볼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이름이었다.
한때 나도 그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래서 오랫동안 가슴 한구석이 아팠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서운함과 그리움이 뒤섞였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다만 세월이 그 위에 여러 겹의 기억을 덮어 주었기에, 나는 이제 모두 지나간 일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다시 듣는 순간, 깊이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하나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오래된 목소리와 표정, 함께했던 시간과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을 스쳐 갔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잊은 것이 아니었나 보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때 소중했던 사람의 이름을 뜻밖에 다시 마주하니 가슴이 먹먹해지고,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전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아 보려 했지만, 잔잔했던 호수 위로 번진 물결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스스로에게 여러 번 말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정심이었다. 아름다웠던 기억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가슴속에 묻어 두고 싶었다. 지난 세월을 되돌리거나, 이제 와서 서로의 삶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처럼 조용히 미사에 다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뒤늦게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한다면, 그 변화가 가져올 무게를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다시 마음을 내어 줄 용기도 없고, 오래전의 아픔을 되풀이할 힘도 없다.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 당분간 만나지 말자. 서로의 안부를 가끔 전하며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해 보자. 나는 이제 너에게 다시 다가갈 힘도, 마음도 없다.’
그러나 그 말을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연락해 온 그의 마음을 매정하게 밀어내는 것 같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혹시 내 말이 그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를 반길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말하지 못한 문장들을 마음속에 남겨 둔 채 전화를 끊었다.
오늘 미사 중에 그를 위해 기도했다.
지나간 인연을 다시 이어 달라는 기도는 아니었다. 오래전의 사랑을 되돌려 달라는 기도도 아니었다. 그가 남은 생을 외롭지 않게 살아가기를,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지나온 세월 속의 상처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가 나를 흔드는 사람이 아니라, 멀리서 서로의 평안을 빌어 줄 수 있는 좋은 벗이 되기를 기도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했다.
하느님, 제 마음을 지켜 주십시오.
뒤늦게 찾아온 흔들림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게 해 주십시오.
지나간 사랑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게 하시고,
서로의 현재를 아프게 하지 않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그가 제게 상처나 미련이 아니라
서로의 평안을 빌어 주는 좋은 벗으로 남게 해 주십시오.
지금도 마음의 파문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문득 그의 이름이 떠오르면 가슴 한편이 먹먹해진다. 그러나 이 흔들림 또한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잦아들 것이라고 믿는다.
호수에 던져진 돌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물결이 영원히 출렁이는 것도 아니다. 흔들린 자리에도 다시 고요는 찾아온다.
나는 서둘러 답을 내리지 않으려 한다. 그저 내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며 하느님께 맡기고 싶다.
언젠가 마음의 물결이 모두 잦아든 뒤, 우리는 지나간 사랑을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안부를 진심으로 물어 줄 수 있는 좋은 벗으로 남을 수 있을까.
오늘 밤, 나는 그 가능성만을 조심스럽게 기도해 본다.
**2026년 8월 4일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