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가복음10장1-52절의 주해와 적용]
통념의 전복과 진리의 인각
권성수 / 대구동신교회 담임목사
마가복음 9장까지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10장부터의 기사는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을 향해 신속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10:1.32, 46). 예수님은 순례자들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통상적인 경로를 따라 가시다가(눅9:51~53) 어떤 지점에서 요단 강을 건너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의 영토인 베뢰아로 가셨다. 10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유대와 베뢰아에서 하신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10장의 구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대답하기 곤란한 이혼 문제를 들고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을 했다(10:2).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 축복을 요청했다(10:13). 어떤 부유한 구도자가 영생의 방법을 질문했다(10:17, 22-23).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각기 우정승과 좌정승의 자리를 요청했다(10:35-37).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시력 회복을 요청했다(10:46. 51) 예수님은 이런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당시 사람들의 통념을 뒤집어엎는 반응을 보이셨다.
1) 이혼 문제(10:1~12)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이혼 증서 규정에 따라 아내를 쉽게 내어버릴 수 있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제자들도 그런 통념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나(10:2, 4, 10),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래적 의도(한 몸 원리)로 그 통념을 전복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여인들을 무시하는 당시의 통념을 ‘한 몸 원리’로 깨어버리신 것이다.
2) 유아 축복 문제(10:13~16)
사람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받도록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10:13). 이것은 어린아이들을 무시하는 제자들의 통념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제자들(당시 사람들)의 유아 무시 통념을 깨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유아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라는 충격적인 진리를 통해 깨셨다.
3) 재물과 구원 문제(10:17~31)
부유한 구도자와 제자들은 재물이 천국 입성에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통념을 가지고 있었다. 부유한 구도자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갔다(10:22). 제자들도 재물과 구원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도자와 제자들은 재물이 천국 입성에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통념을 가지고 있었다. 부유한 구도자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갔다(10:22). 제자들도 재물과 구원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0:24). 예수님은 재물과 구원에 대한 당시의 통념을 약대와 바늘귀 비유로 깨뜨리셨다(10:25).
4) 천국의 지위 문제(10:32~45)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하여 제자들은 천국에서 각기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과 다른 제자들의 분노(10:41)로 드러난 대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는 통념을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10:44)로 전복하셨다.
5) 치유 문제(10:46~52)
많은 사람들은 소경 거지가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하여 부르짖을 때에 꾸짖으면서 잠잠하라고 했다 (10:4748). 그가 소경이 아니고 거지가 아니라 고위층이었다면 꾸짖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면 많은 사람들이 소경 거지를 멸시하는 통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소경 거지의 믿음을 칭 찬하시고 그를 고쳐 주심으로써 그런 통념을 바꾸어 놓으셨다.
여인들을 천시하는 통념, 어린아이들을 무시하는 통념, 구원에 있어서도 부자를 중시하는 통념, 높은 지위를 탐하는 통념, 소경 거지를 홀대하는 통념. 이런 통념을 예수님은 다 부숴뜨리신 것이다. 질문이나 요청, 거기에 숨어 있는 통념, 통념을 깨뜨리신 예수님의 반응, 사람들의 충격과 놀라움.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은 천국의 진리를 전달해 주셨다. 예수님은 가진 자, 높은 자를 우대하고 못 가진 자, 낮은 자를 천대하는 당시의 통념을 깨실 때에 예수님 자신의 사명을 간추려 말씀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이 말씀은 마가복음 10장의 요절이고, 더 나아가 마가복음 전체의 요절이다.
1. 이혼 문제(10:1~12)
예수님은 무리들이 모여 왔을 때 ‘전례대로’ 가르치셨다(10:1). 교육의 전례는 예수님이 얼마나 꾸준하고 집요한 교사였던가를 시사한다. 예수님의 교육은 바리새인들 및 서기관들과 달리 놀라운 권세가 있었다(1:22,27, 마7:28~29).
바리새인들이 이혼 문제를 들고 시험했을 때도 예수님은 그들의 그릇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시는 교육을 하셨다. 이 혼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이 바리새인들의 통념을 깨는 것이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간의 갈등은 점차적으로 증폭되어 결국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는 질문을 했다.
이것은 단순히 이혼의 적법성을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바리새인들은 그 질 문으로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다(10:2). 이혼문제가 시험거리가 된 것은 당 시에 신명기 24장 1절의 "수치되는 일"이 무엇이냐를 두고 상반된 입장으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샤마이파는 "수치되는 일'을 도덕적으로 수치스러운 것(간통)과 유대인 아내가 지켜야 할 법을 어긴 것으로 해석했 다. 힐렐파는 남편을 곤란하게 하는 것 전체를 포괄하여 그것을 해석했다.
이혼문제는 율법해석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헤롯 안디바의 부당 결혼을 책망한 것과도 관련되어 있었다(6:17이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답을 걸어 세례 요한이 빠졌던 죽음의 함정에 예수님을 빠뜨리려는 음모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세례 요한을 처형했던 헤롯 안디바가 갈릴리 건너편 베뢰아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일행이 그리로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이혼문제에 대한 당시의 통념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제자들이 ‘집에서’ 그 문제에 대해 다시 질문한 것과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10:10~12).
예수님은 당시의 통념에서 나온 곤란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에 바로 답변을 하시지 않고 반문하셨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는 반문에는 예수님의 지혜가 엿보인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의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예수님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반문하셨다(12:16). 반문은 상대방이 파놓은 함정을 빠져나가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 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는 바리새인들의 답변(2:4)은 신명기 24장 14절에 근거한 답변이다. 예수님은 모세의 이혼증서 규정에 대해서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고 지적하셨다(10:5). 예수님은 동시에 ‘창조시로부터’의 ‘한 몸 원리’를 제시하시면서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10:6-9).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본래의 결혼 규범(창1:27, 2:24)과 모세의 이혼증서를 대조시켜 어느 한 쪽을 폐기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래적 규범과 사람들의 실존적 상황을 둘 다 언급하신 것이다. 규범(norm)과 상황(situation)의 관계는 윤리의 원리와 실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결혼에 있어서 규범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고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말라’는 것이다. 상황은 인간 ‘마음의 완악함’이다.
하나님이 주신 ‘한 몸 원리’라는 규범이 마음이 완악한 인간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 인간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규범을 포기하는 ‘상황윤리(Situation ethis)’로 인해 사실 하나님의 규범은 아무 구속력이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모세의 이혼증서 규정이 이런 것인가?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규범을 지키지 않고 반역하는 완악한 인간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규범을 최대한 지키는 방향으로 제시한 것이다. 완악한 인간이 이혼증서의 규정 에 속박되어 마음대로 부인을 내어버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혼증서의 규정이 없으면 본질상 완악한 인간은 이혼을 식은 죽 먹듯 할 것이고, 그 결과 ‘한 몸 원리’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가령 ‘(남편인 네가) 가라고 하는데 가지 않으면 아내를 [한 몸에서] 잘라버리고 이혼증서를 주라(B.C. 200년경 Joshua ben Sira)’.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완악한 남편으로부터 여인을 보호하면서 사람들로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를 지키 도록 끌어올리는 이혼증서라는 까다로운 법적인 규정이 필요했다.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덜 큰 악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최선이 아닐 경우 차선이라도 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모세의 이혼 증서 규정은 최선의 규범을 버릴 때에 최악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이다. 하나님의 의도와 인간의 실패라는 두 실재 앞에서 하나님의 의도가 최대한 지켜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의 규정은 괜찮은 것(ok)이지만 최선(less than the best)은 아니다.
하나님의 규범을 지키는 데 있어서 최선은 아니라도 최대한 지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모세의 이혼증서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혼증서의 방향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창조시로부터 주신 한 몸 규범을 최대한 지키는 것이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규범을 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완악한 인간의 상황 속에서 규범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완악한 인간이 하나님의 규범을 버린 후에 ‘이왕 버린 몸 아무렇게나 살자’는 식으로 최악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본래적 규범과 실존적 상황을 다 고려하시는 분이시다. 일부일처제의 본래적 규범이 구약의 인물들(아브라함, 야곱, 다윗 등)에 의해 깨어진 것을 놓고 일부 남성 신자들이 나도 서울에 한 여인, 뉴욕에 한 여인을 두고 살겠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대단한 착각을 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시작되던 초기, 구원역사에 있어서 그림자 시대의 상황을 계시가 대낮처럼 밝은 지금에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편의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림자 시대(구약)의 상황과 실체 시대(신약)의 상황을 고려하셔서 규범준수를 보신다는 것이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음행의 연고’를 이혼사유로 인정하셨다(마19:9). 이것도 하나님의 본래적 규범을 최대한 지키기 위한 허용 조치이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상호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원리를 깔고 있다. 음행은 그 상호신의라는 기본원리를 저버린 것이다. 따라서 음행이 이혼사유로 허용된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허용이지 명령이 아니다. 음행이 있다고 할지라도 회개와 회복을 통해 ‘한 몸 원리’를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다.
2. 유아 축복(10:13~16)
당시 유대인들은 여자와 아이는 계수에도 치지 않을 정도로 무시했다(마14:21, 15:38). 이혼문제에 있어서는 여인들을 무시하던 유대인들이 본문의 유아 축복 문제에 있어서는 아이들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에 제자들이 꾸짖었다(10:13).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모습을 보시고 분히 여기시면서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다(10:14)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심으로써 강조해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10:15)”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어린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10:16).
예수님께서 이렇게 어린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신 것은 당시 어린아이들에 대한 제자들의 통념을 무너뜨리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의 유치성, 무계획성, 미숙성, 이기성, 무례성을 높이 평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절대의존성과 겸허성을 높이 평가하신 것이다(마18:1~4). 어린아이는 참된 제자의 특징을 소유하고 있다. 부모에 대한 겸손한 절대의존이 어린아이의 특징인 것이다.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기포기적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주님의 축복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제외시키거나 무시하지 말고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 이것이 참 된 제자의 신앙의 비결이다.
3. 재물과 구원(10:17-31)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는 질문을 했다(10:17). 이 사람은 부자이고(10:22) 청년이었으며(마19:20) 관원이었다(눅18:18). 요컨대 그는 부유한 젊은 관원(a rich young ruler)이었다. 그가 예수님께 달려와 꿇어앉아 영생 질문을 드린 것을 보면 그는 영생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가진 구도자였다. 그는 영생(미래 천국의 복된 삶)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얻기 위해 예리하고도 열정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정도로 보았지만 그 선생님이 영생의 길을 가르치실 정도로 권위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을 받으신 후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셨다(10:18). 이것은 예수님은 선하지 않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만일 예수님이 선하시지 않고 혹시 악하시다면 그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이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시고 죽은 지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선하신 구원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10:21, 34).
예수님께서 여기서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은 문맥 속에서 깊은 의미가 있다. 그 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킨 ‘선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또 다른 ‘선한 사람(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쌓을 수 있는 구원의 방식이 무엇인가 질문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 청년의 선 개념을 그대로 받아 구원의 방식에 적용하면 선행 구원이라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그의 개념을 깨면서 영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것을 밝히 제시하기 위하여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예수님은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명자로서 성부 하나님에게 영생을 주시는 영광의 초점을 기울이시기 위해 그러신 것이다.
예수님은 ‘선한 선생님’이란 말에 대한 예민한 반응을 보이실 뿐 아니라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것인가’ 하는 데도 깊은 관심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일부를 영생을 얻기 위해 해야 할 무엇으로 지적하셨다. 십계명을 지켜야 영생을 얻는다는 식의 이런 답변은 얼른 보면 예수님이 복음주의자가 아니라 율법주의자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우리가 이런 인상을 받는 것은 복음과 율법의 대조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복음이 아니고 복음은 율법이 아니라는 의식이 우리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이런 율법과 복음의 이원론 때문에 그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이 언급하신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할 때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는 말씀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계명을 행하라’고 암시하신 것이나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하는 청년을 ‘사랑 하셨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실은 계명들을 행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사실은 그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는 식으로 해명을 한다. 그러나 본문에는 그런 근거가 없다. 예수님은 진심으로 그에게 계명들을 행하도록 언급하신 것이고 그가 다 지켰다고 할 때에 그를 사랑하신 것이다. 계명을 행하라는 것과 계명을 행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 전체의 진리이다. 특별히 구약 전체와 신명기 전체는 ‘율법을 행하면 산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사실 하나님의 법을 다 행하면 산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을 지켰다면 영생을 얻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백퍼센트 완벽하게 지키면 영생을 얻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구약의 율법, 율법의 핵심으로서의 십계명은 이미 애굽에서 구출되어 나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삶의 법으로 주신 것이지만, 가정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데 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이미 인간들은 출발선에서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인들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죄와 사망 안에 갇히게 된 것이다(롬5:12 이하).
부자 청년 관원이 ‘다 지키였나이다’고 할 때에 예수님은 지킨 것을 귀하게 보고 사랑하시면서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하셨다. 그것은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10: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킨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못 지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계명들을 더 완벽하게 지키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계명들을 지킬 때에 그 계명들이 핵심적으로 지향하는 메시아를 따르지 않고서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마5:17)로서 완벽한 구원자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서는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저 ‘나를 따르라’고 하시지, 왜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고 하셨는가? 예수님께서 모든 부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지 못했을 것이다(눅 8:3).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 관원에게 ‘다 팔아 …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그의 경우에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재물이 결정적인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한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10:22). 천국은 어린아이처럼 절대의존자의 것인데, 그 청년의 경우 메시아에 대한 절대 의존을 재물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메시아냐, 재물이냐고 할 때에 그는 재물을 선택한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원과의 대화에 이어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10:25). 제자들은 이런 교훈에 심하게 놀랐다(10:26). 그것은 재물과 구원에 대한 제자들의 통념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제자들은 ‘그런즉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했다.
부자만이 아니라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다(10:27). 이것은 구원은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는 것이라는 교훈이다.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영역에 속한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겸허한 절대의존 뿐이다. 그 청년은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에 대한 절대의존 (cocal trust)을 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고 했다(10:28). 이것은 ‘저 청년은 재물을 못 버리고 주님을 따르지 못했지만 우리는 대조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 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10:30).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절대의존적으로 따른 자는 내세에 반드시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어린아이처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금세에 …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가장 쉬운 반문을 해 보자. 베드로와 제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았는가?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받은 것은 고난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대답이 된다. 예수님을 절대 의존하는 자들이 금세에 받는 하나님 나라는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의 백배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 포괄한다(3:31~35).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제자들이 받은 하나님 나라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얼마나 많은 재산(우주)을 포괄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하는 베드로의 말에 이런 식으로 긍정적으로 응수하시면서 동시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부정적으로 응수하셨다(10:31). 이것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누구보다 더 많이 받을 것이다’는 베드로의 자기 공로, 교만, 타인 정죄, 복 독점 등의 사고방식을 물리치시는 말씀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위치 전복(먼저가 나중, 나중이 먼저)의 말씀이 포도원 품꾼 비유를 중심으로 샌드위치구조로 나타나 있다(마19:30; 20:16). 예수님의 말씀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들이 서로 ‘내가 먼저’라고 하는 의식을 갖기 쉬운 데(사실 야고보와 요한의 청이 바로 그런 경우) 누가 먼저냐 하는 것은 인간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문제이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는 동기와 언어와 행위 등 인간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총체적으로 완벽하게 보시기 때문에 인간의 판단에 따른 먼저와 나중이 많이 뒤바뀐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들은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 게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위치전복의 말씀은 제자의 교만을 잘라내는 수술도이다.
4. 천국의 지위(10:32-4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을 ‘리드(read)’하셨다. 그 길은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을 내다보시는 길이었다(10:33~34). 예수님은 고난과 모독과 죽음의 길을 ‘리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의 길에 마지못해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적극적으로 ‘리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제자들이 ‘놀라고’ 추종자들이 ‘두려워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적극적으로 앞서서 올라가셨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셔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10:45) 위한 사명자의 길을 앞서 가신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 길은 어둡기만 한 길이 아니었다. 그 길은 배신과 능욕과 침뱉음과 채찍질과 죽음이 기다리는 길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동시에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말씀대로 부활이 기다리는 길이었다.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구출하는 구원의 길이었다.
예수님은 죽으러 앞서 가시는데 제자들은 한 자리 하러 따라갔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신 후 왕의 영광을 받게 되면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요청을 했다(10:37). 마태복음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청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마20:20) 어머니를 통해서 청한 것도 그들이 청한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의 높아지려는 소원은 그들의 소원만은 아니었다. 다른 제자들이 그들에게 분노한 것을 보면 다른 제자들도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10:41). 그들은 이미 ‘누가 크냐’하는 다툼을 벌였던 자들이다(9:36).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청을 받으시고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말씀을 하셨다(10:38). 그들이 잘못 구한 것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예수님이 마음대로 주실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10:40). 그것은 성부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로 주실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잘못 구한 것은 또한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영광에 이르려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잔과 세례’를 언급하신 것은 다 많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마시게 될 심판의 잔과 세례를 말씀하신 것이다(눅12:50). ‘잔과 세례’는 죄에 대한 심판의 고난(죽음 포함)을 다른 각도에서 표현한 것이다. ‘잔’은 섞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처럼 죄에 대한 심판의 고난을 그대로 다 받는다는 상징이다. ‘세례’는 재난이나 위험에 압도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심판의 고난을 그대로 다 당하신다는 상징이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낮아지심으로써 더 할 나위 없이 높은 곳으로 높아지시는 길을 가셨다(빌2:5~11). 영광에 이르는 길은 고난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것도 모르고 예수님의 잔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야고보와 요한은 후에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고난과 죽음의 잔을 마시고 고난과 죽음의 세례(과격한 죽음이 마치 물 속에 잠기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받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단계에서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점을 다 이해하시고 그들의 수준에서 응수해 주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대답을 수용하신 것이지, 그들의 의미를 수용하신 것이 아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왕궁과 보좌였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잔과 세례였다. 제자들의 관심은 영광이었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고난이었다. 예수님은 크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크게 되는 비결을 말씀하셨다. 천국에서 높아지는 길은 이 세상 집권자들의 길과 정반대의 길이다. 이 세상 집권자들은 마음대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길을 가지만, 천국에서 높아지는 길은 오히려 낮아지는 길이다. 천국에서는 섬기는 자가 크게 되고 종이 으뜸이 된다(10:42-44). 이것은 당시 집권자들의 통념과 제자들의 고정관념에 철퇴를 가하는 교훈이었다. 세도(勢道)의 밭을 갈아엎고 거기에 섬김의 활주로를 여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 자신을 섬김의 모델로 제시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힘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대속물은 노예나 포로나 죄수를 석방할 때 지불하는 돈, 속전(ransom)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고 우리를 석방하신 것이다(눅1:68, 2:38, 2:14, 히9:12, 벧전1:18).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신을 이사야 53장의 여호와의 고난당하는 종으로 보시고 하신 말씀이다(사53:46).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다고 할 때에 그냥 해 본 소리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빌2:8)이실 뿐 아니라 죽기까지 사람들을 섬기신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높은 자리를 탐하는 자들이다. 주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가장 교묘하게, 안 그런 척하면서 자기 자신의 철웅성을 매일 단단하게 다지고 있다.
이런 우리가 항상 목숨을 버려 섬기신 주님의 모델을 본받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 오셨다는 이 말씀은 마치 목표물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미사일처럼 우리의 교만과 야망의 철옹성을 여지없이 폭파시키는 것 같다. 이 말씀이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하신 주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 속에 항상 메아리 친다면 우리는 얼마나 복된 제자들이 되겠는가. 제자도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모험하고, 자기를 주는 낮은 자리의 봉사를 의미한다.
5. 소경의 개안(10:46-52)
예수님 일행과 허다한 무리가 여리고에서 나갈 때에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를 질렀다(10:46-47). 많은 사람들은 그 소경을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다. 여인에 대한 편견, 유아에 대한 편견, 부자에 대한 편견, 높은 자리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이제는 소경 거지에 대한 편견을 드러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소경 거지는 무시해도 좋을 천덕꾸러기로 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경 거지를 홀대했으나 예수님은 후대하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자비로운 메시아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멈춰 서서 ‘저를 부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고 소경은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고 소경은 곧 보게 되어 길에서 예수님을 따라갔다(10:49~52).
예수님께서 보기를 원하는 소경에게 ‘그래. 네 소원대로 보라’고 하시면 될 것인데 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을까? 예수님은 소경의 믿음을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에게 드러내 지적하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놀라운 것은 10장 전체의 내용에서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언급하시지 않았고, 유아들을 금지하는 제자들과 영생에의 뜨거운 열정을 가진 구도자 청년과 천국의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믿음을 언급하시지 않았는데 소경 거지의 경우에만 그의 믿음을 언급하셨다는 점이다. 이 점 역시 제자들과 무리에게 충격적인 교훈이 아닐 수 없었고 오늘 우리에게도 충격적인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믿음을 가장 기대하기 어려운 소경 거지에게서 발견된 믿음을 예수님께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시고 칭찬하신 것이다. 이것도 10장 전체의 말씀과 사건과 맥을 같이 하여 당시인들의 통념을 깨는 점이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언급하신 소경 거지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이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었다. 소경이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 것은 돈 몇 푼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력을 회복시켜 달라는 외침이었다.
그가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밝히 알았는가 하는 것을 본문에서 확인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확신이 소리지르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분명하다. 소경의 믿음은 해결자에 대한 확신이었다.
소경의 믿음은 많은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하여도 더욱 심히 소리질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집요한 간청에도 나타나 있다. 소경에게는 문제 해결자를 발견한 이상 어떤 반대와 질책과 방해가 있어도 기어이 그분을 만나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있었다. 누가복음 18장의 과부처럼. 소경의 믿음은 해결자를 기어이 만나려는 집념이었다.
소경의 믿음은 또한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하는 선명하고 확실한 소원으로 드러났다. 해결자를 만났어도 ‘무엇을 해결해 줄까’라고 할 때 우물쭈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해결자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실 때 즉시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할 정도로 정리된 소원이 표현된 것이다. 자나깨나 보기를 원하는 마음이 소경을 지배하고 있었다. 소경의 믿음은 해결자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는 ‘한 맺힌 갈망’이었다. 예수님은 해결자에 대한 확신과 집념과 갈망의 믿음, 소경의 그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소경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통념을 깨뜨리시고 진리를 인각시키는 교육을 하셨다. 죄로 인해 비뚤어진 생각, 죄악된 편견이 한 시대와 한 민족을 압도하는 통념으로 똘똘 뭉쳐 있을 때 그것은 강하게 깨뜨려져야 한다. 그래야만 사고의 전환(paradigm shit)이 가능하다. 편견의 패러다임이 진리의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데는 충격적인 격파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충격적인 격파의 방식을 통해서 천국의 진리를 새겨주셨다. ‘한 몸’의 진리, 천국은 어린아이들 같은 자들의 것이라는 진리, 재물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진리, 구원은 하나님 단독사역이라는 진리. 섬기는 것이 높아지는 길이라는 진리, 믿음으로 문제 해결을 본다는 진리를 새겨주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