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일 : 일요일 ― 1997년 10월 12일
새벽 6시에 모닝콜을 부탁해 두었지만, 창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닭 울음소리에 먼저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아직 5시 반. 꼭 우리나라 시골 어느 마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였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기대감과 가벼운 긴장감이 교차했다.
짐을 정리해 호텔 문 앞에 내어놓고 아침 식사를 마쳤다. 밖에는 뿌연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호텔 짐꾼들은 빗속에서 어제의 그 낡은 지프차 지붕 위에 짐들을 묶느라 분주했다.
아침 8시경,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호텔을 출발해 빗속을 달려 마챠메(Machame)로 향했다.
킬리만자로에는 다섯 개의 주요 등반 루트가 있다. 마랑구(Marangu), 쉬라(Shira), 므웨카(Mweka), 움브웨(Umbwe), 그리고 마챠메(Machame) 루트다. 그중에서도 마챠메는 하루가 더 걸리고 길도 험한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마챠메 루트를 택했다. 사람들이 덜 찾는 난코스를 오르며 더 큰 성취감을 맛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차는 마챠메 표지판에서 우회전해 한참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빗방울이 차창을 타고 흘러내리고, 길 양편의 바나나 농장은 뿌연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숲 사이로 드문드문 나타나는 촌락들을 지나며 차는 점점 구름에 덮인 킬리만자로를 향해 다가갔다.
어느 순간 아스팔트 포장이 끝나고, 차는 울퉁불퉁한 황토 진흙길을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마챠메는 넓은 공터가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차는 우리가 산에서 먹을 고기와 달걀, 채소 등을 사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게이트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길 사정은 점점 더 나빠졌다. 바퀴는 진흙탕에 빠지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낡은 사륜구동 지프는 용케 빠져나왔지만, 결국 한 굽은 오르막길에서 완전히 멈춰 섰다. 바퀴는 진흙 속에서 헛돌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이 달려와 차를 밀고, 나뭇가지를 길바닥에 깔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소용없었다. 노련한 흑인 운전사도 마침내 포기한 듯 차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다행히 게이트까지는 차로 10여 분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는 질퍽한 진흙길을 걸어 30분쯤 오른 끝에 마침내 입산 게이트에 도착했다.
해발 900미터의 모쉬(Moshi)에서 해발 1,500미터의 이곳까지는 차로 올라온 셈이었다.
게이트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포터들이 모여 각자 짐을 꾸리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내 전속 가이드인 오토(Otto)를 처음 만났다.
그는 킬리만자로 정상에 150회 이상 오른 53세의 베테랑 가이드였다. 영어는 서툴렀고 특히 숫자 표현이 약해 자주 나를 헷갈리게 했지만,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막내아들을 포함해 세 명의 포터를 데리고 왔다.
오토는 입산 허가 등 여러 행정 절차를 처리했고, 나는 입산자 명부에 이름과 주소를 적고 사인했다. 그곳에는 이미 이 산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출발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일이 느릿느릿 진행되었다. 이곳에 우리식 “빨리빨리”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여기는 아프리카였고, 이미 ‘아프리칸 타임(African Time)’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느긋하게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포터들이 짐을 나르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잡담을 나누기도 하며 출발을 기다렸다.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고 안개도 점차 걷히고 있었다. 포터들이 짐의 무게를 하나하나 저울에 달고 있었다. 한 사람당 30킬로그램 이상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도착한 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출발할 수 있었다.
포터들은 먼저 제1 숙영지를 향해 떠났고, 오토와 나는 숲속으로 난 넓은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완만한 길은 점차 좁은 오솔길로 변하더니, 곧 울창한 열대우림 지대로 이어졌다.
아름드리 거목들과 양치식물, 이름 모를 열대 수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밀림 속으로 길은 굽이굽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무마다 연둣빛 이끼가 실타래처럼 매달려 있었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가 밀림의 적막을 깨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은 진창으로 변했다. 발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특히 가파른 오르막에서는 미끄러지지 않으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해야 했다.
가파른 진흙길을 오르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왜 이런 힘든 길을 오르고 있는가.’
그러나 이 길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피할 수 없는 나의 길이었다.
그때 뒤에서 오토가 외쳤다.
“폴리! 폴리!”
처음엔 우리말 “빨리! 빨리!”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뜻이었다. 탄자니아 말로 “천천히! 천천히!”라는 의미였다.
훗날 깨닫게 되었지만, 이 말은 킬리만자로 등반 내내 가장 중요한 주문과도 같았다. 그리고 늘 조급한 우리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오후 3시경, 드디어 햇빛이 비쳐 들었다. 침침한 밀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조각들이 눈부셨다. 출발한 지 네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열대우림 지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길가에는 어여쁜 풀꽃들이 피어 있었고, 나는 사진을 찍어가며 쉬엄쉬엄, “폴리 폴리” 산을 올랐다.
오후 4시 30분쯤, 밀림이 마치 칼로 자른 듯 갑자기 걷히더니 언덕 위로 낡은 오두막 몇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우리가 머물 제1 숙영지, 마챠메 헛(Machame Hut)이었다.
가느다란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토록 애써 올라왔건만, 저 멀리 킬리만자로의 정상 키보(Kibo) 산은 여전히 짙은 구름에 가려 그 눈 덮인 위용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킬리만자로’라 부르는 산은 사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키보 산(Mt. Kibo)과 마웬지 산(Mt. Mawenzi, 5,149m), 그리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쉬라 산(Shira)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화산군이다.
맞은편 메루(Meru) 산 일대에 사는 마사이(Maasai) 족은 눈 덮인 키보 산을 “응가헤 응가이(Ngaje Ngai)”라 불렀다. ‘신의 집(The House of God)’이라는 뜻이다. 적도의 열대 지방에서 눈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산이었기에 그들에게는 신성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번 나의 목표는 키보 산 정상부에 자리한 해발 5,896미터의 우후루(Uhuru) 봉에 오르는 일이었다. 본래 독일인의 이름이 붙어 있었으나, 탄자니아 독립 이후 ‘자유’를 뜻하는 스와힐리어 “우후루”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캠프에 먼저 도착한 포터들은 이미 텐트를 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오토가 뜨거운 탄자니아 차와 비스킷, 팝콘을 가져다주었다. 해발 3,000미터. 어느새 우리는 백두산 높이를 넘어선 곳에서 평온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늘 산행은 습한 열대우림 지대를 통과하는 길이었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음습하거나 독충이 들끓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름 모를 야생화와 열대 식물들을 관찰하며 즐겁게 올라올 수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더 많은 등반객들이 숙영지에 도착했다. 다른 호텔에서 출발한 팀들이었다. 산에서의 만남은 인종과 국적을 초월해 언제나 반갑다.
우리는 서로 이름을 묻고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 세계 곳곳에서 모험과 낭만, 새로운 체험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별난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낮 동안에는 반팔 티셔츠만으로도 충분했지만, 해가 지자 기온은 급격히 떨어졌다. 긴팔 셔츠와 윈드재킷을 꺼내 입어야 했다.
저녁 식사로는 쇠고기 스테이크가 나왔다. 다소 질기긴 했지만, 산중 음식으로는 제법 호사스러운 메뉴였다.
식사를 하던 중 누군가 밖에서 외쳤다.
“키보 산이 보인다!”
급히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뛰쳐나가 보았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흰 봉우리가 드러나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텐트로 돌아와 남은 식사를 마저 하려 했지만 이미 밥맛은 달아나 있었다. 음식을 남기자 오토는 연신 “폴리 폴리, 더 먹어야 한다”고 성화를 부렸다.
잠시 후 텐트 밖으로 다시 나왔다.
반달을 조금 지난 상현달이 밤하늘에 걸려 있었다. 우리가 우후루 봉을 오르는 날이면 저 달도 보름이 되어 있으리라.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서 보이는 달의 모양이 우리나라와 정반대라는 사실이었다. 이곳의 상현달은 우리 눈에는 마치 하현달처럼 보였다.
주변은 달빛으로 휘영청 밝았다.
그리고 마침내, 저 높은 곳 키보의 눈 덮인 영봉이 달빛 아래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냈다.
오늘 지나온 열대우림 지대는 저 아래 어둠 속에서 엷은 안개에 잠긴 채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달빛 어린 킬리만자로의 첫날 밤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내일의 산행을 위해서는 잠을 자두어야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기온은 더욱 떨어졌다. 두툼한 방한복을 껴입고 슬리핑백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채 잠을 청했다.
잠자리는 불편했다.
내일 아침 식사는 7시.
그러나 그것조차 오토는 웃으며 말했다.
“폴리 폴리.”
첫댓글 “폴리 폴리.” 맞습니다.
'빨리빨리'와 대비되네요. I can do it. 너무 빨리 달려왔네요. 요즈음 세상만사가 . . .그것도 과유불급인가?
후속편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