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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객잔》
제13화 ― 봉인의 숲으로
새벽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천하제일 객잔의 문 앞에는 떠날 준비를 마친 일행이 모여 있었다.
연우는 등에 음식과 약초가 담긴 보따리를 멨다.
설화는 붉은 비단옷 위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허리춤의 검을 확인했다.
백노인은 술병을 세 개나 챙겼다가 청아에게 두 개를 빼앗겼다.
풍백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토끼 귀를 감추기 위해 커다란 삿갓을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청아의 등에는 몸보다 큰 보따리가 매달려 있었다.
묘묘는 평소처럼 검은 고양이 모습으로 연우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연우가 객잔 문을 닫으며 말했다.
“불은 껐고.”
“창문도 잠갔고.”
“빙하어 상자에도 부적을 붙였고.”
설화가 팔짱을 꼈다.
“지금 봉인의 숲으로 가는 길입니다.”
“객잔 점검은 그만하시죠.”
연우가 문고리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래도 집을 비우는데 확인은 해야죠.”
청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토끼과자도 잘 숨겨 놨어요!”
풍백이 삿갓 아래에서 말했다.
“그건 태워 버렸어야 한다.”
청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워요.”
백노인이 풍백의 삿갓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하얀 토끼 귀 하나가 삐죽 튀어나왔다.
“아직도 잘 어울리는구나.”
풍백이 황급히 삿갓을 눌렀다.
“이 노인이 새벽부터 싸움을 거는군.”
“객잔 밖에서는 싸워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백노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연우가 두 사람 사이를 막았다.
“싸우지 마세요.”
“돌아오면 제가 맛있는 안주를 만들어 드릴게요.”
백노인의 표정이 곧바로 풀렸다.
“그럼 참아야지.”
설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들은 지금 천 년 된 재앙이 잠든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객잔 앞의 분위기는 평소 아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설화에게는 조금 위안이 되었다.
봉인의 숲으로 가는 길은 객잔 뒤편의 좁은 산길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길이었다.
축축한 흙.
새벽이슬을 머금은 풀잎.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
그러나 산을 오를수록 주변의 기운이 달라졌다.
새소리가 사라졌다.
바람도 멎었다.
숲은 살아 있으면서도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풍백이 걸음을 멈추고 허공의 냄새를 맡았다.
“이상하군.”
설화가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우리가 계속 앞으로 가고 있는데 기운은 오히려 객잔 쪽으로 흐르고 있어.”
청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길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든 거예요?”
묘묘가 연우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검은 고양이는 앞쪽 땅을 살피더니 낮게 울었다.
“야옹.”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묘묘가 길은 맞다고 하네요.”
설화가 묘묘를 바라보았다.
“고양이 말을 알아듣는 기준이 대체 뭡니까?”
“오래 지내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묘묘는 연우를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설화가 말했다.
“방금 표정은 동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연우는 못 들은 척 앞장섰다.
잠시 뒤,
일행은 숲의 입구를 알리는 거대한 돌기둥 앞에 도착했다.
돌기둥은 반쯤 부서져 있었고,
표면에는 오래된 검흔과 요계의 문자가 뒤섞여 새겨져 있었다.
두 기둥 사이에는 붉은 안개가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연우가 가까이 다가가자 품속의 천(天) 나무패가 진동했다.
우우웅.
청아가 목에 건 황금 방울도 동시에 울렸다.
딸랑.
묘묘의 눈빛이 굳었다.
“여기서부터는 절대로 혼자 움직이면 안 됩니다.”
백노인이 물었다.
“무엇이 나오지?”
“봉인의 숲은 들어오는 자의 기억을 읽습니다.”
“기억을 읽는다고?”
풍백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묘묘가 붉은 안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장 그리운 순간.”
“가장 후회하는 순간.”
“그리고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청아가 연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럼 저는 아버지한테 혼난 기억이 나와요?”
“아마도.”
“화염과를 몰래 열 개 먹은 날도요?”
“그건 혼날 만했군.”
백노인이 중얼거렸다.
청아는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아홉 개밖에 안 먹었어요.”
설화가 조용히 물었다.
“환영인 것을 알아차리면 벗어날 수 있습니까?”
묘묘가 고개를 저었다.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억 속에서 스스로 걸어 나와야 합니다.”
연우가 붉은 장막을 바라보았다.
“결국 각자가 이겨 내야 한다는 뜻이군.”
그는 뒤를 돌아 일행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그 자리에서 기다립시다.”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를 함부로 따라가지 마세요.”
백노인이 웃었다.
“제법 주인다운 말을 하는군.”
연우가 피식 웃었다.
“저는 원래 주인입니다.”
그가 붉은 안개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설화와 묘묘가 곧바로 뒤를 따랐다.
백노인, 풍백, 청아도 차례로 장막을 통과했다.
순간,
세상이 붉은빛으로 뒤덮였다.
연우가 눈을 떴을 때,
그는 혼자였다.
주변은 더 이상 숲이 아니었다.
달빛이 비치는 넓은 호수.
호숫가에는 작은 초가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평상에 앉아 있었다.
월령이었다.
그녀는 연우를 보자 환하게 웃었다.
“왜 이제 오셨어요?”
연우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그 목소리는 꿈속에서 수없이 들었던 목소리였다.
그리웠으나 누구인지 몰랐던 사람.
월령은 손에 들고 있던 빗을 내밀었다.
“머리를 빗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연우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평상 위에는 따뜻한 국수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
국수에서는 김이 피어올랐고,
국물 위에는 달빛을 닮은 하얀 꽃잎이 떠 있었다.
월령이 말했다.
“오늘만큼은 아무 데도 가지 말아요.”
“검도 들지 말고.”
“세상도 구하지 말고.”
“그냥 저와 함께 있어요.”
연우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무 평온했다.
객잔도, 흑월도, 봉인도 없었다.
자신을 천검성군이라 부르는 사람도 없었다.
월령은 국수 한 그릇을 연우 앞으로 밀었다.
“직접 만들었어요.”
연우가 젓가락을 들었다.
그 순간,
묘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스쳤다.
가장 그리운 순간을 보여 줍니다.
연우의 손이 멈췄다.
월령이 웃으며 물었다.
“왜 안 드세요?”
“당신이 정말 월령입니까?”
월령의 미소가 아주 잠깐 굳었다.
그러나 곧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제가 누구겠어요?”
연우는 국수 그릇을 바라보았다.
국물 위에 떠 있던 하얀 꽃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평온했던 호수 건너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초가집의 벽에도 가느다란 금이 생겼다.
연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월령의 눈빛이 슬퍼졌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억하면 돼요.”
“저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돌아올 거예요.”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건 제가 찾은 기억이 아닙니다.”
“누군가 보여 주는 기억이죠.”
월령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저를 두고 또 가시려고요?”
연우의 가슴이 아팠다.
그 말은 너무나 진짜처럼 들렸다.
그녀의 눈물도,
떨리는 목소리도,
자신을 붙잡는 손도 모두 생생했다.
월령이 연우의 소매를 잡았다.
“천 년이나 기다렸어요.”
“이번에도 저보다 세상을 선택할 건가요?”
연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호수가 갈라졌다.
평화롭던 풍경이 산산이 부서졌다.
붉은 하늘 아래,
천검성군이 월령을 품에 안고 있었다.
월령의 몸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천검성군은 피투성이가 된 채 절규했다.
그 앞에는 검은 돌문 하나가 서 있었다.
돌문에는 수백 개의 봉인이 붙어 있었다.
문 위에는 단 하나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죽은 자를 되돌리려 하지 마라.
천검성군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들었다.
그의 뒤에는 백노인의 젊은 모습과 인간으로 변한 묘묘가 서 있었다.
젊은 백노인이 외쳤다.
“문을 열면 안 된다!”
묘묘도 천검성군의 팔을 붙잡았다.
“월령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이 문 너머의 것은 생명을 돌려주는 힘이 아닙니다!”
천검성군은 월령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눈처럼 창백했다.
그가 낮게 말했다.
“단 한 번만.”
“다시 숨을 쉬게 할 수 있다면.”
젊은 백노인이 검을 뽑았다.
“그 대가로 천하가 무너져도 말이냐?”
천검성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그는 검을 들어 돌문을 가로막은 봉인을 베었다.
쾅!
첫 번째 사슬이 끊어졌다.
대지가 흔들렸다.
묘묘가 절규했다.
“주인님!”
두 번째 사슬이 끊어졌다.
검은 기운이 문틈에서 흘러나왔다.
세 번째 사슬이 끊어지는 순간,
돌문 안쪽에서 수천 개의 눈이 동시에 떠졌다.
무명겁이었다.
연우는 자신의 전생이 저지른 일을 눈앞에서 바라보았다.
흑월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천검성군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한 사람을 되살리기 위해 금지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재앙을 불러왔다.
환영 속 천검성군이 마지막 봉인을 베려 했다.
연우가 그에게 달려갔다.
“멈춰!”
그러나 손은 그의 몸을 통과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었다.
천검성군의 검이 내려왔다.
마지막 봉인이 끊어졌다.
검은 돌문이 활짝 열렸다.
세상이 어둠에 삼켜졌다.
설화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낯선 궁전 안에 서 있었다.
기둥마다 달과 봉황이 새겨져 있었고,
천장에는 수천 개의 별이 흐르고 있었다.
궁전 중앙에는 월령이 서 있었다.
그러나 연우가 본 월령보다 훨씬 젊고 밝은 모습이었다.
월령의 맞은편에는 어린 소녀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소녀는 검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설화와 닮은 얼굴이었다.
월령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려워하지 마.”
소녀가 울먹이며 물었다.
“정말 제 안에 들어오실 건가요?”
월령은 부드럽게 웃었다.
“전부는 아니야.”
“내 영혼의 아주 작은 조각만 네 혈통 속에 맡길 거야.”
“언젠가 봉인이 약해지면 그 아이가 열쇠가 되어 줄 거야.”
소녀는 월령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되나요?”
월령의 미소가 사라졌다.
“선택해야겠지.”
“나를 구할지.”
“자신의 삶을 지킬지.”
설화의 얼굴이 굳었다.
궁전의 풍경이 바뀌었다.
수백 년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월령의 영혼 조각은 마교의 혈통을 따라 이어졌다.
어머니에게서 딸로.
다시 그 딸에게로.
그리고 마침내 갓 태어난 설화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아기 설화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붉은 보석 목걸이가 환하게 빛났다.
마교의 장로들이 아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녀가 태어났다.”
“월령의 그릇이 돌아왔다.”
설화는 숨을 삼켰다.
그녀가 성녀로 선택된 것은 뛰어난 무공 때문도,
마교의 신탁 때문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월령의 영혼 조각을 품고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장면이 다시 변했다.
어린 설화가 차가운 석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마교의 장로들이 그녀에게 말했다.
“감정을 버려라.”
“사랑은 그릇을 약하게 만든다.”
“너의 몸은 언젠가 위대한 존재가 돌아올 때 사용될 것이다.”
어린 설화가 물었다.
“그럼 저는 누구인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설화는 환영 속의 어린 자신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성격.
누구도 믿지 않는 마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습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만은 아니었다.
그녀를 빈 그릇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 가르친 결과였다.
월령이 설화의 뒤에 나타났다.
“미안해.”
설화가 돌아보았다.
월령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 때문에 네가 이런 삶을 살았구나.”
설화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당신은 저입니까?”
월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제가 당신입니까?”
“아니야.”
“그런데 왜 제 몸을 열쇠로 만들었죠?”
월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설화가 검을 뽑았다.
“저는 누구의 그릇도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궁전 전체에 울렸다.
“저는 마교의 성녀이기 전에 설화입니다.”
검끝이 환영 속 월령을 향했다.
“당신을 구하기 위해 제가 사라져야 한다면.”
“저는 당신을 구하지 않겠습니다.”
월령의 얼굴에 슬픔과 안도가 동시에 떠올랐다.
“그래.”
“그 말을 듣고 싶었어.”
설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월령은 한 걸음 다가와 설화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누구의 선택도 따르지 마.”
“천휘의 것도.”
“천검성군의 것도.”
“내 선택조차도.”
“네 삶은 네 것이니까.”
눈부신 은빛이 터져 나왔다.
궁전과 월령이 빛 속으로 사라졌다.
백노인은 젊은 시절의 자신과 마주하고 있었다.
풍백은 수백 개의 서로 다른 미래 속에서 길을 잃었다.
청아는 불타는 요계의 궁전과 피를 흘리는 아버지를 보았다.
묘묘는 천검성군이 죽던 날로 돌아갔다.
모두 각자의 기억과 두려움 속에 갇혀 있었다.
숲속의 시간은 뒤틀려 있었다.
한순간이 하루처럼 길었고,
수십 년의 기억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가장 먼저 환영에서 깨어난 것은 묘묘였다.
검은 고양이는 붉은 안개 속에서 눈을 떴다.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님!”
묘묘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안개 속을 달리며 연우의 기운을 찾았다.
하지만 숲은 길을 계속 바꾸었다.
앞으로 달리면 같은 나무가 다시 나타났고,
뒤로 돌아가면 처음 보았던 돌기둥이 앞을 막았다.
묘묘가 손톱을 세웠다.
“천 년 전에도 지긋지긋하더니.”
그가 허공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황금빛 발톱 자국이 붉은 안개를 찢었다.
그 틈 너머로 무릎을 꿇고 있는 연우의 모습이 보였다.
연우 앞에는 금지된 돌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검은 기운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주인님!”
묘묘가 찢어진 공간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러나 강한 힘이 그를 튕겨 냈다.
그때,
붉은 안개 속에서 흑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그냥 두어라.”
묘묘가 주위를 노려보았다.
“모습을 드러내라.”
“아직은 때가 아니다.”
흑월의 웃음소리가 숲 전체에서 울렸다.
“그는 이제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보았다.”
“과연 그 진실을 견딜 수 있을까?”
묘묘가 이를 악물었다.
“주인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
“강하지.”
흑월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서 더 위험한 것이다.”
붉은 안개가 흔들렸다.
“천 년 전에도 그는 누구보다 강했다.”
“그래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지.”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묘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 가능성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연우는 검은 돌문 앞에 홀로 서 있었다.
환영 속 천검성군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문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무명겁과,
자신을 바라보는 수천 개의 눈동자뿐이었다.
무명겁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회하느냐?”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려 한 것이 죄인가?”
검은 손들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세상을 지킬 것인가?”
“그 여인을 살릴 것인가?”
연우의 머릿속에 월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가슴이 아픈 사람.
천 년을 기다렸다는 사람.
자신 때문에 봉인된 사람.
연우가 낮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무명겁이 웃었다.
“정직하군.”
“하지만 선택의 순간은 곧 온다.”
검은 손이 연우의 가슴을 향해 뻗었다.
“그때도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연우가 손목을 붙잡았다.
맨손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희미한 검광이 피어올랐다.
“천 년 전의 제가 무슨 선택을 했는지는 보았습니다.”
“그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검광이 강해졌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검은 손이 갈라졌다.
연우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같은 영혼을 가졌다고 해서 같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손을 휘둘렀다.
한 줄기 검광이 검은 돌문과 환영을 동시에 베었다.
콰아앙!
세상이 갈라졌다.
연우가 눈을 떴다.
그는 다시 봉인의 숲 한가운데 서 있었다.
붉은 안개가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묘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묘묘.”
묘묘가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그는 연우의 팔과 얼굴을 빠르게 살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괜찮아.”
“무엇을 보셨습니까?”
연우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했다.
“천검성군이 금지된 문을 여는 장면을 봤어.”
묘묘의 표정이 굳었다.
연우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일이 사실이지?”
묘묘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월령을 살리기 위해서였고?”
“예.”
연우는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설화가 안개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얼굴 역시 창백했다.
연우가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설화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붉은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저는 월령의 그릇이 아닙니다.”
연우가 조용히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설화가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당신은 설화입니다.”
연우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설화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목걸이에서 손을 놓았다.
“저도 기억을 보았습니다.”
“월령이 제게 자신의 선택조차 따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묘묘가 놀란 얼굴로 설화를 바라보았다.
“월령님이 직접 나타났다고요?”
“환영이었는지 진짜 의식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설화는 숲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 말은 제 마음과 같았습니다.”
잠시 뒤,
백노인이 붉은 안개를 뚫고 나타났다.
옷자락은 찢어져 있었지만 손에 든 술병은 멀쩡했다.
연우가 물었다.
“괜찮으세요?”
백노인은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이것도 멀쩡하고 나도 멀쩡하다.”
묘묘가 말했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백노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지키지 못한 사람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곧이어 청아가 울면서 달려왔다.
“주인님!”
청아는 연우의 허리에 매달렸다.
“아버지가 다쳤어요!”
연우가 청아를 안아 들었다.
“환영이야.”
“정말요?”
“그래. 네 아버지는 요계에 잘 계실 거야.”
청아는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풍백이 나타났다.
그는 삿갓을 잃어버린 채였다.
하얀 토끼 귀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풍백의 얼굴에서 평소의 장난기는 사라져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수없이 많은 미래를 본 사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백노인이 어깨를 붙잡았다.
“무엇을 봤느냐?”
풍백이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너무 많이 보았네.”
“연우가 죽는 미래.”
“설화가 사라지는 미래.”
“청아의 아버지가 요계를 불태우는 미래.”
“묘묘가 다시 천 년을 혼자 기다리는 미래.”
묘묘의 얼굴이 굳었다.
풍백은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살아남는 미래도 하나 보았어.”
연우가 물었다.
“그 길이 어디입니까?”
풍백은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 보지 못했네.”
“누군가 미래를 잘라 냈어.”
붉은 안개 깊은 곳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 듯했다.
흑월이었다.
일행은 다시 숲 깊은 곳으로 향했다.
환영을 통과한 뒤부터 길은 더욱 험해졌다.
나무들의 줄기는 검게 뒤틀려 있었고,
가지마다 붉은 부적과 끊어진 쇠사슬이 매달려 있었다.
바닥에는 오래된 검과 창이 무덤처럼 꽂혀 있었다.
연우가 한 자루의 검을 살펴보았다.
손잡이에는 천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백노인이 말했다.
“천 년 전 이곳에서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지.”
“많은 사람이 천검성군을 막으려 했고.”
“많은 사람이 그와 함께 무명겁을 봉인하려 했다.”
연우가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제가 그들을 죽였습니까?”
백노인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는 무명겁에게 죽었다.”
“일부는 서로 싸우다 죽었고.”
“일부는 네 전생의 검에 죽었다.”
연우의 얼굴이 굳었다.
설화가 말했다.
“지금의 당신이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없었던 일도 아닙니다.”
연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확인하러 온 겁니다.”
묘묘가 연우의 옆을 걸었다.
“모든 죄를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십시오.”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올랐을 무렵,
일행은 거대한 절벽 앞에 도착했다.
절벽 중앙에는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
오른쪽 길은 좁고 가파른 돌계단으로 이어졌다.
길 끝에서는 맑은 은빛이 흘러나왔다.
왼쪽 길은 넓고 평탄했지만,
붉은 안개와 검은 기운이 뒤섞여 있었다.
두 길 사이에는 부서진 비석이 서 있었다.
비석의 글자는 대부분 지워졌지만 마지막 문장만 남아 있었다.
하나는 사랑으로 향하고, 하나는 구원으로 향한다.
청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랑이랑 구원이 다른 길이에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연우는 두 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품속의 천(天) 나무패는 오른쪽 길을 향해 떨렸다.
황금 열쇠는 왼쪽 길을 향해 빛났다.
서로 다른 방향이었다.
설화의 붉은 목걸이도 희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묘묘의 표정이 굳었다.
“세 개의 열쇠가 서로 다른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백노인이 오른쪽 계단을 살폈다.
“은빛 기운은 월령의 것이다.”
설화가 왼쪽 길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는 무명겁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청아가 연우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느 쪽으로 가요?”
연우는 풍백을 바라보았다.
풍백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토끼 귀가 바람도 없는데 가늘게 떨렸다.
눈동자 안에서는 수많은 빛과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풍백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 돼…”
백노인이 그를 붙잡았다.
“무엇이 보이느냐?”
“두 길 모두 피로 끝나.”
“누구의 피지?”
풍백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코에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연우가 다가가 풍백의 어깨를 붙잡았다.
“억지로 보지 마세요.”
풍백이 연우의 팔을 잡았다.
“아니.”
“이번에는 봐야 해.”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두 길을 바라보았다.
오른쪽 길 위로 희미한 환영이 나타났다.
누군가의 몸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연우.
바닥에 떨어진 붉은 목걸이.
피로 물든 은빛 머리카락.
환영은 곧 사라졌다.
왼쪽 길 위에도 다른 미래가 펼쳐졌다.
검은 태양.
무너지는 천하제일 객잔.
불타는 인간계와 요계.
수많은 사람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검은 비를 맞으며 쓰러졌다.
풍백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입가에서도 피가 흘렀다.
연우가 그를 붙잡았다.
“그만하세요!”
풍백은 연우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두 갈래 길을 가리켰다.
“오른쪽 길로 가면…”
그의 시선이 설화와 묘묘, 청아를 차례로 스쳤다.
“한 사람이 죽는다.”
청아가 숨을 삼켰다.
설화가 오른쪽 길을 바라보았다.
“누가 죽습니까?”
풍백은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예언을 막고 있는 듯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왼쪽 길을 가리켰다.
“왼쪽 길로 가면…”
검은 바람이 숲 전체를 흔들었다.
붉은 부적들이 일제히 찢어졌다.
풍백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떨어졌다.
“천하가 죽는다.”
숲속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른쪽에서는 월령의 은빛이 연우를 부르고 있었다.
왼쪽에서는 무명겁의 붉은 안개가 길을 열고 있었다.
한 사람의 목숨.
천하의 운명.
연우는 두 길 앞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오른쪽 길 너머에서 월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
동시에 왼쪽 길에서는 흑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택해라.”
“천 년 전처럼.”
연우의 손이 천(天)의 나무패를 굳게 움켜쥐었다.
다음 화 예고
제14화 ― 한 사람과 천하
한 사람을 희생시키면 천하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설화는 오른쪽 길을 선택하자고 말하고,
묘묘는 연우를 지키기 위해 왼쪽 길을 주장한다.
그때 청아의 황금 방울에서 요계 왕 천휘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린다.
“두 길 모두 흑월이 만든 함정이다.”
하지만 이미 숲의 입구는 닫히고,
일행 중 한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오른쪽 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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