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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님'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일사각오의 순교정신 되새겨야 |
탄신 110주년을 맞는 故 주기철 목사는 경남 창원에서 출생(1897.11.25~1944.4.21)하여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예수교대학교(연희전문학교의 전신)에 진학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여 집사로 웅천읍교회를 섬겼다. 글 / 정영훈 갓피플뉴스 편집장 news@godpeople.com
본문: 요한복음 11 : 16 『듸두모라 하는 도마가 동무에게 말하되 우리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 하더라.』 요한복음 11장 16절은 나사로의 부생(復生)장으로 읽게 되다. 예수님 전도의 시기는 점점 끝나게 되고 십자가는 차차 가까와 오는 때 마침 사랑하는 친구 베다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그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급히 오시어 병고쳐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이틀이나 지체하는 중 나사로는 그만 죽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 형세이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다니를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올라가시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라 위험한 곳에 전진하는 제자들은 위구(危懼)한 생각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에 도마가 동무에게 이르되 우리들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고 부르짖었나니 이는 솔직한 도마가 위험 직전에 일사를 각오하는 말이다. 비판의 사람 도마도 사선(死線)을 넘어선 이상 창검이 족히 두려울 바 없는지라 후일의 도마는 과연 파사와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인도인의 창에 피를 뿌려 순교하므로 인도 교회의 터를 개척하였다. 그래서 7월 1일은 도마의 순교일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도마와 같이 일사 각오가 있어야 한다. 一.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 이제 위험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를 따라가려면 생명을 아끼고는 따라갈 수 없다. 도마의 생각에 금번 행차에는 위기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수난의 최기(最期)는 멀지 않은 장래에 닥쳐올 것을 직감(直感)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한 도마는 「우리도 또한 같이 죽자」고 일사를 각오한 것이다. 『무릇 나에게 오는 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의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저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6-27) 이 천지간 머리 둘 곳 없는 곤궁의 자취, 사람들에게 스러버리우는 고독의 자취를 우리도 밟아야 하고 병자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의 자취, 도처에 핍박하던 곤고의 자취를 우리도 따라 나가야 한다. 망하여가는 예루살렘 성 하에 눈물의 자취 겟세마네 동산의 피땀의 자취! 우리도 일보 이보 눈물과 땀방울의 자취를 걸어야 하고 골고다에 흘리신 피의 자취, 우리도 이 피자취에 엎디어 이 몸을 십자가의 제단에 드려야 한다. 二. 남을 위하여의 일사각오 주님의 이번 베다니 행차는 한 사람 친구 나사로를 위한 모험이오, 마르다와 마리아의 간구에 응하여 수고하시는 것이니 남을 위한 모험이다. 이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의 일행도 남을 위한 수고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가서 함께 죽자』는 도마의 결심은 남을 위한 일사각오다. 三.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 주님 이번 베다니 행차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서의 모험이다. 주님이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벌써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애곡의 베다니었나니 주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인생의 비극을 눈물뿌려 곡하시었다. 기도와 함께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하여 천지도 놀라는 듯 나사로는 부생(復生)하였다. 아! 부활! 할렐루야! 영광일세.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진리의 발명은 모두 희생을 결과 아닌 것이 없다. 아메리카 대륙이 인간의 복지되기까지 콜럼버스 이래 허다한 항해자의 수고가 있었고 전기 등이 우리 앞에 밝아지기까지에는 에디슨 같은 과학자들의 뇌고가 쌓였던 것이다. 함지사지면후생(陷之死地面後生)이요 유사이생(有死而生) 죽음이 있는 뒤에 삶이 있다. 한신(韓信)의 배수진(背水陣)도 일사각오다. 일사각오 한 뒤에 승리가 있고 발명이 있고 살 길이 있다. 하물며 천래의 진리 부활의 진리리오, 내세를 부인하는 공산당 무리도 그 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늘 영생을 믿고 부활을 소망하는 신자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본문: 마태복음5:11~12 로마서8:18,31~39 나는 저들의 손에 몇 번째 체포되어 이번에는 오래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가 이 산정재 강단(講壇)에 다시 서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오며 나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리시던 교우 여러분 앞에서 다시 설교하려 하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설교가 아니고 가치운 중에서 늘 기도하던 다섯 가지 제목 곧 「오 종목 나의 기원」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죽엄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人生)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 의(義)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일약 수사도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니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 하와 범죄 후에 사람은 다 죽습니다. 제왕 장상 재자 가인도 다 죽었고 성현 군자 위인 걸사도 다 북망산에 갔습니다. 죄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가치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어 죽는 죽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열 백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 되어도 주님 계명을 지키게 하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 모르는 채 하오리까! 다못 일사각오(一死覺悟)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 권세를 내 발 아래에 밟게 하시옵소서. 「죽음아 네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 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 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을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내 주님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의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요한은 삼십삼세, 스데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이다. 2. 장기(長期)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을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 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일년 십년 계속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준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마디만 타협하면 살려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못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고 신신 부탁하였습니다. 주님도 십자가에 직면하사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질 때 그 아픔 어떠하였으리오! 나와 여러분의 죄, 억만 죄인의 죄짐을 대신 지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 중대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소리를 우주도 감당하지 못하여 태양이 빛을 잃고 그 고통의 피방울 땅도 감당할 수 없어 지축(地軸)이 흔들리어 지진이 터졌던 것입니다. 내 주 예수 날 위하여 이렇게 고난을 참으셨는데 내 당하는 고난이야 그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을 주장하사 완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사 그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 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을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느니라」. 이제 받는 고난 오래야 칠십년이요 장차 받을 영광 십년 만년 영원무궁합니다.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이 죽는 것뿐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생 불사의 몸이오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기리 참아 주가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라.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고난의 명상) 3. 노모(老母)와 처자(妻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팔십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남의 아들로의 의무도 지중하고 남의 가장 남의 아비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① 자식을 아끼지 아니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지 아니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 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니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은 금지 옥엽으로 길러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우고 매맞아 상할 때 내 어머니 가슴이 얼마나 아프실고! 춘풍 추우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 어머님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려 기도하였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도 없습니다. ②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일생을 내게 바치었거늘 나는 남편 된 의무를 못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 두고 잡혀 다니는 이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③ 세상에 제 자식을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네 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는 어린것을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또한 애처롭기 끝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에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든 어린 자식 떼어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지 못하는 이 내 마음 끝없이 비참합니다. ④ 나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나의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을, 내 양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아니치 못합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에, 이리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아니가지 못합니다. 맡기나이다. 내 양들 대목자장 되신 예수님 손에 맡기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에게 짐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못 무소 불능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고 철석같은 마음도 변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는 얽어매지 말라. 주님 따라가는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 4. 의(義)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忠節)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이는 우리 선인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충의대절(忠義大節)입니다. 사람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 되어 주님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 있으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붙잡고 풀무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여 풀무불이냐! 예수를 사랑하여 사자 이냐. 그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습니다. 백제 나라의 도미 부인(都彌夫人)은 개루왕(蓋婁王)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두 눈 뽑힌 남편 「도미」를 찾아 일엽 편주 조각배로 만경창파 서해 바다에 떠서 황주(黃州) 마늘 뫼 아래에서 한 평생 그 남편을 섬기었습니다. 이는 우리 조선의 딸들이 정절을 지키던 피 눈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되어 주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으랴! 주후(主後) 이백년 카르타고의 벨 뻐추어는 이십 이, 삼세의 방년에 젖먹이와 늙은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받겨 죽었습니다. 천고(千古)의 열녀 벨 뻐추어는 주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이몸이 어려서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번 백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 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苟苟盜生) 피할 줄이 있으랴!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平壤)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죽고 죽어 열 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大義貞節) 변치 아니하오리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 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
첫댓글 오목 나의 기원....예수님 향한 주기철 목사님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는 얽어매지 말라. 주님 따라가는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 주님 나 또한 주님 따라 갈때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