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역사
2. 히스기야 아하스 시대 쓰기
3. 제의 중앙화 정리요
4. 산헤립 1.2차 침공정리-2차-701/688
5. 자료 보충
3장 개혁이야기들
1. 왕하18-20주석적 문제
-일차 편집귀절(히스기야시대)
이차 편집귀절(포수기)
2. 출-계약책과 신명기
3. 이사야 마무리
4. 역대기 많이 보충요
1장 연구사
목차 제목의 일관성 만들기
노트연구-성서입문 보충
캠벨연구사 정리요
* 수정과 쓰기/ 자료 정리와 자료 쓰기, 적용
찾아 볼 책 리스트 만들기
성서공회 신청할 책
인터넷 검색, 천리안 들어가기
로워리 책 요약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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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의 개혁의 역사성.
2, 느후스탄의 개혁
p.147-일부학자들은 제의 중앙화 개혁의 연대를 잡는 일은 토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였다.왜냐하면 그 문제는 허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벨하우젠이래로 많은 학자들은 왕하18:4절의 간단한 개혁기사의 역사적 가치를 질문해 왔다. (주-재인용-벨하우젠, 그레스만 호프만, 스피커만, 벤젠, 노트, 그레이, 토드,로우리, 맥케이.)이러한 학자들의 연구를 재구성해보면 청동 뱀 제의물, 느후스탄을 제거하는것은 후기 신명기 개혁에서 모델이된 확대되어진 개혁기사의 역사적인 핵심이었다.(주,버네이) 느후스탄의 제거는 열왕기서의 보다 큰 신학적-문학적인 경향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러나 산당과 아세라, 맛세바(sacred pillar)개혁은 분명히 신명기적인 경향을 보여서 허구적인 것으로 역사성이 거부되어야한다. 이러한 요시야 개혁의 축소물로서 히스기야 개혁기사는 요시야 개혁을 예시하거나 (그래서 앞선 기사로 나타나는 기능을 한다.) 이미 개혁했던 왕보다 훨씬 더 악하게 므낫세를 만듦으로 요시야의 평가를 높이려고 하였다.
아마도 신빙성있는 연대기적인 자료로 부터온 느후스탄 개혁은 `역사적인 모델'이 되었고,(호프만154) 신명기 사가가 보다 광범위하고 허구적인 개혁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포인트'가 되었다.
3,신명기사가 대조
4, 므낫세와 비교
5,개혁조처 4가지
6,제의중앙화-701년 직전: 종교,정치,군사,경제,사회적 차원
7,랍사게의 연설(역사성이있다)
8,국내정책의 위기
9,산당
10,경제
11,조세제도
12,신명기 문헌 -친다윗적이다.
13,신명기적 편집기술
14,율법조항이 고대군주 이전 것을 말하더라도 개혁을 바란 것은 군주시대 것이다.
15,신명기사가는 왕을 싫어한다.
16,신명기 저자의 걱정-국제관계와 외교적 상실
17,반군주적 자료
18,신17:14의만국과 같은 왕
19,계약친족,이방인
20,신17.15-반제국적인 관심
21,왕상11-솔로몬의 이방왕후
22,제의중앙화가 자살세입이었다.
23,제의중앙화-경제적
24, 사회. 정치적 유익
25,종교적 면
26, 제의 중앙화-히스기야는 일시적 조치였고, 요시야는 항구적인 조치였다.
27, 그것은 신명기 사가의 기록의 차이였다.
28,히스기야 개혁기사의 짧은 기술-어휘 분석-hesir
29,산당제거-왕정제의 체계의 변화
30,요시아의 산당제거
31,히스기야 중앙화개혁은 신명기와 요시야 중앙화의 역사적 모델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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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29-32
1,역대기기자의 히스기야상은 다윗과 솔로몬의 역할이다.
2,역대기 기자는 히스기야의 정치적 반란을 언급하지않는다.
3,유월절의 확대 문제
4,유월절 행사의 역사성 문제
5,무교절의 기원-출23.14-17
6,무교절의 발전
7,요시야 개혁과 혼합문제-왕상23.21-23: 역대기기자의 기사는 허구이다.(163)
8.유월절기사에 대한 신명기기사와 역대기기사의 관점
9,역대기기사의 히스기야가 2월에 유월절 지켰다는 기사를 민9.1-14과 비교함
10,민수기기사와 역대기 기사가 동시대적이다.-포수기 후
11.민수기와 역대기 기사의 독립적인 발전-기사가 유사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12,역대기기자는 부정기적 유월절행사에 전혀 문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않았다. 역대기기자의 신학적인 과제는 2월의 비정통적인 연대를 설명하려한 것이다.
13, 28.10-12의 북이스라엘 유월절 초대기사가 허구일 가능성은 없다.
14, 북이스라엘 초대는 역사적이다.-다윗의 권위,반란의 백성준비: 제의 중앙화의 시작이였고, 반란의 중요한 일환이였다.
------*터미널에서 가져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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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의 개혁의 역사성.
2, 느후스탄의 개혁
3,신명기사가 대조
4, 므낫세와 비교
5,개혁조처 4가지
6,제의중앙화-701년 직전: 종교,정치,군사,경제,사회적 차원
7,랍사게의 연설(역사성이있다)
8,국내정책의 위기
9,산당
10,경제
11,조세제도
12,신명기 문헌 -친다윗적이다.
13,신명기적 편집기술
14,율법조항이 고대군주이전 것을 말하더라도 개혁을 바란 것은 군주시대 것이다.
15,신명기사가는 왕을 싫어한다.
16,신명기 저자의 걱정-국제관계와 외교적 상실
17,반군주적 자료
18,신17:14의만국과 같은 왕
19,계약친족,이방인
20,신17.15-반제국적인 관심
21,왕상11-솔로몬의 이방왕후
22,제의중앙화가 자살세입이었다.
23,제의중앙화-경제적
24, 사회. 정치적 유익
25,종교적 면
26, 제의 중앙화-히스기야는 일시적 조치였고, 요시야는 항구적인 조치였다.
27, 그것은 신명기 사가의 기록의 차이였다.
28,히스기야 개혁기사의 짧은 기술-어휘 분석-hesir
29,산당제거-왕정제의 체계의 변화
30,요시아의 산당제거
31,히스기야 중앙화개혁은 신명기와 요시야 중앙화의 역사적 모델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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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29-32
1,역대기기자의 히스기야상은 다윗과 솔로몬의 역할이다.
2,역대기 기자는 히스기야의 정치적 반란을 언급하지않는다.
3,유월절의 확대 문제
4,유월절 행사의 역사성 문제
5,무교절의 기원-출23.14-17
6,무교절의 발전
7,요시야 개혁과 혼합문제-왕상23.21-23: 역대기기자의 기사는 허구이다.(163)
8.유월절기사에 대한 신명기기사와 역대기기사의 관점
9,역대기기사의 히스기야가 2월에 유월절지켰다는 기사를 민9.1-14과 비교함
10,민수기기사와 역대기 기사가 동시대적이다.-포수기 후
11.민수기와 역대기 기사의 독립적인 발전-기사가 유사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12,역대기기자는 부정기적 유월절행사에 전혀 문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않았다. 역대기기자의 신학적인 과제는 2월의 비정통적인 연대를 설명하려한 것이다.
13, 28.10-12의 북이스라엘 유월절 초대기사가 허구일 가능성은 없다.
14, 북이스라엘 초대는 역사적이다.-다윗의 권위,반란의 백성준비: 제의 중앙화의 시작이였고, 반란의 중요한 일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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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 Cross,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Cambridge: Harvard Uni. Press)
Gary N. Knoppers, "There Was None Like Him" : Incomparability in the Books of Kings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
양립 불가능 형태
솔로몬은 전대미문의 지혜와 부로, 히스기야는 신뢰로, 요시야는 개혁으로
포로중인 신명기 역사가가 이미 이전에 있던 양립 불가능한 형태를 사용한 것이다.
게리 나퍼는 히스기야를 탁월한 믿음을 강조하고 그를 개혁자로 언급하는 것을 부정하면서 요시야를 개혁자로 보았다.(p.10)
인용된 것
. 히스기야: 유례없는 믿음
신명기작가는 히스기야의 개혁을 환영했지만, 그는 단지 개혁에 대하여 매우 간단하게 언급을 했다. 그는 히스기야가 산당을 제거하는 것을 칭찬하고 야훼가 모세에게 준 명령을 순종하는 것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그 주장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을 하지 않았다(왕하 18: 4, 6). 역대기와 대조해보면 놀랄만하다. 역대기작가는 히스기야에 대한 보도의 대부분을 히스기야 개혁에 대하여 언급을 했고(역하29:3-31:21), 산헤립의 침입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역하 32:1-23). 그러나 신명기사가는 히스기야의 개혁에 대해서 보도할때에 단지 한 절밖에 언급을 하지 않고 빠르게 앗시리아의 위기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취급을 한다.
학자들은 신명기사가가 히스기야의 통치기간에 그의 나라에 산헤립의 침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고 오래동안 알고 있었다: A(왕하18:13-16), B'(왕하18:17-19a, 36-37), 그리고 B'' (왕하19:9b-35). 게다가, 남아 있는 자료의 어떤 것을 예를들면, 히스기야의 병에 대한 이야기(왕하20:1-11), 앗시리아의 침입에 대한 시각으로 편집되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신명기사가의 소개는 산헤립의 침입에 의하여 야기된 위기에 집중을 하고 있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 광범위한 보도가 신명기사가의 관심을 지시하고 있다. 신명기사가의 역사가 주로 히스기야에 대하여 칭찬한 것은 산헤립의 침입에 대한 그의 반응이다.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는 톡특하게 아시리아의 위기 동안 히스기야의 믿음을 표현했다.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를 그는 믿었다. 그후에 유대의 왕들 가운데 그와 같은 자가 없었고, 그전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왕하18:5).
히스기야의 믿음에 대한 강조는 그의 통치에 대한 두가지 관련된 특징으로 명백해진다: 부정적으로는 아시리아인들이 히스기야와 그의 하나님에 대한 조롱으로, 긍정적으로는 히스기야의 기도이다. 첫 번째 경우에서, 신명기사가는 그의 다른 자료에서 제시한 중심 사상을 효과적으로 이용을 했다. 반면에 그 뿌리 bit 왕하18-19에서 9번 나타나고(주로 B'이야기에서), 그것은 신명기사가의 역사의 나머지에서 단지 두 번 나타난다. 신명기사가의 평가를 분리하면(왕하18:5), 그 뿌리은 히스기야(왕하18:19-25)와 예루살렘의 거주자(왕하18:28-35)에게 대한 랍사게의 말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Brevard Childs의 의하여 심리전으로, 그의 말들이 히스기야와 야훼에 대한 조롱으로 적절하게 기술되었다.
랍사게의 처음의 말은 "너희가 믿는 이러한 믿음이 무엇이냐?"(왕하18:19)라고 시작한다. 랍사게는 "너희가 누구를 의지하여 나를 반역하느냐?"(왕하18:20)라고 묻고 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애굽에 대한 믿음(왕하18:21, 24)과 히스기야가 그의 산당과 예루살렘에 집중되어(왕하18:22) 있는 제단들을 제거할 때 야훼를 믿는 것에 대하여 조롱을 하고 있다. 실로 랍사게는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멸하라고 야훼 당신이 명령을 했다고 선언을 하고 있다(왕하18:25).
히스기야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루살렘의 거주자의 유익을 위해 말한 랍사게의 두 번째 말은 히스기야와 그의 신하들을 이간질 시키려고 시도했다. 앗시리아의 사절단들은 믿음과 구원사이에 관계에 한 역할을 했다. 그들의 왕에 대한 유대인들의 믿음은 그들을 구원할 능력에 대하여 믿거나 믿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랍사게는 예루살렘의 거주자에게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말라. 그가 너희를 구원해 주지 못하리라"(왕하18:29)라고 경고를 한다. 또다시,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야훼를 믿어라"(왕하18:30)라는 믿음을 조롱한다. 히스기야와 야훼는 결코 유다를 구원할 수 없다고 조롱을 한다(왕하18:30, 32).
신명기적 땅의 신학의 풍자시에서 가진 그의 연설의 결론을 보면, 랍사게는 앗시리아의 왕을 대신해서 괴롬을 당한 예루살렘의 시민에게 제안을 확장했다: "곡식과 포도주의 땅, 떡과 술의 땅, 감람류와 꿀의 땅"(왕하18:32)에서 평화하라. 모압의 평지위에 이스라엘 사람처럼, 아시리아의 왕에게 예루살렘의 백성이 복종하므로 죽지 않고 살 것이다. 신명기역사에서, 야훼는 전적으로 다른 신과 구별된다; 그러나, 랍사게의 두 번째의 말에서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사마리아의 신들을 포함해서 그 민족의 신들이 앗시리아의 신들이 승리할 수 없다면 야훼도 역시 그렇다(왕하18:33-35)고 했다.
반면에 그의 두 번째 말에서 그들의 왕 히스기야로부터 예루살렘의 거민들을 고립시키려고 시도했다. 랍사게의 세 번째 대화에서(왕하19:10-13), 그는 히스기야를 그의 신으로부터 고립시키려고 시도를 했다. 그는 히스기야의 "앗시리아의 손에 결코 예루살렘이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비웃었다. 그 민족의 신들이 그들의 나라와 대표하는 왕들을 구원할 수 없듯이 야훼도 히스기야도 구출할 수 없을 것이다(왕하19:12-13).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의 거민의 비웃음속에서,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끊임없이 그의 신을 믿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를 구출할 신을 믿지 말라"(왕하19:10). 랍사게의 세 번째 메시지의 병렬적 배열은 유대인과 왕과 하나님 사이의 결속을 해명하는데 랍사게의 불가능을 강조한다. 그 반복된 조소는 유효하지 않다. 압도적이고 당황케하는 앗시리아의 침입일지라도 히스기야의 믿음은 단호했다.
그의 전거에서 개혁의 동기와 그의 자신의 예정을 따라서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을 볼때에, 신명기사가는 히스기야가 그의 성전, 왕조, 도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붙어 있는 것으로 묘사를 했다. 그의 두번째 말을 들어보면, 그의 옷을 찢고, 상복을 입고, 그리고 성전에 들어갔다(왕하19:1). 이사야에게 보낸 히스기야의 메시지는 "곤란과 질책과 치욕의 날 "이라고 비통해하며 "아마 야훼 하나님이 들고 그 말을 책할 것이다"(왕하19:15-19)는 것을 요구했다.
야훼에 대한 그의 믿음은 심지어 그의 기도에서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왕하 19:1-4절의 B` 이야기에서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그의 유익을 위해 야훼께 중보기도를 해주기를 요구했고, 왕하19:15-19 그리고 20:2-3절의 기도에서 히스기야는 야훼께 직접적으로 기도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나두고도,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는 신명기의 역사에서 단지 다른 왕의 기도를 형성시켰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표현은 저자의 기술(기교)을 고려한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는 널리 크게 신명기적사가의 구성으로 간주되어진다. 히스기야의 첫 번째 기도에서의 수많은 신명기사가의 상투적인 표현과 주제를 기초로, 이 기도는 신명기사가의 구성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히스기야의 두 번째 기도의 경우에서도 신명기 사가는 히스기야의 병을 예루살렘의 구출과 그의 자신을 관련하여 취급하므로 근원을 연결시켰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의미를 명백하게 나타낸다. 그의 간구는 그의 특별한 환경 때문에 드려졌다. 그러나 Richard Pratt가 보는 것처럼 그것들은 또한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의 탄원을 상기시킨다(삼하7:18-29); 왕하8:22-53).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와 같이 히스기야의 기도는 왕권과 예루살렘의 의식에 대하여 비판적인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안식과 성전과 왕조에 대한 나단의 약속들에 대한 반응에 다윗은 그 약속들이 성취되기를 기도했다(삼하7:17-29). 우리가 볼 때, 솔로몬도 안식과 성전에 대한 약속들을 알았다. 솔로몬은 교대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성전의 호의적인 기능에 대하여 기도했다. 기대와 성취의 형태을 인지할때에, Pratt는 그 세왕의 기도사이에, 특히 히스기야와 솔로몬의 기도사이의 여러 관계를 세웠다.
첫째, 다윗(삼하7:22)과 솔로몬(왕하8:23)과 같이 히스기야는 야훼의 주권을 선언하고 있다(왕하19:15, 19). 예루살렘에서 "그룹들 위에 계신 큰무리의 야훼"는 하늘과 땅을 만든 동일한 전지 전능한 신이다(왕하19:15). 사실, 야훼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한 주장들은 히스기야의 첫 번째 기도 곳곳에서 포함을 하고 있다. 히스기야가 그의 첫 어두의 연설에서 선언하고 있다("당신만이 땅의 모든 왕들중에서 유일한 하나님이다";왕하19:15), 그는 간구하길 야훼가 보편적으로 "땅의 모든 왕이 되고 야훼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다"(왕하19:19)는 것을 알리도록 구했다. 통시적으로, 히스기야의 간청은 다른 민족이 야훼의 유일성을 알려지도록 하는 솔로몬의 간청을 상기시킨다(왕하8:43, 60). 동시적으로, 주권과 유일성에 대한 그 신명기사가의 주장은 야훼를 다른 민족의 폐배적인 신과 동질적으로 본 랍사게에게 대답을 한다. 그들의 민족을 구원하는데 어떤 신의 실패 다음에, 예루살렘의 야훼의 구원는 야훼와 인간이 나무와 돌으로 만든 "미신"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를 세울 것이다(왕하19:18).
두 번째로, 성전이 기도의 장소가 되게 해달라는 솔로몬의 반복된 요구와 일치하여(왕상8:27-30,33,35,38-40,42,44,48), 히스기야의 첫 번째 기도는 성전에서 드려지고 그의 두 번째 기도는 성전을 방문하려는 바램으로 응답된다(왕하20:5). 세 번째기도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눈이 성전을 향하기를 소원하는 솔로몬의 간구을 인용하고 있다(왕하8:29,52;왕하19:16). 그리하여, 하나님은 산헤립의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듣고 보셨을 것이다(왕하19:16). 네 번째의 기도는, 솔로몬이 민족이 괴로움과 병을 당할 경우에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왕상8:37). 그와 같은 상황의 경우 솔로몬의 두가지 기도를 분명히 한다(왕하18:17; 20:1). 다섯 번째로, 히스기야의 기도는 "온마음으로 당신 앞에서 행하는 당신의 종에게" (왕상8:23) 신성한 자비를 위한 솔로몬의 간구를 상기시킨다. 그가 구할 때, "내가 당신 앞에서 전심으로 행했습니다"(왕하20:3)라고 기도했다.
히스기야의 기도와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사이에 많은 평행절들은 신명기사가가 히스기야의 기도가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안에 현저한 목적을 상기시키도록 심사숙고해서 형성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히스기야는 왕좌와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에 그의 신뢰를 두었으며 솔로몬의 기도의 간청과 일치하여 행동으로 하나님께 간청을 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을 마음에 새겼다는 왕하19:20과 20:5-6절에서 히스기야에 대한 이사야의 보증은 왕권과 성전, 도시에 대한 신명기사가의 강조을 재확인하고 있다.
신명기사가들은 앗시리아가 침입할때에 야훼에 대한 히스기야의 확고한 믿음을 그의 통치기간에 뚜렷한 특징으로 그의 자료에서 주의깊게 편집하고 부가했다. 히스기야의 통치를 다시 재고할때에 그 광대한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문제들이 무엇이든지간에, 신명기사가가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이 생존한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두가지의 다른 경우에 신명기사가는 신의 중재의 동일한 이유를 ,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을 그의 명예를 지키려는 그의 소망으로, 그리고 다윗에 대한 충성으로 돌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19:34;cf. 20:6).
만약 히스기야에 대한 신명기사가의 묘사가 왕하18:1-20:11에서 동일하게 긍정적이었다면 그와 같이 그의 통치의 결론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메로다하 발라단의 강조점에서 묘사하고 있는 히스기야의 정중한 평가에서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최종적인 이야기는 그의 통치에 대해 다른 견지를 던지고 있다. 이사야의 심판의 말씀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이 경건한지 아닌지에 대한 토론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러나 심판의 말씀에 대한 중요한 포인트는 명백하다: 다윗의 왕조와 거룩한 성은 바빌로니아 민족 때문에 고통을 당할 것이다(왕하20:17-18). 갑자스런 적의 변화와 어조의 변화는 후기 신명기사가에게서도 나타난다. 다윗의 명성이 히스기야 시대에 흠없이 피하였을지라도, 이것은 항상 그렇게 되지 않는다.
히스기야 통치의 종말이 바빌로니아의 지배의 권세를 미리 암시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상당한 역사적인 어려움들이 나타난다. 학자들이 오랫동안 알고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바빌로니아의 사절단의 방문은 앗시리아의 침입의 날짜를 늦추어지는 것보다 오히려 최근에 예견이 되었다. 그 이야기의 순서는 그러므로 거의 문제적이다: 메로다하 발라단의 예루살렘 사절의 방문후에 앗시리아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원되었다.
Noth가 주장한 것처럼 만약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의 작품이 전적으로 부정적이었다면, 히스기야의 통치의 연속이 난점이 된다. 그러나, 신명기사가의 위치는 이사건을 배치한 이유가 명백하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바빌로니아의 정복을 예상하는 히스기야의 통치 초기에 삽입되거나 수정된 이사건은 산헤립의 국가에 대항하여 싸우는 히스기야의 완전한 투쟁이 될 것이다. 만약 성전이 뺏앗기고 확고한 다윗 왕조가 포로로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되는 것이 확실하다면, 야훼 하나님에 대한 히스기야의 믿음이 앗시리아 사람의 침입동안에 얼마나 가겠습니까?
반대로, 히스기야의 통치 말기에 놓인 이 사건은 두가지 목적을 나타낸다. 그것은 앗시리아의 침입의 위기 동안 히스기야의 믿음의 결과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의 통치의 현재의 연속는 히스기야의 업적을 무효화시키지 않는다. 비록 이 문제해결이 궁극적으로 왕조나 성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앗시리아의 침입 위기동안 히스기야의 문제해결을 강조하는데 성공했다.
바빌로니아에게 예루살렘이 실제적으로 항복을 했더라도, 포로기 신명기 사가가 그의 전임자와 선조들보다 비길 수 없을 만큼 히스기야를 지지하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 이전의 이스라엘과 같이 유대가 국가적인 멸망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에, 히스기야는 신명기 신앙의 중심을 이루었던 약속을 의지하였고 야훼 하나님은 그 성을 구원함으로 응답을 하셨다. 사실, 나는 히스기야의 야훼에 대한 믿음(왕하18:6)은 한 포로시대와 특별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적군의 침입에 대한 절대적인 솔로몬 기도의 탄원에 대한 히스기야의 고수를 존중한다면, 그들의 약속을 향한 솔로몬의 기도 탄원을 고수한 포로기 사람들도 존중할 것이다(황상8:46-53). 이러한 입장으로 볼때에 히스기야의 위치는 모범적이다. 여러 가지 위기를 직면했을 때의 그의 믿음은 비교할 수 없는 한 왕으로서 그의 평가를 높여주고 있다.
Ⅲ. 요시야: 놀라운 개혁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는 히스기야를 한 개혁자로 언급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탁월한 믿음을 강조하여 언급을 했다. 그는 오히려 요시아를 개혁자로 더 명시를 하고 있다.
"히스기야 전에 그와 같이 온 마음으로, 온 뜻으로 야훼 하나님을 향하는 왕이
없었고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온 힘으로 그를 좇는자가 왕이 없었다."
Halpern과 Friedman은 이러한 거창한 칭찬은 신명기 6: 5에 "너는 전심으로 온 뜻
으로 온힘으로 너의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라"는 엄숙한 3중적 지시를 이루는 유일한 왕에대한 판단이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기사가는 요시아를 야훼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언급을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에 대한 언급을 했다. 또한 그것은 나에게 요시아를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고, 포로기 신명기사가는 또 "야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언급하는 그 글들을 마음에 두었던 것 같다.
"야훼께 돌아가는 것"을 언급하는 신명기사가의 역사에 나타난 그들의 텍스트는 계약의 파문, 국가적 멸망, 또는 추방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왕상 8:33, 48). "야훼께 돌아오는 것"은 순종을 의미한다. 신명기 30:2에 요시아의 평가와 같이 회개와 순종을 연결시켰다(왕하23:15-20). 신명기사가는 북쪽의 요람(왕하3:2)과 예후(왕하10:26-27)의 통치시대와 남쪽의 앗사(왕상15:12), 여호사밧(왕하22:47)그리고 히스기야(왕하18:4,6)의 통치시대에 제의 개혁들을 간단히 언급하고 있고, 요시아의 개혁은 그의 통치의 신명기사가의 헌정을 가리킨다.
Hoffmann는 요시아의 개혁의 이야기는 이전의 통치자들의 죄를 돌이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을 했다. 그러므로, 요시아는 아세라상(왕상23:6), 단상과 목상(23:14), 산당(23:8), 도벳(23:10) 성전의 두마당에 세운 제단들(23:12), 므낫세로부터 그에게 남긴(21:3,5) 하늘의 주에 대한 섬김(23:4,5,12)을 없앴다. 요시아는 솔로몬이 그의 이방인 아내들을 위하여 세운 산당을 파멸시키고 신성모독으로 여겼다(왕하23:13-14).
므낫세와 솔로몬의 죄들을 바로잡는 것 말고, 또한 요시아는 익명의 이전의 왕들의 많은 죄악들을 수정했다. 요시아는 바알에게, 해와 달과 별에게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없앴다(23:5). 그는 미동을 위한 작은 방을 헐고(23:7) 태양에게 바쳐진 말들과 수레를 제거했다. 더욱이 요시아의 개혁은 이전의 왕들에게서 언급되지도 않았고 이전의 통치자의 잘못으로 돌리지도 않았던 부정한 제의적인 행동과 물건들을 제거했다. 그는 바알이나 아세라 그리고 하늘의 신에게 바쳐진 성전의 기명을 없애고 불살랐다(23:5). 또한 그는 예루살렘의 성에서 유대까지 하나님의 제사장을 데리고 왔고 이전의 그들의 산당을 무시했다(23:8). 모든 그 제의 실행의 발달과 근원이 무엇이든 신명기사가는 예루살렘에서의 요시아의 개혁운동을 서술했고 그것을 폭넓게 기술을 하고 있다.
모든 그의 선조들의 계속되어지는 제의적인 죄악들을 바꾼 것 뿐만 아니라 역시 요시아의 개혁은 정치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솔로몬의 산당을 멸시한 유일한 왕으로써 그 나라의 분할의 원인을 제거했다. 바꾸어 말해서 솔로몬의 죄에 대한 요시아의 도전은, 이전의 북왕국의 그의 개혁들에 있어서 다음장의 배경을 위한 자리를 놓은 것이다. 앗시리아에 대한 이스라엘의 몰락(왕하19:9-12)이 히스기야가 앗시리아의 면전에 직면하는 위기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다하더라도, 여호사밧의 죄에 집약된 이스라엘의 실폐는 요시아 시대에 국가적인 새로운 갱신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요시아는 근원적 죄를 명백하게 상기시키는 말로 여로보암의 죄를 수정했다. "이스라엘 왕들이 지은 사마리아 성에 모든 제당을 없애는"것과 산당의 모든 제사장을 죽이므로 인한 완전하게 개혁을 하고, 요시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왕하23:19-20).
만약 남쪽과 북쪽의 정화가 그 통일 왕국의 영광을 회복한다면, 유월절 기념은 통일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한 시대로 돌아가게 했다. 다시말해 과거를 현재를 근거로 비교하면 그의 통치의 시대 이래로 "이와같이 그러한 유월절이 드려진 적이 없었다"(왕하23:22). 요시아가 그의 통치의 18번째 해를 성전을 수리함으로 시작을 했을지라도, 그는 올해 성전에서 "언약의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민족으로"(왕하23:21-23)성전에서 유월절 의식을 행함으로 끝마친다. 그러므로 율법책의 발견과 훌다의 예언이 요시아가 그 민족을 개혁하도록 했다면, 유월절 기념식을 신호로 이 율법책에 의해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헌신이 증진 되었다.
바벨론 포로시대 이전의 신명기사가는 요시아의 국가적인 삶의 개혁을 칭찬한 반면에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는 요시아에 대해서는 비난을 하지 않지만 돌이킬수 없는 국가적인 멸망에 대해 므낫세를 비난한다. 이것이 요시아의 통치에 대한 중요성에 관한 바넬론 포로시대의 이전의 신명기사가와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 사이의 과장하고 있는 관념적인 차이점에 대한 관심이다.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의 요시아의 통치에 관한 편집은 가볍고, 그들의 차이점들이 때때로 상상할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다. 포로시대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요시아의 개혁은 므낫세에 의해서 발생한 위험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요시아가 노력한 이유를 부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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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22-23의 고도의 문체로 기록된 기사에서 요시아가 완성한 개혁자 왕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에 부와 지혜로 솔로몬 통치를 구별하고, 신뢰로 히스기야 통치를 구별한다면 지배적인 개혁은 요시야 통치로 구별할 수있다. `모세의 모든 토라'에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요시야의 헌신은 선조와 후계자들사이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4. 결론
최종형태에서 신명기역사는 대개 다소 회의적인 분위기로 이해하였다. 사실 노트(Noth)는 전체 신명기역사를 `이스라엘과 유다의'" 확정적인 목적"과 "전체 병합"을 정당화 시켜주는 것으로 본다. 포로의 관점에서 볼 때 다윗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를 구원 할수없고(왕상9:4-9), 요시야 개혁은 므낫세의 의 죄를 대신 갚을 수가 없었다., (왕하 21:10-15;13:26-27). 이 주장들에 타당성이 일부 있더라도 폰라드와 볼프는 신명기 역사의 최종적인 형태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지 않다는 다른 이유들을 제시하였다.양립불가능성의 양식의 포로기 기원의 인정은 이러한 주장을 지지해준다.
포로기 신명기기자는 과제를- 그앞에 있는 자료들을 오랜 사망기사를 보다많이- 윤색하는 것로 이해한 듯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알려진대로 포로기 신명기 기자가 만일 유다의 포로를 므낫세의 단일 개인 죄로 돌린다면,- 즉 므낫세는 이스라엘자녀앞에 야웨가 멸망케 했던 나라들보다 더많이 악하도록했던 왕이었다. - 이와 같은 신명기 기자는 자신의 저작에서 다른 개인들의 업적을 인식하고있는 것이 그럴 듯하게 보여진다. 포로기 신명기기자가 백성들에게 환원(이스라에땅으로 회복)의 직접적인 희망을 거의 보이지 못하더라도 구원받을 수 없는 폐망의 역사를 제시해주는 데 관심하여 여러 군주들 사이에 차이점들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런한 관점은 포로가 선과 악 사이를 구별하도록 하지는 못한다. 반대로 소수의 긍정적인 수준의 왕에 대해 대부분의 퇴보의 왕들을 둘필요가 있었다. 만일 후자(긍정적인 왕)의 업적이 궁극적으로 전자의 왕들이 행한 것들을 반전시키지 못한다면 포로기 신명기 기자는 그기자에의 가장 가치있는 수준을 세우고 주위를 딴데로 돌리지않는다. 신명기 기자는 바벨론 포로가 토라의 교훈들과 유일신 숭배, 예루살렘 독점성을 실제로 확증해준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이러한 스탠더드의 지속적인 가치를 믿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이런 양립 불가능의 양식은 이러한 목적의 긍정적인 수단이 되었다.
양립 불가능 양식이 솔로몬과 히스기야 ,요시야왕에게 적용되였지만 그들은 상충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신명기 역사에서 전체적으로 독특하지는 않았다. 유사한 비교양립불가능의 양식은 에언자 로 세운 모세에게 적용될 수있다.
모세와 같은 예언자 이스라엘에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여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신34:10-12)
분명히 모세는 독특했지만 그의 독특성은 간결하지 않았지만 주의깊게 규정되었다.후의 예언자와는 달리 모세는 야웨를 대면하여 알았다. 후의 예언자들은 모세와 비교해볼 때 그들이 수행했던 기적의 수나 성격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모세에 적용한 양립 불가능의 양식은 다양한 양립불가능의 양식이 상호 모순적이지 않다는 경우를 보강해준다. 개별적인 경우에 포로기 신명기 기자는 지도자가 보유한 특별한 특징을 최상급의 심판과 밀접하게 결합한다. 신명기 역사의 분리된 편집층의 한 열쇠 보다도 양립 불가능의 양식이 포로기 신명기기자가 과거를 통일하고 초첨을 맞춤으로 중요한 수단이 된다.
9, 김성래
pp. 80 - 85.
한마디로 말해, 요시야는 예루살렘-성전에 있는 단 하나의 정통적 제단에서 모든 예배 의식을 통합하였다. 그는 므낫세에 의해서 성전에 놓여진 아세라를 제거하였고(cf. 2 Kgs 21:7) 그리고 그것은 모세가 금송아지를 파괴한 방법을 연상케한 파괴였다(Deut 9:21;cf. Exod 32:20). 덧붙여서, 그는 성전 관구에 위치한 "신성화된 남자들"의 집을 헐었다.
유다와 예루살렘 안에서 개혁으로 다루어지는 두 번째 면에서, 요시야의 노력은 예루살렘 밖으로 넓게 퍼졌다. 신명기는 그들의 신들을 숭배했던 나라들의 모든 장소가 파괴되는 것을 요청했고, 그래서 요시야는 조직적인 방법으로 진행했다. 비 야훼적인 바모트(집)를 제거하고, 요시야는 제사장들이 희생 제사를 드렸던 유다의 도시 안에 위치한 바모트(집)를 훼손했다. 이들 "나라의 제사장들"은 요시야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왔으나 이들에게는 성전에서 중요한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vv. 8-9). 다음으로, 아이들을 "불을 통해 지나가게" 하는 곳인 힌놈의 계곡에 제의적 장비도 이와 마찬가지로 훼손되었다. 성전 주위에 돌아오면서, 그는 히브리 텍스트에 다른 방법으로 언급되지 않은 한 예배로서, 태양을 헌신적으로 숭배하기 위해 말과 마차를 멀리 보내 버렸다(v. 11). 아하스와 므낫세에 의해서 설비된 제단들을 의식적으로(전례적으로) 파괴시켰고, 그들의 가루를 오아시스 Qidron에 뿌렸다(cf. 23:6). 다음으로 요시야에 의해서 훼손된 제의적 기구(산당)들은 솔로몬이 그의 이방인 부인들이 그들의 국가적 신을 숭배하기 위해 세운 바모트(집)였다(v. 13). 마지막으로, 요시야는 마세보트를 부서 버리고 신명기적 법률 제정에 일치하여 아세라를 찍었고 사람의 뼈로 가득한 것으로 그 지역을 비신성화 했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요시야의 개혁에 몇몇 중요한 관심이 즉시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의 개혁 동안 제의적 활동과 사물들을 정화시킨 것은 신명기에 의해 정확하게 불법적인 것들이다. 요시야의 노력은 야훼보다 다른 신을 경배하는 모든 방법(도구)들을 제거하고, 어떤 비 야훼적인 항목들을 예루살렘 성전이 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예식으로 연합된 모든 장소들을 종교 의식적 훼손이라는 것을 포함하였다. 요시야의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청사진으로써 취급된 외국 사람들이 숭배하는 예식의 신명기적 특색과 중앙집권과 제의적 순수성에 대한 신명기적 관념이 거의 질문할 수 없다. 동시에 요시야의 어떤 행동에 대해 특별히 주목해야 되는 것은, 특히 솔로몬에 의해서 세워진 바모트가 아직 활동 중이고, 그 개혁이 히스기야 초기에 기인된 것이라는 질문이다(2 Kgs 18:4). 그래서 요시야는 유다의 예배 그리고 종교적 국가적 그리고 민족적 동질성을 신명기적 청사진에 일치하여 재수립하였다. 므낫세의 통치에 기인된 동질성의 붕괴가, 만약 짧은 시간동안 이라면, 신명기적 관념에 대한 요시야적 계약적 의식적 법률 제정으로 지금 상쇄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신명기 안에서 세운 경계에 의해 구조화된 국가적 동질성은 이스라엘의 쇠퇴한 국가, 요시야의 개혁이 지배적인 그 지역이 포함되고 있다. 여로보암의 중심적으로 채용한 제단의 경계, 벧엘의 제의적 기구에 요시야는 그것의 제단과 더불어 바마를 파괴했고 아세라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v. 14에 묘사되어 있는 비슷한 방법으로 신성화된 지역을 훼손했다. ; 그는 제단 주위에 묻혀 있던 그들의 뼈를 태워 버렸고, 그래서 어떤 의식적 목적을 위한 기구를 비신성화했다. 신명기적 사관에 일관하는 방법으로 요시야는 옛 이스라엘 국가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있는 제단을 위해 이런 예식을 넓혔고, 그들에 대한 사람의 뼈들이 묻히고 제사를 지내는 그런 제단의 제사장들의 제물에 의한 불법적 제단을 훼손했다. 그때 단 하나의 방법으로 이스라엘과 유다 전체가 제의적 단어로 재결합되었다. 야훼에 의해서 선택된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떨어져서 존재했던 예배의 장소는 없었다.
그의 개혁에 대한 마지막 행위로써, 그리고 Deut 16:5-6의 제의적 관념과 일치하여, 요시야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간 시기 이래로 신명기적 역사에 언급되지 않은 유월절로 백성들을 이끌었다, 예를 들어, 나라에서 그것의 의무가 실패함으로 그것을 채우기 위함이다. 이 축제의 상징적 의미가 신명기적 입법에 더욱 더 가득한 것에 이르게 하고 있다. 애굽의 노예 신분으로부터 해방을 기념하기는 유월절 의식은 근본적으로 계약적 공동체의 형태를 의식적으로 재창조하는 것이고, 신명기의 헌장이 박멸되는 것에 의해 모든 종교적 예식이 금지된 한 나라가 세워졌고, 지금 이 재평가된 유대 공동체에 의해서 평행 되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에 금지된 모든 중개적인 것들을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는 마지막 개혁 운동이 아주 영향력 있게 신명기적 저자의 예언자적 목소리, 이야기 설화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요시야의 통치 기간에 이러한 지각 있는 방법으로 신명기적 역사서의 저자에 의해 이원론적 기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왕의 행위를 설명하는 역사로써, 계약의 축복이 어떻게 얻어지고 사람의 부가 어떻게 보증이 되고, 계약과 그것의 의미로 연합된 보복적 정당성이 종교적으로 구조화된 관념의 문맥으로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가이다. 사람들이 신명기적 집대성을 규정하는 단어들이 민속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의되고 있는 것은 그 점에 있어서 명하여진 계약 의식의 적합한 제정에 의해 의식적으로 재창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뒤따르는 왕의 궁극적 실패를 증언하는 이야기의 연속성 이래로 요시야는 므낫세의 행위를 용서하기 위한 마음내키지 않는 신성함뿐만 아니라 그의 개혁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확한 보복의 관념, 신명기적 전통의 본질적 부분이 계속 유지되고,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 전체가 이해할 수 있는 안정되고 믿을 수 있는 영역이 보증되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방법에 있어서, 신명기적 운동의 예언자적 입장을 그냥 훑어보면 안 된다. 특별한 신명기적 역사를 위해 그리고 신명기적 전통을 위해 나비(제사장)의 특색에 대한 중요성이 이 그룹의 동질성의 다른 면을 구성한다. 전체 역사가 구별되고 분명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그런 국가들 가운데 백성들의 흩어짐에 의해 유다의 민족적 동질성이 위협받고 그리고 나라의 쇠망을 가져오고 국외 추방을 인도하는 그런 사건들을 반영함으로써 구조화 될 때, 이야기 설화 기사는 나라들 중에 완전한 동화와- 분해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의 민족적, 종교적 공동체로 남기 위해 그리고 회복하고 되찾기 위한 필요한 관습을 찾는 백성들을 가르치는 도덕적 관점에서의 목적으로서 취급하고 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야훼를 위해 거룩하게 되는 이 백성의 경계선을 선포하는 선언을 공급함으로써 요시야는 조직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이런 요구들을 채우고, 이스라엘이 미래에 신명기적 저자에게 나라와 백성의 관념을 어떻게 회복시키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방법으로 신명기적 저자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그룹을 재건한 그 나라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변의 일부분의 틀로 창조하고, 신명기 안의 하나의 관념으로써, 그리고 요시야의 행위에 대한 기사에서 역사의 목적에 매우 가까운 관념을 재건하는 것으로써 정의한다. 동질성의 실제화와 그것의 잃어버림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틀로써 포함된다. 신명기의 오늘은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별시키는 신명기적 의식 행위를 적합한 이행으로 일치할 수 있고, 어떤 시간에서 의식적으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계약을 깨기 위한 파괴의 위협이 동질화할 수 있는 전체로서 이와 같은 동질화된 공동체를 유지하는 위험에 서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 삶의 위치를 통해 지나온 자신의 국가적 자취에 의해 채용된 역사가 그들이 거주하는 가운데 경쟁하는 사회와 민족적 세계 구조로부터 이 그룹이 그들 스스로 구별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이런 동질성이 그들 스스로 관념적 동질성을 연속적으로 재형성하고 재창조하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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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apget " Historial reliability of chroniches" J sot 33 (1985)
P83-107
2-5-김성국
논문 : S.Japhet the Supposedd Common Athorship of chroniclos and Ezra -Nehe mah Inrestigated VT 18(1968) 332-372
A. 주석의 범위
역대기(2권)은 실질적인 부분들은 이미 구약성경의 사무엘, 열왕기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구절들(정확한 )을 기초로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석가는 어떤 접근방법으로 주석을 하느냐를 결정한다.
현재의 주석을 통한 주된 목적은 역대기 사가 자신이 전수하고 싶었던 그 의미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해서 역사.지리. 유사구절들의 유사점에 대한 의문들에 대해서는 등한히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Topics)들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으므로 주석의 부분에서, 토론은 그가 그것을 다루었던 그리고 그가 역대기에 왜 이러한 주제를 포함시키고 사가의 의도에 포커스를 맞출 것이다. 또 하나 자료의 선택, 유산text사이의 강조점(주안점의 차이(쉽게 판단되지 않는)등 어려움이 야기 될 것임
예를 들어 많은 것은 철자법. 문체상의 습과(관습), 내용 전일(사건)에 대한 차이에 기입한다. 그래서 그것은 쉽게 현재의 주석에서 다루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최그느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에다 역대기 사가가 기본(기초)으로 삼았던 사무엘. 열왕기의 내용이 출판된 히브리 성경의 MT와 항상 똑같은 유는 아니었다라는 한발 더 나간 생각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증거는 사무엘. 열왕기의 그리스 번역에서 볼 수 있고 쿰란에서의 사무엘의 히브리 본문의 두루마리 단편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하게 출판되어 있지는 않지만 Lemake and ulrich은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의 차이는 역대기 사가의 개인적인 편견, 관심이라기 보다는 그가 사용했던 히브리 본문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경우에 있어 그러한 이유들에 대해 충분히 토론을 (포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토론을 통한 결정이 역대기의 주장(표현별도)하는 주석자에게는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역대기 사가의 "소스""가 존재하지 않고, 사가의 자유스러운 "도합"이라고 생각되는 구절들에 대한 주석은, 가능한한 text에 의해 야기되는 모든 문제를 다루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과 관련 두가지의 단계가 있는데 덜 중요한 단계는 역대기 사가가 물려받은 재료의 범위.특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가정인 고국 폭넓고 자세하게 함)
그러나 이것은 독자의 주위를 더 중요한 역대기 사가가 이러한 재료를 포함시킨 이도 그것을 다룬 방법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 어떤 경우에 이 두 단계가 더 민감하게 요구되었음(주석에서)이러한 모든 연구들이 개별적으로 출판되었고 결과만 야기된다.
B. 정경에서 위치와 이름
히브리 정경에서 역대기 1,2권은 한궈으로 간주하고 the events the days라고 부른다. 이러한 표현은 즉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 of Judah같이 더 정확한 정의를 하기 위해 부여되는 장들의 책, 즉 구약에서 일어난다.
역사적인 범위의 책은 Adam에서 페리시아 왕국에까지 미쳐 있다. 어떠한 정환한 정의도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사용이 유대전승에서 남아있다는 것은 "Jargum"에서 보여지는 "fuller title"에서 볼 수 있음
특히 제롬은 이러한 전통에 익숙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번역 그리스제목인 Prologus galeatus (the proloqut to his translation of the books of samuel and kings)
제롬의 그리스어 사용은 히브리어와 비슷한(동등한) 것으로서의 제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롬의 이러한 영향이 루터에 전해져, 제롬의 의도가 결국 폭넓게, 우리의 책이름으로 사용되어졌다.
70역에는 "역대기"를 두가지로 나누고( paraleipomenon)부름, 이것은 역대기가 사무엘. 열왕기의 많은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호하다(단지 반복이 아니다) 역대기 사가가 재료의 선택과 배열 결정하는 그의 자신 적극적인 의도를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이름은 문제가 있다.
사실 70인역과 기독교 교회에서의 V에대한 잘못된 호칭은 지금가지 이러한 책들에 대한 소홀과 가치허식을 가져왔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지하듯이 역대기 책은 한작품으로 중세까지 이루어졌다.
시리아 전통은 치자하고는 역대기는 정경의 위치를 의심받은적이 없고 Josephus의 암시에 의한다면 이미 1세기때 기독교와 유대교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대기는 히브리 정경에는 세 번째 분야의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다. 어떤 떼에는 세 번째의 머리부분에 있기도 하다.
역대기가 히브리 성경의 끝에 오는 것에 대해 처음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합쳐지지 않았겠느냐하는 가정으로 색명되어지곤한다.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사무엘 열왕기에 이미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덜 중요한 역대기에서 떨어져 나와 에스라 느혜미야만 정경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추가로 후에 역대기가 정경화되었다.
H Caxzelles는 이러한 견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역대기가 Sevites에 공헌한 적극적인 역할이고 두 번째 성전시기에 사두개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비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아무 어려움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함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성전 파괴 이후에 바리새 전통이 표준(규범)화 되어진 후에 역대기가 정경화되어졌다고 그는 생각한다.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의심의 여지가 많다. 생각들은 역대기의 정경화 과정을 유례없이 많은 과정을 겪었다고 하고 정경화 과정 자체를 완전히 잘못얘기하고 있다고 함
Willi의 말대로 정경은 선택의 작업이 아니라 유전의 권위의 선포라고 강조함으로 Cazelles를 반박함
에스라 느헤미야보다 역대기가 후에 전경화된 결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70인역에서 각기 따로의 수용은 비교적 초기에는 서로 다르게 취급되었고 정경화되었다는 역대기가 히브리 정경의 마지막에 위치에 있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설명될 수는 없지만 세 번째 부분(저작)잡다한 모음의 내용내에는 이러한 필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C. dureorl 작품의 범례
역대기 작품의 범위에 대해 논함에 있어 두가지 불일치가 있음
첫째, 역대기사가가 에스라. 느헤미야의 책에 대해 부분적인 원인이 있느냐 아니면 총체적인 책임이 있느냐 하는 것
둘째 역대기서의 자체의 2차적인 재료에 대한 의심과 관련 일치되어지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
S.Japget " Historial reliability of chroniches" J sot 33 (1985)
P83-107
2-5-김성국
논문 : S.Japhet the Supposedd Common Athorship of chroniclos and Ezra -Nehe mah Inrestigated VT 18(1968) 332-372
A. 주석의 범위
역대기(2권)은 실질적인 부분들은 이미 구약성경의 사무엘, 열왕기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구절들(정확한 )을 기초로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석가는 어떤 접근방법으로 주석을 하느냐를 결정한다.
현재의 주석을 통한 주된 목적은 역대기 사가 자신이 전수하고 싶었던 그 의미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해서 역사.지리. 유사구절들의 유사점에 대한 의문들에 대해서는 등한히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Topics)들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으므로 주석의 부분에서, 토론은 그가 그것을 다루었던 그리고 그가 역대기에 왜 이러한 주제를 포함시키고 사가의 의도에 포커스를 맞출 것이다. 또 하나 자료의 선택, 유산text사이의 강조점(주안점의 차이(쉽게 판단되지 않는)등 어려움이 야기 될 것임
예를 들어 많은 것은 철자법. 문체상의 습과(관습), 내용 전일(사건)에 대한 차이에 기입한다. 그래서 그것은 쉽게 현재의 주석에서 다루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최그느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에다 역대기 사가가 기본(기초)으로 삼았던 사무엘. 열왕기의 내용이 출판된 히브리 성경의 MT와 항상 똑같은 유는 아니었다라는 한발 더 나간 생각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증거는 사무엘. 열왕기의 그리스 번역에서 볼 수 있고 쿰란에서의 사무엘의 히브리 본문의 두루마리 단편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하게 출판되어 있지는 않지만 Lemake and ulrich은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의 차이는 역대기 사가의 개인적인 편견, 관심이라기 보다는 그가 사용했던 히브리 본문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경우에 있어 그러한 이유들에 대해 충분히 토론을 (포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토론을 통한 결정이 역대기의 주장(표현별도)하는 주석자에게는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역대기 사가의 "소스""가 존재하지 않고, 사가의 자유스러운 "도합"이라고 생각되는 구절들에 대한 주석은, 가능한한 text에 의해 야기되는 모든 문제를 다루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과 관련 두가지의 단계가 있는데 덜 중요한 단계는 역대기 사가가 물려받은 재료의 범위.특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가정인 고국 폭넓고 자세하게 함)
그러나 이것은 독자의 주위를 더 중요한 역대기 사가가 이러한 재료를 포함시킨 이도 그것을 다룬 방법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 어떤 경우에 이 두 단계가 더 민감하게 요구되었음(주석에서)이러한 모든 연구들이 개별적으로 출판되었고 결과만 야기된다.
B. 정경에서 위치와 이름
히브리 정경에서 역대기 1,2권은 한궈으로 간주하고 the events the days라고 부른다. 이러한 표현은 즉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 of Judah같이 더 정확한 정의를 하기 위해 부여되는 장들의 책, 즉 구약에서 일어난다.
역사적인 범위의 책은 Adam에서 페리시아 왕국에까지 미쳐 있다. 어떠한 정환한 정의도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사용이 유대전승에서 남아있다는 것은 "Jargum"에서 보여지는 "fuller title"에서 볼 수 있음
특히 제롬은 이러한 전통에 익숙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번역 그리스제목인 Prologus galeatus (the proloqut to his translation of the books of samuel and kings)
제롬의 그리스어 사용은 히브리어와 비슷한(동등한) 것으로서의 제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롬의 이러한 영향이 루터에 전해져, 제롬의 의도가 결국 폭넓게, 우리의 책이름으로 사용되어졌다.
70역에는 "역대기"를 두가지로 나누고( paraleipomenon)부름, 이것은 역대기가 사무엘. 열왕기의 많은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호하다(단지 반복이 아니다) 역대기 사가가 재료의 선택과 배열 결정하는 그의 자신 적극적인 의도를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이름은 문제가 있다.
사실 70인역과 기독교 교회에서의 V에대한 잘못된 호칭은 지금가지 이러한 책들에 대한 소홀과 가치허식을 가져왔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지하듯이 역대기 책은 한작품으로 중세까지 이루어졌다.
시리아 전통은 치자하고는 역대기는 정경의 위치를 의심받은적이 없고 Josephus의 암시에 의한다면 이미 1세기때 기독교와 유대교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대기는 히브리 정경에는 세 번째 분야의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다. 어떤 떼에는 세 번째의 머리부분에 있기도 하다.
역대기가 히브리 성경의 끝에 오는 것에 대해 처음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합쳐지지 않았겠느냐하는 가정으로 색명되어지곤한다.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사무엘 열왕기에 이미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덜 중요한 역대기에서 떨어져 나와 에스라 느혜미야만 정경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추가로 후에 역대기가 정경화되었다.
H Caxzelles는 이러한 견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역대기가 Sevites에 공헌한 적극적인 역할이고 두 번째 성전시기에 사두개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비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아무 어려움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함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성전 파괴 이후에 바리새 전통이 표준(규범)화 되어진 후에 역대기가 정경화되어졌다고 그는 생각한다.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의심의 여지가 많다. 생각들은 역대기의 정경화 과정을 유례없이 많은 과정을 겪었다고 하고 정경화 과정 자체를 완전히 잘못얘기하고 있다고 함
Willi의 말대로 정경은 선택의 작업이 아니라 유전의 권위의 선포라고 강조함으로 Cazelles를 반박함
에스라 느헤미야보다 역대기가 후에 전경화된 결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70인역에서 각기 따로의 수용은 비교적 초기에는 서로 다르게 취급되었고 정경화되었다는 역대기가 히브리 정경의 마지막에 위치에 있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설명될 수는 없지만 세 번째 부분(저작)잡다한 모음의 내용내에는 이러한 필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C. dureorl 작품의 범례
역대기 작품의 범위에 대해 논함에 있어 두가지 불일치가 있음
첫째, 역대기사가가 에스라. 느헤미야의 책에 대해 부분적인 원인이 있느냐 아니면 총체적인 책임이 있느냐 하는 것
둘째 역대기서의 자체의 2차적인 재료에 대한 의심과 관련 일치되어지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
9쪽
에스라-느헤미야와 역대기는 서로 대조된다. 예를 들면 역대기에서는 보복에 관한 주장을 말하고 있는데 아주 전형적이고 특징적인 언어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때때로 예언자의 말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인데, 에스라-느헤미야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에스라 9장과 느헤미야 9장의 기도에만 나올 뿐이고, 그나마 역대기의 특징적인 언어표현도 없고, 상당히 대조적인 개념의 것이다. 그리고 다윗과 다윗의 왕조와의 계약, 그리고 다윗왕조의 회복은 에스라-느헤미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10쪽
역대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관계라고 하는 계약적 기초에 있어서 근본적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시나이와 출애굽에 대한 신명기적 역사가적 관심에서 벗어났다. 에스라-느헤미야에서는 이런 발전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족장에 대한 약속과 시나이 계약의 중요성을 유지하는 것을 발견한다.
세 번째의 차이의 영역은 두 작품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에 관해서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이 두 작품들을 보급시킨 완전히 다른 태도를 인식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논쟁을 벌여왔다. 옛북왕국의 거주자들의 지위에 관해서는 이것이 더욱 뚜렸하다. 역대기는 사마리아가 멸망하고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북쪽에 계속해서 거주하였다고 믿는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노력이 열성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시도되어졌다. 에스라-느헤미야에서는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어디에도 없다. 에스라 3:1-4:5에서도(역대기의 사상에 상당히 근접해 있는) 역대기와 대조적인 모습이 뚜렷하다. 북쪽의 거주자들로서는 단지 아시리아인들에 의해 재정착된 외국인들을 알고 있을 뿐이며, 이들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거부되어졌다. 역대기는 이 재정착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는다. 만약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역대기가 자기 자신의 시대에 존재한 공동체의 정책과 사상에 관한 안내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에스라-느헤미야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다면, 설명되어지지 않는, 관점의 절대적인 변화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것이다.
네 번째로는 에스라-느헤미야가 민족의 과거 역사에 관해 다룰 때 역대기의 특징적인 전통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다른 어떤 관념(표상)에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역대기에서는 야곱이 줄곧 이스라엘로 불리우며(대상 1:34), 민족의 역사에 대해 중요한 인물로 취급받는다. 이런 명칭과 평가는 에스라-느헤미야에는 없다.
11쪽
옛북왕국의 재정착에 대한 관념(표상)은 출애굽전통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역대기와 차이가 난다.
역사쓰기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으로 그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충분하다. 폰 라드에 따르면 역대기는 역사를 기록하면서 '레위기적 설교들'이라고 불리우는 신학적인 견해들을 공급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고백적인 관점(견해)과 정경적 예언자들로부터 인용해온 것들을 결합시켰다. 게다가 이런 설교들은 역대기 이야기의 특징이 되는 백성들의 운명의 드라마틱한 전환을 자주 동반하다. 에스라-느헤미야는 이러한 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자기의 신념을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한 자신만의 다른 방법들을 채용한 또 다른 작가가 있었다고 하는 강한 인상을 준다.
결론적으로 역대기와 에스라-느헤미야는 별개의 작품이다. 에스라-느헤미야는 에스라-느헤미야의 복잡한 문학적 문학적 역사는 그 사상을 만족스럽게 개괄하는 데 있어서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 해결이 역대기를 언급하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역대기 또한 본래부터 있는 한 작품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스라엘이나 유대에서는 신성한 역사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작가의 시대까지 계속 기록되어져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에는 회복될 것이라고 하는 것에 관한 많은 힌트들이 있는데, 그런 넓은 윤곽은 물론 역대기독자들에게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교훈들이 그것이 위치한 작품속에서 만족스럽게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에스라-느헤미야의 어떤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어떤 언급도 없다.
D. UNITY
12쪽
역대기의 범위와 관련한 불일치의 두 번째 영역은 내부적 통일성이다. 그러한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세 번의 학문적 토론의 시기가 있어왔다.
1. 1920-1930년대에 가장 최고조에 달했던 첫째시기.--펜타토익 기원의 자료설.
RH.----역대기상에 있어서 펜타토익의 P자료의 전통을 잇는 기초설화가 있다. 일련의 개작의 흔적들(역대기를 신명기를 포함한 펜타토익에 조화시키려는 태도).
2. WELCH-----정반대의 의견. 역대기의 작업 시기는 포로후기 회복 이전. 망명생활을 하지 않은 공동체의 일원에 의해 쓰여짐. 역대상 1-9장뿐 아니라 P의 영향력을 무심코 드러내는 모든 구절들도 이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됨. 웰치의 연구서는 P의 관점을 갖고 있는 개정자의 작품을 분류하는 것으로 되었다. 본래적인 역대기는 D를 권위있는 법전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에서 자신의 책을 편집했다.
3. G. von RAD----다소 과격한 RH에 대한 반응. 역대기에 관한 신명기의 중요성을 강조. WELCH.와 같이 과격하지도 않다. 신명기적 역사에 자신을 기초하고 분리된 자료로서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서 펜타토익을 알고 있던 작가를 예상할 수 있다. 역대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차적 편집방법에 복속되며 레위인들의 위치와 연관되어서 특히 그렇다.
13쪽
2. Noth와 Rudolph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역대기를 한 사람의 작가의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후대의 덧붙임의 모든 방법에 복속된다는 증거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립되어 나타나며 하나의 동일한 개작의 결과가 아니다. 노트와 루돌프는 역대기 1-9장에서 비록 역대기를 위해 기본적인 핵심은 간직하고 있지만 이차적인 자료들을 많이 찾아냈다. 다윗의 통치에 관한 언급에서도 많이, 특히 역대기상 23-27장에서, 그리고 15-16장에서 부분적으로, 그리고 나머지부분(역대기하)에서는 거의 없다. 이러한 절들에 있어서의 후대 부가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불분명한 용어로 언급하는 것이 몇 개 있다.
3. 역대개의 통일성 문제를 역대기-에스라-느헤미야의 발전과 연관시키는 것. Cross는 역대기의 세 가지 분리된 판에 대해 주장한다.
①가장 최근의 것---Chr3(B.C.4000, 역대기-에스라-느헤미야 모두로 구성된 것.
Chr2---에스드라 1과 요세프스에서 그 증거로 사용해서 주장함(B.C.450), 끝에서 에스드라 1의 볼라게 전체를 포함한다. (세명의 파숫꾼이야기, Chr3에 뺀 이야기). 역대상 1-9장을 역대기의 좀 더 초기의 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②Chr1---Freedman에게 의지해서 주장하는데 역대기의 최초판.(역대상 10-역대하로 구성)이 되어 있다. 두 번째 성전건축 시기에 생겨났으며 스룹바벨 아래에서의 왕국의 회복제안과 함께 성전의 회복을 지지하기 위해 생겨남.
S.Japhet " Historial Reliability of Chronicles" JSOT 33 (1985)
P83-107
역대기 연구의 최근의 연구를 제펫은 세가지를 든다. 벨튼(P.Welten)의 `역사와 역대하10-36을 다룬 역대기서에서의 역사의 묘사'연구를 주목하고, 노오스(R.North)와 클라인(Ralph W.Klein)의 연구를 언급하였다. 그중에 벨튼의 연구는 대하 10-36의 부가된 부분에 대한 문학-언어적인 분석바방법으로 연구하였다. 그의 논문의 결론의 요지는 군주시대에 대한 지식의 역대기서의 기여는 극소수이고, 르호보암,웃시야,히스기야시대의 자료는 세 개의 짧은 단락으로 연구를 집중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대하 10-36장의 다른 모든 부가된 것은 3세기 초반 역대기 시대의 상황에 반응한 만들어진 자유로운 역대기 기자의 고안이다라고 말하였다.
히스기야 종교개혁에 대한 로워리의 평가
-제의중앙화
히스기야 종교 개혁이 남유다인 전반에 지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로워리는 복합차원의 관점에서 히스기야 개혁을 분석하고있는 것을 살필 수있다. 즉 제의 중앙화를 심리적,경제적,정치적,군사적 측면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을 볼 수있다. 심리적인 면에서 유월절축제를 지냄으로 유대인들이 제국의 복종의 상태에서 야웨의 충성으로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따라서 유대인 들이 앗시리아에 대하여 반란에 참여할 뿐만아니라 반란을 주도하는 개혁그룹에게 개혁을 계속 지속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로워리는 야웨의 충성심은 유대인들에게 반란을 지지하기 위한 강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며, 앗시리아의 억압에서 자유로의 긴 반역적인 행진을 시작하였을 때 유월절은 유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주) 또한 예루살렘으로 규칙적인 순례를 요구하는 것은 다윗왕조에 대한 위상을 높히는 심리적인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제의 중앙화는 예루살렘 수도와 왕족,성직자(레위인)들에게 상당한 경제적인 혜택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신명기의 십일조입법이 균등화로 나타났을 때 제의 중앙화는 반앗시리아적인 혜택이 있었다. 히스기야는 왕족의 재원을 고갈시키며 앗시리아로 세금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국내 세입 체계를 폐쇄하는 조치로 산당을 폐쇄하였던 것이다. 제의 중앙화와 십일조의 소비는 귀족 관료주의자들에게는 간접적인 생활비의 면세수단을 제공하였으며 수도의 경제를 활기띄게 하면서 예루살렘밖의 귀족 부양자들에게 계속적인 생활비를 제공하게 했다.
정치 군사적인 측면에서 제의 중앙화는 전략적인 혜택이 있었다. 앗시리아 군인 들이 예루살렘으로 침공할 때 포획하고 이용할 어떤 세금 저장고도 남겨놓지 않는 것이다. 또한 외곽 지역에서 야웨 제의 종교 대상물들을 제거함으로 적이 정복하는 과정에서 상대 적에게 유리하게 영향을 미칠 정신적인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물질을 뺐앗기는 수모를 당함으로 정신적인 타격을 입는 것을 미연에 방지기 때문에 야웨 제의물을 제거하는 것은 군사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히스기야왕 개혁 배경
왕중심의 개혁이다.
고대 사회는 왕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던 시대였다. 구약 성서시대에도 왕이 중심이 된 시대였다. 따라서 로워리는 히스기야 시대때의 제의 개혁은 왕이 제의 개혁을 하였다고 보았다./ 그래서 제의 개혁을 실시했던 것도 결국은 왕이 주도한 제의개혁이라고 본다.
로뤄리에 따르면 처음부터 끝까지 유다의 공식적인 제의는 왕의 정치적인 요구를 합법화 시켰고 왕의 이익을 전달하였다고 본다. 유다에서는 제의 개혁은 항상 왕들이 이끌어 났다. 또한 제의 개혁에서는 군주정치의 사회적, 정치적인 이익을 채울 수있도록 의도되어 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왕중심의 권력사회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왕이 중심이 되어 개혁을 일으킨 것은 그 밑에 개혁 세력이 있어서 그들이 의견을 제시하고 주도하여가면 왕은 그것에 대해 결정하여 주는 역할만을 감당하였을 것이다. 히스기야 궁정의 사람들이 바로 이 개혁을 주도하였던 세력이었다. 이들은 p의 전승을 알고 있었고, p의 제의에 정통하였던 사람들로, 신명기 역사의 초기작업을 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중 일부는 열왕기서에 나타나는 관료들과 잠언25장의 히스기야의 신하들일 것이다.(잠25.1)
이렇게 상정하여 볼 때 로워리의 주장은 왕의 개혁이였다는 것은 다소 협소한 의미를 주는 것같다.
군주정치에서의 사회적인 역할
왕정정치하에서 경제운영은 세금부과에 의해 이루어졌다. 국가적인 사업과 징병을 위한 모병작업등은 국민들에게 세금을 과다하게 요구하였을 것이다. 왕의 정책은 국민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왕정 정치하에서 국민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서 잉여 생산물을 만들고 법령에의해 정해진 세를르 내기에 무거운 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는 생산물의 변형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경작의 실패는 농부들에게 빚을 지게하였고 대출제도에 의한 사회 구조가 형성하였을 것이다.
앗시리아 제국시대 이전의 왕정상황
앗시리아 제국시대 이전의 유다의 개혁내용을 통하여 볼 때 왕권체제가 점점 집중화되고 강력해져갔다. 과세제도, 의무노역,국가 사법권등에서 왕은 유대사회에서 강력한 통제를 행사하였을 것이다. 왕정시대때는 부익부 빈익빈현상으로 부자는 더욱 부해지고, 가난한자는 더욱 가난해졌고, 국가는 점점 더 강력해졌다.
왕정정치에서의 왕의 역할
왕정제도는 왕을 이스라엘의 국가 신인 야웨의 지상의 대리인으로 신과 같이 떠받드는 공식적인 예배를 통하여 사회 지배를 문화적으로 정당화 시켰다.야웨의 아들인 유다의 왕은 야웨의 상속인으로서 모든 의무와 권한을 행사하였다. 유다의 높은 신인 야웨는 백성들의 토지와 주권의 진정한 소유주였던것이다. 야웨의 지상의 대리인으로서 왕은 백성들의 소작료를 받고,백성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명령하였다.
예배의 개혁에 있어 왕의 역할
남유다의 왕들의 예배의 개혁은 야웨 종교에 있어 성전의 이상적인 기능을 강조하였다. 야웨 예배와 충서은 철저히 결합되어 있었다. 왕은 성전을 건축하였고, 성전의 기금을 제정하고 징수하였다. 정ㅈ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성전 보물을 사용하였다. 성직자를 임명,해임하기도 하였다. 예배 대상물을 만들거나 파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성직자의 역할을 규정하기도 하였다. 왕은 국가 예배생활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산당예배와의 혼합
왕정시대 이전의 예배는 산당예배와의 혼합된 현상을 보여주었다. 야웨는 여러 국가들의 신들중에서 최고의 숭배의 대상이었다. 다른신들도 같이 숭배 받았다. 아세라와 바알같은 토착신들에게도 종교적인 의식이 행해졌고, 국제적인 동맹관계에 따라 예루살렘 맞은 편 올리버스 산을 따라 있는 `대사관의 거리'에서 숭배되었다.
아하스의 종교정책
앗시리아의 영향-경제적인 부담
로워리는 사회 경제적인 상황의 관점에서 아하스의 정치를 강압적인 앗시리아의 종교정책에 순응하여 정치적인 안정을 유지한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앗시리아 굴종한 상태로 어쩔 수없이 앗시리아에 끌려갔다고 보았다.
앗시리아 황제 디글랏 빌레셀3세에 대한 아하스왕의 무조건적인 항복은 남유다인으로 하여금 장기간에 걸친 사회 문화적인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앗시리아와의 봉신 관계의 조건은 다수의 유다인 노동자들에게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유다와 앗시리아의 불균형적인 무역관계는 생산의 집중화를 앗시리아로 쏠리게 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됨으로 유다안에 이미 정착되었던 부와 소유의 불균형적인 분배를 더욱 촉진하였다. 유다는 앗시리아에게 제국세를 지불하고, 군대와 의무노역을 제공하며 침공 때의 앗시리아 군대를 위해 숙소를 제공하는 등의 부담은 유다 군주제의 상황을 더욱 악화되게하였다. 유다의 내부적인 대다수의 사회적인 여건은 앗시리아의 제국하에서는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앗시리아의 종교적인 영향
앗시리아의 종교적인 영향보다도 경제적인 영향이 컸다는 것을 로워리는 강조한다. 주/또한,
로워리는 앗시리아의 종교수용이 강압에 의한 것이냐,모방에 의한 것이냐는 문제는 어려운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분명한 사실은 전형적으로 봉신국의 종교가 봉주국의 종교의식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에서 유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고 하였다.
앗시리아에 대항한 히스기야의 반란
로워리의 최초의 남유다의 히스기야의 반란(705-701BC)은 비참하게 끝났다고 보았다. 경제 사회적인 관점에서 히스기야의 제의 중앙화의 조치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보았다. 산당의 성전세의 향방은 두가지 의미에서 앗시리아와 유다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앗시리아에게는 침공때에 경제적인 수입원이 끊긴다는 의미가 있지만 도리어 유다에게는 평시에 산당의 성전세로 국가 수입원이 되었던 것이 전시에는 산당을 폐지함으로 경제적인 곤란을 겪으므로 특별 십일조를 거두어야 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신명기의 특별 십일조의 입법화는 제의 중앙화기간 동안에 생존을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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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ward
1,제의 개혁의 역사성.
2, 느후스탄의 개혁
3,신명기사가 대조
4, 므낫세와 비교
5,개혁조처 4가지
6,제의중앙화-701년 직전: 종교,정치,군사,경제,사회적 차원
7,랍사게의 연설(역사성이있다)
8,국내정책의 위기
9,산당
10,경제
11,조세제도
12,신명기 문헌 -친다윗적이다.
13,신명기적 편집기술
14,율법조항이 고대군주이전 것을 말하더라도 개혁을 바란 것은 군주시대 것이다.
15,신명기사가는 왕을 싫어한다.
16,신명기 저자의 걱정-국제관계와 외교적 상실
17,반군주적 자료
18,신17:14의만국과 같은 왕
19,계약친족,이방인
20,신17.15-반제국적인 관심
21,왕상11-솔로몬의 이방왕후
22,제의중앙화가 자살세입이었다.
23,제의중앙화-경제적
24, 사회. 정치적 유익
25,종교적 면
26, 제의 중앙화-히스기야는 일시적 조치였고, 요시야는 항구적인 조치였다.
27, 그것은 신명기 사가의 기록의 차이였다.
28,히스기야 개혁기사의 짧은 기술-어휘 분석-hesir
29,산당제거-왕정제의 체계의 변화
30,요시아의 산당제거
31,히스기야 중앙화개혁은 신명기와 요시야 중앙화의 역사적 모델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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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29-32
1,역대기기자의 히스기야상은 다윗과 솔로몬의 역할이다.
2,역대기 기자는 히스기야의 정치적 반란을 언급하지않는다.
3,유월절의 확대 문제
4,유월절 행사의 역사성 문제
5,무교절의 기원-출23.14-17
6,무교절의 발전
7,요시야 개혁과 혼합문제-왕상23.21-23: 역대기기자의 기사는 허구이다.(163)
8.유월절기사에 대한 신명기기사와 역대기기사의 관점
9,역대기기사의 히스기야가 2월에 유월절지켰다는 기사를 민9.1-14과 비교함
10,민수기기사와 역대기 기사가 동시대적이다.-포수기 후
11.민수기와 역대기 기사의 독립적인 발전-기사가 유사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12,역대기기자는 부정기적 유월절행사에 전혀 문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않았다. 역대기기자의 신학적인 과제는 2월의 비정통적인 연대를 설명하려한 것이다.
13, 28.10-12의 북이스라엘 유월절 초대기사가 허구일 가능성은 없다.
14, 북이스라엘 초대는 역사적이다.-다윗의 권위,반란의 백성준비: 제의 중앙화의 시작이였고, 반란의 중요한 일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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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 Cross,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Cambridge: Harvard Uni. Press)
Gary N. Knoppers, "There Was None Like Him" : Incomparability in the Books of Kings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
양립 불가능 형태
솔로몬은 전대미문의 지혜와 부로, 히스기야는 신뢰로, 요시야는 개혁으로
포로중인 신명기 역사가가 이미 이전에 있던 양립 불가능한 형태를 사용한 것이다.
게리 나퍼는 히스기야를 탁월한 믿음을 강조하고 그를 개혁자로 언급하는 것을 부정하면서 요시야를 개혁자로 보았다.(p.10)
인용된 것
. 히스기야: 유례없는 믿음
신명기작가는 히스기야의 개혁을 환영했지만, 그는 단지 개혁에 대하여 매우 간단하게 언급을 했다. 그는 히스기야가 산당을 제거하는 것을 칭찬하고 야훼가 모세에게 준 명령을 순종하는 것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그 주장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을 하지 않았다(왕하 18: 4, 6). 역대기와 대조해보면 놀랄만하다. 역대기작가는 히스기야에 대한 보도의 대부분을 히스기야 개혁에 대하여 언급을 했고(역하29:3-31:21), 산헤립의 침입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역하 32:1-23). 그러나 신명기사가는 히스기야의 개혁에 대해서 보도할때에 단지 한 절밖에 언급을 하지 않고 빠르게 앗시리아의 위기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취급을 한다.
학자들은 신명기사가가 히스기야의 통치기간에 그의 나라에 산헤립의 침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고 오래동안 알고 있었다: A(왕하18:13-16), B'(왕하18:17-19a, 36-37), 그리고 B'' (왕하19:9b-35). 게다가, 남아 있는 자료의 어떤 것을 예를들면, 히스기야의 병에 대한 이야기(왕하20:1-11), 앗시리아의 침입에 대한 시각으로 편집되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신명기사가의 소개는 산헤립의 침입에 의하여 야기된 위기에 집중을 하고 있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 광범위한 보도가 신명기사가의 관심을 지시하고 있다. 신명기사가의 역사가 주로 히스기야에 대하여 칭찬한 것은 산헤립의 침입에 대한 그의 반응이다.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는 톡특하게 아시리아의 위기 동안 히스기야의 믿음을 표현했다.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를 그는 믿었다. 그후에 유대의 왕들 가운데 그와 같은 자가 없었고, 그전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왕하18:5).
히스기야의 믿음에 대한 강조는 그의 통치에 대한 두가지 관련된 특징으로 명백해진다: 부정적으로는 아시리아인들이 히스기야와 그의 하나님에 대한 조롱으로, 긍정적으로는 히스기야의 기도이다. 첫 번째 경우에서, 신명기사가는 그의 다른 자료에서 제시한 중심 사상을 효과적으로 이용을 했다. 반면에 그 뿌리 bit 왕하18-19에서 9번 나타나고(주로 B'이야기에서), 그것은 신명기사가의 역사의 나머지에서 단지 두 번 나타난다. 신명기사가의 평가를 분리하면(왕하18:5), 그 뿌리은 히스기야(왕하18:19-25)와 예루살렘의 거주자(왕하18:28-35)에게 대한 랍사게의 말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Brevard Childs의 의하여 심리전으로, 그의 말들이 히스기야와 야훼에 대한 조롱으로 적절하게 기술되었다.
랍사게의 처음의 말은 "너희가 믿는 이러한 믿음이 무엇이냐?"(왕하18:19)라고 시작한다. 랍사게는 "너희가 누구를 의지하여 나를 반역하느냐?"(왕하18:20)라고 묻고 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애굽에 대한 믿음(왕하18:21, 24)과 히스기야가 그의 산당과 예루살렘에 집중되어(왕하18:22) 있는 제단들을 제거할 때 야훼를 믿는 것에 대하여 조롱을 하고 있다. 실로 랍사게는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멸하라고 야훼 당신이 명령을 했다고 선언을 하고 있다(왕하18:25).
히스기야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루살렘의 거주자의 유익을 위해 말한 랍사게의 두 번째 말은 히스기야와 그의 신하들을 이간질 시키려고 시도했다. 앗시리아의 사절단들은 믿음과 구원사이에 관계에 한 역할을 했다. 그들의 왕에 대한 유대인들의 믿음은 그들을 구원할 능력에 대하여 믿거나 믿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랍사게는 예루살렘의 거주자에게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말라. 그가 너희를 구원해 주지 못하리라"(왕하18:29)라고 경고를 한다. 또다시,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야훼를 믿어라"(왕하18:30)라는 믿음을 조롱한다. 히스기야와 야훼는 결코 유다를 구원할 수 없다고 조롱을 한다(왕하18:30, 32).
신명기적 땅의 신학의 풍자시에서 가진 그의 연설의 결론을 보면, 랍사게는 앗시리아의 왕을 대신해서 괴롬을 당한 예루살렘의 시민에게 제안을 확장했다: "곡식과 포도주의 땅, 떡과 술의 땅, 감람류와 꿀의 땅"(왕하18:32)에서 평화하라. 모압의 평지위에 이스라엘 사람처럼, 아시리아의 왕에게 예루살렘의 백성이 복종하므로 죽지 않고 살 것이다. 신명기역사에서, 야훼는 전적으로 다른 신과 구별된다; 그러나, 랍사게의 두 번째의 말에서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사마리아의 신들을 포함해서 그 민족의 신들이 앗시리아의 신들이 승리할 수 없다면 야훼도 역시 그렇다(왕하18:33-35)고 했다.
반면에 그의 두 번째 말에서 그들의 왕 히스기야로부터 예루살렘의 거민들을 고립시키려고 시도했다. 랍사게의 세 번째 대화에서(왕하19:10-13), 그는 히스기야를 그의 신으로부터 고립시키려고 시도를 했다. 그는 히스기야의 "앗시리아의 손에 결코 예루살렘이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비웃었다. 그 민족의 신들이 그들의 나라와 대표하는 왕들을 구원할 수 없듯이 야훼도 히스기야도 구출할 수 없을 것이다(왕하19:12-13).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의 거민의 비웃음속에서,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끊임없이 그의 신을 믿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를 구출할 신을 믿지 말라"(왕하19:10). 랍사게의 세 번째 메시지의 병렬적 배열은 유대인과 왕과 하나님 사이의 결속을 해명하는데 랍사게의 불가능을 강조한다. 그 반복된 조소는 유효하지 않다. 압도적이고 당황케하는 앗시리아의 침입일지라도 히스기야의 믿음은 단호했다.
그의 전거에서 개혁의 동기와 그의 자신의 예정을 따라서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을 볼때에, 신명기사가는 히스기야가 그의 성전, 왕조, 도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붙어 있는 것으로 묘사를 했다. 그의 두번째 말을 들어보면, 그의 옷을 찢고, 상복을 입고, 그리고 성전에 들어갔다(왕하19:1). 이사야에게 보낸 히스기야의 메시지는 "곤란과 질책과 치욕의 날 "이라고 비통해하며 "아마 야훼 하나님이 들고 그 말을 책할 것이다"(왕하19:15-19)는 것을 요구했다.
야훼에 대한 그의 믿음은 심지어 그의 기도에서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왕하 19:1-4절의 B` 이야기에서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그의 유익을 위해 야훼께 중보기도를 해주기를 요구했고, 왕하19:15-19 그리고 20:2-3절의 기도에서 히스기야는 야훼께 직접적으로 기도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나두고도,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는 신명기의 역사에서 단지 다른 왕의 기도를 형성시켰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표현은 저자의 기술(기교)을 고려한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는 널리 크게 신명기적사가의 구성으로 간주되어진다. 히스기야의 첫 번째 기도에서의 수많은 신명기사가의 상투적인 표현과 주제를 기초로, 이 기도는 신명기사가의 구성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히스기야의 두 번째 기도의 경우에서도 신명기 사가는 히스기야의 병을 예루살렘의 구출과 그의 자신을 관련하여 취급하므로 근원을 연결시켰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의미를 명백하게 나타낸다. 그의 간구는 그의 특별한 환경 때문에 드려졌다. 그러나 Richard Pratt가 보는 것처럼 그것들은 또한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의 탄원을 상기시킨다(삼하7:18-29); 왕하8:22-53).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와 같이 히스기야의 기도는 왕권과 예루살렘의 의식에 대하여 비판적인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안식과 성전과 왕조에 대한 나단의 약속들에 대한 반응에 다윗은 그 약속들이 성취되기를 기도했다(삼하7:17-29). 우리가 볼 때, 솔로몬도 안식과 성전에 대한 약속들을 알았다. 솔로몬은 교대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성전의 호의적인 기능에 대하여 기도했다. 기대와 성취의 형태을 인지할때에, Pratt는 그 세왕의 기도사이에, 특히 히스기야와 솔로몬의 기도사이의 여러 관계를 세웠다.
첫째, 다윗(삼하7:22)과 솔로몬(왕하8:23)과 같이 히스기야는 야훼의 주권을 선언하고 있다(왕하19:15, 19). 예루살렘에서 "그룹들 위에 계신 큰무리의 야훼"는 하늘과 땅을 만든 동일한 전지 전능한 신이다(왕하19:15). 사실, 야훼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한 주장들은 히스기야의 첫 번째 기도 곳곳에서 포함을 하고 있다. 히스기야가 그의 첫 어두의 연설에서 선언하고 있다("당신만이 땅의 모든 왕들중에서 유일한 하나님이다";왕하19:15), 그는 간구하길 야훼가 보편적으로 "땅의 모든 왕이 되고 야훼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다"(왕하19:19)는 것을 알리도록 구했다. 통시적으로, 히스기야의 간청은 다른 민족이 야훼의 유일성을 알려지도록 하는 솔로몬의 간청을 상기시킨다(왕하8:43, 60). 동시적으로, 주권과 유일성에 대한 그 신명기사가의 주장은 야훼를 다른 민족의 폐배적인 신과 동질적으로 본 랍사게에게 대답을 한다. 그들의 민족을 구원하는데 어떤 신의 실패 다음에, 예루살렘의 야훼의 구원는 야훼와 인간이 나무와 돌으로 만든 "미신"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를 세울 것이다(왕하19:18).
두 번째로, 성전이 기도의 장소가 되게 해달라는 솔로몬의 반복된 요구와 일치하여(왕상8:27-30,33,35,38-40,42,44,48), 히스기야의 첫 번째 기도는 성전에서 드려지고 그의 두 번째 기도는 성전을 방문하려는 바램으로 응답된다(왕하20:5). 세 번째기도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눈이 성전을 향하기를 소원하는 솔로몬의 간구을 인용하고 있다(왕하8:29,52;왕하19:16). 그리하여, 하나님은 산헤립의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듣고 보셨을 것이다(왕하19:16). 네 번째의 기도는, 솔로몬이 민족이 괴로움과 병을 당할 경우에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왕상8:37). 그와 같은 상황의 경우 솔로몬의 두가지 기도를 분명히 한다(왕하18:17; 20:1). 다섯 번째로, 히스기야의 기도는 "온마음으로 당신 앞에서 행하는 당신의 종에게" (왕상8:23) 신성한 자비를 위한 솔로몬의 간구를 상기시킨다. 그가 구할 때, "내가 당신 앞에서 전심으로 행했습니다"(왕하20:3)라고 기도했다.
히스기야의 기도와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사이에 많은 평행절들은 신명기사가가 히스기야의 기도가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안에 현저한 목적을 상기시키도록 심사숙고해서 형성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히스기야는 왕좌와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에 그의 신뢰를 두었으며 솔로몬의 기도의 간청과 일치하여 행동으로 하나님께 간청을 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을 마음에 새겼다는 왕하19:20과 20:5-6절에서 히스기야에 대한 이사야의 보증은 왕권과 성전, 도시에 대한 신명기사가의 강조을 재확인하고 있다.
신명기사가들은 앗시리아가 침입할때에 야훼에 대한 히스기야의 확고한 믿음을 그의 통치기간에 뚜렷한 특징으로 그의 자료에서 주의깊게 편집하고 부가했다. 히스기야의 통치를 다시 재고할때에 그 광대한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문제들이 무엇이든지간에, 신명기사가가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이 생존한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두가지의 다른 경우에 신명기사가는 신의 중재의 동일한 이유를 ,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을 그의 명예를 지키려는 그의 소망으로, 그리고 다윗에 대한 충성으로 돌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19:34;cf. 20:6).
만약 히스기야에 대한 신명기사가의 묘사가 왕하18:1-20:11에서 동일하게 긍정적이었다면 그와 같이 그의 통치의 결론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메로다하 발라단의 강조점에서 묘사하고 있는 히스기야의 정중한 평가에서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최종적인 이야기는 그의 통치에 대해 다른 견지를 던지고 있다. 이사야의 심판의 말씀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이 경건한지 아닌지에 대한 토론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러나 심판의 말씀에 대한 중요한 포인트는 명백하다: 다윗의 왕조와 거룩한 성은 바빌로니아 민족 때문에 고통을 당할 것이다(왕하20:17-18). 갑자스런 적의 변화와 어조의 변화는 후기 신명기사가에게서도 나타난다. 다윗의 명성이 히스기야 시대에 흠없이 피하였을지라도, 이것은 항상 그렇게 되지 않는다.
히스기야 통치의 종말이 바빌로니아의 지배의 권세를 미리 암시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상당한 역사적인 어려움들이 나타난다. 학자들이 오랫동안 알고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바빌로니아의 사절단의 방문은 앗시리아의 침입의 날짜를 늦추어지는 것보다 오히려 최근에 예견이 되었다. 그 이야기의 순서는 그러므로 거의 문제적이다: 메로다하 발라단의 예루살렘 사절의 방문후에 앗시리아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원되었다.
Noth가 주장한 것처럼 만약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의 작품이 전적으로 부정적이었다면, 히스기야의 통치의 연속이 난점이 된다. 그러나, 신명기사가의 위치는 이사건을 배치한 이유가 명백하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바빌로니아의 정복을 예상하는 히스기야의 통치 초기에 삽입되거나 수정된 이사건은 산헤립의 국가에 대항하여 싸우는 히스기야의 완전한 투쟁이 될 것이다. 만약 성전이 뺏앗기고 확고한 다윗 왕조가 포로로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되는 것이 확실하다면, 야훼 하나님에 대한 히스기야의 믿음이 앗시리아 사람의 침입동안에 얼마나 가겠습니까?
반대로, 히스기야의 통치 말기에 놓인 이 사건은 두가지 목적을 나타낸다. 그것은 앗시리아의 침입의 위기 동안 히스기야의 믿음의 결과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의 통치의 현재의 연속는 히스기야의 업적을 무효화시키지 않는다. 비록 이 문제해결이 궁극적으로 왕조나 성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앗시리아의 침입 위기동안 히스기야의 문제해결을 강조하는데 성공했다.
바빌로니아에게 예루살렘이 실제적으로 항복을 했더라도, 포로기 신명기 사가가 그의 전임자와 선조들보다 비길 수 없을 만큼 히스기야를 지지하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 이전의 이스라엘과 같이 유대가 국가적인 멸망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에, 히스기야는 신명기 신앙의 중심을 이루었던 약속을 의지하였고 야훼 하나님은 그 성을 구원함으로 응답을 하셨다. 사실, 나는 히스기야의 야훼에 대한 믿음(왕하18:6)은 한 포로시대와 특별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적군의 침입에 대한 절대적인 솔로몬 기도의 탄원에 대한 히스기야의 고수를 존중한다면, 그들의 약속을 향한 솔로몬의 기도 탄원을 고수한 포로기 사람들도 존중할 것이다(황상8:46-53). 이러한 입장으로 볼때에 히스기야의 위치는 모범적이다. 여러 가지 위기를 직면했을 때의 그의 믿음은 비교할 수 없는 한 왕으로서 그의 평가를 높여주고 있다.
Ⅲ. 요시야: 놀라운 개혁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는 히스기야를 한 개혁자로 언급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탁월한 믿음을 강조하여 언급을 했다. 그는 오히려 요시아를 개혁자로 더 명시를 하고 있다.
"히스기야 전에 그와 같이 온 마음으로, 온 뜻으로 야훼 하나님을 향하는 왕이
없었고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온 힘으로 그를 좇는자가 왕이 없었다."
Halpern과 Friedman은 이러한 거창한 칭찬은 신명기 6: 5에 "너는 전심으로 온 뜻
으로 온힘으로 너의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라"는 엄숙한 3중적 지시를 이루는 유일한 왕에대한 판단이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기사가는 요시아를 야훼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언급을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에 대한 언급을 했다. 또한 그것은 나에게 요시아를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고, 포로기 신명기사가는 또 "야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언급하는 그 글들을 마음에 두었던 것 같다.
"야훼께 돌아가는 것"을 언급하는 신명기사가의 역사에 나타난 그들의 텍스트는 계약의 파문, 국가적 멸망, 또는 추방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왕상 8:33, 48). "야훼께 돌아오는 것"은 순종을 의미한다. 신명기 30:2에 요시아의 평가와 같이 회개와 순종을 연결시켰다(왕하23:15-20). 신명기사가는 북쪽의 요람(왕하3:2)과 예후(왕하10:26-27)의 통치시대와 남쪽의 앗사(왕상15:12), 여호사밧(왕하22:47)그리고 히스기야(왕하18:4,6)의 통치시대에 제의 개혁들을 간단히 언급하고 있고, 요시아의 개혁은 그의 통치의 신명기사가의 헌정을 가리킨다.
Hoffmann는 요시아의 개혁의 이야기는 이전의 통치자들의 죄를 돌이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을 했다. 그러므로, 요시아는 아세라상(왕상23:6), 단상과 목상(23:14), 산당(23:8), 도벳(23:10) 성전의 두마당에 세운 제단들(23:12), 므낫세로부터 그에게 남긴(21:3,5) 하늘의 주에 대한 섬김(23:4,5,12)을 없앴다. 요시아는 솔로몬이 그의 이방인 아내들을 위하여 세운 산당을 파멸시키고 신성모독으로 여겼다(왕하23:13-14).
므낫세와 솔로몬의 죄들을 바로잡는 것 말고, 또한 요시아는 익명의 이전의 왕들의 많은 죄악들을 수정했다. 요시아는 바알에게, 해와 달과 별에게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없앴다(23:5). 그는 미동을 위한 작은 방을 헐고(23:7) 태양에게 바쳐진 말들과 수레를 제거했다. 더욱이 요시아의 개혁은 이전의 왕들에게서 언급되지도 않았고 이전의 통치자의 잘못으로 돌리지도 않았던 부정한 제의적인 행동과 물건들을 제거했다. 그는 바알이나 아세라 그리고 하늘의 신에게 바쳐진 성전의 기명을 없애고 불살랐다(23:5). 또한 그는 예루살렘의 성에서 유대까지 하나님의 제사장을 데리고 왔고 이전의 그들의 산당을 무시했다(23:8). 모든 그 제의 실행의 발달과 근원이 무엇이든 신명기사가는 예루살렘에서의 요시아의 개혁운동을 서술했고 그것을 폭넓게 기술을 하고 있다.
모든 그의 선조들의 계속되어지는 제의적인 죄악들을 바꾼 것 뿐만 아니라 역시 요시아의 개혁은 정치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솔로몬의 산당을 멸시한 유일한 왕으로써 그 나라의 분할의 원인을 제거했다. 바꾸어 말해서 솔로몬의 죄에 대한 요시아의 도전은, 이전의 북왕국의 그의 개혁들에 있어서 다음장의 배경을 위한 자리를 놓은 것이다. 앗시리아에 대한 이스라엘의 몰락(왕하19:9-12)이 히스기야가 앗시리아의 면전에 직면하는 위기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다하더라도, 여호사밧의 죄에 집약된 이스라엘의 실폐는 요시아 시대에 국가적인 새로운 갱신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요시아는 근원적 죄를 명백하게 상기시키는 말로 여로보암의 죄를 수정했다. "이스라엘 왕들이 지은 사마리아 성에 모든 제당을 없애는"것과 산당의 모든 제사장을 죽이므로 인한 완전하게 개혁을 하고, 요시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왕하23:19-20).
만약 남쪽과 북쪽의 정화가 그 통일 왕국의 영광을 회복한다면, 유월절 기념은 통일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한 시대로 돌아가게 했다. 다시말해 과거를 현재를 근거로 비교하면 그의 통치의 시대 이래로 "이와같이 그러한 유월절이 드려진 적이 없었다"(왕하23:22). 요시아가 그의 통치의 18번째 해를 성전을 수리함으로 시작을 했을지라도, 그는 올해 성전에서 "언약의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민족으로"(왕하23:21-23)성전에서 유월절 의식을 행함으로 끝마친다. 그러므로 율법책의 발견과 훌다의 예언이 요시아가 그 민족을 개혁하도록 했다면, 유월절 기념식을 신호로 이 율법책에 의해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헌신이 증진 되었다.
바벨론 포로시대 이전의 신명기사가는 요시아의 국가적인 삶의 개혁을 칭찬한 반면에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는 요시아에 대해서는 비난을 하지 않지만 돌이킬수 없는 국가적인 멸망에 대해 므낫세를 비난한다. 이것이 요시아의 통치에 대한 중요성에 관한 바넬론 포로시대의 이전의 신명기사가와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 사이의 과장하고 있는 관념적인 차이점에 대한 관심이다.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의 요시아의 통치에 관한 편집은 가볍고, 그들의 차이점들이 때때로 상상할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다. 포로시대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요시아의 개혁은 므낫세에 의해서 발생한 위험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요시아가 노력한 이유를 부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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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22-23의 고도의 문체로 기록된 기사에서 요시아가 완성한 개혁자 왕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에 부와 지혜로 솔로몬 통치를 구별하고, 신뢰로 히스기야 통치를 구별한다면 지배적인 개혁은 요시야 통치로 구별할 수있다. `모세의 모든 토라'에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요시야의 헌신은 선조와 후계자들사이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4. 결론
최종형태에서 신명기역사는 대개 다소 회의적인 분위기로 이해하였다. 사실 노트(Noth)는 전체 신명기역사를 `이스라엘과 유다의'" 확정적인 목적"과 "전체 병합"을 정당화 시켜주는 것으로 본다. 포로의 관점에서 볼 때 다윗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를 구원 할수없고(왕상9:4-9), 요시야 개혁은 므낫세의 의 죄를 대신 갚을 수가 없었다., (왕하 21:10-15;13:26-27). 이 주장들에 타당성이 일부 있더라도 폰라드와 볼프는 신명기 역사의 최종적인 형태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지 않다는 다른 이유들을 제시하였다.양립불가능성의 양식의 포로기 기원의 인정은 이러한 주장을 지지해준다.
포로기 신명기기자는 과제를- 그앞에 있는 자료들을 오랜 사망기사를 보다많이- 윤색하는 것로 이해한 듯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알려진대로 포로기 신명기 기자가 만일 유다의 포로를 므낫세의 단일 개인 죄로 돌린다면,- 즉 므낫세는 이스라엘자녀앞에 야웨가 멸망케 했던 나라들보다 더많이 악하도록했던 왕이었다. - 이와 같은 신명기 기자는 자신의 저작에서 다른 개인들의 업적을 인식하고있는 것이 그럴 듯하게 보여진다. 포로기 신명기기자가 백성들에게 환원(이스라에땅으로 회복)의 직접적인 희망을 거의 보이지 못하더라도 구원받을 수 없는 폐망의 역사를 제시해주는 데 관심하여 여러 군주들 사이에 차이점들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런한 관점은 포로가 선과 악 사이를 구별하도록 하지는 못한다. 반대로 소수의 긍정적인 수준의 왕에 대해 대부분의 퇴보의 왕들을 둘필요가 있었다. 만일 후자(긍정적인 왕)의 업적이 궁극적으로 전자의 왕들이 행한 것들을 반전시키지 못한다면 포로기 신명기 기자는 그기자에의 가장 가치있는 수준을 세우고 주위를 딴데로 돌리지않는다. 신명기 기자는 바벨론 포로가 토라의 교훈들과 유일신 숭배, 예루살렘 독점성을 실제로 확증해준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이러한 스탠더드의 지속적인 가치를 믿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이런 양립 불가능의 양식은 이러한 목적의 긍정적인 수단이 되었다.
양립 불가능 양식이 솔로몬과 히스기야 ,요시야왕에게 적용되였지만 그들은 상충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신명기 역사에서 전체적으로 독특하지는 않았다. 유사한 비교양립불가능의 양식은 에언자 로 세운 모세에게 적용될 수있다.
모세와 같은 예언자 이스라엘에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여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신34:10-12)
분명히 모세는 독특했지만 그의 독특성은 간결하지 않았지만 주의깊게 규정되었다.후의 예언자와는 달리 모세는 야웨를 대면하여 알았다. 후의 예언자들은 모세와 비교해볼 때 그들이 수행했던 기적의 수나 성격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모세에 적용한 양립 불가능의 양식은 다양한 양립불가능의 양식이 상호 모순적이지 않다는 경우를 보강해준다. 개별적인 경우에 포로기 신명기 기자는 지도자가 보유한 특별한 특징을 최상급의 심판과 밀접하게 결합한다. 신명기 역사의 분리된 편집층의 한 열쇠 보다도 양립 불가능의 양식이 포로기 신명기기자가 과거를 통일하고 초첨을 맞춤으로 중요한 수단이 된다.
9, 김성래
pp. 80 - 85.
한마디로 말해, 요시야는 예루살렘-성전에 있는 단 하나의 정통적 제단에서 모든 예배 의식을 통합하였다. 그는 므낫세에 의해서 성전에 놓여진 아세라를 제거하였고(cf. 2 Kgs 21:7) 그리고 그것은 모세가 금송아지를 파괴한 방법을 연상케한 파괴였다(Deut 9:21;cf. Exod 32:20). 덧붙여서, 그는 성전 관구에 위치한 "신성화된 남자들"의 집을 헐었다.
유다와 예루살렘 안에서 개혁으로 다루어지는 두 번째 면에서, 요시야의 노력은 예루살렘 밖으로 넓게 퍼졌다. 신명기는 그들의 신들을 숭배했던 나라들의 모든 장소가 파괴되는 것을 요청했고, 그래서 요시야는 조직적인 방법으로 진행했다. 비 야훼적인 바모트(집)를 제거하고, 요시야는 제사장들이 희생 제사를 드렸던 유다의 도시 안에 위치한 바모트(집)를 훼손했다. 이들 "나라의 제사장들"은 요시야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왔으나 이들에게는 성전에서 중요한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vv. 8-9). 다음으로, 아이들을 "불을 통해 지나가게" 하는 곳인 힌놈의 계곡에 제의적 장비도 이와 마찬가지로 훼손되었다. 성전 주위에 돌아오면서, 그는 히브리 텍스트에 다른 방법으로 언급되지 않은 한 예배로서, 태양을 헌신적으로 숭배하기 위해 말과 마차를 멀리 보내 버렸다(v. 11). 아하스와 므낫세에 의해서 설비된 제단들을 의식적으로(전례적으로) 파괴시켰고, 그들의 가루를 오아시스 Qidron에 뿌렸다(cf. 23:6). 다음으로 요시야에 의해서 훼손된 제의적 기구(산당)들은 솔로몬이 그의 이방인 부인들이 그들의 국가적 신을 숭배하기 위해 세운 바모트(집)였다(v. 13). 마지막으로, 요시야는 마세보트를 부서 버리고 신명기적 법률 제정에 일치하여 아세라를 찍었고 사람의 뼈로 가득한 것으로 그 지역을 비신성화 했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요시야의 개혁에 몇몇 중요한 관심이 즉시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의 개혁 동안 제의적 활동과 사물들을 정화시킨 것은 신명기에 의해 정확하게 불법적인 것들이다. 요시야의 노력은 야훼보다 다른 신을 경배하는 모든 방법(도구)들을 제거하고, 어떤 비 야훼적인 항목들을 예루살렘 성전이 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예식으로 연합된 모든 장소들을 종교 의식적 훼손이라는 것을 포함하였다. 요시야의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청사진으로써 취급된 외국 사람들이 숭배하는 예식의 신명기적 특색과 중앙집권과 제의적 순수성에 대한 신명기적 관념이 거의 질문할 수 없다. 동시에 요시야의 어떤 행동에 대해 특별히 주목해야 되는 것은, 특히 솔로몬에 의해서 세워진 바모트가 아직 활동 중이고, 그 개혁이 히스기야 초기에 기인된 것이라는 질문이다(2 Kgs 18:4). 그래서 요시야는 유다의 예배 그리고 종교적 국가적 그리고 민족적 동질성을 신명기적 청사진에 일치하여 재수립하였다. 므낫세의 통치에 기인된 동질성의 붕괴가, 만약 짧은 시간동안 이라면, 신명기적 관념에 대한 요시야적 계약적 의식적 법률 제정으로 지금 상쇄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신명기 안에서 세운 경계에 의해 구조화된 국가적 동질성은 이스라엘의 쇠퇴한 국가, 요시야의 개혁이 지배적인 그 지역이 포함되고 있다. 여로보암의 중심적으로 채용한 제단의 경계, 벧엘의 제의적 기구에 요시야는 그것의 제단과 더불어 바마를 파괴했고 아세라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v. 14에 묘사되어 있는 비슷한 방법으로 신성화된 지역을 훼손했다. ; 그는 제단 주위에 묻혀 있던 그들의 뼈를 태워 버렸고, 그래서 어떤 의식적 목적을 위한 기구를 비신성화했다. 신명기적 사관에 일관하는 방법으로 요시야는 옛 이스라엘 국가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있는 제단을 위해 이런 예식을 넓혔고, 그들에 대한 사람의 뼈들이 묻히고 제사를 지내는 그런 제단의 제사장들의 제물에 의한 불법적 제단을 훼손했다. 그때 단 하나의 방법으로 이스라엘과 유다 전체가 제의적 단어로 재결합되었다. 야훼에 의해서 선택된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떨어져서 존재했던 예배의 장소는 없었다.
그의 개혁에 대한 마지막 행위로써, 그리고 Deut 16:5-6의 제의적 관념과 일치하여, 요시야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간 시기 이래로 신명기적 역사에 언급되지 않은 유월절로 백성들을 이끌었다, 예를 들어, 나라에서 그것의 의무가 실패함으로 그것을 채우기 위함이다. 이 축제의 상징적 의미가 신명기적 입법에 더욱 더 가득한 것에 이르게 하고 있다. 애굽의 노예 신분으로부터 해방을 기념하기는 유월절 의식은 근본적으로 계약적 공동체의 형태를 의식적으로 재창조하는 것이고, 신명기의 헌장이 박멸되는 것에 의해 모든 종교적 예식이 금지된 한 나라가 세워졌고, 지금 이 재평가된 유대 공동체에 의해서 평행 되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에 금지된 모든 중개적인 것들을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는 마지막 개혁 운동이 아주 영향력 있게 신명기적 저자의 예언자적 목소리, 이야기 설화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요시야의 통치 기간에 이러한 지각 있는 방법으로 신명기적 역사서의 저자에 의해 이원론적 기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왕의 행위를 설명하는 역사로써, 계약의 축복이 어떻게 얻어지고 사람의 부가 어떻게 보증이 되고, 계약과 그것의 의미로 연합된 보복적 정당성이 종교적으로 구조화된 관념의 문맥으로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가이다. 사람들이 신명기적 집대성을 규정하는 단어들이 민속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의되고 있는 것은 그 점에 있어서 명하여진 계약 의식의 적합한 제정에 의해 의식적으로 재창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뒤따르는 왕의 궁극적 실패를 증언하는 이야기의 연속성 이래로 요시야는 므낫세의 행위를 용서하기 위한 마음내키지 않는 신성함뿐만 아니라 그의 개혁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확한 보복의 관념, 신명기적 전통의 본질적 부분이 계속 유지되고,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 전체가 이해할 수 있는 안정되고 믿을 수 있는 영역이 보증되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방법에 있어서, 신명기적 운동의 예언자적 입장을 그냥 훑어보면 안 된다. 특별한 신명기적 역사를 위해 그리고 신명기적 전통을 위해 나비(제사장)의 특색에 대한 중요성이 이 그룹의 동질성의 다른 면을 구성한다. 전체 역사가 구별되고 분명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그런 국가들 가운데 백성들의 흩어짐에 의해 유다의 민족적 동질성이 위협받고 그리고 나라의 쇠망을 가져오고 국외 추방을 인도하는 그런 사건들을 반영함으로써 구조화 될 때, 이야기 설화 기사는 나라들 중에 완전한 동화와- 분해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의 민족적, 종교적 공동체로 남기 위해 그리고 회복하고 되찾기 위한 필요한 관습을 찾는 백성들을 가르치는 도덕적 관점에서의 목적으로서 취급하고 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야훼를 위해 거룩하게 되는 이 백성의 경계선을 선포하는 선언을 공급함으로써 요시야는 조직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이런 요구들을 채우고, 이스라엘이 미래에 신명기적 저자에게 나라와 백성의 관념을 어떻게 회복시키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방법으로 신명기적 저자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그룹을 재건한 그 나라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변의 일부분의 틀로 창조하고, 신명기 안의 하나의 관념으로써, 그리고 요시야의 행위에 대한 기사에서 역사의 목적에 매우 가까운 관념을 재건하는 것으로써 정의한다. 동질성의 실제화와 그것의 잃어버림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틀로써 포함된다. 신명기의 오늘은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별시키는 신명기적 의식 행위를 적합한 이행으로 일치할 수 있고, 어떤 시간에서 의식적으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계약을 깨기 위한 파괴의 위협이 동질화할 수 있는 전체로서 이와 같은 동질화된 공동체를 유지하는 위험에 서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 삶의 위치를 통해 지나온 자신의 국가적 자취에 의해 채용된 역사가 그들이 거주하는 가운데 경쟁하는 사회와 민족적 세계 구조로부터 이 그룹이 그들 스스로 구별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이런 동질성이 그들 스스로 관념적 동질성을 연속적으로 재형성하고 재창조하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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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apget " Historial reliability of chroniches" J sot 33 (1985)
P83-107
2-5-김성국
논문 : S.Japhet the Supposedd Common Athorship of chroniclos and Ezra -Nehe mah Inrestigated VT 18(1968) 332-372
A. 주석의 범위
역대기(2권)은 실질적인 부분들은 이미 구약성경의 사무엘, 열왕기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구절들(정확한 )을 기초로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석가는 어떤 접근방법으로 주석을 하느냐를 결정한다.
현재의 주석을 통한 주된 목적은 역대기 사가 자신이 전수하고 싶었던 그 의미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해서 역사.지리. 유사구절들의 유사점에 대한 의문들에 대해서는 등한히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Topics)들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으므로 주석의 부분에서, 토론은 그가 그것을 다루었던 그리고 그가 역대기에 왜 이러한 주제를 포함시키고 사가의 의도에 포커스를 맞출 것이다. 또 하나 자료의 선택, 유산text사이의 강조점(주안점의 차이(쉽게 판단되지 않는)등 어려움이 야기 될 것임
예를 들어 많은 것은 철자법. 문체상의 습과(관습), 내용 전일(사건)에 대한 차이에 기입한다. 그래서 그것은 쉽게 현재의 주석에서 다루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최그느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에다 역대기 사가가 기본(기초)으로 삼았던 사무엘. 열왕기의 내용이 출판된 히브리 성경의 MT와 항상 똑같은 유는 아니었다라는 한발 더 나간 생각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증거는 사무엘. 열왕기의 그리스 번역에서 볼 수 있고 쿰란에서의 사무엘의 히브리 본문의 두루마리 단편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하게 출판되어 있지는 않지만 Lemake and ulrich은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의 차이는 역대기 사가의 개인적인 편견, 관심이라기 보다는 그가 사용했던 히브리 본문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경우에 있어 그러한 이유들에 대해 충분히 토론을 (포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토론을 통한 결정이 역대기의 주장(표현별도)하는 주석자에게는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역대기 사가의 "소스""가 존재하지 않고, 사가의 자유스러운 "도합"이라고 생각되는 구절들에 대한 주석은, 가능한한 text에 의해 야기되는 모든 문제를 다루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과 관련 두가지의 단계가 있는데 덜 중요한 단계는 역대기 사가가 물려받은 재료의 범위.특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가정인 고국 폭넓고 자세하게 함)
그러나 이것은 독자의 주위를 더 중요한 역대기 사가가 이러한 재료를 포함시킨 이도 그것을 다룬 방법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 어떤 경우에 이 두 단계가 더 민감하게 요구되었음(주석에서)이러한 모든 연구들이 개별적으로 출판되었고 결과만 야기된다.
B. 정경에서 위치와 이름
히브리 정경에서 역대기 1,2권은 한궈으로 간주하고 the events the days라고 부른다. 이러한 표현은 즉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 of Judah같이 더 정확한 정의를 하기 위해 부여되는 장들의 책, 즉 구약에서 일어난다.
역사적인 범위의 책은 Adam에서 페리시아 왕국에까지 미쳐 있다. 어떠한 정환한 정의도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사용이 유대전승에서 남아있다는 것은 "Jargum"에서 보여지는 "fuller title"에서 볼 수 있음
특히 제롬은 이러한 전통에 익숙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번역 그리스제목인 Prologus galeatus (the proloqut to his translation of the books of samuel and kings)
제롬의 그리스어 사용은 히브리어와 비슷한(동등한) 것으로서의 제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롬의 이러한 영향이 루터에 전해져, 제롬의 의도가 결국 폭넓게, 우리의 책이름으로 사용되어졌다.
70역에는 "역대기"를 두가지로 나누고( paraleipomenon)부름, 이것은 역대기가 사무엘. 열왕기의 많은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호하다(단지 반복이 아니다) 역대기 사가가 재료의 선택과 배열 결정하는 그의 자신 적극적인 의도를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이름은 문제가 있다.
사실 70인역과 기독교 교회에서의 V에대한 잘못된 호칭은 지금가지 이러한 책들에 대한 소홀과 가치허식을 가져왔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지하듯이 역대기 책은 한작품으로 중세까지 이루어졌다.
시리아 전통은 치자하고는 역대기는 정경의 위치를 의심받은적이 없고 Josephus의 암시에 의한다면 이미 1세기때 기독교와 유대교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대기는 히브리 정경에는 세 번째 분야의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다. 어떤 떼에는 세 번째의 머리부분에 있기도 하다.
역대기가 히브리 성경의 끝에 오는 것에 대해 처음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합쳐지지 않았겠느냐하는 가정으로 색명되어지곤한다.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사무엘 열왕기에 이미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덜 중요한 역대기에서 떨어져 나와 에스라 느혜미야만 정경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추가로 후에 역대기가 정경화되었다.
H Caxzelles는 이러한 견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역대기가 Sevites에 공헌한 적극적인 역할이고 두 번째 성전시기에 사두개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비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아무 어려움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함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성전 파괴 이후에 바리새 전통이 표준(규범)화 되어진 후에 역대기가 정경화되어졌다고 그는 생각한다.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의심의 여지가 많다. 생각들은 역대기의 정경화 과정을 유례없이 많은 과정을 겪었다고 하고 정경화 과정 자체를 완전히 잘못얘기하고 있다고 함
Willi의 말대로 정경은 선택의 작업이 아니라 유전의 권위의 선포라고 강조함으로 Cazelles를 반박함
에스라 느헤미야보다 역대기가 후에 전경화된 결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70인역에서 각기 따로의 수용은 비교적 초기에는 서로 다르게 취급되었고 정경화되었다는 역대기가 히브리 정경의 마지막에 위치에 있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설명될 수는 없지만 세 번째 부분(저작)잡다한 모음의 내용내에는 이러한 필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C. dureorl 작품의 범례
역대기 작품의 범위에 대해 논함에 있어 두가지 불일치가 있음
첫째, 역대기사가가 에스라. 느헤미야의 책에 대해 부분적인 원인이 있느냐 아니면 총체적인 책임이 있느냐 하는 것
둘째 역대기서의 자체의 2차적인 재료에 대한 의심과 관련 일치되어지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
S.Japget " Historial reliability of chroniches" J sot 33 (1985)
P83-107
2-5-김성국
논문 : S.Japhet the Supposedd Common Athorship of chroniclos and Ezra -Nehe mah Inrestigated VT 18(1968) 332-372
A. 주석의 범위
역대기(2권)은 실질적인 부분들은 이미 구약성경의 사무엘, 열왕기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구절들(정확한 )을 기초로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석가는 어떤 접근방법으로 주석을 하느냐를 결정한다.
현재의 주석을 통한 주된 목적은 역대기 사가 자신이 전수하고 싶었던 그 의미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해서 역사.지리. 유사구절들의 유사점에 대한 의문들에 대해서는 등한히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Topics)들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으므로 주석의 부분에서, 토론은 그가 그것을 다루었던 그리고 그가 역대기에 왜 이러한 주제를 포함시키고 사가의 의도에 포커스를 맞출 것이다. 또 하나 자료의 선택, 유산text사이의 강조점(주안점의 차이(쉽게 판단되지 않는)등 어려움이 야기 될 것임
예를 들어 많은 것은 철자법. 문체상의 습과(관습), 내용 전일(사건)에 대한 차이에 기입한다. 그래서 그것은 쉽게 현재의 주석에서 다루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최그느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에다 역대기 사가가 기본(기초)으로 삼았던 사무엘. 열왕기의 내용이 출판된 히브리 성경의 MT와 항상 똑같은 유는 아니었다라는 한발 더 나간 생각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증거는 사무엘. 열왕기의 그리스 번역에서 볼 수 있고 쿰란에서의 사무엘의 히브리 본문의 두루마리 단편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하게 출판되어 있지는 않지만 Lemake and ulrich은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의 차이는 역대기 사가의 개인적인 편견, 관심이라기 보다는 그가 사용했던 히브리 본문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경우에 있어 그러한 이유들에 대해 충분히 토론을 (포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토론을 통한 결정이 역대기의 주장(표현별도)하는 주석자에게는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역대기 사가의 "소스""가 존재하지 않고, 사가의 자유스러운 "도합"이라고 생각되는 구절들에 대한 주석은, 가능한한 text에 의해 야기되는 모든 문제를 다루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과 관련 두가지의 단계가 있는데 덜 중요한 단계는 역대기 사가가 물려받은 재료의 범위.특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가정인 고국 폭넓고 자세하게 함)
그러나 이것은 독자의 주위를 더 중요한 역대기 사가가 이러한 재료를 포함시킨 이도 그것을 다룬 방법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 어떤 경우에 이 두 단계가 더 민감하게 요구되었음(주석에서)이러한 모든 연구들이 개별적으로 출판되었고 결과만 야기된다.
B. 정경에서 위치와 이름
히브리 정경에서 역대기 1,2권은 한궈으로 간주하고 the events the days라고 부른다. 이러한 표현은 즉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 of Judah같이 더 정확한 정의를 하기 위해 부여되는 장들의 책, 즉 구약에서 일어난다.
역사적인 범위의 책은 Adam에서 페리시아 왕국에까지 미쳐 있다. 어떠한 정환한 정의도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사용이 유대전승에서 남아있다는 것은 "Jargum"에서 보여지는 "fuller title"에서 볼 수 있음
특히 제롬은 이러한 전통에 익숙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번역 그리스제목인 Prologus galeatus (the proloqut to his translation of the books of samuel and kings)
제롬의 그리스어 사용은 히브리어와 비슷한(동등한) 것으로서의 제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롬의 이러한 영향이 루터에 전해져, 제롬의 의도가 결국 폭넓게, 우리의 책이름으로 사용되어졌다.
70역에는 "역대기"를 두가지로 나누고( paraleipomenon)부름, 이것은 역대기가 사무엘. 열왕기의 많은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호하다(단지 반복이 아니다) 역대기 사가가 재료의 선택과 배열 결정하는 그의 자신 적극적인 의도를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이름은 문제가 있다.
사실 70인역과 기독교 교회에서의 V에대한 잘못된 호칭은 지금가지 이러한 책들에 대한 소홀과 가치허식을 가져왔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지하듯이 역대기 책은 한작품으로 중세까지 이루어졌다.
시리아 전통은 치자하고는 역대기는 정경의 위치를 의심받은적이 없고 Josephus의 암시에 의한다면 이미 1세기때 기독교와 유대교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대기는 히브리 정경에는 세 번째 분야의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다. 어떤 떼에는 세 번째의 머리부분에 있기도 하다.
역대기가 히브리 성경의 끝에 오는 것에 대해 처음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합쳐지지 않았겠느냐하는 가정으로 색명되어지곤한다.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사무엘 열왕기에 이미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덜 중요한 역대기에서 떨어져 나와 에스라 느혜미야만 정경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추가로 후에 역대기가 정경화되었다.
H Caxzelles는 이러한 견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역대기가 Sevites에 공헌한 적극적인 역할이고 두 번째 성전시기에 사두개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비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아무 어려움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함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성전 파괴 이후에 바리새 전통이 표준(규범)화 되어진 후에 역대기가 정경화되어졌다고 그는 생각한다.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의심의 여지가 많다. 생각들은 역대기의 정경화 과정을 유례없이 많은 과정을 겪었다고 하고 정경화 과정 자체를 완전히 잘못얘기하고 있다고 함
Willi의 말대로 정경은 선택의 작업이 아니라 유전의 권위의 선포라고 강조함으로 Cazelles를 반박함
에스라 느헤미야보다 역대기가 후에 전경화된 결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70인역에서 각기 따로의 수용은 비교적 초기에는 서로 다르게 취급되었고 정경화되었다는 역대기가 히브리 정경의 마지막에 위치에 있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설명될 수는 없지만 세 번째 부분(저작)잡다한 모음의 내용내에는 이러한 필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C. dureorl 작품의 범례
역대기 작품의 범위에 대해 논함에 있어 두가지 불일치가 있음
첫째, 역대기사가가 에스라. 느헤미야의 책에 대해 부분적인 원인이 있느냐 아니면 총체적인 책임이 있느냐 하는 것
둘째 역대기서의 자체의 2차적인 재료에 대한 의심과 관련 일치되어지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
9쪽
에스라-느헤미야와 역대기는 서로 대조된다. 예를 들면 역대기에서는 보복에 관한 주장을 말하고 있는데 아주 전형적이고 특징적인 언어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때때로 예언자의 말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인데, 에스라-느헤미야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에스라 9장과 느헤미야 9장의 기도에만 나올 뿐이고, 그나마 역대기의 특징적인 언어표현도 없고, 상당히 대조적인 개념의 것이다. 그리고 다윗과 다윗의 왕조와의 계약, 그리고 다윗왕조의 회복은 에스라-느헤미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10쪽
역대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관계라고 하는 계약적 기초에 있어서 근본적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시나이와 출애굽에 대한 신명기적 역사가적 관심에서 벗어났다. 에스라-느헤미야에서는 이런 발전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족장에 대한 약속과 시나이 계약의 중요성을 유지하는 것을 발견한다.
세 번째의 차이의 영역은 두 작품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에 관해서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이 두 작품들을 보급시킨 완전히 다른 태도를 인식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논쟁을 벌여왔다. 옛북왕국의 거주자들의 지위에 관해서는 이것이 더욱 뚜렸하다. 역대기는 사마리아가 멸망하고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북쪽에 계속해서 거주하였다고 믿는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노력이 열성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시도되어졌다. 에스라-느헤미야에서는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어디에도 없다. 에스라 3:1-4:5에서도(역대기의 사상에 상당히 근접해 있는) 역대기와 대조적인 모습이 뚜렷하다. 북쪽의 거주자들로서는 단지 아시리아인들에 의해 재정착된 외국인들을 알고 있을 뿐이며, 이들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거부되어졌다. 역대기는 이 재정착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는다. 만약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역대기가 자기 자신의 시대에 존재한 공동체의 정책과 사상에 관한 안내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에스라-느헤미야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다면, 설명되어지지 않는, 관점의 절대적인 변화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것이다.
네 번째로는 에스라-느헤미야가 민족의 과거 역사에 관해 다룰 때 역대기의 특징적인 전통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다른 어떤 관념(표상)에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역대기에서는 야곱이 줄곧 이스라엘로 불리우며(대상 1:34), 민족의 역사에 대해 중요한 인물로 취급받는다. 이런 명칭과 평가는 에스라-느헤미야에는 없다.
11쪽
옛북왕국의 재정착에 대한 관념(표상)은 출애굽전통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역대기와 차이가 난다.
역사쓰기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으로 그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충분하다. 폰 라드에 따르면 역대기는 역사를 기록하면서 '레위기적 설교들'이라고 불리우는 신학적인 견해들을 공급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고백적인 관점(견해)과 정경적 예언자들로부터 인용해온 것들을 결합시켰다. 게다가 이런 설교들은 역대기 이야기의 특징이 되는 백성들의 운명의 드라마틱한 전환을 자주 동반하다. 에스라-느헤미야는 이러한 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자기의 신념을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한 자신만의 다른 방법들을 채용한 또 다른 작가가 있었다고 하는 강한 인상을 준다.
결론적으로 역대기와 에스라-느헤미야는 별개의 작품이다. 에스라-느헤미야는 에스라-느헤미야의 복잡한 문학적 문학적 역사는 그 사상을 만족스럽게 개괄하는 데 있어서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 해결이 역대기를 언급하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역대기 또한 본래부터 있는 한 작품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스라엘이나 유대에서는 신성한 역사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작가의 시대까지 계속 기록되어져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에는 회복될 것이라고 하는 것에 관한 많은 힌트들이 있는데, 그런 넓은 윤곽은 물론 역대기독자들에게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교훈들이 그것이 위치한 작품속에서 만족스럽게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에스라-느헤미야의 어떤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어떤 언급도 없다.
D. UNITY
12쪽
역대기의 범위와 관련한 불일치의 두 번째 영역은 내부적 통일성이다. 그러한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세 번의 학문적 토론의 시기가 있어왔다.
1. 1920-1930년대에 가장 최고조에 달했던 첫째시기.--펜타토익 기원의 자료설.
RH.----역대기상에 있어서 펜타토익의 P자료의 전통을 잇는 기초설화가 있다. 일련의 개작의 흔적들(역대기를 신명기를 포함한 펜타토익에 조화시키려는 태도).
2. WELCH-----정반대의 의견. 역대기의 작업 시기는 포로후기 회복 이전. 망명생활을 하지 않은 공동체의 일원에 의해 쓰여짐. 역대상 1-9장뿐 아니라 P의 영향력을 무심코 드러내는 모든 구절들도 이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됨. 웰치의 연구서는 P의 관점을 갖고 있는 개정자의 작품을 분류하는 것으로 되었다. 본래적인 역대기는 D를 권위있는 법전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에서 자신의 책을 편집했다.
3. G. von RAD----다소 과격한 RH에 대한 반응. 역대기에 관한 신명기의 중요성을 강조. WELCH.와 같이 과격하지도 않다. 신명기적 역사에 자신을 기초하고 분리된 자료로서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서 펜타토익을 알고 있던 작가를 예상할 수 있다. 역대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차적 편집방법에 복속되며 레위인들의 위치와 연관되어서 특히 그렇다.
13쪽
2. Noth와 Rudolph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역대기를 한 사람의 작가의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후대의 덧붙임의 모든 방법에 복속된다는 증거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립되어 나타나며 하나의 동일한 개작의 결과가 아니다. 노트와 루돌프는 역대기 1-9장에서 비록 역대기를 위해 기본적인 핵심은 간직하고 있지만 이차적인 자료들을 많이 찾아냈다. 다윗의 통치에 관한 언급에서도 많이, 특히 역대기상 23-27장에서, 그리고 15-16장에서 부분적으로, 그리고 나머지부분(역대기하)에서는 거의 없다. 이러한 절들에 있어서의 후대 부가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불분명한 용어로 언급하는 것이 몇 개 있다.
3. 역대개의 통일성 문제를 역대기-에스라-느헤미야의 발전과 연관시키는 것. Cross는 역대기의 세 가지 분리된 판에 대해 주장한다.
①가장 최근의 것---Chr3(B.C.4000, 역대기-에스라-느헤미야 모두로 구성된 것.
Chr2---에스드라 1과 요세프스에서 그 증거로 사용해서 주장함(B.C.450), 끝에서 에스드라 1의 볼라게 전체를 포함한다. (세명의 파숫꾼이야기, Chr3에 뺀 이야기). 역대상 1-9장을 역대기의 좀 더 초기의 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②Chr1---Freedman에게 의지해서 주장하는데 역대기의 최초판.(역대상 10-역대하로 구성)이 되어 있다. 두 번째 성전건축 시기에 생겨났으며 스룹바벨 아래에서의 왕국의 회복제안과 함께 성전의 회복을 지지하기 위해 생겨남.
S.Japhet " Historial Reliability of Chronicles" JSOT 33 (1985)
P83-107
역대기 연구의 최근의 연구를 제펫은 세가지를 든다. 벨튼(P.Welten)의 `역사와 역대하10-36을 다룬 역대기서에서의 역사의 묘사'연구를 주목하고, 노오스(R.North)와 클라인(Ralph W.Klein)의 연구를 언급하였다. 그중에 벨튼의 연구는 대하 10-36의 부가된 부분에 대한 문학-언어적인 분석바방법으로 연구하였다. 그의 논문의 결론의 요지는 군주시대에 대한 지식의 역대기서의 기여는 극소수이고, 르호보암,웃시야,히스기야시대의 자료는 세 개의 짧은 단락으로 연구를 집중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대하 10-36장의 다른 모든 부가된 것은 3세기 초반 역대기 시대의 상황에 반응한 만들어진 자유로운 역대기 기자의 고안이다라고 말하였다.
히스기야 종교개혁에 대한 로워리의 평가
-제의중앙화
히스기야 종교 개혁이 남유다인 전반에 지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로워리는 복합차원의 관점에서 히스기야 개혁을 분석하고있는 것을 살필 수있다. 즉 제의 중앙화를 심리적,경제적,정치적,군사적 측면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을 볼 수있다. 심리적인 면에서 유월절축제를 지냄으로 유대인들이 제국의 복종의 상태에서 야웨의 충성으로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따라서 유대인 들이 앗시리아에 대하여 반란에 참여할 뿐만아니라 반란을 주도하는 개혁그룹에게 개혁을 계속 지속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로워리는 야웨의 충성심은 유대인들에게 반란을 지지하기 위한 강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며, 앗시리아의 억압에서 자유로의 긴 반역적인 행진을 시작하였을 때 유월절은 유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주) 또한 예루살렘으로 규칙적인 순례를 요구하는 것은 다윗왕조에 대한 위상을 높히는 심리적인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제의 중앙화는 예루살렘 수도와 왕족,성직자(레위인)들에게 상당한 경제적인 혜택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신명기의 십일조입법이 균등화로 나타났을 때 제의 중앙화는 반앗시리아적인 혜택이 있었다. 히스기야는 왕족의 재원을 고갈시키며 앗시리아로 세금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국내 세입 체계를 폐쇄하는 조치로 산당을 폐쇄하였던 것이다. 제의 중앙화와 십일조의 소비는 귀족 관료주의자들에게는 간접적인 생활비의 면세수단을 제공하였으며 수도의 경제를 활기띄게 하면서 예루살렘밖의 귀족 부양자들에게 계속적인 생활비를 제공하게 했다.
정치 군사적인 측면에서 제의 중앙화는 전략적인 혜택이 있었다. 앗시리아 군인 들이 예루살렘으로 침공할 때 포획하고 이용할 어떤 세금 저장고도 남겨놓지 않는 것이다. 또한 외곽 지역에서 야웨 제의 종교 대상물들을 제거함으로 적이 정복하는 과정에서 상대 적에게 유리하게 영향을 미칠 정신적인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물질을 뺐앗기는 수모를 당함으로 정신적인 타격을 입는 것을 미연에 방지기 때문에 야웨 제의물을 제거하는 것은 군사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히스기야왕 개혁 배경
왕중심의 개혁이다.
고대 사회는 왕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던 시대였다. 구약 성서시대에도 왕이 중심이 된 시대였다. 따라서 로워리는 히스기야 시대때의 제의 개혁은 왕이 제의 개혁을 하였다고 보았다./ 그래서 제의 개혁을 실시했던 것도 결국은 왕이 주도한 제의개혁이라고 본다.
로뤄리에 따르면 처음부터 끝까지 유다의 공식적인 제의는 왕의 정치적인 요구를 합법화 시켰고 왕의 이익을 전달하였다고 본다. 유다에서는 제의 개혁은 항상 왕들이 이끌어 났다. 또한 제의 개혁에서는 군주정치의 사회적, 정치적인 이익을 채울 수있도록 의도되어 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왕중심의 권력사회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왕이 중심이 되어 개혁을 일으킨 것은 그 밑에 개혁 세력이 있어서 그들이 의견을 제시하고 주도하여가면 왕은 그것에 대해 결정하여 주는 역할만을 감당하였을 것이다. 히스기야 궁정의 사람들이 바로 이 개혁을 주도하였던 세력이었다. 이들은 p의 전승을 알고 있었고, p의 제의에 정통하였던 사람들로, 신명기 역사의 초기작업을 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중 일부는 열왕기서에 나타나는 관료들과 잠언25장의 히스기야의 신하들일 것이다.(잠25.1)
이렇게 상정하여 볼 때 로워리의 주장은 왕의 개혁이였다는 것은 다소 협소한 의미를 주는 것같다.
군주정치에서의 사회적인 역할
왕정정치하에서 경제운영은 세금부과에 의해 이루어졌다. 국가적인 사업과 징병을 위한 모병작업등은 국민들에게 세금을 과다하게 요구하였을 것이다. 왕의 정책은 국민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왕정 정치하에서 국민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서 잉여 생산물을 만들고 법령에의해 정해진 세를르 내기에 무거운 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는 생산물의 변형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경작의 실패는 농부들에게 빚을 지게하였고 대출제도에 의한 사회 구조가 형성하였을 것이다.
앗시리아 제국시대 이전의 왕정상황
앗시리아 제국시대 이전의 유다의 개혁내용을 통하여 볼 때 왕권체제가 점점 집중화되고 강력해져갔다. 과세제도, 의무노역,국가 사법권등에서 왕은 유대사회에서 강력한 통제를 행사하였을 것이다. 왕정시대때는 부익부 빈익빈현상으로 부자는 더욱 부해지고, 가난한자는 더욱 가난해졌고, 국가는 점점 더 강력해졌다.
왕정정치에서의 왕의 역할
왕정제도는 왕을 이스라엘의 국가 신인 야웨의 지상의 대리인으로 신과 같이 떠받드는 공식적인 예배를 통하여 사회 지배를 문화적으로 정당화 시켰다.야웨의 아들인 유다의 왕은 야웨의 상속인으로서 모든 의무와 권한을 행사하였다. 유다의 높은 신인 야웨는 백성들의 토지와 주권의 진정한 소유주였던것이다. 야웨의 지상의 대리인으로서 왕은 백성들의 소작료를 받고,백성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명령하였다.
예배의 개혁에 있어 왕의 역할
남유다의 왕들의 예배의 개혁은 야웨 종교에 있어 성전의 이상적인 기능을 강조하였다. 야웨 예배와 충서은 철저히 결합되어 있었다. 왕은 성전을 건축하였고, 성전의 기금을 제정하고 징수하였다. 정ㅈ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성전 보물을 사용하였다. 성직자를 임명,해임하기도 하였다. 예배 대상물을 만들거나 파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성직자의 역할을 규정하기도 하였다. 왕은 국가 예배생활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산당예배와의 혼합
왕정시대 이전의 예배는 산당예배와의 혼합된 현상을 보여주었다. 야웨는 여러 국가들의 신들중에서 최고의 숭배의 대상이었다. 다른신들도 같이 숭배 받았다. 아세라와 바알같은 토착신들에게도 종교적인 의식이 행해졌고, 국제적인 동맹관계에 따라 예루살렘 맞은 편 올리버스 산을 따라 있는 `대사관의 거리'에서 숭배되었다.
아하스의 종교정책
앗시리아의 영향-경제적인 부담
로워리는 사회 경제적인 상황의 관점에서 아하스의 정치를 강압적인 앗시리아의 종교정책에 순응하여 정치적인 안정을 유지한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앗시리아 굴종한 상태로 어쩔 수없이 앗시리아에 끌려갔다고 보았다.
앗시리아 황제 디글랏 빌레셀3세에 대한 아하스왕의 무조건적인 항복은 남유다인으로 하여금 장기간에 걸친 사회 문화적인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앗시리아와의 봉신 관계의 조건은 다수의 유다인 노동자들에게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유다와 앗시리아의 불균형적인 무역관계는 생산의 집중화를 앗시리아로 쏠리게 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됨으로 유다안에 이미 정착되었던 부와 소유의 불균형적인 분배를 더욱 촉진하였다. 유다는 앗시리아에게 제국세를 지불하고, 군대와 의무노역을 제공하며 침공 때의 앗시리아 군대를 위해 숙소를 제공하는 등의 부담은 유다 군주제의 상황을 더욱 악화되게하였다. 유다의 내부적인 대다수의 사회적인 여건은 앗시리아의 제국하에서는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앗시리아의 종교적인 영향
앗시리아의 종교적인 영향보다도 경제적인 영향이 컸다는 것을 로워리는 강조한다. 주/또한,
로워리는 앗시리아의 종교수용이 강압에 의한 것이냐,모방에 의한 것이냐는 문제는 어려운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분명한 사실은 전형적으로 봉신국의 종교가 봉주국의 종교의식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에서 유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고 하였다.
앗시리아에 대항한 히스기야의 반란
로워리의 최초의 남유다의 히스기야의 반란(705-701BC)은 비참하게 끝났다고 보았다. 경제 사회적인 관점에서 히스기야의 제의 중앙화의 조치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보았다. 산당의 성전세의 향방은 두가지 의미에서 앗시리아와 유다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앗시리아에게는 침공때에 경제적인 수입원이 끊긴다는 의미가 있지만 도리어 유다에게는 평시에 산당의 성전세로 국가 수입원이 되었던 것이 전시에는 산당을 폐지함으로 경제적인 곤란을 겪으므로 특별 십일조를 거두어야 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신명기의 특별 십일조의 입법화는 제의 중앙화기간 동안에 생존을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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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Albertz, A History of Israelite Religion in the Old Testament Period, Kentucky: John Knox Press, 1994.
레너 알버츠는 히스기야의 역사성을 인정한다. 느후스탄의 언급은 신명기 역사사가의 창작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보고, 고고학적인 발굴의 결과를 받아들여서 아하로니의 8세기말의 브엘세바의 8번째 층에서 커다란 뿔의 제단의 발견이 히스기야 제의 개혁의 증거를 뒷받침해준다고 보았다.
알버츠는 히스기야개혁과 요시야의 개혁을 주도했던 그룹은 호세아 집단이라고 보았다. 그는 722년 북이스라엘이 멸망한후 유다로 피난내려왔다가 개혁에 자극을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더나아가서 예레미아 역시 호세아 집단과 밀접히 관련을 가졌다고 보았다.
알버츠는 남쪽에 있었던 제의 개혁과 북왕국의 호세아가 주장하였던 논쟁 사이에 유사성이 분명하다고 지적하고,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러한 유사성은 호세아의 제자 집단이 피난민들과 함께 유다에 도착했다는 것과 지속적으로 북왕국의 몰락의 이유들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을 하였다고 히는 가정을 함으로써 아주 간단히 설명되었다. 호세아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이 야웨에 대한 독점적인 믿음의 관계에서 멀어졌으며 그대신에 형상,우상들과 제의적인 상징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를 안심하려고 했기 때문에 야웨께서 북왕국을 심판하셨다고 하는 사실은 오직 유다가 야웨에 대한 독점적인 예배와 우상이 없는 예배와 야웨 제의에서 우상 형상을 제거하는 것을 좀더 지속적으로 수행할 때만 유다가 미래에 대한 기회를 얻을 수있다는 것을 의미하한다. 호세아의 비판이 훨씬 더 깊이 진행되었다고 할지라도 개혁하려는 왕의 정책이 이러한 신학적인 논의에 대한 첫 번째 행정적인 응답으로 간주될 수있었다. 지방성소들에 대한 좀더 심하게 통제하고 어떠한 형상도 가지지 않고 오직 야웨만을 경배하는 것을 좀더 지속적으로 수행하면서 최소한 국가 종교의 정체성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던 국가 종교의 양도 할 수 없는 모습들에 대한 반성을 하게한는 일련의 과정이 소개되어 왔다. 그러나 히스기와 함께 이러한 종교의 양도 할 수 없는 모습들에 대한 반성을 하게하는 일련의 과정이 소개되어 왔다. 그러나 히스기야와 함께 이러한 종교적ㅇ;고 제의적인 반성은 앗수르에 대한 반발이라고 하는 위험천만한 정책과 또 다시 결부되었으며 그것은 유다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내포하였다.
파라오적인 가능성은 지금 Dynasty 22nd 그리고 Dynasty 24th로 제한해야 한다.
최근에, K. A. Kitchen은 "그래서"가 22th Dynasty의 (O)so(rkon) 이름의 형식을 줄여써서 대표하는 것을 제안했다. 동쪽 델타에 있어서 그의 토지의 범위와 타니스에 대한 그의 자본의 논쟁은 이 "군주 그림자"의 부분에 대한 실제적인 자원의 부족을 단지 대표하는 외교적 노력으로부터 성공의 결과가 분명히 부족하다는 것을 포함하여 Kitchen, Assyria에 대항한 그들의 반란을 위해 군대의 조언을 구하는 이스라엘의 사절을 찾는 목적지가 거의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전, Hans Goedicke는 이 요점을 더 안전하게 용해시키기 의해 나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나타내었다. Tefnakht는 720년대의 10년 동안 델타에서 가장 힘이 센 파라오를 제안하는 것이고, 그가 서부 델타에 있는 Sais의 수도를 주목하는 것은 그의 사절과 Hoshea에 의한 에집트의 정치적 중심으로써 아마도 간주될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S ' 는 Sais의 수도로 언급함으로써 이해될 것이고, 그리고 어떤 특별한 파라오로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알브라이트가 추신 안에서 Goedicke's의 기사를 지적하는 것으로써, 왕하 17:4절의 헤브르 문서는 두 번째 중자탈락을 통하여 'el로 "에집트 왕에게, 사이스에게"인 'el S <'el> melek Misrayim으로 원래적으로 읽어야 한다.
다른 많은 학자들은 더욱이 이 용액을 더 강조한다. 사실, 안토니 스팔링거는 다른 증거, 즉 사이스의 파라오는 앗시리아로 후에 선물을 보낸 Bubastite 파라오 Shil anni에게 뚜렷한 대조에 있어서, 앗시라아의 친구들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논쟁했다. 그럼으로, 그것은 나에게 아마 Hoshea가 그 때의 서부 델타를 통치하고 있는 Tefnakht로부터 도움을 구했을 것이라는 증명처럼 보인다.
최근의 기사에 있어서, 도날드 B. 레드포드는 사이스로 "그래서"를 기초적 동일성으로 더 확신하고 있다. Manetho와 26th Dynasty를 위한 과장된 목록을 보면, 레드포드가 Nechepdo으로 들어간 입장은, 존 레이가 이미 주목한 것으로써, 아마도 가장 형용어구 - pso에 의해 따라진 Necho이름의 반복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레드포드는 에집트인의 p', s', w(w), "the Saite"을 반영하는 이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갔고, 그래서 희랍 이름이 처음부터 "Necho the Sait"로 지명되었다. 성서의 와 비슷한 이름과 에집트의 이름을 유사한 아람적인 것으로 변형시킨 것을 인용한 레드포드는, 성서적인 "So"도 뒤에 잘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론적으로, 연대기에 관한 낱말은 정리되어 있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So"는 아마 Tiglathpileser III의 죽음과 727년에 계승한 그의 아들 Shalmaneser V의 성공한 후의 몇 해를 가리킨다는 Hoshea's의 제의에 일반적으로 동의했다. Tadmor's의 유다의 연대기를 따르면, 아하스의 죽음은 스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본다. 나는 그것이 중대성 없이는 안 된다고 제안한다. 즉 연대기적 작가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성전을 깨끗이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승리의 유월절도 히스기아의 시대라고 한다. 연대기적 작가가 독자적으로 여기에 반영했든 안 했든간에 그런 야훼적인 재건은 확실히 앗시리아가 약했던 시대에 꼭 들어맞는다고 인정한다. 그것은 실로 역사를 풍자한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의 호세아가 같은 시대의 에집트의 땅으로부터 군대를 찾는다면 유다의 히스기야는 옛날 그 땅에 대항해서 이스라엘에게 승이를 얻게 한 신에게 충성의 의무를 되찾으라고 선언할 것이다.
Zeev Herzog, "Israelite Sanctuaries at Arad and Beer-Sheba" in Temples and High Places in Biblical Times ( Jerusalem: Keter Press,1981)
consume
신명기에 나타난 제의 중앙화 공식의 특성과 역사적 변천
신멱기역사서 연구사
4, 황수연
이스라엘의 역사는 종종 하나님의 의지와는 분리되었다. 그리고 이로인해 Dtr이 설명으로 자세하게
논증을 시도한 것은 이미 예견되어졌었다.
불신앙을 반복하였기 때문에 Dtr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배교의 필연적인 결과에 직면한 것을 보여주었다. 야훼로부터 계속해서 돌아선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결말은 단지 포로생활의 비참한 비극으로 절정에 이른다.
Noth에 의하면 그 역사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쓰여지거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소망에서 그 국가를 인식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였다. 저자의 유일한 의도는 가르치는 것이였다.
오래된 명령을 재 구성하기 위하여 그 땅의 정복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갖는 참된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 님은 매번 늘어나는 도덕적 타락에 경고와 형벌로 응답하시므로 분별이 가능한
방법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최후에 열매없는 것이 밝혀질 때는 전체를 멸절하신다는
것이 그가 발견한 의미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역사의 목적을 설명함에 있어 Noth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만약 역사에서 단지 하나의 주제만을 인식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역사관에서 단면의 비판만 있을 수 있다. 율법과 은혜사이, 재판과 용서사이의 균형을 강조하는 Noth의 입장에 많은 반박이 있었던 이후 더 이상의 연구는 필요하지 않다. 이로인해 전 역사는 율법에서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관한 반복이며 단지 그 국가의 계속되는 형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Noth의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Noth에게 반박하는 사람들은 역사속에서 출발점들로서의 역할을 하며 어떤 결말, 케리그마 혹은 율법의 관점에 속하는 강조와 율법에서의 불신앙과 같은 다른 요소들을 동일시하려는 시도를 한다.
Gerhard Von Rad는 Noth에게 기민하게 반박했다.; 즉 그는 DtrH는 "야훼의 창조적 말씀의 역사"로서 보여져야만 하는 명확한 것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율법의 형태에서 뿐아니라 계약의 형태에서도 능동적인 것이였다. 야훼의 말씀은 통제하고 멸망할 수 있지만 그것은 역시 구원과 용서의 가능성을 가졌다. Von Rad는 Dtr이 포로기간 중에 그의 메시지에서 "말씀"의 두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주장했다.: 즉 야훼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Noth에 의해 강조되었던 율법의 힘은 충벌하는 것인데 Von Rad는 역사를 구성하는 약속 이행의 계획을 지적함으로 역사속에서 신성한 말씀의 힘에 주목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사건들이 예언에서 언급된 자기달성의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설정에서 Von Rad는 다윗의 약속의 의미를 구원과 용서를 가져오는 자기달성의 말씀으로써 표현했다. 다윗에게한 은혜로운 약속은 야훼로부터 돌아섰었던 그 나라에 평화와 정의를 회복할 몇몇 미래의 왕들에 대한 소망을 주는 말씀이였다. 지속적인 약속의 증거를 Von Rad는 왕들의 최후의 증거들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열하25:27-31) 감옥에서 Jehoiachin이 석방됨으로 다윗계보는 결정적인 멸망에 이르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Von Rad에 의하면 이 결론적 진술은 Dtr에 대하여 엄청난 신학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야훼가 만약 그렇게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다는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소송과 재판의 동기가 DtrH의 구성을 결정한다는 Noth의 결론에 동조하는 Von Rad는 다윗의 약속의 전통을 위하여 반복되는 언급을 제공하는 은혜의 상반되는 주제는 미래의 소망을 위한 바탕으로써 무시 되지 말아야 한다.
더 정교한 DtrH의 메시지 이해가 Hans Walter Wolff에 의해 이루어졌다. Noth에 반박하는 Wolff는 재판과 형벌의 중심사상에 그 관점을 두었다. 이 재판과 형벌의 중심사상은 DtrH에 널리 퍼져 있으며 최후심판의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Noth의 추즉으로써 받아들려졌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는 이스라엘을 부르는 것으로 그들의 하나님에게 "돌아와야할" 그 나라를 향한 준엄한 명령이다.
DtrH에서 핵심어 sub(되돌아옴)의 사용에 대한 연구가 기본이다. Wolff는 후회가 뒤따르는 반복되는 잘못의 형태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백성을 위한 야훼의 회복활동이 종종 일어난다. Wolff는 야훼에 대한 변절이 Joshua의 죽음 이후 즉시 시작되었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기간 동안, 사람들이 후회할 때 야훼는 멸망으로부터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사를 보냈다. 그리고 이 일은 불신앙의 각각의 예에서 동일하게 계속일어나고 있다. 그 백성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고통당했다. 그러나 그들이 야훼에게 돌아왔을 때 그리고 그를 부를 때 야훼는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다른 사사를 보냈다. 이같이 그 백성이 한 왕을 요구했고 이로인해 그들의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성에 불충실함을 들어냈을 때 야훼는 다시 그의 백성의 부르짖음에 주목했다. 그리고는 그 스스로 그의 백성을 위하여 한 명의 왕을 세웠다. Wolff는 "그것은 돌아오기 위한 부름을 모욕적으로 무시하는 것이지 최후의 심판을 일으킬 정도의 전체적인 배교는 아니다."라고 대담하게 단언한다.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불신앙의 형태는 포로기에 최종적인 절정에 이른다. 멸망의 이 상황에서 조차도 같은 형태가 일어나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특별히 열상8:33, 35, 46-53의 본문에서는 sub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리고 포로기 때를 특별하게 언급한다. 만약 그 백성이 기도로 야훼에게 단지 돌아 오려한다면 그리고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되었던 그의 음성을 들으려한다면 야훼의 자비가 전 역사를 통하여 들어날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Wolff는 신명기 4:29-31 그리고 30:1-10 본문에서의 Sub 주제를 강화한 제2의 Drt, 혹은 再-Dtr을 요구했다. 이것은 바로 시작부터 전후에 신명기의 핵심적인 자료들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독자는 "돌아올 것"에 대한 강력한 명령으로서 DtrH 전체를 이해할 것이다. Wolff는 야훼에게 되돌아 오는 가능성이 고통스러운 곤경에서 좌절을 다른 방법으로 극복하는 포로된 백성의 소망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Noth의 경우에서와 같이 Wolff는 그의 연구에서 계약의 상반되는 주제에 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런 까닭에 Walter Brueggemann은 핵심어인 tob(좋은)에 관심을 끌어내 Wolff의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 Brueggemann에 의하면 전문 계약용어에 포함되는 "좋은"이라는 단어는 후회하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sub에 반대되는 주제로써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약속들과 회개했을 때 이스라엘을 위한 보증을 제공한다.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에 대한 그의 연구에 바탕이 되었던 Von Rad와 함께 Brueggemann은 다윗에게 이야기된 "좋은"이라는 말이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역사를 통하여 야훼의 "좋음"을 경험했었다. 포로기의 현실 상황에서조차 야훼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던 불신앙을 후회하기 위한 동기가 되는 이유를 갖는다. 야훼의 은혜안에서 충만한 믿음을 갖음으로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을 때 "좋은"이라는 단어를 신뢰할 수 있다.
방주이야기에서 전체적으로 다른 출발점으로부터 Hermann Timm는 Dtr의 내용과 구성이 이스라엘을 부르기 위해 계획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Timm은 노아 방주이야기는 포로기 때 소망의 한 예를 제시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고 발표했다. 그가 신뢰했던 것은 Dtr에서 초기에 유용하게 사용된 자료였다. Timm는 방주를 상실한 상황과 포로되어 땅을 상실한 상황을 비교하였다. Timm은 DtrH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방주이야기가 사사시대의 끝, 그리고 다윗통치의 시작이라는 두 영역에서 전략적인 위치에 있음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이 분리는 실로에서 예루살렘까지 그리고 사사시대에서 제국시대까지의 구원사에 연속성을 보여주기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주 이야기의 배치가 역사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과 야훼에게 계속되는 소망을 위한 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그 백성을 위해 드라마화하였다는 점은 Timm에게 압력을 주었다.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왕이 권력을 잃었을 때, 그리고 외국의 힘에 지배당했을 때의 역사를 기록할 때, 배우는 교훈은 야훼는 방주를 잃어버린 것 같을 때에도 현존해 있었듯이 그의 백성과 함께 확실히 현존해 있다는 것이다. 포로기 상황과 방주이야기의 비교에서 Timm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
전자대 후자, 사사기의 끝과 제국의 끝에서 야훼에 의해 인정되어 존재했던 명령은 더 좋은 것을
위해 돌아섬으로 어느누구도 명령의 원천을 이야기할 수 없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자의 경험에
서 미래의 돌아올 소망을 갖고 생존했었던 "거룩한 남은자"는 없다. 소망은 오직 야훼에게 있었
다. 옛 이야기를 회상할 수 있는 하나님을 경험한 근거에서 야훼를 소망하지 않을 것인가? 전에
처럼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서 이 멸망으로부터 다시금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Timm은 그 땅, 성전, 그리고 왕의 상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방주 이야기의 기능을 성공적으로 논증한다. 야훼에게 있어서 미래는 확실히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오직 홀로 그는 새역사를 이끌어 갈 것이다.
정의를 위하여 야훼의 찬양과 율법에서 불신앙 때문에 그 국가가 무너지는 필연적 멸망의 적용이 DtrH의 메세지라고 Noth에 의해 소개된 결론에서 Noth의 연구에 대한 반응들은 그렇듯한 대안들을 내놓는다. 이러한 연구들은 추측하건데 DtrH가 야훼에게 돌아올 가능성을 강력하게 이야기함으로써 심판과 멸망의 메세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 여러가지 면에서 DtrH는 야훼의 약속의 회복된 자각과 택한 백성을 위하여 새로운 방법들을 행하기 위한 능력을 독자들의 마음에 떠오르게 한다.
5,김진영
Noth and Deuteronomistic History (pp 11-16) 번역
지금까지 제시한 결론에서는, 각 논점이 재앙이나 구원 가능성이라는 단일 메시지로 이어지는 단일 주제에 초점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하나의 단일한 캐리그마적인 충동은 문헌이 그 내용에서 단순한 것처럼 각 사례에서 고립되어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문헌의 무결성을 유지하면서 DtrH내의 내용적 복잡성을 성공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DtrH의 작가정신
그러나 DtrH의 주제적 다양성을 뚜렷하게 설정한, Noth에 대한 응답자들이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들은 다양한 내용을 위한 유일한 설명이 다양한 사람들이 구성에 참여했기 때문이라는 것처럼 성공적으로 편집 또는 작성된 문헌을 주장한다.
Noth는 분명히, 그 작품이 연속적인 대화식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였으며, 우리는 그러한 통찰력에 동의한다. 그러한 통찰력이 어떻게 얻어졌는가를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Noth는 여호수아 1장에서 열왕기하 25장에 이르는 역사가 땅의 정복으로 인한 사건을 땅의 상실과 관련시키는 것으로서 세심하게 통제된 계획에 따라 이렇게 수사학적으로 복잡하게 발전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Noth는 Dtr(신명기)이 이러한 선물과 토지의 상실에 관한 설명에, 역사의 해석을 위한 그의 동기가 된 전체적인 법률들을 통합한 것이라고 시사하였다. Noth는 신명기 1:1-4:43에서 모세의 연설, 즉 신명기의 구성이 된 그 연설이 이스라엘인의 전통내에서 역사적인 대화를 위한 무대를 설정하므로써 전체 DtrH를 도입하였다고 추론하였다. 이렇듯 Noth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으로부터 추방되었을때인 한 특정 시점에서 DtrH가 어떻게 한 사람에 의해 현저하게 일관된 하나의 전체로 구성되었는지를 설명하였다.
또한 Noth는 그가 전체 문헌이 한 작가의 펜으로 작성되었다고 충동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던 그 역사적인 내용을 통찰하였다. 주제와 메시지의 단일성에 관한 그의 결론에서 처럼 단일저자라는 시사는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그 문헌이 한 사람의 작품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은 어떤 별도의 편집자의 속성인 다양한 주제, 기분, 흥미 등을 제시할 만큼 상세한 구분을 가져왔다.
Noth 바로 후에 등장한 한 학자는 Alfred Jepsen이었다. 그는 열왕기가 세 번의 연속적인 편집결과 나타났다는 이론을 도입하였다. 그는 관심과 기여로 구분될 수 있는 각 저자가 이전의 작품을 자신의 관심과 입장이 뚜렷하게 드러난 출처를 가지고 확장하였다고 주장하였다.
Jepsen은 최초의 편집자가 한 예루살렘 제사장이었다고 제안한다. 이 편집자는 Heze- kiah 시대까지의 여러 왕들에 관한 정보를 포함한 동시대의 연대기적 작품을 사용하였으며 여기에다가 이스라엘의 숭배사에 관한 궁중문헌과 물론 자신의 요약으로부터 나온 연대기적 자료를 추가하였다. R..Jepsen의 사상은 그가 창작하였고 또 그가 수집한 출처의 시각을 보여주는 요약자료에 가장 뚜렷이 나타났다. Jepsen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RI는 사원 파괴 직후 기간 중 기초로써 동시적인 궁정연대기를 취하고 연대기로부터 나온 개별 발췌문을 삽입하여 이스라엘과 유대의 숭배적 역사에 관한 개요를 제시한 한 예루살렘 제사장이다. 그가 그러한 역사를 제시한 것은 두 나라를 멸망시킨 야훼의 판단을 이해하여 유대가 다시 하나님과 그의 왕국으로 돌아가는 법을 배울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Jepsen은 두 번째 편집자를 예언자들과 연관시켰다. 그 이전의 작품의 문맥이나 일반적인 형식을 손대지 않고 RII는 RI의 작품을 추가하였다. 이러한 추가는 단순한 추가라기 보다는 책 전체를 통해서 RII의 가필이 인식될 수 있을 만큼 전반적인 것이었다. RII는 예언적 대화, 자신에게 흥미있는 여타 전통 등은 물론 역사상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추가하였다.
Jepsen은 이 단계에서 그가 Noth와 견해를 같이 한다고 표명한다. 이것은 RII가 이미 기존의 출처에 근거하여 이를 확장, 변경하고 하나님의 법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적인 힘인 신학적 해석으로 낙관을 찍었다는 의미이다.
Jepsen에 의하면 DtrH는 6세기 말 경에 세 번째 편집과정을 거쳤다. 거기에 반영된 현저한 제사장적인 관심, midrashic적인 정교함, 역대기의 언어 및 관점과의 일치성 등은 Jepsen으로 하여금 RII가 후기 추방시기에서 레위적인 이동의 동방자였음을 확신시켰다. 일단 사원이 재건되고 희생의 질서가 수립되자, 레위인들은 제사장직에 대한 권리를 다뤄야 하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마지막 편집이 이러한 관심의 편재가 현저했기 때문에 Jepsen은 최종적인 재편집을 레위적인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Jepsen은 열왕기가 탈출시대의 산물이라는 Noth의 가설을 의미있게 제시하였다. Jepsen은 각 연속적인 편집이 사원의 파괴와 재건설 사이인 BC 6세기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Jepsen은 이스라엘 문화의 모든 현저한 당사자가 이 문헌의 구성에 어느정도 참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제사장, 예언자, 현자, 레위설교사 등이다. 즉 Jepsen은 지금까지 제안된 것 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구성과정을 제안한다. 그러나 특별한 관심이 문서내 반영된 각 개인에게 각 편집을 결부시키므로써 역동적이고 복잡하게된 이러한 견해를 설명할 필요가 있는가? 이 경우에서 우리는 완성된 책을 검토하여 다시 재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추론 해 보아야 한다. 예루살렘 몰락 후 근처에 남아있던 서기관들이 다양한 이해와 결부되어 있고 그들이 오랫동안 노력하여 지금과 같은 역사를 창출한 자료를 입수 할 수 있었을까?
열왕기의 주제적 복잡성을 낳은 Jepsen의 분석은 매우 공감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 또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집단이 다양한 견해와 관심을 반영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계속적으로 역사를 재작업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한 이러한 복잡성을 설명하는 명제에 대해 명료한 개념을 가지지 못한다.
신명기 자료의 또 다른 평가는 Walter Dietrich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Jepsen과 마찬가지로 DtrH내에 세가지 분명한 재편집을 구분하였다. 자신의 연구를 위한 시작점으로써 예언적 이야기와 연설을 사용한 그는 예언적 강의가 주로 역사적 자료로 구성된 그 이전의 문학적 출처로 생각되는 것과 결합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이리하여 Dietrich가 DtrP로 확인한 Dtr은 기존의 역사적 설명에 예언을 통합시켜 역사와 연결하였는데 이것을 그는 DtrG라고 불렀다. DtrG는 역사에서 예언자의 역할을 보여주는 예이다. 예언적 이야기와 연설 이외에는 DtrP는 오래된 예언적 대화, 이야기, 간단한 연대기적 사항 등도 취하였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것들을 언급한 바와 같이 DtrP는 "Tradent von Altem und Schopfer von Neuem zugleich"로 간주될 수 있다.
역사적, 예언적 자료의 층을 더하기 위해 3차 편집자는 본질적으로 주격인 것을 덧붙였다. 이 수정은 법과 관련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즉 법률적 격언, 법에 관한 paranesis, 그리고 분명히 법전 그 자체를 포함하였다. 또한 Dietrich는 유대, 예루살렘, 다비드 등에 초점을 두는 전통과 사원을 최종적인 신명기 편집자인 DtrN의 공으로 돌렸다.
Dietrich는 내용의 성질에 따라 편집단계를 산뜻하게 구분하였다. 역사적인 자료는 기반(DtrG)으로써 기능하였다. 여기에 예언(DtrP)이 추가되었고 마지막으로 법(DtrN)이 추가되었다.
5-1 박순영
세명의 신명기 작가들은 모두, 신명기와 요시야의 개혁안에 각각 가장 명백하게 표현되고 있는 성령에 의한 통치 때문에 Dietrich와 같은 주장을 한다.
DtrG(신명기 족보)는 왕들에 대한 통치 안에 계시는 성령을 나타낸다. ;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독립을 주장했던 북왕국 왕들에 대한 그들의 열심으로써의 DtrP(신명기 제사) ; 구별된 이스라엘로부터 이방인들에 대한 성령의 열심과 율법의 포괄안에 있는 DtrN.
율법의 통일된 성령은 이미 각각의 편집자들이 공통된 전망(관점)으로 적용했던 율법과 행위를 주관하였다. 율법이 후기 발전까지 역사에 더해지지 않았을 동안, 역사를 주관한 율법, Dietrich의 주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명령은 기록되지 않은 율법이었다는 것이다.
Dietrich는 역사를 위한 기초로서 그의 율법의 활용안에서, 분명히 북왕국과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Noth에 의하면 율법은 역사적 사실에 절대적이고, 전통의 대부분에 널리 보급되고 법적인 계명으로서 그것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Diertrich에 의한 율법의 활용은 율법이 발전적인 계획에 대한 이스라엘적인 전통에 영향을 미친다는 벨하우젠의 신학과 상응한다. 오직 후기 편집자에 의해 소개된 율법만이 Noth에 의해 소개된 율법과 함께 상응한다.
Dietrich의 목적은 본래 율법의 신명기적 사용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되어졌음에 틀림없다. 그의 연구의 수수께끼는 신명기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사이에의 구별, 이스라엘에 속한 것과 유대에 속한 것 사이의 구별에 접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왕국의 전통으로부터 야훼주의의 전통을 구별함에 Dietrich가 시도한 일들에 대한 가설이 있다. 이 최근의 것들은 기초적인 역사와 선지자적 전통들로부터 부분들을 결합하는 것을 시도했던 최후의 편집자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기초 역사와 단지 처음의 편집문서가 내포하고 있는 과거 결합된 남왕국의 전통과 북왕국과 함께 전통적으로 소개된 그자료들에 대한 이러한 접근안에서 암시하는 것이 있다.
최종적 편집 문서에 대한 왕국전통의 귀속은 열왕기의 책들의 구조를 위한 다윗의 신적 약속의 중요성에 대한 편집자안에서의 문제들을 나타낸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은 기록되지 않은 율법의 성령을 나타내는 것과 기록된 계명으로부터 얻어지는 것 사이에서 조성된 구별들과 함께 독단적인 해석이다. 우리는 연구 방법론과 기초가설은 물론이고 결론까지에 대해서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쨓든간에 사실의 진전을 향하여 기능하된 모세율법으로부터의 전통적인 부분의 다양성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를 이해하게 된다.
Jepsen과 Dietrich는 모두 DtrH(신명기 역사)가 포로생활의 산물이었다는 Noth의 의견에 동의 한다. 어쨓든 그들은 역사가 한결같은 메시지를 소유하며 독특한 시간에 신명기 기자들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들은 모두 세가지 구별된 재손질을 위한 논의를 하고, 그것중의 하나로, Noth에 의해 제안된 날짜인 약 BC 550년에 이르게 되었다. Jepsen은 이 날짜전에 있었던 편집문서중 하나와 성전이 재건되엇을 때인 6세기 말 가까이에 마지막으로 개정된 문서를 분리시켰다.
다른 입장에서 Dietrich는 세가지 편집문서들의 와전한 제작과정이 BC 560년도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고려했다.
Noth 이전의 시간에 대한 고려들로 인해 역사적 책들의 주요부분들이 포로 시대에 완성되었다는 가설들은 폭넓게 받아들여 졌다. 그 설명은 그들이 두 세대에 존재함에 비롯되었다는 것으로 주어졌다.
첫 번째 간행물은 포로전의 계급을 기초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고려했다. 두 번째의 포로기 문서는 포로시대의 상황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작업이 주어졌던 개정판들과 부록들을 고려했다.
Noth 이래로 두 시대 이론은 Frank Moor Cross에 의한 커다란 영향과 함께 재 소개 되어진다. 작가가 요시야 시대의 7세기 동안에 작업을 준비했다고 논의한 Cross는 요시야의 개혁과 다윗시대의 재생에 대한 그의 프로그램적 사건으로써 왕들의 신명기적 역사를 기록했다.
논의를 위한 기초로써 Cross는 두가지 주제, 즉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으로써 여로보암의 죄와 요시야 시대에 있어서 다윗 제국의 환원을 위한 토대로써 다윗의 신앙을 분리시켰다. Cross는 요시야의 개혁을 위한 강령을 준비하는 약속과 협박 두가지의 주제의 병렬을 주장한다. 이처럼 사실은 다윗의 지도 아래에 잇는 유대와 야훼의 유일한 합법적인 성전, 즉 예루살렘에 있는 국가적 성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름받는 이스라엘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도전은 이스라엘의 약속의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두가지 측면에서 포로기적 작가라고 불리우는 Cross는 므낫세의 배신이라는 추가된 주제를 소개한다. 이 작가는 유대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그것과 같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의도했다. 더 나아가 Cross는 부록들과 작가에 의해 이행된 재손질이 상황의 환원에 대한 희망이 어떤 것이든 원초적으로 신명기적 사건 안에서 최고로 조명된 상황을 포괄하였다는 것을 논의한다. 그래서, 개정판들은 유대 포로기에 소개된 역사에 대한 설교로 인한 작업을 변형시켰다. 본래의 희망의 주제가 지나치게 정성되어 기록되고 여러 가지 장식들로 모순되어졌던 것 이래로 결과적인 작업은 단지 회개의 묵시적 희망과 가능성있는 귀환을 제공하였다.
Cross는 열왕기에 있는 신명기적 과도적인 변화에서 협박과 위험이 없다는 것, 또한 작지도 않고 신명기적 역사적인 인물들에게 있어서 부득이한 재난과 여호수아, 사사기 그리고 사무엘안에서 과도적인 재난들의 암시도 아닌 것, 그리고 그가 의도적으로 작가적 손길로 그 본문들까지도 분류했기 때문에 그것은 말하기가 가능하였다.
Cross는 왕들의 역사안에서 주제적 구조의 그의 윤곽에서 가치있는 봉사를 묘사했다. 이러한 작업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역사안에서 주제의 복잡성이 발견되고 현재 본문의 가능한한 전체적으로 주목할만한 창조에 대한 역사로 조립되어진 각각의 주제에 의한 정확성의 현실화의 작각을 가져오게 되었다.
본문의 기초적 분위기(양태)에 있어서 작가나 편집자로 인해 본문의 일부를 분류하려는 시도는 어찌되었든 받아들여져야 한다. Cross는 말하길 ;
협박에 의한 패배와 신명기적 사업에 있어서 재난이 퍼부어졌다. 이것들은 포로기적 작가로부터 분명히 유래할 필요가 없다. 속박과 포로생활은 새로운 앗시리아 세대에 있어서 너무나도 친밀한 운명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포로생활과 속박의 충격은 고대 근동 조약의 단계에 있어서 보편회된 것이었고 자연적으로 이스라엘 계약에 밀접한 단계로 비롯되었다.
어째서 Cross는 포로기 작가의 독자적 증거로 협박과 위험을 주장한 것일까? 그것은 Cross가 다윗의 약속과 여로보암의 죄를 위한 동일한 작가정신을 위한 논의이고 또한 Jepsen과 Dietrich가 귀족과 선지자들의 전형적인 흥미로써 이것들을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문하건대, 어떻게 같은 입장에서 낙관주의적이고 수동주의적인 성령의 양면을 소개할 수 없었던 것일까?
DtrH의 자료들
Noth의 독자적 작가주의 이론은 신명기에 의한 자료들의 사용에 대한 그의 이해에 의존하고 있다. Noth의 선험적인 면에서 신명기는 역사의 모든 언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 그는 분석과 기록, 즉 역사의 기록과 영웅적 인물의 순환과 설화 전체(노아의 방주 설화와 같은) 그리고 설화적 성공으로부터 중요한 부분을 사유했다. ; 신명기는 이것들을 자료들로 취급하였고 계획의 실천에서 유래된 것과 함께 조립하였다.
신명기는 신중하게 수집했고 흥미있는 전통으로 소개했고 그러나 동시에 조직했고 충분한 작업의 구조를 잡았고 예감하고 요점을 되풀이하는 요약을 만드는 것에 의해 분명하고 체계적으로 만드는 작가의 전통적인 이해안에서의 작업이었다.
Noth는 신명기를 여호수아서 연구안에서의 자료의 활용으로 만드는 방법의 현실화를 가져왔다. Noth는 원초적으로 독립된 영웅 이야기들과 통일된 설명으로 조심스럽게 작업된 인과론적 전설들의 연속들을 고려한 여호수아서를 인지했다. Noth는 그가 따라왔던 방법안에서 이해했던 것과 같은 전통적인 과정을 묘사했다.
DtrH(신명기 역사)를 위한 기초적 자료는 이스라엘안에서 일부는 구전되고 일부는 기록되어 존재하게 된 독립된 전설들과 전통들로부터 획득했다. ; 그리고 유용한 자료들은 모아졌고 선택됐고 변형되었고 신명기가 통일된 문서로써의 월초적으로 독립된 자료들로 작업되었던 것에 의해 생성됨이 필요했던 것처럼 변경되었다. Noth는 자료들로 작업된 신명기에 의한 체계적이고 의식적으로 결심된 방법으로 비롯된 작업을 주장했다.
제 1장 신명기 역사의 배경(문맥)속에 있는 므낫세 이야기
신명기에 대하여 행해진 연구에서 열왕기의 마지막 장들은 언제나 신명기 전체의 자연(본성)과 문학의 역사를 세우기 위해 중요한 텍스트로 여겨져왔다. 그결과 신명기의 마지막 장에 대하여 행해진 학문적인 논쟁의 논의는 전체 작업의(작품의) 본성과 구조에 대한 논쟁의 논의와 단절될 수는 없다. 이 장은 신명기 논쟁의 중요한 단계들을 재검토할 것이며 이것을 하면서도 초점은 열왕기의 종결 장들에 관한 특별한 논쟁, 특히 "므낫세 텍스트" 2Kgs, 21:1-18, 23:26-27 그리고 24:2-4에 주어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 제공되는 의견들을 재검토하는 목적은 열왕기의 종결장들의 기원을 재건축하려는 시도들과 관련이 되는 특별한 의문을 묘사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러한 질문들을 다룰 때, 므낫세의 고찰의 적절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1.1. 신명기 역사의 가설: Noth
1943년 Uberlieferungsgeshichtliche Studien의 출판으로 마틴 Noth는 신명기와 예언서의 연구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Studien에서 Noth는 OT안에 있는 모든 역사적인 전통들은 세 개의 큰 분류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세5경, 역대기, 구약성서, Former예언서와 신명기의 전통적인 강박관념을 포함하여 후자의 작품에 대한 존재는 이전에 성서의 문학적-비판적인 연구안에서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Noth의 가설의 핵심은 복잡한 신명기-열왕기 책의 편찬으로 여겨지거나 추가의 신명기 편집 개정에 상당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이제부터 신명기는 dtr로 부름), 신명기 작가에서 나온 단하나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이 작가는 가나안의 정복에서 추방에 걸친 그 자신의 사람들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개인적인 전통들을 모았다. Noth는 이 "신명기 Werk"의 기원을 B.C. 562 직후로 보았는데, 그 해는 열왕기에서 그 마지막 사건, 즉 여호야김의 명예회복(2Kgs 25:27-30)이 서술되었던 때이다. Noth는 신명기가 일종의 자기 억제된 집합체 였다는 네 가지의 표시(암시를)를 언급한다.
1) 언어학적인 증거.
전체 문맥을 통하여 같은 종류의 온건하고 솔직한, 히브리어로 쓰여진 몇 줄(항)이 있다. 고정된 구절들을 선호하는 것 같은 이러한 일률적인 언어는 신명기(이제부터 dtr이라 칭함)의 법률 언어와 관련이 있고, 신명기 작가/편집자를 위한 특징으로 보여지고 있다. Noth의 관점으로는 역사서들 안에서 이미 신명기 작가층의 확증을 이끌어 온 언어학적인 분석의 결과가 너무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서 그의 연구 어디에서도 그는 그것들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신명기 작가 자료의 인지(인식)를 위하여 "sicherste Grundlage"라고 "Spachbeweis"를 말할 뿐이다.
2) 요시아의 책 조직의 어떤 측면들- 열왕기는 신명기 작가 작품의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놀라운 사건들과 결정적인 변화들이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신명기 작가들은 예측과 회고적인 성향을 띠고 자신의 요약된 평언(펑가)을 삽입하였고, 그곳에서 그는 사건의 과정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신명기 역사속에서, Noth는 일곱의 신명기 작가들의 평언들을 분류하였다: 여호수아 1,12,23: Judg. 2:11f;1 사무엘 12;1 열왕기 17:7-23. 이러한 텍스트들은 신명기 밖에서는 이에 상당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신명기 역사가 개념적인 통일체이며 자기 억제의 집합체라는 표시를 강하게 형성한다.
3)이러한 신명기 작가들의 논평이나 다른 신명기 작가들의 구절에서 나온 명백한 종교적인 확신은 일관성을 보여준다. 하나의 특징은 올바른 예배형식이라기 보다는 금지된 형식에 보여지는 관심이었다. 또하나의 특징은 이스라엘의 불복종이 자신의 몰락의 원인이었다는 확신이다. 신명기의 법률의 목적은(신명기 작가가 그의 작품의 서문에서 언급한 바처럼) 이스라엘의 신에 대한 배타적인 경배를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신명기 역사는 이러한 목적이 실패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때문에, 사람들의 파멸은 신명기에서 이미 묘사되었던 것처럼 불복종에 대한 처벌로 그려진다.
4) 공시적인 체제. 신명기 작가는 공시적인 문제들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것은 열왕기 서적들에 나오는 이스라엘인과 유대인 군주들을 추정하는 조심스러운 공시적인 날지 추정일 뿐만 아니라 합계처럼 신명기 작가가 열왕기 Kgs 6:1에서 준 480명의 인물이 나오는 것이다. 신명기 역사 속의 이러한 기간을 찾는 공시적인 자료를 대입하였을 때, 우리는 실제로( 단 하나의 그럴싸한 채택으로) 대략 480년이라는 총계에 도달하게 된다. 요컨대, 신명기 역사의 결합은 신명기 작가의 두 개의 편집 활동의 결과이다: 더 오래된 역사 자료를 계속적인 역사속으로 재배열하고 근원자료를 다양화하기 위해 텍스트의 계몽에 전념하는 것이다. 신명기 작가 자신의 공헌(기고들)들의 일관성이 신학적인 통일성과 그 이전의 잡다한 자료들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아직도 신명기 작가는 대개 그의 작품에서 이러한 자료들을 변화시키지 않은 상태로 포함시키고 있고 그들 속에서 표현된 생각들조차도 자신의 관점과는 잘 맞지 않았다. 신명기 작가가 그 이전의 자료에 대한 개정판을 냈는데, 이것들은 주로 그의 자료들과 실종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사이에 비일관성을 제거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신명기 자가들이 단지 자신의 자료를 재생산하였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세히 이야기해 보는 것에 진짜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신명기 작가는 그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료에 기초를 두어 객관적으로 묘사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oth는 신명기 작가들이 열왕기의 기초가 되는 근원 자료들을 철저히 바꾸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특징적으로 신명기 작가가 그의 서술부에서 참고로 했던 자료들에 대하여 더많은 정보를 독자들에게 주려고 했다. 단지 그가 그의 작품 속에서 포함시킨 자신의 전체의 자료 편집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만을 솔로몬 기간 신명기 작가는 특히 "솔로몬의 법령에 대한 서적"을 이용하였다. 두 제왕의 역사 동안 신명기 작가는 "이스라엘/유다의 왕들에 대한 연대기 책"을 만들었으나 그는 왕들 개인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을 위하여 이러한 자료들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왕들'의 기간에 공시적인 구조를 위하여 자료들을 이끌었고 양쪽의 연대기로부터 왕좌의 계승에 과한 필요한 정보를 위하여 자료를 사용하였다. 이스라엘의 연대기는 신명기 작가는 거의 그의 작품 속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유다서로부터 사원에 일어난 것에 관한 모든 종류의 정보를 끌어내었다. 신명기 작가는 또한 왕권 시대를 제시하기 위하여 예언자의 이야기들을 광범위하게 이용하였다. 열왕기의 마지막 장에 있는 신명기 작가의 설명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Noth는 유대인의 몰락에 대한 설명을 위하여 조심스럽게 준비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2Kg에서 16과 2Kgs, 17에서 신명기작가는 이스라엘의 운명과 유대국의 운명을 결합시켰다. 히스기야 기간을 단지 역사적인 휴지기라고 묘사한 후에 (2Kgs 18-20), 신명기 작가는 유다 왕국의 임박한 운명과 이스라엘의 완성된 운명 사이에 평행성을 그림으로써 2Kgs 21을 Noth의 몰락에 대한 의견과 연결시켰다. 신명기 작가는 또한 유다가 참으로는 판결(재판)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신명기 10:10f와 2kg, 23:4f에서 세부적인 것을 추가하였다. 2Kgs 21에 나오는 유다의 몰락에 대한 선언 다음에 2Kgs 23-23의 유다의 설명은 지연(방해)의 요소를 형성한다. 아마 공식 기록에 기초를 둔 것 같은데 법 서적의 판정에 대한 서술 다음에 "연대기 서적(23:4-20a), (22:3-23:3)에서 나온 요시아의 종교적인 법안들에 대한 정보가 따른다. 23:21-27절은 신명기 작가 자신에게서 나온다. 그 이후의 사건들을 고려해보면, 요시아 제정시대는 단지 어떻게 일이 줄곧 일어나야 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에피소드로서의 역할만 하였을 뿐이다. 남아있는 장들은 요시아국의 파괴를 자세히 이야기해준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표현하지 않고 신명기 작가는 소규모로 그의 일을 끝낸다. Noth의 연구는 역사서의 연구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었고 아직까지도 그 영향력은 계속되고 잇다. 많은 학자들은 그의 통찰력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더 많은 것들은 하나나 그 이상에서 그의 가설을 수정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사실상 Noth의 위치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측면은 의문시되고 있다: 신명기 역사가 단 하나의 손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명백히 비관적이다; 그것은 추방 중이다; 그것은 사료 편집과 관계가 있다; 2Kgs 21의 평가를 위하여 이 네가지 논점은 2Kgs 21의 평가를 위하여 관련되어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1.2 창의력있는 작가로서의 신명기
과거 몇 년 동안 특히 신명기 저술업에 대한 Noth의 관념은 비평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역사서의 최근 전공 논문에서 C.Westermann은 이러한 책들에서의 수없는 서술적인 텍스트들의 상당한 결여점이 신명기 작가의 개념을 방해한다고 주장해왔다. Westermann의 연구는 Noth의 가설의 본질적 요소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책에서 사용된 추방, 숫자들,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과 열왕기의 문학 형태들의 관습적인 역사적 문의는 Westermann의 관점으로는 각각의 책이 포괄적인 역사적인 작업의 부분으로서라기 보다는 독립적인 전체로서 이해되어지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Westermann은 각각의 책은 각자 자신의 정보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구전의 형태로 어떤 사건들을 축하하기 위한 노력으로 시작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개별책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별개의 장을 다룬다. 예를 들어, 사사기 책은 재판들의 시대를 망라한다. Westermann의 관점으로는, 이러한 책들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제시하는 것에 포함된 텍스트들은 그 역사의 해석을 다루는 텍스트와는 엄밀히 달라야 한다. 평언(의견)을 포함하여 그러한 역사의 해석을 다루는 텍스트는 역사적 사건들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Wertermann은 모든 책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Deuteschicht:(사사기와 열왕기에 있는) 구조에 속하는 Parenetic 행사, 다른 의식들 등을 포함시켰다. 해석상의 층은 텍스트들 해석상의 서술과 설명 신명기 작가 문체 안에 있는 모든 텍스트들뿐만 아니라 비신명기 해석상의 자료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층은 신명기 작가라고 확인될 수 있는 문학 통일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Westermann은 신명기에서 열왕기까지의 책들의 제시의 수준이나 해석의 수준 어느 것도 동일된 문학 작업 바꿔 말하면 신명기 역사를 형성한다고 말하여질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신명기 가설에 대한 Westermann의 공격은 분명히 신명기 역사의 연구의 50년 과정에서 시작된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Westermann은 신명기 역사에서 문학 수집의 다양한 분석과 발달의 역사를 강조한다는 명성을 받고 있다. 그러나, 문학 자료의 공통점의 불균형은 그것만으로 이러한 전적인 자료로부터 구성된 역사편집의 가정에 대한 강한 논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Geschichtsdarstellung"의 문학 수준에 대한 공통점의 불균형은 오직 한 명의 창조적인 작가가 쓴 것이나 이 작업에 나오는 서술적인 모든 자료를 고정시키는 관점에 반대하는 논쟁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westermann은 이 논쟁을 Noth를 공격하는데 이용하였으나 Noth 자신은 신명기 역사가 전적으로 한 명의 작가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Noth로서는 신명기 작가의 창조적인 기여는 다소 신중하며 해석상의 텍스트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해석의 수준에서 Westermann은 전형적인 포괄적인 역사편찬의 동일체를 찾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Westermann의 관점은 최소강령주의자적이다. 신명기작가 텍스트가 최소한 신명기에서 열왕기에 일어난다는 사실은 포괄적인 신명기 작가 개정(편집) 계획을 제안할지도 모르나 Westermann은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연결이 되어있다는 표시 즉 신명기로부터 열왕기에 이르는 역사서에 표시(암시)가 있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도 못했다(예를 들어 여호수아와 사사기 사이의 연관성을 보라). 요컨대, Westermann은 신명기 역사 가설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문제점에 대하여 관심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옳았으나 그의 범주에 속하는 거부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Westermann이 Noth가 이스라엘의 역사위 제시에 신명기 작가의 몫을 너무 중요하게 다루었다고 비난한데 반해, H.-D. Hoffmann, J. Vanseters와 R. Polzin은 Noth가 아직도 신명기 역사에서 신명기 작가들의 창조적인 몫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믿는다. 신명기 역사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문학평가 대한 이러한 관점의 결과는 Hoffmann의 연구서 Reform und Reformen에서 가장 명백해진다. Hoffmann의 판단으로는 신명기 자가(바꿔말해서 한명 이상의 신명기 작가들은) 오래된 전통들을 신명기 작가의 제시속으로 너무나 효과적으로 통합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전통들은 자주 문학-비판적 방법 속에서 그것(신명기 작가의 제시)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신명기 작가는 구두의 전통들을 이용하였다- 그것은 고정된 전통과 신명기 작가의 자유로운 형태만들기 사이에 한계들을 정하기가 어렵게 했다- 그리고 그는 마찬가지로 순수한 허구를 썼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Hoffmann의 신명기 작가란, (아직 그가 Noth와 일부 함께 했을 때), 자료의 편집자가 아니라 독립적인 서술자였던 것이다. 신명기 역사의 통일성에 관한 문제들과 신명기 작가들에게 이용 가능한 전통들을 다루는 것은 Hoffmann의 연구의 시작점을 형성한다. Hoffmann은 그가 문학의 대표자(전형)라고 고려했던 것과 신명기 역사의 신학적인 면이 라고 생각한 일련의 텍스트에 관심을 집중했다. 신명기 역사의 모든 부분에 관심이 주어진 주제 중 하나는 예배 분야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발달과 변화와 관계가 있다. Hoff,mann은 관련된 텍스트들을 언어의 분석과 문체에 종속시켰는데 왜냐하면 그는 의식의 용어에 대한 목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명기 역사의 구조를 명백히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Hoffmann은 더 큰 개혁 이야기(설명)로 방향을 돌리기 전에 처음에 그들 상호간의 밀착성 속에서 왕들에게 분배된 수많은 더 적은 의식(제례)의 정보를 분석하였다. 그의 연구의 중심은 요시아 이야기의 문체적이고 구조적인 분석이나(2Kgs 22-23) 요시아의 개혁은 호프만이 의식의 신명기 작가 역사라고 특징지운, the "Trias der drei grossen Kultreformer" 히스기야-므낫세-요시아; 마지막 장의 결론을 형성하고 있다. 다양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개혁자중에서 신명기 작가는 열왕기에 여기에서보다 더 큰 대비가 이루어진 곳은 없다는 것을 소개하였다. 추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의 빗나감(왜곡)은 점점더 증가하였고, 유다왕들의 판단은 점차로 열왕기의 결론쪽으로 더욱 극단적이 된다. 므낫세와 요시아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개혁가의 놀라운 예로서 이 인물들의 시리즈의 끝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왕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신명기 작가는 이전의 개혁의 정보들 속에서 일어난 모든 종류의 동기와 주제를 요약한다. 열왕기의 총계와 의례-제시의 목표로써 양 텍스트는 이전의 정보들과의 수많은 연관을 보여주고 반면에 또한 상호간에 그들은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긍정적인 개혁가로서의 요시아는 므낫세보다 더 중요하다. 후자의 Kultgeschichte에서 현저한 위치는 단지 신명기 작가들이 그가 요시아의 개혁을 고안할 수 있었다는 점을 반대한 어두운 배경이 필요했다는 사실 덕택이었다. Kultbericht 2Kgs 21:3-8은 특히 요시아의 활동의 방법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데 목표가 있다. 그러나 므낫세 이야기의 역할은 요시아가 비길데 없는 개혁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을 넘어선다. 신의 분노의 형성과 함께 (2Kgs 21:11) 므낫세 이야기는 세 개의 참조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한가지 문제를 소개하고 요시아의 몰락 이야기에서 그 결말을 가져온다. 왕국을 몰락으로 이끈 모든 죄의 요약과 같이 2Kgs 21은 후자와는 다르게 전의 텍스트가 왕국의 몰락 이야기를 예측하였음에도 North(북쪽)의 몰락(2Kgs 17:7-23)에 대한 논평과 비교된다. 신명기 역사에서의 자료의 사용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관점에 히스기야에게 지워진 개혁 정치들 어느 것도 역사적인 현실성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신명기 작가만이 세부적인 의례 용어를 사용하여 역사적인 신뢰성을 제안하였다. 이단의 황제에 대한 희미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하여, 신명기 작가는 진실로 이단의 왕으로서 므낫세를 서술하는데 있어 특별한 의례-용어의 도움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요컨대, 부족한 전통들을 이용하면서, 신명기 작가는 의례의 역사로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제시하기 위하여 그의 일반적이고 특별한 의례-용어를 발달시켰다. 신명기 역사의 두 개의 uberlieferungsgesehiehtliche 분석의 결과는 서로 상당히 달랐던 Hoffmann의 관점은 만일 신명기 작가가 오래된 전통을 결국 사용하였다면 이러한 것들은 신명기 작가의 제시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신명기 작가의 활동의 본성9특징)에 대한 Hoffmann의 관점은 주로 J. van Seters에 의해 승인을 받았다. 이 학자는 신명기 역사는 헤로도투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소위 병렬 문제로 구성되어 잇다는 관점을 진행시킨다. 양 작품에서 크기와 장르에 따르면 매우 다른 문학 통일(헤로도투스와 함께 "logoi"라 불리는)는 되풀이되는 문체라는 수단에 의해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 헤로도투스와 같이 신명기 작가는 전혀 열 개의 자료에서 통일성을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Van Sters는 열왕기의 마지막 장에서의 개혁의 역사에서의 신명기 작가의 창조적인 몫(역할)의 크기에 대하여 전적으로 Hoffmann의 의견과 일치한다. 아직도 그는 의례의 역사로서 신명기 역사의 특징짓기는 너무 좁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란 사람들의 정체성을 명료히 하기 위하여 과거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명기 역사속에는 엄청난 자료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9, 김성래
pp. 80 - 85.
한마디로 말해, 요시야는 예루살렘-성전에 있는 단 하나의 정통적 제단에서 모든 예배 의식을 통합하였다. 그는 므낫세에 의해서 성전에 놓여진 아세라를 제거하였고(cf. 2 Kgs 21:7) 그리고 그것은 모세가 금송아지를 파괴한 방법을 연상케한 파괴였다(Deut 9:21;cf. Exod 32:20). 덧붙여서, 그는 성전 관구에 위치한 "신성화된 남자들"의 집을 헐었다.
유다와 예루살렘 안에서 개혁으로 다루어지는 두 번째 면에서, 요시야의 노력은 예루살렘 밖으로 넓게 퍼졌다. 신명기는 그들의 신들을 숭배했던 나라들의 모든 장소가 파괴되는 것을 요청했고, 그래서 요시야는 조직적인 방법으로 진행했다. 비 야훼적인 바모트(집)를 제거하고, 요시야는 제사장들이 희생 제사를 드렸던 유다의 도시 안에 위치한 바모트(집)를 훼손했다. 이들 "나라의 제사장들"은 요시야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왔으나 이들에게는 성전에서 중요한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vv. 8-9). 다음으로, 아이들을 "불을 통해 지나가게" 하는 곳인 힌놈의 계곡에 제의적 장비도 이와 마찬가지로 훼손되었다. 성전 주위에 돌아오면서, 그는 히브리 텍스트에 다른 방법으로 언급되지 않은 한 예배로서, 태양을 헌신적으로 숭배하기 위해 말과 마차를 멀리 보내 버렸다(v. 11). 아하스와 므낫세에 의해서 설비된 제단들을 의식적으로(전례적으로) 파괴시켰고, 그들의 가루를 오아시스 Qidron에 뿌렸다(cf. 23:6). 다음으로 요시야에 의해서 훼손된 제의적 기구(산당)들은 솔로몬이 그의 이방인 부인들이 그들의 국가적 신을 숭배하기 위해 세운 바모트(집)였다(v. 13). 마지막으로, 요시야는 마세보트를 부서 버리고 신명기적 법률 제정에 일치하여 아세라를 찍었고 사람의 뼈로 가득한 것으로 그 지역을 비신성화 했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요시야의 개혁에 몇몇 중요한 관심이 즉시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의 개혁 동안 제의적 활동과 사물들을 정화시킨 것은 신명기에 의해 정확하게 불법적인 것들이다. 요시야의 노력은 야훼보다 다른 신을 경배하는 모든 방법(도구)들을 제거하고, 어떤 비 야훼적인 항목들을 예루살렘 성전이 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예식으로 연합된 모든 장소들을 종교 의식적 훼손이라는 것을 포함하였다. 요시야의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청사진으로써 취급된 외국 사람들이 숭배하는 예식의 신명기적 특색과 중앙집권과 제의적 순수성에 대한 신명기적 관념이 거의 질문할 수 없다. 동시에 요시야의 어떤 행동에 대해 특별히 주목해야 되는 것은, 특히 솔로몬에 의해서 세워진 바모트가 아직 활동 중이고, 그 개혁이 히스기야 초기에 기인된 것이라는 질문이다(2 Kgs 18:4). 그래서 요시야는 유다의 예배 그리고 종교적 국가적 그리고 민족적 동질성을 신명기적 청사진에 일치하여 재수립하였다. 므낫세의 통치에 기인된 동질성의 붕괴가, 만약 짧은 시간동안 이라면, 신명기적 관념에 대한 요시야적 계약적 의식적 법률 제정으로 지금 상쇄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신명기 안에서 세운 경계에 의해 구조화된 국가적 동질성은 이스라엘의 쇠퇴한 국가, 요시야의 개혁이 지배적인 그 지역이 포함되고 있다. 여로보암의 중심적으로 채용한 제단의 경계, 벧엘의 제의적 기구에 요시야는 그것의 제단과 더불어 바마를 파괴했고 아세라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v. 14에 묘사되어 있는 비슷한 방법으로 신성화된 지역을 훼손했다. ; 그는 제단 주위에 묻혀 있던 그들의 뼈를 태워 버렸고, 그래서 어떤 의식적 목적을 위한 기구를 비신성화했다. 신명기적 사관에 일관하는 방법으로 요시야는 옛 이스라엘 국가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있는 제단을 위해 이런 예식을 넓혔고, 그들에 대한 사람의 뼈들이 묻히고 제사를 지내는 그런 제단의 제사장들의 제물에 의한 불법적 제단을 훼손했다. 그때 단 하나의 방법으로 이스라엘과 유다 전체가 제의적 단어로 재결합되었다. 야훼에 의해서 선택된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떨어져서 존재했던 예배의 장소는 없었다.
그의 개혁에 대한 마지막 행위로써, 그리고 Deut 16:5-6의 제의적 관념과 일치하여, 요시야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간 시기 이래로 신명기적 역사에 언급되지 않은 유월절로 백성들을 이끌었다, 예를 들어, 나라에서 그것의 의무가 실패함으로 그것을 채우기 위함이다. 이 축제의 상징적 의미가 신명기적 입법에 더욱 더 가득한 것에 이르게 하고 있다. 애굽의 노예 신분으로부터 해방을 기념하기는 유월절 의식은 근본적으로 계약적 공동체의 형태를 의식적으로 재창조하는 것이고, 신명기의 헌장이 박멸되는 것에 의해 모든 종교적 예식이 금지된 한 나라가 세워졌고, 지금 이 재평가된 유대 공동체에 의해서 평행 되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에 금지된 모든 중개적인 것들을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는 마지막 개혁 운동이 아주 영향력 있게 신명기적 저자의 예언자적 목소리, 이야기 설화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요시야의 통치 기간에 이러한 지각 있는 방법으로 신명기적 역사서의 저자에 의해 이원론적 기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왕의 행위를 설명하는 역사로써, 계약의 축복이 어떻게 얻어지고 사람의 부가 어떻게 보증이 되고, 계약과 그것의 의미로 연합된 보복적 정당성이 종교적으로 구조화된 관념의 문맥으로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가이다. 사람들이 신명기적 집대성을 규정하는 단어들이 민속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의되고 있는 것은 그 점에 있어서 명하여진 계약 의식의 적합한 제정에 의해 의식적으로 재창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뒤따르는 왕의 궁극적 실패를 증언하는 이야기의 연속성 이래로 요시야는 므낫세의 행위를 용서하기 위한 마음내키지 않는 신성함뿐만 아니라 그의 개혁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확한 보복의 관념, 신명기적 전통의 본질적 부분이 계속 유지되고,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 전체가 이해할 수 있는 안정되고 믿을 수 있는 영역이 보증되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방법에 있어서, 신명기적 운동의 예언자적 입장을 그냥 훑어보면 안 된다. 특별한 신명기적 역사를 위해 그리고 신명기적 전통을 위해 나비(제사장)의 특색에 대한 중요성이 이 그룹의 동질성의 다른 면을 구성한다. 전체 역사가 구별되고 분명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그런 국가들 가운데 백성들의 흩어짐에 의해 유다의 민족적 동질성이 위협받고 그리고 나라의 쇠망을 가져오고 국외 추방을 인도하는 그런 사건들을 반영함으로써 구조화 될 때, 이야기 설화 기사는 나라들 중에 완전한 동화와- 분해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의 민족적, 종교적 공동체로 남기 위해 그리고 회복하고 되찾기 위한 필요한 관습을 찾는 백성들을 가르치는 도덕적 관점에서의 목적으로서 취급하고 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야훼를 위해 거룩하게 되는 이 백성의 경계선을 선포하는 선언을 공급함으로써 요시야는 조직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이런 요구들을 채우고, 이스라엘이 미래에 신명기적 저자에게 나라와 백성의 관념을 어떻게 회복시키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방법으로 신명기적 저자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그룹을 재건한 그 나라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변의 일부분의 틀로 창조하고, 신명기 안의 하나의 관념으로써, 그리고 요시야의 행위에 대한 기사에서 역사의 목적에 매우 가까운 관념을 재건하는 것으로써 정의한다. 동질성의 실제화와 그것의 잃어버림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틀로써 포함된다. 신명기의 오늘은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별시키는 신명기적 의식 행위를 적합한 이행으로 일치할 수 있고, 어떤 시간에서 의식적으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계약을 깨기 위한 파괴의 위협이 동질화할 수 있는 전체로서 이와 같은 동질화된 공동체를 유지하는 위험에 서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 삶의 위치를 통해 지나온 자신의 국가적 자취에 의해 채용된 역사가 그들이 거주하는 가운데 경쟁하는 사회와 민족적 세계 구조로부터 이 그룹이 그들 스스로 구별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이런 동질성이 그들 스스로 관념적 동질성을 연속적으로 재형성하고 재창조하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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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URSUS Ⅱ
THE IDENTITY OF "SO, KING OF EGYPT"
왕하 17:4에 "그래서, 에집트 왕이다"라는 언급은 수년간 학자들을 당황케 했고, 그리고 확인하는 과정이나 혹은 게다가 이 비밀의 통지를 설명하는 어떠한 제안도 거의 없었다. 그것은 여기에서 주제에 대한 문학을 연습하기 위한 나의 목적으로써가 아니라, 단지 내가 거짓말로 가장 비슷하게 해결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곳을 지적하고 그리고 가장 최근 약간의 제안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그래서"라는 성공적인 증명(확인)은 에집트인 역사의 어두운 시대에 일치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북쪽 왕국의 목적을 연대기를 위해서 동시에 발생하는 도움이 되는 외부벅 봉사로써 즉시 분명해 질 것이다. 어떤 가능성은 지금 한 번 그리고 모두 제거헐 수 있다: 25세기의 Dynasty 파라오 중의 하나로써 "그래서"라는 종일성을 위한 지난 과거의 시도는 기원전 712년에 어떤 넓혀진 Nubian이 먼저 온 델타를 지배하는 그 비슷하지 않게 보이는 것처럼 그 만큼 불가능한 영역을 내려앉혔다. 보다 더,
여기서 붙여지는 것아니야?
파라오적인 가능성은 지금 Dynasty 22nd 그리고 Dynasty 24th로 제한해야 한다.
최근에, K. A. Kitchen은 "그래서"가 22th Dynasty의 (O)so(rkon) 이름의 형식을 줄여써서 대표하는 것을 제안했다. 동쪽 델타에 있어서 그의 토지의 범위와 타니스에 대한 그의 자본의 논쟁은 이 "군주 그림자"의 부분에 대한 실제적인 자원의 부족을 단지 대표하는 외교적 노력으로부터 성공의 결과가 분명히 부족하다는 것을 포함하여 Kitchen, Assyria에 대항한 그들의 반란을 위해 군대의 조언을 구하는 이스라엘의 사절을 찾는 목적지가 거의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전, Hans Goedicke는 이 요점을 더 안전하게 용해시키기 의해 나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나타내었다. Tefnakht는 720년대의 10년 동안 델타에서 가장 힘이 센 파라오를 제안하는 것이고, 그가 서부 델타에 있는 Sais의 수도를 주목하는 것은 그의 사절과 Hoshea에 의한 에집트의 정치적 중심으로써 아마도 간주될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S ' 는 Sais의 수도로 언급함으로써 이해될 것이고, 그리고 어떤 특별한 파라오로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알브라이트가 추신 안에서 Goedicke's의 기사를 지적하는 것으로써, 왕하 17:4절의 헤브르 문서는 두 번째 중자탈락을 통하여 'el로 "에집트 왕에게, 사이스에게"인 'el S <'el> melek Misrayim으로 원래적으로 읽어야 한다.
다른 많은 학자들은 더욱이 이 용액을 더 강조한다. 사실, 안토니 스팔링거는 다른 증거, 즉 사이스의 파라오는 앗시리아로 후에 선물을 보낸 Bubastite 파라오 Shil anni에게 뚜렷한 대조에 있어서, 앗시라아의 친구들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논쟁했다. 그럼으로, 그것은 나에게 아마 Hoshea가 그 때의 서부 델타를 통치하고 있는 Tefnakht로부터 도움을 구했을 것이라는 증명처럼 보인다.
최근의 기사에 있어서, 도날드 B. 레드포드는 사이스로 "그래서"를 기초적 동일성으로 더 확신하고 있다. Manetho와 26th Dynasty를 위한 과장된 목록을 보면, 레드포드가 Nechepdo으로 들어간 입장은, 존 레이가 이미 주목한 것으로써, 아마도 가장 형용어구 - pso에 의해 따라진 Necho이름의 반복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레드포드는 에집트인의 p', s', w(w), "the Saite"을 반영하는 이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갔고, 그래서 희랍 이름이 처음부터 "Necho the Sait"로 지명되었다. 성서의 와 비슷한 이름과 에집트의 이름을 유사한 아람적인 것으로 변형시킨 것을 인용한 레드포드는, 성서적인 "So"도 뒤에 잘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론적으로, 연대기에 관한 낱말은 정리되어 있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So"는 아마 Tiglathpileser III의 죽음과 727년에 계승한 그의 아들 Shalmaneser V의 성공한 후의 몇 해를 가리킨다는 Hoshea's의 제의에 일반적으로 동의했다. Tadmor's의 유다의 연대기를 따르면, 아하스의 죽음은 스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본다. 나는 그것이 중대성 없이는 안 된다고 제안한다. 즉 연대기적 작가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성전을 깨끗이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승리의 유월절도 히스기아의 시대라고 한다. 연대기적 작가가 독자적으로 여기에 반영했든 안 했든간에 그런 야훼적인 재건은 확실히 앗시리아가 약했던 시대에 꼭 들어맞는다고 인정한다. 그것은 실로 역사를 풍자한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의 호세아가 같은 시대의 에집트의 땅으로부터 군대를 찾는다면 유다의 히스기야는 옛날 그 땅에 대항해서 이스라엘에게 승이를 얻게 한 신에게 충성의 의무를 되찾으라고 선언할 것이다.
Gary N. Knoppers, "There Was None Like Him" : Incomparability in the Books of Kings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
양립 불가능 형태
솔로몬은 전대미문의 지혜와 부로, 히스기야는 신뢰로, 요시야는 개혁으로
포로중인 신명기 역사가가 이미 이전에 있던 양립 불가능한 형태를 사용한 것이다.
게리 나퍼는 히스기야를 탁월한 믿음을 강조하고 그를 개혁자로 언급하는 것을 부정하면서 요시야를 개혁자로 보았다.(p.10)
시내산 구절(pericope)의 대한 생생한 모습
PART 2 by ANTHONY PHILLIPS
이 現 논문의 첫 번째 부분에서(VT 34 [1984], pp. 39-52), 나는 출 20:22-23절은 시내산 이야기에 대한 신명기사가의 편집의 일부분이 아니라 변형된 출 20:24-26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성소들을 더 단순하고 근본적인 형태로 정화하려는 前신명기적 시도들이 현저한(두드러지는)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나는 출 34:11절 이하의 율법에 반영된 히스기야의 개혁과 동일시했다. 나는 이 시내산 이야기의 개정은 사마리아 몰락의 관점에서 유다와 야웨와의 관계를 재평가하려는 原신명기사가에게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신명기사가 편집자들이 이 시내산 사건의 原신명기적인 설명에 의존했지만, 그들은 고의적으로 (ⅰ)십계명을 준 이후에 바로 율법판을 소개함으로써 계약 법전과 그리고 (ⅱ)단지 십계명만 두 번째 판에 쓰여졌다고 주장함으로써 출 34:11절 이하를 생략하여 그것을 고의적으로 바꾸어 버렸다(신 10:4). 이와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유일한 호렙산의 언약 율법인 십계명으로부터 기인한 것처럼 훨씬 더 광범위한 개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히스기야의 개혁을 삭제해 버렸다(신 4:13, 5:22). 이제는 더 이상 신명기사가 편집자들이 시내산 이야기 때문에 출애굽기를 편집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유일한 정경적 권위를 가진 한 설명(version)으로 대체해 버렸다.
이 논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 나는 어떻게 출애굽기에 있는 시내산 이야기가 현재와 같은 모양에 이르렀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질문에 답변하려는 어떤 시도에 닥칠 가장 궁극적인 위험들을 알고 있다. 나의 목적은 단순히 출 20:22-26절의 핵심적 위치를 인식함으로써 발생하는 몇가지 견해들을 단순히 제안하려는 것이다.
Ⅰ
우리는 이미 출 20:22-23절은 현재의 형태인 출 24:3-8절과 관련이 있는 출 19:3-8처럼 동일한 입장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에 히스기야의 개혁과 관련된 것으로서 출 20:22-23절을 내가 더 일찍 증명한 것이 수용되었다면, 그 이야기는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기본적 근거위에서 시내산에서 계약을 세운 것을 묘사하고 있는 출 19-24장에 있는 시내산 기사에 관한 그 이야기의 뼈대구조는 또한 原신명기사가들에게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뼈대구조와 신명기사가의 삽입물인 신명기 5:1-6:3 그리고 9:1-10:11 둘 다에서 연설을 할 때 복수 형태의 사용이 출애굽기와 신명기 모두에서 공통의 편집자적인 입장을 지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반면에, 신명기사가 편집자들이 고의적으로 출애굽기에서 시내산 이야기를 삭제하려고 의도했다는 사실이 이것을 제외시킨 것이다. 더구나, 이 이야기의 구조 안에서 연설의 복수 형태의 사용은 출 19-24장안에서의 原신명기사가들의 편집 활동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고의적인 문체의 고안장치이며, 그리고 그들의 계약신학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비록 그 이야기 자체가 계속되는 속에서(출 23:20-23, 24:12-15, 32:1-34:28) 그들은 초기의 기사로부터 그들의 작업을 구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연설들에서 단수형태로 방향을 돌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D. 패트릭은 VT 27(1977) 156페이지 이하에서 그 이야기의 틀은 시내산 이야기의 계약 법전을 배치하려고 구성되어졌다고 주장했다(그의 주장으로는 E가 J.B.S.와 결합하기 전에). 차일드는 또한 언약이 계약 법전과 십계명을 기초로 하여 봉인되었다고 이해한 JE편집자에 의해서 출 19-24장안에 삽입되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모세가 사람들에게 "말씀"(십계명, 출 20:1), 그리고 언약이 만들어진 "법령"(계약법전, 출 22:1)이라고 말했던 곳인 출 24:3에서 확실히 명백하다. 비록 나의 저서 "고대 이스라엘 형사법"(옥스퍼드, 1970)에서 "JE편집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논쟁에서 E에 의해 의미되어진 것의 전체 문제뿐만 아니라 나는 또한 근본적인 J역(version)이 출 34:11이하(출애굽, p. 607)의 조항들을 밑에 놓았다고 차일드처럼 주장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것들은 히스기야 개혁의 관심을 반영한 계약법전과 십계명으로부터 이끌어 낸 율법의 고의적인 결합과 정교함을 나타낸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신명기 신학이라고 알려진 것을 예시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原신명기사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신학자들의 무리라고 믿는다. 그들은 북왕국의 멸망이라는 관점 하에서 현재형태인 출 19:3-8, 20:22-23, 24:3-8의 이야기 구조를 따랐던, 그리고 출 19-24장 안에 계약법전을 삽입하였고, 출 32-34장을 창작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原신명기사가들의 작품에서 계약이라는 용어가 나타났다고 함으로써 그의 저서 "역사와 전통안에서의 출애굽과 시내산"(옥스퍼드, 1973)에서 나타난 니콜슨의 견해들을 수정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져서는 안된다. 사실상, 그 가능성은 그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논문안에서 고려한 것이다(pp. 74 이하). 물론, 앗시라아의 팽창주의 후의 유다의 불확실한 미래는 언약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그 나라의 소유물이 보장되어지는 한 신학의 발전을 위한 적절한 배경을 제공하였다. 더구나, 이것은 原신명기사가들이 사마리아의 파괴로 심하게 흔들렸던 유다에게 주고자했던 보장이다. 그러므로 현재 형태의 출 19:3-8, 20:22-23, 24:3-8의 이야기 구조의 창작, 그리고 출 32-34장에서의 언약의 낙성식과 금송아지에 대한 기사. 더구나, 그런 최근의 언약개념의 출현은 8세기 선지자들의 작품에서 berit라는 용어가 호세아 6:7과 8:1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체적으로 결핍되었다는 것을 설명해 줄 것이다. 호세아 6:7절에 대한 해석이 불분명한 것으로 남아있는 반면에, 호세아 8:1절은 그것의 기원이 신명기사가적 편집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의 "나의 torah"는 야웨의 의지를 완전하게 표출하는 신명기적 의미에서 사용되어졌고, "나의 berit"와 평행을 이루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제가 되는 자료에서 신학적인 사상에 대한 적절한 통제를 하지 않고 특별한 단어가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으로 성급한 결론을 이끌어내는데 대한 주의가 행해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어떤 특별한 단어가 이것을 정의하기 위해서 생성되기 전에 한 사상이 이미 이스라엘 신앙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래서, A.D.H.메이스가 지적한 것처럼 선택이 가장 초기 시대부터 이스라엘 신학의 일부분이었던 반면에(아모스 3:2),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bahar를 도입한 사람들은 신명기사가들이었다. 두 번째로, 특별한 용어가 결핍된 것은 그것을 몰라서 보다는 또다른 이유때문이었다.
어떤 사건에 있어서, D.J McCarthy가 출 24:8절의 "언약의 피"라는 "바로 비신명기적 구절"로서 그가 묘사했던 것은 Perlitt과는 반대로 그들의 이야기 구조의 결론을 내기 위해서 원신명기사가들이 이것에 의거하기 전에 출 24:4-6절에서의 희생제의의 일부분으로 berit의 개념은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출 24:5의 희생제를 드리는 "청년"에 대한 언급이 레위기 제사장직이 세워지기 전 시대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출 24:4-6, 8에서 우리가 보는 것처럼 초기 언약제의로써 군주제 이전의 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더구나 언약이라는 용어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은 세겜과의 동맹에서 발견되어지는데, 메이스가 주목한 것처럼, 예루살렘의 유일한 성소를 강조하는 신명기사가적 문학작품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세겜에는 강한 前신명기적 언약 전통이 발견되지 않은 곳이다(p. 68)
니콜슨은 McCarthy의 추론을 수용했다, 그래서 "역사와 전통안에서의 출애굽과 시내산" 이라는 저서에서 펼쳤던 자신의 초기 견해를 수정했으며, 비록 저자와 연대에 관해서 판단을 유보했지만 출 24:8에 언급된 제의는 언약의식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에게 있어서 피의제의는 원래는 관계없는 그룹이나 사람들 사이에 우정이나 형제애를 형성시키는 관점으로 이해되지 않았고 오히려 야웨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히브리인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었다. 출 19-24장의 전체 이야기를 요약한 출 19:3-8의 서론에서 주위를 끄는 것은 사상은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 명명하는데 있다(출 19:6 상반절). 이 언약 제의의 결과로써, 출 24:1-2, 9-11(니콜슨, VT 24[1974], PP. 77이하)의 前야웨주의적 신의 현현(顯現)은 거룩한 산은 백성이 접근할 수 없는 장소라는 출 19장과는 반대로 지금은 인정되어진 민족으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안전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Ⅱ
원신명기사가들과 신명기사가적 편집자들에 의해 매우 강조된 언약 용어가 그들에게서 기원하지 않았다면, 십계명의 경우는 어떠한가? 신명기사가 편집자들이 "십계명"이라는 말을 생성시켰는가(신 4:13, 10:4)? 처음부터 시내산 이야기에서 언약과 십계명이 결국 함께 연합되었고, 야웨의 선택된 백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세우기 위해서 십계명에 대한 순종이 가능했겠는가? 비록 십계명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호 4:2과 렘 7:9에서 발견된 사람들에 대한 범죄에 관한 특별한 명령들의 집합이기는 하지만, 십계명 자체는 출 20장과 신 5장에서만 진술된다. 그러나 P.R Ackroyd 축하 논문집에 실려있는 "예언과 율법"이라는 나의 글에서, 나는 이 구절들은 그들의 눈에 호렙산에서 주어진 유일한 율법인 십계명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서 파괴되었다는 것을 지시하는데 관심을 가진 신명기사가적 편집자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 도시들에 임한 결과적인 재앙들은 이해되어졌다.
8세기 선지자적 자료를 잘 살펴보면 두가지의 예언자적 죄의 선고가 나타난다. 아모스, 미가 그리고 이사야는 출 22:20-23:9에 명령되어진 종류의 행동들 같은 인도주의적인 것과 의로운 것이 결핍되었다는 일반적인 비난에 유일하게 자신들의 고발(기소)을 호소했고, 필연적으로 법정에 의해 강요하도록 특별히 규정되지 않았다. 즉 왜 이 법조항들이 제재를 받지 않는지를 설명한다. 또다른 전통은 호세아의 전통으로 그가 배도로써 이해한 이스라엘의 종교혼합에 대해 비난한다.
이 둘의 예언자적 전통에서 강조되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법이 법정에 의해 제재조치가 행해지도록 악한 행동들에 대한 언급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호 4:2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살인과 간음같은 극형을 받을 만한 범죄가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범죄들이 행해졌을 때 그것들은 법률 하에서 취급되어졌다는 것이다. 8세기의 예언자들이 법과 질서안에서 더 명백한 와해행위들을 비난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확실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의 열성적인 종교적 열정뿐만 아니라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처럼 법과 질서의 외부적인 유지안에서 그들의 침묵으로부터 야웨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확신을 백성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8세기 예언자들의 혁신은 자신들의 메시지의 내용 안에 있었다. 즉 명백히 질서있고 확신에 찬 사회가 종교적인 행위에 헌신하기 시작했고, 아모스 시대에 이르러 어느정도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되어진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그들은 한편으로는 비인간적인고 불공정한 관습들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 혼합주의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인도주의자인 아모스, 미가 그리고 이사야의 관심이 계약법전안에서 인도주의적인 것과 의로운 것에 관한 율법이 동기가 되는 구절 안에 추가되어 재차 강조되어졌고(출 20:20 하반절, 22-23, 23:9), 나중에 신명기의 더 심오한 인도주의적 조항들에 의해 재 강조되어진 반면, 이것은 출 19-24장, 32-34장의 현 시내산 이야기와 원신명기사가들의 창작과 신명기서의 원본에 대한 신명기적 편집 모두를 주장했던 사마리아의 몰락 바로 전에 말해진 호세아 예언의 영향이었다. 이 이유 때문에 신명기 사가들은 호세아서에서 보는 것처럼 십계명(4:2)과 "나의 berit"(8:1)에 호소하기 위해 8세기 예언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호세아서를 편집했다. 신명기사가 편집자들은 호렙의 언약법인 십계명이 완전히 거부된 배경을 향하여 호세아의 설교가 이해되도록 의도했다. 그래서 호 4:1에서 호세아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책망한 반면에, 비록 8세기 예언자들이 그런 행위가 발생한 결과보다도 법과 질서의 완전한 붕괴는 없다는 것을 자신들의 침묵으로 지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명기적 편집자들은 십계명의 불이행의 관점에서 이것을 정의했다. 다시말해서, 십계명에 대한 위반은 야웨의 이스라엘에 대한 완전한 포기를 나타내는 총괄적인 표현으로서 신명기사가 편집자들에 의해 사용되어졌다. 두가지 전통이 있는 예레미야 7장의 성전설교에서 나는 5절 하반절-6절에서 결합된 예언자적 정죄, 즉 인도주의적인 것과 정의의 적절한 시행, 그리고 배도를 피하는 것을 분리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삶의 한 사건에 근거를 둔 신명기 사가의 해석자체(렘 24)인 이 설교에서 신명기사가 편집자들은 야웨의 완전한 포기를 의미하는 총괄적인 진술로서 십계명의 불이행을 다시 한번 도입했다. 예레미야 7:9을 제외하고는 유다에 대한 정죄를 십계명에 위치시키는 것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관점에서, 십계명은 신명기적 편집이라는 니콜슨과 메이어스 그리고 다름사람들의 견해는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berit에 대한 더 이른 논의는 너무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데 대해 주의해야 했다. 십계명의 일반적인 폐지의 결과와 같은 일반적 불법에 대한 어떤 언급이 없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자신의 직접적인 선택이 십계명의 명령을 지키는 것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 때문으로 해석되어 질 수 있다. 이것에 대한 증거는 아모스시대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는 언급에서 찾을 수 있다(8:4-6). 확실히, 예레미야 시대에서 조차도(렘 7:4) 예언자적 항의에 직면해서 사람들의 명백한 확신은 자신들 스스로가 야웨에 충성했다고 생각했고 야웨가 자신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지시한다.
Ⅲ
고대 이스라엘의 법률사로부터 십계명이 초기의 것이라는 것을 지지할 어떤 증거가 있는가? 물론, 우리의 정보는 구약 법률 수집물에서 완벽한 법률 체계를 결코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지 부분적이다. 심지어, 이것들은 법률적인 중요성보다는 주로 신학적인 구성에 더 관심이 있다. 법률은 또한 단편적이고 경우에 따라서 사실상 법률에 의해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보다는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데 더 관심을 갖는 이상주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이 수집물들에서 어떤 명확한 진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메이어스(pp. 162이하)는 어떤 유일한 계명의 역사는 열계명의 수집물의 역사와는 구별되어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 몇 계명들은 오래되었고 두세개의 작은 수집물을 형성했던 반면에 그의 주장에서는 7세기 이전에 열 개의 계명의 수집물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왜냐하면, 호 4:2 조차도 열가지 모두를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후기로 십계명을 소급시킨다면 왜 이 특별한 계명들이 그 당시에 함께 결합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계명들이 현재 그것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신명기서의 율법에 대한 서론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반면에 사실은 그것들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 확실히, 신명기적인 법률적 관심의 요약으로서 십계명을 수집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십계명의 신명기적 기원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그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의 수집물의 내용을 근거로 했다는 만족할 만한 이유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결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록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십계명을 초기의 것으로 지적하고 이스라엘의 법률사와 이스라엘 자체 둘 다에게 통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다.
첫째로, 죽음이라는 형벌을 강요할 필요가 있는 범죄는 모두 십계명에까지 소급시킬 수 있다. 이것은 부모를 거역하는 자에 대한 함부라비 법전의 195항에 비교해서 법의 잔혹성을 설명해준다(출 21:15,17). 두 번째로, 계약법전(출 21:12-22:19)의 mispatim에 대한 검토는-재판관이 사용하는 가장 근접한 이스라엘 법전-편집자가 고의적으로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피해를 보상해주어야 하는 일반 범죄와 죽음이라는 형벌을 필요로하는 범죄를 구별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살인(출 21:12)은 폭행과는 달랐고, 유괴범(출 21:16)은 재산을 훔친 것과 달랐다(출 21:37이하). 부모에 대한 거역(출 21:15, 17)은 죽음이라는 형벌을 수반했다; 처녀를 유혹하는 것(간음과 비교해서)은 피해만을 보상해주면 되었다(출 22:15 이하). A. Alt에게 있어서 우리가 유괴에 대해 언급한 도적질에 대한 계명을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이 범죄들은 십계명의 명령과 모두 관계가 있는 것이다. 나의 저서 "고대 이스라엘의 형사법"(pp. 158이하)에서 주장한 것처럼, 편집자들은 십계명에 진술된 것처럼 야웨주의라는 가장 중요한 원리의 관문에서 오래 동안 장로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그 지방 고유의 법적 관습들을 동질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범죄자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서 스스로가 쫓겨났기 때문에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에 대해 공동체는 죽음의 형벌을 요구했다. 내가 두 개의 최근 논문에서 제시한 것처럼, 또다른 고대 근동 관습과 비교해보았을 때, 이것은 이스라엘에서는 왜 살인자와 간음자를 사형시켜야 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었는지, 그리고 타협은 왜 절대적으로 금지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셋째로, 죽음을 요하는 형벌은 범죄(간음이나 살인)와 피해를 갚아야 하는 민법적인 범죄(가축을 도적질하는 것)를 구분할 동일한 필요성은 삼하 7장에 나단의 비유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묘사된 유일한 십계명 조항들을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나온 특별한 법적 체계를 소유하였고, 그리고 그들을 모든 다른 고대 근동의 민족들과 분리시켰다는 충분한 근거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살펴본바와 같이, 신명기적 법률앞에 십계명을 삽입하고, 어떻게 홀로 두 번째 판의 내용을 형성시켰는지를 묘사하려는 신명기사가 편집자들의 목표는 두 번째 판의 율법과 계약법전의 조정율법의 기록을 가지고 출애굽기에서 시내산 이야기를 삭제하려는 것이었다(출 34:11 이하). 동시에 이 십계명의 삽입은 신명기적 율법에 적절한 계보를 주었다. 그래서 나의 견해로는, 십계명은 새로운 신명기적 창작물이다라고 주장하기보다는 신명기사가 편집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호렙산에서 주어진 유일한 율법인 고대 수집물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였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비록 십계명이 신명기적 율법 그 자체에 거의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내산 이야기를 기술적으로 삭제함으로써 편집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의 유일한 테스트인 토라처럼 자신들의 합법성을 유효하게 했다. 그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으로 모든 예배를 중앙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명기 편집자들은 본래의 신명기적 율법 수집물의 일부분으로 형성되지 않은 하나의 새로운 관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십계명을 사용할 수 있었다(7-24장). 십계명의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어구를 제공하기 위해서 출애굽과 그리고 황소와 나귀를 안식일 계명안으로 삽입하고, 그리고 또한 여섯 번째의 짧은 명백한 명령을 열번째에 혼합시킴으로써 원래의 십계명을 수정하여, 그들은 안식일의 계명을 십계명의 중심인 주요한 위치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 십계명은 포로기 상황에서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중요성을 명확히 반영하였다.
그러면 출 19-24장의 시내산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는 어떻게 이것이 오늘날의 형태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을까? 확실히, 출 19:19 이후로부터 출 20:18-21절은 신의 현현(顯現)의 결과에 대한 백성들의 두려움을 원래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에게 그가 확실하게 받아들여지는 반면에, 야웨의 무서운 강림은 또한 그것에의해 그들의 충성을 입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구별된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의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음이 틀림없다. 이것은 십계명의 선포로 확고해졌고 ,야웨의 권위가 이미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fati accompli"로서 제시될 수가 있었다. 비록 내 생각에 이 명령들이 선택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규정지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법적 체계의 전체 본질을 결정했겠지만 이것은 왜 십계명이 법적인 제재가 없이도 일련의 명령들을 합법화시킬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8세기 예언자들의 항의이후에 原신명기사가들은 십계명과 계약법전에 의해서 언약 법을 재해석하려고 했고, 그래서 시내산 이야기에 계약법전을 삽입하였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십계명을 따라서 출 20:18-21을 재정리하였다. 그 결과로서 백성들이 야웨의 절대적인 요구사항을 들었을 때에만 두려움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모세가 중재자로서 백성들이 십계명의 절대적인 요구사항을 지킬 수 있도록 보증해주는 역할을 하는 요구로 인도해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언약법전의 조항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요구사항들을 행할 수가 있었다.
나는 니콜슨(VT 27[1977], pp. 422이하)과 메이어스(pp. 161이하)에 반대해서 맥캐시와 차일드(출애굽, pp. 347이하, 388이하)와 함께 십계명은 근본적으로 시내산 이야기의 일부분이며, 직접적으로 백성들에게 연설한 것으로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출 20:18-21을 재정리한 결과일뿐이다고 주장했다. 비록 그들의 계승자인 신명기사가 편집자들과 다르게 원신명기사가들의 의해 이것이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말이다. 신명기사가 편집자들이 백성들에게 십계명의 직접적인 강연을 강조한 것은 초기 계약법전의 조정된 율법과 출 34:11 이하의 두 번째 판을 삭제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시내산 이야기에서 기인했지만 지금까지는 신학적인 중요성을 지니지 않았다.
현재의 역사적인 사건들에 신학적인 판단을 행했던 原신명기사가들은 백성들의 충성에 대한 시험으로서 무엇보다도 주상(鑄像)을 금지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이 충성심의 결핍이 발견되는 곳이 출 32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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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표에서 보듯이 성경은 북왕국의 왕들은 거의 대부분 여호와 신앙에 비추어 볼 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왕들이 없다. 그러나 남왕국의 왕들은 균형을 이루어 부정적인 평가와 긍정적인 평가가 시계추 움직임처럼 도표에 나타난 것처럼 오가며 보여준다.
남북왕들의 개혁구조를 살피며 개혁 대상들을 분류하여 주제별로 신명기 역사귀절들을 추출하여 개혁의 성격을 자세히 추출해 낸다. 최종적으로 히스기야 ,므나세, 요시야왕이 마지막으로 삼중구조로 결론적 위치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삼중구조에서는 요시야왕의 종교개혁기사가 종합적으로 제의 개혁의 모든 대상이 열거되었기 때문에 가장 강조되고 중요한 위치에 놓였다고 결론내린다. 호프만은 문학적 관점에서 본문에 기록된 용어와 단순한 기술에 강조를 하고 있다. 본문 뒤에 놓인 역사적 정황과 전승의 흐름은 간과한 점이 없잖아 있다. -어떤점이 간과하였는 가?
( 나퍼글에서 인용, Hoffmann는 요시아의 개혁의 이야기는 이전의 통치자들의 죄를 돌이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을 했다. 그러므로, 요시아는 아세라상(왕상23:6), 단상과 목상(23:14), 산당(23:8), 도벳(23:10) 성전의 두마당에 세운 제단들(23:12), 므낫세로부터 그에게 남긴(21:3,5) 하늘의 주에 대한 섬김(23:4,5,12)을 없앴다. 요시아는 솔로몬이 그의 이방인 아내들을 위하여 세운 산당을 파멸시키고 신성모독으로 여겼다(왕하23:13-14).
므낫세와 솔로몬의 죄들을 바로잡는 것 말고, 또한 요시아는 익명의 이전의 왕들의 많은 죄악들을 수정했다. 요시아는 바알에게, 해와 달과 별에게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없앴다(23:5). 그는 미동을 위한 작은 방을 헐고(23:7) 태양에게 바쳐진 말들과 수레를 제거했다. 더욱이 요시아의 개혁은 이전의 왕들에게서 언급되지도 않았고 이전의 통치자의 잘못으로 돌리지도 않았던 부정한 제의적인 행동과 물건들을 제거했다. 그는 바알이나 아세라 그리고 하늘의 신에게 바쳐진 성전의 기명을 없애고 불살랐다(23:5). 또한 그는 예루살렘의 성에서 유대까지 하나님의 제사장을 데리고 왔고 이전의 그들의 산당을 무시했다(23:8). 모든 그 제의 실행의 발달과 근원이 무엇이든 신명기사가는 예루살렘에서의 요시아의 개혁운동을 서술했고 그것을 폭넓게 기술을 하고 있다. )
나퍼(Garry Knopper)는 신명기 역사가가 중요한 역사적 모델로 삼은 왕은 솔로몬과 히스기야 ,요시야 왕이라고 보고 있다. 이들은 양립불가능성의 비교형태로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와같이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더라" 라는 평가를 세 왕만이 받고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솔로몬은 지혜와 부에있어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히스기야는 비교할수 없는 최고의 신앙을 가진 것으로 평가히고 ,요시야는 최고의 개혁을 실시한 왕으로 신명기 역사가가 모델을 삼고있다고 보았다. 나퍼도 요시야왕을 최고의 개혁가로 보고있는 데는 그관점을 같이한다. 신명기 역사가가 역사서에서 종교개혁의 이상적인 왕으로 요시야왕을 그려놓은 것은 분명하지만 히스기야 종교개혁을 정치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요시야가 종교적인 측면을 강조한것과 비교하여 대조를 이루어 평형의 상태로 다윗과 대등하게 히스기야 요시야라는 역사적 인물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1. 히스기야 기사와 요시야 기사가 분량이 유사하다.2. 역대기 기사는 히스기야 기사가 종교적이고 요시야는 정치적으로 신명기역사와 대조적이다 .따라서 역사적 히스기야 종교개혁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역사적 의미가 중요하였다.3. 신명기역사서에서 정치 중교의 펜들 시스템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점을 놓치고 히스기야 제의 개혁의 정치적 성격을 찾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라 아니할 수없다.
생각하기(Th)
(나퍼- 바벨론 포로시대 이전의 신명기사가는 요시아의 국가적인 삶의 개혁을 칭찬한 반면에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는 요시아에 대해서는 비난을 하지 않지만 돌이킬수 없는 국가적인 멸망에 대해 므낫세를 비난한다. 이것이 요시아의 통치에 대한 중요성에 관한 바넬론 포로시대의 이전의 신명기사가와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 사이의 과장하고 있는 관념적인 차이점에 대한 관심이다. 포로시대의 신명기사가의 요시아의 통치에 관한 편집은 가볍고, 그들의 차이점들이 때때로 상상할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다. 포로시대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요시아의 개혁은 므낫세에 의해서 발생한 위험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요시아가 노력한 이유를 부정하지 않는다.)
신멱기역사서 연구사
4, 황수연
--------------영어번역에서 떼옴
이선36,김희섭40
김옥성1
과 목: 히브리어 2
교 수: 박 신 배 님 제출자: 김 옥 성
제출일: 1998. 5. 19. 학 번: 9501010
16. 순종의 길: 왕상 13장 과 신명기적 역사의 구조
마틴 노트의 기념비적인 [Uberlieferungsgeschichtliche Studien]이 빛을 본지 거의 30년이 지났다. 그 저서에서 노트는 Tetrteuch 또는 제의적 작품으로 구성과 조망과는 다른 소위 신명기적 역사라고 불리는 거대한 통일체를 이룬 역사적 작품으로 구성된 열왕기 하를 통해 신명기서의 이론을 전개시켰다. 그의 견해는 구약 학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고, 구약 문학의 중요한 한 획을 긋는 문학활동의 물꼬를 터놓는 역할을 했다.
그러한 노트의 이론에 대한 폭넓은 지지가 있었으나 이어서 일어나는 연구들은 일반적으로 동의되지 않은, 아직 여전히 합의가 되지 않은, 제기된 다수의 새로운 중요한 질문들 즉 불분명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야만 했다. 풀리지 않는 가장 주요한 두 영역의 의문들이 있다: (1) 신명기적 역사서 구성의 저자와 저작 연대의 일치 (2) 신명기서의 전체적인 신학적 견해의 구조와 원리.
전자의 주장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신명기적 역사는 작품들이 후에 단지 전적으로 개정하지 않고 단지 조금의 추가만 수용했다는 바벨론 포로기의 저자로부터 근본적으로 추론되었다는 노트의 기본적인 주장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명기적 역사의 서로 다른 관점을 주목해 볼 때 이것은 적어도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저자가 계속적으로 편집했다는 이론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신명기적 역사가 역사적인 저작이 있을 시기는 그들이 위치해야만 하는 저작 장소 만큼이나 견해가 엇갈린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들의 첫 번째 판은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편집되었고 나머지는 포로기에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포로기에 편집되었거나 심지어 포로기 이전 초기에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우리로서는 저자나 저작 연대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본 신명기적 저작의 모든 부분이 수 십 년 혹은 많은 세대를 거쳐 편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노트의 논제에서 가장 사람의 마음을 끌고 기본이 되는 면들이 완전히 버림받아야만 될 것이다.
논제의 두 번째로 주요한 부분의 고려 즉, 비밀에 쌓인 신명기적 역사의 신학적인 견해의 전체적인 구조와 기초에 관계하는 오늘날의 많은 작품은 역시 노트의 영향력 있는 작품이 나온 이래 이루어져 왔다. 이어지는 연구의 대상이 되어온 이러한 질문들 중에 이 범위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신명기 법전의 신명기적 저자의 관계와 같은 그러한 문제점이 있고, 그들의 관여는 신명기서 그 자체에 나타난 것을 확장한다; 즉 신명기적인 시각에서 왕권적 매시야 신앙과 다윗 신학의 역할; 그리고 신명기적 역사에서 중추적으로 구조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최근 연구에 의해서 진행되고 변경되어온 노트의 작품을 고려할 때 단지 어떤 더욱더 중요한 논쟁을 언급한다.
이러한 발전의 영향 아래에서 그것은 아마도 구약성서문학이 이루었던 이러한 중요한 본체가 되는 어떤 일치에 접근하기 이전에 작업되어서 잔존하는 많은 작품들이 좀더 명료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폭넓은 문학의 좀더 조직적인 선별과 평가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명기적 역사의 좀더 전문적인 주제와 구에 초점을 맞추는 논설과 특수 연구서를 통해서 계속적인 연구를 요구했을 것이다. 다음 페이지에 열왕기 상 13장의 그 저자 자신의 연구는 이러한 기념비적인 작품의 신학과 구조의 계속적인 연구에 가장 많은 기여를 했다.
II
열왕기 상 13장에 나오는 우리의 이야기는 신명기적 역사에 근거되는 예언적 이야기와 많은 황당한 내용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중에 하나이다. 지금의 위치와 같이 그 이야기는 벧엘에 있는 여로보암 1세에게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무명의 사람이 한 말이고 재단의 파괴를 예언한 신탁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로보암이 요시아에 의해서 약 300년 후에 바친 희생 제물에 대해서였다. 두 기적적인 표적에 의한 그의 신탁은 믿을 수 있게 되었고, 그 스스로 새롭게 하고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 왕에 의해 초청이 거부된 하나님의 무명의 사람은 그가 나타났었던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떠났다. 그러나 그는 귀가 길에 신에 의해서 정해진 길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 한 벧엘에 사는 예언자에 의해 설득되었는데 그가 그의 귀가 길을 계속 갔을 때 그 결과로서 사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벧엘에서 온 예언자는 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다시 가지고 왔다. 그는 그 시체를 자신의 무덤에 매장했고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같은 무덤에 자신이 죽었을 때 장사하라고 자기의 아들에게 가르쳤는데 그것은 반드시 벧엘의 제단으로 지나가는 어느 날이 올 것이라는 것에 대한 편지의 예언을 믿는 믿음 안에서이다.
이 이야기는 폭넓은 학문적인 평가에 대한 주제가 되어 왔다. 아직 의견의 일치는 없지만 그것의 구성의 때와 저작권, 양식비평의 분류, 전승역사와 신명기적 역사의 관념적 구조와 큰 구조적인 것 내부에 중요성과 같은 그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주의 깊은 관심이 제기된다. 우리가 특별히 이 연구논문에서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그 편지의 논쟁점이 있지만 그러한 것에서 방향을 선회하기 전에, 그것은 사장된 지나간 어떤 대표적인 학문적인 논문에 대한 간결한 논고를 제공하기 위해서 유용하다. 많은 주석가들은 우리 이야기의 뒤늦은 설화나 미드라쉬(midrash)가 단지 두 번째로 삽입되었고 상대적으로 늦은 단계에 그것의 현재 상황에로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벨하우젠은 그것을 "eine Legende im Stil des Midrasch"라고 불렀고 그것을 후기 바벨론 포로와 후기 신명기 작품 이후에 할당했다. 벤진저는 근본적으로 벨하우젠과 함께 동의하는데 오히려 후기 유대주의 안에 예언자주의의 기계적 개념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열왕기상의 그의 광대한 분석에서 A. Jepsen이 레위기적이고 주전 6세기 이후에 후기 신명기 개정에 대해서 우리의 pericope를 할당한다. 즉 그것은 두 번째 성전을 짓고 있는 기간이다. 이 장의 최근 연구에서 Jepsen은 여전히 이 견해를 선호하지만 포로기 신명기 작품이 이 장의 결론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Eissfeldt는 그것이 2차적으로 열왕기서 안으로 삽입되었다고 믿는데, 그것은 신명기 편집자에게 전적으로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유사한 견해가 J rg Debusdp 의해 주장되었는데 그 증거의 어떠한 중요한 논의가 없을지라도 말이다. 이들의 모든 주석자들은 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후기 신명기의 삽입이 2차적으로 존재하는 이야기로 생각한다. 만약 그들의 견해가 바른 것이라고 증명된다면 그때는 물론 우리의 이야기는 신명기 역사의 구조적이고 신학적인 평가에 대해서 중요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주석가들은 신명기 편집에 대해서 그것의 구성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의 현재의 위치를 지정한다. Montgomery는 문서가 확정된 시기에 대해 날짜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 사람이고 그것이 의심스러운 역사적 가치를 가진 미드라시라고 말한 사람인데 그것이 요시아 때에 편집이라고 선정한 anda를 따른 것이다. Snaith는 대략 주전 610년경에 신명기 편집자는 현재의 위치를 지정했지만 "이것이 고대의 이야기라고 의심할만한 적당한 이유가 없다; 신명기적 편집자는 여로보암이 심각한 경고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회복시켰고, 부수적으로 유대인들은 북부의 사람들과 함께 모든 친척 관계를 피해야 했다."라고 계속 주장했다. 그러나 Snaith가 예증으로 든 것은 그 이야기는 고대 설화라는 그의 주장을 주장하기 위한 증명이 되지 못했다. 불행히도 동일한 것은 그 태고의 설화라는 점과 함께 유사한 확신을 한 경우에 분명히 표현했던 사람인 W. F. Albright는 진실이다. 마찬가지로 열왕기 하 13장의 최근 연구에서 Martin Klopfenstein은 그것의 마지막 형태인 가능한 고대의 이야기에 의존하지만 그는 특히 요시아 때에 그 시기를 지정하려고 했다.
더러는 우리의 이야기에 일치성에 대해서 질문들을 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동등하지 않는 가치의 두 개의 독립된 전승에 대한 결합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Morgenstern는 vss. 1-10, 33-34에서 기초하는 본래의 이야기의 제 2의 확장인 vss. 11-32를 고려한다. 열왕기 주해서를 첫 번째로 개정한 John Gray는 그 이야기를 두 개의 분리된 전승으로 구성되었다는 견해였다. 그 이후로 그 이야기의 단일하다는 견해를 수용하는 대로 되돌아왔고, 그것을 그는 지금 "신명기 편집자에 의해서 전달된 사화(saga)에 있는 예언적 설화"로서 성격을 묘사한다. 그 이야기의 일치는 또한 마틴 노트에 의해 수호되었는데 그것이 신명기 편집에 대한 범위를 규정지었을 때 확실한 모순의 결과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초기 전공 논문에서 그는 우리의 이야기를 벧엘에 있는 예언적 범위에서 발생하는, 그리고 그의 역사 안으로 신명기주의자에 의해서 합병된 한 개인의 설화처럼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요시아 왕의 평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유감스럽게도 미완성된 열왕기의 주석을 아주 최근에 노트는 그것은 이미 여로보암 전승의 단계인 신명기 사가 이전의 부분일 것이라는 제안에 의해서, 그 이야기의 편집 과정에서 좀더 신명기 사가의 몫을 줄이려는 듯이 보인다. 이 이야기에서 신명기 사가의 몫은 verses: 13:2b f., 33-34, 과 아마 13:32b에 따라서 노트에 의해 축소되었다. 그 이야기의 근본적인 출처를 알아보기 위해 노트는 북왕국의 마지막 때로부터 북 이스라엘 예언자 집단을 주목한다.
문학을 간결하게 조사해서 뛰어나게 명확히 되었을 때, 우리의 이야기는 폭넓게 논쟁되어온 많은 문제들로 둘러 쌓이게 되지만 그것에 관해서 여전히 일반적인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의 일치와 고사(antiquity)는 거부와 옹호자 양쪽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것의 근본적인 기원은 추측의 대상이 되어왔고, 그보다 더 흔히 실제 자료의 결핍에 바탕을 두어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신명기 역사의 전체적 구조에서 그것의 위치와 신학적인 중요성은 단지 불충분한 주목을 받고 있을 뿐인데, 그것이 비록 신명기 사가의 위치와 그것의 현재의 형태로 지정하려고 한 주석자들에 의해서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열왕기 상 13장의 구조의 완전한 형태와 신명기적 역사의 신학과 북쪽의 예언자 무리의 근본적인 기원인 가장 많은 발자취를 논하기를 원하여 그것들의 앞에 있는 위치와 신명기적 편집자의 그 손에 공식적으로 소유한 더 많은 것이나 저자보다도 더 지금까지 허락되었었다.
우리는 그 이야기의 구조를 우리의 자신이 그것들의 직접적인 문학의 구조를 따라서 조사를 정확하게 할 것이다.
III
우리의 이야기의 그 직접적인 문학의 뼈대는 12:26-33 과 13:33-34 근거되었고, 2차적인 확장과 반복되는 어구는 과중한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여로보암이 제단으로 올라가는 것이 3번 언급되었는데, 반면에 8번째 달의 15일의 축제를 배설하는 동안에는 두 번 언급되었다. 그 높은 지위에 있는 비 레위 제사장들에 대한 그의 임명은 마찬가지로 두 번 언급되었다(12:31 과 13:33).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 이야기가 이전에 존재하는 이야기에 삽입되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의견들은 갈라진 틈에 자리잡은 것처럼 나누어졌다. 그것은 어떤 주석가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열왕기서에 대한 신명기사가 편집 다음에 만들어진 2차적인 삽입의 결과라 할지라도 그 이야기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무질서와 구조의 무거운 짐은 해석의 결과로부터 더 좋아지고 같게 되거나, 잘못된 기록까지도 신명기 사가에 의해서 우리의 이야기의 삽입 다음으로 만들어 졌다. 13:33절에 있는 'ahar haddabar hazzeh'라는 담화는 명확하게 우리 이야기의 지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그 절의 나머지 그 언어와 12:31의 생각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것은 12:31-33과 13:33에서 인식할 수 있는 편집상의 관여는 우리 이야기의 삽입의 원인이 된다고 가정했다. 이러한 제안은 12:30에서 일시적으로 버려졌던 사고의 완성되고 회복되어진 것처럼 보이는 13:34절의 연구에 의해 더욱더 지지되었다. 신명기 사가가 했던 삽입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참여와 어쩌면 우리 이야기의 부분적인 구성조차도 우리가 다음의 보다 아래 부분에서 논의하려고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 이야기의 그 구조의 간결한 묘사와 그것의 지배적인 주제의 동일함에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이해한 것처럼 그 이야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주요한 두 부분으로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의 각각은 명확하다. 그 초점이 서로 관계없음에도 불구하고: (1) vss. 1-10 과 (2) vss. 11-32절이다. 각 부분은 두 사람의 주요한 주인공이 있는데 주요한 행동을 행하는 사람과 몇몇 중요치 않거나 부수적인 인물들이 있다. 그 첫 번째 부분은 유대에서 온 하나님의 이름 없는 사람에 의해 예언되었던 것처럼 여로보암의 제단의 운명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 다음은 그의 적대자인 왕과, 그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대화와 행동인데. 그 장의 주역이다. 명쾌하게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 중에 그 왕의 종들과 사람들은 부수적인 인물들로 가정한다. 그리고 11절에 있는 죽음을 알리는 정보에 따르면 벧엘에 늙은 예언자의 아들들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행동은 오히려 그것의 절정과 해결에 대한 결실을 분리한다. 그 하나님의 사람이 출현은 여로보암의 제단에 대적하여 그의 신탁을 전했고 표적의 의미에 의해서 진짜임이 증명되었다. 그의 성직자 권세는 열왕의 손에 사실이 더 멀리 밑줄 그었는데 그에 대한 대적자를 높인 것으로 무력하게 만들고 그의 지지를 주와 함께 오직 예언자의 중보 위에 되돌려 주었다. 그 장면은 그 예언자에게 열왕의 초청과 함께 떨어져 쇠퇴하는데 그에게와 그 예언자의 거절한자와 함께 집으로 오는데 그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시 9b-10, "너 또한 그 길에 의해 돌아 도지 않고......"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어 vss. 11-32에 후편 어느 것에 과도기적인 기능에 봉사하는 것을 고대한다.
그 두 번째 부분의 초점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숨겨진 운명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더 많이 진보되고 벧엘로부터 나온 구 예언자의 인격에 새로운 대적자를 소개하는 것이다. 후반부는 벧엘의 지성소에서 일어난 그 사건에 대한 그의 자식으로부터 듣고, 후에 하나님의 사람이 말했고, 그 거룩한 벧엘에서 비밀이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나온 뒤에 그와 함께 올라와서 그의 집에 돌아가기를 꾀어서 그의 전에 반대의 명령을 예언하기를 착수하였다. 불순종의 행동 결과 vs. 20에 즉시로 알게 되는데 이 이야기의 절정을 보는 사람이 될 것이다. 계속적으로, 그 긴장상태는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고 그 이야기는 피할 수 없는 방향으로 그것을 끌고 간다. 하나님의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에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고, 다시 그 시체를 다시 되돌려져서 벧엘에서 온 그의 동료 예언자에 의해 장사되었다. 32절은 우리의 이야기의 첫 번째 부분 같다, 따라서 그룹(bracket)을 제공하는 그것은 양쪽 부분을 함께 가지고 있다. 우리 이야기 구조는 다음과 같은 윤곽이다:
첫째 부분: 벧엘에 있는 여로보암의 제단을 대적하는 신탁. Verses 1-10
A. 소개. Vs. 1
B. 신탁과 제단에 반대하는 이적. Vss. 2-3
C. 왕과 하나님의 사람 사이의 교환. Vss. 4-9a
D. 둘째 부분에 변천. Vss. 9h-10
둘째 부분: 하나님의 사람의 불순종과 그 결과들. Verses 11-32
A. 벧엘에서 온 늙은 예언자의 소개. Vs. 11
B.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신성한 임무로부터 벗어나도록 설득되었다. Vss. 12-19
C.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신성한 임무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심판 받았다. Vss. 20-26
D. 하나님의 사람은 되돌려 졌고 벧엘의 예언자에 의해 매장되었다. Vs. 30
E. 첫째 부분의 주요한 주제의 마지막 되찾음. Vss. 31-32
앞에서 말한 구조상의 분석의 바탕을 둔 그것은 두개의 지배적인 주제에 대해서 숙고하는 그 이야기는 분명해야만 한다: 여로보암의 제의 설립에 반대한 논쟁과 신성한 말에 복종의 중요성에 대하여 산만한 이야기이다. 그 두 주제는 대충 우리의 이야기의 두 개의 주요한 부분에 일치함으로 많은 주석가들은 놀라지 않고 우리의 이야기에 동일한 질문에 적합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에 대해서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한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주요한 주제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법규가 아니다. 그렇다고 두 주제가 전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아래에서 보려고 하는 것처럼 어떤 구약성서의 전승 관점이 있다. 더군다나 만약 두 주제는 사실상 두개의 분리된 이야기였다면, 이것은 전통의 초기 문학 이전의 단계에서 가능했을 뿐이다. 그 이야기는 지금의 입장에 서있을 때 그것은 단지 단일한 문학으로 생각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두 부분들과 그것은 시종일관하여 특징을 나타내는 언어의 통일성 사이에 절대 필요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과 목: 히브리어 2
교 수: 박 신 배 님 제출자: 김 옥 성
제출일: 1998. 5. 19. 학 번: 9501010
16. The Way of Obedience:
1 Kings 13 and the Structure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16. 순종의 길: 왕상 13장 과 신명기적 역사의 구조
WERNER E. LEMKE
COLGATE ROCHESTER/BEXLEY HALL/CROZER
IT HAS BEEN roughly thirty years now since the first appearance of Martin Noth's monumental Uberlieferungsgeschichtliche Studien, in which he advanced the theory that the books of Deuteronomy through II Kings constitute a larger unified historical work, the so-called Deuteronomistic History, which is distinct in outlook and composition from the Tetrateuch or Priestly Work.1
마틴 노트의 기념비적인 [Uberlieferungsgeschichtliche Studien]이 빛을 본지 거의 30년이 지났다. 그 저서에서 노트는 Tetrteuch 또는 제의적 작품으로 구성과 조망과는 다른 소위 신명기적 역사라고 불리는 거대한 통일체를 이룬 역사적 작품으로 구성된 열왕기 하를 통해 신명기서의 이론을 전개시켰다.
His views have gained a wide following among Old Testament scholars and have led to a burst of literary activity on that important segment of Old Testament literature.2
그의 견해는 구약 학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고, 구약 문학의 중요한 한 획을 긋는 문학활동의 물꼬를 터놓는 역할을 했다.
Such widespread acceptance of Noth's thesis in its broad outlines, however, must not be allowed to obscure the fact that subsequent investigations have raised anew a number of important questions, upon which no general agreement has as yet been reached.
그러한 노트의 이론에 대한 폭넓은 지지가 있었으나 이어서 일어나는 연구들은 일반적으로 동의되지 않은, 아직 여전히 합의가 되지 않은, 제기된 다수의 새로운 중요한 질문들 즉 불분명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야만 했다.
These unresolved questions center chiefly on two areas: (I) the unity of authorship and date of composition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and (2) its over-all Structure and basic theological perspective.
풀리지 않는 가장 주요한 두 영역의 의문들이 있다: (1) 신명기적 역사서 구성의 저자와 저작 연대의 일치 (2) 신명기서의 전체적인 신학적 견해의 구조와 원리.
With regard to the former, many scholars no longer accept Noth's basic contention that the Deuteronomistic History derives essentially from one exilic author whose work subsequently received only minor additions but no thoroughgoing revisions.
전자의 주장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신명기적 역사는 작품들이 후에 단지 전적으로 개정하지 않고 단지 조금의 추가만 수용했다는 바벨론 포로기의 저자로부터 근본적으로 추론되었다는 노트의 기본적인 주장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Pointing to numerous seams and differences in perspective throughout the Deuteronomistic History, they feel that these could be better accounted for by a successive edition theory, involving at least two, possibly more, authors.3
신명기적 역사의 서로 다른 관점을 주목해 볼 때 이것은 적어도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저자가 계속적으로 편집했다는 이론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When it comes to dating these historically, opinions are divided as to where they should be placed.
신명기적 역사가 역사적인 저작이 있을 시기는 그들이 위치해야만 하는 저작 장소만큼이나 견해가 엇갈린다.
Some would place the first edition in the late pre-exilic period, with subsequent revisions following during the exile.4 Others would locate all editions in the exilic, or even early post-cxilic, period.5
어떤 사람들은 이 책들의 첫 번째 판은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편집되었고 나머지는 포로기에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포로기에 편집되었거나 심지어 포로기 이전 초기에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
Some would even go so far as to argue that we should no longer speak of major and distinct authors, but view the work as the product of a whole Dcutcronomic school, whose editorial work was an ongoing process extending over several decades or even generations.6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우리로서는 저자나 저작 연대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본 신명기적 저작의 모든 부분이 수 십 년 혹은 많은 세대를 거쳐 편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One may be permitted to observe that if this were ill fact so, then one of the most fundamental and attractive aspects of Noth's thesis would have to be abandoned altogether.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노트의 논제에서 가장 사람의 마음을 끌고 기본이 되는 면들이 완전히 버림받아야만 될 것이다.
With regard to the second main area of contention, relating to the overall structure and basic theological perspective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here, too, much work has been done since the appearance of Noth's influential work.
논제의 두 번째로 주요한 부분의 고려 즉, 비밀에 쌓인 신명기적 역사의 신학적인 견해의 전체적인 구조와 기초에 관계하는 오늘날의 많은 작품은 역시 노트의 영향력 있는 작품이 나온 이래 이루어져 왔다.
Among the question s relating to this area which have been the object of subsequent investigations are such issues as the relationship of the Dcuteronomistic author(s) to the code of Deuteronomy and the extent to which their hand is present in the Book of Deuteronomy itself;7 the role of the Davidic theology or royal messianism in the perspective of the Deuteronormist(s);8 and the pivotal or structurally significant loci in the Deuteronomistic History;9 to mention only some of the more significant issues in regard to which Noth's work has been modified or advanced by recent studies.
이어지는 연구의 대상이 되어온 이러한 질문들 중에 이 범위와 연관되어있는 것은 신명기 법전의 신명기적 저자의 관계와 같은 그러한 문제점이 있고, 그들의 관여는 신명기서 그 자체에 나타난 것을 확장한다; 즉 신명기적인 시각에서 왕권적 매시야 신앙과 다윗 신학의 역할; 그리고 신명기적 역사에서 중추적으로 구조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최근 연구에 의해서 진행되고 변경되어온 노트의 작품을 고려할 때 단지 어떤 더욱더 중요한 논쟁을 언급한다.
In the light of these developments, it has become abundantly clear that much work remains to be done, before anything approaching a consensus on this important body of Old Testament literature may be achieved.
이러한 발전의 영향 아래에서 그것은 아마도 구약성서문학이 이루었던 이러한 중요한 본체가 되는 어떤 일치에 접근하기 이전에 작업되어서 잔존하는 많은 작품들이 좀더 명료하게 되었다.
Not only will it require a more systematic sifting and assessment of the vast literature already produced, but also a continuation of the investigation, through articles and monographs, of more narrowly focused themes and segments of the Dcuteronomistic History.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폭넓은 문학의 좀더 조직적인 선별과 평가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명기적 역사의 좀더 전문적인 주제와 구에 초점을 맞추는 논설과 특수 연구서를 통해서 계속적인 연구를 요구했을 것이다.
The author's own investigation of I Kings 13 in the following pages is offered as a modest contribution to the ongoing study of the structure and theology of this monumental work.10
다음 페이지에 열왕기 상 13장의 그 저자 자신의 연구는 이러한 기념비적인 작품의 신학과 구조의 계속적인 연구에 가장 많은 기여를 했다.
II
Our story in I Kings 13 is one of the more fascinating, though in many respects puzzling, prophetic narratives found in the Deuleronomistic History.11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우리의 이야기는 신명기적 역사에 근거되는 예언적 이야기와 많은 황당한 내용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중에 하나이다.
As it now stands, the story tells of a nameless man of God from Judah, who came to Jeroboam I at Bethel and delivered an oracle which foretold the destruction of the altar, upon which Jeroboam was about to offer sacrifices, some three hundred years later by Josiah.
지금의 위치와 같이 그 이야기는 벧엘에 있는 여로보암 1세에게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무명의 사람이 한 말이고 재단의 파괴를 예언한 신탁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로보암이 요시아에 의해서 약 300년 후에 바친 희생 제물에 대해서였다.
Having authenticated his oracle by two miraculous signs, and having declined an invitation by the king to stay and refresh himself, the nameless man of God departed as abruptly as he had appeared.
두 기적적인 표적에 의한 그의 신탁은 믿을 수 있게 되었고, 그 스스로 새롭게 하고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 왕에 의해서 초청이 거부된 하나님의 무명의 사람은 그가 나타났었던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떠났다.
On his journey home, however, he was induced by a prophet who lived at Bethel to depart from his divinely ordained way, as a result of which he was slain by a lion when he resumed his journey.
그러나 그는 귀가 길에 신의 의해서 정해진 길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 한 벧엘에 사는 예언자에 의해 설득되었는데 그가 그의 귀가 길을 계속 갔을 때 그 결과로서 사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Upon hearing of this, the prophet from Bethel went and brought back the corpse of the man of God.
이 이야기를 들은 벧엘에서 온 예언자는 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다시 가지고 왔다.
He buried it in his own tomb and instructed his sons to bury him upon his own death in the same tomb with the man of God, in the belief that the latter's prophecy against the altar of Bethel would surely come to pass some day.
그는 그 시체를 자신의 무덤에 매장했고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같은 무덤에 자신이 죽었을 때 장사하라고 자기의 아들에게 가르쳤는데 그것은 반드시 벧엘의 제단으로 지나가는 어느 날이 올 것이라는 것에 대한 편지의 예언을 믿는 믿음 안에서이다.
This story has been subject to widely divergent scholarly estimates.
이 이야기는 폭넓은 학문적인 평가에 대한 주제가 되어왔다.
As yet no consensus has emerged in regard to such basic questions as its date of composition, authorship, form-critical classification, tradition history and significance within the larger structural and ideologic framework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아직 의견의 일치는 없지만 그것의 구성의 때와 저작권, 양식비평의 분류, 전승역사와 신명기적 역사의 관념적 구조와 큰 구조적인 것 내부에 중요성과 같은 그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주의 깊은 관심이 제기된다.
It is particularly the latter issue with which we shall be concerned in this paper, but before we turn to that, it night be useful for the sake of the discussion to provide a concise resume of some representative past scholarly discussion.
우리가 특별히 이 연구논문에서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그 편지의 논쟁점이 있지만 그러한 것에서 방향을 선회하기 전에, 그것은 사장된 지나간 어떤 대표적인 학문적인 논문에 대한 간결한 논고를 제공하기 위해서 유용하다.
Many commentators consider our story a late legend or midrash which was inserted only secondarily, and at a relatively late stage, into its present context.
많은 주석가들은 우리이야기의 뒤늦은 설화나 미드라쉬(midrash)가 단지 두 번째로 삽입되었고 상대적으로 늦은 단계에 그것의 현재 상황에로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Thus, Wellhausen called it, "eine Legende im Stil des Midrasch" and assigned it to a late post-exilic and post-Deuteronomic hand.12
따라서 벨하우젠은 그것을 "eine Legende im Stil des Midrasch"라고 불렀고 그것을 후기 바벨론 포로와 후기 신명기 작품 이후에 할당했다.
Benzinger, agreeing essentially with Wellhausen, considered this story a reflection of a rather mechanistic concept of Prophetism in later Judaism.13
벤진저는 근본적으로 벨하우젠과 함께 동의하는데 오히려 후기 유대주의 안에 예언자주의의 기계적 개념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In his extensive analysis of I Kings, A. Jepsen assigned our pericope to a Levitical and post-Deuteronomic redaction of the late sixth century B.C., that is, during the period of the building of the Second Temple.14
열왕기상의 그의 광대한 분석에서 A. Jepsen이 레위기적이고 주전 6세기 이후에 후기 신명기 개정에 대해서 우리의 pericope를 할당한다. 즉 그것은 두 번째 성전을 짓고 있는 기간이다.
In a more recent study of this chapter, Jepsen still prefers this view, but allows for the possibility that an exilic Deuteronomistic hand could have been responsible for the inclusion of this chapter.15
이 장의 최근연구에서 Jepsen은 여전히 이 견해를 선호하지만 포로기 신명기 작품이 이 장의 결론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Eissfeldt believes that it is a secondary insertion into the Book of Kings, which is not to be ascribed to the Deuteronomistic compiler.16
Eissfeldt는 그것이 2차적으로 열왕기서 안으로 삽입되었다고 믿는데, 그것은 신명기 편집자에게 전적으로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A similar view is maintained by J rg Debus, though without any significant discussion of the evidence.17
유사한 견해가 J rg Debusdp 의해 주장되었는데 그 증거의 어떠한 중요한 논의가 없을지라도 말이다.
All of these commentators have this in common: they consider the story to be a secondary, post-Deuteronomistic interpolation.
이들의 모든 주석자들은 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후기 신명기의 삽입이 2차적으로 존재하는 이야기로 생각한다.
If their view should prove to be correct, then, of course, our story would be of no significance for an assessment of the structure and theology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만약 그들의 견해가 바른 것이라고 증명된다면 그때는 물론 우리의 이야기는 신명기 역사의 구조적이고 신학적인 평가에 대해서 중요성이 없을 것이다.
Other commentators, however, assign the story's present position, though not its composition, to a Deuteronomistic redaction.
그러나 다른 주석가들은 신명기 편집에 대해서 그것의 구성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의 현제의 위치를 선임한다.
Montgomery, who calls it a midrash of dubious historical value whose documentary fixation it is impossible to date, follow s anda in assigning its redaction to the time of Josiah.18
Montgomery는 문서가 확정된 시기에 대해 날짜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사람이고 그것이 의심스러운 역사적 가치를 가진 미드라시라고 말한 사람인데 그것이 요시아 때에 편집이라고 선정한 anda를 따른 것이다.
Snaith assigns its present position to a Deuterononlic compilation around 610 B.C., but goes on to say that "there is no adequate reason for doubting that this is an ancient tale; the Deutcronomic compiler revived it in order to show that Jeroboam had received full warning and, incidentally, that Judeans should avoid all relations with northerners."19
Snaith는 대략 주전 610년경에 신명기 편집자는 현재의 위치를 지정했지만 "이것이 고대의 이야기라고 의심할만한 적당한 이유가 없다; 신명기적 편집자는 여로보암이 심각한 경고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회복시켰고, 부수적으로 유대인들은 북부의 사람들과 함께 모든 친적 관계를 피해야 했다."라고 계속 주장했다..
Snaith, however, adduces no evidence to support his contention that the story is an ancient tale.
그러나 Snaith가 예증으로 든 것은 그 이야기는 고대 설화라는 그의 주장을 주장하기 위한 증명이 되지 못했다.
The same, unfortunately, is true of W. F. Albright who on one occasion expressed a similar conviction with respect to the antiquity of the tale.20
불행히도 동일한 것은 그 태고의 설화라는 점과 함께 유사한 확신을 한 경우에 분명히 표현했던 사람인 W. F. Albright는 진실이다.
Martin Klopfenstein in his recent study of I Kings 13 likewise defends the possible antiquity of the story, the final form of which, however, he too would assign to the time of Josiah.21
마찬가지로 열왕기하 13장의 최근 연구에서 Martin Klopfenstein은 그것의 마지막 형태인 가능한 고대의 이야기에 의존하지만 그는 특히 요시아 때에 그 시기를 지정하려고 했다.
Some have questioned the unity of our story, seeing it rather as a combination of two independent traditions of unequal historical value.
더러는 우리의 이야기에 일치성에 대해서 질문들을 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동등하지 않는 가치의 두 개의 독립된 전승에 대한 결합을 깨닫게 된다.
Morgenstern, for instance, considers vss. 11-32 a secondary expansion of a primary narrative found in vss. 1-10, 33-34.22
예를 들어 Morgenstern는 vss. 1-10, 33-34에서 기초하는 본래의 이야기의 제 2의 확장인 vss. 11-32를 고려한다.
John Gray, who in the first edition of his commentary on Kings viewed the story as a composite of two separate traditions, has since reverted to accepting the unity of the story, which he now characterizes as a "prophetic legend in saga style, transmitted by the Deuteronomistic compiler."23
열왕기 주해서를 첫 번째로 개정한 John Gray는 그 이야기를 두 개의 분리된 전승으로 구성되었다는 견해였다, 그 이후로 그 이야기의 단일하다는 견해를 수용하는 대로 되돌아왔고, 그것을 그는 지금 "신명기 편집자에 의해서 전달된 사화(saga)에 있는 예언적 설화"로서 성격을 묘사한다.
The unity of the story is also defended by Martin Noth, though with a certain amount of ambivalence when it comes to defining the extent of its Deuteronomistic redaction.
그 이야기의 일치는 또한 마틴 노트에 의해 수호되었는데 그것이 신명기 편집에 대한 범위를 규정지었을 때 확실한 모순의 결과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In his earlier monograph, he viewed our story as an individual legend, originating in prophetic circles at Bethel and incorporated by the Deuteronomist into his history because of its immediate relevance to the reform measures of King Josiah."24
초기 전공 논문에서 그는 우리의 이야기를 벧엘에 있는 예언적 범위에서 발생하는 그리고 그의 역사안으로 신명기주의자에 의해서 합병된 한 개인의 설화처럼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요시아 왕의 평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In his more recent, and regrettably unfinished, commentary on Kings, however, Noth seems more inclined to reduce the Deuteronomist's share in the redactional process of the story, by suggesting that it may already have been a part of the pre-Deuteronomistic stage of the Jeroboam tradition.25
그러나 그의 유감스럽게도 미완성된 열왕기의 주석을 아주 최근에 노트는 그것은 이미 여로보암전승의 단계인 신명기사가 이전의 부분일 것이라는 제안에 의해서, 그 이야기의 편집과정에서 좀더 신명기 사가의 몫을 줄이려는 듯이 보인다.
The Deuteronomist's share in this story is reduced by Noth to the following verses: 13:2b f., 33-34, and possibly 13:32b.
이 이야기에서 신명기 사가의 몫은 verses: 13:2b f., 33-34, 과 아마 13:32b에 따라서 노트에 의해 축소되었다.
For the ultimate origins of the story, Noth looks to North-Israelite prophetic circles from the time of the last days of the Northern Kingdom.26
그 이야기의 근본적인 출처를 알아보기 위해 노트는 북왕국의 마지막 때로부터 북 이스라엘 예언자 집단을 주목한다.
As is eminently clear from this concise survey of the literature, our story is beset with a number of problems which have been widely debated, but concerning which no general agreement exists as yet.
문학을 간결하게 조사해서 뛰어나게 명확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이야기는 폭넓게 논쟁되어온 많은 문제들로 둘러 쌓이게 되지만 그것에 관해서 여전히 일반적인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Its unity and antiquity have been both denied and defended.
그것의 일치와 고사(antiquity)는 거부와 옹호자 양쪽 모두를 가지고 있다.
Its ultimate origins have been the object of much speculation, which more often than not has been based on a paucity of factual data.
그것의 근본적인 기원은 추측의 대상이 되어왔고, 그보다 더 흔히 실제 자료의 결핍에 바탕을 두어오지 않았다.
Above all, its place and theological significance within the over-all structure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have received only insufficient attention, even by those commentators who would assign its present shape and position to a Deuterononisstc editor.
무엇보다도 먼저 신명기 역사의 전체적 구조에서 그것의 위치와 신학적인 중요성은 단지 불충분한 주목을 받고 있을 뿐인데, 그것이 비록 신명기 사가의 위치와 그것의 현재의 형태로 지정하려고 한 주석자들에 의해서라 할지라도 말이다.
We wish to argue that I Kings 13 forms an integral part of the structure and theology of the
Dcutcronornistic History and that while its ultimate origins may most likely be traced to northern prophetic circles, its present position and formulation owes more to the hands of a Deuteronomistic editor or author than has hitherto been allowed.27
우리는 열왕기 상 13장의 구조의 완전한 형태와 신명기적 역사의 신학과 북쪽의 예언자 무리의 근본적인 기원인 가장 많은 발자취를 논하기를 원하여 그것들의 앞에 있는 위치와 신명기적 편집자의 그 손에 공식적으로 소유한 더 많은 것이나 저자보다도 더 지금까지 허락되었었다.
We shall begin our own investigation with a structural analysis of the story, along with its immediate literary framework.
우리는 그 이야기의 구조를 우리의 자신이 그것들의 직접적인 문학의 구조를 따라서 조사를 정확하게 할 것이다.
III
The immediate literary framework of our story, which is found in 12:26-33 and 13:33-34, gives the impression of being overloaded with secondary expansions and repetitive glosses.
우리의 이야기의 그 직접적인 문학의 뼈대는 12:26-33 과 13:33-34 근거되었고, 2차적인 확장과 반복되는 어구는 과중한 인상을 준다.
Jeroboam's ascending upon the altar, for instance, is mentioned three times (12:32 and twice in 12:33), while his establishing of a festival on the fifteenth day of the eighth month is mentioned twice (12:32, 33).
예를 들어 여로보암이 제단으로 올라가는 것이 3번 언급되었는데, 반면에 8번째 달의 15일의 축제를 배설하는 동안에는 두 번 언급되었다.
His appointment of non-Levitical priests at the high places is likewise mentioned twice (12:31 and 13:33)
그 높은 지위에 있는 비 레위 제사장들에 대한 그의 임명은 마찬가지로 두 번 언급되었다(12:31 과 13:33).
For these reasons, it is generally recognized that our story seems to have been inserted into a previously existing narrative.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 이야기가 이전에 존재하는 이야기에 삽입되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Opinions are divided, however, as to where the seam is to be placed.28
하지만 의견들은 갈라진 틈에 자리잡은 것처럼 나누어졌다.
It by no means follows, though, that the narrative is therefore a secondary insertion, made subsequent to the Deuteronomistic edition of the Book of Kings, as some commentators have maintained.29
그것은 어떤 주석가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열왕기서에 대한 신명기사가 편집 다음에 만들어진 2차적인 삽입의 결과라 할지라도 그 이야기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The present disorder and overloading of the framework may equally well have resulted from glossing, or even scribal errors, made subsequent to the insertion of our story by a Deuteronomistic editor.30
현재의 무질서와 구조의 무거운 짐은 해석의 결과로부터 더 좋아지고 같게 되거나, 잘못된 기록까지도 신명기 편집가에 의해서 우리의 이야기의 삽입 다음으로 만들어 졌다.
Since the words 'ahar haddabar hazzeh in 13:33 clearly presuppose knowledge of our story and, furthermore, since the rest of the verse reflects the language and thought of 12:31, it is to be assumed that the editorial hand discernible in 12:31- 33 and 13:33 was responsible for the insertion of our story.
13:33절에 있는 'ahar haddabar hazzeh'라는 담화는 명확하게 우리 이야기의 지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그 절의 나머지 그 언어와 12:31의 생각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것은 12:31-33과 13:33에서 인식할 수 있는 편집상의 관여는 우리 이야기의 삽입의 원인이 된다고 가정했다.
This suggestion is further supported by the consideration that 13:34 seems to be a resumption and completion of the thought temporarily abandoned in 12:30.31
이러한 제안은 12:30에서 일시적으로 버려졌던 사고의 완성되고 회복되어진 것처럼 보이는 13:34절의 연구에 의해 더욱더 지지되었다.
That the hand responsible for the inclusion, and possibly even partial shaping of our story, was that of a Deuteronomistic editor we shall try to argue in a subsequent section below.
신명기사가 했던 삽입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참여와 어쩌면 우리 이야기의 부분적인 구성조차도 우리가 다음의 보다 아래 부분에서 논의하려고 시도해야 할 것이다.
Before we do that, however, we must turn to a brief delineation of the structure of our story and an identification of its dominant motifs.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 이야기의 그 구조의 간결한 묘사와 그것의 지배적인 주제의 동일함에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As is generally recognized, the story seems to fall quite naturally into two main parts, each of which has its distinct, though not unrelated, focus: (1) vss. 1-10 and (2) vss. 11-32.
일반적으로 이해한 것처럼 그 이야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주요한 두 부분으로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의 각각은 명확하다. 그 초점이 서로 관계없음에도 불구하고: (1) vss. 1-10 과 (2) vss. 11-32절이다.
Each part has two major protagonists around whom the main action revolves, and several minor or incidental characters.
각 부분은 두 사람의 주요한 주인공이 있는데 주요한 행동을 행하는 사람과 몇몇 중요치 않거나 부수적인 인물들이 있다.
The first part focuses upon the fate of the altar of Jeroboam as foretold by the nameless man of God from Judah.
그 첫 번째 부분은 유대에서 온 하나님의 이름 없는 사람에 의해 예언되었던 것처럼 여로보암의 제단의 운명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The latter is the chief protagonist, with the king being his antagonist, and between the two, all of the action and dialogue takes place.
그 다음은 그의 적대자인 왕과, 그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대화와 행동인데. 그 장의 주역이다.
Not explicitly mentioned but assumed as incidental characters are the king's servants and people (vs. 4), among whom, according to die information contained in vs. 11, must have been the sons of the old prophet in Bethel.
명쾌하게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 중에 그 왕의 종들과 사람들은 부수적인 인물들로 가정한다. 그리고 11절에 있는 죽음을 알리는 정보에 따르면 벧엘에 늙은 예언자의 아들들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The action in this part proceeds rather rapidly to its climax and resolution.
그 행동은 오히려 그것의 절정과 해결에 대한 결실을 분리한다.
The man of God appears, delivers his oracle against the altar of Jeroboam, and authenticates it by means of a sign.
그 하나님의 사람이 출현은 여로보암의 제단에 대적하여 그의 신탁을 전했고 표적의 의미에 의해서 진짜임이 증명되었다.
His divine authority is further underscored by the fact that the king's hand, which was raised against him, was paralyzed and that it was restored only upon the prophet's intercession with the Lord on his behalf.
그의 성직자 권세는 열왕의 손에 사실이 더 멀리 밑줄 그었는데 그에 대한 대적자를 높인 것으로 무력하게 만들고 그의 지지를 주와 함께 오직 예언자의 중보 위에 되돌려 주었다.
The scene ebbs off with the king's invitation to the prophet to come home with him and the prophet's refusal to have table fellowship with him.
그 장면은 그 예언자에게 열왕의 초청과 함께 떨어져 쇠퇴하는데 그에게와 그 예언자의 거절한자와 함께 집으로 오는데 그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Verses 9b-10, beginning with the words "nor return by the way you came ...," serve a transitional function in that they look forward to the sequel which follows in vss. 11-32.
시 9b-10, "너 또한 그 길에 의해 돌아 도지 않고......"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어 vss. 11-32에 후편 어느 것에 과도기적인 기능에 봉사하는 것을 고대한다.
The second part focuses upon tile fate of the man of God.
그 두 번째 부분의 초점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숨겨진 운명에 관한 것이다.
It is developed more broadly and introduces a new antagonist in the person of the old prophet from Bethel.
그것은 더 많이 진보되고 벧엘로부터 나온 구 예언자의 인격에 새로운 대적자를 소개하는 것이다.
The latter, upon hearing from his sons about the events which had transpired at the Bethel sanctuary, set out after the man of God, and having caught up with him, he induced him to return to his home, contrary to his previously given divine command.
후반부는 벧엘의 지성소에서 일어난 그 사건에 대한 그의 자식으로부터 듣고, 후에 하나님의 사람이 말했고, 그 거룩한 벧엘에서 비밀이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사람아 나온 뒤에 그와 함께 올라와서 그의 집에 돌아가기를 꾀어서 그의 전에 반대의 명령을 예언하기를 착수하였다.
The consequences of this act of disobedience are announced immediately in vs. 20, which may be viewed as the climax of this story.
불순종의 행동 결과 vs. 20에 즉시로 알게 되는데 이 이야기의 절정을 보는 사람이 될 것이다.
From there on, the tensions quickly resolve and the story takes its inevitable course.
계속적으로, 그 긴장상태는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고 그 이야기는 피할 수 없는 방향으로 그것을 끌고 간다.
The man of God is killed by a lion on his homeward journey, brought back and buried by his prophetic colleague from Bethel.
하나님의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에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고, 다시 그 시체를 다시 되돌려져서 벧엘에서 온 그의 동료 예언자에 의해 장사되었다.
Verse 32 looks back to the first part of our story, thus providing a bracket which holds both parts together.
32절은 우리의 이야기의 첫 번째 부분 같다, 따라서 그룹(bracket)을 제공하는 그것은 양쪽 부분을 함께 가지고있다.
The structure of our story could be outlined as follows:
우리 이야기 구조는 다음과 같은 윤곽이다:
Part I: The Oracle against the Altar of Jeroboam at Bethel. Verses 1-10
첫째 부분: 벧엘에 있는 여로보암의 제단을 대적하는 신탁. Verses 1-10
A. Introduction. Vs. 1
A. 소개. Vs. 1
B. The Oracle and Sign against the Altar. Vss. 2-3
B. 신탁과 제단에 반대하는 이적. Vss. 2-3
C. The Exchange between the King and the Man of God. Vss. 4-9a
C. 왕과 하나님의 사람 사이의 교환. Vss. 4-9a
D. Transition to Part II. Vss. 9h-10
D. 둘째 부분에 변천. Vss. 9h-10
Part II: The Disobedience of the Man of God and Its Consequences. Verses 11-32
둘째 부분: 하나님의 사람의 불순종과 그 결과들. Verses 11-32
A. Introduction of the Old Prophet from Bethel. Vs. 11
A. 벧엘에서 온 늙은 예언자의 소개. Vs. 11
B. The Man of God is Induced to Depart from His Divine Commission. Vss. 12-19
B.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신성한 임무로부터 벗어나도록 설득되었다. Vss. 12-19
C. The Man of God is Judged for His Disobedience to His Divine Commission. Vss. 20-26
C.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신성한 임무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심판 받았다. Vss. 20-26
D. The Man of God is Brought Back and Buried by the Prophet of Bethel. Vs. 30
D. 하나님의 사람은 되돌려 졌고 벧엘의 예언자에 의해 매장되었다. Vs. 30
E. Concluding Resumption of the Major Theme of Part I. Vss. 31-32
E. 첫째 부분의 주요한 주제의 마지막 되찾음. Vss. 31-32
On the basis of the foregoing structural analysis, it should be apparent that this story revolves around two dominant motifs: a polemic against the cultic establishment of Jeroboam and a discursive narrative about the importance of obedience to the divine word.32
앞에서 말한 구조상의 분석의 바탕을 둔 그것은 두개의 지배적인 주제에 대해서 숙고하는 그 이야기는 분명해야만 한다: 여로보암의 제의 설립에 반대한 논쟁과 신성한 말에 복종의 중요성에 대하여 산만한 이야기이다.
Since these two themes correspond roughly to the two major sections of our story, it is not surprising that many commentators have seen fit to question the unity of our story.
그 두 주제는 대충 우리의 이야기의 두 개의 주요한 부분에 일치함으로 많은 주석가들은 놀라지 않고 우리의 이야기에 동일한 질문에 적합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에 대해서 놀라지 않는다.
There is no law, however, that says that a story can only have one major theme.
하지만 한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주요한 주제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법규가 아니다.
Nor are these two themes entirely unrelated, at least in the perspective of certain Old Testament traditions, as we shall see below.
그렇다고 두 주제가 전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아래에서 보려고 하는 것처럼 어떤 구약성서의 전승 관점이 있다.
Furthermore, if these two themes were in fact ever part of two separate narratives, this could only have been possible in the earliest pre-literary stages of the traditions.
더군다나 만약 두 주제는 사실상 두개의 분리된 이야기였다면, 이것은 전통의 초기 문학 이전의 단계에서 가능했을 뿐이다.
As the story now stands, it can only be considered a literary unit, because of the integral relation between the two parts and the uniformity of language which characterizes it throughout.33
그 이야기는 지금의 입장에 서있을 때 그것은 단지 단일한 문학으로 생각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두 부분들과 그것은 시종일관하여 특징을 나타내는 언어의 통일성 사이에 절대 필요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2 King 20:12-19 as an Element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신명기 역사의 요소로써 열왕기하 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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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PHER T.BEGG
Department of Theology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Washington, DC20064
고언용?
P 27
"신명기 역사"(이후로부터는 Dtr로 한다)의 BASIC TO M. NOTH'S 개념은 개정의 변화하는 정도와 함께, 신명기편자 자신의 추방에 의해 구성된 자료요 그에 의해서 통합된 더 이른 원문 사이의 구별이다. 이 구별을 만드는데 있어서, Noth의 지적처럼, 술어학(전문용어)은 최초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따라서 예를들면 신명기의 언어와 함께 그것의 대량의 유사점에 있어서, 그리고 "방주 이야기" (사무엘상 4-6; 사무엘하6)에 있어서 그러한 유사점의 사실적인 부재가 그것의 이전 신명기 기원을 가리키는 동안에 여호수아 23장은 '신명기 편자'자신의 탓으로 돌려질 수 있다.
확실성의 어느 정도와 함께 신명기역사는 신명기 편자와 그의 근원 사이에 있어서 분배되어질 수 있는 사실은 전자의 목적들과 강조들을 설명할 때 학구적인 시도에 영향을 주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지금의 추세는 신명기편자 자신의 작문으로써 일치하는 본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그들은 그가 하려고 시도해 왔던 것에 관해서 최초의 지시자로써 보여진다. 반대로, 이전 신명기의 절들은 그러한 자료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신명기 편자 자신의 목적에 관한 것 보다 더 그것들의 원래 저자들의 의도점들을, 그리고 혹은 이전 신명기의 "모음들"을 보는 경향이 있다.
P. 28
동시에, 열왕기서에 있어서 근원을 가리키는 그의 경향, 혹은 그에게 확실하게 알려진 예레미야의 인물에 대한 그의 언급이 제안했기 때문에. 신명기 편자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정선된 사용자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여겨졌다. 그 사용자는 어떤 주어진 항목을 통합하는데 있어서 (혹은 통합하지 않는데 있어서) 아주 명확한 목적들을 가지고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인식이 너무 강요되어서 그 결과 신명기 역사 안에서 동일시된 각각의 이전 신명기적 요소들 때문에 인간은 질문하는 것을 필요로 했다. 즉 신명기 편자는 이 절 안에서 그의 더 넓은 목적에 대해 쓸모 있는 무엇을 발견 해왔나? 어떻게 그것의 세부적인 내용과 함께 이 특별한 본문은 신명기 편자의 전장의 구문을 보조하는가? 무슨 기능이 그것을 전체로써 신명기 역사의 범위 내에서 가능하게 하는가?
더 최근 고전 학식은 마음에 있어서 상기의 질문들과 함께 신명기 역사 몇몇의 기본적인 이전 신명기적 본문들을 연구 해왔다. 참고문헌은 예를 들어서 A. L. Lafley와 D. J. Mccarthy에 의해서 사무엘하 7장의 연구에까지, W. E. Lemke에 의한 열왕기상 13장의 연구에까지, 그리고 G. Hentschel에 의한 엘리야의 이야기들의 연구에까지 만들어졌었다. 그런 연구들의 선상 안에서, 이기사는 다른 이전 신명기 본문을 시험할 것이다. 즉, 그것의 신명기적 혼합과 전체로서 그의 능력 안에서 그가 놓았던 그것에 대한 사용을 고무하는 가능한 요인이라는 점에서 히스기야에 대한 열왕기하 20장 12-19안에 있는 바빌로니아 대사의 기술.
The Predeuteronomistic Character of 2 Kings 20:12-19
(열왕기하 20장 12-19의 이전 신명기적 특징)
우리가 우리의 제안된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질문 안에서 그 본문이 기본적으로 이전 신명기적인 사실인 어떤 증거를 제공하는 것은 필요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 견해를 지지하는 고찰은 다음과 같다.
(1) 일반적으로, 그 절이 궁극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을 반영하는 널리 퍼진 동의가 있다. 즉 일찍이 B. C. 711년에서 703년 사이안에서 수년 동안에 히스기야에서 바벨론의 Merodach-baladan의 접근. 게다가 그 본문은 그의 책의 많은 인증된 절들 안에서 명확한 것으로서 역사적인 이사야의 "anti-alliance stance"의 확실한 의식을 증명한다.(예로써 이사야 7장, 18장, 20장, 30장 1-5절, 31장 1-3절을 볼 것). 따라서 그것은 순수한 신명기적 창작품으로써 검증되어질 수 없다. 유사하게 그 본문은 어떤 광대한 인식할 수 있는 신명기적 문체를 명백하게 드러낼 수 없다. 함께 취했기 때문에, 이러한 고려들은 열왕기하 20장 12-19을 기본적으로 하나의 단편이라고 제안한다. 아울러 그것을 기록한 사건 후 너무 길지 않은 시간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즉, 그것은 중요한 수정 없이 신명기 편자가 이어왔던 한 단위이다.
(2) 그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많은 저자들은 열왕기하 20장 17-18절에 있는 이사야 알림의 어법은 B. C. 6C안에 하나 혹은 또다른 순간의 반영이라는 것을 고집했다. 즉 신명기 편자의 기간. 우리는 두 가지 시구의 경우를 따로따로 고려할 수 있다.
열왕기하 20장 17절은 597년(열왕기하 24:10-17) 혹은 587년(열왕기하 25:8-18)안에 있는 예레미야의 운명에 대한 견해와 함께 공식화되어 왔던 그 주장은 예상과 반대로 인간은 열왕기하 20장 17절(그것을 조판한 20장 13절과 함께)과 열왕기하 20:17절 안의 두 가지 기술들 사이에서 어떤 특별한 동사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을 실패하는 어려움을 포함한다. 특별히 597년(열왕기하 24:13)과 587년(열왕기하 25:13-17)의 그것의 기술들 안에서 그 신명기적 역사는 성전 보물 약탈의 현저한 언급을 만드는데 반해서 성전에 대한 언급은 열왕기하 20:17(20:13)안에서 상당히 결여되어 있다. 열왕기하 20:17은 597년 혹은 587년에 예레미야의 약탈을 초래한 가정에 대해서 어떻게 그러한 상태의 일을 설명할 수 있는가? 게다가 확실히 말해서 열왕기하 20:17은 히스기야의 "표시"(20:13)에 대한 tailo-correspondence(대응)을 매우 잘 표현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신명기 편자의 B. C. 6C보다 실제로 앞서 일어났던 고대 근동 연습/기술들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물론 이 점의 견해로부터 그것은 그 시를 a vaticinium ex eventu로써 간주하는 것을 필요 없다.
P. 30
(3) 신명기 기원은 "당신이 말한 하나님의 말씀은 선하다"라는 열왕기하 20:19절의 히스기야의 대답에 대해서 E. Bohnet에 의해서 주장되어져 왔다. 이 응답에 대해서 신명기 편자는 하나님의 판단 전에 그의 exilic한 청중에 대한 수락의 자세를 강권해 왔다. 그러나 신명기 합성 안에서 우리가 그 밖에서 너무 자주 발견한 것에 반대로, 히스기야의 대답이 죄의 명백한 고백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신명기 편자가 히스기야의 반응에 대한 어법 안에서 중재하는 상상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P. 31
요약해서, 열왕기하 20장 12-19의 어떤 실질적인 신명기적 개정을 수용하는 것에 대한 강제적인 증거는 없다. 즉, 그 본문은 기본적으로 신명기 이전 편자로써 보여진다.
Factors of Interest for the Deuteronomist in 2 Kings 20:12-19
(열왕기하 20장 12-19안에 있어서 신명기 편자에 대한 관심의 요소들)
우리는 우리의 이전 질문을 언급한다. 즉 이전 신명기 본문 열왕기하 20:12-19절의 무슨 특징들이 신명기 편자가 그러한 본문을 첫 번째 장소의 일부로 만드는 것을 자극해 왔나?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가능한 요소들을 차례로 논의하기를 원한다.
1. 부, 왕, 외국인의 주제
그것의 전체 안에서 열왕기하 20:12-19은 세 가지 상호 밀접한 관계 (부, 왕, 외국인들(바벨))가 있는 주제의 복잡성 주위를 순환한다. 그러나 심지어 신명기 역사 전체의 일시적인 정독은 이러한 같은 세 가지 주제들과 그들의 관계들은 신명기 편자에 대해서 중요한 관심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만든다. 이 관심은 그 자체를 여러 가지 방법에 있어서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신명기 편자는 그들의 상호 밀접한 관계 안에서 그 주제들이 현저하게 나타난 신명기서의 그의 역사에 대한 서문으로써 인도한다. 특별히 신명기는 그 나라에서 이스라엘을 위한 대단한 부를 제공한 반면에 그런 부는 외국 약탈자에게 잃을 것을 경고한다(신명기 28:29-33,41),(신명기 28:8-13). 만약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을 "잊는다면", 부의 기증자들은 약탈할 것이다(신명기 8:17, 6:10-12). 게다가 그것은 부와 왕사이에, 귀중한 금속과 아내들과, 말들의 왕의 축적을 금지 시켰기 때문에 부정적인 관계를 수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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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0장12-19절의 삽화는 고려 아래서 동기의 복잡성 그리고 특별히 단지 처리된 약탈 결과의 복잡성에 대한 신명기 역사의 끊임없는 소개의 배경에 반해서 보여졌을 때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역시 우리는 유다왕과 외국인들에 의한 접근으로 직면된 그의 부를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히스기야의 "표시"(20:13)의 정확한 중요성이 즉시 명확하지 않는 반면, 어떤 의미에 있어서, 제스츄어를 통하여 그는 그의 부를 바벨론 왕의 제안에 놓고 있다고 여겨진다. 다른 말로 히스기야는 여기에서 상기의 절들 안에서 다른 왕들이 한 것처럼 하기 위한 그의 준비를 알림으로써 묘사된다. 즉, 왕의 부를 외국 통치자에게 넘겨준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히스기야는 그러한 왕들처럼 간단히 야훼 하나님을 기술에서 빼놓았다. 그는 그 자신의 축적된 부가 그를 위해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가 집중했던 것 같이 야훼 하나님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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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를 위해서 역시 그 부의 유효성은 단지 신명기 17장 14-20의 "왕의법"이 예견한 것처럼 야훼 하나님께 대한 무시를 발생케 했다. 그때 이러한 모든 점에 있어서, 열왕기하 20:12-19은 신명기 역사의 "약탈연속"의 본문들과 함께 아주 잘 일치하기 위해 나타난다. 마치 신명기 편자에 의한 그것의 혼합이 기꺼이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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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이야기와 함께, 유다의 부의 운명에 대한 신명기 역사의 광대한 기술의 대단원은 최초로 명확한 견해 속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명기 편자에 의한 혼합으로써 어떻게 열왕기하 20:12-19이 부와 왕과 외국인들의 순환하는 주제들과 신명기 역사의 상호 밀접한 관계를 정상에까지 가져오는 것을 취급하는지를 보아 왔다. 게다가 우리는 어떻게 그 삽화가 무엇보다도 바벨의 이 에피소드 안에서의 언급에 의해서 신명기 편자가 관계할 것이라는 것을 세우는데 그러한 세 가지 주제의 해결에 관하여 그의 업적의 대단원에 있어서 작용을 하는지를 보아 왔다. 신명기 역사의 더 넓은 운동을 보조하기 위해서 이이야기의 잠재력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 본문에 대한 신명기 편자의 혼합은 쉽게 이해되어진다.
2. Prophetic Announcement and Its Reception
(예언자의 알림과 그것의 수령)
이 문맥 안에서 주의를 요구하는 본문의 두 번째 요소는 예언자의 중제와 열왕기하 20:14-19안에 있는 왕의 반응에 대한 기술이다. 여기에서 역시 우리는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다. 그 문제는
그의 표상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근원의 영감아래서 그가 전개하는 것 즉 그 주제에 대한 신명기 편자의 처리에 있어서 신명기 편자에 대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특별히 신명기 18: (9-14)15-22의 "예언적 법"은 예언에 대한 여러 가지 점들을 만든다. 그 예언은 신명기 편자의 묘사의 그 현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따라서 신명기의 법은 이스라엘에게 제공하는 불변의 상속과 함께 "모자이크"예언(18:18)에 대한 야훼하나님 약속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예언자들의 말은
그들이 정확하게 사건들이 오는 것을 예언하는 한에 있어서는 "사실"이 될 것이다(18:22). 마지막으로 그 법은 예언자 말에 대한 정당한 반응의 절박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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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그 신명기 편자는 열왕기하 20:14-19의 기술에서 추가의 그리고 더 세부적이고 유용한 능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중요한 현상을 미리 알리셨다는 그의 개념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는 확실하게 이전의 알림(20:17-18)을 포함한 이스라엘 역사의 최고점이 된 것의 그 이야기를 환영했었다. 즉 바벨론에 의한 그것의 약탈. 그런 알림에 대한 유효성은 신앙심이 깊은 히스기야왕 아래서(열왕기하 21-25) 북왕국(열왕기하 17)의 소멸에 대한 그의 기술과 예루살렘의 신성에 대한 그의 강력한 강조를 따랐기 때문에 신명기 편자에게 힘을 주었다. 따라서 열왕기하 20:14-19은 다른 곳에서 반복적으로 이미 만들었었던 그 예언에 대해 예증을 하면서 어떤 일반적인 점들을 간단히 능가한 그 방법 안에서 신명기 편자에게 유용해졌다. 그러므로 그가 이 본문을 혼합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3. Absence of Appeal/ Intercession Motif in 2 Kings 20:12-19
(호소의 부재 / 열왕기하 20;12-19의 중재 동기)
신명기 편자가 그의 더 넓은 목적들을 위한 사용으로 발견해 왔던 열왕기하 20:12-19의 기술 안에서 당면한 다양한 특징들을 우리는 다루어 오고 있다. 그러나 여기 진술은 오히려 현저하게 특징으로 만들어졌다. 그 특징은 우리의 삽화 안에서 발견되지 않으며, 그것의 부재 안에서 그 특징은 본문의 가능성 안에서 신명기 편자의 관심을 자극해 왔다.
이 세 번째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그 기술이 끝나는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한다. 다가오는 재난에 대한, 이사야의 알림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히스기야는 그 알림의 도래에 대한 필연성을 간단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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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그의 구원, 감사, 희망을 표현하는 동안, 그는 그 단호한 결정에 호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야훼 하나님께 그것의 취소 혹은 감소를 위해서 이사야의 중재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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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왔던 모든 것의 견해에 있어서, 신명기 편자가 Josiah 나 Huldah에게 정확한 시적 호소를 탓으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부분에 대해서 신중한 선택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명기 편자는 희미한 재난의 직면안에서 간단히 시도되지 않았던 시간 안으로써 모든 이전의 기간들로부터 유다존재의 마지막 세기를 구별하기를 원한다. 게다가 그것은 열왕기하 21:10-15; 23:26-27에서 나타나 것으로써 시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명기 편자에게 있어서, Manasseh의 인물 안에서 유다의 죄는 한 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 점은 야훼 하나님에 의해 듣는 존재의 어떤 기대를 더 이상 호소하지 않는 점이다. 그리고 무의미한 것으로써 유다의 지도자에 의해 간단히 생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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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경에 반대하여 보여졌기 때문에, 본문 20:12-19은 이사야에 의한 중재 혹은 히스기야의 호소에 대한 그것의 명백한 부족과 함께 신명기 역사의 더넓은 운동을 위해서 그것의 체계화하는 가능성을 명백히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신명기 편자에게 이전 시대로부터 그 시대 안에서 야훼 하나님에 대한 호소들은 불변의 특징, 즉 열왕기하 18:17-20:11안에 있는 그런 호소들의 전체 연속물들 안에서 정점에 이르게 되는 기간의 특징과 호소와 중재가 부재할 유다의 삶의 다음의 히스기야 시기까지의 필요한 전통을 만드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확실하게 이 가능성의 의식은 그 절의 신명기 편자의 혼합을 고무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Conclusion
우리는 열왕기하 20:12-19의 그러한 특징들을 요약함으로써 말을 맺는다. 우리는 신명기 편자의 관심을 끌어당겨왔던 그 특징들로써 열왕기하 20:12-19을 동일시해 왔다. 그리고 그 특징들은 그가 그의 일 안에서 이 pericope를 포함하는 것을 자극해 왔다. 이러한 특징들은 그것의 내용과 구조적인 가능성 양쪽과 관계가 있다. 내용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 본문은 그의 전부의 일 안에서 그에게 현상 주제들에 대해서 중요성의 신명기편자 가능성을 제공했다. 예를 들면 그 부, 왕, 외국인들 그리고 그 다양한 특성들 안에서 예견된 주제. 그의 일의 통합과 구성을 위한 그것의 구조적인 가능성에 관해서 또한 그 본문은 많이 그 신명기 편자에게 많이 제공했어야만 했다. 특별히 유다의 미래 약탈자로써 바벨론에 대한 언급은 그의 일의 최종점을 향해서, 그에 의해서 그의 독자들이 적응하는 것을 시작하기 위해서 다루어져 왔다. 게다가 열왕기하 20:17,18안에 있는 운명의 알림은 변이로써 이전의 이사야 구전(18:17-20:11)에 의해서 강권된 낙관적인 느낌으로부터 다음 히스기야 기간(열왕기하 21-25)의 신명기 편자의 표상의 근심까지 작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열왕기하 20:12-19안에서 호소와 중재 요소의 현저한 부재는 그 신명기 편자가 유다 삶의 뒤따르는 기간의 독특한 특징을 암시하는 것을 하게 했다. 그것으로부터 그는 호소 혹은 중재를 만드는 것의 어떤 언급을 생략할 것이다.
마지막 말로 그것의 더 직접적이고 정확한 목적들을 넘어서 이 기사는 주제의 그리고 구성의 중요성을 신명기 편자 자신 전체의 표상 안에서 부(不) 혹은 이전 신명기적 본문들은 신명기적 역사 안에서 고려할 수 있는 현실을 진전시키는 것을 겨누어 왔다. 그러한 것으로써, 그것은 McCarthy와 다른 사람들의 접근이 효과적인 사람인 것을 보이기 위해서 시도해 왔다.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은 신명기 역사 안에서 여전히 다른 본문들까지 확장 됐다. 동시에 나는 또한 어떻게 특별한 본문이 그러나 간단히 새롭고 중요한 공평을 받아들일 수 있나 강조하는 것을 원했다. 보다 더 큰일의 안에서 통합되었을 때 이것은 단지 열왕기하 20:12-19의 경우 안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2 King 20:12-19 as an Element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신명기 역사의 요소로써 열왕기하 20:12-19)
CHRISTOPHER T.BEGG
Department of Theology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Washington, DC20064
과 목 : 영신학 강독
당담교수 : 박 신배 교수님
제 출 일 : 1998. 5. 13.
제 출 자 : 9501003. 고 언용
그 리 스 도 신 학 대 학 교
영신학강독 박신배교수님 9401019안승대 아시리아의 지배하의 유대:
제국주의와 종교의 재해석
거의 20년전에 존 맥케이와 이 작가는 의식과 종교에 관한 아시리아의 제국 정책에 대해 독립적인 연구를 하였다. 그들의 발견에 관한 학문적인 토론은 그 문제의 현재의 재해석을 촉구하는 논문인 허만 스픽커만의 논문의 발표에 따라 요사이 재개되었다. 멕케이와 코건은 둘다 열왕기하에 기록되어 있는 Ahaz와 Manasseh의 통치기간 동안에 있었던 의식 혁신의 본질과 근원에 관하여 성경적인 역사가들 사이에서 오랬동안 유지되어온 입장에 대해 연구하였다. 게다가, 그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사원을 본따서 예루살렘에 제단을 세웠다.(16:10-16) Manasseh의 의식영역에서의 많은 활동은 천국의 주인에 대한 존경을 소개하는 것과 그가 주님의 집안에 만들어 놓은 야셀을 새긴상을 세워놓은 것을 포함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역사책과 교과서에서 받아들여진 가르침은 아시리안의 종교를 위한 이러한 도입을 취했고 요시아의 그 개혁들은 예속관계의 완전한 폐지로 왕의 사원을 없앴다. 그러나 맥케이는 현존하는 근동지방의 문서들이 앗수르 의식의 부과가 아시리아의 종교, 정치적 이상이ㅔ 있어 어떤 중요성의 완전한 특징이라는 이론을 돕는 증거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의 연구는 이런 평가에 동의 하였고 더 나아가서 이런 차이는 합병된 영토의 통치와 속국의 영토를 통치하는 사이에서 눈에 띈다고 제안했다. 후에 이것은 고유의 의식들을 간섭하거나 부과하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었다. 나는 Ahaz와 Manasseh의 통치때 기록된 이질적인 혁신은 널리퍼진 Assyro-Aramaean 문화인 유대의 우세한 분야에 의한 자발적인 수용에서 기인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고대 근동의 아시리아 학자들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이것은 아시리아의 제국주의가 용인되어지는 관점으로 수정되었다. 정말로, 명쾌한 지지는 아시리아의 정책과 종교적 강압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성경적인 작가들이 저항하는 것에 의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비난하는 생각을 위한 문서로부터 불려올 수 없다. 이에 반해서 성경학자들 사이에서 그 반응은 각양 각색인 편이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철저히 멕케이-코건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Manasseh의 죄들은 의식 혼합주의의 문제에 대한 유대안에서의 내부 투쟁의 한 단면을 반영함으로써 현재에 설명되어졌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중립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존브라이트는 비록 우리가 아시리아의 왕들이 그들의 예속민들에게 아시리아의 신들을 경배하도록 강요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예속민들이 그것이 정책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알만하다고 인정했다. 오직 학자의 소수만이 보수적인 것을 유지하였고 그들에 의해서 정복당한 지역의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아시리아의 압제를 말하는 것이 계속되어졌다. 이 토론은 그 문제에 관한 허만 스픽커만의 재해석의 발표와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스픽커만에게는 종교적 의식에 관한한 주와 속국 사이에 차이가 없다.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지역들은 어쩔수 없이 아시리아의 신들을 숭배하게 되었다. 이것의 증거는 앗수르는 너희의 신이다라는 것과 자주 기록되는 토막신의 추방, 그리고 그 지방에서의 앗수르의 공격기관의 임명이 있는 예속 조약속의 진술에서 발견되어진다. 아시리아의 어디에 살든지, 그들의 궁중 종교의식을 그것들을 따랐다. 유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않는 예속민들에게 주어지는 가혹한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 아하스와 Manasseh는 야훼의 것을 야훼에게 변환하는 자신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시리아의 왕과 그들의 신들을 만족시켰다. 비록 멕케이와 코겐과는 정반대이지만, 스픽커만의 결론은 몇몇 주석자에 의해서 열의 있게 받아들여졌다. 그를 앞서간 모든 연구가들처럼 처음부터 스픽커만은 성경의 전립과 아시리아의 책들을 같이 기초로 해서 사용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새로이 발견된 문서가 아니라 보다 다르게 강조된 것과 두 그룹으로 분리된 현존 자료의 해석이다. 따라서, 그 두책의 모음집, 그들의 특성, 그리고 그들의 고증은 의견을 따르는 대로 초점을 맞춘 것이다. 성경적인 책에서 독립하여 처음으로 해석된 아시리아의 자료인 제국주의와 종교에 대한 더욱 초기의 연구에서 보인 자료의 제출 순서는 유지되었다. 성경이 의식의 영역에서의 아시리아 요구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만큼 이런 절차는 여전히 반대로 제출 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만약 이런 요구가 발견되어 진다면 그것들의 증거는 성경 범위 외의 자료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아시리아의 역사적인 제명은 맨첫번째로 관념형태의 말이었으며, 아시리아 제국의 관념을 선포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개념의 압박하에서 일하며 많은 전통문체와 언어에 의해 유지되어온 왕실의 학자들은 왕과 그의 신의 용감한 업적으로 둘러싸인 사건의 공인된 해석을 내놓았다. 현대 관념학의 책들에서 역사적인 지식이 아주 결여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자는 끊임없이 관념적인 일치의 함정을 조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역사가들은 아시리아의 승리를 기술한 것의 뒤에는 군사상의 후퇴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서학자에게 친근한 듯한 이런 현상의 예로써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오런티스 카르카르의 싸움터에서 흐르는 적군의 피는 Shalmaneser에 의해 겪은 후퇴를 감춘다. 또한 히스기야가 그만둔거로부터 지나치게 무거운 배상금을 받고 있었던 Sennacherib의 거만으로는 왜 그가 히스기야를 대신하지 않는지 또는 BCE701에 성공적인 아시리아의 전쟁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왕실 제명에 기록된 정복된 지역에 강요하는 정치와 사회 협정의 진부한 기술은 액면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때때로, 먼 지역과 다른 통치에 관한 단일 항목은 마치 하나의 정부처럼 계속해서 널리퍼진 제국정책을 모방하는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서 결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명명법의 개선은 아시리아 제국 안과 밖에서 요구되어온 정치적인 관계를 기술하고는 하였다. 스픽커만과 초기의 연구가들 모두 Tiglath-Pileser에 의해 개발되었고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된 체제의 시행을 생각하면서 일반적으로 종, 속국, 식민지란 말을 사용하며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이러한 소규모 상태의 정치적 독립은 세단계로 파괴되었다. (1) 예속의 관계는 아시리아의 전쟁을 위한 국가 군대의 병적편입과 공물, 해마다 지불되는 세금에 의해 제정되어졌다. (2) 불충실의 발견에 따라, 신뢰할 수 없는 예속민들을 이동시키기 위해 그들의 지지자들과 그들의 추방에 의해 군사상의 행동이 시작되어졌다. 새로운 통치자는 증가된 의무를 부담해야하는 축소시킨 지역을 지정하였다. (3) 결국에는, 더 심한 반란후에 이 예속민들은 옮겨지고 아시리아의 양식으로 그의 왕국으니 합병되고 지방화된다. 물론, 역사가들은 제국법칙의 이러한 전형에 예외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지금까지, 그책의 검토를 재개한 것에 따르면 특히 서쪽의 국경지방과 주변 지방에서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 맺어진 광범위한 협정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은 다시 만든 법률과 약속에 관계가 있다. 그 제국으로 흡수되고 유도된 단계는 734BCE에 지중해 연안에 Tiglath-Pileser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부터 Ashurbanipal이 아시리아 본토로 후퇴한 때까지 오랜 세월동안 여러번 변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상황이 바뀔 때 마다 새로이 결정되어졌다. 이것은 역사가들이 그 자료에 따라서 서로 간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정의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결한 구분은 미숙한 독자들에 의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삶의 복잡한 현실에 반영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다른 Philistine 도시, Ashdod의 도시와의 관계는 또한 특별한 협정을 예시한다. BCE712년에 Sarogon의 정복과 Ashdod의 약탈은 외국민의 재정착을 뒤따르게 했고 Assyrian 행정관은 "new Assyrian" 모두에게 적절한 권리와 위상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했다.-그러나 대부분이 의무들이었다.
그러나, 단지 10년후 Ashdod의 왕 Mitinti는 Sennacherib에게 경의를 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Ashdod 지역에 반란이 일어나고 독립을 다시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비록, 그 기록들은 이 문제에 관해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시나리오(일들)는 있을 것 같지 않다. Sargon하의 이전의 통일 시절이나 그직후 Ashdod는 아시리아의 정부를 나란히 통치했던 왕을 재취임 시켰다. 이 이중통치는 Ashurbanipal의 통치만큼 늦게 입증되어졌고 그때(669BCE)는 Asdudu가 eponym으로 있었고, Ahibilki는 Ashdod의 왕이었다. 만일 사람이 Judah's vassaidom을 말하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단지 가장 일반적인 경향으로만 말해질수 있다. 734BCE에 그의 자발적인 복종이후 아하즈에 의해 요구받은 것이 아시리아의 원전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왕기하 16:15에 있는 locanic 진술을 번역해보면 Tiglath-pileser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서 새로운 Damascene 형식의 제단 때문에 버려져 있었던 동으로 된 구식 제단위에 왕의 사적인 재물을 두었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성직자로부터 이야기가 전래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701BCE에 그의 패배이후 히스기야의 새로워진 충신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상 유대가 형식상 잡혔는지 아닌지에 관한 의혹이 증가됐다. ade 조항에 씌여진 것에 의하면 종속된 보다 전통적인 기간은 강제에 의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유일한 그 tyranny of construct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신전에서 아시리아의 문화를 실행해온 예루살렘에 있는 아시리아인과 함께 살아야만 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서학적인 역사적 작품들은 도특한 historiographic-ideological 특징을 나타내는데 그것들의 언급과 증언은 아시리아의 책들이 간주하지 않은 문제와 현상들을 나타낸다. 왕들의 책에서 아하즈와 마나세의 Deuteronomistic 비난은 정치적 준비가 유대에게 강요 되었는지 또한, 이러한 것들이 앗수르를 인정하는 예외에 의해 수반되어 졌는지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그 비난은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의 Du|euteronomic한 요구를 반영한다. 아하즈와 마나세의 그 의식적 활동들은 deuteronomiC 기간들의 기준으로 묘사되어진다. 그리고 그 두 왕들은 이스라엘 왕국의 죄악스런 군주로 비유되어진다.(2kg16:3) 특히 Ahab가 그러하다.(21:3) 아하즈는 불을 통해 그의 아들을 보낸 첫 번째였다.(16:3) 유대의 이전의 어떤 왕도 하나님의 신전에서 마나세가 했던 것처럼 Asherah의 이미지를 세우지는 못했다.(2kg21:7) 그는 또한 천사같은 주인의 도움을 도입했다.(21:3,5) 이러한 행동들에 대한 배경은 진술되지 않았다. 그러나, Deuteronomistic 역사학자들이 그들의 진정한 근원을 기록하는 것을 피했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사람은 다음에 올 것을 생각해야 한다. 솔로몬 왕의 언급에 의하면 역사학자들은 이방신의 이름으로부터 동떨어져진데 부끄러워 하지않고 그들의 의식은 그의 많은 부인들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도입하였다. ;Ashtoreth, goddess of Tyre; Milcom, god of Ammon; Chemosh, god of Moab (1 Kgs 11:1-8). 연속될 것 같은 솔로몬의 행동으로 받아들인 기준이 그에게는 흥미가 없었다. 다소간, 그것은 주변에 비판이 오는 그러한 의식에 대한 왕의 열정이었다.
그리하여 유행처럼, 만약 그것이 현재의 그것이라면 Deuternomist는 아시리아의 의식이라고 이름붙여졌을 것이다. 또한 Ashur와 Ishtar에 대한 마나세의 경의는 평이한 단어로 진술되어졌다. 이방신의 목록뒤에 가리워진 것이 무엇이든지 Canaanites에 의해 존경 받았었다는 것에는 어떠한 이유도 없다: Baal, Asherah, and the Host of Heaven (see 2 Kgs 21:3) 게다가, 만약 정치적으로 자극된 의식적 부과들은 Deuteronomist에 의해 위장되었다. 그러면, 그의 잘못된 행동들에 의해 그의 국민들이 가진 부담은 무슨 영향을 주겠는가? 이 글에서 왜곡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누구인가? 마나세의 통치에서의 묘사로 기록되어진 것은 변절자왕은 국가적 성지를 도입했고 철저히 유대를 후원했다는 황제적 의식이 아니라 Aramean신들과 Canaante의 혼합의 제공이다. 군주정치 초기부터 살아남았던 non-Israelite의식 뿐만 아니라 요시아가 그의 개혁을 지휘했다는 그러한 특징에 반대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아시리아의 왕족의 비문과 성경적 역사책들의 보다 많은 독서가 요구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마땅히 명백해져야 한다. 근동지방의 모든 지역에서 지배권을 장악하고 자기나라의 규칙을 강화한 아시리아의 제국주의의 목적은 문서화 되지 않았다. 어떤 아시리아의 책도 정복된 사람들이 아시리아의 신을 경배하라고 강요당한 사실을 진술하지도 또, 암시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어떤 유일한 범례도 아시리아와 그나라의 지배자 사이에 발전된 정치적 사회적 관계도 설명될 수 없었다. 또 그 당시의 성서들은 종교적 변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악용된 외교정책에 대한 언급은 조금도 없다. 아시리아의 권력과 위상이 서방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아시리아는 처음에 나일강 유역과 Anatolia와 Zagros 산맥을 통합하면서 고대 근동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 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의해 유발된 광대한 정치적 동요는 근동지방의 전례없는 도래와 모든 지역에서의 스타일과 경향의 황급한 혼합에 의해 뒤따라졌다.
몇몇 새롭게 지방화된 곳의 사람들은 아시리아의 시민에 걸맞는 "proper behavior"라는 교육을 받았다. 문화변용의 과정에 대해 잠깐 보자면 사마리아의 의식의 발달로부터 볼수 있다. (2 Kgs 17:24-41) 그책의 특별히 인정된 의도에도 불구하고, Israelites와 Samarians 사이에 발전된 적대감의 표현은 아시리아의 지역으로서 병합된 아시리아의 정부의 기록에서 볼 때 적절하다. 사마리아에 재정착한 이방인들은 야훼의 지역적 Israelite 의식을 채택하는데 자유로왔다. 그들의 개인적 종교의 자유는 수도에 세워진 "weapon of Ashur"라는 공공의 숭배에도 자유로왔다. 심지어 아시리아의 지도자들이 그 정착민들을 올바른 의식형태를 찾는데 목적으로 삼았다고 말해지기까지 한다. 유대왕국의 문제들은 조금 다르다. 유대는 동화된 과정의 소위 "sit on the sidelines" 라고하는 결과로부터 보호하지 못했다. 다마스쿠스로부터 수입된 Aramean 재단인 말들은 아시리아의 의식에서 일반적인 것처럼 태양신에게 바쳐졌다. Phoenician인들은 아이를 산재물로 바쳤다. 유대에서의 그 기간동안 진정한 위협은 문화적 암시를 가진 의식의 모습으로 부터는 아니었다. 정복자가 좋아한 그런 의식은, 그의 죽음으로 사라졌다. 다소, 그 제사는 Israelite 전통이 위협받은 본토지역으로부터 있다. 그 종교적, 문화적 해체는 그 오래된 신들이 나쁜 것처럼 보일 때 새로운 신과 문화의 촉진을 자각함으로서 이방의 방법을 채택하려고 추구하는 유대의 syncretists의 문앞에 놓였다.
신명기 작품의 첨가
신명기사의 구성에 관하여 불일치 되는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그 안에 있는 제 2자료(후기 신명기)가 그 만큼 현존하기 때문이다. Noth는 신명기사 전체를 통하여 후기 추가물들이 있었던 아주 오래된 몇몇 자료들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의 제 2의 자료의 목록은 신명기 4:41-44; 32-34(제외한 것은 34:1,4,5-6); 여호수아 13-22; 사사기1:1-2:5; 13-21.를 포함했다(그러나 한정되지는 않았다). 더욱 최근에 신명기사에 관한 책들의 취급은 신명기에 관한 율법의 모든 책과 사무엘 상의 전승사화를 포함하여 제 2자료의 더욱 광대한 부분조차도 논의되어 왔다. 한편 제 2자료들에 대한 이같은 이러한 최근의 제안들 곧 열왕기서에 나타나는 신명기 작품의 추가로 고려되어지는 그 가설에 대한 관점들은 확실히 선한 회중들로 보고 있다. 아마도 확장된 제 2자료에 관한 가장 근접한 예는 열왕기상 20장 22절과 엘리사에 관한 수집자료들과 엘리야일 것이다. 엘리사에 관한 이야기들은 신명기 역사 속에서 완전하게 일치되지 않아 왔다. 비록 엘리사 이야기나 신명기가 단순하게 엘리야 이야기들을 흡수했다고 Noth의 주장과 같이 상상한다 할지라도 그것들 속에서 신명기에 대한 흔적이 빠져 있다는 것은 그 밖의 장소에서 자료에 대한 사용과는 상충되는 것이며 바로 그것은 바로 그가 편집하지 않았다라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나는 열왕기서의 여러 가지 추가사항들이 같은 저자에게서 나오지 않았고 그 문서를 총괄하여 완전한 체계적인 편집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논쟁해 왔다. 그 밖에 그와 같은 것들이 상세히 신명기사에 관하여 진실된 것 같다. 즉, 신명기서의 범위 안에서 여러 가지 후기 추가물들은 같은 저자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13-22장 뿐만 아니라, 신명기 32장과 34장의 현재의 형태는 종종 제 2예언서로 정해진다. 그러나 사사기, 사무엘서, 그리고 열왕기서의 문서 안에서의 오랜 추가물들은 예언서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고, 같은 수법에 의하여 모든 것이 더해지는 것을 가정하는 것은 추론할 수 없다. 그것들은 다른 관심에 반영하여 나타났고 필경 다른 시대에서 만들어 졌다. 이스라엘 역사에서의 다양한 시대에 대한 전승은 그것들의 시대를 다룬 신명기사의 부문에서 단순히 덧붙여졌다. 거기에는 또한 신명기사의 어디든지, 다수의 더 간결한 추가사항들이 있다. 이전의 사건안에서 논쟁함에 있어서, 전체의 신명기사보다 훨씬 적은 열왕기서의 모든 추가물들을 한 두사람의 특수한 편집자에 의해서 배분하는 것은 어렵다. 독자적인 설화 문학의 추가물에 의하여 보충되어지는 신명기사의 범위의 작업은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몇 세기가 경과되면서 역사적인 상황이 바뀌면 껍데기만 나타난다.
신명기사에 관한 관점은 복잡한 편집에 의한 것보다는 미완성인 것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내부의 균형에 대한 설명이 준비된 신명기사의 본질적인 통일성은 계속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간에 제 2의 본문들의 차이점을 묶어서 결합하여 찾아내고 시도하기 어려운 것을 회피한다. 그것은 구성이 되어있는 Noth의 처음의 모험에 더 근접해 있다. 그 중에서도 나의 의견은 신명기사의 가장 적합한 증거의 관점이다.
기록연대
신명기사의 기록연대는 아마도 신명기사에 있어서 가장 어렵고 학문적인 토론의 논쟁의 양상을 가진다. Noth는 신명기사가 열왕기하에서 곧 끝나기 때문에 포수기 시기에 쓰여졌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Noth는 열왕기서 안의 다윗의 계약의 의미를 충분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야훼의 약속은 다윗이 항상 예루살렘과 그의 왕권으로 자손들을 지배했던 유랑생활 이전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것의 주제와 다른 것들은 요시야 왕의 치세 때에 절정에 이르게 된다. 더 나아가서 요시야 왕의 통치의 기사와 신명기서의 보다 최근의 자료의 사이에서 역사의 최고점으로서 열왕기하 22-23장의 증거가 된다. 더욱 중대한 것은 요시야왕의 죽음에 대한 설명과 열왕기서 안에서의 이전의 자료들 사이의 날카로운 대조이다. 열왕기하 23:26-25:26절에 나타난 므낫세의 실수로서 유랑생활의 설명은 신명기사의 계획에 적합하지 않는다. 유다는 다윗의 충실함 때문에 이전의 사악한 왕들에게 벗어나 살아남았다. 요시야 왕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장래에 관하여 낙관적인 견해를 남겨둔다. 신명기에서 요시야 왕의 지금의 그러한 명백한 상황에서 므낫세의 잘못된 점을 고치는 것과 그리고 유랑생활에 대해서 므낫세를 비난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누구든지 므낫세에 의해 요시야 왕의 노력이 효과 없이 억제되거나 또는 유랑생활을 통하여 요시야를 따르는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설명되는 것을 기대한다. 그는 어느 쪽도 아니다. 그 므낫세의 논지는 그러므로, 고정되어 있다.
신명기사의 유랑중인 기간을 간직해 나가는 것과 두 주제(다윗과 므낫세)를 해명해 나가는 시도는 설득력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열왕기서로부터 완전히 나왔다는 이 결정에 대한 증명을 인정하는 것은 요시야 왕의 통치기간에 대한 오늘날까지의 처음의 신명기사의 구성보다 나은 것 같다. 최근의 열왕기서의 2와 2분의 1장은 신명기사에 대하여 그것의 더 앞선 부분에 첨가된 유사한 신명기사에 대하여 더 늦게 첨가되었다. 이처럼 같은 저자는 열왕기하 21장의 므낫세의 이야기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열왕기서의 더 이전 부분을 수정해 나갔던 글의 증거는 불충분하다.
목 적
신명기사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그것의 기록연대와 함께 관련되어 취급되어져 왔다. 이와 같은 Noth는 유랑생활에서의 신명기사는 그 대단원에 대하여 설명하고 계획하는 것으로 기록되어졌고 이해되어 졌다. 그러나 신명기사의 기간과 열왕기서의 다윗의 서약의 강조는 이해되지 않을 것 같다. Cross는 또한 그것의 기록연대에 관하여 신명기사의 목적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요시야의 개혁을 위한 계획으로서 본래의 역사를 보았다. 그러나 신명기사의 범위는 다시 Lohfink와 Proven의 시사하는 것으로써 의심스러운 견해를 만들었다. 만일 신명기사가 요시야에 대한 선전으로써 구성되었다면 왜 그것은 사사기를 통하여 신명기의 문서에 포함시키지 않았는가? 왜 군주제의 역사에 대해서 한정되지 않았는가?
신명기사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실재로는 장르에 대한 문제이다. 열왕기서를 통하여 나타난 신명기의 문서는 신명기적 역사라고 불리운다, 하지만 최근에 Van seters라는 사람은 그 신명기사의 역사 기록으로써의 그 신명기사에 대한 관계들을 개척해 왔다. 그리스의 역사 편찬으로 그의 비교들은 신명기의 목적을 그의 역사에 대한 기록들과 그의 조사들 속에서 신명기의 그 기록한 목적들이 그것의 민족전통에 대한 이스라엘을 위한 설명들을 보여주고 있다. 신명기사는 동시대의 북왕국 종교에 잇따른 민족적 전통을 찾는 데에서 자극을 받아왔다. 그러한 요시야의 통치기간에 쓰여진 일들은 불가피하게 그에게 유리한 선전의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다.
결국, 그렇다면 나의 조사는 신명기사적인 역사에서의 열왕기서의 문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자세히 얘기하기 위하여 요시야 왕의 통치기간 동안 한결같은 저자 편집자에 의해 씌여진 것으로 추정하게 했다. 세월이 지나서의 작업은 요시야의 죽음이후 유다의 새로운 역사를 포함한 다수의 부분에 대한 주석과 보충을 했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역사는 그것의 초기 구성이후의 질서 있는 편집은 아니었다. 다음의 두 가지 법률은 신명기 역사와 후에 나의 분석에 의하여 첨가된 사건을 설명한다. 신명기사는 아마도 그의 역사 안에서의 대부분의 자료의 원천이다.(대조해 보면 열왕기상 16:1-4에는 예후와 바사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명백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가 충분히 그것들을 고쳐 쓴다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사건은 확실한 정도에 관한 전 신명기의 평가를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명기에서의 자주 일어나는 부가물은 더 이전의 이야기를 고립시키도록 하기 위한 분명한 것으로 열왕기하 9-10에서 예휴의 반란에 대한 설명은 제외되었다. 그와 같은 주어진 진술들은 MT안의 것들이다. 그 맛소라의 역사와 열왕기서에 나타난 특정 구문들에 대한 그 위치는 고대 그리스 문헌 제 2의 vis-a-vis라는 것를 그점은 상기시켜져야만 한다. 열왕기하에 나타난 22장 15-20절에 나타난 훌다. 다음 장에 나타나는 요시야와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문맥 속에서 토론되어질 것이다.
제 5 장
신뢰와 복종:
열왕기서에 나타난 히스기야와 요시야
열왕기하 18-20에서의 예언자 이사야에 대한 이야기는 이전의 장에서의 감춰진 예언자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것들은 다른 세기와 다른 왕국에 정해진다. 이사야 이야기는 명백하게 북쪽으로부터 유래를 찾을 수 없다. 유다의 예언과 특별한 이사야 이야기의 발전은 북쪽의 예언 전승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토론의 화제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의 목적의 더 앞선 열왕기서의 선지자적 이야기보다 아주 다른 근원의 이사야의 이야기를 말미암은 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취급해왔던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선지자는 열왕기하 18장-20장 안에서는 실재적인 중심점이 아니다. 이사야는 중요한 배역을 맡아 한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명백하게 중앙에 세운다.
이사야와 히스기야의 통치
열왕기하 18-20장 안에서의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적인, 연대학의, 그리고 문학의 어려운 점으로 가득하다. 다행히도 그 이야기는 잘 분석되어 졌고 근년에는 그 사건의 유용한 연구사항의 자료도 발표되어졌다. 나는 이 사건에서 당면한 어려운 모든 문제들을 다루어 나가는 것을 시작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히스기야 이야기의 문학의 발달을 중시하는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고집하는 결론을 내려다보고 그것은 연구사항에서의 나의 주된 관심이다. 학자들에 의하여 분석되어져 오고 있는 열왕기하 18-20장의 이야기는 신명기 방법의 저술에 있어서 뛰어난 예증이다.
나는 네가지 구분으로 그 설명들을 조명할 것이다: 1.9-12절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몰락에 대한 회고를 포함하고 있는 서론(18:1-12)과 히스기야 통치의 결말(20:20-21); 2.산헤립의 침공(18:13-19:37); 3.히스기야의 생명연장(20:1-11); 그리고 4.바벨론 사자의 방문(20:12-19).
머리말(18:1-12)과 결론(20:20-21).
히스기야의 통치의 이야기는 통합시킨 것이다. 물론 신명기의 전형적인 시작과 결말짓는 규정안에서 이루어 졌다. 18:6-7, 12와 같은 이 부분 안에서의 다른 절은 명백하게 신명기적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 이야기가 후에 추가되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신명기는 최초의 작자임을 보인다. 그가 또한 연대 속의 구조를 조건으로 한다면 그에게 기록 연대는 유효한 것이다. 신명기 3절에서 히스기야에게 최대의 가능한 영예를 준다: 그는 다윗과 그의 아버지가 행한 것에 따르면 야훼의 보시기에 올바랐다. 다른 왕 요시야는 다윗과 같은 권한은 없었어도 결백하고 좋은 왕이다. 14절에 나타난 히스기야의 예배의 개혁의 묘사는 신명기의 가치있는 평가를 위한 기초가 된다. 히스기야가 를 옮긴 사실은 신명기사에서는 그가 무조건적으로 올바르다고 인정한다. 학자들은 후기 시각으로부터의 신명기 저술을 연구하는데 에서 18:4,22을 볼 때 예배의 중앙집권화로 보는 경향을 가져오고 있다. 신명기의 히스기야의 묘사는 특별히 그의 예배의 중앙집권과 야훼에 대한 그의 신뢰이다. 히스기야에 속한 예루살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한 것을 모면한 사실은 그의 사실적인 신학상의 설명을 만족시킨다.
신명기 후기 히스기야에 대한 신학상의 시각은 18장 5절에 그에 대한 상반된 진술이 또한 명백하다: "그의 후의 유다의 모든 왕중에 그와 같이 행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첫눈에 이 진술은 23:25절의 요시야에 대한 유사한 것으로써 반박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전에는 그와 같은 왕이 없었다." 그러나 그 두왕은 히스기야의 야훼의 신임과 요시야의 복종의 다른 분야에서 견줄 데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히스기야의 신임은 그가 야훼에게 매달리고 그를 버리지 않는 6절에서의 다음 진술에 의하여 볼 수있다. 요시야의 견줄데 없는 복종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전심으로 야훼에게 향한 진술에 의하여 자세히 쓰여졌다. 물론 히스기야의 개혁(18:6)이 또한 모범적이긴 하지만, 신명기의 보고서의 요약은 히스기야에 감탄하는 것은 근원적인 특색으로써 확신을 보인 것을 암시한다. 5절 안에 나타난 히스기야의 확신에 대한 신명기의 중심점은 18:17에서 시작되는 산헤드립의 침공 이야기에서의 확신의 주제를 예상하는 그의 편집의 능숙한 특색이다.
산헤드립의 침공(18:13-19:37).
A에 대한 설명
Stade의 1886년 이래 이 사건을 취급하는 학자들은 열왕기하 18:13-19:37에서의 산헤립의 침공의 두 가지의 명백한 이야기를 인정해 왔다. 첫째로, A에 대한 설명으로 알려진 것은 18:13-16절이다. 그것은 신학상의 논평과 공식적인 원인에서 끌어난 것이 없는 솔직한 역사적인 이야기이다. 그것은 산헤립의 역사 안에서의 이야기만큼 접근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산헤립 침공의 역사적인 재건을 위한 성경의 이야기의 최대한 신뢰성 있는 것이다.
이야기
18:17-19:37절의 B이야기는 그 자체가 합성된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18:17-19:9a를 으로써 첫 번째 이야기로 하고 19:9b를 로 두 번째 이야기로 분리한다.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백성에 대한 랍사게의 연설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B.Childs(1967:80-82)는 바빌로니아의 반역자와 협상을 하는 아시리아의 기사에 대한 이 연설의 유사점을 지적해 왔었다. 그는 양쪽의 본문을 그가 "외교의 논쟁"이라 부르는 같은 유형의 표본으로 결정했다. 그것의 기능은 심리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즉, 협박과 비웃음과 함락된 도시에 포위되어 거주하는 자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다. 이렇게 Childs는 그 연설이 사실적인 역사적 전승을 내포한다고 믿었다.
언급한 것처럼 랍사게의 연설의 주제는 확신 또는 믿음이다. 그는 예루살렘사람들이 갖는 이집트에 대한 믿음과 야훼의 구출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구출시키기 위해 납득시키려 하였다. Goncalvas는 이 확신의 주제가 열왕기하 18-19장의 외관은 신명기사 안에서 공통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어왔다. 이것은 신명기의 공헌이 아니라 연설에 대한 선천적인 그의 근원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18:22절의 히스기야의 예배의 중앙집권에 대한 언급은 몇몇 학자들이 그것의 역사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논쟁의 원인과 그 밖에 신명기의 구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Childs는 그것을 두 개의 결합으로써 본다. 22절에서는 이 요지의 복잡한 특징은 히스기야의 예배 개혁의 심오한 지식과 소란스러운 이교도에 관한 견해의 요점의 이상한 혼합이다. 그러므로 그 절은 신명기 그 자체 뿐만 아니라 랍사게의 연설에 대한 신명기의 자료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아시리아의 외교관은 히스기야의 종교적인 정책의 특성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고 진실한 이교도의 시각으로부터 논한다. 신명기에서는 아시리아 인의 예배의 목적의 이동과 예루살렘에서의 예배의 중앙집권의 계획된 부분으로써 외국의 요소의 파멸의 뜻을 해석한다.
나는 여기에서 Childs의 논증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다. 랍사게의 중점은 히스기야가 그의 성지를 옮겼기 때문에 예루살렘 백성들이 구출에 대한 야훼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히스기야의 야훼 숭배자의 성지의 이동으로써 그의 친교를 미리 예상한다. 만일 그가 Childs의 내용으로써 히스기야가 실재로 아시리아의 예배의 대상을 제거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 그 논의는 손상되어진 것이다.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그는 야훼의 예배와 아시리아의 신 사이는 서로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신명기는 제의의 중앙 집권화에 매우 관심이 있었고, 우리는 그가 18:4절의 히스기야의 통치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읽고 있음을 보아왔다. 18:19-25절의 랍사게 연설의 구조는 더 나아가서 22절이 신명기에 의하여 더하여진 것이라고 시사한다. 그 연설은 네가지 요점을 담고 있다: 1. 21절-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이집트에 의지할 수 없다; 2. 22절-그들은 야훼를 의지할 수 없다; 3. 23절-24절-그들은 훨씬 숫적으로 우세하고 증원을 위해 이집트에 의지해야만 한다; 4. 25절- 야훼 자신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위해 아시리아 사람들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요점들은 제각각 2번 요점을 제외하고 서두를 불변화사 ( )를 붙여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22절은 그것의 문맥으로부터 두드러 진다. 또한, 23-24절의 중점은 21절에 좌우된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이집트에 대하여 병거와 기병에 의지하도록 강요되었고(24절), 21절에 따르면 그러한 제안은 무력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22절은 얼마간 침입하는 것보다 신명기에 의해 할당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32b-35절의 랍사게의 연설의 끝에 이르게 되면 오히려 야훼가 예루살렘을 구하는 것에 대해 무력한 이야기를 갑자기 받아들인다. 이 이야기는 더 이전 절(22, 25, 30)에 확실한 긴장으로 놓여있고 그것은 야훼의 힘을 추정한다. 이것은 18:29-31a와 19:10-13에 의지하여 2차의 발견으로써 몇몇 학자들을 18:32b-35절을 보겠금 인도해 왔다. 추가된 절들은 너무 이르게 신에 대한 불경의 주제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이야기의 중심적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19:4, 6은 18:32b-35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하나님을 훼방하고 있는 랍사게의 19:4절의 진술은 특히 사무엘상 17:3b, 45절에서의 다윗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참고.17:25,26). 18:32b-35절이 신명기의 신학상의 관계를 반영하는 Childs의 결정은 신명기의 제작에 있어서 32b-35절을 더하여 매력적이게 보이는 것이다.
19:1-5절에서의 중재를 위해 이사야에 대한 히스기야의 호소는 그의 야훼에 대한 믿음과 그런까닭에 이야기의 주요한 주제와 조화를 이룬다. 그의 호소는 19:6-7절의 이사야의 간결한 신의 계시에 의하여 산헤립이 아시리아로 되돌아가게 하고 거기서 죽게 만든다. 산헤립의 유다로부터의 철수는 19:8-9a에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그의 암살은 오직 19:36-37절에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19:9b-35절 이야기의 사이에 들게 된 것은 편집상의 추가를 가르킨다.
이야기
19:9b-35절의 이야기의 범위 안에서 21절-31절은 더 후기에 써넣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이야기는 32a 절에서 전달자의 방식으로 반복함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이러한 재편은 한 때 이야기의 명백한 진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Childs가 보여왔을 때, 이야기는 문학상으로 이야기에 의존한다. 양쪽은 다 같은 기본적인 구조와 주제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무엇인가 다른 점은 보다 중요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신학상이 동기이다. 결국, 이야기는 이 점을 포함한 것을 목적으로 명확하게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구성되어졌었다.
이야기의 본래의 모습은 19:32-35절의 결말로부터 지각할 수 있다. 몇 몇 학자들은 33절과 35절의 부조화를 보아왔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후기의 삽입이라고 여길 수 있는(Childs 1967:75-76)와 또 다른 (Clements1980:58-59)를 보게 했다. 그러나 만일 이야기가 단지 편집자의 합성된 것이라면 2차적인 것으로써의 다른 것을 취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저자는 아야기로부터 19:36-37를 분리시켰다, 그것은 그들이 그의 자신의 구성을 삽입시키기 위해 종결했었다. 그는 산헤립의 소문에서의 듣는 것과 그의 구성에서 히스기야의 편지에 대한 동기로써 를 만들어내는 것을 사용해 왔다. 이 때문에 그는 19:36-37에서 아시리아에 대한 산헤드립의 귀환을 하게 하는 것은 글의 구성의 끝부분에서 다른 동기가 필요했다. 그는 36-37절에서 결론을 위한 준비로써 32a절의 바탕의 일부분에 33절을 첨가했다. 이어서 그는 35절을 첨가했다. 그것은 그가 왜 산헤립이 아시리아에 대하여 귀환하려는 지에 대한 설명으로 어둠에서의 죽음 때문에 천사가 출현한 전통적인 장소로부터 구성했었었다.
이야기는 모독과 구출의 주제를 둘러싸고 전적으로 순환한다. 히스기야에 관한 그 편지는 거짓과 무력한 것으로써 야훼를 다루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그 편지가 야훼를 모독했다는 것과 그에게 아시리아로부터 예루살렘을 구하게 하는 것을 지적한다. 이사야의 하나님은 말씀을 히스기야에게 야훼가 그를 위하여 그 도시를 구원시킨 것이라고 확신시켰다.(왜냐하면 아시리아인 들은 그를 모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다윗에 대한 그의 약속은 충성으로 나타났다.
19:34에 나타난 다윗의 계약에 대한 그 언급은 꽤 신명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언급은 야훼의 예루살렘의 선택과 열왕기서를 통해 나타난 사무엘하 7장은 신명기의 강조점으로 적합하다. 신명기는 제 2이야기에 대해 권위를 갖는다고 하는 그 부분은 가장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신명기적인 주제와 언어들은 제 2이야기, 특별히 히스기야의 기도문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 비록 그가 신명기 속에 나타난 기도문을 특별히 나누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기도문에 대한 Goncalves의 기도의 평가는 이처럼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해석을 매우 신뢰한다.
오세진
The biblical interpretation of the reigns of Ahaz and Hezekiah
Peter R. Ackroyd
Ш.역사적인 문맥
열하16:7-9는 아하스왕의 통치기간 중의 정치의 장소의 빛나는 전체의 진술을 준비하지 않는다. 그가 아하시야 왕에게 사자를 보낸 것은 기록되어 있고, '너의 하인과 너의 아들'의 가라앉은 형식이 사용되었다. 주장은 아람과 이스라엘로부터 옮기어 졌다. 아하스는 은과 금을 좋은 국고로부터 신전으로부터 아하시야 에게로 보냈다.아하시야는 다마스코를 탈취했고 '퀴르 로부터 망명했다.'그리고 레진, 아람의 왕, 은 죽음을 당했다.어쨌던, 아하스의 주장은 여전히 이 이야기 속에서 여전히 깨끗하지 않다. '하인과 아들'처럼 지배자 아래의 위치에서 아실리아의 가신인 그는 그의 형식적인 복종인가? 혹은 이 시점으로부터 유다 존재를 넘어 아실리아의 지배와 굴종하는 그의 현존의 이것을 가정으로 해야만 하는가? 몇몇의 이런 명쾌한 질문들은 아마 18:13-16안에 함축되어 되풀이 하고 열하 18:7안에 있는 히스기야의 반역의 예로 인하여 제공된다. 18:14는 ( )라는 말은 가신 상태의 어김을 함축하는 ( )라는 의미심장하게 사용한다. 더욱더, 보증은 3백 달란트의 은과 3십 달란트의 금을 세 나크리브에 의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18:15이하. 히스기야가 부분과 국고와 신전 으로부터 재료를 얻음을 증거로하여 보라. 우리는 같은 문장이 열하16:8에서 아하스왕이 사용됨을 본다.
이 정보의 뒤에는 종종 응집된 그림과 가들 제공된 것으로 된 것을 보고, 그러나 재건은 필연적으로 불가능 한 것이다. 열하 16장은 아하스가 아실리아에게 주장을 논평하고 있지 않음을 함유한다;어떤 부정의 그것의 관점이 아하스가 비난한 것 안에서 문맥의 넓은 것보다 의지한다. 비슷하게 그리고 더 의미심장하게, 논평없는 것은 이사야7장에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두려움에 대항한 것과 아람과 이스라엘에 운명에 소식에 대항한 것이다. (7:4-9) 이 소식에서 아실리아에게 만들어진 참고는 아니다. 명백한 것은 이사야7장에서 열어진 것과 다윗성이 근거없는 것의 공황이 보다 깨끗하게 신탁으로 함유되어 따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이사야가 교제 안에는 없지만 도움을 위하여 아실리아에게 주장한 것에 대항하여 아하스를 경고한다. 만약에 정치적 음모에 대항하여 그의 경고를 가지고 호세아의 제안안에 이사야 29와31와 그의 장소와 같은 안의 이집트위에 의존의 경고을 가지고 비교가 예언자들을 위해서 논리학의 위치처럼 간주된다. (호7:11) -우리는 여전히 교제가 명백히 말하고 있는 점에 대해 묻지 않고 있는 지 물어야 한다. 이사야7장과 8장에 따라온 것을 보면 '아실리아의 왕'7장17,20절 안의 광택과 8:4과 7안의 아실리아 참고로 가득찬 아실리아의 손에 유다를 위한 운명의 제목으로 다가온다. 잘못된 신뢰의 함축은 8:6과 7안에 현존한다. 그러나 다시 교제는 아실리아에게 정치적인 주장을 명백하게 비난하지는 않는다. 이사야는 신의 보호 때문에와 그의 안뜰은 아람과 이스라엘 두려움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보다 강조하여 나타난다. 그것은 왕이 아실리아의 손안에서 기대되는 운명을 기대해야 한다는 야훼안에서의 믿음의 결핍을 강조한다. 그러나 두 원소는 걱정을 남겨둔다. 부연해서 교제와 광택에 속하는 교제와 결심의 어려움에 의해 명백한 광택의 문제가 일어난다. 아하스의 포괄적인 그림은 독특한 정치종교의 관점을 제안한다. 신학적으로 나쁜 것으로 간주되는 외국의 힘을 빌리려 한다. 그의 제공의 분명히 독특한 종교의 문맥 안에서 독특한 왕의 부연의 부정의 기증을 한다. 우리는 돌아 서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열하18-20안에 히스기야의 묘사는 그에게 소망을 보여준다. 함축에 의하여, 아실리아에 대항하여 (18:7), 아실리아에게 복종하는 것과 보증의 지불.(18:14-16) 이것들과 이야기안의 다른 원소들 사이에서 관계는 논쟁의 지역이다. 눈에 띄게 이야기의 대조는, 혹은 의심 많은 대조 이야기는, 18:13,18:17-19:37안에, 예루살렘의 잡음에 대한 가져감에 대한 아실리아의 모든 무능을 보아라. 그리고 군대와 센나그리브의 죽음과 군대의 모든 쳐부숨과 그유다의 해방과 아실리아의 천재는 포괄적인 그림에게 기증적인 복잡한 분할의 여러가지 원소이다. 아실리아의 근원 안으로부터 정보의 문맥 안에서, 세나크리브의 주장은 유다의 침략이다.그리고 그것은 18:13을 함축한다. 예루살렘 자신의 잡음을 포함하지 않는다. 유다의 정치적 군대적 위기를 맑게 했다. 아실리아가 예루살렘을 잡았다면 그것은 더욱 명백해 진다. 예루살렘은 아실리야에게 아직 잡히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실현 않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 결과는 종교 재판이기도한 정치적 재판을 야기 했다. 히스기야는 해방의 대리인이다. 해방은 모든 정치와 군용에 대항하여 사이에 든 신의 지시의 결과에 의해 더욱 명확하게 기술된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아실리야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함축은 아실리야는 이 해방과 연결에 대항하여 반역이 함축되어 있다. 이 전망은 더 병 안든 이야기의 길 안에 밑줄 보다 있다. 20:1-11(특히 6권)
이렇게 우리는 아마 아하스왕은 나쁜 왕으로 히스기야왕은 좋은 왕으로 재판되는 정치적 부과를 제공하는 이야기를 본다. 열하16:6는 외국인의 얻음과 상실을 좋게 측정한다. 그래서 16:5를 추가하여 아람과 이스라엘에게 재판의 추가되어 가르쳐준다. 다시 이 제목은 크로니클러의 증명으로 확장된다.
Ⅳ종교적인 부과
열하16:2안에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비난을 가지고 아하스는 취급된다. 이것은 16:3-4에서 세가지 원소적인것에서 따라온다. 이스라엘의 왕의 연습에게 그의 일치에게 참고된는 요소에 의한 것이다. (열하8:18,27)진술은 그는 그의 아들이 가나안의 나라를 쫓아내는 것의 혐오를 가지고 일치 안에서 해고 당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에 지나간다. 그리고 참고는 경배는 ( )와 ( )와 '모든 초록 나무'이다. (열하14:23)
이것들의, 두 번째의 것은 구별된다. 그러나 비난도 받는다는 것은 일반화 되고 아주 전적으로 제외되지 않는다. 부적당한 종교의 주제는 그의 지불을 위해 국고성과 신전으로 으로부터 은과 금을 조회 16:8을 계속했다는 함축이다. 만약 문맥안에, 이것은 아마 종교적인 부적당을 제안할 작정이다. 이것은 명백히 정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유명해진 것처럼, 유사한 점은 이스기야에 대해 만들어진다.(열하18:14-16)
더 많이 특히 세밀히 16:10-18안에 나타난다. 여기서 아하스는 다마스코스 안에 티그라스 피르서전에 나타나는 여행에서 현존한다. 그리고 우리아의 사제직의 세밀한 가득참으로 보내진 것의 제단을 본다. 그것이 종종 아실리안의 도안의 제단의 가정이 되는 동안 그리고 그것은 연상시켰다.따라서 정치적 관계의 사이에서 유다와 아실리아의 사이에서 그것은 더많이 아마 사실 아라맨과 다마스코스의 신전에서 연상시킨다. 우리아의 제단의 ㄱ5 설의 말의 결과에 따르면 결과가 보내진다; 정확함위의 감정은 훈련이 예배당과 펜타토치안에서 다른 물질의 기술안에서 알아낸 것을 종종 형식의 반어직인 사용을 제안한 것에 따른다. (출39:32)이 형식의 관계는 아하스의 명예의 취급 안에서 중요한 원소가 나타난다;어떤 하나의 레벨 그것이 정확한 신의 정도의 지시를 읽을 수 있긴 하지만, 그들은 기도 해야만 하고, 실행해야 한다.16:12이하 아하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제단을 보았다.-그것의 수락과 시인의 그의 암시의 문장,그리고 그는 그것의 세밀의 공급의 희생을 제공한다. 16:14안에 예배 비품의 기술됨의 다시정리됨이 결과 된다.야훼가 이동되기전에 제단은 청동 제단으로 보여 진다, 신전 위로부터 가져갔다, 그것은 제단(그것은 그것이 아님이 명백함)과 신전, 과 제단의 북쪽에 위치 했다.(그것은 명백한 위치가 아니다) 교제는 명백한 의미가 없고 가능한 과적했다.그러나 물질의 덩이는 그것이 새로운 제단이 좋은 것으로 되고 나라적인 제물의 상태가 되었을때 나타난다. 청동제단, 그것의 새로운 위치,는 왕 자신의 신성을 가져온다. 복종 형식의 반복을 가지고 끝내는 것은, 다시 제안적인 반대이다, 그러나 또한 신이 주신 목적의 훈련인 것을 통하여 유력한 세력가가 가리키는 것이 옮기어 진다. 16:17-18 몇가지 명부는 더 신전 안에서 변경되었다. 아하스 '지름길',명백한 명예로운체 한다. 세부는 자주 깨끗해 진다. 기간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참고는 바다밑에 있고 돌의 부양함에 의한 반환과 청동 황소에 의하여 만들어 진다. 교제는 청동의 이동을 명백히 암시한다. 아마 또한 그것은 다져 졌다. 청동을 위해 신전을 훔쳤을 까요? 다른 목적을 위해 청동은 취해 졌을까요? 혹은 입고,손해,신전 준비를 깨기위해 새롭게 반환 했을까? 우리는 청동을 반환을 예측할 수 있고, 많은 힘센 무거운 물체를 잡을 수 있다. 사악한 절차를 필요로 합니까?교제는 계속하여 말한다. 신전을 건설하는 것과 왕을 위한 밖의 입구는 그는 야훼의 신전을 돌았다. 의미는 매우 불명확하다. 18절 후반부에 진술은 선행하여 모든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아시리아왕 전에'이다. 아시리아의 자격 혹은 아시리아 지배자의 요구의 만남이 그리는 모든 변경이 함축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사야38;8에 참고하여 함축된 종교적 활동은 아하스의 부적당한 활동은 더 지적된다. 그리고 열하23:12, 제단은 지붕위에 건설된다. 의미하는을 아느것이 단지 어렵다는 것에 대한 확실성은 조회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이 바라지 않는 목적 혹은 건조처럼 보이는 것은 공정한 가정이다. 대하 28:16-21은 천재의 묘사가 꽉 차있다라고 말한다.이시리아 왕에게 주장을 시작했다. 참고는 신전과 궁전으로부터 아하스왕에게 감사의 표시를 한 것을 참고하라. 비웃는 논평은 그를 좋지 않게 본다. 아하스는 우상숭배 연습을 갈망한다. 아람의 하나님의 경배는 열하2장 제단의 제목의 방해일 것이다. 그는 잘못된 제사 행동을 갈망했고, 그런 악마파괴였고 거룩한 그릇과 신전 문의 닫음 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안의 제단의 다양성을 건설한다. 제공 기술은 아하스의 반종교적인 일반적인 진술을 더 존경을 통한 것을 제공한다. , 대하29:19안에 히스기야의 그의 행동은 반대의 지시를 위한 법이 포장되었다. 아하스가 종교의 관점으로 부터,그리고 이것은 대하 안에 더 눌려 지는 악마 왕처럼 그리는 묘사는 명확하다.
(생략)
Ⅴ가설
선행한 것 안에 제안의 가설의 동의는 명백할 것이고, 그러나 우리가 그 같은 선 보다 더 멀리 진행한 이래로, 우리는 마지막 건설을 짓지 않고, 가능한 두 지배자의 다른 어려운 가설은 포괄한다.
(1)우리는 북왕국 시대의 기도의 재앙에 살고 있는 아시리아에게 보증된 복종의 아하스 논쟁할 수 없을까? 우리가 이사야로 인해 관념을 완전히 가질수 없다. 그리고 교제는 우리에게 그가 주장에 대해 상담하고 아시리아에게 복종한 것을 지금부터 말한다. 우리는 정치의 조용함을 좋아하는 지 않하는지 또한 그렇게 채택했는지 할 수 없다, 아시리아인들은 충의 의 명확한 부재에 대해 만족한다.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은 매우 정교하고 정치적인 위치이고 그의 왕좌의 진실한 위협, 이사야7:6의 다빌 지명된 이래로 그의 장소로 후보자가 생존해야 한다. 아하스의 손해,아마도 고안해서, 그의 왕좌와 손대지 않은 그의 왕국, 오래사는 것은 독립의 쓸데없는 태도보다 더 중요하다.
(2)우리는 논쟁할 수 있을까?-그리고 이사야 20장에 여기 반역 그리고 아시라아인들의 반역안에 연루시켜 히스기야의 관점에 아시리아의 재료를 보라. 반역의 히스기야는 더욱 하나 였고, 진정으로 유다에게 전체적으로 위험했을까? 만약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의 공격에 움추리지 않았다면 그들이 라크시를 잡은 것같이 유능하게 완벽히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유다는 완전히 701로 떨어졌다. 센나크리브에 의해 주장된 46개 도시의 상실이다. 무엇이 히스기야의 평결인가? 세기의 세가지 정복다음에 아시리아에 유용한 것이 남아있다. 교제,명확한 조용한 반대와 역사와 부정확한 관점의 함축은 각각 열하와 이사야에 있다. 유다의 이름은 모든 아시리아로부터 전달 된다. 히스기야는 그의 할 만함 보다 누루는 것으로 보인다.
(3)큰 고려함은 보다 더 요인할 수 없다.우리는 그것이 마지막 세기의 이야기하는 것안에 탐지를 옳은지 물어본다. 그리고 유다 역사의 반은 그의 지배자위로 스스로 부과하는 인공의 교대의 양식이다. 후에 그리고 모든 복합의 구조는 대하 2장에 발견되었다. 겔 18, 그것의 고대의 숫잘르 가지고, 다른 예의 제공, 여호와김은 나쁘다:그것은 설교를 좋게 하는 양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진실이 좋은 것이 아닐까?
Ⅵ결론
이 이야기는 역사적인 종결을 도착하는 관점을 가지고 쓰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존재 이야기와 그가 읽을 의상의 방법안에 타당한 방법으로 보이는 부과와 이야기의 존재의 표면의 바로 아래에 찾을 수 있는 시도로 보인다. 우리가 그들과 다른 각도에서 서 있다면 그들은 아마 어려움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편리함의 부과의 반대라고 보인다. 정치적인 왕은 선함과 악함의 혼합의 있을 법한 일이다.그들의 정치 종교는 만약 우리가 아마 유사의 정치를 위한다면 순수한 종교의 관계의 정치 재판을 가지고 결합한다.아주 현실적인 보여지지 않는 것은 검고 단순하고 하얀 부과 이다. 그리고 역대기의 사실은 열하의 재판으로 아하스와 히스기야의 일로 더 취할 수 있다.실제의 마네세와 요시야의 경우 역전 실제의 결과 동안 더 중요한 우리가 준 수락하기전의 고려의 증정의 동기를 제안한다.괴스타 얄스트룜의 글에서 그 자신이 우상파괴 주의자로 보이기 전에 쓰여졌다.이 독톡한 돌아선 위쪽의 조각은 재판의 독립의 감사의 표시로 제공되어졌다.
성기종
유랑에서의 이스라엘-요시아
역사가의 관점에서 본
열왕기서와 관련된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이스라엘인들을 유랑과 몰락으로 이끌었던 불신앙의 장황한 설명으로 결론짓는다. (왕하 17:7-23) 그리고 이야기는 기원전 720년에 아시리아의 탈취이후 사마리아로 이끌어지는 식민지 주님을 묘사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여되었던 운명에 대해서 더 이상의 소식은 없다. 왕들에 대한 신명기서의 작가에 의해서 여기 표현된 생각은 최근 연구에 의해서 요약되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에브라임의 땅의 인구는 멸망이후 완전히 변화되었다. toto에서 자생적인 이스라엘 공동체는 추방되었고, 그 땅에는 거기로 이주하는 외국인들로 차게되었다. 이전 북왕국에서 사건의 상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는 관점을 가진 자들은 우리의 고대 역사가들이 피하려고 하는 문제에 화를 낸다.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추방되었는가? 북쪽에 수립되었던 Magiddu와 Samarina 신 아시리아의 지배들 뒤에 남아있던 이스라엘의 운명은 무엇인가? 그리고 유랑에서 그들의 타국에서의 상태와 되돌아올 가능성은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직접적으로 주의를 가지는 최후의 질문이다. 그리고 우리 역사가들은 그가 그렇게 이해하는만큼 이스라엘망명 문제에 조용한 것이 아니었다하는 것을 제기한다.
유랑에서 이스라엘에 연관이 있는 신명기 기자의 증거는 왕하 17:24-41에서 발견되어진다. 현재 학자들은 대개 이것을 Samaritan 기원에 있어서 토의의 출발점으로 다룬다. 두 개의 학문적인 집합체는 뚜렷하게 인식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집합체 분할은 그것의 진실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문제로 대충본다. 그리고 정말로 제2의 집합체는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첫 번째 집합체는 Samaria에서 "이교도 관습의 고발"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다음 어느 학자들은 (바벨론이전이든 이후이든) YHWH's 토라의 계약의무에 구속되어 있는 "야곱의 아들"로써의 외국인을 말한다. 이 문제는 두 번째 집합체가 첫 번째 집합체로부터 독립되었다고 우리가 인식하면서 언제가 없어지게 되었고 더큰 왕하 17장의 본문안에 보여지고 특별히 vv7-23안에 이스라엘의 설교가 포함되었다는 것으로 제거되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토라에서 유래된 것, 풍부한 세부상에서 모아진 증거들, 이스라엘의 땅으로의 이동으로 이끄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날까지" 기자의 보고서에서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유랑에서 못내 그리워한다. "이날까지"의 문장은 v34에서 다시한번 나오고(두번째 집합체의 처음) - 후에 다소 길게 첫 번째 집합체에서 여담으로 쓰여진다. Wiederaufnahme에 의하면 - 중단된 이야기에 의한 문학적인 기술은 선정되고 핵심단어와 문장은 반복되면서 계속되었다. - 두 번째 집합체는 v23의 회복으로 특징지어졌고 그것은 Samaria 몰락이후 이스라엘 존재에 주된 주제로 특징지어졌다. 외국 정착민으로 있을 때 첫 번째 집합체의 주제로 그들은 다시 v41에 나타난다. "그들의 나라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같은때에)그들의 우상을 경배할 것이다 : 바로 그들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그렇게 역시 그들의 아들과 손자들도 이날까지 하리라" 우리는 지금까지 반복될지 모른다. 사료적인 관점에는 두 번째 집합체가 포함된다.
vv34-40에 제한되어진 ; 심지어 형벌후에 즉 유랑, 이스라엘은 그것을 "정해진 길"로 고집하고 되돌아가지 않는 것을 추구했다. 이런 분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멀리까지 미치는 것이고 현대 역사학자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내놓는다. 기원전 720년 후의 이스라엘의 이런 아직 작자들에게 알려지고, 그의 비방에 주제가 되었던 배교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역대기 작가의 말속에 있다. "아시리아 왕의 손으로부터 도망한 남은 자들"(대하 30:6) 아시리아 지방에 살았던 자들인가? 또는 이스라엘로부터 추방되거나 메디아 도시들, Gozan땅 Habor에서 에브라임 왕국으로 망명한 자들인가? 우리는 아시리아 정복후 북쪽의 인구조사의 대한 논쟁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단지 사실상 후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인구의 퍼센트는 신명기 저자들의 포인트가 아니였다. 때문에 그들 모든 이스라엘은 그 땅으로부터 망명했다. YHWH가 매우 격노할 "시야에서 없어짐"이었다. 왕하 17장에 그땅은 이전의 거주자들에 의해서 개간되었다. 어느 이스라엘 신명기 저자는 Priori를 알기 위해서 이교도의 숭배자의 영역을 아래로 포함한다. 하나는 반드시 결정되야 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 집합체는 망명에서의 이스라엘 그것 자체를 제기한다. "그들이 그들의 이전 방식을 따르는 이날까지-그들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준 야곱의 아들들에게 주신 토라와 계명등 그들의 법과 규칙... 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여전히 그들의 이전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우상숭배에 대항하는 신명기 저자의 배경과 그것의 연대기적 한계는 제안될 수 있는가? 다음의 것들을 고려해 보자, 바벨론 유수의 예언자들은 미래에 한 나무로 비유해서의 유다와 에브라임의 두 지파의 연합과 부딧힘의 기간에 대해 말한다. 귀환자들 사이에서 Ezra의 명단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느혜미아는 에브라임으로부터 그리고 연안에 있는 이스라엘 영토까지의 가족들이 있었다. 심지어 요단의 다른쪽에 있던 르우벤은 귀국자들의 행렬에서 확인된다. 망명 이스라엘의 죄악된 행위의 문제는 바벨론 유수의 문제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이후의 주제로 보여진다. 우리 논쟁에 있어서 예루살렘의 폐망은 기원전 586년으로 보여진다. 이른 바벨론 유수전에 유다는 요시아의 통치때, 특히 통치기간동안 거주자들과 이스라엘왕국인들의 적절한 정착에 초점을 두었다. 다윗의 현현으로 비춰진 요시야는 벧엘 제단을 파괴하고 바못전이 있던 사마리아 다른도시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전의 사마리아로 이동한다. 이런곳에서 예배하던 제사자들은 학살되고 헤렘법 아래에서 이교도 제사장들은 죽임을 당하였다. 요시야의 인상적인 행동은 진정한 상속인으로 여기는 다윗 가문의 당연한 요구로 여겨진다. 그래서 상속인의 것을 현존하지 않는 왕국의 영토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였다.
17:34-40에 논쟁은 이러한 요구를 더 심화한다. 이스라엘이 망명은 그들의 계속적인 우상숭배에 의한 그들의 이전 거주지에서의 어떤 권리를 몰수당하는 것이였다.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정통성을 부정한다.; 그들의 망명이 거부의 증거이다. 그의 동시대에 사람 예레미아에 의해서 선언된 망명의 호됨에의한 것이 베제되어진 이스라엘 남은자들의 관한 예언자적 관점은 본국에서 돌아와 지는 것과 에브라임산에 제정착하는 것고 얼마나 다른가. 하지만 그리고 나서 이것은 단지 문자적 예언과는 의견을 달리하는 신명기 저자를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히스기아 왕의 종의 날인 도장
히브리 날인도장에 관계된 관인을 만드는 브라운 크레이는 최근에 이스라엘 박물관에 히브리 도장부문에 취득되어졌다. 도장을 만드는 것은 헤브론 지대로부터 기인한다고 한다. 얻게 되면 그것은 함께 또는 부분적으로 부서져서 아교로 붙여진 3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장의 길이는 16mm 이다 폭이 14mm 그리고 두께는 5mm 이다. 날인의 길이는 12mm이고 폭이 9mm이다.
다시말하면 도장을 만드는 것은 파피루스 섬유에 명료한 날인과 관계가 있고 그것은 파피루스 문서에 도장을 찍기 위해 사용되곤 했던 것을 가리킨다. 지문의 잔재는 날인의 가장자리에서 보인다. 그 도장의 날은 손으로 쓴 내줄의 문장이 포함된다. 그것은 그것들 사이에 연속이다. 아들과 종이라는 단어는 점 다음에 따른다. 그것은 다음에서 읽을 수 있다.
그 명패는 그러므로 그의 직함 뿐만아니라 아버지 그리고 도장의 소유자 이름과 관련이 있다. Yehozarah 이름은 성명과 다른 도장들에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Zerah라는 이름은 신으로부터 명명된 접미사로서 나타난다. 역대상 5:27 6:36 출애굽기 7:4, 8:4 소유자의 아버지의 이름은 Hilqiyahu 이다. 그는 Eliaqim 의 아버지로써 즉 다시말해서 Hezekiah 왕실에 로얄 스튜어드로서 왕하 18:18에서 언급되어진다. 이 이름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성경안에서와 코끼리 사본에서 언급되어진다. 그것은 또한 히브리 도장들에서 여러번 나타나고 때때로 Hilqyw에서도 나타난다.
종이란 칭호는 왕의 Asahiah종과 관련되 두 번 요시아의 때에 성경에서 언급되어졌다. (왕하 22:12 ; 대하 34:20) 그러나 그것의 공식적인 기능은 알려져있지 않다. 5개의 도장들이 '왕의 종'칭호를 가지고 알려진다. 종의 칭호와 이름에 관련된 도장의 독특한 다른 부류는 항상 왕의 이름에 뒤따른다. Megiddo에서 발견된 어느 도장은 그리고 이스라엘왕국에서 고위 공무원에 속하는 도장들은 ; 이것들을 읽을 수 있다. Jeroboam의 종 Shena에게 이러한 칭호를 가진 3개의 도장은 유대 고위 공무원에 속한다. 다른 도장은 Ascalon 왕국으로부터 기인하고 다른 2개는 Ammonite 왕국으로부터 기인한다. 하나는 명백히 Byblos 왕국으로부터 기인한다. 우선 종의 칭호가 따르는 이름의 두 글자를 검토해 보면 확실히 heth 와 zayin을 읽을 수 있다. 날인에서 quph 와 yod의 칠한 흔적은 읽을 수 있고, 식별가능한 he와 waw라는 마지막 두 글자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아마도 Hizqiyahu와 관련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것은 도장이름의 출처를 아는 첫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날인은 Hezekiah의 종 Hilqiyahu의 아들 Yehozarah의 날인과 관계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므로 그가 왕하 18:18에 언급된 Hezekiah의 스튜어드가문 그 때문에 기원전 727-698년에 도장을 만든 Hilqiahu의 아들 Eliaqim의 형제였다고 추측한다.
쉽게 식별가능한 날인의 문자들은(beth, he, waw, zayin, heth, yob, land) siloam 비문의 그것들과 매우 닮았다. 추측연대도 매우 잘 일치한다. 머리글자 "lamed"는 또한 예루살렘으로부터 스튜어드의 비문의 그것과 또한 비슷하다. 두드러지게 알려진 4개중에 2개는 주요 유대 공무원에 속한 히브리 도장의 날인과 관련된 bullae이다.
덧붙여서 juglet안에 있음직한 Lachish로부터 17개의 bullae 그룹이 있다. Hezekiah 왕의 종 Yehozarah의 날인은 유대 bulla와 히브리 도장 모음의 흥미있는 구성에서와 이스라엘 박물관의 도장날인 부문에서 날짜기 매겨진 가장 첫 번째의 것이다.
중간고사 과제
영 문 해 석
과 목 명 : 영신학강독
담당교수 : 박신배교수님
학 번 : 9401016
성 명 : 성 기 종
그 리 스 도 신 학 대 학 교
이선
히스기야의 개혁의 역대기 자료
이선
B.C 721년 사마리아의 가을과 북이스라엘의 인도된 시민들의 국외추방과 함께 유다는 여호와의 법 아래 홀로 견디는 정부의 이상의 짐을 이어받았다. 사마리아에 일어났던 대 이변의 충격은 많은 양상을 나타내고 뿌리깊었다. 정치적으로, 유다는 앗시리아의 남부 발전능 막는 남아있는 유일한 국가로서 유다는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유댜의 아하스는 앗시리아에 복종하도록 이미 선탯되었었다. Syro-Ephraimite 연합에 대항하여 막는 것과 교환조로 경제적으로, 작은 왕국은 완전히 저항할 수 없는 앗시리아에 의해 덧붙여진 세금의 무거운 짐을 낳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종교적인 불의로 인해 생겨난 모든 면들에서 그들이 증언하고 있는 재난에 대한 민감한 지식이다. 한 세기가 넘는 동안 선지자들은 왕국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 받지도 못할 것이다. 그들이 둘러 쌓여진 사람들의 종교적인 믿음과 행위들로 타협되어져 그들의 정체성을 잃는다면. 위협받아왔던 것은 북이스라엘의 경우에 있어 넘어가게 되었고 메시지는 유대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있어 잃지 않게 되었다. 사마리아 개혁의 멸망에 따른 십여년간 공중에 있었고 젊고 열정적인 지배자인 히스기야의 다윗의 왕 위에 접근 한 것을 더해짐에 따라 그의 안에서 강력한 국가주의와 Yahwistic 열정의 높은 정도로 묶여졌다. 정치적인 부대적 의미들이 있는데, 확신하건대, 이 당시 어떤 개혁에도 그것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열심인 Yahwist의 지지와 함께 예루살렘과 또 다른 곳들에서 히스기야는 성실하게 되돌리고 정화하는 종교적인 관습들의 일을 그의 왕국안에서 실행해 나갔다. 우리가 살펴볼 것들에 따라, 그는 심지어 점령당한 이스라엘에까지 접촉하려 했고, 하나님의 진실한 제사에 있어 보존되어진 마지막 상태로 나타난 유대왕은 형제같은 책임감을 느겼다. 이것이 역대기에 없다면, 누가 히스기야의 개혁의 방법들에 세가지 부분들을 충당했겠는가? 왕하 18:3-5에 있는 몇 개의 반대되는 구절들에 따라, 우리는 개혁의 행동이 가지고 있는 이른 예들에 있어 약간의 정보들을 갔는데 결국 이 부분에 있어, 뒤에 그리고 더 효과적인 요시야의 개혁에 단단히 묶여져 있다. 두가지 운동의 연결성이 아무것도 없는데에 있어 W.F.Albright는 진술해 왔는데 "북부에 있어 히스기야의 선교적인 행동에 의해서, 유다의 왕들은 그들의 북부의 친족들과 함께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몬, 므나세의 짧게 산 아들이며 계승자, Jotbah 갈리리마을로부터 저명한 이의 손자이다. 요시아 그의 아들은, 엘리아킴, Runah의 갈릴리마을로부터 또 다른 저명한 이의 손자이다. H.H.Rowley는 또한 주장해왔는데, 신명기는 요시야의 7세기 개혁의 주요근원들 중 하나, 히스기야에 의해 시작된 일들을 진행시키기 위한 개혁그룹들 므나세의 지배에서 일찍이 이루어졌다. 호의적인 기회가 일어날 만큼 곧 am나세의 이교도 통치에 있어 그와 같은 개혁 계획들은 비밀스러웠다. Rowley교수는 이교도 통치에 있어 없다. 반세기가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지나갔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 모두가 죽어갔고, 그들의 일은 놓여졌고, 모르는 만큼 그렇게 잊혀지지 않았고, B.C 621년까지 소란스러운 상대에 있는 것이 가능하였다. 히스기야에에게 주고 있는 네 개의 부분들에서 이것은 평가받아왔는데 역대기는 열왕기서와 평행적인 자료의 오직 18개 구들을 반영하고 약 100개 구들로 종합된 새로운 자료들을 소개한다. 역대기에 대한 이 중요한 특권의 재료는 지시하지 않고 오로지 역대기의 형상에서 오늘날 이것을 발견할 수 있는 약간의 사람들이 있다. 열왕기와 역대기안에서 이 통치의 자료들에 대한 비교는 재미있고 각 역사가의 독특한 관점들을 반영한다. 이것은 역대기에서 말하고 있지않은 Brazen Serpent의 멸망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왕기서는 히스기야의 개혁적인 행동을 빠르게 넘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자료는 유다의 산헤립의 침략의 묘사와 결과적으로 일어나는 철수에 대한 것들은 취하고 있다. 열왕기하에서 히스기야의 개혁의 긴 묘사 후에 야훼에 대한 히스기야의 성실함의 결과로써 보여지고, 단지 그의 개혁의 열정안에서 새롭게 명시하고 있었다. 야훼와 이것의 보상안에서 히스기야의 절대적 믿음의 상대적으로 잔잔한 그림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기 위해서 역대기가 열왕기와 이스라엘 자료들로부터 온 것을 생략하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우대의 이집트로부터 기다리는 도움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는데, 우리는 히스기야가 기도를 통해 어떤 두려움도 없음을 배운다. 사실 당황스러움도 없다. 히스기야는 그의 수도에 "새장속의 새처럼"안에 들이지 않고 있는 것을 묘사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산헤림은 요새화한 도시들에 대항해 진을 치는 것으로 묘사되어지는데, "그들을 이기기우해 혼자 힘으로 생각하기"(32:1). 역대기 이야기의 역사적인 유효성을 지워가는 것은 이미 유행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어떤 이는 이것이 그의 고유한 특별한 관심들과 목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고려하는 때이다. 역대기는 이것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상기하지 않고 그는 열왕기와 다른 자료들의 너그럽게 보고 있는 세세한 부분들도 단순히 채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B.C 400년을 전후해서 쓰여진 것들에서 그는 현재를 위한 교훈으로써 과거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자료들에서 확실한 전통들의 선택과 강조는 그의 실용적이고 신학적인 목적, 말하자면, 선은 여기에 지금 과거로부터의 반영을 끌어내고 있는 것들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모든 이것의 한계와 무력함과 함께 그의 날의 유다는 다윗아래 신권정치의 황금기의 계승자였다. 예를 들면, 히스기야는, 역대기의 관점에서, 다윗의 정통 후손을 넘어선다. 그는 두 번째 다윗인데 다윗의 영광의 날들에서 생생히 깨달아지고 선지자들에 의해 상상되어진 주님과 인간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역대기는,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와 방향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 그러나, 저 위조된 역사의 허비는 아니었다. A. Bentzen은 이것을 가치를 떨어뜨리는 함축없는 "교리적인 사료 편찬"이라고 불렀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우리가 넓은 의미를 취하게 하고, 역대기에 의해 묘사되어진 겨과에서 아마도 하나의 다른 것을 따르지 않는 세걔의 국면들을 포함한다. Schematization의 어떤 확실한 자료는 세장을 향한 히스기야의 개혁 계획의 압축을 통해 기대되어진다. 취하고 있는 방법들은 (1) 성전의 정화와 재봉헌이고 (역 29장) (2) 이스라엘로부터 나타난 유월절의 장중한 축전이 초대되어 지는 것이고(역 30장) (3) 땅의 정화와 성전의식의 고유한 관례를 위한 규칙들이다.(역 31장)
두 가지 것들은 즉시 말하여졌다. 히스기야의 개혁이 충분히 역대기에 기록된 것과 같이 시행된 것에 대한 논쟁을 위한다면, 젊은 유다 왕은 그와 같은 방법들로 착수한 혁신자가 아니다. 개혁의 경향들은 요시야의 잘 알려진 개혁까지 제한적이지 않았다. 군주 정치기간동안 선지자들의 모든 계승자는 다윗의 나라와 가족을 향한 특별한 길에서 야훼와 언약한 계약들의 충실한 의식을 왕들에게 권고했다. 어떤 많은 그들의 계시들은 동시대의 왕을 위한 개혁의 근거들은 뒷받침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를 들면, 미가의 경고는 히스기야의 양심을 감동시켰고, 이사야의 계시가 그들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심지어 군국정치의 시작전에도 개혁과 종교적인 남용들의 제거는 율법의 시간동안 이스라엘의 amphictony의 영으로 반영되었다. 야훼를 향한 순종과 성실에 관한 신명기의 감동적인 권고는 과거를 그리는 노력으로부터 나오는데 초기 시대의 확실한 영을 회복키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연결에서 잠 25:1은 크게 조명하고 있다. 그 "히스기야의 사람들"은 저작자 그룹들이었는데 왕의 보호아래 집합되어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과거의 문학적인 기록들을 모으고 편집하는 것이었다. 북이스라엘에서 어떤 부본없이 유다의 첫번째왕 히스기야는 과거의 유산을 보호하기 원했고, 역사적이고 예언자적이며 슬기로운 전ㄴ통들을 구성해갔다. 게다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한 신명기적 설교들이 유대의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개혁과 함께 몇며츠이 방법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과거의 고리와 재구성키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있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를 제외하고 적어도 두 왕들은 개혁자들로 분류될 수 있었고 예후의 언급없이 예후의 피의 과다는 이스라엘의 오점은 Baal-Melcarth의 제의식의 제거를 위한 근본적으로 종교적이고, 목적성있는 그의 개혁의 사실을 가리게 되어왔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에 의해 시작된 개혁을 이어나갔다. 이는 야훼의 율법에 있어 그의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한 여호사밧에 의해 구성된 훌륭하게 후원한 교육 임무의 형태를 취한다. 이교육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유대적 개혁이 있었고, 북 이스라엘의 쇠약하게 하는 영향에 반해 강력한 유대를 위한 모든 가능성의 개시에서 북 이스라엘 내부의 타락은 상태의 붕괴를 서두르게 하였다. 이 노트의 가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유대적 기계류, 종교적 근원의 종류를 세우는 것을 증가시킨 사실들이다. 종교적 근원은 제의적이고 다론 종교적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요아스 왕권으로부터 빼앗은 아달랴의 개혁은 왕에 의해 최고에 올랐다. 성전의 수선으로 시작되었다. 유댜 왕들에 의해 유발된, "땅의 백성"과 레위인들의 영향력은 G.Von Rad에 의해 강조되어왔다. 개혁이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행동이던 중에, 그것은 또한 정치적 암시를 담고 있었다. 이것은 특별한 사실인데 이것은 중앙집권화의 큰 방법으로 육성되어지고, 더욱이 왕의 특권을 강화하고 신적 존재의 상징으로서의 예루살렘도 모든 시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필요했고 오직 진실한 의식 그곳에서만 보여지게 되었다. 요컨데, 히스기야에 의해 취해진 개혁적인 행동들은 놀라는 이 없이 개혁의 마음을 가진 부하들에 의해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이것은 역사에 있어, 결정적인 순간을 기대케 했고, 그 자매 왕권의 몰락이 한세기 넘는 동안 이스라엘에 반해 예언자들의 선포된 파멸의 계시의 시행동안 실제적인 증거로 공급되어졌다.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게 되고, 유다는 개혁을 하든지,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든지 해야했다. 역대기의 개혁의 묘사는, 세부분에서, 그 자신의 신학적 관점과 일치한다.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제의적 중심인 예루살렘과 함께 연합된 이스라엘의 비전에 의해 지배당한다.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그들의 개혁을 왕국의 이상을 주위에 세운다. "모든 이스라엘"를 껴앉고 이 선교를 북부에 강요하여 그들이 다시 주장한다. 다윗 정권아래 열두부족 연합의 목표는 "모든 이스라엘"구절은 역대기에서 48번,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8번보다 적지않게 나타난다. 매우 연합된 나라안에서 한가지 중요한 문제는 종교적 감독인데, 형식적인 역대기의 시간에서, 백성들 사이에서 어떤 일치점의 주요한 보증이다. B.C 400년 역대기 그 위치의 견해로부터 보여지는데, 그는 성전의 정화와 재봉헌과 함께 시작하는데, 유월절 축제가 뒤따른다는 것은 놀랄 것이 아니다. 이 행동은 수반하는 역사적인 행동을 위한 근본을 제공하고, 그것은 분명해 묘사되었다. 높은 곳들과 제단들의 붕괴는 나라의 많은 부분들과 아세라의 잘려진 부분들에 있어서, 그 운동의 완전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매우 적은 영구적인 가치가 있었다. 히스기야가 이미 다윗이 임명한 이들의 후손들에 의해 경영되어진 예루살렘 제의의 정설을 보증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왕족뿐 아니라 제의적 전통들은 다윗에게도 되돌아갔고 둘중 후자는 역대기의 관점에서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는 연결된 다윗의 필요로 쓰려졌다. 오직 그의 시간의 생존할 수 있는 성직의 구조들이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으로 세부적인 것들의 지연 없이 그의 왕권 주위에서 역대기는 히스기야를 그린다. 성전을 정화하고 재봉헌하는 일도 즉시 구출한 몇몇의 이유들 때문이다. 우리는 B.C 701년 여름 산헤립의 전쟁전 14년이다. 왕궁의 연대기는 틀림없이 혼란스러운 문제이다. 그러나 이날은 성경 역사가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고 있다. 재봉헌에 대한 묘사는 지난 5세기동안 현재의 관습을 반영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백성들은 그들의 봉헌물을 봉헌키 위해 초대되고 그들은 열광적으로 따른다. 제물로 바쳐진 동물들의 학살의 결과는 제사장의 부족으로 인해 지연되었고 역대기는 그것을 다시 감지키 위한 경우들을 취하고, 적어도 이러한 경우에서, 레위인들은 제사장들보다 더 양심적이다.
히스기야에 의해 제정된 유월절 축제는 개혁의 다른 어떤 사항들보다 많은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어떤 이들은 역대기의 묘사가 허구라는 것과 히스기야의 왕권으로 retroject된 요시야 개혁의 단순한 묘사를 믿는다. 다른 이들은 사건의 근본적인 사적확실성을 주장하는데 북이스라엘로부터 온 요소들에 의한 것 안에서의 참여를 포함한다. 첫 번째 달 대신 두 번째에 예루살렘에서의 축제를 지키기 위해 초대되어졌다. S.Talmon은 순수한 역사적 자료로써 유월절의 역대기적 기록을 받아들이고, 정확하게 즉 자세하게 그는 통일국가의 파괴 후에, 여로보암 1세는, 정치적 이유들 때문에, 에브라임과 유대에서 예배 기념적인 일들의 일치를 분열시키기 위해 절기 달력을 조종한 것에 동의 한다. 이것은 어떤 충성부터 예루살렘까지 열 개의 부족들로 갈라진 것을 지키기 위한 그의 정책 중 일부이다. 같은 목적 때문에 그는 라이벌인 예루살렘의 성전처럼 벧엘과 단에도 다른 축제들을 한 달로 연기했고 게다가 북쪽의 농업 요건들과 더욱 거의 일치하여 그들은 축제는 온다는 것이며 그러나 북쪽과 남쪽 사이에 축제들의 일치를 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변화는 옛 에브라임 전통들을 반영했고 에브라임에서 기후적이고 농업적인 요건들과 더욱 맞는 것이다. 그 달력의 정확성은 북쪽의 사람들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졌고 그들은 더욱 제의적 축제와 농업적 계절의 일치와 가까워졌다.
이 학설, Talmon에 따르면, 두 번째달 예루살렘의 허락된 유월절 축제에서 히스기야의 지금까지의 모호한 행동은 만족스럽게 설명된다. 만약 히스기야가 남북통일을 위한 그의 정책에 어떤 성공이 있었다면 그의 첫 번째 단계중 하나는 왕구의 두부분들사이에 옛 의식적인 일치의 회복되어지는 것이다. 예배의식의 행사들의 일치된 달력 없이 재통합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그의 사자를 북부의 초대되어진 유대인들에게 보내는데 그들은 사마리아의 몰락이후에 남겨져 다시 예루살렘에 온 그리고 유용한 시간,첫번째달에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이들이었다. 역대기는 기록하는데 초대는 북부를 통해서 경멸과 조롱과 만났다. 왜? Talmon은 이유를 주장한다: 히스기야는 한 달에 유월절을 축하하기위해 그들을 초대하는데 그들의 달력에 따라 고쳐진 시간 전에, 그래서 그들은 이것을 아무것도 가짖 못했다. 이 난국에서 히스기야는 자문위원들에게 조언을 받고, 양보하도록 결정한다. 유월절은 두 번째달에 행해지고, 비전통적인 달 즉 북부의 농업학적 동방적인 달력에 완벽하게 따르는 것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양보와 함께 에브라임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오고 그들의 유다 동포들과 함께 유월절 축제를 보내게 된다. Talmon의 학설은 더욱 분명한 빛안에 히스기야의 유월절의 역대기 자료에 놓여져 있는데, 불분명한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신명기적 유월절의 본질은 엣 가족 축제 대신에 예루살렘에서 국가적 축제에 놓여져 있다면, 그 때에 이 발전은 히스기야의 공로가 아니라 오히려 요시야의 공로라는 결정으로 인도되어진다.
Talmon의 학설에 대한 어떤 비판은 역대기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성을 존중하는 그의 긍정적인 접근과 그의 노력은 인정되어져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제의는 여전히 결정적인 즉 유월절에 대한 증거자료가 부족한 학설로 남아 있다. 이것은 또한 북부와 남부 사이에 단일화된 달력의 인보(隣保)동맹적인 가능성을 간과한 것처럼 보여진다. 이 가능성은 선택된 중앙의 성소에서 제의적인 축제를 위해 요구 되어진다. 여로보암은 그의 다른 개혁들에서 옛 인보동맹의 전통을 존중하고, Talmon 자신이 제시한것처럼, 이것은 그가 어떤 전통적 지지없이 영속적으로 축제 달력을 재정리 하는 것으로 보여지지는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물론, 여로보암이 옛 북부와 가나안 달력 심지어 전통적인 인보동맹 달력보다 오래된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것을 결정했다. 예외적으로 역대기 30장의 이야기는 Talmon에 의해 제의된 그 사건들의 재건설에 대한 지지는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히스기야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유용한 시간에, 첫 번째달의 14일에,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해서 초대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북부의 초대에 대한 경멸적인 거절이후에, 히스기야는 타협하고 두 번째달로 축제의 날을 변경한다. 그러나 본문은 말한다. 왕과 자문위원들은 가졌는데, 초대를 발하기전에, 두 번째달로 고친 것을,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날의 이변화를 위한 이유를 준다 - 제사장들은 충분한 수에서 그들 자신을 신성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모아진 사람들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Talmon를 지지하는 중에 역대기의 자료는 근본적으로 역사적이다. 확실한 세세한 부분들은 히스기야의 유월절의 묘사에서 역대기의 시간으로부터 오게 되고, 이것은 단순한 논쟁이 진척되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역대기가 그의 상상으로부터 유월절 축제를 건설하기 원하고 히스기야의 개혁에 첨부시키기를 원한다면 그는 매우 어색한 일들을 하는 것이다. 왜 그는 단지 쉽게 요시야의 유월절 경우에 따라서 첫 번째달에 그것을 놓았을 때 이 매우 정통적인 저자는 두 번째달에 행해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가?(역대하 35:1) 역대기는 히스기야의 시간에 민수기 9:2-1에서 단지 "두 번째 유월절" 법의 근거에서 유월절 축제는 꾸며진것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더욱 큰 가능성은 역대기가 비일반적이고 비정통적인 역사적 사건 즉 그가 두 번째 유월절의 법을 향한 명백한 참조로 인해 설명할 수 있는 시도를 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심지어 이것은 모든 상황을 명백히 밝히지 못한다. 30:17-20은 보여주는데 심지어 두 번째 달에 많은 백성들이 여전히 깨끗지 못하고 게다가 축제에 참여하지 못한다. 불규칙성과 미봉책은 히스기야의 유월절의 확실성에 대한 좋은 논거로 나타난다. 역대하 30:26은 동등하게 우리에게 말하는데 이것은 중앙 성지에서 열린 첫 번째 연합된 성치 순례 축제이다. 나누어진 독재정치의 붕괴 이후로 말이다. 이 주의는 역대하 35:18과 열왕기하 23:22을 비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요시야의 유월절은 사무엘 시대 이후로 그 종류들의 첫 번째이라고, i.e, 중요한 해마다의 축제들이 amphictyonic 의식이었던 때 이후부터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반대하여 명령은 요시야의 개혁을 관찰하고, 유월절은 땅의 정화를 따르고 높은 곳들의 히스기야의 붕괴는 유월절 의식을 따랐다(31:1). 어떻게 넓게 영원히 이 개혁들이 있었는가? 그러나 히스기야의 프로그램은 거의 즐길 수 없었고 온건한 성공이었다. 우리는 이교도들의 행동의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데 그의 아들 므낫세의 접근후부터 유다에 스며 들어오게 되었다. 어떤 개혁의 행동들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부터 돌아온 열렬한 야훼주의자들에 의해 북부에 행하여 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다윗의 권위의 회복의 어떤 종류의 것을 꿈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실제적 정치적인 것을 얻는데 북부지방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거의 가망성이 없다. 한세기 후에 요시야는 이 목적을 성취하는 더 위대한 성공을 하게되는데 심지어 유다는 명목상의 앗시리아의 종주권아래 놓이게 되는 동안에도 말이다. 앗시리아는 그 때에 그 올가미의 끝에 있었고 요시야는 그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개혁을 북부와 남부를 통일하려는 목표와 함께 강요하기 위해서 서둘렀다. 정치적 행동을 떠맡은 히스기야는 의심할여지없이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산헤립이후까지 B.C 705년에 앗시리아의 왕위를 계승했다. 높은 곳들을 일소하기 위한 히스기야의 개혁의 성공에 따라서 전통(열왕기하 18: 4-22;역대하 31:1)을 묻기위한 좋은 이유가 없었다. 그 전통은 중앙집권화의 고려할만한 방법은 그의 왕위동안 성취되었다. 역대기가 히스기야의 개혁의 그의 길고 자세한 자료를 끝냈을 때, 역대기는 지금 산혜립의 침략을 취하고 빠르게 그것을 통해 달려간다. 앗시리안 인들은 쉽게 훼방해왔는데 히스기야가 개혁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이야기의 시작전에 역대기는 개혁하는 왕의 그의 인상을 요약하여 간단하게 정지시킨다(역대하 31:20-21). 그가 unstintingly 히스기야의 야훼를 향한 헌신과 그 같은 전형적인 충성이 수반된 성공 찬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기는, 히스기야를 향한 그의 모든 불공평성과 함께, 신명기의 평가의 부족을 멈추고 있다: "유다의 모든왕들중에 그와 같은 사람이 그 이후에 없었고, 그전에도 없었다"(왕하 18:5)
과목명:히브리어 영어 해석 제출자:신학과 4학년
교수명; 박 신 배 교수님 이 상 희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제출일:98년 6월 8일
THE PRIESTLY ACCOUNT OF THE THEOPHANY
AND LAWGIVING AT SINAI
Baruch J. Schwartz
다음의 연구는 the Pentateuchal the Priestly material은 법률적인 시내산에 대해 완벽하게, 계속적으로 서술적인, 시내산 사건에 대해 분리되고 독립적인 J·E·D의 설명을 포함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이다. 더욱이, the Priesly theology속의 그것의 위치와 이러한 서술 속에 표현된 시내산의 계시의 독특하고 명백한 제사장적인 관점에 초점을 가져오기 위함이다. 그것은 이것이 P의 문학적인 본질에 관여한 계속되어지는 논쟁에 대한 a modest contrlbution을 구성하기를 바라고 있고 그것이 문학적인 요소뿐 아니라 개정을 계획 세우는 사람들이라는 관점을 확실히 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러한 일은, 그곳에서 the Sinai pericope의 중심을 위한 것 뿐만아니라 법적인 요소의 통합과 P요소 속의 서술들을 위한 논쟁이다. 이러한 연구는 Menahem Haran 저자의 구두의 가르침이나 출판물의 한없는 도움이 있었고 모세 5경의 작가의 고부된 설명에 의해 아래의 증명된 것보다 더 많은 방법들로 인도되어졌다.
P:The State of Inquiry
(탐구의 상태)
학문은 오래전에 모세 5경 속의 사제적인 사회계층의 존재 위에서 그리고 인기있는 어법상의 특징의 총체적인 것 위에서 사실상의 합의에 도달했었다. 모세 5경의 범위 밖의 사제들이 쓴것들에 나타난 특별한 주제를 벗어나는 것을 방치했고 모세 5경 속의 P의 범위의 그때만의 특이한 관점, 그것은 아마도 기본적인 동의는 또한 the Priestly material 그 스스로의 확인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안전하게 주장하였을 것이다. the Priestly의 "world view"의 특징은 또한 명백하게 남아있다, 비록 여기에 그것이 최근에만 언급되었을지라도 이 커다란 part에서는 Harah의 연구들의 grand-breaking(커다란 파괴)로 돌려야 한다. 이러한 주제는 적절한 세심함과 함께 어떠한 현실의 세부사항속에서 연구에 착수되었다. 첫째는 성직자가 모세 5경의 사회 계층에 대한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date의 질문에 대해 종종 맹렬한, 계속적인 열정의 토론에 관하여 쓴 것들을 둘러싼 주제들 사이에 있다. 모든 것을 위하거나 또는 성직자의 대부분을 위한 추방 이전의 date에 대해 쓰여진 경우는 더 이상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것은 kaufmann의 몇 안되는 특별한 신자들에 의해 예전에 일반적인 것인 것처럼, 그것은 scholaship안에 훌륭한 위치가 되었다. 비록 주요한 어떤 것이 아니다 할지라도 또 다른 남아 있는 토론의 주제들은 종종 date의 질문의 상관적인 요소이다. 예를 들어, 흥미있게 찾았던 P의 "kerygma"는 결정하지 못한 주제들 사이에 남아있다. 아직도 주요한 신학적인 것 또한 교훈적인 the Priestly wort의 목적을 분명히 하려는 시도는 결코,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의도되었던 것을 위한 청중과 그것이 구성되었던 것의 the religio-historical 위치의 주제로부터 분리되었었다. 게다가, "kerygma"의 질문은 일반적으로 변장속의 date의 질문보다 더욱 아무것도 아니다.
또다른 미해결된 주제는 P의 인기있는 "world view"와 P의 미에 대한 평가와 신학적인 원인에 의해서이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표현 위에 쓰여진 성직자의 문학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기꺼이 하려는 마음에 의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콜라의 개성적인 taste에 의지함으로 점차적으로 목적을 이루었을 가망이 없다. 여전히 그것은 the postexilic period의 그들을 사회적 지위에 놓으려는 몇몇 스콜라의 편애는 종종 부정의 평가를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했어야 한다. 스콜라주의가 a preexilic date를 좋아하는 동안에 P의 모세율법주위와 종교적 의식의 올바른 논리, 신학적 깊이, 그리고 문학적 예술의 좀더 훌륭한 면을 찾는다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된 경향이 있다. P속의 스콜라쉽의 의견은 토라의 어떤 다른 초점보다 역사적 질문의 목적이 더 많다.
P as source, Not redaction
(개정이 아닌, 근원으로서의 P)
여기서 우리는 다른 문제에 목표를 정하게 되는 게 그것은 한 세기의 마지막의 4분의 2속에서 계속적으로 사용되었던 모세 5경의 비평론으로 사제들의 문서들의 문학적인 구성 요소의 질문이다. 최근들어 이 주제를 처리하는 학문적인 간행물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비평들이 난국에 도달했거나 일치에 도달했거나 하는 부정확한 상태가 되려한다; 이러한 상황은 꽤 조금더 복잡할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좀더 확실하게 그것에 의해 분명히 말했었고 그리고 전통적으로 Noth와 결합되었던 the Graf-Wellfausen school의 고전적인 관점이 현대학문에 의해 거절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제의 문서들은 참으로 독립적으로 한번쯤은 표현되었던 문서이고 J와 E문서들과 함께 결국에는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The Covenant &The "Torah" in P
(그 계약과 P의 토라)
마지막으로, 나는 non-priestly 속에 시내산의 전설들이 존재한다는, 비록 성직자적인 문서가 그것들과 함께 생소하지 않는다해도, 그것은 실제 시내산 사건들과 관계되어지지 않은 방법으로 그것들을 사용한다.
(1)covenant(계약)
학자들은 오랫동안 깨달았던 것으로, P속의 그 계약은 땅의 약속을 구성하고 있고 그 결과는 장로들을 만들었다. 그 계명의 이행은 두 개의 활동범위 안에 있다. 후계자의 신비로운 숫자는 모세가 태어나기 전에 이집트에 자손을 낳았다. 이에 반해서 그 땅의 소유는 모세 5경의 이야기의 끝 후에 즉 모세가 죽은 후에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P속의 모세의 출생은 두 개의 활동 범위 사이에 작은 GAP이 생긴다. 그의 생애의 최초에 모세에게 준 다의 약속의 반복은 그 계명의 주장으로써 요구를 만족시킨다. 아직 이행되지 않았던 것은 여전히 법률상 효력속에 있다.
신의 출현이나 시내산의 입법도 아니다 그들에 대한 어떠한 요소도 계명처럼 P에 대해 이해 되었던 것도 아니다. 축복들에 대한 선언과 성직자적인 입법족의 저주들은 이러한 사실, 즉 계명의 형식이 그 문학적인 구조의 영향을 받았었다는 것을 지시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P는 레위기 26장의 징조와 약속들 속에서 시내산과 관계를 맺고 있는 문서를 언급하기 위한 room을 발견한다. 여기에도 역시, 그 언급의 대부분은 계약의 하나님에 의해 이해하거나 또는 취소하기 위해서 장로들과 함께 만들어졌다. 단지 이집트 탈출은 지금 그것의 이행의 한 부분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추가할 뿐이다. 단지 v.15은 그의 계약의 취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법들과 조상들과 함께 승낙하기 위해 불이행의 표시로,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계속적으로 확실히 약속의 땅의 종교적인 반전이 언급되어진, v.44에 나타난 구절은, v.15의 독특한 사용은 아마도 과장된 반사일 것이다. God, 그의 무서운 즉각적인 칼(swift sword)로 특징을 짓는 것, "covenant vengeance"의 얼마간의 분명치 않은 협박에 더하여, 이것은 어떠한 최우선의 견해에 반하는 것을 취한 적이 없는 일관된 술어학보다 지방의 수사학이 H에 의해 쓰여진 것은 실로 혁신적인 경우일 것이다.
여전히 P가 계명과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시내산에서 주어진 법률들로 보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레위기 26장의 증거는 P가 땅의 약속과 후계자가 이스라엘의 나름데로 모세에게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던 법들에 순응한다는 것의 사실을 위한 증명이다. 이것은 P의 깨끗함의 rule들과 육체적이고 도덕적인 것들에 순응한 특별한 진실이라는 주장에 의해 확실시되었다. Circumcision, 계약의 표시였던 할례는 실행적인 명령이다. 그것의 결과들을 무시한다.--다시말해서, 개인적인 단계에서, 후계자의 약속으로부터 배척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준수 또한 요구, 명령은 계약의 두 번째 표시이다. 약속의 가정적인 특성은 P에 의해 논쟁되지 않았다; rather, 말이 의미하는 것. P안의 은 그것과 관계되었던 계약상의 아주 가까운 관계가 아니라 약속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적인 전통속에 이 없는 것을 시내산에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