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크레인 거중기와 화성의궤
거중기(擧重機 또는 擧重器).
우리나라 최초의 크레인(Crane)은 다산 정약용이 제작한 거중기다. 크레인은 건설기계로 기중기(起重機)로 불린다.
거중기는 도르래(Sheave 활차)의 원리를 이용해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데 사용한 기계다.
기본적인 원리는 복합 도르래를 이용한 것이다.
위에 고정도르래(Fixed pulley) 4 개와 아래 움직도르래(Driving pulley) 4 개를 좌우 양쪽에서 끈으로 연결하여 밑에 있는 큰 고정도르래와 물레의 일종인 녹로를 양쪽에서 잡아 다녀 아래에 있는 물건을 끌어 올리게 만든 기구다.
이 거중기는 하나의 움직도르래는 2배의 힘을 작용할 수 있으니 4개의 움직도르래가 있어 8배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수원화성을 쌓을 때 좌우에 30명의 남자들이 1만 2천근(7.2톤)의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어서 한 사람 당 4백 근(240kg) 의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는 조선시대에 천시하던 과학기술을 사대부의 대 실학자가 직접 고안하여 축성에 활용하였다는 것은 조선 후기 과학기술의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해야 한다.
이 거중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크레인(기중기)이고 200여 년 전인 1794년에 토목공사에 활용한 이 거중기를 개량 발전 시켜 현재의 크레인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것은 후대의 우리가 반성해야 할 일이다.
거중기의 모형은 남양주 조안면 마현리의 다산 유적지와 용인 상갈동의 경기도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청나라 강희재(康熙宰)는 중국 고금의 방대한 문헌들을 모아 활용하기 좋게 금 6000여 항목으로 분류해 재구성한 세계사상 최대의 유서(類書)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1만1000여권을 편찬 중국에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조선 22대 이산 정조(正租)대왕은 이 고금도서집성 5022권을 거금 2150냥에 구입 하여 우리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는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정조는 그 중 독일인 선교사 J. Schreck 가 서술한 서양 축성법(築城法)이 분류된 기기도설(奇器圖說) 한 책을 정약용에게 주어 연구하게 하였으며 다산 정약용은 이를 근거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정조에게 바쳤다. 여기에 녹로와 독창적인 설계에 의한 거중기(擧重機.또는 擧重器)가 제작 되였고 이 녹로와 거중기로 현재 수원성인 ‘화성 성역’을 쌓게 하였다. 이 거중기의 자세한 설계도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수록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 6/16 - 1836 2/22)이 31세에 창안한 이 새로운 건설도구인 녹로와 거중기를 활용하여 10년 공사로 예정된 수원성 축성을 3년 안에 완공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18년 서기 1794년 2월 28일 기공하여 정조 20년 서기1796년 9월 10일로 2년 7개월 만에 완공하였다. 정조대왕이 정성을 다하여 축성한 이 수원성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인류 문화유산에 올라가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거중기 정면 거중기 측면
수원화성(水原華城)
수원화성은 정조 13년(1789년)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천장한 후에 수원 유수부를 팔달산 밑으로 옮기고, 천장하고 5년 후인 1794년 새로 이전한 수원 외곽에 성곽을 축성하기 시작하고 3년 내에 완공한 것이다.
화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4대문에 48개의 시설물이 있다. 둘레는 5,743m 면적은 18만 8048m2인 평산성이다. 총 공사비는 87만3천517냥7전9푼이다. 평지에 세워진 화성은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인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있고 동양과 서양의 과학기술이 집약되어 있는 근대 초기 성곽 건축의 백미로 평가 받는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효심과 정치구상의 중심지와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전술적인 면을 고려하여 신도시를 건설한 정조의 대 업적이다.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영의정 체제공이 총괄하고 수원부유수 조심태의 지휘로 축성된 화성은 예술인 김홍도 실학자 정약용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한 대 역사였다. 화성은 축성술과 기능성 과학성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최대의 역작이 수원 화성이다.
화성 성곽을 축조한 후에 한번도 이 성에서 전투를 해 본적이 없는 성이기도 하다.
수원 화성은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결정된 후 1997년 12월 4일 이태리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였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의궤(儀軌)란 조선 시대에 국가의 큰 행사가 있으면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그림과 함께 기록하여 책자로 간행하였는데 이를 의궤라 한다.
왕실의 결혼의례나 회갑연, 장례식은 물론 왕릉의 축조와 궁궐의 신축이나 수리가 있을 때 의궤가 작성된다.
의궤는 지방 서고에 보관하기 위하여 통상 6부나 7부를 만들며 어람용은 별도로 제본이나 장정을 정성껏 만들었다.
화성성역의궤는 정조의 지시로 화성 축조를 시작할 때부터 완공할 때까지 전 공정과 부수과정을 세밀히 기록하여 간행된 책자로, 필사본이 아니라 금속활자로 1801년 간행되어 여러 부가 간행되었다. 화성성역의궤의 전체적인 구성은 권수(卷首) 1권과 본편 6권 부편 3권으로 총 10권 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서는 각 공사일정과 공사에 관여한 감독관의 인적 사항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실명제를 채택하였다. 건축물의 조감도와 건축물의 명칭 건축물의 세부적인 설명이 수록 되였으며 자재 운반용 기구도 도안과 함께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화성성역 의궤에 기록된 거중기의 치수와 설계도로 현세에 거중기의 원 모형을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화성의궤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중요한 건축물의 용어가 정리될 수 있었으며 1975년부터 1979년 까지 부서진 화성을 복원하는데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원상대로 복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세계적으로 보아 고대도 아니고 근대 초기의 성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는 것은 희박한 일이었다.
나머지 9권에는 왕의 명령이나 공사에 관계된 공문서 상량식이나 제반 의식 물자의 종류 지출비용 장인들의 이름 출신지 편수의 작업일수까지 세세히 기록하여 그 분량이 방대하다. 한 건물을 짓는데 못의 수량 단가 규격까지 기록되었으며 장인이 몇 명이 며칠을 일했는지도 알 수 있게 기록하였다. 돌은 어느 지방에서 어떻게 조달하였고 소나 마차는 몇 마리가 어떻게 쓰였는지 솥이나 숟가락 수량은 물론이고 빗자루 수량까지 기술하였으니 후세사람에게 감명을 준다.
연 인원 70여만 명이 동원된 수원 화성을 축성하는데 국민들에게 강제부역을 시키지 않고 노임을 후하게 주었으며 공사내용은 일급으로 하지 않고 도급방식으로 하여 공사가 빨리 완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화성성역의궤는 국립도서관이나 서울대규장각이나 몇 개 대학 도서관에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화성의 건축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화성성역의궤가 2007년 6월 14일 유네스코 제8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결정된 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2007년 7월 1일 공식등재 되여, 화성의 세계문화유산과 동시에 우리나라에 겹경사가 생기게 되였다.
참조 ; 유네스코 세계유산 기록.
화성종합건축보고서 ;화성성역의궤.
조선일보2000 이규태 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