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시절, 미군 PX는 한국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풍요의 대명사였다. 사진은 부산의 미군 주둔지인 하얄리아 부대.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 |
'부대찌개'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다. 속칭 '부대고기'라고 한다. 정확히 말해 미군이 먹다가 버린 각종 햄 소시지 치즈에다 김치를 넣고 찌개를 만들었다. 그것은 외국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다. 미군의 음식물 쓰레기를 재활용한 것에서 출발했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고유의 음식이다.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미군부대는 그야말로 풍요의 섬이었다. 6·25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 갔지만 더 많은 새로운 것도 가지고 왔다. 미군이 들어왔고, 그 부대 주변에는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었다. 미군PX에서 흘러나오는 물품은 담배, 껌에서부터 하다못해 쓰레기까지 모두 돈이 됐다. 없어서 못 팔았다.
당시 국내에선 거의 아무것도 생산되는 게 없었다. 자연스레 PX를 중심으로 서울 회현동, 남대문 시장 근처는 'PX 경기'로 달아올랐다. PX 뒤는 싸구려 먹자골목 이었다. 양공주 양아치 달러아줌마 PX아가씨 지게꾼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돈 셈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거래를 트기도 했다. 모두들 미군이나 미제(美製) 물건에다 밥줄을 걸고 사는 한통속이었다.
늦둥이인 필자는 엄마 젖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도 덩치와 키가 크다. 형들은 늘 말했다. "임마 니는 아 일때 PX에서 나온 우유를 먹고 크게 자란기라! 니가 그걸 먹을 때 우리 집이 우유의 향으로 꽉 찼던기라! 그걸 묵은 니 하고 못 먹은 우리하고 덩치 차이가 얼마나 나노?" 영양실조 상태에서 후각이 예민해지고, 결핍은 그 미제 우유에 대한 굳은 신앙을 키웠다. 미군 PX라는 말만 들어도 모두 사족을 못 썼다. 그것이 바로 서구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일제시대 동경제국대 발굴단이 낙랑고분을 발굴하고 있다. | |
낙랑군의 주민은 주로 산동의 낭야에서 온 중국인이 많았다. 고향에서 올 때 그들의 손에는 산동산 누에가 들려있었다. 그들은 그 벌레를 지금의 남한지역(삼한)과 일본열도에 무상으로 뿌렸고, 누에 치는 기술도 가르쳐 주었다. 남한과 일본열도에서 많은 누에고치가 났고, 비단실과 비단솜 생산으로 이어졌다. 배를 탄 낙랑상인들이 정기적으로 그것을 수집하러 갔기 때문에 생산만 하면 수익이 되었다. 그 생사는 낙랑군의 수공업장에서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낙랑비단'이란 상표를 달고 중원에 비싼 값으로 수출되었다. 비단수출로 거액의 돈을 번 낙랑인들이 생겨났고, 중국 본토에서 사치품을 파는 상인들이 그곳으로 몰려왔다. 낙랑은 중원에서도 최고의 상품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실로 한국 고대인들에게 한군현의 중심지인 낙랑군의 문화적 경제적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낙랑군은 한반도에 중국의 제품을 공급하는 PX 역할을 했다.
낙랑군의 상류층 중국인들은 중국본토의 가구와 장신구 등을 사용하였다. 칠기장 가운데는 멀리 사천성의 국영공장에서 제작한 것도 있었다. 0.5t이 넘는 거대한 목관도 본토에서 실어와 사용한 탓에 폐퇴관리라는 악명까지 듣는 사람도 있었다. 중국의 화려한 비단과 쌀, 밀가루, 식용돼지, 거대한 서역산 군마가 들어왔다. 그들의 생활은 고구려인이나 삼한(三韓, 진한 변한 마한)인들에게 무한한 경이와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낙랑을 통해서 처음으로 금은을 보고 유리구슬을 만져 보았다.
어린 시절 나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부산진구 하얄리아부대에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군속이었던 동네 아저씨의 손을 잡고 그곳을 구경했다. 보이는 차는 모두 커다란 외제차였고, 보이는 사람들도 우리와는 다르게 생긴 키가 큰 사람이었다. 아저씨와 PX 안으로 들어가 큰 박스를 보고는 뭔지 물어봤다.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바로 에어컨이었다. 당시 집 1채 가격이고, 전기가 모자랐던 그 때 우리에게는 무용한 물건이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곳은 맥주 초콜릿 주스 등을 비롯하여 양주 담배 화장품 과자류 그리고 청바지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는 만물상이었다. 아무리 어렸지만 문화적 충격을 받은 터라 기억이 생생하다.
다시 고대로 돌아가자.'삼국지'위서 동이전을 보면 삼한인들이 제멋대로 사절을 자칭하며 낙랑군으로 몰려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명의 맛을 본 사람들은 그것에 취했다. 그들은 낙랑이란 외국시장에 보따리 장수를 하러 왔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오기도 했다. 그러한 사절들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당시 삼한은 100개 정도의 소국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낙랑은 한반도에 많은 선물을 주기도 했다. 보다 발달된 벼 재배 기술, 금은 광산의 개발·제련 기술, 탄탄하고 깔끔한 회도토기 제조 기술이 들어와 생활에 큰 변화를 주었다.
후한 말 황건적의 반란으로 중원이 끝없는 무정부 상태에 들어서자 기존 철 생산이 마비되었다. 위·촉·오의 만성적인 전쟁이 지속되던 삼국 시대가 되자 철의 수요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것은 한반도로 바로 파급되었다. 철산을 찾아 한반도를 다니는 중국인들이 늘어났고, 드디어 김해지방에 철산이 터졌다. 중원의 무한한 철의 수요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철산지로 변모시켰다. 김해에서 대방군과 왜국으로 철이 수출되었고, 철덩어리는 화폐가 되었다. 여기에 낙랑의 채광·제철기술이 크게 기여했다. 한국 고대의 본격적인 철기 사용은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낙랑의 문화는 고구려의 묘제에도 큰 변화를 주었다. 낙랑이 병합된 이후 고구려에 거대한 봉토분이 생기기 시작했고, 무덤의 거대한 방을 벽화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구려 고분벽화가 여기서 탄생했다. 낙랑인들은 단검이 아니라 장검을 사용하였다. 고구려와 삼한인들은 처음에 청동단검을 알고 있었을 뿐 철제 장검은 몰랐다. 단검은 상대방에 가까이 다가가서 찔러야 하지만 장검은 그보다 떨어져서도 큰 상처를 줄 수 있었다. 여기서 전투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 실로 낙랑군은 문화적 경제적으로 막대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고대 한국에 주었다. 금과 철 그리고 쌀의 본격적인 생산은 한국 고대가 실질적인 왕국으로 발전하는 초석이 되었다.
300년대에 들어가면서 중원은 다섯 종족의 북방 유목민들이 세운 16개의 나라가 쉴새없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중원이란 어항에는 먹이사슬이란 생존의 순환 고리가 없었다. 모두 육식성 물고기였기 때문이다. 하나가 살아 남을 때까지 싸웠다. 영원이 빠져나올 수 없는 무간도(無間道)로 보였다. 중원과 교류를 통해 그 명맥을 이어오던 낙랑군 본연의 역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다 발전된 중국의 문화가 들어오지 않았고, 그 와중에 많은 낙랑의 유민들이 고구려 백제 등으로 흡수되었다. 313년 최후의 날이 올 시점에 낙랑군은 전혀 이용가치가 없는 그러한 곳이 되었다. 고구려가 낙랑을 합병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낙랑군은 한반도에서 404년간 존재했다. 만일 그것이 부정적인 역할만 했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존재했을까. 우리의 국사교과서는 낙랑군을 몰아내야할 외세의 식민지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색안경을 끼고 한국 고대사를 볼 때 오는 착시현상이다. 낙랑군을 접수한 고구려인들은 결코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현대인들보다 더욱 현대적인 사람들이었다.
고구려 미천왕 시절 낙랑군은 사라졌지만 많은 중국인들이 남았다. 중국문명을 체화한 그들은 고구려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고구려는 그들을 차별한 흔적이 없으며, 오히려 우대한 느낌이 강하다. 낙랑인들은 고구려의 해외 상업과 외교 나아가 정교한 가공을 필요로 하는 수공업에 종사했다. 세계에 존재하는 벽화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안악 3호분의 벽화의 주인공은 중국인 관리 출신이었으며, 357년에 그것을 그린 사람도 낙랑계 장인이었다.
아직 우리나라 주요도시와 전략거점에는 빠짐없이 미군부대가 있다. 북한이 힘을 잃은 지금 그들의 존재가치는 과거보다 떨어졌다. 보다 정확히 말해 생활수준이 올라간 지금의 우리는 그곳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 있다. 일부에서는 미군의 철수를 부르짖고 있고, 현 대통령도 한때 그러한 암시를 한 적도 있다. 지금 미군은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하고 있다. 병력이 모자라 북극권인 알래스카 주둔 미군도 무더운 사막의 땅으로 보내지고 있는 지경이다. 현재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미군은 언제든지 떠나야 될 형편이다. 물론 한국인이 원한다면 그것은 앞당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미군이 떠난다면 우리에게 오게 될 손해가 너무나 막대하다. 미군의 철수는 국제 신용등급 하락을 가져올 것이 틀림이 없고, 한국의 주가 폭락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다. 우리가 아니라 외국투자가들이 안보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원화의 가치하락으로 이어질 것이고, 힘들게 축적해놓은 우리의 부는 증발해버린다. 여기서 고구려인들의 사례는 오늘날 우리에게 소중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중국 혼란이 장기간 지속되자 비교적 안정된 고구려로의 인구 유입이 늘어났다. 낙랑의 사례를 보고 배운 고구려는 기회만 있으면 중국인들을 유치하려고 애를 썼다. 중국에서 명망이 있는 인사나 관리들이 망명을 하면 어김없이 관직을 주었으며, 그들이 중국 본토와 교류하는 것을 결코 방해하지 않았다. 중국의 명망가들은 대부분 가솔과 아래에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왔고, 고구려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모국의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고구려는 외국인 거류지역인 평양부근의 지방에 더 많은 자유를 준 것이 확실하며, 거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고구려는 고대에 인구 500만 명의 내수시장을 만들어 냈다.
도대체 어떤 외국인이 정부가 간섭하고 개입하는데 그곳에 사업을 하거나 살기 위해 오겠는가. 사실 우리 역사에서도 사업가들을 피곤하게 했던 시대는 조선과 대한민국밖에 없었다.
서영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