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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팔아 작품을 하는 사람인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빨리 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살아있는 예인의 광기가 느끼어 집니다.
그래서 더 강렬했는지는 모릅니다.
그와의 약속 Promise with Him
- 류인 추모전 -
인사아트센터 2F, 2001. 1. 31 - 2. 25
1999년 작고 후 처음으로 열리는 인사아트센터의 류인 추모전은 대형조각가 류인의 작품세계를 사적(史的)으로 재조명함과 동시에 그의
작품세계에 담긴 역동적 생명력의 생동감을 전달하는 전시이다.
류인(柳仁1956-1999)의 인체 조각은 단단한 해부학적 기초에 바탕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작가는 현대 한국 회화에서 거목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부친 편정(片丁) 류경채(柳景埰1920-1995)의 영향아래 견고한 작업의 기반을 닦았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이미 20대 때부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형성하였다.
1. 류인의 작품세계
류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조각적 특성은 조각품의 조각적 볼륨감과
자체의 비례, 구조적 조화, 거기서 나아가 내적 에너지의 표출과 그 생동감이 아우러지는 가운데 나타나는 전체적인 표현성과 그로 인한 긴장감에 있다. 작가는 인체를 대상으로 하되, 인체의 형상을 분절하거나 왜곡하는 등의 해체적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단단한 해부학적 기초를 바탕으로 형성해낸 것이며 강건한 근육과 힘에 바탕을 둔 결과이며, 작품은 완벽에 가까운 균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구상적 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작가는 우선 대략의 작품 구상을 소형의 모형으로 형상화한다(마케팅작업). 그 후 그 모형에 근거한 점토원형을 만들고 그에 기초하여 석고나 합성수지로 작품의 원형을 완성한다(캐스팅작업). 그 후 그 원형에
기초하여 주물공장에서 모래를 이용하여 작품의 형태에 맞는 주형(鑄型 거푸집)을 제작하고 그것에 청동을 부어 응고, 냉각시킴으로써 지금의 브론즈 작이 형성된다. 따라서 작품의 원형은 처음의 점토원형과 석고, 합성수지 원형이 그 기본 형태가 되며 작가의 손길이 살아있는 생생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주물공장을 거친 브론즈완성품은 그 원형의 완전성과 표현성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류인은 작품의 재료로서 점토, 합성수지, 철,
나무, 브론즈 등을 사용하였다. 그는 점토나 석고, 합성수지를 만지면서 그들의 질료적 특질을 살려 근육질의 표현성과 생동하는 세(勢)를
나타낸다. 이는 브론즈의 재료적 특성과 더불어 마치 액션페인팅이나
표현주의적 회화의 화면에서처럼 생동하는 긴장감을 전달하는 결과를 낳는다.
류인이 이러한 작업공정에서 대형이면서도 정교한 조각면을 표현했다는 것은 작가적, 기술적 완성도에 의한 것이며, 그의 작품의 강한 표현성과 생동감, 긴장감은 작가가 단순한 물성을 내는 조각품의 범주를 넘어선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세계를 형성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2. 류인 작품세계의 특성 및 의의
류인의 조각세계는 그를 한국 현대조각사의 큰 획을 긋는 작가로 평가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근대기 조각가 정관(井觀) 김복진(金復鎭1901-1940) 이후의 인체를 중심으로 한 구상 조각의 흐름이 있었으나 현대에 이르면서 재료의 질료적 특성과 형상 자체의 표현성을 강조한 비구상의 분야가 주된 흐름으로 등장하였다. 그 속에서 류인은
구상에 바탕을 둔 표현성 강한 자신만의 작품특성으로 인해 커다란
차별성을 가지면서 이후 조각사에 있어서도 비중있는 작가로 떠올랐다.
작가 류인 작품세계의 특성은 인체를 대상으로 대형 조각세계를 이루어내었다는 점, 완전 추상이나 물질적 차원으로 흐르지 않으면서 강한 표현력을 나타낸다는 점, 재료(주로 브론즈)의 속성을 강한 에너지의 표출로 승화시켰다는 점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류인이 근대기 이후 조각사에 있어 재료의 특성을 살리는 문제, 형상화의 문제, 소재의 문제 등을 일관된 주제의식으로서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류인 작품 특성과 주제의식은 류인을 현대 조각의 소명을 작품을 통해 진지하게 구현해낸 작가임을 확인토록 해주는 토대가 된다. 그는 표현주의 조각가들이 마주쳐야 했던 형상화의 문제를 그의
대형 인체조각을 통해 풀어내었다. 즉, 작가는 기존의 인체조각의 전통적인 표현기법을 뛰어 넘어 독자적 작품세계를 형성한다는 미술가로서의 문제의식과 당대 작가가 처한 사회상황과 시대의 사실상을 작품에 담아낸다는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소명을 작품을 통해 구현해낸
것이다.
따라서 류인은 한국 현대기의 인간고뇌상을 몸소 보여주는 작가이자
그것을 작품을 통해 나타내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류인 작품세계에서 나타나는 이상의 특성은 로댕적인 견고함과 표현성을 담보한 채
거기서 더 나아가 해체, 분열, 극도의 표현성, 강한 에너지의 발현, 물적 세계를 넘어선 정신적 고뇌의 형상화에 기인한다. 이러한 측면은
류인이 단지 물성을 토대로 한 재현성을 넘어선 정신적 세계와의 통합을 이룬 작가이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으로의 진지한 동참과 숙고를 요구하는 현대적 의미의 리얼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와의 약속 Promise with Him
- 류인 추모전-
" 먼저 간 친구 仁이를 생각한다." - 오 상일(조각가·柳仁의 동료)-
사람이 죽고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은 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발버둥치며 사는 것일까? 한번 가면 그뿐인 인생에서 죽는 그 순간까지 버리지 못하고 매달린 것이 그렇게도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일까? 그놈의 조각이 돈 보다, 여자보다, 아내와 자식보다, 더 좋은 것일까? 자식으로서의 도리, 가장으로서의 의무, 선생으로서의 책임도, 그
잘난 조각에 비하면 그저 다 하찮은 것에 불과한 것일까?
仁이가 마지막 가던 길. 북한산 기슭의 선산으로 가는 좁고 가파른 산길을 운구하는 젊은 조소과 후배들은 쌓인 낙엽에 미끄러지며 언 땅에 무릎방아를 찧곤 하였다. "씨발 놈, 땅 속에 들어갈 때까지도 여러
사람 힘들게 하네." 나는 그렇게 저만 알고 살다가 저 혼자 떠나가는
仁이가 실컷 패주고 싶을 만큼 미웠다.
그를 처음 기억하는 것은 1978년의 봄 학기. 소주에 발갛게 익은 얼굴로 조용한 강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귀여운 얼굴의 무법자. 어쩌다
학교에 나타났다가도 중간에 그냥 내빼기가 일수였는데, 교수의 출석호명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천연덕스럽게 '네!'하곤 했다.
그러한 그가 한 과목의 빵구도 없이 사 학년 전과정을 제때에 마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렇게 다닌 학교의 졸업식은 총장님의 치사와 함께 거룩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줄지어
앉아있는 졸업생들 사이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아주머니가 있었고
그 아주머니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몸을 숨기는 仁이가 있었다. 외상 술값 받으러 온 학교 앞의 '계단집' 아줌마와 仁이를
숨겨 주던 졸업생들의 한바탕 숨바꼭질 덕에 그 해의 홍대 졸업식은
더없이 재미있는 졸업식이 되었다. 그의 음주행각 못지 않게 여성편력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줄창 옆구리에 여자를 달고 다녔는데
(아니, 몸집이 작은 그가 여자 옆구리에 붙어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여자 꼬시는 솜씨가 출중했던지 아니면 제임스 딘을
연상시키는 눈빛 때문이었는지 꽤 예쁜 여자들이 많았고 같은 남자로서 그게 부러울 때도 있었다. 한번은 미모와 재능을 갖춘 신출내기 여류조각가가 동료 조각가에게 시집을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仁이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그녀가 다른 남자의 여자 되었음에
몹시 분개했다. 이미 유부남인데다가, 아무런 감정적 교류도 없었으며, 또 그럴만한 정서적 권리도 없는 주제임을 망각하고 있는 그 어처구니없는 노여움과 질투가 나중엔 귀엽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감정은 비단 그녀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자기 눈에 괜찮은 여자에게는 동일한 지배욕이랄까 뭐 그러한 것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 모든 여자를 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사내 치고 세상 여자를 다 자기 것으로 거느리는 황홀한 꿈을 꾸어 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마는, 그러한 욕망은 진시황이나 술탄 같은 하늘이 내린 행운아 이외의 평범한 사내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애초에 잘라 버려야할 불길한 싹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사내들은 무자비한 거세에 대한 순응도에 따라 모범생과 문제아로 분류되기 시작했는데, 그러한 관점에서라면 위선적 모범생과 솔직한 문제아는 거세에 대한 대처 방법의 차이일 뿐, 그것으로 진정한 도덕적 우열을 가름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의 仁이는 자신을 분명하게 후자에다 편입시킨 용기 있는 자였다고 한다면
억설이 될 것인가?
정말 그랬다. 약속 시간 제대로 지키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작품 재료를 훔치지 않고 돈주고 사오는 것을 자존심 상해했으며,
여자에게서 술 얻어먹던 그 자리에서 느닷없이 그녀의 귀싸대기 때리는 걸 무슨 대단한 터프가이쯤 되는 것으로 알았던 仁이. 그러한 자기학대와 반항으로 일관하던 모습을 보면서 지금은 종법(宗法)스님이
된 성률이 이외에 그의 미래를 낙관하는 클래스메이트는 아무도 없었다. 훗날 대학에 강의를 나갈 때도 제 작품 바쁘다는 핑계로 결강을 밥먹듯 했고, 同人모임에는 항상 결석이요, 회비 한 번 제 때에 낸 적이
없었다. 공모전에 출품할 때에는 항상 마감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미리 자리를 잡아 놓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는, 못 다한 칼라링을 한다 미진한 부분에 수정을 가한다 법석을
떨다가 종내는 옆 사람의 작품에 물감을 묻히고야 마는 둥. 그에게는
한때 '공모전의 공해' 라는 닉네임이 붙어 다닌 적도 있었다.
仁이와 함께 목원대학으로 강의를 나가던 때 학교 앞 책방에서 당시
회자되던 A·토플러의 {제3의 물결} 두 권을 사서 하나씩 나누어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 仁이는 정색으로 책 사는 돈을 아까워하면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나를 나무랐고 나는 조각가로서의 필수적 교양
운운하면서 그의 가방에 책을 쑤셔 넣고야 말았다. 당시의 나로서는
유명한 문필가인 어머니 영향 하에서 성장한 그가 그러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두고두고 이해할 수 없었다. 여하튼 그의 반항과 고집은
나이가 들어서도 수그러들지를 않고 오히려 그 단수가 높아져 갔다.
작품 제작상의 문제로 조언을 부탁해 놓고는 의견을 피력한 사람이
무색하게도 결국은 꼭 반대로 만들곤 하였다. 언젠가는 윤영자 선생이 정년퇴임을 하면서 석주미술상을 제정하셨다. 내노라하는 인사들이 참석한 리셉션에서 선생님에 대한 치하와 정신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공부장관의 연설이 한창이었는데, 仁이는 원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벌써부터 먹고 마시고, 무어라고 떠들면서, 맨손으로 집어든
음식을 연신 나에게 권하기도 하면서... 그때 장관은 굳은 얼굴로 우리
쪽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연설을 계속하였고, 仁이는 아랑곳없이 먹기를 계속하였고, 나는 그저 안절부절 하기를 계속하였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예절이나 매너, 지식과 교양, 도덕적 책무, 그 모든
것이 한낱 무용지물, 핵심없는 껍데기였다. 그러한 仁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적 미숙아임이 분명한데, 어쨌든 나는 누구에게 굽실거리거나, 아부하거나, 거짓을 말하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오히려 아래위 볼 것 없이 자기생각을 내뱉고 때로는 신랄한 비판도 서슴치 않던 그를 볼 때, 눈치보며 말을 아끼는 내 자신이 사실은 비굴하고 용기
없는 놈이라는 자괴감이 들 때도 종종 있었다. 작품 열심히 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였고, 한번 작업에 몰입하기 시작하면 그 작품이
마음에 들 때까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거기에 매달렸다. 그리고 병원에 실려가기를 반복. 심지어 다른 환자들의 눈치와 의사의 경고를 무릎 쓰고 입원실에서까지 작업을 끌고 들어가던 진짜로 미친놈. 그가
연애할 때는 아무리 짧게 끝난 사이라 해도 내가 아는 한은 절대 거짓으로 사랑을 얘기하지 않았다. 무엇을 한번 가르쳐 주면 상대가 완전히 이해했다고 판단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해주었고. 결강은
잦았지만 한번 수업에 들어가면 성심껏, 때로는 수업종료를 훨씬 넘긴 시간까지 학생을 지도해 줄만큼 정이 깊었다. 자기가 좋아한 사람에게는 항상 진실하고 의리를 지켰다. 그렇다. 그때 宗法이 말대로 仁이는 실로 엄청난 에너지를 그 작고도 수척한 몸 속에 감추고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에너지를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소진하고 간
것이다. 굵고 짧게 사는 인생이 내 어릴 적 소망이었는데, 그래서 정말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었는데 말이다...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한 남자에게만 정절을 바친 여인을 흔히들 열녀라고 한다. 조각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았던 외곬수, 죽는 날까지 희윤이와 인혜氏 보다는 작업을 걱정하던 그에게서
광적 집착의 표본을 본다. 그것은 열녀를 지향하던 조선 여인들의 집단 편집증이나 종교예식에서의 엑스타시와 같이 완전한 믿음에서 나오는 에너지인 것이다. 仁이는 자기의 신념에 충일한 삶을 살았다. 결국 천재는 달리 천재가 아니다. 하나의 가치를 위해서 자기의 전존재를 완전연소 시킬 수 있는 맹목적이고도 철저한 헌신! 대상과 자기와의 완전한 합일! 그것은 윤리적 척도나, 공리적 가치 따위를 이미 뛰어넘어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仁이는 한국 현대조각의 작은 거인이었으며, 나는 격정의 한 시기를
그와 함께 살아낸 동료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싶다.
2001년 1월
예술의 자유를 위한 통과의례 존재적 절망·고독
조은정(미술평론가, 한남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
조각사를 일별하는 과정에서 존재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로댕적 인간상을 지나칠 수 없다. 서구 조각의 유입이라는 문화적 충격이 외세가
지배한 시대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분출하는 인간성의 표상으로 보이는 로댕의 인체가 들어선 그 길목에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자각과 자유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었음을 확인하도록 해 준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 서구적인 조형어법으로서의 인체는 존재의 각성과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민족적 자각을 수반한 역사적 인식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Ⅰ. 조각가의 손
사실 아주 구체적 존재인 인간의 모습에 추상적 개념을 투영한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 이미 물질적 존재를 넘어선 존재임을 과시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개인적 존재의 자각을 넘어 역사 속에 투영된 인간상을 포착하기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어서, 길 가운데 선 의젓한 모습의 애국선열의 동상을 보고도 그 억지스러움에 피식 웃음을 머금기도
한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존재를 한낱 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하는가 하면, 소박한 옷을 입은 고요한 여인의 모습에 감동되어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기도하게끔 하는 조각가의 손은
신의 손에 버금갈 만하다. 손을 그린 그림보다는 손의 형태를 띤 조각이 더 많이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각가들은 손에 대한
자각의 문(門)을 통해 세상을 향해 작품을 내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손에 대한 상념, 특히 조각가에게 있어 손에 대한 가치를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그래서 철학적 의미를 곱씹게 하는 조각으로 나의 기억 속에 뚜렷이 자리잡은 작품 가운데는 류인의 <파란(破卵)Ⅱ>가 있다. 젊은 남자의 머리와 젖가슴의 윗 부분 그리고 한쪽 팔로만 이루어진 이
작품은 '조각가가 세상을 사는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동시에 지구라는 알이 깨지는 아픔을 겪고 난 뒤에 자신의 내부에서 또 다른 존재의
모습을 발견하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 『데미안』의 화자(話者) 징클레르의 모습으로도 보이는 것이었다. 육체적 젊음의 상태에서 정신적
성숙을 이룩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1956년 생인 류인은 2001년 현재 마흔 다섯 살이 아닌 마흔 세 살인데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마흔 셋일,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신이 하사한 시간(時間)이라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적용되기도 하는 것을 종종 경험케 되는데
조각가 류인도 바로 그러한 경우로 보인다. 흔히 물리적 나이보다 더디 가는 것이 미술가의 길이지만-사회에서 일컫는 청년이라는 때가
넘어 장년이라 해야 할 법한 나이도 미술가의 경우는 여전히 청년작가이다-그의 나이 서른에 이미 조각가로서 양명(揚名)의 길에 들어서
있음을 그의 작품은 증명하고 있다. 거기서 로댕적 인체의 오만함을
극복하고 헤세적 사유를 넘어서 자신의 세계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는 손의 주인공인 조각가 자신으로 보이는 인체가 역사의 주체자로서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음을 본다. 사실 증언자나 관찰자로서가 아닌,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자전적 모습을 전시장에 디밀어 놓는 조각가의 독선에 관객이 굳이 말려들어갈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 지극히 개인적인 모습에 눈길을 주고, 작품이 주는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을 경험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타자화시켜 역사적 존재로 나타낸 인체가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류인에게 있어 형상적 인체는, 최초에는 자신의 육체적 분신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업의 특성상 조각가가 육체의 모든
에너지와 정신의 집중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형태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자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사지(四肢)이며 손(手)의 힘이다. <조각가의 혼>(1986)은 자신의 육체를 통한 사회적 인식을 독백적으로 나타내는 작품이다. 마치 육상선수가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잔뜩 긴장한 채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는 순간, 전장터를 향해 무심한 마음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병사의 두 다리처럼 이 작가가 세상을 향해 존재하는 방식은 바로 손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윤(尹)의 변>(1988)은 직육면체의 구조물 위쪽 사각의 나무틀 안에 갇힌 인체가 엉덩이 아래 하체만 위로 삐져나와 공중에 떠 있는 작품이다. 허우적대는 두 다리와 형태적으로는 아주 상반되게 두 팔로 이 직육면체형의 대좌를 꽉 눌러 몸 전체를 받치고 있다.
사과궤짝 또는 어려서 무겁게만 느껴지던 초등학교의 의자와 같은 나무 구조물은 육체의 브론즈적 질감과 대비에 의해 물성이 강조되는데, 옭죄인 틀 속에서 세상을 딛고 선 손의 모습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더욱이 울퉁불퉁한 마디에 둥글고 뭉툭하며 납작해진 손가락 끝이 작업에 혹사당한 조각가 윤씨의 것임을 확인한 순간, 아무리 처세에 능수능란하며 달변이어도 이 세상을 받치는 조각가의 유일한 힘은
손뿐임을 이 눌변의 작가가 웅변적으로 나타낸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결국 세상을 향한 창구로서, 조각가가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유일한 방식은 손을 통하여서라는 인식은 이 작가 류인이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라는 무거운 등짐을 언뜻 비쳐보이는 것이다.
Ⅱ. 존재에 대한 확인, 자전적 인체
사회 구성원으로서 조각가라는 자의식이 드러나는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이 작가의 사회에 대한 존재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인간이라는 형태가 절단과 뒤틀림에 의해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파생된 미학적 비장함에 의해 야기된 강력한 에너지를 통해 관객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단면을 읽게 된다. 그래서 전에 없이 강한 남성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류인의 작품 세계는 민중미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용되고 또 다양한 이해의 준거틀 아래
해석되어져 왔다. 류인은 예술가 집안에서 예술적 감수성 아래 성장하였으며, 상복(賞福) 또한 많은 작가로서, 젊은 작가들이 아주 좋아하는 국내 작가 가운데 하나이자, 그 재능을 다 나타내지 못하고 일찍이
세상을 뜬 작가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점을 모두 접고 객관적으로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는 한국조각사에서 분명 중요 영역을 차지할 이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주관적 감정이입을 떠나, 분석할 수 있는 조각의 진실을 찾고자 함이다.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부터 아주 열심히 작업을 했다는 미망인 이인혜
씨의 증언에 부합하듯 그의 작품은 1981년도의 자소상 한 점을 제외하면 현재 대학원 입학년인 1983년 작부터 확인할 수 있다. 초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작품들은 아주 충실한 구상적 인체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류인 조각의 특성인 파토스적 상황의 일부인 강력한 힘의
표현은 이미 이 때부터 나타난다. 거의 동시에 제작된 1985년의 전신상인 두 작품 <묵시(默示)>와 <입허(立虛)>를 놓고 보자. 여자 입상인
<묵시>는 굳게 다문 입술과 깊은 시선, 당당한 어깨, 강하게 드러난 두
다리에 의해 중성적 이미지를 주는 작품으로, 섬세한 여성 입상에서
느낄 수 없는 인간적 고뇌, 비판적 사회의 단면을 투사해볼 수 있다.
남성 입상인 <입허>는 허공을 향한 응시, 앙상한 갈비뼈, 호리호리한
몸매에 이등변 삼각형처럼 벌리어 선 두 다리와 나무토막 위에 선 긴장한 두 발 등이 <묵시>의 당당한 여성상과 상반된 면을 보이는 작품이다. 이 두 작품만을 통해서도 제목에서 드러나는 사회에의 대응(묵시)과 자신의 모습(입허)이라는 의식의 세계를 읽어낼 수 있거니와 예술가가 흔히 빠지기 쉬운 나르시시즘에서 멀리에 자리한 작가의 겸양(謙讓)을 본다.
물론 우리나라 형상미술에 나타난 인체는 소외의식과 나르시시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형상미술의 작가군에 속하는 류인의 작품을 말함에 있어 나르시시즘을 부정하는 것은 어불성설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자신을 주제로 한다고 해서, 또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체를 열심히 생각한다고 해서 나르시스트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 본래의 모습에 대한 탐구를 '소외'라는 언어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추상적 경향에 전도되지 않고, 자신의 세계라 생각하는 인체에 천착(穿鑿)한 이 작가의 작품제작 기간은 사망에 이르기 전, 병으로 인해 작업에 충실하지 못했던
시간을 제외하면 10여 년 정도이다. 따라서 평생이라 해도 그리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게·자주·여럿보다는 크게·대규모로 만들려했던 작가의 의도 덕분에 대다수의 작품이 차지하는 의미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사실
생전의 인터뷰 기사 대부분은 '작품에 비해 아주 왜소한' 작가의 신체적 조건에서 시작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무엇보다 작품의 스케일에 압도되었음이 확실하다.
작가로서 오랜 시간을 산 것이 아니어서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다채로운 인간상을 통해 그는 많은 이들에게 감흥과 영향을
주었으며 기념비적 작품을 남긴 작가로 평가된다. 비록 수가 많지는
않지만 당연히 시도되어 마땅한 작품의 변화과정을 도해한다면 대략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준거점은 작품세계의 변화양상이 되겠지만 생전에 가졌던 네 차례의 개인전도 인체라는 일관된 작품의 양상 아래 작은 변화를 정리하여 볼 수 있는 적절한 분기점 노릇을 한다.
첫 개인전으로 자신의 세계를 열기 시작했던 1987년도의 전시, 주변의 화제를 모으며 역량을 펼치기 시작한 1991년 문예진흥원에서 2회의 개인전, 1994년의 뉴욕에서의 전시, 1996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에서 우수창작상을 받아 초대전을 가지며 역사적인 해석의 작품으로
이해되던 4회이자 마지막이었던 개인전이 그것이다. 현재 지면이나
도록, 실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대개의 작품에는 인체를 바탕으로
당시의 관심 영역에 따라 표현 방식이나 제작 방식이 다르게 적용되었다. 사실 사회에 대한 관심은 그의 인간에 대한 관심과도 연계되며,
표출된 형상보다는 복잡한 구조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이해의 근거는 그가 작품을 제작할 때 어떤 생각에서 출발하느냐는 학생의 질문에 "화장실에서 신문을 보다가 관심이 있는 문자를 오려서 이를 조합한다"라는 답변에 있다. 아무리 무심한 상태에서 시작했다하더라도 신문의 사회면은 인간의 문제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매체라는
점에서, 또 언어를 분절시켜 얻는 이미지의 파편화는 그가 작품을 구조적으로, 언어분석적인 관점에서 시작한다는 측면에서 아주 흥미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1995년도의 학생들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과 달리 10년 전인 1980년대 중반의 그는 아주 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 <밤의 혼>(1986)은 공간에 부유하는 인간상으로
사지는 축 늘어져 보이지만 두 손은 마치 애타게 절규(絶叫)하고 있다.
꿈의 망령에 시달려 밤새 쏘다니는 몽유병적 상태도, 환상이나 불면의 밤도 아니지만 고통으로 가득함이 분명한 이 작품은 분명 이 작가가 겪었어야 할 밤의 모습인 것이다. 힘으로 가득한 조각의 창조자가
밤이면 밀려오는 육체적 고통에 맞서야 하는 힘겨운 삶의 연속선상에
있었던 것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앓았다기에는 너무나 많은 질병의 이름을 진료기록서에 담은 채, 뼈마디가 쑤시는 밤을 끙끙대며 버틴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문을 나서야 했던 낮은
얼마나 많았던가. <밤의 혼>은 그래서 로댕의 지옥문이 주는 시(詩)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그 낭만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고통으로 부유하는 밤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실 그의 자전적 인체는 고통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는데 1989년 작
<정전>과 <숨소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퓨즈가 나가면 한순간에 꺼져버리는 전기체처럼, 정전이라는 상황에서는 모든 움직임 정지하는 도시와 같은 존재인 인간이 마치 제사상의 제물처럼 그 목을 내놓고 있음에도, <숨소리>에 보이는 두상을 에워싼 가시덤불처럼 세상은 녹녹한 것이 아니다. 육체가 건강한 이에게는 사회적 구속으로 보일 한계적 상황의 인간 모습도 이 작가의 경우, 가볍게 숨쉬는 것조차
폐부를 찌르는 고통을 동반하는 상황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환원되는 존재에 대한 확인임을 인지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조각이 전하는 진실은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어서 사적인 체험이 인간보편성에
대한 확장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나고 있음 또한 알 수 있다. <숨소리Ⅱ>에서 마치 고개를 쳐든 독사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신체는 끈끈한 생명력, 피할 수 없는 본능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개인적 경험의 표출이자 문화에 각인된 원죄의식의 표상이기도 한 것이다.
Ⅲ. 알을 깨고 길을 묻다
청년적 순수를 담은 <파란(破卵)>이란 제목의 일련의 작품은 인체의
몸통을 기초로 하여 존재에 대한 확인을 모색하는 작품의 모체로 보인다. 직육면체의 틀을 깨고 불끈 솟아나는 남성 토르소는 허벅지 아래와 머리부분은 사각의 물체 그대로인 상태로 꿈틀대는 자아에 대한
성찰로 이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각의 기둥에서 온전히 드러난 상반신을 나타낸 <지각의 주>, 사각의 물체 속에 갇혀있는 인물의 머리와 두 팔만 표현된 <입산(入山)>은 같은 유형으로 보인다. 도(道)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을 떠올리게 하는 <입산>이란 제목은 자연목에 걸터앉아 한쪽 다리를 내려뜨린 다리로만 이루어진 작품에서도 표제로
나타난다. 비스듬히 누워 한 손은 허공을 향해 무엇인가를 움켜쥐려
하고 한 손은 가슴에 댄 채 얼굴에는 찌그러진 모자 내지는 그릇을 덮어쓴 것 같은 인물의 상반신을 표현한 작품은 <입산>의 상대어라 할 <하산(下山)>이란 표제를 달고 있다. 이러한 확대된 의식의 전개는 <아들의 하늘>에서는 알껍질을 깨고 나온 아버지와 다시 아버지라는 알껍질을 뚫고 나온 어린아이의 이층구조를 보이는데 이 작품은 <파란(破卵)>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는 동시에 무성생식과는 다른 유전적
성질의 사회적 부활로도 이해된다.
존재를 찾아 떠나는 정신적 여행은 알을 깨거나(破卵), 산에 들거나(入山) 내려오거나(下山)에 상관없이 여전히 공간에 긴장감을 동반한 '던져지는' 상태로 나타난다.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 형상으로 풀어나가는 이 일련의 작업은 "그 해석 자체가 표현의 방향을 설정해주고 이
표현을 위해서는 나의 손때가 묻어야 한다"고 한 작가의 말처럼 아주
정직해 보인다. 심리적 갈등과 존재적 불안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동시에 긍정하는 현실성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들 작품이 구축적이며 공간을 흡수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늘상 작품이란 보는 사람과 함께 숨을 쉬어야 한다고 주장한 작가의 말처럼 여백을 자신의 작품 안에 끌어안음으로써 호흡의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고로 앞서의 <입허> 또한 철저히 같은 맥락에 놓여 있는 작업임을 알겠다.
물리적 공간(空間)과 정신적 지각(知覺)이라는 현학적 인식을 조형성과 줄거리로 분석해가는 류인의 작업은 철두철미 사변적이며,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클론적 진화를 거듭한다. 예를 들어 신체의 일부가 사각에 갇혀 있으며 9개의 인체로 이루어진 <급행열차>를 구성하는 <윤의 변>의 인체는 얼굴을 사각에 묻고 있으나 하체는 <입허>의 이등변삼각형의 그것과 아주 닮아 있다. 일련의 의식적 선택에 의한 조합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정전Ⅱ> 또한 <급행열차>의 한 부분이 된다. 이것은 언어의 코드화와 같은 구조인데 모르스 부호로 수많은 의미를 조합할 수 있는 것처럼 조각에서 인체의 일부를 코드화함으로써
내용의 변주를 꾀하는 아주 조직적인 작업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변적인 방식은 드로잉에서 마무리까지 전체 작업을 통괄하여 혼자 작업할 수 없었던 쇠약한 조각가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이기도
하며, 독서를 통한 깊은 사유가 생활화된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드러내는 면모이기도 하다. 관자(觀者)에게는 격한 감정의 폭발로 보여지는 장면도 조절되고 의식화된 정서의 표현이며 의미있는 소수의 집합
결과인 것이다. 몇 소절만 들어도 모짜르트와 바하를 구분하는 예민한 청각을 지닌 청중은 몇 개의 손마디와 공간의 실루엣만 보아도 "류인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관람객이기도 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결과이다. 동시에 이미 류인이 작가적 양식을 획득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신의 조형언어를 찾던 노력은 이러한 코드화를 터득한 후 확대되어
역동적인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이는데 <동방의 공기>, <망각의 그늘> 등이 엄청나게 확대된 공간을 잡아먹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Ⅳ.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체
미술에서 인체가 갖는 의미는 완벽한 미의 재현, 창조주 모습의 축소판으로서 인간 형태에 대한 자각 그리고 나아가 만물의 척도라는 존재로서의 자긍심으로 축약될 수 있다. 고대 지모신상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여체는 미의 이상이었다. 그런데 류인의 작업에서는 초기의
몇 점과 남성과 한 조가 된 <뇌성>, <하나 비(碑)> 정도를 제외하고는
의심할 바 없는 남성의 모습만이 표현 대상이 되고 있다. 작가는 엄청난 힘을 표현하기 위해 여성보다는 남성을 선택했다고 말했지만, <이중성>이나 <사인(思人)>에서 나타나는 내면에의 표상이 남자의 모습에 한정되는 것은 작가의 자의식이 그의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에너지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자신의 존재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 작품을 생산하는 원동력이기에 그것이 어떠한 성(性)이건 관계없이, 원형으로서의 남성(MAN)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관심은 타자화된 역사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나타나는데, 요리를 연상시키는 일련의 작품들인 <절대자-인간한계>, <푸짐한 식사>, <그 숨소리> 등은 역사에 바쳐진 세례 요한의 머리와도 같아 보인다. 2회 개인전에 출품된 <흙-난지도>와 <바다-침묵>은 설치의 힘을 빌어 사회학적 맥락에서 확대된 역사인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자신이 처한 사회, 그 구조의 부조리한 상황은
<살해동기>나 전쟁의 상황을 드러내는 <동방의 공기>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황색음-묻혔던 숲>은 내게 생떽쥐베리의 {성채}의 한
구절을 상기시켰던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현재를 사유하는 것을 단순한 일로 생각지는 말라. 왜냐하면
네가 사용해야 하는 물체 자체까지도 네게 저항하고 미래에 대한 너의 계획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라붙은 우물 근처의 모래 위에서 잠들어 꿈속을 행진하는 사람은 벌써 태양에
의해 증발해 버린 것과 같다."
우물, 증발, 계획 등의 언어에서도 그렇지만 저항하는 물체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역사 앞에 선 인간의 왜소함, 증발하는 인간 등의 모티프가 연관성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현실을 재생산하는 수단으로써, 단지 미적 가치만을 지닌 인체가 아닌 작가의 삶 속에서 투영되고,
자신의 조형언어로써 선택되어진 인체는 이미 작품이라는 물질성을
넘어 정신적 차원에서 관객(觀客)과 만나게 된다"는 작가의 글에서처럼 인체를 통해 구현된 형상성이 무형의 내용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 앞에 의연히 대처하는 인간의 유형은 <부활-조용한 새벽>, <그와의 약속>, <황색해류Ⅱ>에서처럼 영화 속의 영웅적인 모습일 수도 있고, <망각의 그늘>이나 <황색음-몽골리안>, <부활-그 정서적 자질>에서처럼 절망적 상태의 패배적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아주 상반된 모습이지만, 이들은 결국 역사 앞에 선 인간의
양면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병사(兵士)를 상기하도록
하는 <황토현서곡>이나 <부활-궤도수정>, <부활-평화군단>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이 모든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의 바탕에는 만화적 상상력이 자리하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비닐로 만들어진 치렁치렁한 머리털이 그로테스크함을 강조하지만, 병사들의 중심부에 의연히 자리잡은 무쇠 솥의 형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방패라든가 마늘을 넣고 콩콩 찧기 딱 맞은 쇠절구를 투구랍시고 쓴 병사의 몸체가 부엌에서 쇠그릇을 북북 닦을 때 사용하는 밤 솔로 만들어졌다는 것 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웃음이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었을,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 작가가 지닌 유쾌한 정서의 일부가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에 얽매여 그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게 만드는 상황에 일말의 자유라는 빛을 던져주는 것이다.
Ⅴ. 예술의 자유에 이르기 위한 통과의례
존재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사색해온 밀란 쿤데라에 의하면 체코어로 표현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문장은 "나는 너에 대한 '향수(鄕愁)'를 갖고 있다"라고 한다. 류인은 "어린 시절 굴속, 헛간, 화장실에서 묘한 향수를 느꼈던 생각이 난다. 이 무렵 나의 감정적 표현을 어색해하던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잘 부르는 노래 한번 못했던 내가 이제야 작업을 통해 이야기하게
된 것 같다"라고 했었다. 세상을 향한 대화의 매개체로서 조각의 진실을 찾아냈던 한 조각가에게, 어린 시절의 비밀스런 장소에 대한 향수를 지닌 한 조각가에게 우리는 향수를 지니고 있다. 예술적 천재들에
대해서 우리는 모두 그들의 비범함에 대하여 또 남다른 인생의 역정이 야릇한 신화를 생성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요절한 작가인 탓에 그가 남들만큼 더 살았더라면 완벽한 작품이 생성되었을
것이라는 환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류인은 우리 주변을 서성이는
작가였고 그가 말하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느끼는 그것이었기에 신화
속 존재라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나의 모든 작품들이 대지에 편히
놓여지기를 원치 않으며 계획된 긴장감으로 인해 그 공기 속에 항상
살아 숨쉬기를 원한다. 그러나 결국 작품의 해석은 관객에게 강요치
않고 그들의 상상력에 던져주어 여운을 남겨주고, 사고를 일깨워 주는 것이 큰 의미이며 그것이 작품의 격을 더해 준다. '진실은 또 다른
희생을 원한다'를 되새기며" 라는 작가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여 그를
더욱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범인(凡人)에게 미를 선사한 저 지고한 존재로 여길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지독할 정도의 고통과 고독이 관객의 심연에 자리한 인간적 고뇌를 자극하고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슬픔을 당연시 여기게 만드는데, 그것은 절망의 몸짓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키에르 케고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병, 죽음보다도 치명적인 병을 절망이라 했다. 류인의 마지막 작품에 해당되는 작품인, 1996년도
개인전에 출품되었던 <황색해류Ⅱ>는 처절한 절망적 상황을 나타낸다. 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결코 완성되지 않을 이 작품은 그의 작업실
천장에 매달린 나무와 결합된 인간의 형체와 동격을 이룬다. 이들 작품을 이루는 사슬과 뒤틀린 나무, 절규하는 파편화된 인체는 절망 그
자체라고밖에는 다른 수사적 언어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절망은
'예술의 자유'를 희구하던 조각가가 치달았던 10여 년의 여정을 통해
구체화된 자기의식의 에센스이다. 절망은 존재적 고독에 시달린 모든
예술가들이 겪었던 길이며 그곳에서 발현된 예술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통과의례인 것이다. 우리는 류인이라는 작가가 물질성을 넘어선
정신적 차원의 인체를 구현하고자 했고 그것이 이루어졌음을 이미 확인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면모가 오늘날 수많은 젊은 조각가의
가슴을 뛰게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오래 살아야만
이름이나 업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산
예술가의 작품도 한낱 부평초같은 우리 인생보다는 오래 갈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류인이라는 작가가 상대적 수명의 잣대에 의해 '요절'이라는 사회적 언어의 안경을 통해 갑자기 제초제를 만난 식물처럼 보여져서는 아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식물은 봄에 싹을
뿌려 뜨거운 태양 빛이 채 가시기 전에 잘 익은 열매를 제공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 줄기에 불과한 야리야리한 옥수수는 태풍에도 결코
뿌리가 뽑히는 일 없이 수많은 알갱이를 가을이 오기 전에 뿜어내고
있지 않은가. 더 많이 이루었을 지도 모를 가능성에 대한 확신에 밀려
비교적 젊은 나이라 할, 인간의 평균수명에 못 미치는 나이에 세상을
뜬 작가들의 세계를 미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혹시 산 자의 교만(驕慢)은 아닐까.
철학적 한계상황은 득도(得道)로 연결된다고 알고 있다. 육체적 고통을 딛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하여 스스로의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히말라야의 요기(Yogi)처럼, 육체적 고통을 인내하며 작품에 몰두한 류인의 세계에서 존재의 절망적 상태의 치유방안을 찾아내기 이전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형상성을 잃어버리고 공허한 두뇌 놀음에 안주할 뻔한 한국 조각의 과거 한 지점에서, 류인은 구체적 형상이
주는 기쁨을 용기있게 고백하고 과감한 변용의 묘를 발휘함으로써 구조주의적 이해의 코드를 제공한 조각가로서 한국조각사에 새겨져야
할 작가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