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암면 유래
주암면은 순천의 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는 마름모 꼴을 하고 있다.
광주로부터 남동쪽으로 50Km, 순천 시내로부터는 서북쪽으로 약 30Km지점에 있으며 서쪽에 밤실산(598m), 서남쪽에 모후산(918m), 동남쪽에 조계산(884m)과 오성산(608m), 동쪽에 유치산(530m), 북쪽에 한동산 (648m)이 병풍 처럼 둘러 있다.
인구는 2004년 12월말 현재 2,069세대에 4,864명이며 남자가 2,442명, 여자가 2,422명이다. 면적은 93.79㎢로 순천시 전체면적의 10.3%를 점하고 있다.
주암면은 고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 둔지현에 속하였다.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는 가음현이라 불리운적이 있었고 경덕왕 16년(757년)에는 부유현이라 칭하여 동복현, 구례현과 함께 곡성군 영역에 속해있다가 995년인 고려 제6대 성종14 년에 승주군으로 예속되었다. 고려 제10대 정종 2년(1036년)에는 승평군 주암면(舟岩面)으로 불리워지다 1309년인 충선왕 원년에 승평목 주암면이라 하였다.
조선조 제26대 고종 32년(1895년) 5월에 전국을 23부로 개편당시 순천군 주암면, 조선 제27대 순종 2년(1908년) 주암면(住岩面)으로 개칭하였다. 1910년 융희 4년에는 곡성군 석곡면 영귀와 마전이 주암면으로 편입되었고 1949년 8월 15일 순천읍이 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승주군 주암면으로 되었다. 1983년 2월 15일에는 곡성군 석곡면 운룡리가 주암면에 편입되었고, 95년 1월 1일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 새로운 순천시 주암면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법정리는 20개로서 행정, 갈마, 주암, 오산, 창촌, 복다, 문길, 요곡, 구산, 죽림, 고산, 대광, 광천, 비룡, 운룡, 한곡,어왕,백록,대구,궁각이다. 행정리는 35개,자연마을 64개에 이른다. 주암면에는 지난 1983년 3월에 착공하여 1992년 12월에 준공을 본 주암본댐이 대광리에 있어 전남 동부지역 뿐만아니라 광주권까지 생활용수를 공급해주고 있다.
이 주암댐은 높이 58m, 길이 330m이며 총 저수량은 4억5천7백만㎥, 유역면적은 1,010 ㎢에 달한다. 이 주암댐에서는 폭 4.5m, 길이 11.5Km의 도수터널을 통해 상사호로 용수를 공급하며 연간 2만2천5백Kw의 전력을 생산한다.
면의 중심부로 호남고속도로 12Km가 관통하고 있으며 국도 22호선과 27호선이 교차하고 있다. 관내에는 주암종합고등학교를 비롯하여 주암중학교, 창촌초등학교, 주암초등학교가 있으며 주암농협, 오성농협, 우체국, 경찰지구대, 수자원주암댐관리소, 주암변전소, 수도사무소, 주암 농공단지가 소재해있다.
주암면의 문화재로는 구산 용수제(지방무형문화재 제32호)성황신 김총영정(지방민속자료 제27호), 조순탁가옥(지방민속자료 제 30호), 정헌재(지방민속자료 제31호), 상호정(문화재자료 제49호), 석등(문화재자료 제50 호), 석불입상(문화재자료 제51호), 승주향약재(문화재자료 제90호), 조승훈 가옥(문화재 자료 제178호)이있으며 숙종 32년(1706)에 창건하여 6臣을 제향하고 있는 겸천서원 등이있다.
- 접치
해발 210m 1630년경 전주이씨 이조화공이 선산을 수호가기 위해 살았다고 하나 그 이 전부터 함씨들이 살았다고 구전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학동이라 부르다 1914년 접치로 개칭되었다.
- 행정
해발 165m 1480년경 목천장씨와 강능함씨가 처음 자리를 잡았다고 하며 중간에 김해김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은행나무 정자가 있어 은행정. 오능정. 행정으로 불리우다 1914년 행정으로 개칭되었다.
- 갈마
해발 122m 1300년경 영월엄씨. 김해김씨. 밀양박씨의 3성이 모여 형성하였다 하며,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하여 갈촌이라 불리우다 1914년 갈마라 개칭하였다.
- 감성
해발 120m 1500년경 인동장씨. 하동정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하며, 마을 형성 당시 양성씨의 꿈에 하늘에서 길성이 뻗쳤다 하여 갑숭골로 불러오다 중간에 감성마을로 개칭되었다.
- 동촌
해발 120m 1600년경 광산김씨 3형제가 지금의 천평마을에서 수해를 만나 터를 잡고 이주하였다 하며 타마을에서 보아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촌이라 불렀다.
- 주암
해발 140-150m 500여년 훨씬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처음터를 잡은 사람은 옥천 조씨 부정공 조유의 후예라고만 전해진다. 1914년 주암리로 개칭되었다.
- 오산
해발 120m 고려 명종 29년 1197년 보조국사가 잡은 터 라하며, 마을모양이 자라처럼 생겻다하여 자라오자 오산이라 불리우다 1914년 오산리로 개칭되었다.
- 용지
해발 95m 1180년경 생겼다고 전해오나 1750년경 이천서씨가 정착하였으며 그후 제주양씨 옥천조씨가 들어왔다. 1914년 용지, 임촌, 용곡 3개 마을을 병합하여 용지마을로 개칭 되었다.
- 창촌
해발 90m 757년 경덕와 16년에 부유현, 995년 승평군 부유현, 1036년 승평군 주암면으로 고쳐졌으며 구한말까지 현이나 면의 소재지 였다. 창마을 창몰이라 불리워졌으나 1914년 개칭되었다.
- 천평
해발 90m 마을 형성시기는 757년 부유현때부터 이며 1200년경 보조국사가 마을 샘터를 잡어주었다 하여 샘바대라 불리우다 1914년 잿등과 천평을 합하여 천평리가 되었다.
- 복다
해발 110m 1580년경 연안이씨가 터를 잡았다 하며, 1914년 용강, 보령, 신기, 수평, 쌍산, 월평, 용촌과 행정, 문길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복다리라 부르고 있다.
- 용촌
해발 92m 1594년경에 충청북도에서 이주해온 전주이씨 이인하공이 터를 잡았다하며 마을의 산세가 용머리 형국이어서 용두라 불리우다 1914년 용촌으로 개칭되었다.
- 월평
100m 1800년경 옥천조씨 조광호공이 터를 잡앗다하며, 조선후기 전정제도에 의해 천자문 8번째 해당하는 원자와 들녘이라는 평자를 따서 월평. 말꼬리 형상이라 하여 마미등으로 불리웠다.
- 문길
해발 92m 1500년경 여산송씨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중간에 남원양씨 옥천조씨가 들어와 살고 있다. 1914년 문길과 장동을 병하바여 풍교리라고 부르다 최근에 이르러 문길리로 개칭하였다.
- 요곡
해발 92m 1400년경 도강김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1600년경 경주정씨가 들어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역귀풀이 많아 여꾸실 요곡이라고 불리웠다. 동네 입구는 200년전 면서당이 있어 석당이라고 불린다.
- 선산
해발 85m 1450년경 도강김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마을뒤에 마늘 조각 같은 형상이라 하여 말매(마늘)라 하다가 이 산명에 따라 선산이라 칭하고 오느에 이르고 있다.
- 구산
1447년 옥천조씨 조지곤이 살았다하며 마을 전후좌우에서 보아도 거북 형상을 하고 있어 거그메라 부르다 일제 시대에 일본왕중에 귀산천황이 있었다 하여 이홉구자 구산으로 개칭되었다.
- 둔대
해발 80m 호암은 1230년경 둔대는 1280년경 옥천조씨가 오원은 1924년 김씨가 터를잡았다. 호랑이 형국이라하여 호암, 까마귀 형국이라 하여 오원, 고려말 군량미저장고 터라 하여 둔터라 불리우다 둔대로 개칭되었다.
- 죽림
해발 64m1380년경 부정공 조유가 처음으로 마을을 이루었다하며, 처음엔 대숲골 1706년 겸천서원이 건립되면서 서원마을이라 하다가 조선중엽 죽림마을로 개칭하였다.
- 고산
해발 68m 1400년경 경주황씨가 터를 잡았다하나 실제 조선시대 경주정씨에 의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아미산줄기가 고리처럼 에워싼다하여 고리메, 환곡으로 불리우다 1914년 고산으로 개칭되었다.
- 문성
해발 115m 1700년경 옥천조씨가 터르 잡았다. 아미산과 옥치재계곡의 수정같은 물을 바라보며 학문연구에 좋은곳이라 하여 서당골, 서당도으로 불리웠다. 그후 문장이 나는 곳이라하여 문자와 옥녀봉을 가르켜 성자를 넣어 문성동이라 하였다.
- 외광
해발 65m 1780년경 김해김씨가 터를 잡앗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광청리라 불리웠으나 보성강을 끼고 있어 광천리로 불리워JT다. 1914년 1.2.3구로 분할하면서 외광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 내광
해발 70m 1430년경 김호스님이 자리를 잡았다 전한다. 처음에는 광청리라 불리웠으나 보성강을 끼고 있어 광천리로 불리웠다. 1914년 1. 2. 3. 구로 분할하면서 내광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 원동
해발 70m 1730년경 전주이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하나, 유물 유적으로 보면 그 이전에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덕양역에 속한 광천원이 있어 원골, 원동이라 불리웠다.
- 비룡
해발 110-1143m 기룡은 순창옹씨가 월봉은 김해김씨가 1750년경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기룡은 점골로 월봉은 갈용. 가랭이. 신기는 샛터라 불리웠다.
- 운룡
해발 100m 1380년경 옹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용이 누워있다하여 운와리라 하다가 후에 용이 등천하는 형국이라 하여 운룡리라 개칭하였다. 1983. 2.25일 석곡면에서 주암면으로 편입되었다.
- 용두
해발 190m 1600년경 진주강씨가 임란을 피해 마을을 이루었다 전한다. 꼭두바우라 불리우다가 운룡마을의 용이 머리를 향하고 있다하여 용두마을로 개칭하였다. 1983년 석곡면에서 주암면으로 편입되었다.
- 약촌
해발 71m 1600년경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전부터 터를 잡았다는 설도있다. 1854년 군수 신석희가 향약재를 건립하여 향약정이라 불리우다 1914년 약촌이라 개칭하였다.
- 한곡
해발 85m 한곡은 1783년 옥천조씨가 유산은 1686년 경주정씨가 터르 잡았다고 전한다. 큰절이 있었다하여 대사동이라 불렀고, 그다음에는 주위 경치가 한가로워 한동이라 부렀다고 한다.
- 문천
해발 115m 무학은 1572년 옥천조씨가 문천은 1586년경 흥덕장씨가 연동은 1586년경 광주안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양촌이라 불이웠으며 조선조때 역터가 있었다 전한다.
- 백록
해발 110m 685년 가음현의 현령이 있었던 터이다. 마을 뒷산의 산세가 사슴처럼 생겼다고 하고 뒷산바위가 멀리서 보면 흰바위로 보여 흰사슴마을이라 부르다가 백록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 가음
해발 110m 685년 가음현의 설치되었던 터로 고을터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향교터와 가음현 당시 시장터였다고 전하는 구장터, 매화봉은 봉화를 올렸다하여 촛대봉으로 부른다.
- 대구
해발 105m 최초로 마을터를 잡은이는 알 수 없으나 박씨와 김씨였다 전한다. 1630년경 옥천조씨가 새거주지로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거북의 꼬리터라 하여 한구미라 부르다 1914년 대구리로 개칭하였다.
- 궁각
해발 65m 궁각은 1486년에 양천허씨가 매우는 서시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궁각은활뿌리와 비슷하다 하여 활뿌리라 불였으며, 소가 잠을 자는 형상이라 하여 매우라 하였으나 매우라 쓰고 있다.
- 마전
해발 66m 1686년경 양천허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마을에 삼을 많이심어 마포를 만드는 마을이라하여 삼밭마을이라 부렀다가 1914년 마전으로 개칭하였다. 1909년 석곡에서 주암으로 편입되었다.
주암댐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住岩面)에 축조된 다목적 댐.
본댐 길이 330m, 높이 58m, 저수량 4억 5700만t이며, 유역면적은 1,010㎢이다. 상사면(上沙面) 조절지댐 높이 106m, 저수량 2억 5000만t, 발전시설은 2만 5000kW이다. 공사기간은 1984년부터 1991년이다. 댐은 보성강(寶城江) 하류인 순천시 주암면 대광리(大光里)와 구산리(九山里) 사이 협곡을 막아 만들었고, 조절지댐은 순천시 상사면(上沙面) 용계리(龍溪里)에 축조되었다.
이 2개의 댐에서는 광주·나주시·여수시·순천시·광양시·고흥군·화순군 등지에 하루 118만t의 생활 및 농·공업용수와 전력을 공급한다. 이 댐의 건설로 순천시와 화순군·보성군의 1읍 8면 49개 마을이 수몰되어 2,336가구 1만 2750명의 주민이 이주하였다. 수몰지에서는 마한(馬韓)시대 유물인 고인돌 211기와 돌칼 등 322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고고학적 수확을 얻었다.
모후산
모후산은 섬진7지맥의 한 봉우리로 백아산의 산줄기를 타고 내려와 동복천을 앞에 두고 멈춰 선 곳이다.
이 지세는 자연스럽게 순천시, 곡성군과 화순군을 경계지으며 남북으로 뻗어있다.
주암댐의 담수와 더불어 삼면이 푸른 물줄기로 둘렀으며 멀리 무등산, 조계산, 백아산과 득량만의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완만한 경사이나 코스에 따라서는 급경사지대도 있다.
고려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자비령을 넘어 쳐들어 오자 왕과 왕비는 태후를 모시고 안동, 순천을 거쳐 이곳 산기슭까지 피난왔다고 하는데 수려한 산세에 반한 왕이 모후산에 가궁을 짓고 환궁할때까지 해를 넘겨 1년여 남짓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산의 이름을 나복산에서 어머니의 품속같은 산이라 하여 모후산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 등산코스
생태공원(용문) - 용바위 - 옛잠실터 -유치재 - 능선삼거리 - 정상 (총 4시간 소요)
생태공원(용문) - 대밭 - 배바위 - 1봉우리 -능선 - 정상 (총 4시간 소요)
- 교통
주암IC로 빠져나와 광천 면소재지에서 용문생태공원에 주차후 등산
- 주변볼거리
송광사, 선암사, 주암호, 고인돌공원, 낙안읍성.
용문지구 생태공원 조성
주암호 본 댐에서 상류 쪽으로 약 5km를 거슬러 올라가면 나타나는 전남 순천시 주암면 대광리 용문계곡 일대는 전국의 댐 수몰지역 가운데 처음으로 20만평의 대규모 생태복원사업이 진행중이다.
옛날 호랑이가 살았다는 모후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이곳 풍경은 언뜻 보기에 유채꽃과 비슷한 노란 캐모마일 군락에 곳곳에 둘러쳐진 돌담과 방문객을 감싸고 춤추는 총천연색 나비떼 등 제주도에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했다. 손으로 그냥 떠서 먹어도 될 만큼 맑은 계곡물은 여러 식물군락이 자리한 계단식 초지와 부들 창포 등 수생식물이 심어진 20여 곳의 인공습지(지름 20m안팎의 연못)와 도랑을 거치면서 주암호로 흘러들고 있었다.이 습지에서는 다슬기와 가재와 소금쟁이 반딧불이 등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이 지역 생태계가 이미 안정단계에 접어든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이 생태복원 사업은 “댐 상류의 논밭에 농사를 지을 경우 농약 비료 등에 의한 수질오염이 불가피한 만큼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투자를 통해 친환경적 생태환경으로 바꿔줘야 한다”는 전남대 오준성 교수의 제안에 따라 2001년 시작됐다.
앞으로 전국의 학생 관광객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자연생태 학습장을 만드는 등 현지 주민과 공생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廣川 水邊 休養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