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산 기슭에 큰 절이 하나 있다. 천삼백년 고찰 부석사다. 매년 가을이면 이 산사로 가는 길 위 하늘은 샛노란 은행나무로 뒤덮인다. 역설이다. 계절에 패해 화염에 휩싸인 식물들의 소리없는 대학살극. 넋잃은 관객들은 비명 대신 그 광채에 찬사를 던진다. 부는 바람에 노란 잎새들이 사방에 흩날리면 역설은 극에 달한다. 도대체 이곳은 사바세계인가, 화엄 어귀인가.
1. 이 가을, 정확하게는 이번 주말에 영주 부석사에 가는 사람은 정말 행복하다. 이 땅에서 가장 예쁜 절집, 그리고 "영남 최고의 사색 길"이라는 은행나무 숲길을 거닐 수 있으니까. "예쁘다고 하면 그 웅장함을, 웅장하다고 하면 그 예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누군가가 말했고, 절을 찾은 이들은 열이면 열 모두 동의하는 절. 구절양장 죽령 너머 풍기 지나고 순흥 소수서원을 지나서 나오는 고찰이다.
2. 사하촌에서 길을 오른다. 매표소를 지나 모퉁이를 돌 때부터 조짐이 이상하다. 길 위에 떠 있는 공기가 연노란빛으로 물들어 있다. 때깔 고운 일주문이 앞에 서 있지만 정작 눈에는 양편으로 줄서 있는 노란 은행나무밖에 뵈지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 얼굴에도 광채가 서렸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800여m. 햇살은 그 얇은 나뭇잎을 비집고 마사토 길에 닿는다. 되도록이면 천천히 걷는다. 가끔은 멈춰서서 뒤돌아본다. 효도관광온 노인들, 가족들, 연인들,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들…. 적당히 경사진 길 위, 표정은 무척 다양하다. 천왕문에서 숲길은 끝나고 절집 순례가 시작된다.
676년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전설로는 당나라에서 유학중인 의상을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날아왔다고 한다. 용은 이곳에 웅거하던 도적떼 500명을 바위를 날려 물리쳤고, 그 돌은 무량수전 뒤켠에 내려앉아 '부석'이라고 각인돼 지금도 남아 있다. 무량수전에 이르는 아홉개의 거대한 석축은 극락에 이르는 구품만다라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사바에서 극락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다. 범종루, 안양루 등 그 흔한 단청 없는 누각들은 뜯어볼수록 예쁘다. 크고 작은 자연석들을 예술처럼 이어붙인 석축은 그 아름다움에 웅장함을 더한다.
드디어 무량수전. 아랫중간부분이 불룩한 소위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해진 최고 목조건물이다. 건축기법은 현대건축가들이 탄복할 정도. 앞에는 왜정 때 버트란트 러셀이 와서 보고는 "이야말로 조선 국보 1호"라 경탄했던 석등이, 오른편 오솔길 옆에는 소박한 삼층석탑이 본전을 호위한다. 오솔길을 따라가면 단풍으로 불타는 산중으로 들어간다.
3. 순례는, 되도록이면 늦은 오후에 시작할 일이다. 나른한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숲길, 누런 석양을 받는 절집 흰벽과 석축, 그리고 무량수전 앞으로 활짝 펼쳐진 산자락이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장면이 기다린다. 적막에 휩싸일 무렵 범종루에서 열리는 불전사물, 온 산을 울려대는 심원한 타악기 소리가 삼라만상 속에 파고 든다. 화려하고, 아름답고, 웅장한 산사에서 맞는 밤이다. 이 가을, 이 천년 고찰로 나들이 해보시라. 후두둑 떨어지는 황금빛 빗줄기 속으로
(기자)
▲가는길(서울기준):영동고속도로 남원주IC→중앙고속도로→제천→ 단양→죽령(꼬불꼬불한 길 조심) 넘어 풍기. 여기부터는 이정표가 아주 훌륭하다. '영주에서 모든 길은 부석사로 통한다!' 기차(중앙선)나 버스로 영주, 풍기에 가면 시내버스 많다.
▲주변: 조선 최초 서원, 소수서원(0572-634-2608):순흥면 읍내리에서 부석사 방향 5분. 원내 안내원에게 설명을 부탁하면 많은 공부가 된다. 박석홍 학예연구원을 만나면 행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마을 전체가 학살당한 비극을 비롯해 '한 서원에 숨겨진 엄청난 비밀'을 들을 수 있다. 순흥박물관:순흥면사무소 내, 국내 최소형 박물관.
▲먹을거리: 종점식당(633-3606):산채류. 후한 반찬 인심. 순흥묵집 (634-4614):순흥 읍내리. 가마솥에 장작불로 만든 묵을 낸다.
▲잠자리: 절 앞 민박집 다수. 절 가는길 초입 코리아나호텔(633-4445), 풍기호텔(풍기·637-8800), 희방호텔(희방사 입구·636-9981) 등. 옥녀봉자연휴양림(죽령 넘어 풍기방면·636-5928):8,13평 통나무집 8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