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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유사그리스도인이 거의그리스도인으로 보일정도로 신앙적인 삶의 진보를 보일수 있는가?
-첫 번째이유
*반론
신앙적인 삶에 있어서 어찌하여, 혹은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거의 그리스도인으로 보일 정도로 그렇게 멀리까지 이를 수 있습니까?
*응답
첫째, 그것은 양심의 초청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소수이지만 양심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의 내용에서 양심이 이 일에서 어디까지 작용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1. 양심의 빛이 발견하는 신의 존재
양심은 신을 가지고 있고, 이 신은 피조물의 경배와 섬김을 받아야합니다.
사도가 말한 것처럼 실제적인 무신론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디도서>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그러나 심판 때에는 아무도 무신론자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양심의 빛에 의해서 신의 존재를 발견한 것처럼,더 나은 빛,말씀의 빛의 도움으로 신을 경배해야 합니다.
사람은 양심의 빛과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지만,그 마음에는 최소한의 은혜도 없을 수 있습니다.
2. 죄를 깨닫게는 하지만 구원에 못 미치는 양심
거듭나지 않은 자연적인 양심은 은혜의 수단으로부터 많은 진보를 할 수 있습니다.
즉, 양심에 조명을 받고, 죄를 깨달을 수 있지만, 구원을 받을 만큼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 6:4절은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원을 얻은 참된 회심의 상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조명과 맛봄에도 불구하고 뒤에 나오는 6절을 보면 그들은 타락하였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4절의 하늘의 은사와 성령에 참예한 것은 성령의 일반은총입니다.
은혜의 참된 작용(특별은총)이 있다면 그들은 결코 은혜에서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자는 지저분하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하신 팔이 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3: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람의 양심에서 일어난 진보는 성령의 일반 사역으로 신앙의 의무를 매우 많이 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특별 사역은 사람을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도우시는 힘으로 복음을 전하고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효력 있는 부르심이 없는 자는 결국 망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렇습니다.
양심에는 진보를 보이지만 거듭남의 양심에는 이방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의 작용에 현혹되지 말고 말씀으로 개선되기를, 즉 성령으로 새롭게 된 양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3. 자연인의 양심이 느끼는 율법의 공포
자연인의 양심은 걱정과 고통의 영향을 받습니다.
자연적인 양심은 은혜로 성화되지는 않지만 종종 괴로워합니다.
양심의 고통은 신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에게도 있습니다.
자연인의 양심을 소유한 사람들이 신앙에 몰두하는 근거는 양심에서 오는 죄책감과 고통 때문입니다.
또한 계속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양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은 설교를 듣고 마음을 아파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죄를 여전히 즐깁니다. 그리고 늘 하듯이 양심으로 인하여 더 괴로워합니다.
그럴 때 하는 신앙고백은 입속에 굴러다니는 것으로, 죄의 고통을 없애는 일시적인 안정제와 같은 것입니다.
4. 비참한 상태를 보게 하는 양심의 눈
말씀으로 조명된 자연인의 양심은 자신의 비참함에 빠져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효과적으로 벗어날 수 없어서 그 비참함 속에서 지치고 안식이 없이 헤매게 됩니다.
그리고 죄인은 자신의 벌거벗은 것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종교적인 의무를 행하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가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3:0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죄인이 자신의 죄(원죄, 자범죄)를 깨닫게 되면, 그리스의 의로 자신을 덮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의무를 행하는 것은 무화과나무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인 가죽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
히시니라
자연인은 자신이 구주가 되려고 합니다.
자신의 종교적 의무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진정한 신자들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은혜가 없는 신앙고백이 자신을 하나님께 인도할 것으로 여겨 자신의 율법주의적인 행함을 통한 나름대로의 구원에 대한 무모한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53
Ⅶ. 자연적인 양심과 갱신되어 새로워진 양심의 차이
질문:
자연적이 양심이 여기까지 율법의 의무를 행할 수 있다면, 위선자들의 자연적이 양심과 신자들의 새로워진 양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나의 양심의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응답:
이것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 어려움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 때문입니다.
1. 자연적인 양심과 새로워진 양심은 구별하기 어려움
1) 은혜 가운데 끼어드는 죄
그것은 가장 훌륭한 성도들에게도 있는 위선 때문입니다.
연약한 신자는 아무런 위선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한 성도는 어느 정도의 위선이 있습니다.
최상의 은혜가 있는 곳에도 어느 정도 죄가 있습니다.
2) 은혜와 위선 사이의 유사성
위선은 본질은 아니지만, 외양은 은혜와 유사합니다.
위선자가 은혜와 닮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은혜가 아닙니다.
만약 참된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은혜를 받은 사람보다 더 잘할 때, 신자는 자신이 받은 은혜가 참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그 양심의 작용이 은혜로 일어나는 것인지, 자연적인 것인지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54
2. 자연적인 양심과 새로워진 양심의 차이
1) 자연인의 양심은 종교적 의무를 제한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제한적으로 행합니다.
그가 행하는 일과 복종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복종입니다.
그는 어떤 의무는 행하지만 다른 것은 무시합니다.
‘이 정도면 됐어, 이 정도면 천국에 갈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새로워진 양심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합니다.
양심이 은혜로 새로워지면 전혀 다릅니다.
비록 종교적인 의무를 행하는데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그 영혼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렇게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워진 양심은 더욱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순종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균형을 잡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는데도,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데 제한한다면, 즉 한 계명은 기뻐하지만 다른 계명을 무시한다면,
그때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은 자연인의 양심입니다.
그러나 온 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면 새로워진 양심입니다.
<시편>
119:128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19: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2) 자연인의 양심은 종교적 의무로 양심의 입을 막습니다.
자연인의 양심이 죄를 발견하고 죄를 책망한다면,그는 양심을 만족시키지 않은 채, 오히려 죄를 지적하는 양심의 입을 막아 버리려 합니다.
자연인이 행하는 종교적 의무의 대부분은 양심을 잠잠케 하고 질식을 시킵니다.
*그러나, 새로워진 양심은 보혈로서 죄가 제거되기를 바랍니다.
자연인은 죄를 제거하기보다는 양심의 소리를 잠재웁니다.
마치 눈에 티끌이 들어갔을 때, 물로 씻고 물기를 제거하여 말리지만 티끌이 제거되었는지를 살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새로워진 양심은 물기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눈도 살피고 그 원인을 제거합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죄를 책망할 때,종교적인 의무의 삶을 선택하고 경건의 모양을 취하고 양심의 소리를 그치게 한다면 이는 자연적인 양심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죄를 자백하는 자는 새로워진 양심입니다.
그리고 종교적 의무가 아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55
3) 자연인은 종교적 의무(기도, 자백, 봉사)를 죄의 가리개로 삼습니다.
자연인이 행하는 모든 종교적인 의무들은 죄를 숨깁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덮개로 사용될 뿐입니다.
*그러나, 새로워진 양심은 종교적 의무로 자기 죄를 드러냅니다.
새로워진 양심은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죄를 미워합니다.
<시편>
119:104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다윗은 종교적인 의무를 죄를 숨기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오히려 죄를 진정시키고 제거하는 것을 돕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고백하고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면,
<로마서>
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사랑하는 가운데 신앙의 고백으로 죄를 가린다면 그는 위선자요,
그의 종교적인 의무들은 자연적인 양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불의에서 떠난다면, 그리고 종교적인 의무들을 죄를 덮는데 사용하지 않고 죄를 죽이는데 사용한다면,그가 행하는 종교적인 의무는 새로워진 양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4) 자연인은 종교적 의무를 크게 자랑합니다.
자연인은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의무를 많이 행하면 행할수록 더욱 높이 들러 올립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누가복음>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러나 새로워진 양심은 진정으로 낮아집니다.
새로워진 양심은 종교적 의무를 가장 높게 행한 때라도 자기 마음을 가장 낮은 곳에 둡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주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겸손하게 자신은 아무런 자격도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모든 일을 행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위선자는 자신이 행한 종교적 의무를 부풀리지만, 신자는 겸손한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위선자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 입장만 보고 자신을 높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을 목격하였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깁니다.
이것이 그를 더욱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행합니다.
#56
5) 자연인은 모든 의무의 공로를 자기 것으로 삼습니다.
어떤 행동의 영예가 한 사람의 자아에 돌려진다면, 그 행동의 근원은 자아입니다.
모든 자연인이 행하는 의무는 자신에게 흘러갑니다.
그것은 결코 철저한 은혜의 역사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자리에 이르지도 못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행한 것이 자기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존재를 위해 살 수도 없으며,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의무를 행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새로워진 양심은 수고의 열매를 은혜로 생각합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공로나 가치를 찾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였다고 말하지만 결국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 천상의 이십사 장로들이 면류관을 벗어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내려놓을 정도로 마음을 가질 수 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의 자아는 뒤로 물러가고, 그리스도께서 맨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
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자신이 많은 희생을 하고 충성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유익과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이며 자신을 내려놓은 것이 아닙니다.이것은 자연인의 양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나 의무를 행하며 그 모든 수고와 희생의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린다면,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한다면,여러분은 자신의 자아를 던진 자요, 여러분이 행하는 것은 거듭난 양심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6) 자연인의 양심은 봉사는 하지만 성화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자연인의 양심은 많은 봉사를 하게 할 수 있지만, 결코 거룩함에 도달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행한 모든 봉사의 밑에는 성화되지 못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혜의 작은 조각을 하나도 갖지 못한 채, 단지 입술로만의 고백자로서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습니까?
*그러나, 새로워진 양심은 고백과 거룩한 행실이 균형을 이룹니다.
거듭난 양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를 행하게도 하지만 거룩함의 성장도 수반합니다.
은혜가 의무를 행하는 것을 돕는 것처럼, 의무는 은혜로 주어진 거룩함의 성장을 돕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의무를 행할수록 더욱 거룩해지며 더욱 천국 백성답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은혜⇒의무, 의무⇒거룩함의 성장
그러므로 종교적 의무를 많이 행하면서도 거룩한 삶에는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다면 그는 자연인의 양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행실의 거룩함이 신앙의 고백과 균형을 이룬다면,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라면,지혜가 의무를 행하는 동안 성장한다면,
그는 거듭난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1: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57
7) 자연인의 의무는 처음에는 크지만 나중에는 미약합니다.자연인의 양심이 의무의 샘이라면, 이 샘물은 처음에는 많이 흐르지만, 날이 갈수록 감소하고 마지막에는 말라 버립니다.
*그러나, 새로워진 양심은 나중 것이 처음 것보다 많아집니다.
거듭난 양심, 즉 성화된 마음이 의무의 샘이라면, 이 샘은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이 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항상 흐릅니다.
오히려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이 흐릅니다.두아디라 교회가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실 것입니다.
의문:
자연인의 양심으로 행하는 사람보다 거듭난 양심으로부터 행하는 사람이 왜 의무를 행하기에 더욱 소홀하게 되고 약해집니까?
응답:
그 이유는 그 의무들이 오류가 있는 뿌리, 즉 부패한 뿌리에서 자라기때문입니다.
자연인의 본성은 시들어가는 뿌리이므로 열매도 시들어가지만,거듭난 양심으로 행하는 의무는 영구적인 뿌리에서 자라나는 열매입니다.
그 뿌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은사(재능)는 자연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약한 은혜라도 은사와 재능보다 오래 살아남습니다.
은사와 은혜의 차이는 구두의 가죽과 발의 피부의 차이와 같습니다.
구두 밑창은 결국 달아 없어지지만, 발바닥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한 쪽에는 생명이 있지만, 다른 한 쪽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이 약해지고 따분해져서 마침내 사라진다면,
영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끝난다면, 여러분이 행한 모든 것은 자연인의 양심으로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성장하고 굳세게 되어 끝까지 견디어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면, 그것은 거듭난 양심으로 행한 것입니다.
#58
Ⅷ. 많은 진보에도 불구하고 한갓유사그리스도인에 머무는 이유
질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멀리가지 이르렀으면서도 유사 그리스도인에 머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 원인은 어디 있습니까?
대답: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 두 가지로만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1. 죄에 대한 올바른 각성이 부족하기에 죄를 뉘우친다고 해도 모두가 철저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강한 역사로부터 온 것이 아닌, 단지 본성적이고도 이성적으로 죄를 뉘우치기도 합니다.
이성적인 죄의 각성은 자연의 빛으로부터 죄를 인식하는 것으로서 자연의 양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들은 자연의 빛(양심)으로 죄를 인식했고, 복음의 빛의 도움(보편적 부르심: 전도)으로 이러한 죄의 인식이 향상될 수 있지만 아직 마음은 새롭게 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영적인 죄의 각성이 있는데, 이것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죄인 됨의 실상이 드러나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건전하고 철저한 죄의 각성입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의 반응이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1) 영적인 죄의 자각과 자연적인 죄의 자각
많은 사람들이 죄를 인식하고 각성하지만 그 모두가 영적인 각성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럼 이런 의문을 가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의문:
‘내가 만약 죄에 대한 각성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이 자연적인 양심에 의한 것인지, 혹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대답: 둘 사이의 뚜렷한 다섯 가지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영적인 죄의 자각은 은밀한 것까지 포함합니다.
자연적인 양심은 주로 자연적인 빛에 거슬리는 죄, 사람들이 문제로 삼는 죄만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죄의 각성은 비밀스럽고 내적이며 드러나지 않는 죄, 즉 마음속의 위선, 형식, 미지근함, 무감각, 완악함 등까지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외적일 뿐만 아니라 내적인지, 그리고 드러난 죄뿐만 아니라 숨겨진 욕망, 즉 내적이며 영적인 죄인지를 살펴보십시오.
② 자연적인 죄의 자각은 본성의 오염을 알지 못합니다.
자연적인 죄의 자각은 사람의 태도만 취급하고, 그의 상태와 처지는 다루지 않습니다.
즉, 행해진 죄만 다루고 죄의 근원은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죄의 각성은 모든 죄를 다룹니다. 우리의 마음의 근원의 죄까지 다룹니다.
성령이 효과적으로 역사하신다면, 율법이라는 안경을 통하여 자신 마음의 본성에 있는 추악함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서의 죄는 자연의 빛으로 깨닫는 죄가 아닙니다. 사도가 말하는 죄는 원죄로 이해해야 합니다.
죄인의 전적인 타락과 부패(원죄)를 보게 하고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즉, 성령님은 마음의 어두움, 정서의 혼란, 세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죄와 절망적인 상태를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③ 자연적인 죄의 자각은 죄 자체의 악함을 모릅니다.
자연적인 죄의 자각은 영혼으로 하여금 죄 안에 있는 악독보다는 죄로 말미암는 악을 더 잘 발견하게 합니다.
즉, 죄의 악함보다는 죄의 결과에 치중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죄의 자각은 영혼으로 하여금 죄로 인한 악보다 죄안에 있는 악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즉, 죄의 결과보다는 죄의 근원 때문에 더욱 괴로워합니다.
④ 자연적인 죄의 자각은 일시적이고 표면적입니다.
자연적인 죄의 자각은 마치 피부를 살짝 베인 것 같아서 당장은 피도 조금 나오고 아픔도 있지만, 곧 낫고 며칠만 지나면 흉터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죄의 자각은 지속적입니다.그것은 쉬 사라지지 않습니다.
죄인이 결국 변화하기까지 영혼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죄의 자각은 살을 파고드는 것과 같이 괴롭습니다.
성령의 위대한 치료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치료된 후에도 상처가 남습니다. 그러나 회복된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여기 내 상처의 흔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59
⑤ 성령의 역사인 죄의 자각은 죄인을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자연적인 죄의 자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합니다.결국 분리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가인이 그렇습니다.
<창세기>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4: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죄의 자각은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죄의 자각과 회심의 차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차이이며, 보통의 것과 구원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누군가에게 전자만 있고 후자가 없다면, 그는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다만 사람입니다.
#60
2) 영적인 죄의 자각
영적인 죄의 자각을 깊이 탐구해 보겠습니다.
① 영적인 죄의 자각은 건전한 회심에 필수적인 부분입니다.회심은 죄의 자각에서 시작됩니다.
즉, 참된 회심은 죄의 자각에서 시작되고 참된 죄의 자각은 회심으로 끝납니다.
죄인이 죄를 자각하기 전에는 결코 죄에서 돌아설 수 없습니다.죄를 철저하게 발견하기까지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의사가 전심으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② 작고 일반적인 죄의 자각은 겉모습에만 머물기 때문에 위선의 요인이 됩니다. 미미한 죄의 자각은 그리스도를 알게 할 수 있지만, 밀접하게 하지는 못합니다.그것은 위선의 가면에 불과합니다.미미한 죄의 자각보다 더 큰 위선의 샘은 없습니다. 이것은 위선으로 교회를 가득 채우며, 결국 배도하기에 이르도록 합니다.
참된 죄의 자각이 없는 사람은 흙이 얇고 돌밭과 같아서 씨가 말라버립니다.
그러나 철저한 죄의 자각이 있는 사람은 마음의 흙이 두터워서 말씀의 씨가 잘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죄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여 죄인이로소이다”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참된 각성이 부족하므로 많은 사람이 유사 그리스도인으로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61
2. 철저한 은혜의 역사가 부족하기에 많은 진보에도 불구하고 유사 그리스도인에 머무는 이유는 ‘마음에 먼저 역사하는 철저한 은혜의 역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에 은혜의 작용이 없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신앙고백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참된 변화가 없다면, 신앙의 의무를 행하고, 많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국 위선자, 혹은 배도자로 죽게 될 것입니다.
출생할 때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기형입니다. 옷으로 가리고 보강할 수 있겠지만 그는 여전히 기형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고백을 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그는 모든 신앙고백에만 그치는 것입니다.
종교의 의무를 행함으로 자신을 보강할 수 있겠지만 결국 위선자이고 그것으로는 근본적인 기형을 치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성령이 주시는 은혜의 작용이 없다면, 거듭남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가 없습니다.
① 행위는 마음과 짝을 이룹니다.
내부의 정신과 정서는 외부의 고백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기도와, 율법을 주신 분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없는 복종을 혐오하십니다.
내적인 예배 행위는 외적이고 의무적인 예배 행위와 호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은혜의 작용이 없다면 그 사람의 행위와 마음은 아무런 균형도, 상응하는 것도 없습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신실함이 결여된 행위를 혐오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려지게 될 종교적인 행위들은 신실하게 행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허풍을 떠는 우리의 행위를 취하시거나, 혹은 그 빈도로 우리를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작은 것이라도 신실함으로 행하는 것은 받으시지만, 가장 큰 것이라도 신실함이 없다면 거절하십니다.
<잠언>
11:20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상태의 변화, 즉 마음에 은혜의 작용이 없다면,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이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나면서부터 거짓되고 심히 사악합니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신실함에 더욱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 부패는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의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영혼에 은혜의 작용이 없다면 그 영혼에서 신실함을 발견할 수 없으며,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종교적인 의무를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합니다.
#62
Ⅸ. 유사 그리스도인이 신앙고백을 하는데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원인
질문: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유사 그리스도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답: 그 결정적인 이유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많은 사람이 유사 그리스도인에 머무는 까닭은 자신의 신실한 상태를 스스로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상태를 잘못 판단합니다.
사실은 악하고 위태로운데도 선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그들이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임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받은 은혜보다는 자신의 죄를 더 바라보고, 자신의 믿음보다는 자신의 타락을 더 바라보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보다는 내재하는 정욕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매우 선한데도 매우 악한 존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겸손).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신부는 ‘저는 못난 죄인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대여,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가서>
죄인은 자신의 행위로 생명책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장부에는 악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대단한 존재라고 자신을 속이고 타인도 속이는 일을 행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해 이방인에 불과하면서도 자신이 얻게 될 이익만 생각합니다.
성령을 돈으로 살려고 한 마술사 시몬처럼 자신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정작은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8: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8: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 위와 같이 자신을 알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는 근거 다섯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1) 거짓된 마음으로 스스로를 기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인간은 죄로 인하여 전적 타락과 부패와 오염된 존재입니다.자신을 믿는 자에 대한 솔로몬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잠언>
28:26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2) 자신을 알지 못하는 실수는 교만한 마음으로 스스로 의로운 줄알기 때문입니다.이런 실수는 자만심에서 옵니다. 자만심은 모든 자연인에게도 있고, 아담이 죄를 범할 때도 있었고, 모든 아담의 후손에게도 있습니다.
자만심은 근본적인 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적인 사람들은 지나치게 의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의, 즉 그리스도의 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의가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자기 의입니다.
그러나 은혜에 반응하는 사람은 스스로 기만하고 교만하기보다는 겸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신자의 모토(motto)입니다.
“나는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요, 죄인 중에 큰 자라.”
그러나 육적인 사람의 모토는 이렇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3) 자신을 알지 못하는 실수는 일반 은혜를 특별 은혜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 대신 일반 은총으로 자신을 속입니다.둘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마치 위조지폐와 같습니다.
일반 은혜를 구원하는 은혜로 오해합니다.
일반 은혜는 본성을 부추기지만 특별 은혜는 본성을 새롭게 합니다.
성령의 모든 구원하는 역사는 초자연적이지만,성령의 모든 초자연적인 역사가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역사 대신 초자연적인 작용을 취하여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4) 자신을 알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는 사람은 참된 회심보다는 외적 개혁에 머뭅니다.
많은 사람은 회심의 사역 대신 신앙고백을, 내적인 거듭남의 참된 표지보다는 외적인 개혁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컵의 겉을 씻는 것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컵 전체가 깨끗해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건의 모양만을 취하면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함으로 영원한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방법대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악도 행합니다.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5) 자신을 알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는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은 자신이 처한 진실한 상태와 조건을 발견하기 위하여 마음과 양심에 하나님의 율법을 통렬하게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족하면 은혜의 역사가 부족한 가운데 있을 것이고, 자신에 대해 실제보다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63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말씀이 있을 때와 없을 때에 대하여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진술합니다.
<로마서>
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첫째, 여기 율법이 없을 때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모양만 가지고 있었으므로 “율법을 가지지 못했을 때”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회심 전에 자신의 마음과 양심에 죄를 각성시키고 분별하는 율법의 효과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선하다고, 즉 “내가 살았더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진정한 율법에 반응할 때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해가 있는데, 이것은 앞의 상태와는 대조적입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이것은 주의 말씀이 그의 영혼에 능력으로 임했을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양심에 유효적으로 좌정했을 때를 의미합니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는 말씀 앞에서 그가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와 자기 의의 추함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유사 그리스도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로 자신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선하지도 않은데 선하다고, 즉 살아 있다고 생각하므로 율법 앞에서 자신의 추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실수하는 이유는 다섯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① 거짓된 마음,
② 교만한 마음,
③ 일반 은혜를 특별 은혜로 착각함
④ 참된 회심보다는 외적 개혁에 머묾,
⑤ 마음과 양심에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적용하지 않음
#64
2. 많은 사람이 유사 그리스도인에 머무는 까닭은 경건의 모양만 갖추라는 사탄의 유혹 때문입니다.
사탄은 죄인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게 할 수 없다면,
경건한 모양만 갖추도록 교활하게 설득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정욕에 빠져 천국을 무시하도록 유혹할 수 없다면, 천국에 이르기에 부족할 만큼만 신앙고백을 하도록 유혹합니다.어떤 죄에서 떠나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그대로 행하게 합니다.
어떤 신앙적인 일은 행하는 것은 동의하지만 나머지는 무시하게 합니다.
사탄은 회심을 통한 구원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행하는데는 동의합니다. 즉, 우리를 결국 지옥에 이르게 할 수만 있다면, 그 길이 어느 갈래가 되도 개의치 않습니다.
3. 많은 사람이 유사 그리스도인에 머무는 까닭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방법 때문입니다.
세속적이고 육적인 방법은 많은 사람에게 큰 장애가 됩니다. 그런 방법은 흔히 경건과 배치됩니다.
예후는 바알을 제거하고 종교 개혁을 일으키지만 혹시라도 왕국에 해가 될까 봐 금송아지 단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열심은 수단과 방법을 가볍게 여깁니다.
<열왕기하>
10:28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10:29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므로 우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경건의 수단이 말씀을 벗어나면 안정성을 잃습니다.그리고 수단에 경건이 결여되면 성실성과 진실성을 잃습니다.
4. 여전히 유사 그리스도인에 머무는 이유는 내재하는 정욕이 진보에 한계를 긋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내재하는 정욕이 그리스도께 진심으로 응답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유사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 할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까지는 오지 않습니다.
한 젊은이가 그랬습니다.
영생을 원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고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오직 한 계명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하나 정도의 계명은 봐 주시지 않으실까요?’ 아닙니다.
천국에 값 싸게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천국을 위해 아무 것도 내놓지 않을 것이므로 천국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면, 진주의 값으로 모든 것을 내어놓지 않는다면,그는 흥정도 해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형식적인 신앙고백자들은 두 개의 똑같은 자석 사이에 있는 쇠붙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당기시면 하나님 쪽으로 움직입니다.그러나 세상이 잡아끌면 세상 쪽으로 끌립니다.그들은 양자 사이에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지도 않지만 세상도 떠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정욕과 아끼는 것과 모든 것을 사랑하는 죄들을 내버려야 한다면, 데마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갈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65
Ⅸ. 나가며
사랑하는 여러분!!
유사 그리스도인은 매우 무익합니다.
왜냐하면 어는 한 가지라도 실패한다면 천국에 가려는 시도를 전혀하지 않은 것과 같은 동일한 손상을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 그리고 유사 그리스도인은 세 가지 면에서 매우 난감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1. 유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모두 미움을 받습니다.
세상은 그의 신앙고백 때문에 그를 미워하고, 하나님은 그의 위선 때문에 그를 미워하십니다.
세상은 그가 선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고, 하나님은 그가 선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선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든지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2. 유사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태복음>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여러분, 외적인 신앙고백도 경건의 능력만큼 사람을 고난에 직면하게 합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이 없다면 고난을 겪을 때 신앙고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경건의 모양도 미워하여 핍박합니다.
내가 신앙을 고백한다면 아마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만 한다면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난감한 일입니까?
3. 유사 그리스도인은 소망이 헛됩니다.
소망이 헛되므로 천국을 바라지만 결코 그곳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66
▣ 유사 그리스도인이 처할 위험
그러므로 유사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매우 위험할 것입니다.
? 회심의 참된 역사를 방해하기에 위험합니다.
? 은혜의 상태로 오인하기에 쉽기에 위험합니다.
? 은혜를 받은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므로 위험합니다.
? 헛된 양심에 평안을 누리기에 위험합니다.
? 용서받을 수 없는 죄와 연관되므로 위험합니다.
? 결국 배교하게 되므로 위험합니다.
? 하나님의 두려운 영적인 심판을 초래하므로 위험합니다.
? 저주를 대단히 악화시키기 때문에 이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67
▣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한 동기부여가 필요하십니까?
1.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의 법의 핵심입니다.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일치시키는 것이 성경의 모든 계명이며 본질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분리시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정서와 세상의 정욕을 공유하게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과 순종하는 것에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1: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2. 그리스도만이 온전한 구세주와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온전한 구세주요, 완전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분은 반만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며,하나님의 공의를 반만 만족시키신 것이 아니며, 죄인을 반만 구원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온전하신 구주이신데 우리가 온전한 성도가 아닐 수 있습니까?
참 구주를 믿는다고 하면서 참 신자가 아니라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3. 가장 유용하고도 값진 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에 따른 경건은 가장 큰 수입을 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신앙적입니다.
신앙의 유익이 큰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세속적인 욕망에 따라 살고 그것에서 만족을 찾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금이나 은을 얻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한 곳이 있습니까?
은과 금은 성소의 저울로 달아볼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언>
3:13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3:14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
보다 나음이니라
3: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
교할 수 없도다
여기서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들어 주시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악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에 따라 동반되는 경건의 삶이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욥기>
28:28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4. 사악한 사람들도 온 맘을 다해 정욕과 죄를 섬깁니다.
여러분, 사악한 사람들도 자신의 정욕에 전적으로 복종하는데, 왜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아들들의 마음이 악을 행하고 악을 행하기에 항상 준비되어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을 행하고 항상 선을 행하기에 온전히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5. 심판 날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심판의 날에 바로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위선적인 신앙의 고백자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아무 답변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여러분이 위선적인 신앙을 고백한 유사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의 날’에 변명의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당신을 그리스도께서 살피실 때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은혜의 날에 은혜가 없는 자는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그리스도께 연합할 마음도 없이,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구원이라는 선물을 사모함이 없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했다면, 당신의 영혼은 용서 받을 수도 없고 저주를 피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68
▣ 유사 그리스도인에서 돌이킬 수 있는 지침
*질문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수단을 사용해야 저의 마음이 온전한 행위를 이룰 수 있으며 더 이상 유사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대답: 이에 대한 세 가지 지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양심의 모든 거짓된 평안을 깨뜨리십시오.
거짓된 평안은 하나님을 찾는 영혼을 붙들어 매는 마귀의 끈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있는 반면 사탄의 평안이 있습니다.
이것은 빛과 어두움처럼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은혜 속에서 거듭난 상태의 평안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평안은 거듭나지 못한 상태의 평안이요, 죽음의 평안입니다.
욥은 음부에도 평안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죄로 죽은 영혼은 평화롭고 사탄은 그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욥기>
3: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하나님의 평안은 의롭게 하는 은혜로써 죄책을 제거함으로 흘러나오는 평안입니다.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평안은 죄에 대하여 마음을 강하게 하는 죄로부터의 평안입니다.
<빌립보서>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러나 죄인의 평안은 죄와 함께 하는 평안이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평안은 지키는 것보다 깨뜨려야 합니다.
그것은 거짓되고 위험하며 불안정한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함께 하는 평안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안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님을 찾지 않는 자에게 주님은 평안을 주시지 않습니다.그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욕을 내어 버려야 얻게 될 그리스도의 평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그리스도의 치유와 평안을 누리기 전까지는 죄로 인해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2. 죄를 뉘우치되 온전히 힘써 뉘우치십시오.
죄를 뉘우친다고 해서 모두가 철저하게 뉘우친 것은 아닙니다.
철저하지 못한 죄의 뉘우침은 바르고 건전한 것이 아니므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법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죄의 비참함을 보게 하심으로 구주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악을 보게 하시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의를 보게 하십니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유익을 앞에 두고 자신의 불의의 무익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불평으로 먼저 불 뱀에 물렸지만,그 후에 놋 뱀이 예비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민수기>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21: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죄를 자각하고 뉘우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철저하게 뉘우치십시오.
그리고 특별히 명심할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① 죄의 악함을 확신하십시오.
죄는 악하고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내는 것이며, 성령을 슬프게 하며, 당신의 영혼을 상하게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악한 것이지만 죄를 깨닫는 것도 훌륭한 판단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깨달아야 그리스도의 의로 인한 온전함을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② 자연 상태의 비참함과 절망적인 위험을 인식하십시오.
(원죄로 인한 부패와 원죄로 발생하는 죄의 오염이 되는 자범죄).
③ 평안을 주기에 오직 예수 이외에는, 불충분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십시오.
▣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 이 세 가지를 바르게 인식하십시오.
성령께서 이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시는 이유는 참된 회심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른 죄의 자각을 얻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만약 죄의 자각이 없다면 거룩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것입니다.
3. 회심에 이르기까지 결코 죄의 자각과 뉘우침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실수하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뉘우쳤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그로 인해 자신들이 깨달은 죄를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거나, 혹 은혜가 없음을 알게 된 것이 은혜의 역사라고 생각하여 자신들이 회심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죄의 자각은 회심의 첫 발자국이지 아직 회심이 아닙니다.
죄의 자각을 지닌 채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죽음에 이를 때에 불쌍한 인생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죄의 자각에서 더 이상 향상이 없었구나.
나는 죄를 인식하였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로 나가고 말았구나.
그러한 상태를 깨달으라는 설교를 들었지만 무시했었지.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리스도는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깨달음을 좇지 않았구나.”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미미한 죄의 자각은 죽음의 침상에서는 최악의 동반자입니다.
죽음의 자리를 매우 불편하게 하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목적과 약속들이 성취되지 않은 것과 깨달음이 미약하고 향상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성령이 여러분의 영혼 속에서 역사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죄의 비참함을 깨닫고, 그 비참함을 치유하기에는 나와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이 확신을 더욱 향상시키십시오.
주님께 철저하게 응답하고, 완전한 회심에 이르기까지 결코 안주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하여야 당신은 유사 그리스도인이 아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유사 그리스도인은 되지만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고, 유사 그리스도인의 무익함과 고난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동기와 지침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죄의 자각에 그치는 어리석음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하고 그 믿음을 확증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또한 성경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계명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그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계명은 쉽고 가벼운 멍에이며, 그 멍에를 통하여 진리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일서>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유사그리스도인 / 매튜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