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요즘 세계적으로 자살자가 늘어나며 특히 우리나라가 심하다고도 합니다. 최근에는 지도자였던 분이 자살을 함으로써 국민들이 크게 상심하기도 했는데, 일부 불교지도자까지 그 자살을 미화하듯 발언을 하기에 혼란스럽습니다. 불교에서는 자살을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소중한 인연들의 은혜로 이루어진 삶
‘목숨’아닌 ‘어리석은 집착’을 놓아야
답 : 망자에 대한 좋은 얘기는 유족을 위한 배려이며 추모의 뜻으로써, 결코 자살에 대한 미화는 아닐 것입니다. 지도자였던 이의 자살은 두 가지 축면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한 가지는 자살이 일어나기까지의 정치적인 상황전개가 아름답지 못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최고지도자의 자리까지 갔던 이로서 국민이나 가족에 대한 배려가 깊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그 자살을 두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대신 안고 간 대승보살적인 행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부득이한 선택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대승적 보살행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아울러 이런 시각은 자칫 각자의 고귀한 생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삶은 단순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으로 이루어지며, 그 인연들은 자기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뜻대로 하려고 고집하면 온갖 문제와 그로인한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원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육체나 목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일으킨 ‘집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끊을 것이 아니라 바로 집착을 놓아야 하는 것이지요.
대승적이라는 것은 좋은 일도 함께 하고 괴로운 일도 함께 풀어가는 것을 뜻하지요. 함께 하는 것을 포기하면 극단적으로 됩니다. 정치건 경제건 개인의 삶이건 다 함께 아우르는 것을 포기하면 극단적 생각들이 대세를 이루게 되고, 이 생각들이 정책이나 생활에 반영되며, 이어서 극단적인 대립과 투쟁으로 전개됩니다. 지도자였던 이의 자살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보살행이라는 것은 베풀고 포용하며 절제하고 통찰하는 삶을 뜻합니다. 그런 삶에는 자기중심적인 것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고통마저도 포용하기에 이미 고통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인욕수행자였을 때 흉포한 왕의 칼에 팔과 다리를 잘리면서도 왕의 뜻에 맡겨 두었고, 한 번도 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왕은 그것을 계속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황에서 혀를 깨물어 자진하진 않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안고 간 그분의 가르침이 세상을 바꾸게 되지요.
자살을 시도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은 목숨을 끊으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단견(斷見)’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상견(常見)’과 더불어 극단적인 견해이지요. 진시황제처럼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경우나 모두 끝내겠다고 자살하는 경우나 둘 다 잘못된 견해이며, 결코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내려놓음’은 수많은 은혜로 형성된 육신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극단으로 치우친 어리석은 생각들을 놓으라는 뜻이지요.
자기의 몸이나 생각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육신이 사라지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도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자살자의 영혼이 겪는 고통은 산 사람이나 자연스럽게 인연이 다해 죽은 영혼인 경우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더욱 정성스럽게 49재를 베푸는 것입니다.
송강스님 / 개화사 주지
[불교신문 2543호/ 7월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