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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동(茶雲洞)
햇차 가 나왔다. 우전이니 작설이니 세작이니 하며 제 이름값 한다고 차 고유의 기품을 시장거리에 내걸고 있는 모양새를 보면서 그저 허허롭게 웃는다. 첫 장마를 고스란히 맞으며 신선처럼 사는 서진욱1) 선생댁의 서재에 앉아 손수 법제한 차를 다관에 담아 우려내는 차를 숭늉 마시듯 들이키는 이 자유를 다도라는 고상한 의관정제가 알기나 할까? 번거로운 형식이 차의 본질을 눌러버리는 현실을 나무라며 다운동에 얽힌 이야기를 다식 삼아 긴 시간 담소했다.
삼국사기 흥덕왕 3년 12월조에서부터 나타나는2) 차가 이 마을에 심어진 시기는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신라 왕경과 지척에 있었고, 자장에 의해 창건된 태화사와 신라 후대에 왕 행차가 잦았다는 사연만으로도 그 기원이 멀다고 짐작해 본다.
땅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차나무가 자생하던 마을 다운동. 그 이름만큼 고즈넉하고 심성 곱던 마을을 돌아본다.
□ 마을변천사
설화를 앞세워 본다. 남쪽 건너가 굴아화촌3)의 치소였는데, 나가소의 전설에 의해 물길이 바뀌었다고 한다면 다운동은 굴아화현의 취락지이자 지배계급의 무덤중심이었다. 이 터에 사람이 거주한 흔적은 청동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일 가능성이 많다.4)
다운동은 정조연간(1777~1800)에 다전리(茶田里)라고 하다가 고종31년(1894)에는 다전동과 운곡동(云谷洞)으로 갈라졌다. 이 운곡은 1911년의 기록에 ‘雲谷’으로 표시되다가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지금의 서사리에 속해 있었던 신안동(新安洞) 일부를 합하여 다운리(茶雲里)라 하였다. ‘다운’이란 이름은 ‘다전’의 ‘茶’자와 ‘운곡’의 ‘雲’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5)
본래 다운리는 범서면(凡西面)에 속하였으나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면서 다운동이 되었다. 이후 한때는 인구가 적어 무거동에 속했다가, 다시 태화동에 편입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후 1995년 3월 2일 온전한 다운동으로 거듭났다. 그런데 이때도 태화동의 멍정마을과 난곡마을을 안고 왔지만 지금은 법정 다운동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면적 8.957㎢에 11,431세대 인구 33,571명의 중구에서 가장 넓은 면적과 명정천, 척과천, 태화강을 끼고 있어 친수공간이 많고 쾌적한 주거환경으로 촉망받고 있다.
□ 다전(茶田)
울산시에 편입되기 전인 1960년대 초에는 임란공신 망조당 서인충의 후손들이 울산도호부의 서쪽 땅기운이 모인(府西十二地墟) 이곳을 찾아 집성촌을 이룬 달성서씨(達成徐氏)를 중심으로 6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터를 일구던 자리였다. 태화강과 척과천이 만나는 이곳은 물안개가 짙어 차 재배지로 적격이었다. 마을 서쪽 기숙등을 중심으로 자생차가 산재해 있었고 수 천 평의 차밭이 있었지만 1980년대 들면서 택지에 밀려 지금은 다운동 산 146번지 일대에 일부만 남아있다. 다전이란 이름도 차밭이 있음으로 해서 얻어진 이름인데, 세종실록지리지에 울산의 토공품으로 작설차를 바쳤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차밭의 기원을 유추할 수 있다.
□ 운곡(雲谷)[구리미]
글자 그대로 본다면 구름 많은 골짜기라고 직역할 수 있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천만의 말씀’이라고 손사래 친다. 토박이 이름은 「구리미」다. 강기슭의 운무가 짙다한들 억지로 붙인 이름이다. 한말까지만 하더라도 운곡(云谷)이라고 했는데, 이는 골짜기에 들어선다는 의미다. 지금은 1995년 무렵 남구 용연동, 황성동 사람들이 공해지구이주대책에 따라 이곳으로 새 터전을 잡아 이주하면서 큰 도시가 되었지만 전에는 문전옥답을 일구던 40여 가구의 토박이들이 척과 골짜기를 거쳐 경주로 넘어가던 길목이었다.
토박이말 ‘구리미’에 대해 서진욱6)씨는 “뒷산은 복등산(伏嶝山)으로 개가 넙죽 엎드린 형상인데, 한자로 狗泥尾라고 표기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를 일제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엉뚱하게 구름운(雲)자를 적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7)
□ 봇동산[복등산(伏嶝山)]
다전의 동쪽 운곡 뒷산을 이른다. 개가 엎드린 형상이라고도 하고, 보의 동쪽에 있어 봇동산이라고도 한다.
□ 띠밭등
다전에서 척과쪽으로 오르다가 척과천 건너편 기다란 등성이가 띠밭등이다. 지금은 소나무가 우거졌지만 전에는 띠풀(茅)이 우거져 붙은 이름이다. 띠를 울산에서는 ‘피기’ ‘핑기’라고도 하는데 오월이면 잎줄기에 싸여있는 꽃대를 뽑아 먹는다. 단맛이 나는 이 피기를 한손가득 뽑아들고 먹든 시절이 있었다.
이 띠풀은 생장력이 매우 강해 산소에도 잔디를 잠식하고 자라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본뜻8)을 버리고 울산에서 ‘핑기없는 밋등없다’며 형상만 말하기도 한다.
임상이 매우 좋아 보존가치가 높다.
□ 깍건장, 갓골, 까끈장보
다전에서 척과쪽으로 올라가면 왼쪽뒷산의 생김새가 흡사 갓(冠)처럼 생겼다. 우뚝 솟은 갓모자와 양옆으로 펼쳐진 갓양태. 그 아래에 갓끈처럼 흘러내린 골짜기에 멋진 이름정자를 지었다. 어떤 사람이 오해하여 각건정(脚健亭)이라고 하던데 전혀 아니다.
이 골짜기를 ‘갓골’이라고 하며, 지금 이곳에는 고령박씨의 재실이 있다. 한편으로 나무가 우거져 삼곡(森谷)의 뜻도 있다고 한다.
‘갓끈정’에서 흘러내린 물은 척과천에 합류되고 이곳에 보를 막았으니 ‘까끈장보(洑)’라고 한다. 지금은 시멘트로 물길을 만들고 흔적만 남겨놓고 있다.
□ 한대밭골
갓끈정 북쪽, 갓골의 안쪽에 있는 골짜기를 이른다. 이 길을 들어서면 Y자형으로 골짜기가 갈라지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두동면을 거쳐 두서로 이어지고, 왼쪽으로 가면 범서로 나아간다. 이 갈림길 약간 못미처 오른쪽으로 난 샛길이 있는데, 서사리로 넘어가는 길이다. 지금은 성토(盛土)하여 넓은 터를 만들고 있지만 전에는 논이었다. 이 한대밭돌은 바로 울산으로 이어지는 장꾼들의 길이었다. 등짐을 벗고 짱치기도 하면서 쉬던 터에는 지금 묘가 한 기 들어서 있다. 골짜기가 무척 길어 마치 큰칼(大刀)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넓은 골짜기라는 의미도 있다.
□ 장꽁만디[장꽁말랭이]
다전마을의 서북쪽 동아아파트 뒷쪽에 있는 산마루를 이르는데, ‘장꽁’은 수꿩의 사투리다. 울산말에서 동물의 수컷을 이를 때 ‘장’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곧 수탉→장달, 수꿩→장꽁으로 쓰이는 예가 그렇다.
‘만디’는 산마루 고갯마루의 ‘마루’라는 뜻의 사투리다. 본디 ‘만디’라는 사투리는 ‘만당’으로 쓰였으나 나중에 비슷한 뜻말인 ‘말랑’이라는 말과 서로 같은 뜻말이 되었다.
간추리면 장끼가 머리를 처박고 앉은 모습과 흡사한 지형으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위에는 무덤이 한 기 있는데 여자무덤이라 기가 상충하여 발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 실골[서일골]
척과천이 동쪽으로 길게 난 골짜기를 이른다. 가늘고 매우 길어 붙여진 이름인데, 실골은 길촌고개에 이어진다.
□ 도계골(陶溪-)[도덕골, 도적골, 동축골]
다운목장이 있었던 골짜기로 도둑이 숨어 살았다고 하여 도적골이라고도 하지만, 인근 유곡동이나 태화동에서는 ‘독적골’이라고 하는데 아마 독점골(甕店谷)이 와전되어 붙여진 이름이라 여겨진다.
□ 새각단
실골 남쪽 띠밭등 언저리에 생긴 마을인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도 본래 서씨성을 가진 사람이 머슴을 부리며 한집 살았는데 그 터전을 확장한 것이다.
□ 디전별서(茶田別棲)
한말 徐章杰이 초옥을 짓고 시를 읊으며 거처하던 곳인데, 이후 徐晋圭, 徐鍾施로 이어지면서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지금은 유택(幽宅)이 들어섰다.
□ 춘상골(春山谷)
동마실의 동쪽 골짜기 대밭속에서 솟아나는 따뜻한 옹달샘이 있어 언제나 봄기운이 가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동리(東里)[동마실], 동리앞들
다전 동쪽 산록에 있었던 마을과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가리킨다. 지금은 이 터에 다운제2초등학교, 다운중학교, 다운고등학교가 들어섰다.
□ 기숙등
태화강변 다전 서남쪽에 있는 산인데 게가 엄지발을 모아 웅크리고 있는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기’는 게의 사투리며 잠잔다, 머문다는 뜻의 ‘숙(宿)’자를 붙였다. 이 산 등성이는 온통 고분군이며, 차나무가 자생했는데 지금은 남쪽 일부에 차나무를 가꾸고 있다.
□ 배리끝
옛날 울산에서 언양으로 가는 길이 몇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 태화강변을 따라 다운동에서 범서 구영리로 가는 길이 있었다. 급경사와 낭떠러지가 있는 험한 길이지만 지름길이라 쉽게 다녔는데, 이곳에 ‘배리끝’이 있다. 벼랑끝을 울산에서는 ‘배리끝’이라고 부른다. 태화강을 낀 다운동의 가장 서쪽 이곳에는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으니,
『옛날 한 젊은이가 아내와 시집가지 않은 누이를 데리고 홍수가 난 태화강가를 지나던 중 두 여인이 그만 급류에 빠지고 말았다. 응급 결에 옷자락을 잡아 건지고 보니 아내였다. 누이는 이미 성난 급류에 휩쓸려 저 멀리 멀어져 가고... 이 애처로운 일이 있은 다음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지어 모내기 노래로 유행시켰다. “낭창 낭창 배리 끝에 무정하다 울오라바 나도야 죽어 후생하면 낭군부터 정할래라”』
울산에서 파생된 이 소리의 발생지를 두고 몇 다툼이 있기는 하다.9)
□ 사군탄(使君灘)
배리끝의 누이가 죽어가면서 한을 품었으니 ‘다시 태어난다면 낭군부터 정하겠다’는 아픔을 사람들은 사군(使君)이라 했고 그 간절함이 흐르는 여울(灘)이라 ‘사군탄’이라 불렀다. 여기에 옛날 보를 막고 물길이 얕아지면 그 봇둑을 건너 굴화까지 다녔으며, 물가에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동네사람들이 이용하였지만, 1960년대에 없어지고 말았다.
□ 나가소(羅家沼), 낙안소(落雁昭), 난간수보
배리끝과 사군탄의 이야기는 다시 ‘낭관소(郎官沼)’로 이어진다. 죽음을 맞으면서도 낭군을 생각했을까? 울산읍지에도 ‘낭관소’란 지명이 언급되고 있지만10),
이보다 토박이들은 전해오는 전설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옛날 태화강물이 굴화에서 백천쪽으로 흐를 때 다전마을에 인접한 곳에 나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이 마을은 넓고 기름진 문전옥답을 가지고 있어 대대로 풍요로웠는데, 문제는 경주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목이라 지나가는 길손이 빈번하여 한편 귀찮기도 했겠다. 하루는 땅거미가 깔릴 무렵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이 이 마을에서 가장 번듯한 집에 들어서서 하룻밤 묵어갈 것을 청했으나 주인은 과객들로 진저리가 나 거절하고 만다. 노인은 하는 수 없이 밤이슬에 노숙한 뒤 날이 밝자 영축산에 올라 마을을 한참 바라보았겠다. 그는 혀를 차며 주문을 외우고 지팡이로 구영동쪽을 가리키다가 휙 배리끝쪽으로 허공에 선을 그은 후 사라졌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갑자기 서쪽하늘이 어두워지더니 큰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비가 그치고 나서보니 이게 웬일인가? 태화강은 물길을 바꾸었고, 나씨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곳에 큰 못이 생겼다.』
이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이 못을 가리켜 ‘나가소’라 하는데, 지금도 나가소의 남쪽 땅을 파면 강자갈이 나온다고 하여 이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기러기가 내려앉는 터라 ‘낙안소’라고도 하며, 이 아래에 있는 보를 ‘난간수보’라 한다.
□ 해연(蟹淵)
이 나가소 아래가 해연이다. 마치 게의 모양을 닮은 기숙등 아래에 있어 해연이라 하는데, 이전에는 민물게가 많이 잡히기도 했다한다.
□ 삼탄(三灘), 삼호(三湖)
사군탄, 나가소, 해연을 합쳐 삼탄 또는 삼호라고 부른다.
□ 보뚝모티[운곡보, 구리미보]
척과천을 두고 다전과 운곡이 갈라지는데, 이곳에 보를 막고 건너 다녔다. 이곳에는 주막이 있었다.
□ 어사암(御使岩)[어서바우], 원고개
운곡에 있던 바위인데, 지금은 주택지에 사라지고 없다. 이곳에는 이런 설화가 내려온다.
『임란공신 망조당 서인충의 5세손 서달급이 다전에 다산사(茶山祠)를 세워 망조당을 받들고 있었는데, 조선말기 울산도호부사가 이 다산사에 참배하고 돌아가려는데 급한 기별을 받았다. 내용인 즉 운곡마을 앞으로 어떤 선비가 지나가는데 아무리 보아도 예사사람 같지 않다는 것이다. 도호부사는 스치는 육감으로 급히 걸음을 재촉하여 난곡마을을 돌아 다시 운곡으로 오니 과연 한 나그네가 바위 위에서 쉬고 있었다. 이에 부사는 정중히 인사하고 성내로 안내하였는데, 훗날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암행어사였다.』 이때 나그네가 쉬던 바위를 ‘어사암’이라 하고, 도호부사가 앞질러 간 길을 ‘원고개’라 하는데, 지금의 다운동사무소 인근이다.
□ 말미등
말응정의 끝이라 말미등(末尾嶝)이라고 하는데, 새각단의 북쪽으로 범서 서사리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대해 또 다른 설이 있다.11)
□ 산송골
다전의 서쪽 깊숙이 산성터가 있다. 축조연대와 규모에 대해 밝혀진바 없지만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이 산성의 동남쪽으로 뻗은 골짜기를 이른다.
□ 고대유적
다전마을에는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청동기시대 고분군과 동아아파트 뒤쪽에서 환호유구 일부를 비롯한 수많은 고분이 발굴되었으며, 입구에는 소규모의 고인돌 3기가 분포하고 있었다.
운곡에도 적석총 유구가 발견되는 등 다운동 전체가 청동기시대에서 삼한시대, 신라전기까지 이어지는 울산지방 고대문화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1) 72세, 400년 전 10대조에 입향. 울산향토사연구회장, 울산향교 전교 역임
2) 三國史記 券第十 新羅本紀 興德王 三年(828) 冬十二月 ... 入唐廻使大廉持茶種子來。王使植地理山。寀自宣德王時有之。至於此盛焉 3) 鶴城誌. 權相一. 英祖25年(1749). 建置沿革 郡治本新羅屈阿火村 婆娑尼師今始置 屈阿火縣 4) 울산다운동유적 ‘마’지역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 2001.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 p.18 5) 울산지명사. 이유수. 1986. 울산문화원. p88 6) 주 1)의 인물 7) 울산지명사. 이유수. 1986. 울산문화원. p891. 마을 동편에 있는 어사암(御使巖)이 마을을 보고 구부린 듯하다 하여 굴암(屈巖)이라 하던 것이 ‘구라미’ ‘구리미’로 변하여 한자로 쓴 것이 운곡(雲谷)이 되었다.
2. 삼호다리 밑 일대의 태화강을 해연(蟹淵)이라 하였다. 해(蟹)는 ‘게’니 ‘게’가 ‘개(犬)로 되고 ’개‘는 ’구(狗)와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구루미는 옛날에 ‘구리(狗里)’라 하던 것이 접미사 ‘미’가 붙어서 ‘구리미’가 되고 ‘구리미’는 ‘구루미’로 변하여 한자로 운곡(雲谷)이라 한 것이라 한다.
3. 구루미의 서북편에 있는 산의 생긴 모양이 마치 개머리 같으므로 구리동(狗里洞)이라 하던 것이 구르미(雲)로 변한 것이라 한다
8) 사람은 죽는데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핑계거리를 대며 합리화시키는 꼴을 두고 만든 말이다 9) 언양읍지. 언양읍지발간추진위원회. 2001. p.678 ...반천리 살수마을 동쪽 산 벼랑길이 곧 이곳인데... 10) 嶺南邑誌 蔚山府事例. 개국503년(1894). 山川條. ...使君灘 在郎官湖上 11) 울산지명사. 이유수. 1986. 울산문화원. p91새각단의 북쪽에 있는 범서면 서사리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말미등이라 하는 것은 말뫼등[馬山嶝(마산등)]이 변한 것인데 마산이라고도 표기한다. 말미 또는 말뫼라는 말은 높은 웃머리되는 산인 머리뫼란 뜻을 가진 것인데 이것을 한자로는 두리산(頭里山), 뇌산(磊山), 마산(馬山) 등으로 썼다. 머리뫼란 것은 그 산아래 사는 사람들이 매일 조석으로 쳐다보면서 저 산은 햇빛의 조림(照臨)을 제일 먼저 받을 만큼 가장 높은 우두머리격인 산이라 하여 마리뫼, 머리뫼라고 불러옴으로부터 발생한 말이었으며 이 머리뫼라는 산명은 다분히 그 마을의 머리인 진산(鎭山) 즉 주룡산(主龍山)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라 하였다. 지리산(地理山)의 두류산(頭流山)이란 일명도 이 머리뫼를 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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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배리긑 얘기가 왠지 우울하다
다운의 조그만한 마을에 이렇게 많은 지명과 이야깃 거리가...
두양반 차마시는 모습은 안봐도 비디오고...새각단.낙안소..한대밭골.갓골.배리끝.다전.구리미. 참 정겨운 이름이제. 울아버지는먹고살기 위해고향을 떠났고[그 바람에 난대현인이 되었지만] 방학이면 다전을누비고 다녔다오.동쪽거랑은 목욕탕이고 망은 오빠들이 봐주고.타성이 없었거든.어릴때 추억이 담긴 아주 예쁜마을이라우.수안선생 덕분에 또다시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언제 거랑에 목욕하면... 이제 망은 내가 봐 줄께...
언제 다시 그런날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