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강해(15) 2017. 7. 2
영광을 얻지 못한 남자(바락)
삿4:6-10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을 쓰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사기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부르신 네 사람의 사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부름 받은 사사는 나이 많은 옷니엘이었습니다. 거의 80세에 달하는 옷니엘을 통해 메소보다미아 구산 리사다임에게 8년 동안의 압제에서 구원하셨습니다(삿3:8).
그 다음에는 쓰임 받은 사람은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왼손잡이 에훗이었습니다. 그의 칼로 모압 왕 에글론의 기름진 배를 찔러 죽임으로 18년의 압제를 끝냈습니다(삿3:14).
농부 삼갈을 들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백성의 영적인 ‘고질병’은 잘 낫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태평세월이 있어도(80년) 하나님의 은혜를 잊기 일쑤였습니다.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 죽은 이후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또’ 다시 ‘배교’가 시작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반역한 이스라엘을 ‘하솔 왕 야빈’의 손에 ‘파셨습니다.’
그 결과 야빈 왕은 2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습니다.’
이번에는 야빈에게 20년 동안 학대를 받은 후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주부인 ‘드보라’를 들어 하나님의 사사로,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두 예상하지죠? 예, 일반적인 사람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는 사람의 기대를 초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고전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사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면 인간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모세나 갈렙 같은 노인도 쓰셨습니다. 소년 다윗도 쓰셨습니다. 장애인도 쓰셨습니다. 소 모는 농부도 쓰셨습니다. 여자라고해서 쓰시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어부와 세리를 자신의 제자로 삼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조건 아무 사람이나 쓰실 수 있는 것인가요? 그것은 아닙니다.
저는 다윗은 유언을 통해 그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삼하23:6-7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7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
‘가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잡으실 수 없습니다. 불평의 가시, 혈기의 가시, 불순종의 가시, 불신앙의 가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불살라 내버리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손으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응답하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사사로 부름 받은 사람은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거의 80세에 달하는 옷니엘도 나이를 핑계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왼손잡이 에훗도 장애인이었지만, 그 시대 소외된 사람 중 하나였지만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믿음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소 모는 막대기’ 하나밖에 없는 ‘삼갈’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 블레셋 사람 600명을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기에 ‘삼갈도 이스라엘을 구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3:31).
한 가정의 주부였던 ‘드보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기에, 여인의 몸이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먼저 그럴듯한 배경을 갖추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것이 채워지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혹시 내 기도대로 채워지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일을 뒤로 유보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그 배경과 그 능력이 오히려 가시가 되어 하나님의 손에 잡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좋은 배경이나 뛰어난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온전히 붙잡히면,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도’ 이 시대의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락을 불러다가>
오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하지 못해 영광을 얻지 못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드보라에게 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솔 왕 야빈의 박해로 고통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사를 세우라는 그런 명령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직접 지명하신 사람이 바로 ‘바락’이었습니다.
6-7절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셨느니라.”
드보라는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면 야빈의 군대 장관과 그 군대를 바락의 손에 넘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솔 왕 야빈의 압제로부터 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바락’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바락’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쓰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드보라는 단지 대언자로서 하나님의 신탁을 바락에게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언제나 문제가 벌어진 지역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구원자’를 찾아 세워 오셨습니다. 이번에도 그 원칙에 따라서, 하나님은 야빈 왕에게 가장 많은 박해를 받고 핍박을 당하고 있었던 납달리 지파 중에서 ‘바락’을 사사로 세우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사들도 매번 그런 식으로 세워졌고, 또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해 오셨습니다. 이번에도 똑같은 일을 계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분명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7절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셨느니라.”
단순히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하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더 구체적으로 ‘그를 네 손에 넘겨주겠다’입니다. 여기에서 ‘그’가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입니다.
적군의 우두머리를 잡으면 그 전쟁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우두머리를 누가 잡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우두머리를 잡는 자가 승리의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니라, 바로 바락의 손에 넘겨주시겠다고 지금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전쟁 영웅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전쟁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갈 그의 리더십을 확실히 세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락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겠다하니 그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일들은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다 알아서 해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락의 대답을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8절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바락은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이 축복의 기회를 그만 놓쳐버립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당신’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선지자 드보라입니다. 물론 야빈이 가진 철병거 구백 대가 너무나도 막강해 보여서 도저히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드보라가 같이 간다면 납달리 자손과 스블론 자손들을 규합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심리적으로 한층 더 든든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은 드보라에게 주신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드보라를 통하여 바락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락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바락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더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붙잡히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전의 사사들을 보십시오. 다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나갔습니다.
‘옷니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에 그는 스스로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가서 싸우지 않았습니까? ‘에훗’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에글론 왕을 암살한 후에,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으지 않았습니까?
‘삼갈’도 ‘소 모는 막대기’ 하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 붙잡혔을 때 블레셋 사람 600명을 쳐 죽였습니다.
그들은 뭐 자신만만해서 그렇게 순종한 것입니까?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전전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다른 조건을 내걸지 않았습니다.
‘바락’도 그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온전히 맡겼어야 합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어도 담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무엇가지고 이겼습니까? 물맷돌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삼상17:45) 이겼습니다.
이런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다윗은 훗날 이런 시를 썼습니다.
시8:1-2“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도 얼마든지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만드실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이 사실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락’은 여선지자 드보라의 치맛자락을 놓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조건부 순종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드보라를 통해서 즉시 바락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9-10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10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드보라가 함께 가겠답니다.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영광입니까? ‘사사’로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영광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적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이스라엘 온 백성들 앞에서 ‘전쟁 영웅’이 되는 영광입니다. 전쟁 이후 계속해서 사사로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조건부 순종을 택함으로써, 인간적인 방법을 계산하고 자기의 눈에 그럴 듯하게 보이는 사람의 도움을 의지하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신 영광을 발로 차 버리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전쟁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으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당시의 최첨단 무기였던 철병거 구백 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에게 너무나 쉬운 일이었습니다. 바락은 적장 ‘시스라’를 죽이는데 실패합니다. 그는 도망을 쳤고 훗날 ‘야엘’이라는 여인의 손에 죽습니다(삿4:17-22). 말씀대로 바락은 “영광을 얻지 못했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참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겨주셨으면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야지, ‘이 문제 먼저 해결해 주시면…, 저거 먼저 채워주시면…’ 하면서 늘 조건을 붙여 도망갈 구멍을 찾고 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겠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겁니다. 내게 다른 무엇이 더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린 아이처럼 미련하다고 해도, 내가 젖먹이처럼 약하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그런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데, 믿음이 약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따르지 못하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저런 조건을 붙이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영적인 싸움에 직면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겨놓고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넉넉히 이기는 사람들‘(롬8:37)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세상과 타협하게 만들고, 세상에 동화되어 살도록 유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그 자존심을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장애물이 있으면 있는 대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으면 있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갑시다. 그리하면 “영광은 우리의 것입니다.”그러면 장애물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재료가 되고,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기고 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직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자리에 다 들어가는 은혜를 맛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