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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소설] 도가니71편
“바로 이 신문입니다.”
젊은 목사는 신문 하나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어제 방송이 나간 후, 그동안 자애학원 사태를 조사해왔던
무진 인권운동센터를 주축으로 해서 자애학원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들은 무진의 오랜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며 전 무진 영광제일교회 목사였고
지금은 ‘교회 없는 교회’ 목사로 일하는 최요한 목사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젊은 목사가 잠시 성도들을 둘러보았다. 일순 침묵이 다시 이들을 내리눌렀다.
짧은 탄식을 애써 억누르는 사람도 있었다.
최요한 목사는 무진 영광제일교회를 지금의 담임목사인 아버지 목사와 함께
초창기부터 일군 목사로서 담임목사가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려 하자 반기를 들었고
그 불화를 견디다 못해 오년 전 이 교회를 나갔다.
그때 그를 따르는 많은 이들이 이 교회를 떠났고
무진 영광제일교회는 아직도 그 상처를 다 치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제가 최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비방하고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개인적으로 훌륭하신 분입니다. 아버님과 함께 이 교회를 개척하시던,
제가 코 찔찔 흘리던 꼬맹이 때부터, 저는 그분의 기도를 받고 자랐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더욱더 우리 교회의 장로로 계시는
두 형제를 고발하는 위치에 서면 오해를 받으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것을 모르셨을까요? 저는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그분을 고발해야 하는 위치에 어쩔 수 없이 서야 한다면? …
저는 그분을 잘 알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자리라면 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서셨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아멘, 했으나 이번에는 그 소리가 좀 약했다.
“자 여러분, 이밖에도 대책위에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전교조 출신 기간제교사. 이 사람은 이 사건이 나기 겨우 한달쯤 전에 홀연히 서울에서 옵니다.
그리고 한때 전교조에서 활동했는데 그동안 이상하게도 교사일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이 사건의 대책위를 맡아 지금은 학교 내에서 가장 열렬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참 이상한 대목입니다. 누가 봐도 이상하지요?
그리고 무진 인권운동센터. 이들은 말이지요, 우리 장로님 중에 최수희 장학관님 계시지만,
이상하게도 말이지요, 이사장과 이사진을 해임하고 관선이사를 파견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자, 그럼 교육청과 시청에서 그걸 들어준다고 칩시다. 그럼 누가 그 관선이사가 될까요?
지금 이 학원의 이사진들, 무진 시내에서 열 손가락에 들기도 아까운 그런 분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물론 본인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만 저희들 돈 받은 거? 있죠. 한번 갈 때마다 차비조로 10만원인가 받았습니다.
우리들 시간 없는 사람들, 정말, 가여운 아이들 위해서 일한다는 봉사의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 이사들 다 해임하고 50년 동안 판자촌에서 시작해서 온 가족이 사생활도 희생하고
오직 장애인 아이들을 위해 일생을 일궈온 그 학원 내놓으라고 합니다.
좋습니다. 죄지었으면! 내놔야죠. 법에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도 내놔야죠.
무진 영광제일교회 장로가 불쌍한 아이들에게 그런 짓 했다면! 저라도 다 내놓으라고 호통을 칠 겁니다!”
“할렐루야! 아멘!”
젊은 목사는 이번에는 목소리를 아주 작고 부드럽고 속삭이듯 바꾸었다.
귀엣말을 하듯이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러분, 그분들이 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그 죄가 너무 지저분해.
너무 좀 추해.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그래요. 사람이니까! 남자니까!
사춘기 가슴 빵빵한 아이들 보고 마치 다윗이 유부녀 밧세바 보고 유혹에 빠지듯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사탄의 유혹인 줄도 모르고! 그럴 수 있는데!
그러면, 에잇 장로님, 어서 벌 받으쇼! 하겠는데…… 이건 좀 너무 많이 갔어요. 너무 싸구려 뽀르노로 가버린 거야.
가다보니까 너무 많이 가서 마치 뱀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던 그때처럼 과장하고
거짓말이 거짓을 낳고 또 거짓을 낳아서 코미디로 변하게 해버린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상식을 가지고 이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상식 말입니다!!”
목사의 웅변은 폭포처럼 쏟아져내렸다. 에너지는 폭풍우처럼 충만했고 논리는 정연했다.
이제 대성전은 거의 감동의 도가니로 변해가고 있었다.
누구라도 감동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마음을 열고 그의 말에 흠뻑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령께서, 그분께서 임하신 것만 같았다. 최수희 장학관마저도 시큰해진 눈가를 훔쳤다.
[공지영소설] 도가니72편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조카아이가 요즘 뉴라이트인가 뭔가를 참 열심히 해요.
제가 한번 그게 뭐하는 거냐? 그러니까 삼촌 그거 우리 건강한 사회 만들자는 거예요, 그럽디다.
그래서 제가 그래? 근데 ‘뉴’는 왜 붙였냐? 하니까? 예전에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김일성 부자 찬양하던 게 부끄러워서 그래요, 하고 웃어요.
그래요, 그 아이는 저와 제 아버지이신 담임목사님의 기도 그리고 온 가족의 눈물어린 기도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가 운동권일 당시 히틀러의 선동론이라는 것을 공부했답니다.
그게 뭔데? 내가 물으니 그 애가 그런 말을 합니다.
히틀러가 당시 국민들을 기가 막히게 속이는 걸로 유명했는데 그 방법이 이것이랍니다.
예를 들어 국민을 오른쪽으로 좀 데리고 가고 싶으면, 오른쪽으로 100미터 가면 한 사람에게 금 10톤씩 준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선동한답니다.
그걸 들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생각하겠죠.
세상에 있는 금을 다 끌어모아도 한 사람에게 어떻게 10톤을 준단 말이야?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말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것도 없이 저런 말을 할까?
아마 한 100그램은 주겠지. 어쨌든 가보세나…… 즉 뻥을 치려면 세게! 쳐라.
그러면 사람들은 설마 다는 아니더라도 뭐가 좀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게 히틀러의 선동론, 공산주의자들의 선동론, 사탄의 선동론, 거짓의 아비들의 선동론!
자, 여러분 이제 제 말을 좀 정리해보십시다. 우리 장로님들 두 분, 그들은 우리들이 차마 하나님 아버지 모시는
이 자리에서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그런 일을 했다고 지금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을 고발한 이들은 운동권이었거나 아직도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 여러분들은 이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제 이 예배가 끝나면 여러분들은 무진 시민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거짓으로 우물거리지 말고! 주 수난 당하던 날 밤 비겁한 베드로처럼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 하지 말고
대답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들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기에 그들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욕하고 우리에게 돌을 던져도 우리는 절대 수난 당하던 밤의 베드로처럼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일찍이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오로지 예수께 희망을 두고 살 뿐입니다.
지저스 얼리빙홉! 예수, 우리의 살아 있는 희망! 예수가 있기에 우리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사모님 두 분 힘을 내십시오. 특별헌금 주신 것, 주님께서는 그것이 두 분의 눈물,
아니 지금 차가운 감방에서 고생하시는 그분들의 눈물로 이루어진 돈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들! 상심하신 두 분을 위해 큰 박수를 부탁합니다.”
최수희 장학관은 요즘 원어민에게 영어강습을 받고 있었으므로 대성전 안에서
축복과 위로가 함성으로 터지는 중에도 유학파 목사의 본토 발음을 몰래 따라하고 있었다.
지저스 얼리빙홉! ‘아이돈워나두우잇! 자, 다시 따라해보세요. 아이돈워나두우잇!
여러분들 말이지요. 저보고도 빠다 바른 듯이 너무 느끼한 목소리라고 하시는 분이 많으신데,
그거 겁내시면 안돼요. 느끼할수록 좋은 거예요. 자아, 더욱 느끼하게 원모어타임, 아이돈워나두우잇!’
“그 여자가 또 왔는데요.”
온라인 영어회화를 듣는 이어폰 너머로 김과장이 들어와 말했다.
최수희는 서유진이라는 것을 알고 여느 때처럼 약간 주름을 잡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가락을 가볍게 저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방금 배운 영어회화를 ‘더욱 느끼하게’ 따라해보았다.
아이돈워나두우잇!
[공지영소설] 도가니73편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사건의 충격이 가라앉을 무렵,
영광제일교회의 젊은 목사가 말한 논리 역시 많은 힘을 얻어 퍼져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상식적이었고 보통사람의 사고에 잘 맞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사건이 자신의 도시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부끄럽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했다.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고치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생각해봐. 선생들 다 있는데, 애들 보는 눈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겠어, 아무리 말이야.
그리고 교직자잖아. 그냥 좀 집적거린 거겠지.
사춘기 아이들이니까 그걸 예민하게 받아들인 거고 말이야.
에잇! 사람들이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어린 것들한테……”
누군가 말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강석 형제가 그렇고 그런 못난 남자들 중의 일부일 뿐이라고
얼른 판결을 내리고 싶어했다. 그러면 도시를 뒤흔든 사나운 소동은 햇살에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면서
바다 쪽으로부터 부드러운 바람이 산들산들 밀려오는 것도 같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다시 온화해졌고 햇살은 다시 따뜻해진 것만 같아서,
다가오는 아이들의 대학입시와 김장과 물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두런거리며 할 수 있었다.
그 무렵 강인호는 서무실의 호출을 받았다.
서무실에는 오십줄이 넘어 보이는 낯선 남자가 돈을 세고 있었고
뜻밖에도 윤자애가 팔짱을 낀 채로 그 곁에 앉아 있었다.
강인호가 문을 들어설 때부터 윤자애는 노골적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 돈 세어보시고 거기 사인 좀 해주세요.”
낯선 남자가 말하자, 강인호는 영문을 모른 채로 그가 내미는 돈과 종이를 집어들었다.
종이에는 ‘이강복이 강인호에게 빌린 오백만원을 반환함’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강인호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들자 낯선 남자가 돋보기 너머로 강인호를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교장선생님께서 우선 개인적인 모든 채무를 깨끗이 하시고 싶다고 해서 제가 대리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이 학교에 부임할 때 강제로 내게 했던 ‘사립학교 발전기금’이
졸지에 개인적 채무가 되어 이제 다시 그의 손에 쥐어지게 된 것이다.
아직 시청이나 교육청이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곧 감사가 시작될 것에 대비하는 것 같았다.
강인호는 얼핏 웃음이 나와서 일단 그 돈을 받아들고 사인을 해주었다.
윤자애의 당돌한 시선은 아직 그의 귓바퀴에 머무르고 있었다.
요즘 다시 학교로 돌아온 연두와 유리, 민수 등을 윤자애가 기숙사에서 수시로 불러 혹시라도 재판에 나가면
교장 형제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못하도록 아이들을 협박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갑자기 윤자애가 입을 열었다.
“경력이 참 대단하시던데요?”
강인호가 비로소 그녀를 돌아보았다.
“비합법 시절의 전교조 투사를 이런 촌구석 벙어리 학교에서 만날 줄이야, 하!”
“전교조?”
어이가 없다는 듯 강인호가 되묻자 윤자애는 대답 대신 그를 노려보더니 다시 말했다.
“당신 누구야? 누가 보냈어? 왜 온 거야 여기!”
윤자애는 악을 써댔다. 기가 막힌 강인호가 무어라 대꾸를 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공지영소설] 도가니74편
아내였다. 강인호는 그냥 윤자애를 무시하고 복도로 걸어나와 전화를 받았다.
먼저 전화를 걸어놓고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송이 나간 후 바로 전화를 할 것 같아 내심 각오를 했었는데 아내는 한동안 전화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비로소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새미 아빠, 여태까지 당신 일에 반대한 적 거의 없어, 그치? 나 당신 언제나 믿었어, 그치?”
아내는 오래 생각한 듯했다.
그는 그래서 무언가 중대한 말이 나올 거라는 것을 짐작했고
그것이 그의 의지와는 다른 것일 거라는 걸 짐작했고 그래서 무겁게 응, 하고 대답했다.
짧은 이별이었지만 그 사이 그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기에
어차피 아내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부탁해 어렵게 자리를 만든 아내의 입장이 얼마나 곤란할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아내에게 전화할 수 없고 상의할 수 없었는데
이제 아내는 너무 먼 나라의 이민자같이 그에게는 느껴졌다.
체제도 언어도 화폐도 다른 나라의 사람 같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한 생(生)처럼 길게 느껴지는 그런 일들이.
“나 생각해봤는데, 당신 빠른 시간 내에 그냥 서울로 오면 좋겠어.
그 사람들 옳고 당신 틀려서 그런 거 아니야.
당신 거기 취직시켜준 내 친구가 나한테 전화해서 그래, 정말 지랄지랄……”
아내는 여기서 잠깐 말을 끊고 침을 삼켰다. 그러자 그가 혼자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그간 아내가 혼자 당했을 모욕이 깊었을 거라는 게 비로소 느껴져왔다.
남편 하나 잘못 만나 이렇게 목구멍으로 굵은 수모를 삼켜야 했으리라.
만일 그녀가 가까이 있었으면 그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오래 안아주었을 것이다.
그는 혼자 그것을 견디어내고 삭이고 정리한 후에야 비로소 전화를 건 아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고,
고맙고 미안한 만큼 그러나 또 아내가 멀어지고 있는 것을 인정했다.
운동장 끝으로 걸어온 그의 시야 멀리 갈매기들이 낮게 날고 있었다.
먹이를 찾아서 낮게 더 낮게 날갯짓을 하며 강하하고 있었다.
“그래, 그놈들 나쁜 놈들이지. 당신이 하려는 그거 옳은 일이지. 그 아이들 불쌍하지.
그런데 하지 마. 당신은 하지 마. 부탁이야, 여보. 손 떼고 돌아와. 그냥 와.”
강인호는 담배를 물었다. 맑은 가을 저녁이었다.
만 너머로 펼쳐진 젖빛 갈대들이 보이는 풍경 너머로 그는 뽀얀 담배연기를 뿜었다.
마지막 남은 햇볕은 옅은 분홍과 보랏빛으로 구름을 물들이며 기울고 있었다.
이 모든 풍경에서 사람들을 지워버린다면 여기가 천국일 것이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아름다운…… 천국.
“한번만 눈을 감아줘, 나랑 새미 위해서. 정 미안하면 방법은 많아.
당신이 갑자기 아픈 걸로 하고 나머지 짐이랑 그런 거 내가 다 싸러 내려가도 돼.”
“내일…… 공판 시작이야.”
강인호는 그가 부임하기 한달 전 이 운동장 끝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여학생을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저녁은 너무 평온한 가을 저녁이었다.
바람도 없는데 갈대들이 부드럽게 부풀어오르며 햇살을 끌어안고 있는 듯 보였다.
막 머리를 감은 듯 부풀어오르는 갈꽃들이 소녀의 머리털처럼도 보였다.
“새미 아빠 부탁이야, 한번만 눈감고……”
“………”
“당신, 나랑 새미 사랑하잖아. 그 아이들 사랑하겠지.
그렇지만 나랑 새미를 더 사랑하잖아, 그러니까……”
강인호는 입술을 잠시 물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새미 엄마 잘 들어.
나 그 아이들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런데 이건, 너무 아니야.
너무 아닌데, 그걸 그렇다고 할 수는 없어서, 그러는 거야.
그래서 가더라도 말하고 가려는 거야. 이건 아니라고, 진짜, 아니라고.”
[공지영소설] 도가니75편
전화를 끊고 복도로 들어서다가 강인호는 잠깐 연두와 마주쳤다. 연두는 유리의 손을 붙들고 서 있었다.
그러고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샐쭉 웃으며 강인호의 손에 조그만 리본이 달린 봉투를 올려놓았다.
편지였다. 녹두알만한 금빛 방울이 매달린 분홍 리본으로 치장한 편지지를 내밀고
연두와 유리는 여느 사춘기 여학생들처럼 까르르 웃으며 복도 끝으로 뛰어갔다.
교무실로 들어가 강인호는 편지를 폈다. 음… 우리 강인호 선생님께,라고 시작되는 편지였다.
음… 우리 강인호 선생님께
일반학교 말고 청각장애인 학교에 와서 선생님께 편지를 써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박보현 선생님이 경찰서로 가신 이후로 저희는 좋은 저녁시간들을 보내고 있어요.
윤자애 선생님이 당직일 때만 빼구요. 실은 저는 이곳의 선생님들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어요.
뭐랄까요, 선생님들은 늘 한쪽 눈으로는 우리를, 그리고 다른 쪽 눈으로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 같았어요.
제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라서 그런지 저는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눈빛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선생님께서 처음 오신 날 저희에게 보여주신 그 시를 저는 아직도 기억해요.
성냥불도 켜주셨지요. 그때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제 마음속에 빛이 환하게 당겨진 것 같았어요.
그 전에는 내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불이 켜지고 보니까
아아, 내가 어둠속에 서 있었구나, 깨닫는 거 같은 느낌…… 아세요?
그날 이상하게도 선생님의 두 눈이 우리만 바라보고 있다고 저는 느꼈어요.
민수 동생이 죽은 이야기를 그래서 아마 선뜻 꺼냈는지도 모르구요.
교장선생님이랑 서무실장 선생님 그리고 박보현 선생님이 곧 재판정에 서신다구요.
선생님께서도 증언을 하러 나가신다고 들었어요.
서유진 간사님이 어머니께 전화를 하셔서 저희도 증언대에 서야 할지 모른다고 하셨대요.
저는 선생님께서 얼마나 우리들을 위해 잘해주실지 믿어요. 우리도 잘할 거예요.
저는 이전에는 어른들은 모두 나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서유진 간사님, 우리 강인호 선생님
그리고 저희를 위해 대책위원장을 맡아주신 최요한 목사님을 뵈면서 정말 반성을 많이 했어요.
제가 너무 세상을 나쁘게만 생각한 것 같아 죄송했어요.
선생님 오늘은 옆침대의 유리가 잠들었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어요.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추워서 창문을 닫으려고 창가로 갔는데
멀리 달빛 아래 갈대밭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게 보였어요.
바람이 부는지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도요.
아주 어린 시절 제 귀를 스치며 들려오던 그 바람소리가 기억났어요. 소리의 기억이요……
이젠 너무 희미해져서 그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선생님께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나봐요.
그 이야기, 제가 들을 수 없게 된 이야기… 말이에요.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날, 저는 아주 아팠어요. 밤새 많이 아팠어요.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큰집 제사에 가시고 이웃집 할머니가 절 보고 계셨는데
혼자서 저녁때부터 막걸리에 취해 제가 아무리 울어도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새벽녘에 엄마가 오셔서 제 이마에 찬 물수건을 올려주고 한참을 지나서야 저는 겨우겨우 잠이 들었지요.
잠에서 깨어난 아침, 이상하게 집안이 너무 조용했어요. 너무나도요……
묘했어요. 물속 깊이 잠긴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아서 눈을 뜰 수가 없는데
내가 너무 늦잠을 자서 식구들이 모두 나갔나보다 생각하고 졸린 채로 엄마를 불렀지요.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엄마가 대답을 안 하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나서 엄마! 하고 고함을 치며 일어났어요. 벌떡 일어난 순간, 저는 알았어요.
식구들이 바로 제 곁 둥그런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다 말고 모두 저를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제 고함소리에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말이지요.
그러니까 아픈 저를 아랫목에 눕혀놓고 식구들이 바로 옆에서 밥을 먹고 있었던 거지요.
그리고 무언가 말을 했어요. 아니, 한 것 같았어요. 입이 벙긋벙긋 하더군요. 아무리 제가 어렸지만 가슴이 철렁했어요.
무언가 아주 나쁜 일이,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되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만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