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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15) 2018. 11. 21
세 가지 징조
삼상 10:1-7
<지난 시간 요약>
자신을 찾아 온 사울을 본 사무엘은 이 청년이 바로 하나님 예고하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어야 할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사무엘은 그를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합니다. 그리고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울의 최대 관심사인 암나귀들의 행방을 알려줍니다. 이미 찾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에게 중요한 내용이 있더라도 상대방의 입장(관심사)을 먼저 배려하는 사무엘의 목회적 마인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20절b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이 말에 놀란 사울은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21절) 하고 대답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모든 지파 중에 막내 지파인데다가, 기브아 불량배들을 보호하려다가 거의 전멸을 당해 이제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지파였습니다. 그러한 지파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나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자신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중에서 가장 보잘 것이 없는 집안인데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자기 인식과 동시에 겸손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상석에 않게 합니다(지역의 유력한 사람들 30명을 초대). 그리고 요리인에게 준비된 음식을 내어오게 합니다. 바로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24)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의 몫인데(레7:32),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내어줍니다. 이는 사울을 장차 왕이 될 자로 최고의 예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는 사무엘의 훌륭한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식사 후 사무엘은 사울을 지붕으로 불러 담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의미하는 바를 가르쳐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사무엘은 사환을 앞서 보내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려주겠다고 합니다.
<기름을 붓는 사무엘>
사무엘은 사울과 단 둘이 남자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1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기름을 붓는 것은 거룩한 구별, 곧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움을 받았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출 30:30). 이스라엘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가 이러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왕의 소명을 받은 증표’로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사울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기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출 19:5).
그런데 주어가 “여호와께서”입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었지만 그 실제적인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받은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손을 거쳤지만 그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한편 굳이 ‘왕’이라는 표현보다는 ‘지도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9:16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왕은 하나님 한 분).
그런데 문제는 지금 사울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울은 자기 집에서 도망친 암나귀들을 찾으러 나왔다가 얼떨결에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자리라 할지라도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것은 여간 부담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또 이 일이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형식적인 예식)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셔서 세우셨다”는 마음의 소명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세 가지 징조>
그래서 사무엘은 세 가지 징조를 만날 것임을 예고하여 주십니다. 세 가지 징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다는 분명한 내적 확신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징조는 2절에 있습니다.
2절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베냐민 경계에 셀사라는 곳에 라헬의 묘실(무덤)이 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 두 사람이 ‘네가 찾던 암나귀들은 이미 찾았기 때문에 걱정 하지 말고, 오히려 아버지 기스가 당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하고 있다’라는 말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 말을 듣게 되는 장소의 상징성입니다.
마치 오늘날 어떤 결단이나 예식을 할 때 상징성을 가지는 장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대통령에 당선되거나, 정당 대표에 당선되거나 하면 공식적으로 가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현충원(국립묘지)입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모신 곳이기에 그만큼 ‘장소가 갖는 상징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 장소에서 지나온 역사를 생각하며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것인지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부모님의 묘소를 찾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두 사람을 만나 장소가 라헬의 묘실(무덤)입니다. 베냐민 지파인 사울에게 라헬의 묘가 갖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누구입니까? 야곱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사고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의 받은 일로 인해 형 에서의 분노를 샀습니다. 그는 급히 외삼촌 라반으로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라반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바로 레아와 라헬입니다. 야곱은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하였습니다. 야곱은 그녀를 얻기 위해 7년을 봉사하였지만 장인 라반에게 속아 레아와 결혼하였습니다. 곧 이어 라헬을 아내를 맞았지만 이후 7년을 더 무료로 봉사해야 했습니다. 라헬을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레아가 4형제(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낳는 동안,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몸종 빌하를 통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 했을까요? 성공하여 단과 납달리를 얻었습니다. 레아도 지지 않으려 자신의 몸종 실바를 통해 아들을 낳습니다(갓과 아셀). 이후 레아는 또 다시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잇사갈, 스불론).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으로 라헬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더군다나 둘째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 끝에 라헬은 생명을 잃었습니다. 라헬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즉 ‘나의 슬픔의 자식’이라고 짓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이름을 ‘베냐민’ 즉 ‘오른 손의 아들’이라고 고쳐 불었습니다(창35:18). 특별히 구약에서 ‘오른편’은 ‘능력’(시110:1)이나 ‘하나님의 도우심’(사41:10)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베냐민’이라는 이름은 ‘슬픔 가운데 얻은 자식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아버지 야곱의 애틋한 마음에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냐민은 어머니 라헬이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 낳은 아들입니다.
아마도 베냐민은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그 은혜에 고마워했습니다. 그래서 훗날 ‘베냐민 지파’는 라헬의 묘가 있는 땅을 차지했습니다. 아마도 이 묘실을 찾을 때마다 베냐민 지파는 라헬의 희생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라헬의 묘실은 베냐민 지파의 뿌리, 즉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 사울입니다. 사울에게 라헬의 묘실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상징적인 장소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 준 어머니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왕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돼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백성들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왜 두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어떤 특별한 일에 대한 법정적 증언을 위해서는 반드시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예언은 사울에게 확실한 소명을 주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이, 그것도 복수의 사람이 자신의 사정을 정확히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사울을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징조는 본문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4절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4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다볼에 있는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세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은 벧엘로 제사 드리러 올라가는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졌습니다. 염소, 떡, 포도주 모두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입니다(민15:5-6).
그런데 이 세 가지 물건은 왕에게 드리는 물건이기도 했습니다.
훗날 사울이 악령이 들렸을 때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뽑았는데 다윗이 뽑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이새는 다윗으로 하여금 떡과 포도주, 그리고 염소 새끼를 사울에게 가져다주도록 하였습니다.
16:20-23 “이새가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그의 아들 다윗을 시켜 사울에게 보내니/ 21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 22 또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원하건대 다윗을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23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그런데 떡 세 덩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떡 두 덩이를 사울에게 줄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4절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문안한다’는 것은 단순한 안부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왕에 대한 예우의 표현입니다.
또 ‘떡 두 덩이를 준다’는 것은 단순히 먹을 것을 나누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떡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용도로 가져가는 거룩한 떡입니다. 즉 하나님께 바친 것인데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제물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떡을 사울에게 준 것은 마치 ‘사무엘이 넓적다리 고기를 사무엘에게 준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서 ‘왕 같은 제사장직’을 잘 수행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백성들을 섬기라는 의미로 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징조는 5-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5-6절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 곳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6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하나님의 산’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의 기브아’입니다. 이는 사울의 고향 ‘기브아’를 가리킵니다. 아마도 당시 기브아에 하나님께 제사하던 산당(13절)이 있었기 때문으로 그렇게 부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산에 ‘블레셋 사람들의 영문’이 있었습니다. 이 ‘영문’(진영의 문, 위병소)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세운 전초 기지가 있었습니다. 후에 요나단이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한 것(삼상 13:3-4, 14:4)으로 보아 블레셋의 군사 기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거기서 ‘선지자의 무리’를 만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점점 숫자가 늘어납니다. 첫 번째 징조인 ‘라헬의 묘실’에서 만난 사람은 ‘두 명’, 두 번째 징조인 ‘벧엘로 제사 드리러 올라가는 사람들’은 ‘세 명’, 그리고 세 번째 징조인 ‘하나님의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선지자의 무리’로 그 수가 점점 늘어납니다. 증인의 숫자가 점점 늘어납니다. 사울에게 더욱 분명한 확신을 주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무리’는 사무엘 선지자가 세운 선지학교의 ‘생도들’(왕하 23:3-7, 4:1)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사무엘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역량 있는 선지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선지학교를 세우고 가르쳐 왔습니다. 훗날 엘리야와 엘리사도 선지학교를 세우고 교육하였습니다.
이 선지자의 무리들이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파와 수금’은 오늘날의 하프와 기타와 비슷합니다(현악기). ‘소고’는 일종의 탬버린인데 일찍이 미리암이 사용했습니다(출 15:20). 그리고 ‘저’는 피리의 일종입니다(사 5:12; 30:29).
‘예언하며 내려온다’는 말은 성령 충만한 가운데 여호와를 찬양한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그들이 여러 악기로 연주하며 내려오는 중에 의식을 잃지 않은 사실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그들을 만날 때 사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예언합니까?
6절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여호와의 영’은 성령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성령님께서 활동하시면서 특별한 은사를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상당히 제한적으로 활동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임하시기도 하며 떠나기도”(삼상 16:14) 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오신 성령께서는 성도의 마음에 내주하시며 떠나지 않으시고 중생, 성화의 역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요 14:16, 행 2:1-4).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는 말씀은 내적 확신 곧 ‘새로운 의지와 마음을 가진 존재’로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외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 변화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두 가지 징조와 더불어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부름 받았다는 확실한 소명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한 소명을 사람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 분명한 징조(계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계시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주는 징조와 같은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기록 목적을 이렇게 썼습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다른 하나는 오늘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입니다.
우리가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인정할 때 성령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말씀과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내적 확신을 주십니다.
교회에 등록했다고, 외적 물세례를 받았다고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으로 성령님에 의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 때 분명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확신이 생길 때 이전의 삶으로부터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종의 삶에서 아들의 삶으로).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이 징조에 대한 예언을 마친 사무엘은 사울에게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7절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이 세 가지 징조가 임하거든 ‘기회를 따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사울이 왕이 될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징조가 임하면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우물쭈물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선물)로 알고 적극적으로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분명한 징조가 임했으니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놓치지 말고 믿음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은 사울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 완전한 계시를 내리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님을 통해 내적 확신을 주셨습니다. 믿음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결단입니다. 헌신입니다. ‘기회를 따라 행하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놓치지 말고 믿음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임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더욱 쓰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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