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에서
안연미
역사는 현실일까, 전설일까. 가는 곳마다 서글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여기는 충절의 고장 강원도 영월.
명승 50호로 지정된 청령포는 어린 단종의 비애를 간직한 곳이다. 희뿌연 겨울은 떼 지어 노닐던 새들을 강 너머 솔숲으로 들여보낸다. 나룻배 형상의 동력선은 손님을 태우자 쿨룩 쿡쿡 신음을 뱉으며 살얼음을 걷어낸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서강(西江)이 격한 울음을 토해낸다. 비통한 그 날 어린 임금의 마지막 숨소리도 저리 거칠었을까.
어느 예술인의 발상이런가. 입구에서 만난 이정표의 색깔 배합은 겨울날 눈 속에 피어난 매화 같다. 원혼이 남았을 이곳 역사의 현장에서 분홍 바탕의 흰 글씨라니! 예술가도 어린 임금의 원혼을 달래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 옆을 비켜서 몇 걸음 걸으니 세월 따라 굵어진 소나무는 가지마다 팔을 벌려 하늘을 가린다. 울창한 숲 속은 어둡기까지 하다. 단종어가를 향해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단종어가는 어린 임금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그리고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었던 곳이다. 수백 년이 지난 소나무 한 그루가 어가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다. 임 향한 충정에 허리조차 펴는 것도 잊었을까. 소나무는 가히 충절송의 이름을 얻을 만하다. 어쩌면 저 소나무는 사육신의 넋일는지도 모르겠다. 억울하게 죽은 어린 임금을 둔 충신들은 죽어서도 소나무가 되어 임금을 지키고 싶었으리라.
아니면 일찍이 돌아가신 어머니 현덕왕후의 걱정스러운 모습이 아니었을까. 한양에서 목 놓아 기다리는 아내 정순왕후의 그리운 자태이기도 했을 것이다. 말 붙일 사람 하나 없는 이 외진 곳에서 청령포의 소나무는 어린 임금의 아픈 마음을 보듬어 주었던 안식처였다.
궁녀와 관노들이 기거했다던 행랑채를 들여다본다. 낮은 담장 하나로 신분의 경계를 구분했던 돌담도 비운의 역사를 모두 보았을 것이다. 궁녀가 있다기에 부엌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더니 궁녀는 밀랍인형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다. 나는 넋을 잃고 인형을 주목했다. 한평생 임금의 수발로 생을 마쳤을 궁녀의 인생은 무엇이라 해야 옳을까. 임금과 더불어 평생을 죄인으로 산 저 궁녀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단종이 사약을 받았을 때 이곳 영월에도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진 궁녀들이 있었음을 아는가. 백제 의자왕이 신라에 무릎을 꿇던 날, 궁녀들이 백마강에 몸을 던졌던 낙화암이 있었듯이 이곳 궁녀들 역시 임금이 사약을 받았을 때 동헌 앞에 흐르는 동강으로 한 맺힌 몸을 던졌다고 한다. 임금에게 궁녀는 무엇이었을까. 궁녀에게 임금은 무엇이었을까.
궁중의 꽃 궁녀는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이라서 선출 조건 또한 몹시 까다로웠다 전한다. 4세에 입궁한 어린 궁녀들은 12, 13세가 되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여러 가지 절차가 있었다. 그중에 처녀성을 확인하기 위한 금사미단(金絲未斷)의 판정이 참으로 해괴하다. 앵무새의 피 한 방울을 궁녀의 팔에 떨어뜨려 피가 퍼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처녀요, 피가 팔뚝에서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니라 해서 탈락시켰다. 하찮은 앵무새의 피 한 방울에 생을 송두리째 맡긴 인생도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궁녀들이 몸을 던졌다는 강물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려나.
어린 임금이 한양 쪽을 바라보며 깊은 시름에 잠겼다던 노산대魯山臺에 오르니 가파른 벼랑 아래에 서강의 겨울 전경이 눈 아래 모여 있다. 군데군데 언 듯 녹은 강물이 봄을 만나 얼음을 깨고 흐르기 시작할 때, 젊은 궁녀들은 빨래를 핑계로 강가에 나가 두고 온 가족과 임금을 생각했을 것이다. 가여운 임금과 그리운 가족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이 얼마나 되었을까. 때로는 아무도 몰래 강을 건너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한양에서부터 자신의 꿈을 깨끗이 포기하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나이에 궁녀가 되어 입궁하던 날 그들의 꿈은 이미 강물에 던졌을지도 모른다. 한양에서 임금과 왕후의 애달픈 이별을 목격한지라 이곳에서는 어린 임금에 대한 보살핌에 온 힘을 다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임금의 복위를 위해 고초를 겪다 죽은 여러 충신처럼 자신들의 소임을 다 할 것을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애통함은 한이 되어 강물을 따라 흐른다. 꽃다운 숨결이 잠들어 있을 강가로 가까이 가보면 어떨까.
슬픈 역사로 얼룩진 청령포를 뒤로하고 송림을 빠져나오니 세월에 씻긴 자갈밭이 저녁 햇살에 빛난다. 강가를 걷다가 조약돌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 옛날 이곳에서 빨래를 두들기던 궁녀의 손길이 닿았을지도 모른다. 귀 막고 입 닫은 그들에게 어쩌면 이 돌은 그리운 가족이요, 친구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만지작거렸던 조약돌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들과 이별을 해야 하는 시간인가.
꿈쩍 않던 나룻배는 손님을 향해 요란한 소음을 내뿜으며 발길을 재촉한다. 애달픈 역사는 살얼음 밑으로 유유히 흐른다. 청령포는 역사를 안고 저녁 햇살에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