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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강해(13) 2023. 10. 15
사람을 세우는 느헤미야
느헤미야7:1-73
<성벽 중수 작업 완료>
(산발랏, 도비야, 게셈 등) 외부의 조직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또 그들에게 빌붙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유착 세력들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의 흔들리지 않는 지도력과 느헤미야를 신뢰하는 백성들을 헌신을 통해 불과 52일 만에 기적적으로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1차 목표는 달성하였습니다. 이제 더 중요한 일이 남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읍을 ‘하나님의 성읍’답게 만드는 일입니다.
컴퓨터에 비유한다면, 아무 성능 좋은 컴퓨터를 구매해도 그것을 바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드웨어일 뿐입니다. 성능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깔아주어야 제대로 된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성벽은 하드웨어입니다. 소프트웨어가 제대로 준비되어야 예루살렘은 진정한 도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첫 출발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가장 먼저 세운 사람>
느헤미야가 가정 먼저 세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1절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예, 가장 먼저 세운 사람은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입니다.
‘문지기’는 무얼 하는 사람입니까?
예, 외부로부터 성읍을 안전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들어와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당시 마을을 지켜낸 25세 여성의 사연이 전해졌습니다. 이 여성은 이스라엘에서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10일(현지 시각) 뉴욕포스트에 따르면 이스라엘 가자 지구에서 불과 1.6km 떨어진 키부츠(이스라엘의 집단 농업 공동체) '니르 암'의 보안요원 인발 리버만(25)은 주민들과 함께 하마스 대원 25명을 사살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하마스 대원들이 이스라엘 남부를 공격했던 지난 7일 오전, 리버만은 평소와는 다른 폭발음을 들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무기고를 열어 신속대응팀에 무기를 건넸고, 키부츠의 주변에 매복 공격을 준비하는 등 전투태세를 갖췄습니다. 얼마 후 하마스 대원들이 키부츠 울타리로 접근했고, 이들은 즉시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25명의 하마스 대원이 목숨을 잃었지만, 주민들은 모두 무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스라엘 일간 마리브는 해당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이 리버만을 '영웅'이라고 칭송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SNS에서는 "모든 것이 끝나면 이 여성은 이스라엘 상을 받게 될 것", "그녀의 영웅적 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스라엘의 전설로 전해질 것"이라는 등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또 이 문지기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성벽(망대) 위에 올라가서 외부의 적들이 다가오는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날로 보면, 넓게 보면 정보기관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가자지구의 하마스 습격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의 책임이 큽니다.
아마도 전쟁이 끝나면 큰 문책과 더불어 대대적인 개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느헤미야는 문지기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습니다.
3절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
성문은 보통 해가 뜸과 동시에 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문 여는 시간을 ‘해가 높이 떴을 때’로 많이 늦추었습니다. 성벽 재건은 완료되었지만, 사면의 대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루살렘 정착을 집요하게 훼방하고 있었기에, 여전히 경계심을 풀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파수꾼들이 지키고 있을 때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지기의 역할(파수꾼의 역할)은 전문 문지기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읍의 주민들에게도 저마다 지정된 장소에서 보초를 서게 하였는데, 특히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대를 분별하는 ‘영적 파수꾼’입니다.
사람들에게 경고음을 울려 마지막 때를 대비하며 살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롬13:11~14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두 번째 세운 사람은 성전에서 봉사할 찬양 대원들과 레위인들입니다.
1절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노래하는 자들’을 세웠습니다. 즉 ‘성전의 찬양 대원들’을 재조직한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 조직되었던 성전 찬양대를 다시 정비함으로 성전제사의 웅장함과 고귀한 사역을 다시 부흥케 한 것입니다.
또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쌓으려는 목적도 예루살렘 성전을 보호하고 그 기능을 온전히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느헤미야는 성전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전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며, ‘제사장 나라’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신약시대는 ‘성전 중심의 신앙’이 아닙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입니다. 성전은 특정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우리 안에 거시시면, 우리 몸이 곧 성전입니다.
그런데, ‘성전 중심의 신앙’이든 ‘말씀 중심의 신앙’이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성령님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무의식의 영역까지 지배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우리의 인생은 자전거 바퀴와 같다고 비유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자전거 바퀴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지요? 예, 중심에 허부가 있고, 그 허브에서 여러 개의 살이 림(휠)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전거 바퀴의 모든 살들은 우리가 맺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자전거 바퀴의 살은 부모님과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 배우자와의 관계, 자녀들과의 관계, 직장 동료/친구들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 바퀴의 다양한 살들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퀴의 다양한 살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퀴의 중앙에 있는 ‘허브’여야 합니다. 자전거 바퀴의 모든 살이 허브에서 나오고 또 그곳에 연결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허브입니다. 모든 관계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시인인 T. S. 엘리엇은 “하나님은 회전하는 세상에서 정지해 있는 한 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약1:17)고 정의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주관자로 인정하고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23편에 그의 신앙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시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인정하였습니다. 자신의 그의 기르시는 양일뿐입니다.
내가 내 삶을 이끌어 나간다고 생각하면 피곤한 인생이지만, 하나님을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한다면 마음이 담대해집니다.
때로 우리가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맡기면 가장 좋은 것으로 내게 베풀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성전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벽을 완공한 후 성전을 섬기는 일꾼들을 우선적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세우기 위해, 또 인구 배분을 위해 정확한 인구조사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읍은 아주 크고 넓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읍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성읍 안에는 제대로 지은 집들도 얼마 없는 상태였습니다(4절). 한 마디로 예루살렘 성읍은 썰렁했고 황량했습니다. 본국으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성벽조차 없었던 예루살렘을 떠나, 보다 안전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귀향자들의 명단 (7:4-73) - 때마침, 느헤미야는 일찍이 바빌로니아 땅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1차로 고향 땅에 돌아온 사람들의 가족별 등록 명부를 발견했습니다.
첫 번째 귀환민의 족보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① 5-7 : 인솔자명단, ② 8-38 : 가족별 명단, ③ 39-45 : 제사장과 레위인, 노래하는 자, 문지기 명단, ④ 45-60 :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종 명단, ⑤ 61-65 : 계보 불확실한 자 명단, ⑥ 66-73 : 귀환자 총수와 예물의 총계 등입니다.
느헤미야가 확보한 이 족보는 공동체의 확립 즉, 누가 진짜 유대인인지 신원을 확인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적법한 사람을 예루살렘 공동체에 들어오게 할 수 있는 일에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족보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레위 가문의 사람들에게만 허용했던 성전 직무를 수행할 만한 적법한 사람들을 가려낼 수 있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목할만한 내용이 64절-65절에 나옵니다.
64~65절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65 총독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 안에 들어 있는 우림과 둠밈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 도구였습니다.
우림과 둠밈의 모양, 재료 등은 분명하지 않으나 제사장이 판결의 흉패에 넣고 다닌 것으로 보아(레 8:8), 돌이나 보석이 일종으로 추측된다. 보통은 하나님의 뜻을 ‘Yes'나 'No'로 묻는 단순한 문제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데 사용되었다. 우림과 둠밈은 초기 왕정시대까지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었으며(삼상 28:6), 다윗 이후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면서부터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
따라서 대제사장이 우림과 둠밈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제사장의 족보에서 누락된 사람일지라도 누가 제사장의 자격에 부합되는지를 분간할 수 있었고, 따라서 제사장의 몫인 지극히 거룩한 음식 먹는 것을 허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림과 둠밈은 오랜 세월 동안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남왕국 유다가 멸망할 때(주전 586년경),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나타날 때까지 족보에서 누락된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에게 지극히 거룩한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명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그동안 자격 없는 제사장들이 교묘하게 이스라엘 공동체에 파고들어,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특권을 행사하며 제사장이 누리는 권리를 누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 무자격자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큰 교훈을 줍니다. 예전에, 천막만 치고 교회를 개척해도 사람들이 몰려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기회에 소위 ‘학위 장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보면, 어디서 신학을 공부했는지, 어느 교단에서 안수를 받았는지 모를 많은 사람이 대거 목회 현장에 나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덕적으로 말로 다 형언치 못할 부끄러운 일도 많았습니다. 또, 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이 교회 안에서 활개를 쳤습니다.
저는 교회에는 누구나 올 수 있지만, 교회의 지도자는 반드시 정식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학교육은 물론, 영적으로 건강하여,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에 감격하고, 성령님의 통치에 철저히 순종하는 자가 지도자가 되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건강해야, 교회도 건강해지고, 교회가 건강할 때 성도들도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행정 책임자를 세움 - 사람을 쓰는 기준>
그 다음 행정 책임자를 세웠습니다.
2절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여기서 ‘하나니’는 느헤미야의 아우입니다. 그러나 느혜미야가 그를 임명한 것은 그가 단지 그의 친형제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니는 느헤미야가 바사 왕실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있을 때, 예루살렘의 참담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까지 멀고 힘든 여행을 할 정도로, 예루살렘의 안녕에 큰 관심과 열심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와 같이 귀국하여 성곽건축을 도운 실로 느헤미야의 오른팔과 같은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느헤미야에 대한 충성심은 신뢰할 만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공동 행정 책임자로 세웠는데, 그는 바로 ‘하나냐’입니다. 그의 직임은 ‘영문의 관원’이었습니다. 즉 북쪽 성문을 지키는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사실 그의 경험은 일천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를 과감하게 예루살렘 전체를 다스리는 행정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파격적인 인사입니다.
왜, 느헤미야는 그를 택하여 예루살렘의 행정 책임자로 세웠을까요? 느헤미야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설명입니다.
‘충성’이라는 헬라어 ‘피스토스’(πιστὸς)는 주인 앞에서 변함없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피스토스”(πιστὸς)에서 영어의 “Piston”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자동차 엔진의 “Piston”은 일정하게 충성스럽게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그것이 자동차의 생명입니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피스톤 작업을 한 곳은 심장입니다. 장년의 경우에 1분에 평균 80회씩 마지막 순간까지 일평생 끊임없이 지속됩니다.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피스톤 작업을 진행하여 맥박이 끊임없이 뛰게 하고 혈액과 산소와 영양분을 몸 구석구석으로 운반하여 줍니다. 심장이 튼튼하게 잘 뛰면 다른 곳이 좀 부실해도 생명에는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심장의 피스톤 작업이 끝나면 생명도 끝이 납니다. 다른 장기가 아무리 건강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충성, 즉 “피스토스”(πιστὸς)이라는 단어는 ‘믿음’이라는 단어로도 사용됩니다. 충성스러움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치면 우리의 영혼의 생명도 끝장이 납니다.
성경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을 이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셨습니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기까지 섬기는 일에 주님은 충성스러우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는 대속의 제물, 속죄의 제물, 화목의 제물이 되시고 온전히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 내 쏟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기까지 목숨을 다하여 충성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는 일꾼의 자세로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고전4: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변함없이 충된스러운 사람으로 인정받으셔서 하나님의 사업에 귀히 쓰는 그릇으로 이용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단순히 하나님은 두려워한다는 의미를 넘어선 개념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친밀한 태도를 갖는 것을 경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생각과 행실에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것이 바로 경외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십니다(잠1:7).
이 말씀은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저는 이 말씀은 앞의 ‘충성스러운 사람’을 보완해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깡패도 의리를 중요시합니다. 충성을 요구합니다. 아무리 두목에게 충성스럽다 한들 누가 그를 존경하겠습니까?
전두환에게 충성스러운 사람 – 장세동, 그러나 누가 장세동을 존경하겠습니까?
‘하나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충성스러웠는지, 무리 중에서 뛰어났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가 사람을 찾아 적재적소에 세웠듯, 오늘날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선한 일꾼을 찾으십니다. 어떤 사람을 찾으시겠습니까?
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또, 한결같이 ‘충성스러운 사람’을 찾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택함 받기에 합당한 사람입니까?
바라기는 우리 사도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꾼으로 쓰임 받기에 흠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모든 무리 중에서 뛰어난 일군’으로 인정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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