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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눅 8:12-18절
제 목 :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일 시 : 2013년 1월 7일
눅8:12-18/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주로 사용한 방법은 비유였습니다.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실 만큼 대부분의 가르침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상징이라는 뜻입니다. 직유나 은유로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많은 비유들 중에서 우리가 함께 읽은 씨 뿌리는 비유는 매우 중요한 비유입니다. 그래서 막4:13/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다른 비유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비유를 이해하고 깨닫는 출입문과도 같습니다. 그만큼 씨 뿌리는 비유는 중요합니다.
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세상에는 네 종류의 밭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도 아니요, 말씀의 씨앗을 좋은 땅에 뿌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 비유의 진짜 목적은 시대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의 밭이 어떠한지를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각자가 자신의 마음의 밭을 볼 수 있다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면, 그리고 자신이 바로 믿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깨닫게 된다면 주님은 그것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눅8:5-8/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조차도 비유의 뜻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해석해주셨습니다.
눅8:12-18/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비유에 대한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보다 그리고 비유 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유에 대한 결론입니다. 비유를 나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6-18절을 보시면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왜 씨 뿌리는 비유와 그 해석을 하시고 나서 거기에 대한 결론으로 등불을 켜는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등불을 켜는 목적과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이 같기 때문입니다.
먼저 등불을 켜는 목적입니다. 왜 등불을 켭니까? 집안에 등불을 켜 두는 목적은 집을 드나드는 자들로 하여금 그 빛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등불이 집안 전체를 비추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등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불빛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집안 전체를 비추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빛을 통해서 불편함이 없이 생활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을 때도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의 결론으로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치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등잔 위에 불이 켜지면 그 빛이 온 집을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도 그것을 감출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잠6:23/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했으며, 시119:105/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입니다. 때문에 말씀의 빛을 받게 되면 그것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받은 말씀이 마음을 밝게 비출 것이고, 말씀의 빛이 생각을 밝게 비출 것이고, 말씀의 빛이 생활을 밝게 비출 것이기 때문에 말씀의 빛은 분명히 밖으로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참으로 듣고 받은 사람들은 분명히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 놓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거나 말씀을 받아 놓고도 열매가 없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은 말씀이 가지고 있는 뜻이 영원불변하다는 것이고, 또한 말씀의 능력이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히4: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짜 받게 되면 말씀의 능력이 나의 삶을 바꾸고, 나의 생각을 바꾸고, 나의 인생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나의 잘못된 습관들도 바꾸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받게 되면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8: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삼가다란 블레포(blevpw)라고 하는데 보다(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알다, 조사하다, 관찰하다, ...에 주의를 기울이다, 주의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는지 자신을 주의 깊게 조사하고 관찰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조사하고 관찰해야 합니까? 내가 말씀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조사하고 관찰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말씀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어떻게 관찰할 수 있습니까? 그 다음의 말씀은 관찰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눅8: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말씀하신 후에 곧 바로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의 방법으로 말씀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조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면 다른 말씀을 더 많이 받게 될 것이지만 말씀을 잘못 들었거나 말씀을 간직하지 않았다면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말씀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은 또 다른 말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단 한번이라도 말씀을 받아서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들은 또 다른 말씀을 받고 싶어할 것입니다. 또 다른 말씀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말씀을 받아서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이라면 다른 말씀을 받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입니다. 반듯이 새로운 말씀들을 받아 먹고 싶어할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굶주림을 느낄 것입니다. 말씀의 참된 맛을 본 사람들은 계속해서 말씀을 받아 먹고 싶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한 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는 말씀을 많이 들어서 잘 아는 것 같은 데 실제로는 말씀을 다 빼앗겨 버리고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고 있는 세 종류의 밭과 같이 말입니다. 길 가 밭과 같고, 돌이 있는 밭과 같고, 가시 떨기 밭과 같이 결실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단 한 번이라도 말씀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말씀이 또 다른 말씀을 요구하기 때문에 말씀을 듣지 않고는 살 수가 없고, 다른 말씀들을 받아 먹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회개하게 되거나 고민하게 되거나 아니면 가슴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말씀이 그 속에서 살아 역사하고 운동하기 때문에 죄악들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잘못된 삶을 고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받은 말씀이 내 속에서 거룩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거룩함을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또 다른 진리를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받은 말씀 때문에 죄악을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말씀 때문에 세상을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말씀 때문에 분별력이 생겨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게 됩니다.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그 사람은 단 한번도 말씀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했습니다.
빛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빛이 비취면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빛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히게 되어 있습니다. 빛이 가는 곳마다 모든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빛이 들어갔는데도 어두움이 그대로 있다거나, 방에 전기 불을 켰는데도 전혀 밝지 않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빛은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빛은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빛은 스위치를 켜는 순간 즉시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스위치를 켰는데도 어두움이 그대로 있다면 아직 빛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말씀을 받았다면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받았다면 또 다른 말씀을 듣고 싶어하고 먹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했습니다. 듣는다란 아쿠오(ajkouvw)라고 하는데 (여러 감각에서) 듣는다, 청취하다, 들려 오다, 깨닫다 라는 뜻입니다. 어떻게란 포스(pw'")라고 하는데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라는 말씀은 너희가 어떤 방식으로 말씀을 듣는가?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말씀을 듣습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버리는 방식으로 듣습니까? 건성으로 듣지는 않습니까? 듣는 즉시 잊어버리지는 않습니까?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이 오면 말씀을 포기하고 버리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좋은 자세로 말씀을 듣고 받아 지켜 행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먼저 말씀을 불이요 방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렘23:29/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같습니다. 말씀은 더러운 것을 태우고 죄악을 때우는 역할을 합니다. 산 불이 나게 되면 수 십년, 수 백년 된 아름드리 나무들을 다 태워 버리듯이 말씀을 받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죄악들을 태워 버립니다. 내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태워 버립니다. 그리고 말씀은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와 같습니다. 말씀을 받게 되면 완악한 마음이 깨어집니다. 부드러운 마음이 됩니다. 열린 마음이 됩니다. 아름다운 마음이 됩니다. 나의 나쁜 습관을 깨뜨립니다.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오랫 동안 굳어 있는 나쁜 습관들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롭게 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고전10:6/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으며, 고전10:11/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와 삶을 기록한 책은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고 했습니다. 거울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 줍니다. 말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말씀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과 죄악과 실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말씀은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대신에 자신을 냉철하게 성찰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는 일에 열중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듣고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닫고 가슴을 칩니다. 자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거울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만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비방하고 판단하고 흉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3)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영과 혼과 육체를 수술한다고 했습니다.
히4: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육을 수술합니다. 내 안에 병든 부분, 상한 부분, 잘못된 부분을 수술합니다. 잘못된 생각들을 들추어 냅니다. 잘못된 사상들을 들어냅니다.
말씀을 받게 되면 자신의 죄악들이 들어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요단 강에 나타나서 회개하라고 선포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받은 사람들은 즉시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라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고치려고 했습니다. 행2: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받으면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마음에 찔려 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바로 듣고 받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당신 이런 죄인이요 라고 말하지 않지만 스스로가 죄를 깨닫고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말씀을 제대로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바른 자세로 받고 말씀을 참으로 받게 되면 분명히 삶이 달라집니다. 내가 받은 말씀이 그렇게 하게 됩니다. 능력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행17:11-12/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고 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말씀이 정말 그러한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으며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으면 집으로 돌아가서 오늘 들은 말씀이 정말 그렇다 말인가 하면서 그것을 다시 찾아보고 연구하고 묵상하게 됩니다. 그 결과 믿음이 날마다 성장하게 됩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듣는지 스스로 삼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스스로 삼가다란 블레포(blevpw)라고 하는데 보다(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알다, 조사하다, 관찰하다, ...에 주의를 기울이다, 주의하다 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듣는지를 조사하고 관찰하며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서 자신의 삶을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지, 말씀대로 실천하는지,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고 있는지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만약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지 않거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삶에는 열매가 없고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2:1/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고 했습니다. 모든 들은 말씀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합니다. 여기서 삼간다는 말씀의 뜻은 마음을 ~에 두다, 주의하다, 조심하다, 전념하다 입니다.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라는 뜻은 더욱 많이 주의 하여 숙고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흘러 떠내려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흘러 떠내려 가다란 흐르다, 부주의하게 지나다, 미끄러지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강가에 배를 잘못 메어 놓으면 물에 떠내려 가듯이 말씀도 마음속에 간직하지 않으면 떠내러 갑니다. 말씀을 잃어버리고 놓쳐 버리게 됩니다. 말씀을 받지 않는 것처럼 됩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참석해서 말씀을 들어놓고도 그것을 안들은 것처럼 잊어버리거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버리게 된다면 그 사람은 말씀을 잘못 듣고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관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와 복을 베푸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으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날 밤에는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서 순종했습니다. 밤이 맞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지만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히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반듯이 크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첫댓글 아멘. 주님, 그렇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받으면 분명히 기적은 일어나고 삶의 변화와 개혁이 일어납니다. 이런 복을 나에게도 항상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