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육을 삶는 솥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넉넉히 넣은 집된장과 무, 양파가 어우러져 구수한 냄새가 감돌았다. 아들 도착 시간에 맞춰 간이 잘 맞고 부드러운 엄마표 수육을 완성하리라!
2. 며칠 전 통화에서 아들은 덤덤하게 말했다.
“엄마, 요즘 많이 힘들어요.”
무심히 들으려 했지만, 좀처럼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아이의 말에 담긴 무게는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오랫동안 갈등이 되풀이되다보니 연료가 별로 없는 느낌이라고 했다.
3. 아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몰두하는 아이였다. 느긋하고 낙천적인 면이 있지만,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때는 주변과 상관없이 자기 안에서 동력을 만들어내곤 했다.
‘연료가 없다니! 바삐 돌아가는 연구실에서 주어진 역할에 맞춰 뛰어다니느라 길을 잃었나?’
4. “주말에 집에 올래? 엄마가 수육 맛있게 해줄게.”
에너지를 소진한 아들을 위로하기엔 궁색했는데,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아이의 대답에 정신을 차리고 하고픈 말을 이었다.
“답답하고 힘들지? 시간이 더 걸려도 괜찮다. 엄마는 채근 안 할게. 그냥 기다릴게.”
5. 수육은 작은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고기 한 점에 새우젓을 찍어 한입 가득 베어 물던 모습이 떠올라 한동안 솥 앞에 서 있었다. 늦은 밤 도착하는 아들의 배를 따뜻하게 채우고 싶었다. 마음 한구석이 묵직했지만, 기다림은 하얗게 오르는 김처럼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6. 전화기가 짧게 울렸다. 전기공급 장치에 문제가 생겨서 기차가 멈췄다는 메시지였다. 처음엔 20분 연착으로 안내 문자가 왔지만, 이미 30여 분이 지났다고 했다. 힘겹게 보낸 한 주를 뒤로 하고 집으로 달려와 쉬고 싶었을 텐데 난데없는 연착 소식이 야속했다. 끓고 있는 솥의 불을 낮췄다. 나의 기다리는 마음도 온도를 낮출 수 있으면 좋겠다.
7. 내가 알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아들은 여러 번 멈추고 기다렸을 것이다. 보고서 준비와 이어지는 실험으로 늘 분주한 연구실에서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 아들은 어떻게 마음을 다독였을까?
8. ‘이제 출발한다.’는 문자에 안도의 숨을 쉬었지만, 연이어 다시 멈췄고 급기야 뒤로 간다는 문자가 이어졌다. 원래 방향으로 달리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기차, 완성을 향해 마음껏 달리지 못하는 아들의 마음이 겹쳤다. 기차는 뒤로 가지만, 향하는 곳이 있을 것이다. 시간이 걸려도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한 여정이라며 마음을 달랬다.
9. 제일 낮춘 불에도 수육 국물이 졸아들고 있었다. 애써 견디는 동안 지치고, 바싹 말라가는 아이의 속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눈앞이 흐려졌다. 고기가 충분히 익었으니 불을 꺼야겠다. 고기가 식으면 데워야 하는데, 남은 국물까지 졸아들면 데우기도 어렵다.
10. 문득 채근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겠다는 내 말에 조금 가벼웠던 아들 목소리가 생각난다. 작은 불꽃이라도 시간이 오래면 졸아든다. 시간이 걸려도 아들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하는 길이기에 걱정과 염려의 불을 끄고 기다려야겠다.
11. ‘이제 조금씩 움직여요.’
100분의 연착을 뒤로 하고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 멈추었던 기차가 앞으로 움직이고 있다. 오래지 않아 기차는 제 속도를 낼 것이다. 고된 시간을 보내고 아들은 연료를 채워 다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12. 새벽 2시. 긴 기다림 끝에 역에 도착해서 아빠 차를 탔다는 소식이 왔다. 연착이 오래였지만 도착했으니 됐다.
13. 다시 데워서 뜨거워진 수육을 썬다. 한밤의 기나긴 기다림을 견디고 집에 도착한 아들이 차근차근 자신의 해답을 찾아가길 바란다. 기다림에 졸았던 나의 마음은 현관문을 들어서는 아들을 보는 순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넉넉해질 것이다.
14. 거실로 나와 현관문 앞에서 서성인다. 곧 문이 열릴 것이다. 아들이 지고 온 무거운 마음은 수육을 먹으며 나누는 얘기들에 녹아서 부드러워지겠지. 연착한 기차는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고, 아들은 따뜻한 집에서 쉬고 힘을 내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첫댓글 조바심이 컸겠습니다. 무사히 도착한 아들과 좋은 시간 되십시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미 선생님,
아들을 향한 엄마의 마음은 보이지는 않아도 강합니다. 고기에 스며드는 뜨거운 김처럼...
모성애가 진하게 느껴지는 글입니다.
여운이 남는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절절하네요.
올해도 좋은 글 많이 쓰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는 아프지말고 건강하길 빕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