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의 <해탈향>에서 <해탈>은 모든 장애, 고통, 어려움, 문제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생로병사를 위시해서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개인적인 모든 문제를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우리가 부처님처럼 훌륭한 인격자가 되려면 현재의 상태에서 부단히 벗어나야 한다. 쉽게 말해서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겸손해져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것을 삶 속에서 해탈의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생사해탈이 목적이라 하더라도 작은 해탈부터 실천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어떤 고정된 관념 속에서 보지말고 항상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늘 새로운 삶을 꿈꾸며, 창조적인 태도로 매 순간을 사는 것이야 말로 해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 것이다. 그런 삶에는 향기가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해탈을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 옷 입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같은 옷이라도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외형적인 모습에만 신경을 기울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면 외형적인 몸치장 또한 마음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 수행력이 깊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만 수양이 얕은 사람일수록 몸이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마음만 중요하고 몸은 별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이다. 절에 갈 때는 가능하면 가장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가야 한다. 단정한 몸차림이면 마음은 저절로 상쾌해지게 마련이다.
관세음보살의 몸치장을 보면 온갖 장신구로 장엄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절의 단청이나 탱화의 색깔도 대단히 화려하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인격을 형상화해 놓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세음보살처럼 우리의 인격도 훌륭해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관세음보살님처럼 화려한 장식을 하고 오라는 뜻이 아니라 나의 인격을 완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격이란 몸과 마음을 합하여 지칭하는 것이지 단지 마음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몸은 아무렇게나 하고 있으면서 마음이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몸이 잘 다듬어지면 마음 또한 정돈되는 게 중생의 근본 모습이다. 하찮은 옷 하나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한 가지 예로 스님들이 승복을 입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승복을 입고 있으면서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외모 또한 마음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해탈이란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좀더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이며, 새로운 삶을 꿈꾸고, 창조하고, 구상하며,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매일 대하는 식구들도 새로운 각도에서 신선한 시각으로 본다면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늘 새로운 모습으로 현재의 상태에서 변화 발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일상생활 속에서의 해탈이다.
어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공부의 진척을 기대 할 수 없는 격이다. 우리가 법회에 참석하여 뭔가 배우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작은 해탈의 시작이다. 그러한 마음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정에서 주부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주부의 마음가짐이나 생활태도가 밝고 행복한 쪽으로 바뀌면 그 가정은 틀림없이 밝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부는 항상 행복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쉽게 실천할 수 있다. 또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무난히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가 전부 자신의 인생이다. 그 사이에 단 일 초라도 빼 버린다면 자기 자신의 전체 인생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전부 자기의 인생이라면 매 순간을 의욕적이고 신선한 생각으로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늘 향상하려고 노력하는 그 마음가짐이 바로 해탈의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을 긍정적이고 새롭고 밝고 맑은 마음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이 진정한 해탈인 것이다.
인간의 일생은 한 번 밖에 없는 예술이다. 우리의 인생은 평생을 통해 자신의 예술품을 다듬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매 순간을 보다 아름답게 자신의 작품을 장식할 수 있도록 해탈의 의미를 되새기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오분향의 마지막으로 <해탈지견향>은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지견(知見)>은 ‘지혜’라는 말과도 통한다. 아울러 <해탈지견>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해탈의 경지로 이끄는 중생제도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땅에 오셨으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고(開), 보여서(示), 직접 깨달으시고(悟)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그 지견속으로 들어오게 하셨느니라(入)’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의 지견이란 모든 중생이 함께 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행하여 중도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불교는 자신의 해탈과 함께 다른 사람의 해탈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전법(傳法)을 통한 중생제도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 즉 <해탈지견향>이란 나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의 해탈을 함께 성취하려는 교화활동을 뜻하는 것이다. 해탈에 대한 바른 견해가 섰다면 자기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이해가 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제대로 알게 되면 자연적으로 실천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둘이 아닌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앞의 <계향><정향><혜향><해탈향>의 각각 항목이 참으로 자기 것이 되어서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해탈지견향>이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오분향의 설명을 다시 정리하면 <계향><정향><혜향><해탈향><해탈지견향>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중요한 뜻을 지니며, 그것이 또한 순서대로 실천될 때 완전한 것이 된다. 오분향에는 부처님의 모든 법문이 함축되어 있으며, 부처님과 모든 수행자들이 갖춘 무량한 공덕이므로 우리도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 오분향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들은 평생을 통해서『예불문』의 구절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예배 드리는 것이다. 실제로 오분향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분향은 읽고 또 읽어도 향기가 가시지 않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가르침인 것이다. 실제로 오분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압권(壓卷)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계·정·혜 삼학을 통해 해탈하게 하며, 그 해탈을 남에게 전함으로써 해탈지견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삼학이라 할 때의 학(學)은 단순한 글공부가 아니다. <계>를 지키고, <정>을 찾고, <혜>를 얻는 것 모두가 학(學)인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고 참선하는 사람을 공부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불자라고 생각한다면 항상 공부인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