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노는 우리 역사에 잘 나타나지 않는 인물이다. 역사가들이 그의 행적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조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귀중한 인물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요즈음 일단의 여성학 연구자나 연성운동가들이 소서노라는 한 여인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여성의 역사를 2천년 전에서부터 쓰겠다는 의도이다.
문화계 쪽에서, 소서노를 주인공으로 하여 장편소설을 쓴 작가가 있는가 하면, 소서노의 이름만 빌어다 쓴 만화가도 있다.
이외에 초기백제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 몇 사람은 소서노가 고구려와 백제, 즉 두 나라를 세운 인물이라는 관점에서 소서노를 연구하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서의 소서노를 바라보고 있다.
때마침 중국이 고구려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겠다는 의도로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있다. 중국의 패권주의가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곧 북한이 자멸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주인 없는 북한 땅에서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의도로 이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면 먼저 고구려초기사와 백제초기사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으면 아니 된다. 소서노라는 한 인물이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먼저 소서노와 고구려시조 추모왕의 관계를 끊어야 하고, 다음에 고구려역사와 백제역사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고구려역사와 백제역사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중국은 초기백제역사에서 초기고구려역사를 분리해 내지 않으면 아니 된다. 분리해 내지 않고 고구려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자 한다면 편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두 역사의 분리가 불가능하므로, 고구려역사를 중국사에 편입할 수 있는 방법은 백제사도 함께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황당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 글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라는 두 나라를 세워 두 나라 역사의 연결고리가 되어 있는 소서노는 어떤 사람인가를 조명하기로 한다.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소서노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한단고기」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짧게 실려 있다. 소서노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으므로 포의문자인 한자로 기록된 그의 이름 소서노를 분석함으로써 어느 정도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소서노라는 이름은 그녀가 무당이면서 무장임을 나타낸다. 소召자에는 무당이 굿을 할 때 작두거리에 들어가서 칼을 입에 무는 형상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가 작두거리를 하던 무당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름 끝의 문자인 노弩자는 그가 세뇌라는 강궁强弓을 쏘던 무장이었음을 나타낸다. 이 문자도 그가 굿 12거리 중에서 사냥굿을 하던 무당이었음을 나타낸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연타발延佗勃의 딸로 역사무대에 등장한다. 연타발은 북부여의 2세 단군 모수리慕漱離(재위 35년)의 상장上將인 무인이었다. (북부여기 상) 모수리 단제는 연타발을 요녕성 해남(요동만에 있는 해안 도시)에 있는 평양에 파견하여 성책을 설치하게 하였다.
연타발은 졸본 사람으로 갈사曷思의 남북을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었다.
은밀하게 고주몽을 도와 나라를 세우고 도성을 정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뒤에 그가 다스리는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고기를 잡고 소금장사를 하였다. 고주몽이 북부여를 칠 때 5,000석을 내어 도왔다.
고주몽이 서울을 눌현訥見으로 옮길 때 이 일을 앞장서서 하였고, 나라가 망하여 떠도는 북부여의 백성을 위무하고, 왕이 하는 일을 잘 할 수 이도록 하여 공을 세웠다. 이리하여 坐原이라는 벼슬에 봉작을 받았다. 그의 나이 80에 숙었다. 그때가 다물多勿(서기전 37-19, 추모왕의 연호) 34(년도에 착오가 있는 듯 하다)년 병인 3월이었다.
문자학의 관점에서 본 召西弩
召西弩라는 세 문자는 이 문자가 갖는 본래의 의미를 도출해 내면, 이 문자의 의미와 관련이 되는 다른 문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召西弩시대의 역사를 유추해 낼 수 있게 한다. 召西弩 세자를 각각 분리하여 한자씩 의미를 추적한다.
召
한자풀이로 보면, 召는 刀+口(칼을 입에 물고 있다는 뜻)이다. 소서노가 여자이므로 여자로서 입에 칼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면 무당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무당은 작두거리에서 작두를 타기 전에 칼을 물어 작두신명의 위력을 보여준다.
西
西는 서쪽 방위를 나타낸다. 소서노가 서쪽에서 왔음을 의미한다. 그가 정착한 한산漢山에서 볼 때 서쪽을 의미한다.
기묘년 3월에 召西弩는 辰 番 (패대浿帶의 땅)에 이르렀다. 辰은 辰韓 즉 옛날의 眞朝鮮, 番은 番韓 즉 옛날의 番朝鮮으로 보인다. 따라서 진조선과 번조선 사이의 땅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여기를 패대浿帶의 땅이라고 하였다.
召西弩가 高朱蒙에 의하여 어하라於瑕羅에 봉해진 점으로 보아서, 강력한 무력을 기반으로 하여, 진조선과 번조선 사이의 옛 땅 발해만에 있는 동해빈東海濱쪽, 즉 창덕彰德과 현덕顯德 사이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弩
弩는 女+又+弓의 문자로 활을 든 여자를 의미한다. 강력한 활인 쇠뇌를 의미하는 문자가 노弩자이다. 낙랑樂浪지역의 옛 무덤에서 노가 출토 되었던 점으로 보아서 노가 고구려의 무기였다고 볼 수 있다.
소서노가 弩를 휴대하였다는 점에서도 소召자에서 보았듯이 두 가지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활을 쏘아 짐승을 사냥하여 제사에 올리는 타살거리를 수행하는 무당의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궁수弓手와 같은 노수弩手의 기능이다. 소서노가 인솔하는 무사집단이 노수집단이었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이상 세 문자의 뜻을 종합하면, 召西弩는 칼을 입에 물고, 활을 들고 서쪽에서 온 여자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소서노가 인솔하던 무사집단은 남자무사집단이라기 보다는 여자무사집단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울러 강력하고 무거운 무기를 두 가지나 휴대하였다는 점에서 여자거인이었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해진다.
소서노의 또 다른 의미는 한글 음에서도 도출된다. 한자의 음은 한번 정해지면,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간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한글 표음의 가차假借로 볼 수도 있다. 아울러 소서노라는 문자에는 표의와 표음의 이중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召西弩에는 솟아오르다, 솟아오름 등의 뜻이 있다. 솟대나 소도蘇塗 등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따라서 솟는다는 의미를 가진 성씨인 소씨蘇氏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2 召西弩와 鄒牟王의 관계
고구려 分封王으로서의 소서노
소서노는 패대浿帶의 땅에 정착하여 수만금을 벌어 막강한 토호세력으로 성장한다. 그는 막강한 재력으로 동부여東扶餘를 탈출하여 떠돌이 신세가 된 고주몽高朱蒙을 거두어 주고 고구려를 창설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고주몽은 고구려를 세우고 추모왕鄒牟王이 된다. 소서노는 추모왕과 군신의 관계를 맺는다.
이 대목은 합리적인 기술이 아니라서 동의하기가 힘든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슨 이유로 떠돌이에 불과한 고주몽이 전폭적으로 소서노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의 왕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서소노와 고주몽의 시대엔 전세계적으로 신화가 공유되던 시대였다. 어느 특정한 종족이 신화를 독점하여 신화제국주의로 행세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 시대가 지나가면서 신화들이 원주민의 인종이나 지역이나 문화의 특성에 의하여 변형이 가해지는 시대가 있었다.
召西弩와 高朱蒙의 관계를 신화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왜 소서노가 떠돌이 고주몽을 나라를 세우고 임금의 자리에 앉도록 도와주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하여 어하라於瑕羅를 분석할 때에 논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소서노가 추모왕의 後室이 되었다고 하였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서는 소서노가 추모왕의 신하 되기를 주청하여 어하라로 책봉되었다고 하였다.
소서노가 추모왕의 後室이 되었다는 기록은 歷史歪曲이다.
소서노가 추모왕의 後室이 되어야 할 이유가 마땅치 않은 것이다.
어하라는 소서노의 땅에 내려진 나라이름이다. 추모왕이 소서노의 땅을 고구려의 속국으로 인정했다는 말이 된다. 만약 소서노가 추모왕의 후실이 되었다면 그의 봉지를 따로 인정해 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추모왕에게 본처와 본처의 소생 유리가 나타나고, 추모왕은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이를 보고 소서노는 아들 온조와 백제를 세우고 온조를 백제의 시조왕이 되게 한다.
소서노의 나라 於瑕羅
소서노라는 문자를 분석하여 의미를 도출하였듯이 어하라於瑕羅를 분석하여 소서노에게 어하라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於
於자에는 비교한다는 의미가 있다. 鄒牟王의 나라인 鄒牟와 召西弩의 나라인 瑕羅를 비교한다는 뜻으로 썼다.
고구려를 鄒牟로 보면 소서노의 나라인 어하라於瑕羅가 무슨 뜻인지 의미가 풀린다. 어하라에 추모를 추가 하고 자리를 바꾸어 하라어추모瑕羅於鄒牟로 쓰면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瑕羅於鄒牟는 鄒牟보다 나은 瑕羅라는 뜻이다. 소서노가 주몽朱蒙 섬기기를 주청하여(신하되기를 주청하여) 고주몽은 몹시 기뻐하여 이를 장려하여 어하라於瑕羅에 책봉했다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장구성이 가능해진다.
瑕
추모왕이 이토록 어하라를 극진하게 예우한 데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떠한 정치적 계산이 갈려 있었는지 하瑕자와 라羅자를 분석하면 알 수 있게 된다.
하瑕자에는 구하씨지지邭瑕氏之地(「左傳」 成六年, 康熙字典 瑕자 745쪽 참고)라는 뜻이 있다. 구하씨의 땅에 나라를 세운나라가 하瑕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瑕는 소서노의 나라로 볼 수 있는 문자이다. 瑕는 소서노의 나라이름이다.
구하씨의 구邭는 구句+읍ꞥ이므로, “구려句麗의 땅에 세운 작은 나라”라는 뜻이 된다. 구려(번조선番朝鮮)가 있던 곳은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평군東平郡이다. 구려句麗라는 국명은 후대에 가서 고구려에 의하여 계승된다.
句는 구진성勾陳星 즉 북극성北極星이다. 북극성은 유목민족이 가장 신성시하는 별이다. 몽고인은 결혼식 때 신부 집에서 시가에 보내는 폐백에 양의 머리를 쓰는데, 양의 이마에 북극성을 장식해서 보낸다. 소서노가 구진성으로 몸을 단장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瑕자에 또한 붉은 옥이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소서노는 붉은 옥에 비유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소서노가 붉은 옥을 치장하여 자신의 외모를 가꾸었다고 볼 수 있다.
하瑕는 축융祝融이라는 말에 대비하여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축융이 불을 관장하는 남신이므로, 日月之子인 鄒牟王에 비견하는 하瑕를 불을 관장하는 여신의 의미로 썼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의 땅에서 출토되는 정교하고 화려한 화염문양火焰紋樣의 유물들은 소서노와 관련이 있는 문양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화염문양火焰紋樣(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화염문)에 소서노의 이미지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召西弩와 高朱蒙을 하나로 묶어 주는 단어가 하瑕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를 신화적 관점에서 분석해 보기로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왕의 신화 가운데에 아버지의 출신이 불분명한 신화들이 있다. 고주몽이나 박혁거세나 김수로왕이 알에서 태어난다던가, 백제 무왕이 용의 자식으로 태어난다던가, 견훤이 지렁이에게서 태어난다던가 하는 신화가 그런 신화이다. 이들 신화는 임금의 아버지를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 그들의 아버지를 숨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바빌론신화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바빌론에는 이슈타르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에서 모시는 신이 이슈타르여신이었다. 이 여신은 이 고장에 사는 여자들로 하여금 1년에 한 번씩 외간남자에게 몸을 바치는 일을 주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마고삼신이 하는 일을 이슈타르여신이 주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1년에 한 번 이 고장 여자들은 신전에 가서 그를 원하게 될 외간 남자를 기다렸다. 이때 그들은 여신의 징표로 머리에 띠를 두르고 앉아 있었다. 그들이 사내를 기다리고 있으면, 한 사내가 다가와서 금을 던져 청혼하였다. 이때 신분의 고하는 무시되었다. 이리하여 여자는 남자와 몸을 섞게 되고, 여자는 이슈타르여신에게 봉사하였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임신이 이루어져 아기를 낳는다면 그 아기는 종족의 아기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습은 모계사회에서 종족을 보존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사회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남녀관계를 성창聖娼이라고 하였다. 인류의 시조 나반과 아만이 아이샤타에서 만났다고 하는 인류시조신화도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이샤타는 아슈타테르, 이슈타르의 음기”라고 박용숙씨가 그의 저서 「지중해문명과 단군조선」에서 밝힌 바가 있다.
우리 신화에서 아비 없이 태어나는 자식을 알의 자식이나 용의 자식이나 지렁이의 자식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우리에게도 이러한 성창제도聖娼制度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 고장의 세력가로 부상한 소서노가 떠돌이 고주몽을 받아들여 그를 돌보아주고 고구려의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면 부여게열의 사회에 바벨론의 성창제도와 같은 사회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슈타르테 여신전과 같은 신전이 우리 조상에게 있었다면, 그것은 마고가 관장하는 삼신산이라는 성역이었을 것이다. 삼신이 아기를 점지한다는 말은 아마 성창제도에 대한 고도의 은유가 아니었을까? 삼신산이 좀더 현실화된 것이 소도로 불리는 성역이었다. 이 성역에 소서노에게 마음의 표시로 하瑕(적옥赤玉)를 던진 사람이 고주몽이었고, 소서노의 마음을 사로잡은 고주몽은 소서노의 가호 아래서 고구려의 세력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주몽의 출생도 부여의 성창제도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羅
라羅자는 망罒+사糸+추隹자로 구성되어 있는 문자이다. 실로 그물을 짜서 새를 잡는다는 의미가 있다. 그물과 옷감을 짜기 시작한 새로운 문명을 나타내는 문자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명을 시작한 나라라는 의미가 어하라於瑕羅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신라新羅 또한 같은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새그물을 조고鳥罟라고 하는데, 이 새그물을 라羅라고 하였다.(<이아석기爾雅釋器> 羅자, <康熙字典> 986쪽)
新羅弁韓苗裔也 居漢樂浪地
신라변한묘예야 거한낙랑지 <唐書 東夷傳>
신라는 변한으로 묘족의 후예이다. 한나라의 낙랑 땅에 살았다.
위 글에서 신라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위 글에 나타나는 신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가 아니라 새로 태어난 나라인 소서노의 어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여기에 인용하였다.
위 글에서의 신라는 문자 그대로 새로 생긴 나라를 의미한다. 이 새로 생긴 나라가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변한弁韓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왕명이다. 옛날엔 한韓을 임금의 의미로 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고조선시대에 진조선의 임금을 진한眞韓이라고 하였고, 번조선의 임금을 번한番韓이라고 하였고, 막조선의 임금을 모한慕韓이라고 하였다. (<단군세기> 6세 檀君達門 임자 35년, 서기전 2049년 <한단고기> 74,75쪽 정신세계사)
음의 변화로 보아서, 변한은 번한에서 나왔다고 보는데, 번한은 번조선番朝鮮의 임금이므로, 새로 생긴 나라 즉 신라는 번조선의 후예가 된다. 또한 묘예苗裔라고 한 말은 묘족苗族의 후예라는 말인데, 배달나라(靑丘)를 다스린 치우천왕蚩尤天王에 대하여 중국의 역사가 왕동령王桐齡은 <중국민족사> 4쪽에서,
“4,000년 전 … 현재의 호북, 호남, 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句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 주3 32쪽 정신세계) 라고 하였다.
번조선과 묘예를 연결시키면, 번조선이 치우천왕의 후예가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새로 생긴 나라는 치우천왕과 번조선의 대를 이은 후예가 된다고 볼 수 있고, 이 새나라가 있었던 곳이 한나라의 낙랑이므로, 이들이 살았던 낙랑이 한반도에 있지 않고 중원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록과 관련이 되는 나라가 필자가 보기에는 어하라이다.
<성씨급취편姓氏急就篇>에, 라羅씨가 성姓을 취득하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는데, (<康熙字典> 羅자, 986쪽) “라羅씨는 전욱고양諯頊高陽이 라羅에 봉했는데, 지금의 방주房州로 자손이 방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해 볼만하다. 추모왕이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에 봉했으므로, 어하라의 羅가 소서노 조상의 씨칭氏稱을 밝혀 주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於瑕羅의 於자는 召西弩의 召자와 같은 의미로 섰다고도 볼 수 이다.
왜 전욱고양 때부터 羅가 성씨가 되었을까? 그 이유는 라씨가 옷감을 짜는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으로 방주에 정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옷감을 짜는 여인의 우두머리를 직녀織女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직녀의 나라 於瑕羅
이상 전개한 어하라 해석을 간추리면, 소서노가 세운 새나라는 추모왕의 나라에 대응하는 나라 곧 옷감을 짜는 직녀의 나라로 압축이 된다. 따라서 어하라를 직녀의 나라로 부를 수 있다고 본다.
직녀의 나라는 하늘에서는 직녀성이다. 소서노를 직녀성으로 보면, 그에게 어하라를 책봉한 추모왕은 견우성이 되고, 그의 나라 고구려는 견우의 나라가 된다고 볼 수 있다.
3 소서노의 두 아들 沸流와 溫祚
비류沸流는 유리琉璃가 추모왕鄒牟王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제2대왕이 되면서 어하라於瑕羅의 시조로 등극한다. 이곳이 요서遼西의 백제군百濟郡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소서노는 온조와 함께 요서지방을 떠나서 한반도로 들어와 백제 창업에 나선다. 비류백제와 온조백제를 논하기도 하는데, 비류백제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비류백제는 어하라로 보아야 한다.
‘비류’를 假借로 보면, ‘빌다’라는 뜻과 ‘불’이라는 뜻의 두 가지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 ‘빌다’는 祭官을 의미하고, ‘불’은 불의 관리자인 祝融을 의미한다. 축융은 한인천제로부터 祝融과 赤帝라는 正統性도 함께 부여받는다. 비류는 13년 임인에 고주몽이 죽자 백제군에서 於瑕羅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그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는 것은 요서의 백제군에서 백제의 임금으로 즉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등극은 고구려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4 비류가 백제왕이 된 후의 소서노와 온조의 활동
온조는 가차로 보면, 옷으로 읽어진다. 옷을 관장하는 직책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鄒牟聖王의 땅 彌鄒忽
彌鄒忽의 의미
온조는 비류가 어하라의 시조로 즉위하자, 소서노가 추모왕에게 책봉 받은 나라인 어하라를 떠날 것을 결심한다. 그는 신하 마여馬黎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배를 짜게 한다.
소서노와 온조는 어하라(東海濱?에서)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미추홀彌鄒忽(지금의 소래)에 닫는다.
미추홀은 문자의 의미로 보아서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鄒牟王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추모왕의 땅을 곧 미추홀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자를 분석하면 그 의미가 나온다.
미추홀彌鄒忽은 미彌(너)+추鄒(추모왕-고주몽)+홀忽(마을, 고을, 谷)이 된다.
너(온조)가 닿은 추모왕의 고을 즉 ‘추모왕의 땅‘이라는 뜻이다.
발해만의 동해빈에서 출발하여 직선거리로 닿을 수 있는 곳이 소래 곧 미추홀이다.
彌鄒忽이라는 지명의 변천
미추홀은 소서노가 지은 이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후로 고구려에 의하여 미추홀은 買召忽縣으로 부르게 된다. 매買자의 의미가 돈을 주고 산다는 의미이므로, 소서노가 추모왕에게 돈을 주고 매입買入한 마을을 현縣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지명으로 보아서, 소서노가 미추홀에 상륙하여 자기의 영지領地로 삼은 후에, 추모왕에게 본인이 직접 가든 아니면 사신을 보내든 공식적인 절차에 의하여 미추홀을 매입하여 소서노의 땅으로 확정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라고 할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엔 매소홀현이 경덕왕에 의하여 소성邵城으로 바뀐다. 召 +ꞥ 이므로 소씨의 나라라는 의미를 갖는다. 신라는 고구려 초기에 미추홀이 소서노의 땅이었으므로, 소서노의 나라로 인정하여, 소서노의 나라였음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소성邵城으로 확정하였던 것이다.
소서노는 미추홀이 자신의 영토임을 추모왕에게 확정하도록 한 이후에 그 판도를 넓혀 북한北漢에 다다른다. 이리하여 매소홀은 한북으로까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彌鄒忽 주변 지명과 소서노와의 관련성
소소노가 상륙한 곳을 소래로 보기로 한다. 소래의 지금 지명이 蘇來(蘇萊)로 되어 있는데, 인천시청에서 인천의 沿革을 소개하는 글에 지극히 무책임하고 애매한 글을 싣고 있다. 인천의 역사를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다.
‘백제가 건국된 당시의 비류의 미추(홀)국이 있었다. 그러나 미추(홀)국이 인천의 어느 지역이었는지 그 절대위치에 대하여 알 수가 없고 東史綱目이나 輿地圖書 仁川府邑誌 등에 文鶴山城이 그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인천 지명의 역사를 밝히는 데는 있으나마나 한 기록인데, 지명을 밝히기 위하여 주목해야 할 곳이 蘇來이다. 지금은 來자를 萊자로 바꾸어 어원을 찾는데, 어렵게 만들었다.
신용할 수 없는 설이지만 신라 무열왕 7년(660)에 나당연합군으로 파견되는 당의 蘇定方이 산동성의 萊州에서 왔다고 하여 來자를 萊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識字憂患이라고 할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소정방과 관련하여 생긴 지명은 이외에 소래산이 있다. 신라 경덕왕 때는 한때 양주군을 來蘇郡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 곳에 상륙하기 전에도 이 고장 이름이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그 이름이 생겨난 위치가 어디가 되었던 인천을 미추홀로 불렸다는 점이다. 인천을 미추홀로 부르기 위해서는 어딘가 소서노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 있어야 하는데, 소래를 옛날에 산동반도를 출발한 소서노가 蘇州에서 출발하였다면, 백제 초기에 그곳의 지명이 召州로 불렸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그가 상륙한 곳도 召來로 불렸을 것이다. (古地圖 확인 필요)
召는 (廣韻, 邑名 康熙字典 110쪽) 「광운」에서 읍의 이름이라고 하였으니, 그곳에 나라가 있었음이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召씨가 살았던 나라는 汝南과 安州이다.
그러므로 소주가 없다고 해도, 그의 생활근거지였던 여남과 안양은 있으니, 여기가 於瑕羅의 활동무대였다고 볼 수 있다.
<氏族博考>에 春秋시대(서기전 770-403)에 召 와 邵는 한 성씨였다. 후에 둘로 갈라져 汝南과 安陽의 족성이 되었으나, 모두 邵씨에 따랐다. (春秋召與邵一氏後分爲二汝南安陽之族皆從邵-<氏族博考> 강희자전 110)
汝南는 汝州 남쪽이다. 춘추시대에는 왕기와 정초의 땅이었다가 좌전 때 양의 습격을 받아 현이 되었다가 후에 위나라 때는 여북군에 속했다. 수나라 때 육혼현으로 옮겼으나 여북군에 따랐다가 개편하여 여주가 되었다. (<詩周南> 邑名. <廣韻> 春秋時王畿及鄭楚之地左傳襲梁縣後魏屬汝北郡隋移于陸渾(혼)縣北遂改爲汝州 - 康熙字典 596쪽)
安은 安州이다. 춘추시대에 운국이었다가 한나라 때 강하군에 속했고, 송나라 때 개편하여 안주가 되었다. (<風俗通> 春秋時鄖(운)國漢屬江夏郡宋改爲安州 - 康熙字典 234쪽)
召西弩와 鄒牟聖王
추모성왕鄒牟聖王은 鄒牟王으로 동명성왕東明聖王의 다른 호칭이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하해방촌(옛 이름 下羊魚頭) 집안평야 동북쪽 끝 용산 남쪽 기슭에 있는 모두루총牟頭婁塚(중국 공식명칭 집안 통구고분군 하해방묘구1호묘)의 널방 안벽에 기록된 묵서묘지墨書墓誌에 추모성왕鄒牟聖王이라는 기록이 있다.
추모鄒牟라는 문자는 어하라於瑕羅라는 문자와 함께 우리의 드러나지 않아 알려지지 않은 상고사의 상당한 부분을 밝혀 줄 수 있는 귀중한 사료史料이다.
이 기록은 무덤의 주인 모두루가 추모성왕 때부터 추모성왕을 수행했던 노객奴客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이 글에서 첫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에 대한 호칭이다.
5 추모성왕은 河伯의 자손
우리역사에 등장하는 河伯
묵서 묘지명에서 추모성왕을 하백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하백은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인 배달나라倍達那羅(단국檀國)시대에 황하黃河 일대를 다스리던 기씨己氏 집안의 왕을 의미하는 호칭이다. 기씨는 한국桓國을 창설한 한인천제桓因天帝의 후손으로, 한국을 주도했던 풍이風夷를 구성하는 한 족성族姓이다.
진주소씨晉州蘇氏 족보서문族譜序文인 「부소보서扶蘇譜序」에 따르면, 한인천제의 직계후손으로 기풍己豊이 있었는데, 제곡고신帝嚳高辛(황제黃帝의 후예)의 학정을 피하여 배달나라(단국)의 洪帝에게 귀순한다. 이리하여 사실상 황하 일대를 지배하던 하백의 나라는 지일홍제가 다스리는 배달나라(단국)에 흡수된다. 이리하여 하백의 후손에 의하여 동이족의 역사는 큰 변화를 맞는 계기가 된다.
하백의 집안 己氏
하백은 고조선이 단군왕검에 의하여 건국되기 이전에 있었던 배달나라倍達那羅(단국檀國) 홍제洪帝 8년 己巳년에 배달나라의 변방(실은 하백 기풍이 다스리던 땅)을 침입한 제곡고신帝嚳高辛을 물리친다.(이고선李固善의「조선기朝鮮紀」 지일홍제地一洪帝) 그는 홍제에게 공을 인정받아, 홍제로부터 소씨蘇氏를 사성賜姓한다.(「扶蘇譜序」) 이리하여
기풍己豊이 소풍蘇豊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기풍己豊이 소풍蘇豊으로 불리기 시작한 다음해인 홍제 9년 庚午년에 홍제는 소풍에게 명하여 수분하綏芬河 동쪽에서 직접 군사를 조련한다.(李固善의「朝鮮紀」 地一洪帝)하백의 족성族姓 己氏는 뱀(巳)의 자손이라는 뜻이고, 한인천제의 種族名稱인 風夷의 후예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림 사巳자는 풍이風夷의 문자이다. 풍風자 안에 있는 충?자는 巳자의 변형이다. 巳자에서 자子자가 태어난다. 巳의 음은 뱀인데, 뱀과 子는 동일시同一視된다. ‘아기(子)를 배다’는 말도 뱀이란 문자에서 태어난다. 사씨巳氏는 최초로 태어난 성씨姓氏이고, 巳氏는 여러 성씨로 분화한다. 己氏는 巳氏에서 태어났다.
그림 사巳자는 풍이風夷의 문자이다. 풍風자 안에 있는 충?자는 巳자의 변형이다. 巳자에서 자子자가 태어난다. 巳의 음은 뱀인데, 뱀과 子는 동일시同一視된다. ‘아기(子)를 배다’는 말도 뱀이란 문자에서 태어난다. 사씨巳氏는 최초로 태어난 성씨姓氏이고, 巳氏는 여러 성씨로 분화한다. 己氏는 巳氏에서 태어났다.
풍이의 후예 하백녀
하백 기풍은 河伯女라는 딸을 두었는데, 하백녀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선포하면서 맞아들인 두 번째 부인이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성왕이 그가 하백의 자손임을 선포한 것은 그가 소풍蘇豊(기풍己豊)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그가 단군왕검과 하백녀를 조상으로 두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朝鮮을 구성하는 魚族과 羊族
추모왕은 또한 해와 달의 아들(日月之子)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왕의 위세를 부리기 위하여 한 소리가 아니라, 그가 풍이 출신의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이다.
신라시대에 화랑의 우두머리를 풍월주風月主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표현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風月主는 풍이의 후예로서 풍이의 문물인 風流를 계승한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풍류가 이미 桓國時代에 있었음을 <부소보서>가 전한다. <부소보서>에서는 풍류에 해당하는 말을 풍도지기강風道之紀綱이라고 하였다)
그림 배달나라는 한웅천왕桓雄天王-고시高矢-복희伏羲-신농神農-소전少典-유망楡罔-희熙로 이어진다. 물고기를 뜻하는 어魚는 희씨의 熙氏 종족種族아이콘이다. 단군왕검이 조선朝鮮을 선포할 때 熙氏는 지배계층을 형성한다. 朝鮮의 선鮮자에서 魚는 희씨계열熙氏系列의 종족을 의미한다. 단군왕검은 희씨계열이다. 하백河伯은 하늘에서는 태양을 관장하는 신이고, 땅에서는 황하黃河를 관장하는 신이다. 또한 황하를 관장하던 己氏계열의 임금을 의미하기도 한다. 단군왕검은 조선의 단군왕검으로 등극하면서 하백의 딸인 河伯女에게 장가갔다. 추모왕鄒牟王, 모두루牟頭婁, 소서노召西弩는 모두 하백녀게열의 사람들로 보인다.
일월지자日月之子를 달리 말하면 朝鮮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조朝자에 日月이 들어 있으므로 그리 말한 것이다. 일월지자가 되는 조건은 선鮮자에 나타나는 어魚와 양羊이다. 어魚와 양羊은 모두 한웅천왕桓雄天王-고시高矢-복희伏羲-신농神農-소전少典-유망楡罔-희熙-전욱고양諯頊高陽 계열의 종족이다. 어魚는 물고기 족표族表
(종족 아이콘)을 쓰는 희족熙族을 의미하고, 양羊은 희족의 다음 세대인 전욱고양족諯頊高陽族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월지자가 될 수 있는 요건要件을 갖추려면 물고기족표를 쓰는 희족熙族이거나 양족표를 쓰는 양족羊族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림 선鮮자는 갑골문은 보이지 않고, 금문만 보인다. 이점은 선자가 갑골문을 쓰던 시대에 생겨난 문자가 아니고 금문을 쓰던 시대에 생겨난 문자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조선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금문을 쓰던 시대에 나온 문자라고 볼 수 있다. 上羊下魚, 즉 下魚羊頭의 문자로 되어 있어서, 下羊魚頭라는 지명이 생겨나기까지 두 종족 사이에 세력다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모두루총牟頭婁塚이 있는 지명 하해방촌의 옛 이름이 하양어두下羊魚頭였다는 것은 양이 아래에 있고 물고기가 머리에 있다는 뜻인데, 이를 다시 말하면, 양족羊族은 백성이고 희족熙族은 지배자라는 뜻이다. 조선을 구성하는 종족은 지배종족인 희족과 피지배종족인 양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만주 일대가 고구려의 전신인 조선의 영토였음을 우리는 이러한 지명을 분석함으로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추모성왕이 일월지라라고 했을 때, 그의 출신이 조선의 지배계층인 어족魚族 즉 희족熙族이 되는 것이다. 희족은 단군왕검이 장가 든 집안인 하백 기풍의 조상이 된다.
추모왕의 鄒자는 추芻 +읍ꞥ의 문자이다. 추芻는 소에게 먹이는 꼴을 의미하는 문자이다. 읍ꞥ은 성곽으로 둘러싼 나라라는 뜻이다. 추모왕의 주鄒자는 소를 먹이는 나라, 다시 말해서 견우牽牛의 나라를 의미하는 문자이다. 추모왕이 세운 나라 고구려가 말하자면 <견우의 나라>라는 뜻이다. 추모왕은 고구려가 <견우의 나라>이므로, 소서노의 나라를 <견우의 나라>에 대응하는 <직녀의 나라>인 어하라로 분봉分封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추모왕은 견우에, 소서노는 직녀에 대응하게 된다.
6 추모성왕의 나라 고구려는 牽牛의 나라
칠석제를 지내는 나라 고구려
추모성왕의 모牟자는 제사의식祭祀儀式을 나타내는 문자이다. 牟자는 사厶+우牛로 된 문자인데, 사厶의 의미는 나(我)이지만, 원래의 의미는 북두칠성의 성기星氣를 받고 잉태하여 태어난 나를 의미한다. 우리 무가사설에서 “칠성님의 명命을 받고 태어났다”는 말은 이를 뜻한다. 厶+牛에서는 소의 뿔에 조응하는 북두칠성의 성기를 나타낸다고 본다. 소의 뿔에 북두칠성의 성기가 조응하려면 뿔을 해체하여 제단에 올리고 제사의식을 거행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따라서 추모성왕의 모자에는 소의 뿔을 바치고 제사지내는 제관이라는 의미가 있다.
추모성왕의 시대에 제사에 바치는 소를 모우旄牛라고 하였다. 모우를 잡아서 뿔을 해체하여 제단에 올리면 牟가 되고, 그 꼬리에 달린 술을 소나무 기둥 꼭대기에 달면 모旄가 되었다. 천제天祭를 지낼 때는 제단에 모牟를 올리고, 높은 산에 모旄를 세웠다. 이 모를 세우기 위하여 판 구멍을 혈구穴口라고 하였다. 강화도의 옛 지명이 혈구穴口였던 것은 그곳의 노고산 뒤쪽으로 연결된 높은 산에 모旄를 꽂는 혈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혈구산穴口山이 있어서 고조선시대의 제사의식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강화도에 고구려 역사와 관련이 있는 설화가 내려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牟를 올리고, 모旄를 세우는 제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견우의 나라 고구려를 대표하여 이곳에서 牽牛祭-七夕祭-天祭를 지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칠석제는 제관을 모두 여자로 한다는 점에서 왜 여자만을 칠석제의 제관으로 쓰는지 그 이유를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召西弩와 관련이 있는 牟頭婁塚의 奴라는 문자
모두루총牟頭婁塚에 묻힌 사람은 그의 조상을 노객奴客이라고 하였다. 노奴는 소서노召西弩의 노弩와 관련이 있는 문자이다. 노奴가 궁弓을 메고 있는 형상이 노弩이기 때문이다. 노奴라는 문자는 女+又이므로 女+女가 된다. 따라서 한 명의 여자는 임금이고, 다른 한 명의 여자는 신하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궁弓을 메어 그가 武士 또는 巫師임을 나타내고 있음이 타살거리를 하는 무당巫堂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무당이 타살거리를 할 때 활을 가지고 짐승을 잡는 시늉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잡는 짐승은 사슴(鹿)이 다.
사슴은 치우천왕의 본고장인 탁록涿鹿(夏에 의하여 탁록이 되기 이전에는 靑丘로 불렸다)을 의미하는 문자이다. 치우천왕이 사슴을 사냥하여 제사지내던 유습이 타살거리에 반영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객客자는 추모성왕이 주인主人이고, 노奴는 객客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왕王과 신하臣下의 사이를 나타내는 말이다. 옛날에 상相을 국객國客이라고 하였는데(司儀-康熙字典 客자 237쪽 참고),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을 주主 즉 상上이라고 하고, 국무총리國務總理를 객客으로 보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따라서 노객奴客은 여자로서 국왕의 신하로서 최고 관직인 상相에 있었던 소서노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노객이 소서노를 의미하는 문자로 보고 있다.
牟頭婁塚의 주인
모두루총의 주인은 소서노의 후예로 소서노계열의 모계사회를 대표하여 대모大母가 내세운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모두牟頭에서 이를 찾을 수 있고, 루婁에서도 이를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소서노가 그의 아들 온조를 내세운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루婁는 밭 가운데에 솟대를 세우는 여인을 의미하는 문자이다. 모牟를 족성族姓으로 보면, 루婁는 씨칭氏稱秤로 볼 수 있는데, 그의 모계는 모우旄牛에서 뿔을 각을 떠서 천제를 지내는 집안이요, 그의 부계는 밭 가운데에 솟대를 세우는 집안이다.
루婁자의 원래의 의미는 신神과 교역交役함을 나타내는 문자이다. 루婁자의 고자古字에 세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나라 국囗자 안에 女자 둘이 위 아래로 들어가 있는 문자이다. 말하자면, 나라 국囗자 안에 奴자가 들어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의 문자라고 하겠다. 또 다른 하나는 나라 국囗자 안에 사람 인人자 둘이 위 아래로 들어가 있고, 이 문자를 女자가 머리위에 이고 있는 형상이다. 세 번째 문자는 여자가 두 손으로 신대를 떠받들고 있는 형상의 문자이다. 이들 세 문자가 모두 여인을 주인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고(康熙字典 婁자 214쪽 참고), 이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신을 떠받드는 여자라는 점에서 하백녀河伯女와 같은 지위에 있었던 여자로 볼 수 있다.
이 문자를 분석하면 무덤의 주인 모두루牟頭婁가 추모왕과 같은 계열의 하백녀 집안 출신임을 유추할 수 있게 되는데, 하백녀가 소씨蘇氏집안 출신이므로, 그도 소씨 집안 출신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서노도 같은 하백녀 계열의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소서노라는 음이 소를 유추하게 함으로 추리에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상스런 三國史記의 기록
소서노에 대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기록이 있는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와 비교하여 보면, 「삼국사기」의 저자가 소서노에 대하여 왜곡하여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서노에 대하여 왜곡하였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소서노를 후실로 삼았다는 대목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당시가 모계사회이고 고주몽이 소서노에게 신세를 지는 처지인데, 무슨 이유로 소서노가 고주몽의 후실이 되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비류가 백제의 시조가 된다. 아버지는 우이優台로서 북부여北夫餘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는 졸본인卒本人 연타발延拖勃의 딸 소서노召西弩이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이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沸流이고 작은아들은 溫祚였다. 구이가 죽어 졸본으로 돌아와 과부로 지냈다. 부여에서는 주몽이 부여에 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년) 동부여東扶餘에서 도망 나와 졸본卒本에서 고구려를 세우고 소서노를 취하여 비로 맞아들였다. 소서노는 주몽의 개국에 전적으로 내조하여 주몽도 왕비를 사랑하고 비류와 온조도 자기 자식처럼 사랑했다. 그러나 주몽이 동부여에 있을 때 얻은 전처 예씨禮氏부인과 소생 유류儒留(유리琉璃)가 도망해 오자,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계승시켰다. 비류는 온조에게 “대왕이 동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왔을 때에,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 나라를 창업했을 때 도움이 컸었거늘 홀대한다”고 설득하여, 남쪽으로 땅을 찾아 내렸다.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정착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서설 중의 異說, 金聖昊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참고 38쪽)
소서노의 개가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기록하였다. 당시가 모계사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기록은 유가사관儒家史官이 남성중심의 역사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역사왜곡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서노가 고주몽에게 개가한 것이 아니라 소서노가 떠돌이 고주몽의 인물 됨됨이를 보고 거두어주었다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그것도 그냥 아무나 받아들이듯이 고주몽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어떤 종족적 합의나 사회적 합의에 의하여 수행되는 종교의식의 과정 중에 고주몽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그 것이 1년에 단 한 번 소도에 한시적으로 설치되었던 성창聖娼에 의하여 맺어졌다고 본다. 소도에 세우는 솟대나 무당이 들고 무무巫舞를 추는 신대가 모두 남녀의 교접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솟대를 세운 그곳은 성창이 허락되는 곳이요, 무당이 들고 있는 신대는 신대를 들고 있는 여자가 자신의 성창을 허락하겠다는 의사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신대 즉 신간神竿에는 남근男根의 다른 이름인 신의 의미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행사가 지금도 축제의 형식으로 행해지고 있는 곳이 강릉의 단오제 때 산에서 모셔오는 웅상웅상雄常儀式이다. 무당은 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桓雄天王을 상징하는 웅상을 모셔다가 무녀로 하여금 동침하게 하고 굿이 끝난 후에 불태워버린다. 소서노가 이러한 유습을 고주몽에게 행했다고 유추하게 해 주는 것이 또한 단오굿판에 숨어 있는 성창의식이다. 단오는 五와 五의 만남인데, 음력 5월 5일에 남중하는 해가 천기天氣의 악살惡煞인 천중살天中煞을 제거하고자 거행하는 의식이다. 천중살을 제거하기 위하여 죽은 한웅천왕의 영혼을 불러다가 산 무녀와 동침하게 하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한웅천왕의 신체神體를 모셔다가 이 의식을 벌이는 이유는 한웅천왕이 「천부경天符經」을 녹도문자로 기록하게 한 분이므로, 「천부경」에 나오는 오칠일묘연五七一妙衍이라는 문자가 천기의 악살을 제거하게 해 주는 천문의 이치대로 별들이 운행하기를 비는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런저런 이유로, 소서노가 고주몽과 만나게 된 때가 천중살을 제거하는 날인 단오 때였다고 볼 수 있고, 소서노가 택하게 된 고주몽이 천기의 악살을 제거하는 데 주역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주몽을 일러 일월지자日月之子라고 한 것도 고주몽의 위세를 나타내기 위하여 한 헛소리가 아니라 당시의 사회에서 고주몽으로 하여금 그러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어진 호칭일 것이다. 그를 동몽성황東明聖王으로 부르게 된 것도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해와 달을 의미하는 명明자에서 유추할 수 있고, 고주몽高朱蒙이라는 문자에서 높이 뜬 해를 연상하게 되는 이유도 그가 단오 때 천기의 악살을 제거하기 위하여 부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주몽의 배후에 당시 모계사회의 막강한 실력자인 소서노가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소서노가 아니었다면 동명성왕 즉 고주몽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시대에 행한 굿을 동맹東盟이라고 했는데, 동맹은 동쪽에 제물을 차리고 올리는 일월마지를 의미하는 굿이다. 이월마지의 주역이 동명성왕이 되게 한 사람도 소서노였을 것이다. 동맹은 10월에 올리는 추수감사제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는데, 오월 단오제 때 올린 천중살 제거의식의 결과로 나타난 철모리굿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소서노가 그에게 후처로 들어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역사왜곡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서노가 그의 근거지인 어하라를 떠나게 된 이유는 새로운 곳, 즉 모계사회의 대모가 새로이 솟대를 세우고 소도를 만들 곳을 찾아야 하겠다는 정치적 결정에 의하여 행한 행동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7 鄒牟王을 잃은 召西弩의 불리한 입지
추모왕의 죽음으로 독립을 필요로 하게 된 소서노
소서노가 주몽朱蒙 섬기기를 주청하여(신하되기를 주청하여) 고주몽은 몹시 기뻐하여 이를 장려하여 어하라於瑕羅에 책봉했다.(「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290쪽) 고 했는데, 주몽이 막강한 세력을 가진 같은 모계혈족의 동족인 소서노를 상相(客)으로 얻어 국력을 강성하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본처와 소생 유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주몽의 왕위는 비류에게 돌아갔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정치적 계산에 의하여 소서노가 고주몽의 노객奴客이 될 것을 자청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고주몽은 소서노의 제의를 받아들여 어하라에 책봉했다고 생각되는데, 유리가 왕위를 승계하고 고주몽이 세상을 떠나면서 소서노와 고주몽 사이의 약속은 깨어지고 만다. 이리하여 비류는 어하라의 왕으로 주저앉고, 소서노의 입지는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 하면 추모왕이 책봉해 준 어하라의 독립성을 유지하게 될지가 의문이었던 것이다. 소서노는 어하라를 정리하고 나서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경영할 땅을 향해 떠났다. 그곳이 마한馬韓이라는 땅이었다.
소서노의 내륙 진출
소래에 상륙한 소서노가 어디로 방향을 잡았을까?하는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옛 지명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의 시흥은 조선조 정조 때 생긴 지명인데, 서울의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동작구, 서초구 등과 경기도의 안양시, 광명시, 안산시, 과천시, 군포시, 의왕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시흥의 고구려시대의 이름이 仍伐奴이다. 관직이 奴客인 소서노가 정벌하여 사람이 살게 된 곳이라는 뜻이다. 뜻을 풀이하면, 仍(인하다, 거듭하다)은 亻 +乃로 인구가 불어남으로써 생긴 문자라고 볼 수 있다.
伐(치다, 베다)는 군대로 상대국을 친다는 뜻이다.
奴는 소서노의 관직인 奴客 즉 재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소서노가 고구려의 관직 노객으로서 정벌하여 확장한 땅이 잉벌로이다.
召西弩의 弩자와 老姑山의 老자와 타살굿
강화도에서 서울에 이르는 길목엔 노고산이라는 지명이 세 곳에나 있다. 강화도의
외포리에서 석모도席毛島를 바라보는 야산이 노고산이고, 부천과 시흥의 경계에도 노고산이 있고, 서울의 마포에도 노고산이 있다. 이들 노고산이라는 이름에서 소서노를 유추할 수 있는데, 소서노의 노弩자와 노고산의 노老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소서노의 쇠뇌를 뜻하는 노弩자는 소서노가 고구려의 강력한 무기인 쇠뇌를 사용하는 무사이자 무당임을 뜻하고, 노고산의 노老자는 소서노가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뜻하는 문자이다.
노老자는 흙토土+삐침별丿+비수비匕자로 이루어진 문자이다. 하늘에서 땅에 별의 기운이 꽂히는 것을 형상으로 하여 만든 문자가 노老자인데, 이때 땅에 꽂히는 별의 기운은 북두칠성에서 오는 기운을 말한다. 따라서 제사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姑자는 여자여女+옛고古로 이루어진 문자로 마고麻姑를 신神으로 모시면서 만들어진 문자이다. 그러므로 노고산老姑山이란 마고에게 제사지내는 산이라는 뜻이다. 마고는 여신이므로 남자들이 제사지내지 않고 여자들이 제관이 되어 제사지낸다.
소서노가 한강을 통과하면서 제사지낸 산들이 강화도의 노고산, 부천의 노고산, 마포의 노고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소서노는 북한北漢(광주의 옛 지명)에 이르는 동안 세 번 마고에게 제사지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제사를 지냈을까? 당시에 사람들이 사냥을 하면서 이동하였다고 보면, 제사의 형태는 타살굿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타살거리는 막동이藐東夷 즉 마고의 아들 동이가 사슴을 잡아서 올리는 일련의 무속적 제사행위이다. 이러한 제사행위는 그 연원을 찾아 올라가면 탁록涿鹿에서 사슴을 잡아 제물로 올리는 굿 즉 타살굿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蚩尤時代의 유습으로 볼 수 있다.
神輿 方丈 天符三印
그렇다면 소서노 일행이 무엇을 모시고 어떠한 모양으로 이동을 하였을 것인가? 「한단고기」 삼한관경본기가 그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태백산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고 높게 비서갑의 땅(斐西岬之境)에 우뚝 서 있다. 물을 뒤로 업고 산을 끌어안고 있는데, 크게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라, 세상에 전하기를 「한웅천왕」이 여기까지 순수하시사 사냥하시었기 때문에 그를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天符刻鏡) 앞서 가고, 우사는 북을 치면서(雨師迎鼓) 돌아가며 춤을 추고(環舞), 운사는 운검으로 호위(雲師佰劍陛衛)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실 때의 의식(天帝就山之儀)은 이처럼 장중하였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三韓管境本紀 195쪽 임승국 역)
위 기록은 「삼한관경본기」에 실린 한웅천왕이 태백산에 천제 지내러 갈 때의 의장행렬과 의식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다.
비서갑은 후대에 가서 홍제 때에 부소갑扶蘇岬으로 불리고, 소시蘇氏의 봉지封地가 되고, 하백녀의 근거지가 된다.
대일왕大日王은 한웅천왕의 휘諱에 해당하는 존칭尊稱이다.
천부각경天符刻鏡은 마고가 후대에 전수한 천부삼인을 새긴 거울이다. 한웅천왕시대에는 돌에 새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루단군이 돌아가신 후에 부루단지를 모시고 부루단군에게 기도하던 여인들에게 신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무당이 된 여자들이 보전해 오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이북굿을 하는 무당이 신당에 걸어 두거나 굿을 할 때 제단 위에 걸어둔다.
풍백風伯은 한웅천왕시대에 태백진교太白眞敎라는 종교를 관장하던 관직이다. 한웅천왕은 신지혁덕에게 녹도문자鹿圖文字로 천부경天符經을 기록하게 하여 사유思惟의 기틀을 세우고 일석삼극一析三極이라는 사유체계思惟體系에 기초하여 마고시대 이후로 전해 오던 삼신교三神敎를 발전시켜 태백진교를 만들었고, 태백진교에서 재세이화在世理化의 도道를 가르쳤다.
영고迎鼓는 길굿이다. 이 일을 한인천제시대로부터 풍이족風夷族의 풍물패들이 하였다. 부여에서 받아들여 추수가 다 끝난 후 12월에 하였다.
환무環舞는 무천舞天과 같은 것이다. 예濊에서 받아들여 음력 시월에 국가적 행사로 하였다.
운사雲師는 군대. 군대가 운검雲劒으로 천왕을 호위하였다. 그 후로 덕망 있는 원로장수가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는 일을 운검이라고 하였다.
한웅천왕 때의 제천의식 행차의 경호의식警護儀式은 참고할만하다. 천부인을 제작하여 이동형의 신당인 방장에 모시고 이동하는 의식을 생각해 봄직하다.
8 소서노와 慰禮城
새로운 땅 우레성을 찾아 떠나는 소서노
소서노와 온조는 한산漢山(광주廣州의 옛 이름이다)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 오른다. 이곳이 하남河南 위지성慰支城으로 가기 전의 하북河北 위례성慰禮城이다. 위지성은 위례성의 지성支城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소서노 행사를 하려면 소서노가 어디를 하북 위례성으로 잡았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야 한다.
「삼국사기」 온조왕 즉위 원년조 기록에 나타나는 도읍지 하남위례성에 대비되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기 전에 먼저 하북 위례성에 도읍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우리는 먼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위례성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위례를 울타리라는 우리말의 한자화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러한 설을 처음 내놓은 사람은 정약용이다. 그러나 필자는 위례가 우레의 변음으로 보고 있다. 우레성으로 보는 것이다. 상고시대에 우레에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있다. 도교에서 우레인 뇌성雷聲을 보화천존普化天尊이라고 하여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굳이 울타리성이라는 중복되는 이중의 용어를 써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위례를 우레-뇌성보화천존-하나님의 가호로 본다면, 위례慰禮가 하나님에게 에를 다하고 위로를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禮자에는 삼신三神(示)에게 제사지낸다(豊)는 의미가 있으므로 예가 제사행위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위례성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소서노를 무당으로 본다면 위례를 우레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
방학동토성이 초기백제의 國都가 되기 위한 전제
방학동토성이 위레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는 한종섭과 오순제 두 분이다. 이분들은 방학동토성 내부를 위레성으로 보고 있다. 여기가 위례성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곳이 초기 백제의 국도가 된다는 의미가 되는데, 방학동토성이 초기백제의 국도가 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연구부족으로 천문적 전제조건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여기뿐만 아니라, 하남 위례성을 국도로 보는 시각에도 강북위례성에서처럼 공통적인 결함이 있다. 옛날 사람들의 천문관에 대하여 지식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사실이다. 국도가 들어서려면 천문에 맞는 합리성을 충족해야 하는데, 이점에 대하여 전혀 연구가 없으므로 현재의 연구는 근본에서부터 재검토가 필요하다.
하북위례성 국도론國都論을 충족할 수 있는 방향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상고시대에 국도가 어떻게 결정이 되는가를 찾아 생각해 보기로 한다.
後桓熊氏繼興 奉天神之詔 降于白山黑水之間 鑿子井女井於天坪 劃井地於靑邱
후한웅씨계흥 봉천신지조 강우백산흑수지간 착자정여정어천평 획정지어청구
후에 한웅씨가 계속해서 일어나 하나님을 받들고 고하여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와 천평에 자정子井과 여정女井을 파고 청구靑邱에 정지井地를 기획하였다. (<한단고기> 三聖記全 상편 安含老 撰 17쪽 정신세계사)
위 글은 안함로가 지은 삼성기 상편에 실린 글인데, 한웅천왕이 배달나라를 靑丘에 세워 靑邱로 불리게 될 당시의 국도國都 정하는 법을 기록한 것이다. 청구라면 지금의 섬서성에 있는 탁록涿鹿을 말한다. 원래 땅 이름이 청구靑丘였으나, 한웅천왕이 국도의 체제를 갖추면서 청구靑邱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한웅천왕은 세력을 확장하면서 하나님을 받들고 나라 만들 것을 고한 다음에 백산과 흑수 사이에서 내려와서 터 잡을 곳을 찾는다. 그가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고 한 것은 다른 곳에서 와서 그곳이 마지막 기착지가 되었다는 말이다. 한웅천왕은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사방을 두루 살펴 본 후에 천평天坪(천평은 천신이 내려오는 들이라는 뜻이다. 三仙坪과 같은 뜻이다)에 자정과 여정을 판다.
본문을 번역한 임승국선생은 백산을 백두산이라고 하였으나 이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이 일대에서 배달나라의 근거지가 되는 청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탁록에서 보면 백산은 서남쪽에 떨어져 있는 태백산太白山을 의미한다. 태백산의 뜻이 <큰 백산>이므로 태백산이 탁록의 서남쪽을 막아주는 배후의 산이 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태백산 정상에 한웅천왕을 유추할 수 있게 하는 <할아버지 호수>로 불리는 호수가 있는 점으로 보아서 이곳을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의 근원인 자미천紫微泉 즉 자미샘으로 본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태백산을 잇는 진령秦嶺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둘인데,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황하黃河를 형성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장강長江을 이룬다. 따라서 본문에서 흑수黑水라로 한 것은 흑룡강黑龍江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북쪽으로 흐르는 강인 황하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탁록은 하나라 때부터 불려진 지명으로 하나라가 들어서기 이전엔 엄연히 청구로 불리던 곳이다. 동쪽에 있는 비옥한 땅이라 청구로 불렸을 것이다. 한웅천왕이 천평이라고 한 곳이 당시의 이름으로 청구로 불린 지금의 탁록일 것이다. 천혜의 땅을 의미하는 청구에 인공을 가하여 천평으로 불렀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인공을 가하였는가 하는 흔적이 본문에 나와 있다.
먼저 자정子井과 여정女井을 팠다(鑿)고 했는데, 자정은 북쪽에 판 우물이고, 여정은 남쪽에 판 우물이다. 이들 우물을 파는 이유는 도성의 방위를 잡기 위해서이다. 그 중심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단天祭壇을 만들고 이를 부도符都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면 도성의 방위가 결정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도성 터 잡기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 강화도이다. 강화도에 있는 지명 냉정리冷井里는 자정에 해당하는 우물을 판 곳이고, 온수리溫水里는 여정에 해당하는 우물을 판 곳이다. 자정과 여정에 정북이나 정남의 방위를 벗어나는 위치변동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물이 나오고 나오지 않는 데에 따라서 위치가 변하기 때문이다.
두운리斗雲里는 부도를 설치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냉정은 북쪽 우물이라는 뜻이고, 온수는 남쪽 우물이라는 뜻이다. 두운의 두는 제사 터의 방위를 정해 주는 별이라는 뜻이다. 냉冷자에서 감坎, 자子, 남男의 의미가 도출되고, 온溫자에서 이離, 남南, 여女의 의미가 도출된다.
한웅천왕이 세운 배달나라의 근거지가 배달나라의 국도였다면 강화도에서처럼 위에 든 자정 여정 두운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탁록을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탁록의 복쪽인 탁록지야涿鹿之野나 중심인 기주지야冀州之野나 탁록의 서쪽인 판천지야阪泉之野는 옛날 청구의 천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탁록에는 자정에 해당하는 황제천黃帝泉이 서북쪽인 건방乾方에, 여정에 해당하는 치우천蚩尤泉이 동남쪽인 손방巽方에 있다. 물이 나오는 곳을 찾다 보니까 남북정방위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치우천에서 흐르는 물을 치우천수라고 한다. 이 물을 한 곳에 모이게 하여 용왕당龍王塘이라고 하였다. 풍수를 고려하여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방학동토성은 국도될 수 있는 전제를 충족하는가?
“도봉산에는 자미샘에 해당하는 샘이 입석대 근처에 있다”고 김대성씨가 도봉문화 제9호에서 밝혔다. 필자는 자미샘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필자가 잘 아는 김대성씨가 자미샘의 존재를 밝혔다는 점에서 믿어도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자미원에서 감위수坎爲水가 내려오는 자리에 자미샘이 있다면 일단 자정子井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제1차 국도의 전제를 충족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에 해가 지나가는 자리를 표시하는 엄曮자를 새긴 엄자바위가 방학토성 북쪽 능선부에 있다고 방학동토성을 연구하는 오순제씨가 도봉문화 제11호에서 밝히고 있다는 점도 고무적이라고 할 것이다. 방학토성에 엄자바위가 있다는 것은 이 곳의 방위를 알려주는 증표로서 여정을 대신할 수 있다고 보아서 고무적이라고 한 것이다. 이들 두 방위는 초기백제 도성의 위치를 찾는데 첫 번의 근거가 된다.
다음에 보아야 할 것은 우이계곡에서 발원하여 번동 앞을 흐르는 우이천牛耳川과
의정부 북쪽에서 발원하여 창동 앞을 흐르는 한천漢川이 합수하여 중량천이 되어 한강漢江으로 흘러드는 삼태극형상의 한천漢川이다. 한천은 대한민국의 국도인 서울의 전면을 흐르는 한강과 같은 의미를 가진 하천이다. 천문에서 한강은 은하수이고, 서울은 자미원이다. 이와 같이 한천은 초기백제도성을 자미원이 되게 하는 은하
수가 된다. 그러므로 초기백제도성의 입지로 합당한 곳은 우이천과 한천의 합수지점 안에 있는 공간인 창동과 방학동 일대가 된다. 여기가 초기백제도성이 되는 지역이고, 수도서울이 대한민국의 도성이 되게 하는 원형이 된다. 이곳을 옛날에 방학굴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방학굴은 그곳에만 한정되지 않고 한천 남쪽에 펼쳐있는 중벌리(현재의 樊洞)일대를 포함한다. 중벌리 일대를 방학굴이라고 하였으므로 당연히 백제초기도성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다.
방학동토성 남쪽의 시루봉은 증산甑山으로 증甑자는 나라를 상징하는 문자이다. 시루에 떡을 져서 천제를 지내게 됨으로 나라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방학동은 원래 방학골이었는데, 학이 많이 날아들어서 방학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보아서는 아니 되고, 다른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굿에서 칠성거리에서 추는 칠성춤을 학춤이라고 한다. 칠성은 하나님이 천문에서 북두칠성으로 나타난 경우이므로 학춤은 곧 하나님에게 바치는 춤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서노 당시에 하나님에게 칠성춤을 출 수 있는 사람은 소서노였다고 보아야 한다.
우이천과 한수의 합수지점 가까이에 있는 지명 종암鐘岩에 대하여 오순제씨는 「도봉문화」 제13호에서 그곳이 민속신앙의 제사 터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곳의 바위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인데, 물이 합수하여 삼태극의 형상을 취하게 됨으로 이곳이 제사 터가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삼태극은 제사의 대상인 삼신의 문양화 임으로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9 남제사에 나타나는 위례성의 고유한 이름
북두칠성은 그 음이 곰이다. 한자로 고마固麻로 쓴다. 고마는 백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남사백제전南史百濟傳」(「康熙字典」 부수-麻 1622쪽 國際文化出版公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남사는 南齊史이다.
百濟國號王所都城曰固麻邑曰檐魯如中國言郡縣也
백제국호왕소도성왈고마읍왕첨로여중국언군현야
백제의 국호는 왕이 머무르는 도성으로 하는데, 고마읍이라고 하고, 첨로라고도 하고, 중국말로 군현과 같다.
위 글에서 고마固麻는 우리글 곰을 한자로 바꾸기 위하여 고마로 풀어 쓴 것이다. 이글은 백제의 도성이 ‘곰’으로 불렸다는 증거이다. 첨로檐魯의 ‘첨’은 단군왕검의 검儉과 같은 뜻으로 쓴 말이다. 두 말 다 ‘처음’이라는 뜻이다. 이들 문자는 모두 다 마고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 말의 중요한 점은 마고를 계승한 조선과 백제가 국조國祖를 마고로 하였다는 점이다.
서울의 북단에 있는 삼각산 자락에 마고에서 나온 곰이 백제 도성의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다. 곰이 다시 한자화 하여 웅진熊津이라는 지명이 생긴다. 웅진은 곰나루(지금의 公州)의 한자화 이다. 마고는 지방마다 사당을 지어 모시는데, 이 사당을 할미당 또는 삼신당이라고 하였다. 할미는 한어머니라는 뜻이다.
소서노가 이 곳에 도읍을 정하고 곰으로 부름으로써 스스로 독보적으로 마고를 계승하였음을 나타내었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좀더 확실하다. <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戊辰宰相會百官及國老欲署名呈省書國老多不至事
竟未就王傳車疾驅艱楚萬狀未
至揭陽丙子薨于岳陽縣. 或云遇 或云食橘而
國人聞之莫有悲之者小民至有欣躍以爲復見更生之日.
初宮中及道路歌曰:"阿也麻古之那從今去何時來?" 至是人解之曰: "岳陽亡故之難今日去何時還?"
王在位前後六年壽三十.
무진일, 재상들이 백관들과 나라의 원로들을 소집하여 원나라 중서성에 제출할 서한에 서명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나라의 원로들 대부분이 모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성사하지 못하였다.
왕(원에 납치되어 후에 살해당하게 되는 충혜왕)은 전거傳車(역마)에 실려서 급히 달려가는 도중에 천신만고를 겪으며 계양까지 가지 못하고 병자일에 악양현에서 죽었다. 혹은 “독살되었다”하고, 혹은 “귤에 중독되어 죽었다”고도 하는데, 본국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가난한 백성들은 기뻐 날뛰면서 이제 다시 갱생할 날을 보게 되었다고까지 말하였다.(주, 이 글은 친원파親元波의 기록을 조선 초기에 고려사를 편찬하는 사람들이 다시 폄하한 글이므로 왜곡되고 훼손된 글이라고 보아야 한다)
처음에 궁중과 항간에서 노래가 유행되기를, “아아 마고지나 이제 가면 언제 오나?”라고 하였다. 왕은 전후하여 재위 6년이며 수명 30세이었다.
<고려사>에는 이렇게 고려가 계승한 나라가 ‘마고지나’임을 밝히고 있다.
古韓語 연구자들은 우리 말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에 쓰이는 고마가 마고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에 ‘神 같다’는 표현으로 썼는데, 오늘날 ‘고맙’다는 표현으로 의미가 바뀌었다고 한다. ‘곰 같다’→‘검 같다’→‘신 같다’로 보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神을 かみ라고 한다. かみ는 우리 말 검(神)의 일본어화이다.
우리 음악의 고유한 이름을 매昧라고 한다. 매는 북두칠성에 소속한 별이다. 매를 친다, 두드린다는 의미가 있다. 두드린다는 斗(북두칠성)에 드린다는 의미이다. 곰에게 드린다는 뜻이기도 한다. 곰은 검이다. 검에게 드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에게 드린다는 뜻이 된다. 매는 신의 의미로 쓰는 마고에서 나온 것이다. music은 마고에서 온 것으로 본다.
엄마의 마나 어머니의 머는 마고에서 온 것으로 본다.
9 맺는 말
필자는 우리 역사에서 소서노라는 한 여성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문자학과 무속과 천문과 풍수를 동원하여 여러 각도에서 그의 행적을 서술하였다. 결론을 말하면, 그는 떠돌이나 다름없는 도망자 고주몽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세울 수 있게 하였고, 고주몽이 추모왕이 되면서 그의 수하로 들어가 자기만의 나라인 어하라에 책봉되었다. 어하라는 지금의 요서지방, 옛 고조선의 땅에 해당한다. 여기가 백제군(金庠基, <백제의 요서 經略에 대하여>-東方史論叢(1974)) 이다.
이렇게 백제초기역사가 고구려초기역사와 맞물려 있으므로, 고구려의 역사를 띠어내어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킨다는 <동북공정>은 역사를 조작하여 만들어 내는 허구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