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도 |
국적 |
등반루트 |
등 정 자 |
비 고 |
1974 |
인도 |
서릉 |
도르지, 펨파, 파상 |
초등 |
1980 |
일본 |
북릉 |
|
|
1981 |
인도, 영국 |
동필라 |
더그스트코트, 그렉챠일드 |
푸트초등 후 서벽으로 하산 |
1982 |
영국 |
북동릉 |
닉, 톡스 |
알파인스타일 |
1983 |
일본 |
동릉 |
야마가타, 오하마 |
캡슐스타일, 1,200m(42피치) |
1983 |
영국 |
남동릉 |
크리스보닝턴, 짐 |
남서봉(6,525m)초등 |
1984 |
네덜란드 |
서릉 |
란테르, 피에레게 |
알파인스타일 |
1984 |
스페인 |
중앙필라,남벽 |
호세, 프란시스코 |
알파인스타일 |
1985 |
독일 |
북서릉 |
쿤터 외12명 전원 |
|
1986 |
이태리 |
북서벽 |
언리코, 프브리지오 |
8일간 등반 |
1987 |
유고 |
북동릉 |
보쟉케넥 |
|
1987 |
체고, 독일 |
북벽 |
토마스 키실카 |
루트 초등 |
1989 |
미국 |
북동릉 |
빔 더프 |
|
1990 |
영국 |
북벽 |
앤디 파킨 |
|
1991 |
노르웨이 |
서릉 |
할트 빅 |
|
1995 |
오스트리아 |
동필라 |
2명 |
알파인스타일 |
6. 등반추진 일정
1994년 11월 : 기초계획 및 발의
12월 : 자료준비 및 등반 기획서 발간
정기총회 안건 발의 및 확정
1995년 1월 : IMF(인도 산악연맹)로 입산신청서 발송(FAX)
2월 : 서신으로 답장 수신
3월 : 자체 운영 추진에서 국제 캠프로 업무대행진 결정
4월 : “청화”팀으로 받은 퍼미션을 국제캠프로 인계하고,
등산대 명칭은 “청화”로 결정 추진비 입금(국제캠프에)
5월 : 운행, 식량, 의료, 장비 계획서 확정
6월 : 등반계획서 발간(한글, 영문)
8월 16일 : 출국
9월 20일 : 귀국
|
I. M. F 인도의 모든 산악행정을 관장하는 곳이다. 숙박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볼더링장, 인공암벽이 있으며, 아침이 제공되나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인도의 산에 관한 자료를 구할 수 있고, 숙식비는 일반호텔에 비하면 비싼 편이다. 행정 처리의 편리함과 시간단축을 위하여 각국의 원정대가 이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1실에 10명이 함께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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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원정 일정표
일수 |
날짜 |
B. C 일수 |
일정 |
내용 |
비고 |
1 |
8/16 |
|
서울→홍콩→델리 |
I. M. F에서 숙식 |
|
2 |
17 |
|
I. M. F 브리핑 |
I. M. F에서 숙식 |
|
3 |
18 |
|
대사관 방문 |
I. M. F에서 숙식 |
|
4 |
19 |
|
차량 이동 |
델리→우타르케쉬 |
|
5 |
20 |
|
차량 이동 |
우타르케쉬→강고트리 |
|
6 |
21 |
|
체류 |
강고트리 |
3,048m |
7 |
22 |
|
B. C 어프로치 |
강고트리→보쥬바샤 |
3,800m |
8 |
23 |
|
B. C 건설 |
보쥬바샤→타포반 |
4,463m |
9 |
24 |
1 |
수송 |
A. B. C 중간지점 데포 |
|
10 |
25 |
2 |
수송 |
A. B. C 데포, 장비분실 |
|
11 |
26 |
3 |
B. C 체류 |
|
|
12 |
27 |
4 |
B. C 체류 |
분실장비 찾음 |
|
13 |
28 |
5 |
1차 A. B. C |
|
4,800m |
14 |
29 |
6 |
2차 A. B. C |
|
4,950m |
15 |
30 |
7 |
A. B. C 체류 |
|
|
16 |
31 |
8 |
C1 건설 |
|
5,250m |
17 |
9/1 |
9 |
수송 |
C2 중간지점(오버행 밑) |
|
18 |
2 |
10 |
C2 건설 |
|
5,550m |
일수 |
날짜 |
B. C 일수 |
일정 |
내용 |
비고 |
19 |
3 |
11 |
C3지점 도달 및 C1로 후퇴 |
|
|
20 |
4 |
12 |
C1→B. C 이동 |
|
|
21 |
5 |
13 |
B. C 휴식 |
바기라티Ⅱ봉 사고소식 접수 |
|
22 |
6 |
14 |
B. C 휴식 |
|
|
23 |
7 |
15 |
C1로 전진 |
2차 공격 |
|
24 |
8 |
16 |
C1→B. C로 이동 |
철수 |
|
25 |
9 |
17 |
B. C 체류 |
추석 |
|
26 |
10 |
|
바기라티Ⅱ봉 B.C로이동 |
|
|
27 |
11 |
|
바기라티Ⅱ봉 C1 |
시신 수색 작업 |
|
28 |
12 |
|
강고트리로 철수 |
바기라티Ⅱ봉A.B.C→고묵 →보쥬바샤→강고트리 |
|
29 |
13 |
|
차량이동 |
강고트리→우타르세퀴 |
|
30 |
14 |
|
차량이동 |
우타르케쉬→델리 |
|
31 |
15 |
|
델리 체류 |
International Youth Center |
|
32 |
16 |
|
델리 체류 |
Asoka Yatrl Niwas Hotel |
|
33 |
17 |
|
아그라 시 |
타지마할 |
|
34 |
18 |
|
델리 체류 |
I. M. F 등반보고, MR,PURI 초대방문 |
|
35 |
19 |
|
인도출발(23:30) 2시간지연 |
델리.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 |
|
36 |
20 |
|
홍콩→서울 |
김포공항 도착 (15:00) |
|
8. 등반대원 프로필
대 장 : 김 병 태
1961. 5. 7 일생 A형
1985. 4 맥킨리 등반.
1991. 5 맥킨리 등반.
1993. 1 아콩카구아 등정
한국등산 학교 암벽반 12회 수료.
현재 부회장.
행 정 : 정 동 익
1964. 3. 22 일생 O형
1994. 8 알프스 몽블랑 등반.
한국 등산 학교 정규반 31회 수료.
장 비 : 최 복 환
1964. 11. 22 일생 AB형.
한국등산 학교 동계반 18회 수료.
현재 리더.
식 량 : 김 영 록
1965. 2. 7 일생 A형
1993. 7 낭가프라밧 정찰등반.
한국등산학교 동계반 17회 수료.
현재 리더.
9. 운행 및 등반보고
어프로치 (8월22일~23일)
고트리 - 보쥬바사 - 타포반
(3,048M) 14Km 10Km (4,463M)
어프로치가 짧은 편이어서 많은 등반대가 몰리는 거리이기는 하지만, 고소 적응과 기타 이유 등으로 인하여 2일에 걸쳐 B. C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강고트리에서 보쥬바사까지는 평탄한 거리를 걷게 된다. 고묵 및 타포반 지역이 성지이기 때문에 길은 좋은 편이고 장마 등으로 인하여 길이 끊겨도 곧바로 길이 복구되기 때문에 아주 좋은 조건이다.
거리상 바로 고묵까지 갈 수 있으나, 고묵에서 타포반까지 급한 경사를 오르기 때문에 보쥬바사에서 고소적응 겸 자고 가는 것이 좋다.
보쥬바사에서 고소적응 겸 자고 가는 것이 좋다. 보쥬바사에는 롯지가 있어서 잠을 잘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산장을 생각하면 된다. 한군데는 1인당 하루에 60루피, 또 다른 곳은 35루피였다. 물론 깎은 금액이다. 당연히 35루피를 선택하였다. 우리가 비교적 빨리 도착한 편이어서 그 정도 금액이지만, 등반대가 많이 몰리는 날이면 금액이 오르는 것은 당연 하리라. 침구는 갖추어져 있지만 벼룩, 빈대 등의 걱정으로 침낭에서 잠을 잤다. 스프레이 모기약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많이 뿌리고 잤다. 그래서 인지 아침에 자고 나서 긁는 사람은 없었다.
보쥬바사에서 평탄한 길을 계속가면 빙하가 보이는데 그 곳이 고묵이다. 차와 음료수, 비스킷 등을 파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성지 순례자가 많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빙하를 돌아 급경사를 오르는데 낙석이 많고, 길이 자주 변한다. 이곳을 통화해서 긴 급경사를 오르면 넓은 타포반 평지가 나온다. 가급적이면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등반에 편하다. B, C로는 상당히 멋있는 곳이다.
B. C - A. B. C (8월 24일~ 29일)
(4,463M) (4,950M)
이곳 강고트리 지역은 성지이기 때문에 살생이 금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기’는 구경할 수 없다. 육식이 꼭 필요한 등반대라면 ‘햄’종류를 많이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술도 구할 수 없으나 ‘창’이라는 인도 막걸리를 현지인에게 부탁하면 구할 수는 있다.
A. B. C는 B. C에서 쉬블링을 바라보면서 오른쪽 능선을 올라가면 기나긴 능선이 이어져 있고. 능선이 끝나면 돌무더기 지내가 나오는데 북벽 쪽으로 올라가면 북벽 A. B. C이고, 서릉 A. B. C는 북벽 A. B. C에서 조금 더 가야한다. 커다란 돌무더기로 이어져 있어서 걷는데 상당히 지루함을 느껴야 한다.
B. C에 도착하는 날은 날씨가 상당히 좋아서 등반대를 상당히 들뜨게 하였으나. 그 다음날부터는 좋은 날씨를 구경하기 힘들었다.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을 계획하였기 때문에 B. C에서의 고소적응이 중요하였고, B. C에서 2~3일 정도 체류하면서 고소적응 후 , 출발하는 것을 기본 계획으로 삼았다.
B. C일수 첫날 오전에 장비를 점검하고, 오후에 전원이 고소적응 및 루트관찰을 위해 A. B. C지점 중간까지 운행하면서 장비와 식량 일부를 올려놓고 내려왔다.
2일째 최복한 대원이 데포된 장비를 옮기러 올라갔고, 장비가 분실된 사실을 최대원이 내려온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런 예는 거의 없었고, 등반대들도 서로의 장비, 식량에 대해서는 허락 없이는 함부로 손대지 않기 때문에 무척 난감 하였고, 자연히 공ㅇ한 포터가 의심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 B. C위로 등반한 다른 사람은 미국, 인도 합동팀의 ‘피터’였었고, 또 다른 한명이 있었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었으나, 정부연락관은 우리가 보지 못한 이태리언 트랙커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여러 방면으로 확인 한 후, 국제캠프의 서기석씨와 진주팀의 고소포터 1명, 그리고 Cook을 강고트리로 저녁 늦게 내려 보냈다. 새벽까지만 도착한다면 떠나기 전에 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때문에 이틀 동안의 시간을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B. C 일수로 4일째 되는 저녁 늦게 장비를 찾아 일행이 B. C로 올라왔다. 등반을 포기해야 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날씨는 좋아지지 않고 있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5일째 출발을 하였다. 4,800M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대장님은 몸살이 나아지지 않는다며 B. C로 내려갔다. 대장님을 제외한 대원 3명만이 등반을 속개 하였다. 하루 종일 눈, 비가 쏟아진다, 고도를 약 200M정도 옮긴 후, 다시 약 5,000M지점에서 운행을 중단하고 2차 A. B. C를 설치했다. 날씨가 더 이상 좋아질 것 같지 않아, 최복한 대원은 B. C로 내려가고 , 정동익 대원과 김영록 대원은 계속 A. B. C에 남기로 했다. 눈과 비가 교대로 내리는 아주 지겨운 날씨이다.
A. B. C - C1 (5,250M) (8월 31일)
쉬블링을 등반할 수 있는 모든 루트중에서 텐트를 설치 할 수 있는 곳은 서릉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서릉이 절대로 쉽다고 할 수 없다. 돌무더기 중간 지점인 A. B. C에서 북벽을 바라보며 오른쪽 끝을 보면, 능선이 길게 이어져 있고 뾰족한 봉루리가 3개 보인다. 그 능선 중간 지점에 넓은 바위가 보이고 그 옆이 안부인데. 이것이 C1자리이다. 전 사면에 걸친 눈사태에도 안전한 지역이다.
C1 도착 직전 안부에 올라서기 위한 급경사가 만만치 않으며 대원들을 지치게 만드는 곳이다.
B. C일수 8일째 되는 날 그 동안 보이자 않던 쉬블링이 선명하게 보이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C1까지 두 번에 걸쳐 수송하고 B. C에 있는 최복환 대원은 C1까지 바로 운행하였다. 쉬블링 등반 기간 중 가장 좋은 날씨였다.
C1 - C2 - 5,900M - C1
C1에서 앞에 바로 보이는(능선상의) 뾰족한 봉우리를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면 오버행 지대가 나온다. 오른쪽 끝으로 보면 가장 낮은 쪽으로 P. P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을 넘어서면 둘째 봉우리와 셋째 봉우리 사이의 안부로 급경사를 오르게 된다. 그 안부가 우리가 설치했던 C2자리이며, 그 C2지점에서 마지막 봉우리를 바로 오르면 5,900M의 C3지점이 나온다. 대개 C3지점에서 바로 C2를 설치한다. 이곳에서 부터는 서릉의 긴 릿지가 뚜렷하게 보이며 정상까지의 길을 잃어버릴 걱정 없이 운행하게 된다. 릿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세락지대가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고 이 구간을 아이스클라이밍으로 넘어서면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시작된다.
9일째 되는 날. 날씨는 좋아지지 않았지만 전진하기로 했다. 늦은 출발로 걱정이 되었다. 출발 직전 최복환 대원이 컨디션이 나빠 쉬기로 하고, 정동익 대원과 김영록 대원은 출발 하였다. 오른쪽 사면을 돌아 오르니 8m/m의 노란 P. P가 보였다. P. P를 따라 오르다 보니, 오버행 지대가 가로 막고 있었다. 날씨가 나빠 오버행을 오르는 P. P는 보이지 않는다. 클라이밍으로 넘어갈까 하다가 내일 뒤따라 올라올 최복환 대원이 걱정되어 C1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눈이 계속 내려 20M이상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C1 으로 돌아온 후 2박3일 정도의 식량에 침낭을 빼버리고, 2인용 텐트와 침낭커버만 가지고 가기로 결정했다. 무거운 짐은 시간만 낭비하게 하고 운행을 느리게 할 뿐이다.
다음날, 어제 도달했던 지점에서 오버행을 넘어가는 P. P를 발견하고 어센딩을 하여 넘어간 후, C2로 전진하였다. 그날 오후는 날씨가 좋아져 대원들을 희망에 부풀게 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5,900M정도 까지 어센딩을 하여 올랐으나, 이런 날씨에 저 릿지를 건너다가는 무사 귀한을 보장할 수 없을 것 같아 의논 후 C1로 철수하여 대기하기로 하였다.
이틀에 걸쳐 어렵게 올린 고도를 단 2시간 만에 다운시켰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B. C귀환 및 2차 공격
B. C와 교신하여, 계속 날씨가 나쁠 것이라고 하니 일단 B. C로 내려오라고 한다.
2차 공격을 위해 장비, 식량을 남겨 놓고 B. C로 내려왔다.
B. C에 체류하는 동안 바기라티2봉을 등반하였던 한국의 하이얀 산악회 팀이 눈사태를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긴 B. C에 눈이 덮일 정도로 날씨가 좋지 않았으니…
당초에 계획했던 추석에 등정일을 맞추기 위해 , 정동익 대원과 김영록 대원이 C1로 떠났다. 2차 공격을 위해, 이번에는 침낭커버도 빼버린 완전한 비박태세로…
그러나 C1까지 가는 길에 눈이 너무나 많이 내려 러셀을 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물론 엄청난 체력 소모도 함께.
C1에 도착해 눈에 묻혀버린 텐트를 정리하고, B. C와 교신하였다. 이런 조건이라면 더 이상 전진하기도 힘들다고 아마도 완벽한 극지법으로 해야 통할 것 같았다.
등정은 하늘이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던가?
하늘이 열어주지 않는 길, 쉬블리을 바라보며 우리는 B.C로 내려가고 있었다. 텐트와 식량을 뒤의 한국팀이 사용하도록 남겨 놓았다 남아있는 한국팀이 성공하기를 빌면서
쉬블링 등반에 대한 평가 및 견해
돌이켜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등반이었다. 잘 짜여진 팀웍과 등정에 관한 갖자의 왕성한 의욕, 국내에서부터 준비된 철저한 훈련 등이 실패를 전혀 생각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등반기간과 맞물려 버린 몬순, 장비분실로 인한 3일간의 지연, 늦은 출발, 공격 중에 있었던 약간의 의견차이 등이 결과론적으로 실패를 분석하게 하는 요인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양력으로 계산된 등반기간은 윤달이 끼어있는 올해 같은 경우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결국은 앞당겨진 몬순기간과 일치하게 되는 불행을 우리는 맛보아야 했다. 폭설이 내리기 전 3~4일 정도는 날씨가 좋지 않았으나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면 가능성이 있기도 했고 또한 장비분실로 인한 B. C에서의 3일 체류가 우리를 몹시 서운하게 하였다. 그 후 2차 공격 때 다시 올라간 C1에서의 상태는 10여명의 대원과 고소포터를 이용한 철저한 극지법이라야 통할 것 같은 크러스트되지 않은 심설의 상태이고, 곳곳에서 쏟아 부어 내리는 눈사태는 심리적 위축을 가지기에 충분하였다. 2~3일간의 비박태세로 올라간 2명의 공격조는 전진을 포기해야 했고, 그렇게도 열심히 준비했던 쉬블링 등반을 이렇게 마감하여야 했다. 고소적응과 컨디션이 너무 좋았었기 때문에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 등반이었다.
쉬블링에서의 등반은 고소적응을 마친 팀이 알파인스타일로 연속비박을 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속공으로 등정해야 가능한 산이다. 실제로 서릉을 제외한 모든 사면은 텐트조차 칠 자리가 없다. 서릉 또한 극지법으로 등반한다는 것은 규모에 비하여 지나친 전력의 소모만 초래하게 된다.
쉬블링은 등정률이 극히 낮은 산이며, 등정자 역시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산악인들이다. 등반성이 매우 높은 산이며 산행 대상지로는 아주 훌륭한 곳이다. 한국 산악인이 서릉을 제외한 다른 루트를 통해 등정한다면 세계적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서릉 또한 20여년의 등반사에서 3~4번 밖에 등정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우리는 등반기간 중 8m/m캠코더로 촬영을 해왔기 때문에 다음 쉬블링을 준비하는 팀이 있다면 상당히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온다면 멋있는 등반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현지인의 말로는 5~6월이 등반 시즌이라고 한다. 9월초에 약간 좋기는 하지만 가능성을 높지 않다. 준비하는 팀이 있다면, 5~6월에 갈것을 권유하고 싶다.
10. 개인별 등반일지(김병태)
8월 16일 서울. 빌리(I. M. F).
인도의 내음이 느껴지고 있다. 후덥지근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끈끈한 냄새들이 산발적으로 흐드러진 가로등 불빛을 따라 인도 델리의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만 그 내음이 거부감이나 역한 느낌은 아니다. 옛날 우리 할아버지 초가집 냄새가 그랬으리라, 작고 나직한 건물들, 허름한 행인들의 모습, 지나가는 차창에서 바라보는 인도인들의 눈길들이 내가 이들 속의 모리가 아니고 나는 틀림없는 낯선자 임을 느끼게 한다.
I. M. F 지하의 철제 침대가 놓인 대형 룸의 천장에 매달린 큰 선풍기들은 더운 바람만 내뿜고 있다. 몇 번 샤워를 했지만 더운 델리의 첫 밤을 식히기에는 별 방법이 없는 것 같다.
8월 17일 I. M. F체류, 식량, 장비 구입
긴 밤을 보냈다.
오전에는 I. M. F 매니저에게 등반 대원과 등반 허가사정에 관한 브리핑과 정부 연락관과의 만남이 있었다.
서울에서의 행정중비와 이곳에서의 행정 절차, 처음 등반을 계획하고 꾸릴 때 품었던 행정의 복잡함을 많은 시간을 가지고 꾸준하고 착실하게 준비한 결과인지 이곳 I. M. F에서는 별 어려움 없이 잘 끝이 났다. 매니저나 정부 연락관 모두 좋은 사람인 듯하다. 부족한 것을 자세히 일러주고 대사관에 등반 온 것을 신고하길 권유했다. 모든 행정이나 필요한 절차들은 우리가 등반을 시작하기 전 꼭 거쳐야 하는 일들이기에 완벽한 준비만 한다면 그것들에 대한 복잡함이나 부담은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제는, 눈꺼풀이 무거워져 잠을 느낄 수 있다. 오늘은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다.
8월 18일 I. M. F 체류. 뉴델리, 올드델리 관광.
쑥 들어간 두 눈 속의 감은 눈망울들, 바쁘고 정신없이 오가는 차량들과 인간들의 외침, 차량이 멈출 때 마다 차량 곁에 다가와서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돈을 구걸하는 손짓과 건널목마다 거리마다 걸인의 모습은 끊이지 않는다. 나보다는 우선 자국민들의 어떤 시각으로 저들을 바라볼까? 저들에게의 배고픔과 헐벗음 등은 전혀 나와는 관계없다는 듯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애꿎은 여행객들만 걸인들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는 듯하다.
경찰관들이 관광객을 따라다니는 걸인들을 긴 몽둥이로 저지하는 모습들도 보였다.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야릇한 감정으로 솟구친다. 십대 초반 밖에 안 되는 소녀가 아기를 안고 구걸하는 몸짓과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갈망하는 그 까만 눈동자들을 언제쯤이나 잊을 수 있을까.
8월 19일 델리 → 우타르카시
들길과 산길 꼬불꼬불 꼬부랑길을 달려 13시간. 어딘가로 부터 점점 멀어짐이 못내 아쉽고 그리움마저 떨쳐버릴 길이 없다. 무엇을 찾아 떠나고 있는 것일까? 굳이 산을 오르는 것만을 위해 떠난 것은 아닌 성 싶은데, 찾아서 적어낼 이유가 분명하질 않다. 한 가지 정확한 것이 있다면 멀어지고 있음은 돌아갈 시간 또한 가까워지고 있음이다.
저녁한때 많은 비가 내렸다. 같이 온 정동익, 최복환, 김영록, 식사 잘하고 컨디션이 좋아 보여 마음이 흐뭇하다.
모두들 절제되고 통일된 행동으로 표시나지 않게 잘 따라주어 마음 또한 든든하다.
8월 20일 우타르가시 → 강고트리
거침없이 내리치는 거대한 물줄기의 소요돌이를 아랑곳 하지 않고 버티어 내는 바위들, 천년을 살아온 듯 한 곧게 뻗은 소나무, 산허리를 휘감는 운해의 고귀한 자태, 바위틈새에 낀 이름 모를 작은 꽃의 아름다움 까지도 어느 무엇과도 비교 될 수 없는 것 같다. 치장되고 가꾸어진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 한 들꽃들의 조화로움은 신의 영역인 듯하다.
수십 킬로를 이어지는 계곡의 작은 돌 만큼이나 많은 생각들이 차창에 스치는 풍경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있다. 거침없이 내리치는 물줄기에도 아랑곳없이 버티어 내는 바윗돌처럼, 마음 어디인가에 자리 잡고 버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신의 아름다운 조화 속에도 부족한 것(?) 마음속으로부터 느껴지고 있다.
8월 21일 강고트리 체류
싸늘한 기온이 감도는 새벽 6시가 조금은 안 되는 것 같다. 서울에서의 늦은 가을쯤은 되는 느낌이다. 오늘 강고트리에서의 하루는 지루함이나 내일 일정의 기다림은 없다. 지금 부딪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산등성이를 흐르는 아침운해는 분명 설악산 어느 능선 그것과 다를 바 없는 느낌이다.
저녁은 모두들 잘 먹어 한결 기분이 가볍다. 오후 8시53분 벌써 두 침낭 속은 조용하다. 내일 일정에 대한 염려 때문일까. 약속이나 한 듯 계곡에서 세차게 들려오는 물소리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모두들 이른 잠에 빠져 든 것 같다.
8월 22일 강고트리 → 보쥬바샤
인간의 가치와 존재 과연 이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른 인생 다른 삶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어쩌면 이렇게 까지도 다른 것일까. 십대 초반 어린 포터의 행동에는 무엇인가 모자람이 느껴진다. 모두들 자기들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 주었으면 하는 눈길들이다.
저들이 우리 일행들을 부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루 85루피(약2,000원)에 만족하고 자기들 삶에 나처럼 만족할 수 있으면 그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편안하겠다. 찬 이슬을 맞으며 이 밤을 지새우겠지만 내일 아침이면 나는 그들에게서 나에게는 존재 하지도 않는 무한한 삶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8월 23일 보쥬바샤 → B. C
넓은 평원 한쪽으로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바기라티 1,2,3 봉 앞으로 넓고 높은 언덕도 있다. 순례자들이 저 언덕길을 따라 더 멀리 고행의 길을 떠났을 것이다.
평원 위의 B. C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마시고 버려도 될 만큼의 넉넉한 식수도 있고 시선을 두고 감상에 젖어도 좋을 만큼의 높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져있다. B. C 까지는 후배들도 적응에 별 무리가 없는 것 같고 나 역시 고소적응에는 별 문제가 없으니 정말 멋진 등반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느낌이 괜찮은 심정이다.
8월 24일 B. C → A. B. C → B. C
어느 등반 때나 느낌은 똑같다. 고통은 나를 짓누르고 나는 고통을 참아내며 한 걸음 한걸음 버티는 것이다.
가슴은 터질 것 같고 목이 메어 버리는 듯한 고통의 연속이다. 우리가 고통을 이겨내며 등정을 이루려는 뜻은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일까?
돈을 벌고 명예를 갖는 것은 과정에 불과하다. 그 과정 속에 내 마음에 품고 있는 작은 산을 바라보며 계획하고 노력하며 걷고 느끼며 산을 오르는 것이 나의 소망이며 뜻이다.
8월 28일 B. C → A. B. C
가볍게 A. B. C로 다시 올라 왔지만 저녁 식사가 내키질 않는다. 냄새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몇 일간의 거른 식사와 높은 체온 탓에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모두들 식사를 잘했다. 체력을 유지하고 고소에 적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왕성한 식욕인데 식사를 할 수 가없으니 더 이상 고도를 올리는 것은 나에게나 후배들에게 짐이 될 뿐인 것 같다. 내일 아침 컨디션을 봐서 B. C 로 내려가야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후배들이 이번 등반에 기울인 마음들이 나로 인해 조금이나마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8월 29일 A. B. C → B. C 귀환
밤새 기침을 했다. 몸이 불같이 뜨거워졌다. 엊저녁에 끓여놓은 보온병의 꿀차가 새벽녘에는 동이나 버렸다.
아침 식사 중 B. C로 내려갈 것을 후배들에게 알렸다. 몸의 상태가 좋아지질 않아 이 상태로는 후배들을 따라 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등반을 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아는 나로서는 더 이상 후배들에게 짐이 될 수 없었다. 후배들도 동의 해 주었다. A. B. C 철수 후 동익이가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등반도중 제일 선배이니 열심히 등반해 후배들에게 힘이 되라고 격려해 주었다.
돌아서는 길이 왜이리 멀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비는 주절주절 온몸과 마음을 무겁게 적시는 듯하다.
침낭 속에 누웠으나 헛구역질이 계속 나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며칠을 먹은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토해낼 것 또한 없어 헛구역질과 고통으로 밤을 지새웠다.
8월 31일 B. C
따스한 가을 햇살 같은 햇볕이 텐트 문을 두드리며 다가서고 있다. 정말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인가. 이름 모를 새들의 아름다운 지저귐이 하늘을 맴돌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색깔은 연한 잉크 빛 그 자체이다. 소슬 부는 바람은 어느 가을날 잘 익은 수수밭 사이를 가볍게 흔들고 스치는 바람결 같다.
오후 2시 이후면 어김없이 내리던 비도 이제는 말끔히 사라졌다. 마음이 흥분 된 듯하다. 컨디션이 좋아진다면 그들이 간 길을 따라 내일이라도 올라가고 싶은 날씨이다. 몇 일간만 이라도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9월 1일 B. C
날이 새는 것을 보고서야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아침 식사 전에 침낭에서 일어나야 했다. 후배들이 등반하고 있는 위치를 바라보며 오늘의 날씨를 예상하고 하루 일정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개, 구름, 비 무엇으로 좋은 날씨를 기대해야 할까. 그들의 소식을 아침저녁으로 무전기를 통해 듣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아침이면 밤새 컨디션은 나빠지지 않았는지 느낌으로 캐치 하고 오후면 목소리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일과의 전부이다. 조금은 성급하게 재촉도 해보고 강한 의사를 전달해 보지만 정오 이후의 날씨는 나의 모든 의사를 묵살해 버렸다.
5,900M 까지 등반을 하고 많은 눈으로 인해 C1로 내려와 있는 그들에게 B. C 로 내려올 것을 지시했다. 너무 오랫동안 5,000M이상의 캠프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동안은 날씨가 좋아 질 것 같은 판단이 서질 않는다.
9월 5일 B. C (전대원)
C1에서 일주일을 머물던 아메리칸팀이 B. C에서 철수를 서두르고 있다. 같이 온 북벽팀은 철수한지가 며칠이나 지났는데 강고트리에서 길이 끊어져 4일째 묶여 있다는 소식이다. 아메리칸팀의 정부연락관은 라디오 뉴스에서 인도 델리가 이상기후로 홍수에 시달리고 있으며 앞으로 오랜 시간동안 나쁜 날씨가 지속될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알려주었다. 며칠을 더 기다려 보려는 나의 마음을 망쳐 놓는 뉴스였다. 좋은 날씨가 며칠을 계속 되어야 새로 내린 신설이 굳어져 등반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좋지 않은 날씨가 등반 일정에 많은 지장을 주고 있다.
청주팀은 올라온 지 며칠 안 되어 이제 등반준비를 하기 위해 컨디션 조절을 하고 있고, 단국대팀이 며칠 후 올 것이라 하지만 그들과 같이 좋은 날씨를 기다리기에는 모든 일정이 맞아주질 않는다. 여러 가지 여건을 종합해 볼 때 좋은 컨디션으로 나쁜 날씨에 임에도 높은 고도까지 확실히 등반 해준 것에 만족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새벽에 약간 높은 산들이 보일 때면 아쉽고 가슴이 쓰리지만 철수를 결정할 때가 된 것 같다.
9월 7일 B. C → C1 (김용록, 정동익), B. C (김병태, 최복환)
진주팀의 철수, 바기라티의 눈사태 사고, 미국팀이 C1에서 1주일이나 날씨를 살피다 철수, 모든 것이 날씨와 맞물려 내 마음이 어수선하다.
며칠을 망설이다 후배들에게 캠프를 완전히 철수할 것을 의논하고 결정 하였지만 아침에는 새벽에 약간 갠 하늘을 보고 속이 쓰리고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위쪽의 상황이 어떨는지는 모르나 그냥 철수하기에는 용납되지 않는 날씨였다. 동익과 영록에게 다시 한 번 등반시도와 철수를 병행케 했다. 등반 준비를 하지 않고 C1으로 올라가서 좋은 날씨를 행여 만날 수 있다면 내 마음이 또 얼마나 쓰릴 것인가, 6시에 무선 통화 내용 중 A. B. C에서 C1으로 가는 2시간 거리의 능선이 5시간 걸려 C1에 도착해 보니 11MM폴이 4개나 있는 튼튼한 텐트가 많은 눈으로 인해 주저 않아 있다고 소식을 전해 홨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신설을 밟으며 우리가 준비한 알파인스타일의 장비와 식량과 2명의 등반대원으로는 어렵지 않겠는가 하는 판단을 내리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일 아침 상황을 다시 보고 철수 할 것을 지시하였다.
9월 12일 바기라티 2종 A. B. C(5,000M) B. C(4,600M), 강고트리
9일 하이얀팀의 도움 요청 서신을 받은 후 오늘까지 2박3일간의 일정 또한 나에게는 또 하나의 산의 체험을 경험케 했다. 처음 교신 때 느낀 눈사태의 상황을 볼 때 시신을 충분히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 5,300M 정도의 사고지점에 이으러 상황을 보니 처음 상황하고는 달리, 엄청난(가로300M X 세로400M) 눈사태가 사고 이후 계속 같은 지역을 쓸고 내려 간 것이었다. 몇 군데 점검을 해 보았지만 꿀르와르를 덮쳐버린 많은 눈사태를 소수의 인원으로 시신을 찾기란 어려운 듯 했다. 주위에선 눈사태 소리가 들렸다 이 지역도 위쪽 벽의 경사가 심해 눈이 어는 정도 벽에 쌓이면 바로 눈사태로 이어지는 눈사태 다발지역인 듯하다. 상황을 점검하고 11일 저녁은 5,000M정도의 바기라티 A. B. C에서 자고 12일 새벽 6시쯤 전원 B. C로 철수하였다. 하이얀팀 내장님은 내일 포터가 오면 모래쯤 다시 수색작업을 한 번 더 해보려하였다.
우리는 내일 강고트리에 있는 잔류대원들과 만날 약속이 있어 일정을 하루 당겨 강고트리로 내려왔다. 우리가 강고트리로 내려 왔을 때 바기라티 B. C에서 내일 포터가 올라오면 수색작업을 중지하고 철수를 하겠다는 메모가 왔다.
바기라티 A. B. C에서 10시간을 달려 내려온 2,500M의 고도가 몸으로 느껴진다.
신선하고 머리가 가볍게 느껴지고 작은 마을이지만 인간사회의 풋풋한 내음이 새롭게 느껴진다.
11. 개인별 등반일지(정동익)
8월 17일
모기에게 시달리며 잠을 깨어나서 아침 일찍 볼더링을 하다. 오전 내내 침대에서 뒹굴다가 간단한 브리핑으로 행정처리가 쉽게 끝났다.
오후에 정부 연락관을 배정 받았는데 공무원(고교교사)이라고 한다. 처음인 것 같고 인상이 참 좋다. Jinja 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국제캠프 식량 사는 것을 도와주었고 300$(US)을 환전했다.
8월 18일
오전부터 움직였다. 병태형, 복환이와 함께 관광을 나섰다. 분수 광장에서 카메라를 한 대 사고 Jinja에서 역시 점심을 먹은 후, 공원과 라르킬라성을 관광한 후 돌아왔다.
Packing 을 25Kg 단위로 재정리한 후 잠을 다다.
정부 연락관이 머리를 빡빡 깎고 와서 모드들 웃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8월 19일
델리에서 우타르카시까지 차량이동 (13시간소요) 6:30~ 7:30 간에 걸친 차량이동으로 약간 지루함, 자다가 깨다가 반복하며… 아직까지 길은 편한 편이다.
점심과 저녁은 현지 식당에서 먹었는데 입에 전혀 맞지 않았지만 많이 먹었다.
8월 20일
우타르카시 → 강고트리(차량이동)
없는 비닐을 겨우 13장구했고(비싼 편) 휘발유 5리터를 93루피에 샀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아이들하고 공차기를 하고, 기념 촬영을 하다.
역시 인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밀가루 떡을 많이 먹었다.) 2시경 출발 한다. 어제와는 달리 가는 길이 험하고 곳곳이 비경이다. 장엄하고 멋있다 투어를 올만한 곳이다. 기어코 차 앞바퀴가 펑크 났다.
7:00(P.M) 강고트리 도착(약3,000) 창고 같은 롯지에서 잠을 청하는데, 여기 있는 침구로는 도저히 잠을 잘 것 같지가 않아 침낭을 꺼냈다. 경희 침낭을 빌려 왔는데 상태가 무척 좋다. 뽀송뽀송한 침낭에서 잠을 자려니, 오랜만에 모기도 없고 덥지도 않고 포근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돌아가면 당장 침낭부터 사버려?
멀리 능선 사이로 스노우라인이 보이기 시작한다. 언젠가부터 꿈꿔오던 높고 흰 산을 이제 등반하게 되나 보다.
운명인가? 의지인가?
‘77 에베레스트 화보집을 보고, 막연히 동경하여 오던 등반을 내가 하다니…
돌아가면 열심히 생활해야지, 다음의 등반을 또 위하여…
8월 21일 오전 맑음
2시경부터 비가 옴.(강고트리 예비일.)
김치를 담그고, 포터를 구하고, 짐도 재정비하고 그러면서 하루를 보내다.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 하니 무척 좋다. 잘 먹힌다.
약간 (뛰어다니면) 숨이 차기도 하고, 아주 약간 어지럽기도 하고, 일교차가 아주 크다. 낮에는 무척 덥다가 저녁에는 매우 쌀쌀하다. 체온 관리를 잘 해야 할 것 같다.
내일은 새벽 일찍(6시) 출발한다고 하니 일찍 자두어야겠다.
8월 22일 흐림(때로 비)
강고트리 → 보쥬바샤 (Approch march)
제일 먼저 고소가 걱정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럽다. 아주 약간 머리가 무거운 정도이고, 감기 증세가 있어서 얼굴에 열이 약간 있는 정도이다. 작년 알프스에서의 증세와 비교한다면 같은 고도 상에서 1/10정도라고 보면 좋겠다.
운행 도중 강고트리에서 살면서 고묵까지 관광을 하고 간다는 한 가족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로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내며 운행했다. 생가가 돌았던 여자아이 두 명은 17살 15살이라고 하는데 상당히 예쁜 편이다. 무척 수줍어서 얼굴을 붉힌다. 목걸이 볼펜을 선물로 걸어주고 사탕을 주니 좋아한다. 돌아가는 길에 우리 카메라를 사고 싶다고 한다. 등반 끝나고 내려가면서 찾아가겠다고 하니 주소를 적어준다.
12시 반에 도착하여(7시 출발) 롯지를 차지하고 기다리는 1시간 반 정도 뒤에 국제캠프 팀이 도착했다. 진주팀이 나중에 도착하고, 포터들은 속도가 아주 느리다.
늦게 저녁을 먹고 뽕약(별칭)과 화콜 두 알을 집어 먹고 잠을 청한다. 약간 두근거리는 정도인데, 아침에 일어나면 깨끗하여 지리라고 믿는다.
복환이와 영록이는 의욕이 대단하다. 고도 적응 차 앞산에 다녀왔다.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다. 팀워크도 완벽하고, 고소순응도 순조롭고, 등반 성공률도 점차 확률이 높아지며…
8월 23일 보쥬바샤 → (고묵) → 타포반(BASE CAMP 입성)
빙하지대에 도착하다, (고묵) 빙하가 녹으면서 떨어지는데 소리가 굉장히 크다.
세락지대를 통과하여 오르는데 돌이 굴러 다리에 맞았다. 한참 아파서 엎드려 있다가 일어났다.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1시 정도에 B. C 에 도착했다. 텐트를 치고, 주변 정리하고, 텐트에 들어가서 누웠다가 일어나니 강하게 고소증세가 왔다. 조제한 약을 먹으니 금방 좋아졌다.
8월 24일 저녁에는 비 (A. B. C 진출)
오전에는 장비를 정리하고, 오후에 공동장비를 A. B. C 전 능선에 데포 시키고 돌아왔다. 비를 맞고 오버페이스를 했었던지, 돌아와서 심하게 고소증세를 느꼈다. 대장님도 컨디션이 무척 좋지 않은 모양이다.
저녁에는 음식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 국물만 먹고 돌아와서 잠을 청하는데 무척 아프다. 고소증세가 심하게 오니 걱정스럽다.
8월 24일 전 (B. C 예비일)
오전에 계속 아파서 누워 있다가 조제한 약을 먹고 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점심으로 냉면을 먹는 둥 마는 둥
‘피터’라는 미국 클라이머(4명의 등반 대원과 12명의 트랙커 그중 3명은 여성대원)를 만나서 등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오후에 골프를 치면서 고소순응을 하다.
복환이가 오후에 A. B. C까지 이동 하였다가 돌아왔다. 내 짐이 분리되고 신발의 위치가 이상해서 여러 가지로 분석, 처음에는 포터의 소행으로 추측 그러나, 한 이탈리언의 소행으로 굳어짐. Mr서와 Cook, High Poter 세 명이 짐을 찾으러 강고트리로 저녁 늦게 내려갔다.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꾸 잦은 불길한 일들이 일어나서 한편 걱정스럽다. 등반을 하지 말라는 것인지… 아니면, 액땜인지.
내일은 내임을 챙겨서 A. B. C 까지 가야겠다. 고소 순응겸 여러 가지 확인을 위해.
8월 26일 밤부터 계속 비 내림. (B. C 체류일)
날씨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
산 중턱에 걸리던 비, 구름들이 이제는 B. C 전체를 덮는다. 컨디션은 좋은 편이다.(회복중) 병태형은 좋아지는 중이지만 여전히 나쁜 편인가 보다.
오늘도 오전에는 골프를 쳤다.
미국대가 오전에 출발 한다. A. B. C 까지 갈 모양인가 보다. 몇 마디 나누어 보았다.
점심으로 짜파게티를 먹었다. 여전히 잘 먹힌다. 다행이다.
장비를 찾으러 간 일행들은 아직 연락이 없다. 찾아야 하는데 참으로 걱정스럽다.
정부 연락관 문제가 심각히 거론 되었다. 잘 통하지 않는 언어도 문제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에게 진정으로 인간적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국제캠프 및 그들(?)은 이 점을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제적인 문제로 발전될 수 있으며 이미지 손상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내려온 미국대에게 물어 보았다. 데포된 짐이 잘 있는지…남아있는 것들은 잘 있다고 한다.
저녁을 먹을 즈음 다시 머리가 아파온다. 뽕약과 화콜 두 알을 먹어 본다. 화콜도 이제 없다. 테이레놀이 잘 들어주어야 할 텐데.
8월 27일 흐리고 비 (B. C 체류)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무겁다. 하루 종일 머리가 쑤셔 힘든 하루였다. 오전에 타이레놀 두 알을 먹었는데, 저녁 늦게 되어서야 통증이 멎는다. 자고 나서는 괜찮아야 할 텐데… 복환이와 영록이는 아직도 컨디션이 좋은가 보다.
며칠째 계속 비가 내려 날씨가 좋지 않다.
기다리기 지루한 모양이다. 병태형은 아직도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걱정스럽다.
오늘은 복환이가 나의 짐 중에서 식량만을 챙겨서 A.B.C 로 이동하였다. 대단한 의욕과 컨디션이다. 못 움직여 주는 내가 미안스럽게 느껴진다.
반가운 일이 있었다. 강고트리로 짐을 찾으러 간 일행이 돌아왔다. 물론 잃어버린 짐도 찾고, 훔쳐간 이탈리언은 개 패듯 맞은 모양이다, 괘씸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측은하게 느껴진다. 오죽했으면 데포시켜 놓은 장비에 손을 댈까?
장비도 찾았으니, 이제 날씨만 좋아지면… 물론 병태형 컨디션도 좋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는 ○○도 생각난다. A도, B도, C도… 삶의 여유도 이제는 없는지, 문장도 길게 써지지가 않는다. 늙어가는 것인지, 내게서 감상적인 모습이 사라져 가는 것인지…
하긴 詩人은 가난하다?
8월 28일 흐리고 비 (A. B. C 진출)
날씨는 나쁘지만 마냥 기다릴 순 없어서인지 대장님의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썩 좋은 컨디션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괜찮다. 이제 출발하면 1주일 뒤에나 돌아온다.
비가 와서 인지 상당히 힘이 든다. 능선까지의 언덕도 멀게 느껴지고 능선상의 거리도 길게 느껴진다. 너덜지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고어텍스 4인용 텐트로 A. B. C를 설치하고, 저녁은 일본에서 구입한 알파미와 냄비찌게, 그리고 한국산 쇠고기 소스덮밥으로 해결했는데 무척 잘 먹힌다. 대체로 다른 멤버들도 괜찮다고 한다. 단지 대장님이 컨디션이 아직도 정상이 아닌지 많이 먹지 못한다. 걱정이다.
머리가 무거워져 오고 얼굴에 열이 오른다. 진통제 두 알을 먹는다.
오늘도 짐이 굉장히 많게 느껴져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A. B. C 에도 제일 늦게 도착했고, 운행도 제일 느렸다. 중간 간식으로는 어포를 주머니에 넣고서 먹으면서 왔는데 그런대로 다 먹혔다. 제발 좋은 컨디션이 유지되기를 빌며…
(A. B. C 고도 4,850M. 날씨 : 비가 가늘게 뿌림 6:00 저녁)
8월 29일 하루 종일 눈, 비 (A. B. C 이동)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무척 무겁다. 아침을 먹고 나니 대장님이 힘든 결정을 내리셨다. 컨디션이 좋아지지 않으니 내려가겠다고 한다. 셋만 정상적으로 등반을 하라고 한다. 장비를 챙기는데, 무척 머리가 무겁고 짜증스럽다. 뒤돌아보니 대장님의 모습이 보인다. 정말 우리 열심히 준비했는데… 눈물이 핑 돈다. 열심히 해야지 꼭.
약 2시간 정도 운행 했는데 무지하게 힘이 든다. 몇 발자국 못가서 쉬면서 약 고도 200M정도 올리니 영록이와 복환이가 쉬고 있다. 역시 힘이 드는지 여기서 캠프를 치자고 한다. 나도 힘이 들어서인지 동의 했다. 텐트를 치는데도 한참 시간이 걸린다. 눈비를 맞으니 컨디션이 아주 좋지 않다.
복환이가 날씨가 좋아지지 않으니 내려가서 쉬겠다며 3시경에 출발했다. 6시에 무전 교신을 하니 대장님의 기침 소리가 계속 들린다. 걱정스럽다. 복환이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걱정스럽다.
일본식 알파미, 된장찌개, 소고기덮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오늘은 약을 먹지 않을 생각이다. 아프지 않고 잠을 잘 자야 할 텐데…
날씨는 계속 엿 같다. 텐트 밖에 나가기가 싫을 정도이다 (고도 약 5,000M)
8월 30일 A. B. C 체류
아침에 눈을 드니 머리가 무겁다. 그러나 약을 먹으나 먹지 않은 상태나 같다. 그렇다면 먹지 않을 것으로 생각 해 본다. 날씨는 여전히 함박눈이 내린다. 마치 겨울 설악의 잦은 바윗골 같다고나 할까?
새로 산 고어텍스 텐트는 한마디로 엿 같다. 물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무리일까? 아침으로 누룽지를 끓여 먹는다. 잘 먹힌다. 영록이가 약간의 장비를 가지고 C1 지점까지 데포 시키고 돌아왔다. 나도 움직여야 할 텐데 엄두가 나질 않는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것저것 막 먹은 것 같은데
오후 2시 30분경 국제 팀이 지나가다 텐트에 들렀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5시까지 시간을 보낸다. 등반을 끝내면 관광을 잘 해야지, 볼 것도 많을 텐데…
국제 팀이 데포시키고 간 신라면을 2개 끓여 저녁으로 먹는다. 정말 맛있다.
작전을 짰다. C1 부터는 짐을 대폭 줄인다는 생각이다. 짐이 많아서는 전혀 등반이 될 것 같지 않다.
저녁 6시 교신을 끝내고 영록이가 먼저 침낭 속에 들어간다. 잠 자가기 두렵다.
8월 31일 오전 무지 날씨 좋음 (C1이동)
아침에 눈을 뜨니 하늘이 무척 맑다. 이럴 수가! 어제 저녁만 해도 펑펑 함박눈이 쏟아졌는데, 정말 히말라야의 날씨는 알 수가 없다.
아침에 대장님과 무전 교신을 했다. 날씨가 좋으니 C1로 모두 이동하겠다고 복환이도 9시에 출발한다고 한다. 교신을 끝낸 후 좋은 컨디션으로 장비와 식량을 챙겨 C1으로 이동했다. 움직이니 무지무지 머리가 또 아파온다.
긴 돌무더기를 지나 급경사에 붙으니 이건 아예 전진이 안 된다. 다섯 발자국에 한번 쉬는 꼴이다. 겨우 데포 시켜 놓고 내려오는데 영록이는 벌써 텐트를 걷고 있다. 대단한 녀석이다 아니면 내가 느린 것인지?
내려오는 길에 국제캠프 텐트에 들러 파인애플 깡통과 물을 얻어 마셨다. 새로운 힘이 솟는다.
데포 지점이 어디인지 몰라 헤매다가 겨우 찾았다.
‘피터’를 만났다. 혼자 왔다고 한다. 날씨가 좋은데 왜 일까? 나중에 C1에서 물어 보아야겠다.
복환이가 저 멀리 보인다. 기다렸다가 짐 챙기는 것을 보고 출발한다. 너무 힘들다. 걷는 것이 이다지도 힘들 줄은…
C1을 건설했다. 어렵게 저녁을 먹으며 피터를 불렀다. 피터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복환이가 손금도 봐주고 신기한 모양이다. 청교도인 이라고 한다. 담배도 안하고 생활의 건실함이 엿 보인다.
10시다. 피곤하다. 잠자리에 든다. 내일을 위하여…
9월 1일 눈이 많이 내림
눈을 뜨니 밖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내 생각 같아서는 후루 예비일로 쉬고 싶지만, B. C 에서의 대장님 지시가 내린다. ‘GO' 라고
역시 씩씩하게 응답하고 짐을 꾸리고 나서는데 10시가 너었다. 너무 늦은 출발이다. 출발 후 갑자기 복환이가 운행을 중지하자고 했다. 무척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의논 후 영록이와 내가 계속 전진하고 복환이는 내일 따라오라고 했다. 영록이가 별로 편하지 않은 심정으로 몇 마디 했다.
오버행 밑에 까지 도달 했는데 휘스로프가 보이지 않는다. 등반을 해서 넘어갈까 생각했는데, 뒤에 올 복환이가 걱정 되었다. C1에 돌아오니 마음이 편치 않다. 무척 피곤하기도 하고…
라면을 맛있게 먹고 저녁도 맛있게 먹고 다시 작전을 짰다. 3일 연속 비박으로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간다고, 7시 반 저녁을 먹고 잠을 청한다. 편히 자야 할 텐데.
9월 2일 흐리고 눈 온 후 오후 맑음
오전 일찍 눈을 뜨고 준비를 서둘렀다. 어제 남은 밥을 끓여 먹고 2인용 텐트를 걷고, 개인 장비도 웬만한 것은 다 빼버렸다. 침낭 까지도…
미국대는 내일 출발 한다고 한다. 어제의 데포지점 까지 올라와서 장비를 챙겨 오른쪽 오버행을 보니 P.P 가 보인다. 이 오버행을 어센딩 하니 온몸에 힘이 빠진다. 잠시 쉬고 나서 간단히 행동식을 먹으니 더 이상 P.P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할까 망설이다가 1시 방향으로 틀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영록이가 줄이 무겁다고 해서 안자일렌을 했다. 이것도 힘이 든다. 서로 속도가 맞지 않으니…
세 번째 큰 봉우리를 틀어 돌면서 보니 P.P가 보인다. 제대로 온 모양이다.(고도5,550M)
영록이가 힘이 드는 모양이다. 오늘은 운행을 중지하자고 했다. 짐이 많아서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내 생각으로는 저기를 넘어 섰으면 했는데…(복환이도 운행 중지를 찬성)
작년 예성 산악회 C2자리에 비박지를 꾸렸다. 침낭 커버만으로 자야 하는데 춥지 않을지 걱정이다. 6시에 B. C와 교신을 했다. B. C에서는 오늘 도달한 고도에 상당한 불만인 것 같다.
9월 3일 눈이 오거나 흐림
어젯밤은 모두들 추워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것 같다.
일찍 서둘러 출발을 했다. 어제 보아 둔 P.P에 쥬마를 걸고 어센딩을 하는데, 체력들이 떨어져서 인지 모두 힘들어 한다. 나도 힘들기는 마찬가지. 중간쯤 전진하던 복환이가 갑자기 내려온다. 복환이를 불렀다. 대답이 없다.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10분정도 생각을 정리 했다. 여기서 영록이와 둘이서 전진할 것인지 아니면 모두 다 돌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때 영록이가 내려왔다 BACK를 결정했다. 어렵게 올린 고도를 약 2시간 만에 C1으로 다운시켰다.
6시 B.C와 교신을 했는데, 날씨가 더 이상 좋아지지 않으니 일단 B. C로 귀환하라고 한다. 통신을 끝내고 저녁을 먹고 잠을 청하는데 쉽게 잠들어지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생각으로…
9월 4일
위에는 눈이 내리고 밑에는 비가 내린다. B. C 로 돌아오는 길이 왜 이리도 어수선 한지
능선을 넘어서니 보이지 않던 캠프가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충북 팀인가 보다.
B. C에 돌아오니 대장님이 반갑게 맞아 주신다. 컨디션은 많이 조아진 것 같은데 여전히 완전하지는 못한 것 같다.
바로 옆에 있던 진주 팀이 철수 한다고 한다. 이렇게 빨리? 진주 팀을 보내고 나니 썰렁한 기분이 든다. 날씨가 좋아져야 할 텐데…
9월 5일
바기라티Ⅱ봉에서 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그 팀 정부 연락관에게서 들었다. 1명은 사망하고 3명이 부상 중이라고 한다. 대장님은 만약 구조가 급한 상황이면 등반을 중지하고 구조하러 가자고 한다. 일단 그쪽 팀의 의견을 무전기로 확인하였으나, 괜찮다고 하여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다.
9월 6일 흐림
헬기가 날고 있다. 아마도 구조 헬기인가 보다. 몇 바퀴를 선회하더니 타포반 우리 B. C옆에 앉는다. 정부연락관과 내가 헬기로 접근하여 환자 2명은 고묵으로 도보 이동 중이고 시신은 아직 찾지 못한 것 같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모든 것이 잘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한국 팀이 사고당한 것도 그렇고, 헬기비용이 적지 않을 텐데…
9월 7일 흐림
아침에 일어나니 병태형이 부른다 한번만 더 해보자고…
영록이와 내가 준비하고 출발 했다. A. B. C 까지 빠른 속도로 진행했다. 출발하면서 영록이에게 말했다. 마지막 기회인 것 같으니 잘 해 보자고… 그러나 그런 생각은 곧 바뀌고 말았다, 그 사이에 내린 눈이 허벅지 까지 빠진다. 러셀을 하면서 진행을 하니 죽을 맛이다. C1에 도착하니 텐트가 묻혀있다.
C1에서 비박하는 밤이 왜 이렇게도 긴지
춥다, 잠을 잘 수가 없다. 너무나도 긴 긴 밤이다.
9월 8일 흐림
텐트와 식량을 충북 팀을 위해 남겨 놓고 B. C로 철수를 결정했다.
눈이 너무 깊어 도저히 전진이 안 된다. 아마 이런 조건이라면 철저한 극저법이라야 통할 것 같다. 이틀 식량에 침낭도 빠져버린 비박태세라면 도저히 힘들 것 같다.
아침에 통신하기로 했던 무전 교신도 안된다.
이제는 돌아 서는 일만 남은 가 보다.
어제밤 그 무섭던 눈사태도 이제는 멎었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못내 서운했는지 영록이는 매트리스를 결국 짓이겨 버리고 말았다. 나도 배낭에 꽂아 두었던 스노우바를 저 멀리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B. C로의 길을 재촉하였다. 눈사태가 난 지역을 통화하면서 “저걸 맞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영록이 왈 “죄가 있으면, 우리를 치겠죠?”한다. 적어도 우리는 죄 지은 것이 없나 보다.
하늘이 열어 주지 않은 길 쉬블링을 뒤돌아 내려오며…
12. 개인별 등반일지(최복환)
8월 16일
그렇게도 안타까워하고 마침내 출발하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한 이 쉬블링 원정대의 출발은 촌놈의 처음 타는 비행기의 움직임보다 빠른 맥박으로 요동을 하더니 금색 구름 사이사이로 보이는 낯선 땅과 산과 물.
꼬박 3시간을 날아오는 그 서막부터 진주팀의 등반대장이 낙오하여 면세지역에서 기다리다 탑승하였다. 지루한 5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통관의 까다로움에 놀라며 공항을 나서니 끈끈하고 훅훅 달아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도로 왼쪽으로 달리는 이상스런 처와 비마져 내리는 방향모를 도로를 전세버스에 올라 I.M.F에 그 첫날을 보내고 있다.
4명은 아직은 제각기 잘 하는데 진주팀의 Y. B는 O. B에 밀려 고생이 심한 듯 작은 투정을 한다. 조금씩 도와주며 동화되어 가고…
양양 촌놈의 어설픈 영어는 대화가 성립되지도 않고 몸(?)으로 열심히 설명하면 어떻게든 알아듣고 대답을 한다. 아! 영어 공부 좀 해라, 배워서 남주냐? 떠오르는 말씀과 일깨우던 영어선생님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친구 녀석에게 끝내 서운 했지만 팀에서 도와준 모든 분들의 고마움을 생각해서 꼭 최선을 다하며 누구에게도 실망함이 없는 등반을 하리라 다짐하여 이 밤을 보낸다.
8월 17일
후덥덥한 날씨와 모기와 파리에 시달리며 겨우 이룬 잠. I. M. F에서 차려준 아침은 식빵 4조각과 후라이 큰 것 하나. 버터에 익숙하지 못한 입은 쨈과 케첩을 발라먹게 한다. 홍차+커피(쨔이)맛을 느끼게 하는 차를 마시고, 볼더링장에서의 땀과 샤워…
여유 있게 이야기로 소일을 하는데 교민처장님이 오시고, 메니져도 오시고, 우리의 권익을 대변할 정부 연락관도 오고 서로들 브리핑도 하였다.
정관이(정부연락관 약어)와 국제캠프 2명과 초모랑마팀 4명과 뉴델리로 나가면서 대사관을 들렀으나 14:30분에 문을 연다고 해서 바로 뉴델리로 향하였다.
택시들은 철저하게 합의를 본 다음 타고 아니면 미터기를 꺾고 약 50%에 해당하는 외국인 할증이 당연히 적용되고 있었다.
영어로 아무리 슈퍼마켓을 찾아도 몰랐으나 특권층이 이용하는 슈퍼바쟐을 찾으면 훨씬 빠르다.
특정 수입품의 가격시세는 거의 우리나라만큼 동일하므로 필름, 건전지, 생리대 등은 미리 면세점에서 구입하면 돈을 훨씬 절약할 수 있으리라.
연료 및 물이 이곳에선 문제이다. 개 발에 땀나도록 뛰어 근근이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서툰 영어지만 눈칫밥 덕이리라.
총각이 이곳에 오면 눈이 크고 까무잡잡한 피부와 볼륨 있는 몸을 눈요기하는 센스도 필요하다. 손으로 만지면 노터치를 강력하게 세 번씩이나 하는 것을 다른 팀의 실수를 보고 깨달았다.
피곤에 지쳐 25Kg 팩킹을 한 후라 엄청 졸리다. (현지시간 00:30) 결국 오늘은 신기함과 어색함이 공존하는 나를 느끼며 오늘이 지난 오늘을 마감한다.
8월 18일
7시 조금 넘어 간밤에 모기 때문에 긁적거리며 뒤척인 잠에서 깨어 볼더링을 하며 땀을 빼고, 더위에 지친 영록을 남겨두고 뉴델리 중심지 지하 바쟐에서 카메라 2대의 수리를 의뢰했으나 월요일에 찾아가라한다. 내일 새벽이면 차량운행이 시작되는데… 결국 2,000루피를 주고 일제 자동카메라를 구입하고 진자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코브라 댄싱도 보고 올드렐리의 라키라성으로 향하였다.
택시에서 내리며 복잡한 인파를 빠져 나가는데 가방이 열려 있는 것을 본 동익이가 나를 불러 황급히 성 입구에서 액수를 맞추어보니 200루피가 없어졌다.
진주팀 대장을 마중나간 사람들, 머리를 빡빡깍고 나타난 정부연락관 하지만 맛있는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고 바둑, 장기를 두며 소일거리를 찾고 있다.
내일이면 본격적인 카라반이 시작될 것이다.
8월 19일
새벽 4시 30분경에 일어나 버스에 짐을 옮겨 싣고 부족한 아침식사를 위해 미숫가루와 개인 물품을 챙겨 차에 오르니 시원한 에어컨이 작동되어 있었다.
아침 6시30분 뉴델리에서 델리 랄카라성까지는 어제 온 길이라 알지만 이후부터 가는 코스는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산. 넓은 평원과 이따금 나타나는 작은 소음들…
며칠 전부터 비가 왔는지 모래에 갇혀버린 차, 무너진 길과 흐르는 길을 아슬아슬 비켜가고, 내려 보면 까마득한 절벽을 어렵고 힘들게 올랐다. 졸고 또 졸다 보니 이곳 우타르카시까지 왔다.
2인용 호텔은 200루피인데 수건이나 세면용구를 구경할 수가 없다.
내일이면 강고트리에 도착할 것이고 이후로는 고소에 시달리며 카라반이 시작될 것이다. (23:55)
8월 20일
바한다리 호텔에서 대충 빵과 콜라로 아침을 때웠다 우타르카시에 위치한 닐 등반학교를 방문하고 비닐과 과일을 사서 강고트리(15시)로 출발하여 낭떠러지 위를 곡예 하듯 지났으며 한계령의 10배쯤 되는 꼬부랑길을 올라오는데 절경이다.
날카로운 돌에 의해 펑크가 난 바퀴를 갈아 끼웠고, 잘랑잘랑 외치는 조수 녀석의 재촉에 아랑곳없이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의 욕심.
2,800M의 고개를 넘어 강을 끼고 내려오니 오히려 처음보다 길이 훨씬 편해졌다.
강니기리의 다리를 넘어 오르막을 얼마나 올랐을까(?) 깜박 졸다 깨어보니 강고트리에 도착해있었다. 롯지를 배정받아 짐을 풀었다. 오랜만에 우리 입맛대로 사골우거지국을 밥과 함께 먹고 나니 포만감이 든다.
3,180M의 이곳 강고트리에서의 다섯 번째 밤. 가슴이 답답하고 무엇인가 부자유스럽다.
8월 21일
새벽6시경 기상 후 물을 챙겨 마시고 거울을 보니 눈가에 붓기가 있었다. 강고트리의 유명한 사원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며 낮잠까지 때렸는데도 11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국제에서 준비하는 김치 담그는 것을 대장을 비롯해 대원들이 적극적으로 도와 준 결과 맛있게 담가졌다.
영록이와 둘이서 시장(?)거리로 나갔다. 고글의 코덮개를 만들 재료를 콩글리시와 바디랭귀지로 구입해 4개의 훌륭한 고덮개 만들었다.
쿡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지며 자기는 현재 25살이며 와이프는 우타르카쉬에 있으며 아들을 하나 두고 있다고 한다. 나는 32살이고 아직 장가도 못가 혼자라고 했다. 여자 한명 소개시켜 달라고 하니 문제없단다. 에구머니나! 동익이는 늙어서 안 된다고 한다.
혼자만 고소증상인줄 알았는데 남들은 더 심한 경우도 있어 당연한 걸 어젯밤엔 괜스레 두려움을 가졌나 보다.
내일이면 포터 44명, 헤드포터 1명, 쿡과 보이 2명, 정부연락관 1명, 대원 12명 도합 60명이 카라반을 시작한다. 서서히 고소에 적응하는 요령이 생기며 여유도 찾는다.
8월 22일
새벽 4시 15분에 기상하여 조식을 함께 준비했다. 아침을 대충 챙겨먹고 포터에게 짐을 주고 사행 카라반의 첫날을 맞이한다.
깡마르고 작은 체구에 어떻게 저것을 들까? 13살의 소년이 25Kg의 무게를 지고 오른다. 3,200M에서 머리가 약간 띵하고 졸음이 온다. 역시 남들과 똑같은 증세라 다행이었다. 지루한 카라반은 아침 7시부터 시작 되었고 퍼펙트의 챙 넓은 모자 덕분에 외쪽 급사면의 위험스러운 낙석 구간도 보지 못한 채 마냥‘인샬라’(영록이 파키스탄에서 배워온 말)를 외쳤다.
지금까지 최고의 기분이랄까 정소랄까. 고묵까지 올라갔다오는 강고트리지역의 젊은 오빠 셋과 여동생들을 우연히 매점 같은 곳에서 만나 친해져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오르다 보니 12시 30분쯤 보쥬바샤 롯지에 도착했다.
해발 3,700M에서 바라보이는 바기라티 1,2,3 구름에 가려진 쉬블링의 끝자락은 결국 보지 못하였다. 늦은 운행으로 2시간을 기다려 첫 포터의 짐을 받고 얼마 후 고묵에서 내려오는 5남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잠시 고생을 잊는다.
영록이와 500M정도의 부근 산을 고소 순응 겸 다녀오니 훨씬 상태가 좋아졌다.
짐정리를 하고 저녁을 먹는데 급체한 포터 한명이 있어 진주팀과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오늘의 운행이 늦어서일까? 피곤한 국제캠프를 더 도와주기로 하고 맑은 눈의 17,8세 소녀의 티 없는 얼굴을 또 한 번 그려보고 순수한 그 미소를 간직하며 잠을 자려 한다.
8월 23일
보쥬바샤에서 새벽 5시경 일어나 볼일을 보는데 별이 총총하고 맞은편 봉우리의 긴 설벽도 보인다.
포터들에게 짐을 주고 고묵으로 출발한 시간은 대략 7시 40분경. 고묵에 도착해 보니 쉬블링도 보이고 바기라티 1,2,3봉과 멀리 샤토판스가 보인다.
너덜지대에 작은 배낭만한 바위가 굴렀으나 다행스럽게 동익을 스쳐지나가 큰 상처 없이 약간의 통증에 조금 부은 상태라 안심하였다.
너덜의 긴 벽을 너무나 힘들게 오르니 타포반의 B. C 자리가 그림같이 앉아있다.(13시 도착)
동익이 먼저 띵! 하다가 나아지니 내가 또 띵! 영록이는 그럭저럭 잘 견디고 있고 병태형이 몸살인지 체했는지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저녁을 너무나 많이 먹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였다.
8월 24일 예비일
아침 6시에 일어나자마자 물을 0.5L정도를 억지로 마시고 초원을 걸으니 두통이 심하다. 날씨가 좋아 바기라티 연봉도 보고 쉬블링의 북동, 북서벽도 볼 수 있었다.
장비를 정리하고 개인에게 맞게 조정도 했다. 점심을 먹기 직전 영록이 큰 배낭을 메고 먼저 떠났고 점심 후 병태형과 동익은 여유를 부리다가 출발했다. 뒤에서 엄청 무겁게 짐을 메고 A. B. C 지점을 가기위해 13시 40분경 출발하여 가파른 너덜 길과 지루한 능선 길을 오르다 비를 맞아가며 지쳐 16시경 내려오는 형과 영록과 동익을 만나 A. B. C 까지 1시간 20분경 영록에게 소리쳐 챠이 두잔 끓여달라고 외치고 내려와 보니 형이 스프를 따뜻하게 끓여 주었다.
B. C 지점으로 가기 위해 13시40분경 출발하여 가파른 너덜 길과 지루한 능선 길을 오르다 비를 맞아가며 지쳐 16시경 내려오는 형과 영록과 동익을 만나 A. B. C 까지 1시간 10여분 거리에 데포 시키고 내려왔다. 17시 20분경 영록에게 소리쳐 챠이 두잔 끓여달라고 외치고 내려와 보니 형이 스프를 따듯하게 끓여 주었다.
정부연락관의 바뀐 생각에 안타까움과 처지를 이해하며 저녁을 기다리는데 형이 몸살을 앓는 것 같다. 간밤에도 그렇게 앓더니… 펜을 들어 오늘을 정리하는 이 시간에도 앓는 소리다.
진주팀에서 홍삼 엑기스를 주워 먹었는데 정말 효용이 좋을지 의문이다. 거기에다 동익이도 몸살로 끙끙 앓고 있다.
밤은 깊어가고 텐트마다 이야기꽃이 핀다.
쿡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석청’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강고트리나 우타르카쉬에서 판매하는 일반적 석청이라는 꿀은 혼합이며 약으로 쓰려고 하는 진짜를 구해 줄 수 있는데 150루피라 한다.
9일째인데 언제쯤 정상을 올라갈 수 있을까. 이제 겨우 B. C에서 코가 막혀 킁킁거리며 무슨 망각적 조급함일까?
모두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 좋은 날씨 속에서 훌륭한 등반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8월 25일
간밤에 내리던 빗줄기는 거짓말처럼 그쳐 버리고 형과 동익이 아침을 제대로 먹질 못해 스프와 차를 끓여주고 점심을 비빔냉면으로 때웠다. 13시30분경 컨디션 조절 겸 데포지까지 내짐을 옮기려고 A. B. C로 향했다.
어제 짐을 지고 두 시간 삼십분을 간 거리가 빈 몸으로 가니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도착해 보니 이중화와 폴대가 밖에 나와 있었으나 무심하게 지나쳐 병태형의 데포지점에 내 짐을 내려놓는데 진주팀 하이포터 두 명이 지나가며 시간을 묻는다.
16시 동익의 분산된 장비를 챙기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어 촬영을 하니 카메라가 추워서인지 작동이 되지 않아 그냥 내려왔다.
17시 05분에 B. C로 내려와 보니 아무도 안보여 미국팀 캠프지로 가보니 모두 거기에 있었다. 그들의 산행에 관한 정보를 나누었다.
8월 26일
아침에 그렇게 심하게 내리던 비도 이제는 소강 상태인가보다 조금씩 안개비처럼 온종일 오락가락 가스만 찬 날이다.
일어나자마자 씨그 버너에 불을 붙여 꿀차를 끓이고 물을 끓여 영록, 동익 병태형께 주고서 상황이 좋은 쪽으로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웃으며 소일거리를 찾고, 골프도 했다.
미국 등반대 4명과 정부연락관까지 5명이 서릉을 정찰하기 위해 A. B. C 를 향해 올라갔다.
국제캠프와 정부 연락관과의 미묘한 갈등의 어려운 처지를 해결해 보고자 하나 국제에서는 항상 우리 팀에겐 문제가 없단다.
내려오는 미국대에게 꿀차를 대접하고 상황을 물으니 눈이 많이 내려 스노라인이 내려와 있다 한다. 우리 정연관이 어제 일을 설명하자 웃으며 자기네 캠프에 내려오면 커피를 대접한다며 가버리고 저녁을 먹고 쉬는데 진주팀은 무엇인가 열심히 상의하고 있다.
8월 27일
지난밤 텐트를 두드리던 빗소리는 멎었으나 끝내 쉬블링의 모습은 가스에 가려져 볼 수가 없다.
아침을 북어국으로 먹고 10시 20분경 동익의 식량과 스크류 3개와 몇 가지 소품을 챙겨들고 형에게 인사를 하고 미국, 인도, 스웨덴 합동대 (‘피터’대)와 함께 서릉을 가기 위해 올랐다.
어제의 데포지점에 도착하여 내 짐을 조사하니 장비 몇 개가 없다. 진주팀이 비가 오니 쉬었다가 가라한다. 오트밀과 건파인애플을 먹고 깜빡 졸다가 B. C로 향했다. 주절주절 비 내리는 날 안개처럼 찬 가스는 발밑과 쉬블리의 2/3지점까지만 환하게 열어 주었다. 우리가 가야할 확실한 코스를 확인할 수 있었고 능선너머 B. C로 돌아오니 없어진 물건들이 고스란히 돌아왔다 한다.
우리 대원들은 얼마나 잘 자고 일어날까? 내 몸이야 지금만 같아도 될 텐데…
입술이 트는데 적절한 약이나 비타민계 레모나 같은 게 없다. 잘 챙겨야 했었다.
8월 28일
흐린 날씨 속에서도 쉬블링 전부의 모습이 보였다. 조사장님께서 우리 대원을 촬영해 주셨고, 아침식사를 끝내고 장비를 챙겨 몇 번이나 가 보았던 A. B. C를 향해 출발했다.(10시 20분)
동익의 짐을 나우어 A. B. C에 도착(13:50)하니 병태형과 영록이 이미 텐트를 치고 차를 끓여 내주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 동익이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저녁을 불고기덮밥과 일제국을 끓여먹고 나니 모두들 졸린지 일찍 잠자리에 들어간다.
밖에서 열심히 꿀차 2병과 숭늉 1병을 끓여놓고 들어와 조용히 이글을 쓴다. (두통 및 고소증세 전혀 없음)
8월 29일
배앓이로 밖에서 볼일을 보는데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4명이 누운 텐트속의 부족한 산소 탓일까? 아니면 너무 일찍 잠이 든 탓일까? 아침은 어제한 밥에 물을 부어 먹고 왔는데 형이 어제 먹은 국 냄새가 그렇게도 역겨웠나보다. 짧은 시간동안 형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내려갔으면 하는 말에 모두에게 힘든 하루를 예상했다.
4,750M의 A. B. C에서 형을 떠나보내며 C!을 향해 출발했다.
계속해서 내리던 빗줄기가 4,900M정도에선 진눈깨비가 4,950~5,000M사이에서는 폭설처럼 눈이 내린다.
두 명이 누울 정도의 공간에 황급히 푹 젖어버린 텐트를 치고, 12시50분경 다시금 영록이의 짐을 가져와 동익과 스프, 누룽지를 끓여먹고는 우모복만 챙겨 캠프를 16기 30분에 떠났다.
내려오는데 피터대의 인도 아가씨가 신발이 젖어 고생하고 있기에 황급히 대포지점에서 양말과 운동화를 갈아 신겨 주고 맨손에 하얗게 물이 묻은 검은손에 미튼을 끼워주고는 B. C로 내려왔다.
18:00에 영록, 동익에게서 무전이 왔다. 날씨는 여전히 눈이 내린다고 한다.
병태형의 상태는 생각보다 점점 심해져 가는 것만 같다.
C1이 건설되면 속전속결의 스피디한 공격으로 정상을 등정하고 빨리 내려와 따뜻한 곳에서 관광이나 하자고 셋이서 결정하고 최후의 일전을 이번 주 주말로 정하였다. 위에선 잘라고 있는지 궁금하다.
고생하는 형의 몸살이 빨리 나아지길 바라며 이 밤의 끝을 맺는다.
8월 30일
몇 번이고 일어나는 형의 생태는 좋지 못하다.
꿈에선 누군가와 열심히 환상여행을 떠나고 있는 것 같다.
아침을 챙겨 먹는데 영록, 동익조에게서 무전이 내려온다. 눈은 조금씩 내리고 안개가 짙으나 조금씩 걷히므로 최소의 장비만이라도 C1에 올려놓겠다고 한다.
공격조의 선택을 받으마 하고 교신을 끝내고 식량텐트에 불을 지펴 계속해서 젖은 옷을 말리고 있었다.
점심을 잣죽으로 때우고, 공격조에서 날아온 교신은 아침과 똑같다. 저녁 6시에 다시 교신하기로 했다.
양송이 스프를 끓여 놓았으나 또 잠이 들어버린 형.
혼자의 따분한 시간.
피터대의 인도 아가씨가 미튼을 들고 찾아왔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키친보이에게 카메라를 건네기에 얼떨결에 우리 카메라와 조사장님 카메라에 쾅쾅쾅!
그녀의 나이는 27이고 직업은 프랑스, 영국인들과 커뮤니케이션한다고 했고 이번 크래킹도 그런 연유였으며 상당히 쉬우리라 예상했는데 상상외로 눈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으나 다행히 매너(?)있는 나를 만나 손과 발이 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진을 보낼 테니 주소를 달라기에 대원프로필을 주었다. 좋아하는 액션배우가 성룡이고, 자기 오빠는 가라테의 블랙밸트라고 하기에 나도 태권도 유단자라고 응해주었다.
동익으로부터 교신이 왔다. 날씨가 좋지 않아 약간의 장비만 C1에 올려놓았고, 내일 가스와 누룽지를 많이 가져오라고 했다.
건투를 빌며 교신을 끝내고 모처럼 형이 일어나 부엌도 기웃거리고 음식을 손수 챙긴다. 내일이라도 같이 올라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8월 31일
아침에 텐트문을 여니 햇살이 비쳐 쉬블링 전체가 구름 한 점 없이 보이는 상쾌한 아침.
동익의 8시 무전교신 후 사진 몇 장 찍고, 찍히고
모자란 것을 챙겨 9시 10분경 C1을 향해 출발했다. 데포지점에서 가스 및 의류, 식료품을 챙기고 다시 잘 정리하여 데포 시킨 후 눈에서 잘 보이게 분홍색 비닐로 표시하였다.
긴 여정을 하는 듯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는 C1,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800M의 수직고도, 4,400M의 B. C에서 5,200M의 C1까지. 지쳐버리기 바로 직전에 영록이가 내려와 배낭을 받아준다. 이 먼 시간의 5분이 어찌 그리 고마운지…
저녁을 지어서 피터와 우리 넷이 둘러앉아 음식도 서로 바꾸어 먹었다.
노래, 이야기, 끝내는 손끔까지 보았다. 시간은 어느덧 잠을 잘 시간을 넘겼다. 운행으로만 꽉 찬 하루라 피곤하기만 하다.
9월 1일
간밤에 화장실을 너무 오래 갔다 온 탓인가. 아니면 어제 하루를 무리한 탓인가. 정인씨는 배가 아프다며 혈변을 쏟는 바람에 못 가게 되었고 나 또한 출발을 막자 영록, 동익이 눈 내리는 서릉을 향해 출발한다.
간밤의 꿈이 너무나 뒤숭숭하고, 아침에 썬글라스테를 분질러 먹고, 빙하는 끊임없이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어제의 무리한 운행에 의한 무력감.
내 평생 후회할 일은 아닐까 염려하며 두 대원의 얼굴이 떠나지 않고 있는데,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사람들, 밀어주고 당겨주시던 산악회 선후배님들, 밑에서 무전기 붙잡고 마음 고생하는 형과 그렇게도 무던히 뒷바라지 하시던 형수.
아! 영록이와 동익이 피곤한 모습으로 BACK을 하여 다시 C1에 들어서는 게 아닌가? 눈이 많이 내려 고정로프를 찾는데 고생이 말이 아니었던가보다. 나를 이해 해주는 두 사람.
내일 최소의 장비로 공격하기로 하고 일찍 저녁을 먹으며 B, C의 형과 교신을 했다.
무엇을 위하여 이렇듯 오름 짓을 해야 하는 걸까? 조급함과 오만함으로 일관하던 내 삶에서 철저하게 준비하고 실행하는 차분함을 배우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뀐 삶에, 원정이라는 목표에 도전해보는 이 클라이머들의 삶은 또 무엇?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밟고 내일이며 또 다시 고소와 싸우며 올라야겠지. 마치 숙명처럼 운명처럼…
9월 2일
언제나 눈을 뜨면 하늘부터 보는데 조금씩 눈이 내렸다.
B. C와의 교신에서 형은 비박장비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는 말에 침낭커버를 추가하여 다음 캠프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너덜로 가파른 길을 올라 힘들게 럿쎌을 하며 오르니 작은 오버행 구간이 나타났고 쥬마링으로 그대로 치고 올라 행동식을 먹으며 쉬다가 눈 내리며 흐린 날씨탓에 좌우분간이 되지 않아 마주 보이는 봉우리 좌측으로 틀어 예상했던 C2 지점에 텐트를 치고 차를 끓이고 저녁을 준비하며 정리하는데 먼저 이곳을 왔던 팀들이 남겨놓고 간 로프와 스노우바와 쓰레기들이 바위틈에서 나타났다.
오후 4시쯤 되니 이런 젠장 그렇게 눈 내리고 가스 차던 날씨에 엄청스레 좋아지는 게 아닌가. 우리가 올라가야 할 곳을 그 과정까지 보여주는 게 아닌가?
6시 교신에 형은 5,800M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걱정을 분발을 바라고 있다. 그렇게 많은 눈을 헤치고 왔는데 좌측 아이스폴에 고정로프가 걸려 있었다. 언젠가 누군가 저리로 올랐던 기록을 본적이 있는데…
내일은 최대한 고도를 올리리라 교신을 끝내고 무릎이 시린 비박을 한다. 별이 무척이나 맑은 것으로 보아 내일은 날씨가 좋을 것 같다.
아침교신에 진주팀 A. B. C가 철수한다고 했는데 김정인씨는 잘 내려갔는지 모르겠다.
이 좁은 텐트에 3명이 누우니 비좁고 숨이 찬다. 옆에서도 뒤척거리기만 하고,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9월 3일
간밤에 숨이 차고 답답해 텐트밖에 나와서 물을 끓여먹고 들어가 겨우겨우 버팅이며 잠들려 했으나,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지는 눈을 들어 밖을 내다보니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습관 때문인지 밤새워 뒤척이다 아침에 누룽지를 끓여 먹는데 미리 불려 놓지 않아 장장 한 시간 반이나 소요되었다.
병태형과 B. C상의 무전을 끝내고 고정로프를 찾아 다음 캠프를 향해 출발했다. 영록은 벌써 능선을 넘어 안전지점까지 5미터가 남았고 밑에선 줄이 꼬여 올라갈 수가 없다. 어센더에 얼음이 끼니 밀리고 떨어져 버리길 네다섯 번.
위에선 전진을 하지 못하고 밑에선 아예 등반 줄을 풀어놓고 올라오고 있다.
어센더의 이빨을 청소한다고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는데 저 만치 눈 위에 오버미튼이 날아간 것이 하얀 눈 위에 보랏빛으로 보였다.
보이지 않는 사람과 대화가 통하겠는가, 밑에 있는 사람의 구겨진 인상을 반겨 말하겠는가.
무얼 생각했는지 조차 잊어버릴 만큼이나 빠르게…
영록에게 줄의 여유를 주고 동익이의 뒤에서면 될 것 같아 내려와 버렸다.
처음의 의지와 내려오며 벌어진 상태는 왜 그렇게 달라져 있었으며 납득하지 못할 행동이 유발됐을까.
하얀 설벽으로 흘러내리는 등반 줄을 미친 듯이 달려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태도 잊어버린 채 끌고 오는데 줄을 던져버린 나의 행동이 밉고, 포기하듯 말하는 나의 행동이 밉고 무엇보다 희망마저 잃어버린 내 자신의 절망이 아쉽다.
힘겨움과 실패에 왜 그렇게 서럽던지 그렇게 힘들게 올랐는데 내려올 때는 왜 그렇게 짧은 시간에 내려올 수 있었는지…
무전교신을 서로 미루다가 통화를 한 후까지 참으로 많이도 열심히 arj고 누워 오늘을 생각한다.
9월 4일
얼마큼이나 깊이 잠들었으면 텐트를 덮칠 만큼 눈이 내린지도 모르고 잤을까?
눈을 뜨니 세상이 하얗게 밝아 보이고 B. C와의 교신시간이라 공격신호를 받을까 염려하며 텐트 문을 여니 그냥 쏟아져 들어오기 일촉즉발.
세상에 이렇게 많은 눈은 등산학교 동계반때 양폭에서 맞이하고는 처음이라, 텐트 주변의 눈을 치우는 피터대의 눈삽을 빌려 나가보니 1인용텐트는 무너져 버렸고 그네들의 4인용 와일드컨츄리텐트도 거의 지붕까지 덥혀 있었다.
무전교신에서 A. B. Calx에는 소나기가 내리니 눈 걱정 말고 귀환하라 한다.
3명은 침낭과 젖은 옷가지만 챙겨 내리 쏘는데, 무너지는 듯 한 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양방향에서 눈사태와 낙석 구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음은 ‘인샬라’
영록이와 동익은 저 멀리 사라져 버리고 북면 A. B. C에서 눈사태를 찍으려고 기다려도 작은 것만 서너 번 무너질 뿐.
오랜만에 B. C에 모인 대원들.
진주팀의 끈기 없는 행동에 분개한 ‘원 코피’ 어르신의 말씀을 듣다가 우리 캠프에 모여 영록이 찍은 비디오를 보며 또 한바탕 긴긴 비 내리는 밤을 웃어넘긴다.
내 스스로 동익과 영록의 지원조가 되길 원했을까? 성격상, 훈련의, 팀의, 개인의…
지금은 욕심보단 실리.
꼭 정상에 올리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뒷바라지 해야겠다. 어차피 2인용텐트에 3명은 너무나 비좁고 숨차다. 동익이가 영록이가 올라갈 수 있도록 차분히 준비하고 마음을 합해야 할 때이다.
비야!
내려라, 쏟아라!
그리고 3일간만 맑아다오.
9월 5일
밤새워 내리는 빗소리에 선잠에서 깨어 밖을 내다보니 무슨놈의 장대비가 왜 이렇게 퍼붓는지…
장대비가 눈으로 변하여 두세 시간 후엔 주위가 온통 눈으로 뒤덮여 갔다
바기라티 B. C에서 정부연락관이 평상복 차림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황급히 바기라티팀의 무전기 주파수를 알려준다. 교신을 하니 . A. B. C에서 눈사태에 휘말려 1명은 사망했고 2명은 부상 중이며 시신은 그대로 A. B. C에 있고 부상자중 1명은 갈비뼈가 이상 있으며 1명은 픽켈에 어깨가 찔려 엄지손가락 신경을 건드려 헬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캠프에 모여앉아 이번 등반의 느낌을 나누려고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왜 그렇게 내 자신에게 미안스러운 걸까?
엄청 쏟아지는 눈 보다 내 자신이 약해서였는데…
9월 6일
눈을 뜨면 항상 날씨부터 본다. 약간 흐린데 조금씩 비가 내리고 있다.
육개장으로 조식을 하고 난 후 미국대로 놀러가자는 형의 말씀에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그냥 개인용 텐트에서 밀려오는 졸음을 맞았다.
얼마나 잠이 들었던가. 밖에서 ‘ 시실리’ 가 찾아와 함께 트레킹을 하자는 제안을 정인씨로부터 듣고 셋이서 케다르돔 B. C까지 다녀왔다.
끝내 미국대에서 등반 불가능의 적설량을 전해 듣고는 내일 C1을 철수하기로 했다.
9월 7일(추석?)
형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영록과 동익이 C1로 올라가는 날이다. 부지런을 떨어 쿡이 마련한 그네들의 의식을 지내고 우리식대로 술이 없어 냉수를 떠 올려 절하며 추석날 아침(?)을 맞이했다.
2차 공격을 하기 위해 C1로 출발한 시간 8시 50분. 보슬비처럼 내리는 비.
강고트리로 내려간 서기석씨와 포터가 올라오면서 지금 밑에선 물난리로 길이 막혀 진주팀도 오늘이나 내일쯤 되어서야 빠져 나갈 것이라는 것도.
바기라티에 새로운 등반대가 들어가며 쉬블링에도 다른 미국대가 올라오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동익에게서 날아온 눈이 너무 많아 등반이 불가하다는 교신내용을 받고 내일을 철수일로 장해버렸다.
텐트에서 형과 마주 않아 담소를 나누며, 가까이 있을 사람에게 더 관심 두며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해야 하는 사실을 알고
여전히 옆에선 기침소리 들리며 변함없이 내리던 비가 그친 것이 의아할 뿐 밤은 이렇게 깊어만 간다.
올해의 추석은 쉬블리에서 이렇게 지낼 뿐
동익아. 영록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
9월 8일
아침에 교신을 기다렸으나 끝내 연락이 없다.
B. C에 앉아 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있는데 12시 청주팀 교신에 A. B. C를 5분전에 출발했다고…
하이포터 1명과 같이 A. B. C중간쯤까지 마중 나가고, 영록이와 동익이는 사태지역을 만나 고전하며 내려오고 이었다. 동익과 영록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고 나니 응어리진 미안함이 한결 가벼워진다.
짐을 나누어 메고 B. C로 내려와 점심을 라면으로 때우고 H 다시 모처럼 4명이 함께 한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추우 밤을 보내고 온 2명, 너무너무 고생 많았다.
훤하게 밝은 달은 구름과 가스에 가려 보이지 않고 날씨는 여전히 흐린 듯. 맑은 듯 변화무쌍하다.
인도 그곳에서는 신과 함께 사는 인도인들의 가장 전형적인 삶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작은 보따리와 허름한 천막이 가진 것이 전부인 사람들… 차이와 밀가루 빵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거나. 아니면 구걸을.
인도의 가장 큰 병폐중의 하나인 계급제도의 존재 하에서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한데 어울려 여러 삶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은 종교의 힘이다. 그들은 죽음이 생의 끝이 아님을 믿는다. 따라서 현세는 곧 내세로 이어지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보기에 그들은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며 영원으로 이어지는 내세를 위해 산을 향한 기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종교와 생활은 곧 하나로 이어지며 신을 모시는 일은 그들의 가장 큰 중대사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은 풍요로움을 원하지 않고, 또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다만 살아 있음, 그 자체를 느끼며 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반드시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다. 현대 문명사회처럼 많은 것을 누리며 살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항상 순수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고 순수함이 있다. 그들은 또 다시 열리는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들은 기도 하고 있다.
마음의 평안함과 기쁨을 구하는 기도를, 신은 그들에게 축복을 내린다. “마음이 행복한 자”라는 말처럼 등반을 하는 우리도 그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