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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동안 우리들에게 많은 신앙적 지식을 쌓게 해주신 신부님의 추천도서들입니다.
영적 양식들을 쌓지 않으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쌓아가지 못하고 삶도 변화할 수 없다고 늘 강조하셨죠.
제발 책 좀 읽으라고 하신 신부님의 목소리가 생각납니다.
신부님이 직접 책의 감상들을 적어오셨던 것들이라 너무나 귀한 자료입니다.
총37권인데 파일로 올리려 하니 못보시는 분들도 계실 듯해서 여러편으로 나누어 복사해서 올립니다.
♣ 읽어봅시다!!!
『희망의 이유』
-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궁리출판사/ 2000
시작 -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 절망과 기쁨 속에서도 어떤 커다란 계획을 따르고 있었다는 믿음이 든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길을 잃고 방황한 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로 길을 잃었던 적은 결코 없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바람이 떠도는 작은 조각을 정확한 길로 부드럽게 밀거나 혹은 맹렬하게 불어주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 표류하는 작은 조각이 바로 과거의 나였고, 또한 지금의 나이다.
준비 - 나는 자신이 어떤 거대한 통일된 힘의 일부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눈물이 흐르도록 깊은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었고, ‘가슴속에 지극한 기쁨이 한없이 차오르게’ 하는 것도 있었다. 특히 아름다운 일몰을 보거나, 태양이 구름 뒤에서 얼굴을 내밀고 새가 노래할 때 나무 아래 서 있거나, 어떤 고대 사원에서 완전한 고요함 속에 앉아 있거나 할 때가 그때였을까? 이 같은 순간에는 어떤 거대한 영적인 힘, 바로 하느님 안에 있다고 강하게 느꼈다.
아프리카로 - 약 14년 동안, 즉 여덟 살이나 아홉 살 때부터, 나는 아프리카에 있는 것을, 오지의 야생동물들 사이에서 사는 것을 꿈꿔왔다. 그런데 갑자기 아침에 깨었을 때 내가 나의 꿈속에서 실제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이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곰베에서 - 처음에는 어머니와 저녁을 들기 위해 항상 내려갔다. 그러나 식사 후에는 어린 이기심으로 어머니를 혼자 두고 다시 나왔다. 달빛을 받으면서 정상으로 가는 잘 아는 길로 올라갔다. 작은 손전등을 가지고 가기도 했는데 너무 행복했다. 어머니를 캠프에 혼자 남겨둔 채로 나는 어머니가 낯설고 새로운 세계에 혼자 남겨져서 어떻게 느낄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공헌이 진실로 얼마나 굉장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홀로 - 침팬지와 비비, 원숭이들과 함께 새와 벌레들, 활기에 넘치는 숲의 풍부한 생명체들, 결코 멈추지 않고 바쁘게 흐르는 거대한 호수의 물, 셀 수 없이 무수한 별과 태양계의 행성들은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모든 것은 하나이며, 모든 것은 거대한 미스터리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일부이다. 평온이 나를 감쌌다. ‘여기는 내가 속한 곳이다. 이 일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다.’
변화의 10년 - 곰베에서 처음으로 영국으로 되돌아왔을 때, 별로 변한 것 없는 버치스와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다르게 - 거칠고 낯설게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변한 것은 바로 나였다. 곰베에서 여러 달을 지낸 후, 나는 새로운 눈으로 우리가 만들어낸 ‘문명화된’ 세계를 보았다. 그 세게는 벽돌과 회반죽, 도시와 빌딩, 도로와 자동차와 기계의 세계였다. 자연은 거의 언제나 아름답고 영혼을 풍요롭게 했지만, 사람이 만든 세계는 끔찍하게 추악하고 영혼을 메마르게 하기 쉬운 것처럼 보였다. 곰베에서 영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두 세계간의 이러한 대조가 선명히 떠올라 나를 슬프게 했다.
잃어버린 낙원 - 나는 호수 저 멀리 평화롭게만 보이는 산속으로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며 앉아서 그 모든 폭력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의 뛰어난 지성과 고귀한 포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격성이 침팬지의 그것과 단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더욱 악질적이라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를 생각하였다. 인간은 기본적인 본능을 초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나쁘다. 반면에 침팬지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곰베에서의 수년간의 침팬지 연구를 통해, 왜, 어떻게 인간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악의 뿌리 - 그렇게 곰베 침팬지들의 행동은 이론적 논쟁에 불을 붙였다. 여러 과학자들이 곰베 침팬지들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논쟁했다. 그들은 인간 공격성의 본질에 대해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론을 입증하거나 반박하기 위해서 침팬지들을 이용하고 무시했다. 반면에 나는 곰베에서의 연구 결과를 가지고 침팬지 공격성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다. 나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침팬지들이 증오와 악의 전면전에 도달한 우리 인간들의 행로를 얼마나 따라왔는가?
전쟁의 전조 - 문화적 종분화는 분명히 세계 평화의 장벽이다. 우리가 ‘지구촌’보다 더 작은 집단을 중요시하는 한, 편견과 무지를 계속해서 키워나가게 될 것이다. 조그마한 집단의 부분이 되는 것은 아무런 해악도 없다. 실제로 수렵 채집 집단적 성향으로 인해 작은 집단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또한 완전히 믿을 수 있고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내부의 친구 집단을 만들어 준다. 그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해준다. 위험은 오직 우리 집단과 달리 생각하는 다른 어떤 집단 사이에 날카로운 선을 긋고, 도랑을 파고, 지뢰밭을 만듦으로써 생긴다.
연민과 사랑 - 나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사랑과 연민과 자기 희생의 자질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정말 잔인하고 악해질 수 있다.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행동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도 서로를 고문하고 싸우고 죽인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가장 고결하고 관대하며 영웅적인 행동들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죽음 - 인간이 느끼는 연민, 이타심, 그리고 사랑의 뿌리는 우리의 과거 속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 사랑은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는데, 우리는 종종 이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한다. 우리는 친구, 가족, 애완동물,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나라를 사랑한다. 우리는 자연을 사랑하고, 폭풍우와 바다를 사랑한다. 또한 신을 사랑한다. 그 무엇을 사랑하건, 그 사랑의 깊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잃었을 때의 슬픔의 깊이를 결정한다.
♣ 읽어봅시다!!!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
- 헨리 나웬/ 성찬성 옮김/ 바오로딸/ 2009
“우리 삶은 불멸의 옷을 차려 입기 위해 먼저 죽어야 하는 씨앗입니다!”
헨리 나웬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고 혁신적인 영성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노트르담, 하버드, 예일 대학에서 가르친 가톨릭 사제로서 제네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체험했고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재기 넘치고 지칠 줄 모르는 헨리 나웬은 마침내 정신 장애인들을 위해 마련된 캐나다 라르슈 공동체 ‘새벽’ 담당 사제로 봉사했습니다.
어느 겨울날 라르슈 공동체가 모여 사는 길을 걸어가던 헨리 나웬은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거의 죽을 뻔한 이 사건은 그에게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깊고도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죽음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두 번째 탄생’이라고 했습니다.
죽음과 새 삶에 대한 묵상을 담은 이 책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품위 있고 기쁘게 맞이하도록 이끄는, 신앙심 깊은 깨달음을 한데 모은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1995년 9월부터 1996년 8월까지 쓴 일기에서 발췌한 이 책은 독자들에게 특별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헨리 나웬은 자신의 약함과 고민과 기쁨을 가장 내밀한 목소리에 담아 기꺼이 나눕니다.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는 죽음과 연약함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빛과 사랑과 영광으로 흘러넘치는 새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줍니다.
- The Henri Nouwen Legacy Trust 재단(캐나다)
“헨리 나웬을 알고 싶은데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하나요?”
우리가 끊임없이 듣는 물음입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흔히 바람직한 출발점으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나 <탕자의 귀향>을 추천하곤 합니다. 그리고 진지한 애독자들이 나웬의 사상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는 책을 물어올 때면, 그의 인생 마지막 해가 어떠했는지 보여줄 뿐 아니라 내밀한 통찰의 향연이라 할 만한 <안식의 여정>을 권합니다.
이 두 부류의 독자들을 연결시킨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생명과 질병,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중점적으로 통찰하는 방향으로 <안식의 여정>을 축약하여, 해마다 처음으로 나웬에게 눈을 돌리는 몇 천 명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는 이러한 바람의 완결판에 해당합니다.
삶에 대한 근본 의문을 다룬, 깊은 통찰력과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나웬의 일기는 그가 십여 년 전 글을 쓴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감동을 줍니다. 나웬은 아버지를 다시 만날 때나 친구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을 때, 또는 작은 모임을 상대로 이야기하며 특유의 활력과 매력을 발산할 때 삶의 성스러움을 온전히 포용하고 이러한 삶에 경하해야 함을 다시 없이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나웬을 처음 만나는 사람이든 오래 함께한 애독자든, 아무쪼록 이 책을 읽으면서 기쁨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Crossroad 출판사(미국)
※ 책을 펼치면...
오후 아홉 시 반에 프란츠와 레니가 호텔로 와서 자기 본당 크리스마스 미사에 나를 데려갔다. 아버지는 위장병이 도져 호텔에 머물며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성당이 많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늘 사람들로 붐비는 리치먼드 힐의 예식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곳도 똑같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은 상당히 작은 ‘군중’이 모여 있었다.
주임신부는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내게 미사를 공동으로 집전하자고 했다. 보좌신부는 권능에서 무능으로, 강함에서 약함으로, 창조주에서 피조물로, 위대함에서 작음으로, 자립에서 종속으로 옮겨가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소망을 아름답게 고찰했다.
덕분에 나는 이번 주 초에 심사숙고하던 내용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강생의 신비가 지닌 놀라운 숨은 뜻을 충분히 음미하지 못한 것 같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느님은 힘없고 약점 투성이인 우리, 보잘것없고 종속되어 있는 우리 안에 계신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지체장애인, 정신장애인, 노인, 힘없는 사람이 있는 곳에 계신다.
그러니 우리의 초점이 성공과 영향력과 권력이 있는 곳에 맞추어져 있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충실함은 부서진 마음과 외로움과 인간적 요구가 있는 곳에 얼마나 기꺼이 찾아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나는 믿는다. 교회에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미래일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이런 믿음 속에서 살고 성장하는 길을 진지하게 찾으며 우정으로 서로를 떠받칠 수 있다. 우리가 수많은 ‘세속적 이해’ 속에서 온전하게 자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마음과 모든 인간 안에 살아 있는, 힘없는 아기 곁에 머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기 예수가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발견할 때 우리는 진정 기뻐할 수 있다.
- 1995년 12월 24일 주일
※ 통신판매 02-944-0944 인터넷 서점 http://www.pauline.or.kr 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읽어봅시다!!!
『할아버지의 축복』
- 레이첼 나오미 레멘 지음/ 류해욱 옮김/ 문예출판사/ 2008
이 책을 읽으면 암울하고 이리저리 엉킨 세상이 갑자기 맑고 환해지고, 내가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사는 게 심드렁해질 때, 로봇같이 기계처럼 살아가는 내가 한심한 생각이 들 때, 이 책을 펼치면 각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내 속에 숨어 있던 사랑과 희망, 용기와 의지를 일깨우고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의미를 지헤롭게 곱씹게 한다. 이미 <그대 만난 뒤 삶에 눈 떴네>와 <할아버지의 기도>로 레멘 박사의 글의 힘은 미국에서도 우리 나라에서도 입증된 바 있지만, 요증음처럼 컴퓨터가 의학가지도 지배하는 시대에 이렇게 인간을 진정 인간답게 만드는, 마음과 영혼까지 치유하는 의사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냥 책이 아니고 삶을 보는 새로운 눈, 아니 새로운 삶이다. 내게는 레이첼 나오미 레멘이라는 작가와 이 책을 발견한 것 자체가 큰 축복이었다.
-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
사람들은 평소에 잊고 지내다가 중한 병을 앓거나 어려운 일을 겪고서야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되고,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삶의 희로애락을 체험하면서 삶의 어느 한쪽만이 아닌 양쪽을 모두 바라보는 여유와 그 속에 담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지혜를 얻기 바랍니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생명은 인간들이 쥐락퍼락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모태에서 열 달을 지내다 세상에 첫 울음을 터뜨린 그 자체로 누구나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명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생명은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 최충언, 외과의사, 남부민의원 원장
마음의 승리이다. 이 책을 읽을 때 당신은 마음을 치유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것이다. 이 책은 사랑으로 가득 찬 보물 창고다.
- 잭 콘필드, <마음으로 가는 길>의 저자
※ 일반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책을 펼치면...
☞ 젊은 시절 나는 의사로서 사는 삶이 드라마와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각본과 연출이 있고 나는 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연기가 서투르면 감독은 즉시 컷! 하고 소리를 지른다. 철저하게 준비된 연기자에게만 역할이 배정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평범한 삶을 뛰어넘는 재능과 탁월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봉사나 타인을 섬기는 일에서 어떤 재능이나 탁월한 능력 같은 것은 아주 사소한 부분임을 알게 되었다. 봉사나 섬김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 속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어떤 지식이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 존재로서 봉사하고 섬길 수 있다. 때로 우리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봉사하고 섬기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삶을 축복하고 있다. 가장 단순하고 일상적인 행동이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더 전화 한 통, 가벼운 포옹,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것, 따스한 웃음과 눈인사 등이 그네들에게 활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축복의 말을 건네고 축복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의 작은 행동으로 커다란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 떨어진 귀고리를 찾아주거나 장갑을 집어주는 행동들이 타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되찾아 줄 수도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축복할 때 물을 먹은 새싹이 자라듯 우리의 삶 역시 성장한다. 삶을 축복할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가 병들거나 늙는다고 해서 축복의 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 때 축복해줄 수 있는 힘이 더 생긴다. 삶의 연륜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힘들고 긴 여정을 걸어왔다. 그들의 체험이 사람들에게 희망이 깃든 축복을 준다. 시간이 흐르면 유리 역시 치열한 삶의 경쟁에서 벗어나 그 너머 어딘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곳이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속하는 장소다.
축복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축복은 만남의 순간이다. 함께한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우친다.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는 아무런 가식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될 수 있다. 이 순간 상대방에 대한 불신에서 벗어나 진정한 안식을 얻는다. 우리는 축복을 통해 나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깊이 성찰할 수 있다.
삶을 축복하고 서로를 섬기는 사람들은 서로가 싶은 유대 속에서 힘을 얻는다. 권태와 공허뿐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외로움을 극복하고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어 준다. 우리가 서로 삶을 축복해 줄 때 더욱더 친밀해지고 그 속에서 잊어버렸던 나 자신을 찾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축복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중요하고 자신에게 축복받을 만한 어떤 것이 있음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때 내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 읽어봅시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 안셀름 그륀 신부 지음/ 이미옥 옮김/ 위즈덤하우스/ 2007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바람은 어떤 종교와 믿음을 가지고 있든 혹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아마도 여러분은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정답을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재산을 모으고 커다란 명예를 얻는다 해도, 언제나 더 많은 재산과 더 큰 명예에 대한 욕심이 우리 내면에 불을 지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삶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알게 될 때 행복은 이미 우리 곁에 살포시 다가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흔히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독일 베네딕토 수도회 원장으로서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진 저술이가이자 신학자입니다. 그리고 쉽고 친근한 필체로 독자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세상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성실한 묵상을 통해 깊이 있는 가르침을 전하는 영성가이기도 합니다.
이런 신부님의 명상집을 위즈덤하우스에서 번역해서 출간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참진리란 그 원천이 하나이기에, 천주교 신자가 아닌 많은 분들도 그륀 신부님같이 좋은 영성 지도자의 말씀을 접하면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는 데 좋은 길잡이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조차 망각하고 숨 가쁘게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목표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그륀 신부님의 명상집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가 여러분의 마음 공부에 도움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끝으로 신부님의 말씀 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봅니다.
우리의 마음이란 하느님이 머무는 장소이다. 마음은 하늘과 땅이 서로 맞닿는 곳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들어올 수 있는 문도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 준다. 두 개의 마음이 만날 때, 하늘은 그들 위에 열려 있다. 이때 천사가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가 올라간다.
여러분 모두가 보다 행복해지기를 기원합니다!
- 정진석 추기경
♣ 책을 펼치면...
☞ 마음을 다해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가 처한 어려움을 같이 느끼면, 그의 어려움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된다. 당신에게는 다른 사람의 근심을 축복으로 탈바꿈시키는 힘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로 가라. 그리고 그들을 받아들여라. 도와줄 수 있다면 기꺼이 도와라. 관심과 애정을 선물하라. 잘산다는 것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스스로에게조차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 행복은 따뜻한 도움의 손길에서 비롯되며, 다시 빛과 함께 자신에게로 되돌아간다.
어쩌면 당신은 어떤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날마다 당신 앞에 나타나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하느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신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사람, 그리고 당신의 미소를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으로.
어딘지 모르게 영적인 빛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천사이다. 적당한 시점에 우리 삶에 나타나, 축복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암시해주고, 길을 잃은 우리를 안내해주는 천사. 천사와 눈이 마주칠 때, 우리는 순수한 기쁨을 느낄 것이다. 천사를 볼 수 없다면 자신의 욕구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미소를 통해 가까워질 수 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는 금세 친밀함을 느끼게 해주고 조화를 만들어낸다. 미소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는 표현이다. 상대가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당신은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당신은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용서를 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마련이니까. 용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정화시켜주며 상처받고 또 상처 입히면서도 다시금 관계를 회복하고 이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당신이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그 사람에게 묶여 있게 된다. 그러나 용서를 하는 순간,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대할 때 연민의 정을 가져라. 다른 사람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당신을 대하면, 그의 호의를 기분 좋게 경험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서로 자비를 주고받게 된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라.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온화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은, 그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좌절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성취한 것을 인정하라. 사람은 누구나 진심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칭찬을 받으면 기쁨이 솟아나고 가슴 속에 꽃이 피어난다. 칭찬은 그야말로 하나의 예술이다.
♣ 읽어봅시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
- 최인호 지음/ 샘터출판사/ 2005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993년부터 1995년까지 3년간 가톨릭주보에 일주일마다 연재하였던 ‘말씀의 이삭’란에 실린 내용들이다. 1987년 6월 가톨릭에 귀의하여 ‘베드로’ 라는 세례명으로 거듭 태어난 내가 그 무렵 10년도 안되는 얕은 신앙인으로 성서의 말씀을 묵상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나는 줄곧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목국의 집필의뢰가 너무 강렬해서 몇 번이나 고사를 하였지만 마침내 ‘순명’을 내세운 권유에는 어쩔 수 없이 매주 그날의 성서말씀을 주제로 한 ‘말씀의 이삭’을 집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연재하는 3년 동안 내 머릿속에는 장 프랑소와 밀레가 그린 <이삭 줍는 여인들>의 명화장면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만종>과 더불어 밀레의 대표작인 <이삭 줍는 여인들>은 추수가 끝난 황금빛 들판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나이든 세 농촌 여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노르망디의 가난한 시골농가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가난한 생활을 했던 밀레가 그린, 과장하거나 감상도 섞지 않고 일하는 가난한 농민의 모습을 종교적으로 심화시킨 이 작품처럼 추수한 들판에 함부로 버려져있는 말씀의 이삭들을 주워 올려 그 작은 낟알 속에 숨어있는 영원의 양식들로 한 끼의 식탁을 차리는 그런 소박한 마음에서 출발하였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주님께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뿐이었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만큼 큰 나무가 된다.”
주님의 말씀처럼 말씀의 이삭들은 겨자씨들처럼 작았지만 그 작은 낟알 하나로도 수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성찬이 되는 기적을 느꼈으며 그래서 가장 행복했던 사라은 오히려 나 자신이었다. 보잘 것 없는 이 글들을 매주 열심히 읽어준 내 이웃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또한 언젠가는 주님의 발자취를 좇아 이스라엘로 떠나 그분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소망인 나에게 이 작은 묵상집이 주님을 향해 떠나는 그 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여전히 추악한 죄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는 나에게 항상 진리의 빛을 비추며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그분께 감히 이 작은 묵상집이 언젠가는 주님께 바칠 성전의 벽돌 한 장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
- 최인호
♣ 책을 펼치면...
☞ 솔직히 말해 보겠습니다, 주님.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전해 듣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의심하였던 토마처럼 나도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한술 더 떠서 부활하신 주님의 지문과 주민등록증까지 확인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셨다면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셨는지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하자 “내 손과 발을 만져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나에게는 있지 않으냐” 하시며 그래도 어리둥절해하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까지 잡수신 주님.
그러나 그렇게 생생히 부활하신 주님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어째서 하루 종일 함께 가면서도 끝내 알아보지 못하였는지요. 그뿐인가요. 전능하신 천주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하고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나는 덜컥덜컥 의심이 드나이다. 하느님께서 생겨나라 하는 말 한 마디에 정말 저 푸른 하늘과 땅이 생겨났는지. 저 솔로몬의 영광도 미치지 못할 아름다운 들꽃 하나도 정말 하느님이 직접 만드셨는지.
어째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명령하시고 삼위일체를 가르쳐주셨는지. 솔직히 말해서 믿어지지 않나이다.
초대 그리스도 교회의 위대한 사상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신비를 알고 싶어서 깊은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바닷가에 나갔다가 한 소년이 모래밭에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어린아이는 대답하였습니다.
“저 바닷물을 이 조개껍질로 모래밭에 모두 옮겨 담으려구요.”
어린아이의 대답을 통해서 인간의 머리로 하늘 나라의 신비를 해석하는 것은 마치 바닷물을 조개껍질로 퍼 담으려는 행동처럼 어리석은 것임을 깨닫고 그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나이다.”
주님. 나는 이 많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나도 불합리한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천지가 생겨나기 전부터 있어 왔던 주님. 유행가의 가사처럼 가까이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멀게만 느껴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나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 읽어봅시다!!!
『피에르 신부의 유언』
- 아베 피에르 신부 지음/ 이효숙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6
유언은 죽음에 대비해서 자신이 남겨놓고 가는 것들의 처리 문제를 주로 담는다. 즉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잘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피에르 신부의 이 ‘유언’은 그야말로 유언의 본래적 기능에 충실하다. 피에르 신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인데, 이 유언 속에는 바로 그 사랑이 담겨 있고, 그 사랑을 어떻게 써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상속인인 우리 모두는 그 사랑을 물려받아서 형제에게, 이웃에게,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피에르 신부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눈에 힘을 주며 분노한 얼굴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처 때문에 안타깝고 아프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compassion’을 느끼기 때문이다. ‘함께’를 의미하는 ‘com’과 ‘고난’을 의미하는 ‘passion’이 합쳐진 이 단어는 불한사전에서 해석해놓은 ‘연민’ 또는 ‘동정’이 주는 느낌과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인 것이다. 그럼에도 피에르 신부는 이 책에서 이 단어를 쓰는 것조차 조심스럽다고 했다. 혹시라도 우월의식이 담겨 있지나 않을까 해서이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독자들에게도 이 책 속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우리가 바로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문제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가 낳은 실업문제, 그로 인한 가족 해체와 노숙자 양산 등에 대한 사회문제들이 프랑스에서는 1980년대부터 서서히 확산되었는데, 우리에게는 IMF 사태 이후 강도 높게 급속도로 진행되어 바로 몇 년 전부터 그 문제들을 첨예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또한 이런 문제들은 세계화의 부정적 결과의 하나로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함께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공동의 과제가 되었다. 남을 돕는 일이 곧 나를 돕는 일이 된 것이다.
피에르 신부는 이러한 서로의 도움이 과거에 과시욕으로 행해지던 선행이나 자선의 차원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의 통찰력은 자기애적인 감상이나 기만적인 허위의식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구제방식은 그저 주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배부른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긍지에 찬 인간으로 우뚝 세워주는 것이 그의 사랑법이다. 이 책에 담긴 꾸밈없고 소박한 글들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이유에 관한 진실들이 깊은 사랑과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유쾌한 유머감각이 엿보이는 개인적인 이야기나 에피소드들은 그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쁨’의 샘물은 마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옮긴이의 말
※ 일반 서점이나 인터넷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책을 펼치면...
☞ 나는 장점과 단점, 열정과 이성을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을 뛰어넘어 마치 만화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진 특별한 상황들 가운데서 늘 도구로 쓰였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던 어린아이, 부르주아 출신의 파란만장했던 젊은 시절, 수도원 생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은둔해 살던 7년간, 질병, 전쟁, 저항운동을 하고 훈장을 받은 사제, 살인범을 집으로 맞은 사제 의원, 그리고 그와 함께 노숙자들을 위해 집을 짓기 시작한 사제.
내 인생이 이렇게 이끌어져 온 것은, 다만 피하지 않았을 뿐 내가 특별히 어떻게 한 것은 없다. 내 앞에 놓인 상황들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 상황들 앞에서 도망치거나, 아니면 분별없이 거기에 작은 손가락을 하나 갖다 대야 했는데, 일단 그러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선하신 하느님은 자신의 원칙대로 할 일을 하셨고, 나는 내 일을 받아들인 것이다. 때로는 잘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 반대이기도 했다. 기쁨과 더불어 한 적도 있고, 눈물과 더불어 한 적도 있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아침에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이해를 갈망하고 있으나 그들의 그 어마어마한 갈망에 비해 사람들이 적게, 너무 적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의무에서 벗어나 희망의 이름으로 그들의 요청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내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아낼 것이다. 실업으로 인해 고통 받고 불투명한 삶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나처럼 모욕적인 상처를 받지 않고 기쁨과 희망을 가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 생의 마지막 유언이자 바람이길 희망하면서.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이유와 방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았을 때, 비로소 삶의 기쁨과 희망은 새싹처럼 자라날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가장 고통 받는 자들을 먼저 보살피라고 말하고 싶다. 나눔은 자선이 아니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당신과 나의 마음이다. 고통 받는 자들 또한 그 고통이 지나가면 또 하나의 나눔을 주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작은 실천에서 비롯된다. 생각한 것을 말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기쁨과 희망은 저절로 우리의 것이 되고, 삶의 풍요로움 속에서 삶의 의미와 이유는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 읽어봅시다!!!
『천국의 열쇠』
- A.J. 크로닌 지음/ 이승우 옮김/ 바오로딸출판사/ 200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이제까지 폐쇄했던 문호를 활짝 열고, 보수적 선교방식을 복음 선포를 중심으로 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이것은 지나친 교조주의를 지양하고 보다 더 인간의 심성에 호소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의 정신을 부각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모든 여건은, 곧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지 않으면 안 될 교회 내부의 사상적 동향은 벌써 1세기 전부터 대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역대의 교황은 교회의 무사주의를 표방하고, 종교개혁에 대한 방어책으로 호교론을 중심으로 한 선교방식을 사용해 왔다. 가톨릭교회는 약 4백 년 동안 이러한 태도를 고집해 옴으로써 교회 자체가 지닌 더할 수 없이 고귀한 진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전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타종교와의 대화의 기회마저 상실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그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천국의 열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20년 앞선 1941년에 출판된 것으로서 벌써 그러한 교회의 모습을 예언한 것이다.
책의 내용은 가톨릭교회의 한 신부를 중심으로 한 것이지만, 그 소재나 줄거리에 있어서는 비신자라 할지라도 숨도 돌릴 틈이 없을 정도로 흥미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간다. 누구든 이 책을 한번 손에 들면, 다 읽을 때까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
크로닌이 이 소설을 쓸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처참한 참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인류 상잔의 전쟁을 어떻게 해서든 막을 수 없을까 생각하면서, 인간과 세계의 참다운 이상상을 이 책에서 추구해 본 것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온 인류가 한 형제라는 전제하에서만 이룩될 수 있다. 한 형제가 되기 위해서는 한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곧 온 인류는 한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형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사상, 종파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대립하거나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인종이나 국가의 차이 없이, 인류는 형제임을 깨달을 때 참 사랑과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점을 재미있는 줄거리의 전개와 함께 역설하고 있다.
주인공 치셤 신부의 회고담으로 시작된 이 책은,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비롯해서 인간이 요구하는 참다운 신앙이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고향에서의 신학생 시절부터 그가 지닌 성실성과 인간 양심의 핵심에서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고 독실하게 자기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얄팍한 세상은 그의 성실성에 오해와 냉대를 보내기까지 한다. 동급생인 안셀모 밀리는 치셤과 정반대로, 학교에서 반장 노릇을 하고 신부들의 신임을 독차지하며 요령 있게 살아간다. 그는 나중엔 주교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치셤 신부는 그의 생활환경에서 얻은 개신교와 융화된 사상 때문에 본국에 있지 못하고, 중국으로 선교사가 되어 떠난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가서도 바로 그곳에 높은 도덕률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고 공자의 가르침을 흡수해서, 자기 안에 독자적인 참 신앙을 확립시킨다. 주인공은 바로 여기에서 타종교와 그리스도교,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경화되고 대립된 대치상태를 극복해 간다. 그리하여 그는 이 대립에서 오는 서먹한 인간관계를 융화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신앙의 기쁨을 되찾아 주면서 깊은 감동과 용기를 갖게 해준다.
그리스도교 교파간의 알력이 신자들에게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는 주인공 치셤 신부를 통해 종파 간에 서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를 해소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류의 이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자의 도교 사상에서 공자의 유교 사상까지도 그리스도교 진리와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하려고 시도한다. 곧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온 인류가 한 형제라는 것을 주인공이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 치셤 신부가 그러한 성실하고도 충성된 하느님의 사제로서의 길을 성실하게 걸었음에도 교회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 멸시당하고, 심하게는 이단시까지 됨으로써 외면상으로는(혹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실패의 연속인 생애를 걷는다. 하지만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길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교의 헌장 16항)의 것이며,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가 비록 비신자이건, 자유사상가이건, 나아가서는 무신론자이건, 반드시 천국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이다.
- 옮긴이의 말
※ 성바오로 서원 및 바오로딸 서원 (051-465-2173) 및 인터넷 바오로딸 서원 www.pauline.or.kr 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읽어봅시다!!!
『인 생 피 정』
- 이제민 신부 지음/ 생활성서사/ 1997
현대인은 바쁘다. 일어나기가 무섭게 바쁜 하루를 구상해야 한다. 양치질을 하면서, 밥을 먹으면서, 집을 나서면서, 일을 하면서, 친구를 만나면서 다음의 일을 구상해야 한다. 바빠서 도저히 현재의 시간을 살 수 없을 정도이다.
그토록 바삐 새벽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몸과 마음을 움직이건만 삶이 풍요롭지 않고 여유가 없어 보이는 것은 왜일까? 바쁜 것은 삶을 즐기고 여유를 찾기 위해서 아닌가? 그런데 모두가 바쁘게 삶을 꾸려나가는 동안 사회는 더욱 삭막해지고 인간미도 없어지는 듯하다. 바쁜 가운데 찾는 것은 무엇일까? 바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바빠야 하나?
바쁨과 여유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인생은 풍요로워지고, 우리가 인생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이고, 남이 보이고, 인간이 보이고, 사람 사는 집이 보이고, 사람 사는 세상이 보일 것이다. 산이 보이고, 자연이 보이고, 우주가 보이고, 그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 보일 것이다. 생명의 하느님께서 흥얼흥얼 노래하며 속삭이며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고 별들과 속삭일 수 있고, 어둡고 무서운 밤과도 달콤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창조(creation)하고, 재창조(recreation)하며 삼라만상과 함께 어우러져 참으로 신나게 삶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피정은 우리를 이런 삶에로 인도한다. 무미건조한 듯한 우리의 일상으로, 생명이 없는 듯한 사막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생명의 원천에서 목을 축이게 하고, 바쁜 가운데 우리를 잃지 않고 우리를 쉬게 하며, 모든 것의 의미를 찾아준다. 그리고 자유를 찾아준다. 쉼과 여유를 즐기는 삶을 위해 우리는 피정을 해야 한다. 인생은 피정이다.
- 책머리에
※ 생활성서사(02-945-5987) 인터넷 www.biblelife.co.kr 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책을 펼치면...
☞ 쉼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쉼은 일을 마친 후에 피곤한 몸을 눕히는 휴식만이 아니다. 다음 일을 준비하고 힘을 비축하기 위한 여백만일 수도 없다. 또 한적한 호텔방에 모여 앉아 고스톱 치는 유한 엘리트의 쉼도 아니다. 정말 잘 쉬기 위해선 온갖 잡다한 생각을 다 휴식시키고 쉼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쉼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창조적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쉼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쉼 자체, 즉 안식이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다.
한동안 많은 사람들은 ‘쉼’을 ‘열심’의 반대말 정도로만 생각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지금도 쉼에 대한 많은 현대인들의 생각은 소극적이다. 현대인은 쉬지 않고 열심히 뛰는 것만을 성공의 비결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쉰다는 것은 게으르고 나태한 행위로 비칠 수 있다. 쉼을 단순히 ‘열심’의 반대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공 위주의 삶에 쫓기면서 무의식중에 형성된 느낌일 것이다.
현대인에게 쉰다는 것은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이고,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것이다. 쉰다는 것은 경쟁에서 지는 것이고, 경쟁에서 지는 것은 인생의 패배이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뛰고 기계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밥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항상 그 다음 일을 생각하며 긴장한다. 그렇게 쫓기기에 쉬는 것은 아까운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자다가도 일어나서 무엇인가를 한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현대인은 도대체가 시간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증발한 시간, 그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정말 시간이 없어서 밥을 못 먹고, 시간이 없어서 잠을 못 잤는가? 밥을 먹으면서 밥 먹고 난 후의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서도 잠자고 난 후의 일을 고민하고, 친구를 만나서도 그 후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현대인이 쉬지 못하는 이유로는 바쁘다는 구실 외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이기적인 사고도 한몫을 한다. 자기가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되는 것처럼, 자기가 없으면 학교가, 본당이, 사회가, 나라가 안 될 것처럼 사사건건 끼어들어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간섭하는 일에 묶여 자기를 가만두지 못한다. 그러면서 입버릇처럼 늘상 ‘쉬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 말 이면에는 쉬지 않고 일하는 자기를 과시하고픈 욕망이 깔려 있다.
쉬고 싶다는 말은 지쳤다는 말이지만, 막상 쉴 수 있는 기회를 주면 혹시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고, 능력을 과소평가 받는 것이 아닌가 섭섭해 한다. 쉬는 것을 말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현대인은 계속 바쁘다. 그는 자기가 자는 동안에도, 심하게 말해서 죽은 후에도 세상일은 계속 진행되고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진작 일은 자기가 쉴 적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현대인은 모른다. 이 쉼을 우리는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의 쉼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창세 2,2-3)
세상이 움직이는 것은 쉴 줄 몰랐던 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잘 쉴 줄 아셨던 안식일의 주인인 하느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 잎이 무성해지고, 가을에 결실을 보며, 겨울에 앙상해졌다가, 다시 새봄이 오면 물이 오르고 움트는 것, 이 같은 일들이 하느님이 쉬시는 가운데 진행된다. 만일 하느님께서 사사건건 간섭하시며 늦겨울에 피어나는 개나리를 일찍 핀다고 벌주시고, 초봄에 눈이 내린다고 탓하신다면 창조의 아름다움이나 신비스런 경이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 읽어봅시다!!!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나?』
- 더글러스 J. 브라우어 지음/ 오영민 옮김/ 성바오로/ 2007
내가 그동안 귀 기울여 들은 내용을 돌아보니, 사람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으뜸 주제는 분명 소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어떤 주제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소명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그 말보다 더 친근한 형태인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말조차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자신들의 삶이 반드시 뭔가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끼는 듯하다. 즉, 자신의 삶에는 목적과 의미가 있어야 마땅하다는 태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또는 그와 아주 유사한) 질문을 한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실제로 내게서 어떤 답을 얻고자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물론 그들은 내가 어떤 제안을 하게 되면 귀담아듣는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들이 내게서 의도하는 바를 얻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들 자신의 존재론적 갈등을 말로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들의 질문 내용이 분명하도록 이끌어 주는 데 쓴다. 그들이 질문 내용에 대해 나와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를 더 잘 이해하고 다른 견해를 알기 위해서이거나 문제를 이해하고 있는 누군가를 찾기 위한 방편이다.
내 체험으로 볼 때, 사람들은 거의 연령과 인생의 시기에 관계없이 그 같은 물음을 던진다. 청소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인들도 그렇고 중장년층의 사람들도 거의 다 마찬가지다. 사실 나는 그런 질문은 주로 20대들로부터 듣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들은 다양한 인생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취사선택해야 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은퇴한 사람에게서 “하느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실까요?”와 같은 질문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처음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나의 주의력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그때까지는 줄곧, 은퇴하면 더 이상 소명에 관한 물음들은 들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잘못됐던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소명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소명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 있을 수 있는 길이다.
그러기에 이 책은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구도자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일종의 안내서 같은 것이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지향한다. 즉, 우리가 까다로운 물음들, 예리한 물음들, 삶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물음들을 던지도록 도와주고자 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소명은 우리가 우연히 하고 있는 일, 생계를 꾸려 가는 수단으로서의 일 이상의 것이다. 소명에는 삶 전체가 포함된다. 존재하는 우리의 모든 것,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 우리가 되고자 갈망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소명은 삶의 길이다. 아니, 삶의 여정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듯싶다. 나는 우리가 부르심, 곧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 때 가장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명의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잘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소명의 문제는 복잡하고 도전적이며 우리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도록 강하게 요구하고, 또한 우리 자신 너머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즉, 우리 삶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붇고 싶다. 여러분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러분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책을 펼치면...
☞ 우리가 삶에서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계속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역할 때문에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고방식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노동 자체 때문이 아니라 노동이 내는 효과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결정들은 보잘것없고 겉보기에는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중요한 것이다. 그 결정들에는 쌓여 가는 효과들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의 기여가 그리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합쳐져 하나를 이룬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 즉, 금요일 오후 늦게 하는 병원 방문, 갈등하는 직원에게 해주는 한마디 격려, 잇따른 위원회 모임에 앞서 바치는 기도 등의 모든 나의 행위들을 하나로 합치면 상당한 양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나의 삶은 장기간에 걸쳐 효과를 낸다. 그 효과를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백하건대, 허구한 날 모르기 일쑤다). 나는 나 자신이 어떤 경이적인 중요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일한다.
2004년에 나는 13년 동안 봉사했던 일리노이의 휘턴에 있는 교회 신자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 작별은 거의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복받치는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우리는 풍요로운 사목의 한 시기를 함께 누렸던 것이다.
작별 인사를 건네는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서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물론 나의 설교에 감사했고 나의 가르침이나 이따금 병원에 방문한 것에 대해서도 고마워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은 이를 테면, 교회 문에서 주고받은 작은 것들, 봉사 중에 틈틈이 나눈 대화들, 복도에서 나눈 격려의 포옹 같은 아주 소소한 일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처음 교회에 나온 다음 내가 그의 이름을 기억해 준 것을 잊지 못해 했다. 또 어떤 젊은이는 내가 직접 그에게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던 일, 그리고 그에 대한 답례로 그가 좋아하는 책을 내게 권해 보라고 했던 일들을 속속들이 상기시켜 주었다.
이번 기회에 나는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아주 짧은 시간에 주고받은 것들이 엄청난 행복의 잠재력, 곧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하느님께서 뜻하신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크나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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