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이 명 순
가을이 익어 가는 10월 어느 날, 강원도 영월로 여행을 떠났다. 막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영동고속도로를 달렸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반듯한 고속도로를 벗어나 구불구불한 시골길에 들어서니 미루나무 가로수들이 반갑게 맞는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눈을 더 부시게 한다. 붉은 단풍잎은 바람에 너울거리고 그 너머 청잣빛 하늘은 채색이라도 한 듯 곱디곱다. 첩첩 산이 색동옷으로 갈아입고 어서 오라 손짓한다. 감탄사가 절로 난다.
가을이 어느새 깊어 가고 있었다. 일행은 첫 번째 목적지인 난고 김삿갓의 묘와 문학관에 도착하였다. 산세가 수려한 곳에 묻힌 김삿갓의 묘는,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노루목은 주변 지형이 꼭 노루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소박하고 정감이 넘치는 지명, 노루목의 궁금증이 풀렸다.
난고 김병연은 원래 전라도 동복(지금의 전라도 화순군)에서 세상을 떴지만, 그의 둘째 아들 익균에 의해 발견되어 아들의 주거지였던 바로 그 골짜기에 묻혔다. 한편 그의 묘소는 1982년 영월의 한 열정적인 향토사학자의 노력 끝에 발견되었다.
난고는 영월의 백일장에서 조부를 욕되게 하는 시를 썼다는 자책감으로 머리에 허름한 삿갓을 쓰고 평생 방랑 생활을 한 시인이다. 어느 학자는 출세가 보장된 조선시대 양반가문 출신인 난고선생이 “조부의 문제로 폐족 당하는 운명에 처하면서, 시를 낳고 방랑을 낳았으며, 이는 시를 쓴 것이 아니고 시 속에서 시와 함께 시를 위해 가족과 욕심을 버리고, 마침내 자신도 버린 시인”이라고 했다. 난고의 시를 읽으면서 조선 전국을 떠돌며 당시 양반 귀족들의 부패와 죄악상을 풍자한 200여 년 전의 그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유적지 안에 흐르는‘곡동천’은 물이 많지 않았으나, 여름철에는 유리알처럼 맑고 풍부한 수량이 기암괴석 사이로 흘러 넘쳤을 거라는 상상을 펴게 했다. 그리고 묘 주변에는 산수유나무들이 파수꾼처럼 서 있다. 붉은 열매는 루비 보석과 흡사하다. 노란 잎 사이로 산수유 열매가 내 손길을 유혹한다. 호기심을 뿌리치지 못하고 한 알 따서 입에 넣고 깨물었다. 아직은 시큼하고 떫은 맛이 난다.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욕심을 떨치지 못한 나는, 산수유 열매 맛에서 설익은 자신을 발견한다. 잠시 상념에 젖었다. 무덤가 넓은 잔디밭에 앉아 산 아래 먼 곳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을 평온하게 해 주는 신비감에 빠져든다. 이처럼 산자수려한 풍광 속에 청운의 푸른 꿈을 접고 해학과 재치와 풍류로 한 세상을 살다갔다는 천재시인 김삿갓의 체취를 아쉬워하며, 두 번째 목적지인 한국지형도를 닮은 선암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선암마을은 서강 지류인 평창강 푸른 물줄기가 휘돌며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이다. 인터넷 영상으로 보았을 때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그곳은 마치 인공위성에서 찍은 듯 한반도와 비슷하다.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초월한 자연의 창조물이다. 이 마을은 전원적인 전설속의 마을처럼 고요하다. 선암마을 주변에서 제주도와 독도를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신선한 공기와 자연풍광에 찌든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쉽지만 자리를 떠나 이른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주천마을로 향했다.
한우고기를 저렴한 값으로 맛보기 위해 전국 관광객이 모여든다는 주천 장터. 조그마한 시골마을에 사람들이 북적거려 처음엔 의아스러웠다. 그곳은 면소재지로 매일 사람들이 들끓다시피 하는 곳이다. 그것도 인근 사람들이 아니라 전국에서 몰려온 것 같다. 미식가들이 다 모였나보다.
시장 입구부터 쇠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장터를 빙 둘러 자리 잡고 있는 가게는 대부분 ‘다하누촌’이란 간판을 내건 상점들이다. ‘다하누촌’이란 ‘한우고기만을 파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옆에서 누군가 귀띔을 해주었다. 식당들은 고기를 구워 먹는 손님들로 빈자리가 없을 만큼 문전성시다. 고기를 사기 위해 주차장을 찾았으나 마땅히 차를 댈 곳이 없었다. 마침 찐빵가게 앞에 빈자리가 있기에 주차를 시켰다. 그때, 주인아주머니가 나오더니 “가게가 차에 가려 영업에 방해가 된다.”며 차를 빼달라고 했다. 잠시만 주차하겠다고 부탁하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손님들이 차만 댈 뿐, 빵을 먹으면 쇠고기가 맛이 없을까봐 안사고, 쇠고기를 먹고 나면 배가 불러서 빵을 안 산다.”며 암튼 이래저래 장사가 안 되어 마음이 고달파 죽겠다며 하소연을 한다. 그녀는 눈길을 돌려 맞은편 한우 가게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정말 그랬다. 빵을 사자니 아주머니 말처럼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도저히 그냥 나올 수 없어 찐빵을 사서 들고 나왔다. 아주머니는 고맙다며 미안스러운지 겸연쩍게 웃는다. 덕분에 주차는 마음 편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학창시절 친정어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 되었다.
부모님은 고향에서 예식장을 운영하였다. 부대시설로 식당, 미용실, 사진관도 겸했다. 예식업이란 주로 겨울에 성행을 하는 까닭에 외지에서 공부하던 우리 남매들은 겨울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일을 도와야했다. 직원들도 있었지만 일손이 부족해 식장 청소며 식당일을 거들 수밖에 없었다. 예식이 많은 날은 하객손님의 비빔밥 위에 얹을 700여 개가 넘는 달걀프라이를 늦은 밤까지 지졌다. 연신 하품을 하며 내리누르는 눈꺼풀과 싸워야 했다. 겨울이면 일이 많아서 몸이 고달프고, 여름이면 손님이 적어 마음이 고달프다고 했던 어머니의 한숨 섞인 푸념이 생각난다. 생각하건데 만약에 이 장터에 ‘다하누촌’이 성시를 이루지 못했다면 빵은 더 팔리지 않았을 것 같다. 욕심은 누구나 한정이 없나보다.
쇠고기를 구입한 후 구워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 점심 때 먹은 음식이 다 소화가 안 된 때문인지 고기의 깊은 맛은 기대만큼 덜했다. 어느 부위는 질기고 맛이 없었다. 평소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입맛 때문일지도 모른다. 허나 별식이라 생각하고 부위별로 몇 점을 먹었다. 이다음에 또 오게 되면 허기진 배로 주천마을을 찾아야겠다.
여행이란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지루한 삶에 활력소를 불어 넣는 조금은 긴장된 가슴 설레는 일이다. 일정에 잡혀 있던 ‘섶다리 걷기’는 다음 기회로 남겨 둔 채,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귀로에 올랐다. 차창 밖 넓은 들녘에는 아직 추수하지 않은 콩대가 나목처럼 서 있다. 김삿갓을 통하여 욕심 버리기를, 산수유의 설익은 맛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그리고 빵가게 주인의 성급함을 읽는 의미 있는 하루였다. 머릿속의 잡념들이 잠시나마 씻겨가는 듯했다.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작은 소리로 흥얼거렸더니 길가 언덕 위에 핀 억새풀의 춤사위가 만추를 노래한다. 잘 가라는 듯이.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당시엔 제발 손님들이 북적대는 삶에서 벗어나, 좀 조용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방학이 끝나면 부모님의 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마나 좋아라했던가. 생각하면 참으로 철부지였다. 어머니의 팔· 다리 관절염과 요통은 그때 고된 삶의 증표인 듯싶어 마음이 짠하다.
전망대에 올라서서 디카를 좌우로 돌려가며 사진을 찍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자 향 (이 명순)
간혹 지인들로부터 고향이 어디냐고 질문을 받으면 얼른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출생지와 성장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구태여 대답을 하자면 “태어난 곳은 소도시 전북 정읍이요, 성장한 곳은 지형이 높아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경북 영양이다.”라고 한다.
고향의 사전적 뜻은, 먼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다음으로 ‘조상(祖上) 때부터 대대(代代)로 살아 온 곳’을 말한다. 이런 의미로 보면 나의 고향은 출생지다. 태어나서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생관이 정립되는 청소년 시절을 보낸 성장지는 고향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서 제2의 고향이라는 말이 나왔나 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들은 짓궂게 웃으며 대구 모 산부인과라고 한다. 딸도 오빠의 익살에 맞장구치며 부산의 모 병원이라고 한다. 나처럼 애잔한 시골 정서와 끈끈한 혈연을 중요시하는 고향이, 뻔히 없는 줄 알면서도 질문을 해 본다. 나는 ‘차라리 엄마 뱃속이라고 해라’며 반박했다. 그랬더니 웃고 만다. 요즘은 거의 병원에서 태어나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더욱이 요즘세대는 핵가족인 까닭에 형제와 남매의 개념을 잘 모른다. 외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족 환경에서 고향의 의미는 해가 거듭할수록 옅어질 것이다. 점차적으로 고향집, 고향마을, 고향산천이란 말을 잃어버린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산부인과를 고향이라고 말하는 우리아이들도 고향은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아버지의 고향이 고향일 뿐이다.
남편은 금융회사에 근무했던 관계로 전출이 잦았다. 그래서 주민등록 등본을 떼어 주소지를 보면 앞면도 모자라 뒷면까지 빈칸이 없다. 그 바람에 아이들은 여러 곳의 학교로 옮겨 다녔다. 그럴 때마다 낯이 설어 외로워했고, 정든 친구들과 헤어짐이 서러워 통곡한 적도 있다. 지금도 가끔 얘기한다. 한 동네에서 유치원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 제일 부럽다고. 아마도 자기들끼리 영역 다툼이라도 한 모양이다. 아니면 고향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웃사촌 같은 친구들 틈에서 소외감을 느꼈거나. 이사를 자주 다닌 아들딸을 바라보며 태연한 척했으나, 내 마음은 더 아팠다.
성장지는 친구들과의 추억과 인생관이 결정된 곳이기에 당연한 고향이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들 모임에서 어떤 동기생이 ‘고향은 출생지를 말하며, 네 고향은 영양이 아니야.’라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동서(東西)간의 지역감정까지 보태질 때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된 듯하다. 하긴 태어난 지역이 다르므로 지리학적인 한 고향이 아니긴 아니다. 허나, 출생지보다 친구들과의 추억담이 많은 곳인데 한쪽귀로 듣고 흘러 보내야지 하면서도 이방인 같은 묘한 기분은 감춰지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면 천하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제 고향이나 제 집을 떠나 낯선 고장에 가면 자연 천대를 받기 쉬우며 고생이 심하고 외롭다는 뜻이다. 그렇다. 그 친구는 내게 뭔가 못마땅하여 텃새를 부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친구로 인하여 전학이 잦았던 아들과 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마음이 아프다.
‘고향‘ 이라는 말 속에는 다정함과 그리움, 그리고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이 묻어 있다.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으며 정이 있고 내가 형성된 곳이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봄날 새싹이 돋듯 추억도 돋는다. 석양이면 천방 둑에 앉아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흩어진 가족들이 보고파 눈시울을 적셨다. 또 눈보라 치는 겨울날에는 따뜻한 아랫목에 두 발을 묻고 오롯이 모여 앉아 할머니의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철없이 마냥 뛰어 놀던 뒷동산, 토담 밑에서 사금파리로 소꿉놀이 하던 친구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은 박 넝쿨이 오른 초가, 굽은 담벼락, 뒷마당의 감나무 등은 모두 사라지고 희미한 기억에서만 존재한다. 그래도 고향이 그리우면, 나는 눈을 감는다. 어린 날의 정취가 서린 고향을 보기 위해서다.
남편의 고향은 태어나서 자란 곳이고, 또한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출생에서 유년시절까지의 기억을 간직하고, 부모님까지 그곳에 지금도 계신다. 완벽한 생물학적 지리학적인 고향이다. 명절 때면 남편은 고향을 찾는다. 한나절은 족히 걸리는 곳이지만 짜증스러워하기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역력해 보인다. 그곳에는 정지용의 시 ‘향수’시구처럼, 집 앞에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얼룩백이 황소도 있다. 옅은 졸음에 겨워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늙으신 부모님도 계신다.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어머니와 돌아 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이다. 이런 고향을 가진 남편이 부럽다.
귀소본능이랄까. 남편은 나이가 들수록 고향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지 좀 더 나이가 들면 아예 내려가서 살자고 한다. 고향이 멀수록 향수의 그리움이 짙어진다더니 남편은 요즘 들어 잦은 고향타령이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하던데 남편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고향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사람의 마음속에서 소멸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유년시절을 반추하며 그리는 마음이 더 간절해지나 보다. 고향을 떠나본 자만이 고향이 있다고 한다. 어쩌면 고향이 두 곳인 나는 더 행복한지도 모른다. 두 곳 모두 똑같이 가장 소중하고 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