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내게는 이 계절에 쏟아져 나온 모든 시집을 제대로 헤아리고 살펴볼 능력이 없었다. 민족작가회의 회원들의 시집으로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일부러 서점에 나가 시집을 사들이기도 했지만 더러는 친소를 중하게 여겨 우편으로 보내준 시집을 택해 읽었다.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 못한 시집이 있다면 그것이 비록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하더라도 두로 미안하다는 말을 해둔다.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최근에 간행된 그런 대로 괜찮은(?) 시인들의 시집은 대부분 자연 혹은 생명에 천착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작가회의 회원들의 시집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나 민족, 민중은 차지하더라도 삶과 생활을 너무도 많이 잃어버려 어느새 우리 시가 또 다시 중용을 상실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998년 하반기(1월 16일) 합평회 이후 그 동안 내가 찾아 읽거나 확인한 작가회의 회원들이 간행한 시집은 황지우 [어느 흐린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천양희 {오래된 골목}(창작과비평사), 백무산 {길은 광야의 것이다}(창작과비평사), 강인한 시집 {황홀한 물살}(창작과비평사), 장대송, {옛날 녹천으로 갔다}(창작과비평사), 이문재 시집 {마음의 오지}(문학동네), 이영진 {아파트 사이로 수평선을 본다}(솔), 조재도 {그 나라}(세계사), 최승자 {연인들}(문학동네), 권경인 {변명은 슬프다}(창작과비평사}), 김기택 {사무원}(창작과비평사), 박흥식 {아흐레 민박집}(창작과비평사),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문학동네), 강영환 {눈물}(열린시), 조진태 {다시 새벽길}(모아드림), 곽재구 시집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이정록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어 살고 싶다}(문학과지성사) 등이었다.
위의 이들 시집 중에서 그 동안 내가 읽은 10여권의 시집에 대한 가벼운 독후감을 아래에 적었다. 간단한 인상을 기록한 것일 뿐이니 본격적인 서평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1.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는 언뜻 보기에 너무도 혼란스러운 세계를 담고 있다. 그러나 꼼꼼하게 읽어보면 알싸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이 시집이기도 하다.
이 시집 이전에 제대로 된 시집으로 그가 간행한 시집은 {게눈 속의 연꽃}이다. 그 외에도 1995년에 간행된 12편의 시를 싣고 있는 조각 시집 {게눈 속의 연꽃}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간 개작되어 대부분 이 시집에 재수록되어 있다.
이번 시집에서 황지우는 이른바 해체시의 선봉장이라는 그간의 면모를 거의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까지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지적이고 관념적인 시작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는 모더니스트이다.
하지만 그도 이 시집에서는 주관적 감정 자체를 객관화하는 작품들을 상당히 선보이고 잇다. 표제의 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聖 찰리 채플린} {비닐 봉지 속의 금붕어}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름하여 회한의 정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뭉텅이로 드러나 있는 시들도 적잖다는 것인데, 아마도 이는 그가 대학에서 자리를 잡기 이전의 작품들이지 않나 싶다. 그러나 그는 이들 시에 드러나 있는 회한의 정서 자체에 몰입하거나 그것을 탐닉하지는 않는다. [뼈아픈 후회]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저 그는 적당한 엄살을 즐길 뿐인데, 그러한 점이 그의 시인다운 면모일 것이다. 그 스스로도 시를 통해 말하고 있듯이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황지우는 주관 혹은 내면보다 객관 혹은 바깥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려는 의지를 보여준다.(물론 많은 경우 의지 자체일 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그의 이번 시집에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는 시적 화두는 '바깥'이다.
물론 이 때의 바깥은 다소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그가 그것을 내면이나 자아, 개인의 의식이나 무의식의 대립 개념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깥은 객체나 외면, 나아가 객관 세계 일반일 수도 있지만 더 나아가 공동체의 현실 전반일 수도 있다. 우선 그것은 이 시집의 冒頭에 실려 있는 [아직은 바깥은 있다]라는 작품에서 확인이 된다. 그가 여기서 "늙은 농부님"과 "묽은 논물"을 보고 "아직은 저기에 바깥은 있다"라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공동체의 현실 안에서 그것이 이루는 애환을 시적 제재로 삼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요컨대 그를 가리켜 공동체의 현실에 기반한 민중적 서정시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사실 외롭고 고독한, 머리가 너무 무거운, 언제나 새롭고 참신한 표현과 발상에 목말라 있는, 정직한 지식인 시인일 따름이다.
그의 시에서 '바깥'은 대부분 객체로서의 세계 일반을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집의 주요 화두로서 '바깥'이 내포하는 의미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셈이다. 안의 대립 개념으로서 밖, 그리고 그 중간의 세계, 이른바 간주객이라고도 할 수 있는 틈이며 경계의 세계에 대한 그의 천착을 우리가 익히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번 시집에서 안과 바깥 사이의 틈이며 경계의 세계는 또 하나의 화두로 서 막(膜)의 이미지로 구체화되어 있다. 그가 보기에는 그 막으로 하여 안과 바깥이 단절되어 있기도 하고,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틈과 경계로서 막은 사유의 대상으로 요즈음 들어 특히 각광을 받고 있는 몸이고, 육체이고, 바디일 수도 있다. (한자로 膜이 고기 肉 변을 쓰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이 항상 자아와 세계 사이에, 정신과 물질 사이에 존재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막이라는 중간을 갖는 주체와 객체는, 내용과 형식은, 내면과 외면은, 안과 밖은 그가 보기에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를 가리켜 참 중용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 자아와 세계가 갖는 이러한 관계를 황지우는 膜의 이미지를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로서의 이미지를 매개로 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숙명에 황지우는 이처럼 능숙하게 순응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황지우는 나와 다르다. 기껏 나는 주체와 객체가 이루는 이러한 관계를 뭍과 바다의 이미지를 이용하거나 좀더 직접적인 묘사를 통해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의 이번 시집에는 화사한 비유에서 비롯된 발랄한 이미지들이 여기저기서 흥청거리고 있다. 그것들과 더불어 과도하게(?) 개성적인, 그래서 다소 작위적으로 생각되는 묘사들도 돋보인다. 사실 황지우는 지적 허영심이 매우 강한 시인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감추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위장 기술은 끊임없이 고향의 언어, 곧 전라도 사투리를 끌어안고 들어가는 일이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철학적, 미학적 사유와 전라도 사투리를 접합시키고 있는 그의 작업은 달리 생각하면 얼마간 대견스럽기도 하다. 어찌 보면 그의 이러한 작업은 저 자신의 근본을 잃지 않기 위한, 나아가 모든 중심의 문화(정신)에 대한, 더러는 경상도 사투리에 대한 저항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저항의식의 산물이 아니라면 이미 병적인 저 끈질기고 도저한 촌놈 근성의 산물이라고 해도 좋다. 결국 그것도 지식의, 사유의, 제반 정신의 중심에 대한, 나아가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 일반에 대한 딴지 걸기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자신이 또 하나의 중심이 되어 있지만.
이 시집에서는 연극적 혹은 희극적 장치를 이용하거나 그것의 효과를 노리고 있는 시들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살진 소파에 대한 일기] [석고 두개골] [모래 지평이 있는 유리상자] [모래 지평이 사라지는 유리상자] 등의 작품이 그 예이다. 장르간의 해체와 통합, 그로 인한 새로운 미적 효과를 염두에 두고 있는 작품들이라고 할 것이다.
이 시집에서 정작 감동을 주는 시들은 시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는 가족간의 애증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太陽祭儀] [이 세상의 밥상] [안부1] 등의 시가 그것으로, 아버지, 어머니, 형님, 아우 등의 삶과 생활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들에서 애틋한 정서의 공유를 느끼는 것은 일종의 보편법칙이리라.
앞에서 예로 들은 작품 외의 것으로는 [여기서 더 머물고 가고 싶다] [유혹] [흑염소가 풀밭에서 운다] [가을 마을] [8월 16일] [거룩한 식사] [안부 1] [나무 숭배] [지하철역에 기대고 서 있는 석불] [노스텔지어] 등이었다.
2. 천양희 {오래된 골목}(창작과비평사)
천양희의 이 시집은 1998년 10월말에 간행되었고,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본 논의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천양희의 시집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을 해두는 것이 아래의 논의를 펼치는 데 다소 도움이 되겠기에 일부로 끄집어 몇 마디 덧붙이기로 한다.
시인 천양희, 이제 그녀는 확실히 저 자신만으로 충분히 시인 천양희가 되었다. 아마 그 스스로도 대견하리라.
헬레나의 {오래된 미래}로부터 발상을 했을 것이 분명한 그녀의 시집 {오래된 골목}(창작과비평사)을 읽었다. '오래된 미래'라니! 이 말처럼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우리 나라 시인들의 두뇌를 사로잡은 말도 없는 듯하다. 언뜻 떠오르는 시인들만 해도 천양희를 비롯해 이시영, 이문재, 나희덕 등의 시인이 있다. 이은봉도 일찍이 이로부터 발상한 시를 쓴 적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참으로 얄팍한 것이(유행에 민감한 것이) 우리 시인들의 정신 세계이기도 하다.
1994년에 낸 {마음의 수수밭}과 비하면 이 시집의 작품들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이 시집으로 보여주었던 신선함이 벌써 가셔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 천양희에게는 생태학적 상상력이 이미 하나의 지배담론이 되어 있다. 새로운 깨달음이 없이 반복되는 시적 발상은 언제나 작품의 분위기를 나른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물론 시인에게 안정된 기량과 지속적인 탐구의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천양희에게는 이러한 면이 장점일 수도 있겠다. 나로서는 [물에게 길을 묻다] [돌을 던지다] [나는 강변에 있다] [사람들] [보리밭을 지나다] [2월] [눈] [비오는 날] [소포리] 등의 시가 읽을만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정신은 육체의 나이에 비하면 아직 생생하다. 우리는 늙지 않는 그의 마음에서라도 무언가 배워야 한다.
3. 백무산 {길은 광야의 것이다}(창작과비평사)
{길은 광야의 것이다}는 백무산이 생태학적인 문제로 관심을 돌린 이후 두 번째로 상자한 시집이다. 그러한 시각으로 읽었기 때문일까, 내가 보기에는 이전의 시집 {인간의 시간}에 비해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떨어진다.
'길은 광야의 것이다' 라니! 도시의 거리나 골목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벌판이나 산야의 것이라는 뜻인가. 주지하다시피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현대는 광야의 시대가 아니라 밀실의 시대이다. 사실 그렇다. 지금의 우리는 방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만화방, 세탁방, 게임방, 노래방, 휴게방, 소주방, 피아노방, 전화방, 빨래방 등등등……. 이러한 방의 시대에 대해, 다시 말해 밀실의 시대에 대해 백무산이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가 추구하는 이러한 의지의 경우 '기술의 근대'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서 '해방의 근대'일 수도 있으리라.
백무산은 이번의 시집 {길은 광야의 것이다}에서도 불교적 생태학에 정신의 근거를 두고 있다. 알고 보면 불교적 생태학도 크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불교적 상태학이라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현주 목사 등의 글을 읽다보면 기독교적 생태학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최근에 들어 많은 시인들이 불교의 세계, 특히 선의 상상력으로 귀의하고 있다. 고형렬 강인한 등등의 시에서 그러한 면모가 확인된다. 종교로서의 불교가 갖는 마력은 십분 인정할 수 잇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통 리얼리스트에게서 보여지는 이러한 경향은 일종의 도피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피라고 비난을 해서 어쩌자는 말인가. 물론 특별히 어쩌자는 것은 아니리라. 이 말은 날 더러 하는 것이다. 시인으로서 이은봉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도피라도 하지 않고 어떻게 이 무미건조한 상실의 시대를, 이 지루한 하강의 나날들을 견디라는 말인가.
물질의 생산과 소비와 관련하여 생각하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 시인이다. 쓸데없이 주체하기도 어렵게 머리만 커다란 사람들이라니! 정신의 생산자로서 정통의 시인은 이제 그 역할과 의미가 현저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오늘날과 같은 의장과 패션의 시대에, 이른바 대중문화(표피문화)의 시대에 그것에 악착같이 저항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목소리가 힘을 발휘하기 어렵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처럼 즐거운 일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백무산의 이번 시집에서는 [풀씨 하나] [그 쬐그만 것이] [에밀레] [꺼구로 비추는 거울] [촛불 시위] [듯] [찔레꽃] [문] [그녀가 사는 곳] [사랑은 어디서] [물빛] [이사] [젖어서 갈 길을] [내려다 보는 산] [살아 있는 길] 등의 시가 좋게 읽혔다.
시집을 읽으면서 떠오른 잡념이 있다. 중이라도 되려나. 백무산은 아마 더 늦기 전에 출가를 결행하고 싶을는지도 모른다. 불가에서는 언제나 이러한 방법으로 인재를 충원해온 바 있다. 그도 이른바 젊은 피일 수 있다.
그런데 노동해방문학의 조정환은 어디로 갔나. 이데올로기 이전으로 돌아가 그도 입산(?)했나.
4. 강인한 시집 {황홀한 물살}(창작과비평사)
강인한 시집 {황홀한 물살}……, {참 맑은 물살}이라는 제목은 곽재구의 시집이었나.
그의 시집을 읽으며 우선 먼저 떠오른 생각이 있다. 거개의 시들의 경우 형상이 명료하지 않다는 것……. 내게는 그의 많은 시들이 추상적으로 다가왔다. 과도하게 내면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강인한 시인 역시 불교의 禪 맛에 깊이 취해 있다는 점이다. 제1부의 시들이 특히 그러했는데, 나로서는 그래도 이 부분의 시들이 좋았다.
부분적으로는 뛰어난 표현을 보여주는 구절이 많았다. 그러나 그 구절들이 더러는 나머지 구절들과 제대로 호응을 못하고 한 구석에 널브러져 있어 안타까웠다. 과감히 군더더기를 덜어내면 좋은 시가 될만한 것도 다수 눈에 띄었다.
어쨌거나 강인한은 자기 나름의 표현 방식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그러나 그것의 운용 방식은 교과서의 차원을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아 보였다. 그의 시들이 별다른 개성과 특색을 보여주지는 않는 것도 이로부터 연유하리라.
그런가 하면 그의 시의 정서적 아우라가 여전히 따뜻하고 안온해서 우리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모르기는 해도 시인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몇 편의 서정 위주의 단시는 수작이다.
시에 대한 시인이 인식이 자신의 시를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강인한의 시에 대한 인식은 다소 평범하다. 장르로서의 서정시 자체에 대한 사유도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시의 형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삶에 대한 문제의식도 새롭지 않고, 미의식도 새롭지 않다. 이러한 면에서의 새로움을 추구하기에는 그의 나이가 너무 많은 지도 모르겠다.
모든 단점은 장점을 포괄하기 마련이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단아한 형식, 안정된 형식들의 경우 편안하기는 하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시인 강인한은 고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그가 무언가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도 그 동안 자신이 이룩한 자신의 형식 속에 안주하고 싶은 세월을 살고 있으리라.
그의 이번 시집 중에서 좋은 작품(내게 좋게 보이는 작품) 위에 동그라미를 쳐본다. 하나, 둘, 셋……. [보랏빛 남쪽] [애가] [적막] [禪食 이후] [황홍하게] [산수유꽃 피기 전] [지붕 아래] [어떤 흐린 날] [부재] [안녕한 풍경] [歲寒圖] [별] [고정희 생각] [오월의 어머니] 등의 작품 위에 동그라미가 올라가 있다.
5. 이문재 시집 {마음의 오지}(문학동네)
이전에 간행된 이문재의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 줄 때}와 {산책 시편}은 솔직히 말해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미지, 기이하고 참신한 이미지의 사냥꾼이라도 되는 양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무질서를 늘어놓는 것은 일종의 치기로만 보였다.
이번 시집 {마음의 오지}도 앞부분의 작품들을 읽을 때는 대강 그만그만해 보였다. 이러한 부정적 인상은 뒷부분으로 넘어가면서 말끔히 가셔지기 시작했다. 마음보다 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봄밤 원효]는 어쩐지 요즈음의 무슨 유행을 보는 듯도 싶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몇 편의 시를 더 읽으면서 이내 그의 활기찬 행보를 눈치챌 수 있어 기분이 맑아졌다.
이문재의 이번 시집에는 김종철의 근본주의 생태학과 김지하의 동양적 생명사상, 더불어 오랜 전통의 노장적 자연관이 결합되어 표출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생생한 비유(직유)들이 돋보이고, 문명에 대한 비판적 깊이가 눈길을 끌기도 한다. 특히 [농업박물관] 연작 등의 시에 이르면 제법 심도 있는 발견과 깨침을 담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시집에 드러나 있는 이문재의 시정신을 요약하면 농업 지향의 생태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헬레나의 {오래된 미래}로부터 받은 영향은, 말미의 '시인이 쓰는 이야기'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만, 이 시집의 주요 발상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낙원상실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이문재의 이상주의는 자칫 비현실적인 유토피아 의식으로 이월되고 말 우려가 없지 않다. 미래에 대해 고뇌하는 자세는 좋지만 그 미래가 단지 과거 옮겨놓기로서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순진한, 그리하여 너무도 무너지기 쉬운, 어찌 보면 매우 안일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의 고뇌는, 비록 실천과는 유리된 몽상에 그치고 있을지라도, 매우 값진 것은 사실이다. 그 나름의 좀더 낳은 세상, 해방의 삶에 대한 열정에 나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도할 정도로 개인주의에 바탕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사실 그렇다. 그의 시세계는 이른바 '그 나름'이라는 한계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다.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생태학적 상상력은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의 상투적인(?) 禪에 기대고 있지 않아서 관심을 끌기도 한다. (상투적인 禪이 있을 수 있는가) 오늘날 불교의 禪 맛이 시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게 왜곡되고 있는가를 되물을 필요가 있다. 무엇이 이들 시인을 자꾸 불교의 禪의 세계로 불러들이는가.
이문재로서는 이 시집에 이르러 비로소 자기 세계를 갖기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얼마간은 자기 나름의 작의를 지닌, 조금은 새로운 시도를 담고 있는 것이 이 시집이라고 생각된다.
6. 이영진 {아파트 사이로 수평선을 본다}(솔)
나로서는 이영진 시집 {아파트 사이로 수평선을 본다}를 읽는 마음이 편치 않다. 아직도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의문을 잃지 않고 있다. 끝없는 질문이 그 내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 이 시집이다. 돌이켜 보면 질문을 상실했을 때 이 세상은 그저 관성일 수밖에 없다. 관성화된 갈등, 혹은 아무런 대책 없는, 그리하여 긴장이 상실된 고요, 마침내 무갈등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시와, 그의 시의 불안을 낳고 있다. 불안, 초조를 낳는 고요의 세계, 적막의 세계도 이영진에게는 하나의 시적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식하는 것은 그에게도 하나의 불행이다. 왜 그는 고요를 고요로 살지 못하는가. 고요를 고요로 살 수 있을 때, 아니 불안과 초조, 나아가 온갖 시끄러움과 소란까지도 고요로 살 수 있을 때 인간의 자아는 참되게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생각을 생각 이상의 것으로 만들기는, 그리하여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에게나 이러한 일이 계속될 때 불가불 획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회한의 정서이다. 그가 이번 시집에서 독백적 어조를 통해 이루는 엷고 담백한 회한의 정서를 토대로 하여 자기 반성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리라.
이영진의 첫 시집은 {6·25 참외씨}이다. 이 시집의 그 격렬했던 감정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 그리하여 저녁 연기처럼 산언덕을 낮게 내려와 깔리는 이번 시집 {아파트 사이로 수평선을 본다}의 기본 정서가 이루는 배후에는 무엇이 자리해 있나. 끊임없이 부랑할 수밖에 없는 그의 슬픈 중년이 자리해 있으리라. 세기말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오늘까지도 뿌리뽑힌 채 하염없이 떠돌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엄청난 후기 근대적 생존의 끈질김이라니!
어쨌거나 이번 시집에서 그의 시들은 나날의 현실로부터 얼마간 비켜서 있다. 불교적 禪 맛도 없지 않아 이는 더욱 선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초월을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암자를 포착하고 있는 시들……. 청소년기의 한때 그는 암자들의 주변에 자신의 젊음을 방황이라는 이름으로 퍼부어 대기도 한 바 있다. 이들 시가 돋보이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속도'를 매개로 한 자본주의의 삶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번 시집에도 여전하다. 그러나 휘청휘청 돌아가는 발길로 멈칫멈칫 걷어차는 것으로는 오늘의 자본주의가 아프지 않다. 비명소리 한 마디 들리지 않는다. 설령 비명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어쩔 것인가, 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이영진의 이번 시집에서는 [죽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파트 사이로 수평선을 본다] [群集] [비오는 날들의 神들은] [동산방 화랑·1] [界火島를 보았다·1] [界火島를 보았다·3] [開岩寺·2] [잡담] [가객] [봉원동 山번지의 봄·1] [봉원동 山번지·2] [봉원동 山번지의 봄·3] [上岩洞] [내 차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산·1] [산·2] [숙취] [도솔암] [참당암] [지나간 기억은 내 모든 선택에 개입한다] 등의 시가 좋았다.
7. 조재도 {그 나라}(세계사)
{삶의 문학} 동인들 중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은 조재도 시인이다. 그가 지난 1월 다섯번째 시집을 냈다. 그의 이번 시집 {그 나라}(세계사)는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특별히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기획은 별로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너무도 의도가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의 {그 나라]는 무엇보다 백석 風이 심한 시집이다. 그리고 더러는 박용래 風도 섞여 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백석과 박용래는 대단한, 일류의…… 어쨌든 뛰어난 시인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결이 순하고 부드러운 정서를 취하고 있는 조재도의 이번 작업은 괜스레 뻔한 관념을 집어넣는 등 어렵게 제작한 시집들에 비하면 훨씬 살갑게 다가오는 시집이다. 그가 백석과 박용래로부터 배우고 있는 것은 나와 비슷하다. 하지만 조재도는 이들 시인에게 아직도 갇혀 있다. 기법도 응용이 별로 없고, 시정신도 별다른 진전이 없다. 시어며 시행도 그대로 복사하고 있는 것이 적잖다. 그것이 이 시집이 주는 안타까움이다.
내가 그들로부터 배우고자 했던 것은 시어를 다루는 방법, 즉 언어(어휘)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의 행마법이다. 그것을 가리켜 단순하게 표현기법이라고 해도 좋지만 물론 말 그대로의 표현기법은 아니다.
그러면 조재도는? 그에게는 이번 시집이 하나의 과정일 수도 있다. 이동순의 어떤 시집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쨌거나 시적 대상과 시정신까지 복사해서는 안 된다. 상상력도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의 세계만 배우려고 하면 단순한 모사에 그칠 염려가 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이 시집은 우리 모두에게 반성을 촉구하게 한다.
한 시인이 어휘에 집착한다는 것은 그가 시를 부리는 데 있어 아직도 초보라는 것을 뜻한다. 그래도 조재도가 이 시집에서 토속의 세계, 민속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마음은 정겹다. 더러는 그만의 독특한 언어들― 의성어 의태어들도 있어 싱싱하다. 백석이나 박용래의 냄새를 피우지 않고 그만의 경험에 기초한 고향의 세계를 그릴 수는 없을까.
물론 조재도가 이토록 고향의 세계에 집착하는 까닭은 잘 알 수 있다. 아무런 대립도 갈등도 없는 '그 나라', 그리하여 아무런 분열도 파괴도 없는 '그 나라'의 공동체적 행복을 그려 보임으로써 미래의 이상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이 이 시집의 시인 조재도일 것이다. 원시의 세계, 신화의 세계, 유년의 세계, 농촌 공동체 사회 …… 이미 잃어버린 이들 세계를 꿈꾸지 않을 수 없는 오늘 이 극단의 정보화사회를 사는 시인은 슬프다. 그것은 다만 조재도 개인만이 아니다.
8. 최승자 {연인들}(문학동네)
최승자의 새 시집 {연인들]의 작품들은 뒷표지에 실린 김정환의 몇 마디 코멘트가 무색했다. 읽을만한 시들이 별로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의 초기시가 보여주었던 제멋대로 일그러지던 정신의 파편들을 아직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피투성이로 분출하던 정신적 고투가 만들던 흔적 말이다. 그녀도 벌써 마흔 여덟의 나이가 아닌가. 진실을 찾기 위해 그녀가 더 이상 세상과 싸움을 걸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리라. 이젠 그녀도 늙었다. 무엇으로, 무엇을 위해 이 세상과의 싸움질을 계속해나갈 것인가.
그래도 [심장론] [아득한 봄날] [흔들지마] [이 시] ["그릇 똥값"] [좌우지간] [왕국] [?] [연인들 2] [연인들3] 등은 한 소식을 담고 있다.
9. 권경인 {변명은 슬프다}(창작과비평사})
권경인. 1957년 생, [변명은 슬프다}는 그녀의 고집스러운 첫, 시집이다. 그녀의 시집을 읽는 동안 좀더 부지런하지 못한 내가 줄곧 싫었다. 근면 성실, 얼마나 낡은 슬로건이냐! 그래도 나는 몸을 던져 이 낡은 세계로 가야 한다, 라고 수없이 다짐하곤 했다. 이 모든 것이 내 책임인가.
그녀의 시에 관한 몇 가지 느낌을 적어 보자.
非對象의 詩……. 그의 시는 외적 대상이 없이 관념만으로 간신히 몇몇 이미지를 만나 시를 유지시켜 가고 있다. 그러니 묘사나 서사가 시에 살아 있을 리 없다. 설명이 되거나 진술이 되는 언술 방식도 그의 시의 독서를 피곤하게 한다. 관념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미처 관념 이전의 의식이라고 해야 옳다. 그것도 뿌옇게 침전해 있는, 아무런 형상도 갖지 못하는……. 이처럼 낡은 시, 한국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식내면과는, 전통적인 정신형질과는 전혀 무관한 시를 새로운 의식을 담고 있다고 창비의 편집진들은 생각했으리라. 60년대 아류 모더니즘을 보는 느낌이 든다면(특히 시집 앞부분의 작품의 경우) 지나치게 과격한 말일까. 내가 보기에 그의 시는 적어도 그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초기 이승훈의 비대상의 시로부터 영향(?)을 받았나. 물론 어떤 특별한 소식, 나아가 깨침을 담고 있지도 않다, 특별히 새로운 세계의 발견도 없다. 그러나 시인 권경인은 너무도 아픈 자아를 갖고 있다. 정말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가. 고통의 자아가 만드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아우라)는 하나의 매력이다.
일종의 지적 포오즈일까. 그렇다면 그의 지적 포즈들이 그런 대로나마 읽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이 지적 포즈라면 지난 70년대 이후, 꼭 집어 말해 김수영 이후(김수영 자신이 대단한 포오즈에 취해 있었지만) 우리 시단을 그것을 얼마나 혐오해왔던가. 당시로서는 그것을 일종의 허위의식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런데 왜? 무엇이? 이곳으로, 이 엉뚱한 곳(?)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했을까. 90년대의 탓이라고? 후기근대 탓이라고? 세기말 탓이라고? 일단은 모더니즘의 세계인식이 새롭게 이해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그보다는 비로소 모더니즘(정신과 방법)이 자생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좋다.
이 세계는 연속되어 있나, 과연 종합되어 있나? 이 세계가 실제로 체감하는 삶에서는 불연속되어 있다면? 사실 그렇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동일성(유사성)보다는 차별성(차연성)을 강조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를 만날 때마다 어느 여류 시인은 짜증이 날 정도로 자기가 남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하느라고 늘 정신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 좋은 시들은 일종의 유기적 총체로서 그것의 초점을 향해 집합되고 수렴되는 이미지들의 운동을 담고 있다. 뛰어난 경구, 훌륭한 에피그램은 언제나 소중하지만, 전체의 이미지들로부터 엉뚱하게 불거져 있을 경우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좋은 작품이 되기 어려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시에서 그것들이 수렴되고 집합되는 이미지들의 운동을 보여주지 않아도 좋다. 병치되고 병렬되는 이미지들의 수직적 나열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실은 내면의 질서를 갖는 법이다.
권경인의 시에서도 좋은 시는 모두 이러한 특징 안에 자리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보기에는 그의 이번 시집에 이러한 뜻에서의 좋은 시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의 시적 진실은 아프고도 아름답지만 그의 시적 언어들은 아직 미숙하다고 해도 좋다.
물론 그가 진지하고 정성스러운, 그렇게 진정의 마음을 갖고 있는 시인임에는 분명하다. 삶의, 그리고 자아의 현존을 온 몸으로 끌어안으며 끙끙거리며 앓고 있는 것이 그이다. 따라서 불투명하고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그의 시로부터 시적 진실을, 그 고통을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러한 시적 진실이 곧바로 시적 성취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나이와는 달리 그녀는 아직 신인이다. 그녀의 시에는 그러한 만큼의 신선함이 아직 남아 있다. [슬픈 힘] [킬리만자로의 표범] [변명은 슬프다] [원근법] [적막강산] [木魚者] [회귀] [그리운 지평선] [김 선생]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에 이르다] [나무] [K] [괴물 피카소에게] [기회주의자] [잃어버린 날들의 기록] [지리산, 지리산] 등 시의 위에 나는 동그라미를 쳤다.
10. 김기택 {사무원}(창작과비평사)
나로서는 처음으로 김기택의 시를 꼼꼼히 점검해본 듯하다. 첫 번째로 파악되는 것은 김기택 시의 話者가 일단은 관찰자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나 정서를 드러내는 것으로 시의 내용을 만드는 낭만주의 시인이 아니다. 더러는 화자의 의지나 욕망을 표출하기도 하지만 정서나 감정을 냉정하게 걸러낸 채 그것들을 건조한 어조(목소리)로 객관화하고 있는 것이 그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자아는 객관적 대상을 선택하여 섬세하게 묘사해내는 카메라의 역할에 주력할 따름이다. 물론 [발자욱1] [발자욱2] [우주인] 등과 같은 예외적인 작품들도 눈에 띠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들 작품에서 시적 자아는 간주관 혹은 간객관으로서의 주객일치, 주객의 변증법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자아의 설정이 그의 시에 얼마나 커다란 미학적 성취를 주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간 대상에 대하는 그의 뜨거운 정직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그의 세계인식은 끊임없이 중용을 탐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의 시에서 이 중용은 상대적으로 좀더 객관 쪽에 중심축을 두고 있다. 어찌 보면 김기택 시의 이러한 특징은 최두석이나 곽재구(?), 이은봉(?) 등의 일부 80년대 시인들의 진보적 방법을 자기 나름으로 십분 응용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시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개입시키고 있는 점을 상기해 보더라도 그렇다.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시적 대상의 선택 자체로 세계관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재의 선택 자체가 벌써 세계관의 선택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그의 세계관이 추구하는 진실성을 익히 알 수 있다. 소외된 것들, 버려진 것들, 변두리 혹은 하급의 것들이 주로 그의 카메라에 찍히는 피사체들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피사체들은 정상 이하의, 평균 이하의 낮고 비천한 존재(?)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벌레, 파리떼, 할머니, 노인, 아이, 장애자, 갈치, 낙지, 닭살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대상들이 이 세상 밖의 어떤 특별한 곳에 따로 존재하는 것들은 아니다. 눈을 바로 뜨면 누구나 어디서나 곧바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로, 일상에서 너무도 자주 마주할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더라도 그의 관찰력은 매우 뛰어나고 섬세하다고 할 수 있다.
세번째로 파악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시에서 이러한 존재들에 대해 골똘히 사색하면서 그것들을 손아귀에 넣고 한없이 주물러 터뜨린다는 점이다. 사실 그는 가슴에서 솟구치는 영감이나 하늘에서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계시를 받아 작품을 기록하는 시인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그는 나와 조금은 다른 창작방법을 선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획하고 준비하는 가운데 매만지고 공굴리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세련된 심미적 가공기술을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 그이다. 그의 시가 다소 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시의 표현방법은 나의 경우보다는 상대적인 면에서 최두석의 경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충분히 시의 장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장인은 모더니스트(기법 면으로서의)로서의 솜씨와 관련해서 하는 말이다. 그를 가리켜 이처럼 기법의 면으로서의 모더니스트라고 하는 것은 그의 시에 어지간히 지적인 정서의 통제, 개성의 통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인칭 화자가 등장하는 시 [꼬리는 있다 등]의 경우에는 풍자로서의 언어 운용, 곧 풍자적 어조가 보이기도 하는데, 이 또한 예의 논리를 증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김기택은 자기 나름의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는, 주목할 만한 시인임에 분명하다. 나이와는 달리 그의 시에는 아직도 풋풋한 젊음이 남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1. 박흥식 {아흐레 민박집}(창작과비평사)
박흥식의 첫 시집 {아흐레 민박집}(창작과 비평)을 읽고, 그 독후감으로 '어머니와 소의 상상력 혹은 순결의 세계'라고 이 시집의 시세계를 얼핏 요약해 본다. 박흥식의 시들은 우선 이상국의 초기 작품들이 이미 보여준 바 있는 비약적 상상력을 연상시킨다. 과도한 생략이 만드는 이러한 비의적 세계는 고형렬의 초기 시에도 없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소간은 모더니즘의 기법을 훈련하는 과정에 형성된 관습일 수도 있다.
그런데 박흥식의 시에서는 그것들이 왠지 조금쯤 성글다. 특히 시의 종합적 매듭, 매조지를 짓는 솜씨가 다소간 엉성해 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마도 박흥식의 가슴속에 너무도 커다란 동굴이 살고 있고, 그곳에서 너무도 엄청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연유로 하여 이 시집의 시들에서 화자는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그런데 이 때의 그 빛깔은 짙은 고동색이다.
결국 시인은 이 시집에서 유년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다. 누구나 유년의 세계는 현세에서는 고향이거나 자연일 수밖에 없다. [장마굴] 같은 작품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추상으로서의 자연을 택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어머니로서의 고향에 지친 몸을 눕히고 싶은 것이 그의 시의 시적 자아들이다. 소처럼 미련하게 고향을 지키고 있는 것이 어머니이고, 그 어머니를 부를 때 그는 위안을 얻는 것이다.
이 시집의 시들은 대강 제2부에 이르러서야 제 꼴의 성취를 얻기 시작한다. 나의 편향된 입맛에게는 제2부 이후의 시들이 훨씬 구체적인 형상을 보여준다. 이들 시의 상상 세계가 상대적으로 좀더 작위적 어눌함을 극복하면서 나름대로 깨침과 미의식을 담아가기 때문이다.
육친의 情만큼 근원적인 것이 있을까. 이 시집에서도 그것은 으레 고향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어머니의 편지 혹은 목소리를 담고 있는 시들 [에밀세, 이 사람아] [母書] 등의 작품이 보여주는 보편성은 이른바 X세대들에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아직 내게는 하나의 감동이다. 박흥식과 마찬가지로 나도 늙어빠진 고향으로부터, 부모로부터 도시로, 객지로 일탈해온 감정덩어리이기 때문이리라.
박흥식의 시는 그다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는 무엇보다 시 문장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시 문장은 여전히 복합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어지럽게 뒤얽혀 있다. 그의 의식의 저변에 여전히 모든 언어가 농촌적 한가함이 만드는 복문과 혼문으로 자리해 있어서 일까. 오늘날 원인과 결과의 고리로 이어지는 문장은 그러나 자칫 지루할 수도 있다.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대등적 병치문이 그에게까지 침투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시문장의 특성과 상관없이 그도 자신의 시어에서 시적 자아의 정서적 반응을 삼가는 데는, 절제하는 데는 철저하다. 섣불리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켜 센티멘털리스트가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은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작업이 그로 하여금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길렀으리라.
무슨 마음이 가슴에 도사려 있어 그로 하여금 古色蒼然한 분위기를 꿈꾸게 할까. 번번이 눌변으로 시어의 행마를 의도하는 배경엔 그의 古風의 정서에 대한 집착이 자리해 있다. 일부러 호흡을 껄끄럽게 가로막는 것도 그의 복고풍과 맞물려 있어 시를 낯설게 하고 또 새롭게 한다. 그러나 아직은 새로운 작품보다 낯선 작품이 많다. 미처 완벽한 지경에 이르고 있지 못한 작품들은 어느 누구의 시집에게서나 흔히 볼 수 있다.
12.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문학동네)
{바닷가 우체국}(문학동네)을 서울발 광주행 고속버스 안에서 그야말로 겨우겨우 읽었다. 최근의 내 일상이 그만큼 동분서주하다는 뜻이리라. 독후감을 압축하여 '원초적 자연 혹은 생명의 환희들'이라는 말로 정리해 본다. 이 시집에서 시인이 무엇보다 원형적 자연, 신화적 자연의 발견을 주된 세계로 펼쳐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의 자연의 세계는 그 내부에 어떠한 괴리도 틈입되어 있지 않은 원시적 공동체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처럼 무갈등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 이 시집의 경우 일종의 유토피아 충동을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본래 유토피아가 미래의 세계를 뜻하고 있어 정확한 언어가 아니라면 이미 잃어버린 낙원을 꿈꾸고 있다고 해도 좋다.
안도현이 꿈꾸고 있는 이러한 세계는 이미 김용택의 시집 {그 여자네 집}에서도 마찬가지로 추구된 바 있다. 김용택이 이 시집에서 그리고 있는 자연도 안도현이 {바닷가 우체국}에서 그리고 있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모습의 원형적 형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안도현의 자연이 좀더 근원에 가깝고, 따라서 그만큼 생활의 체취가 빠져 있기는 하다. 그의 시에서 원형적 자연의 공동체는 이미 아주 먼 시공의 거리 속에 위치해 있는, 당연히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지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살아 있는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감하게 이 시집에서 그러한 세계를 흔히 후근대라고 하는 오늘의 아수라장 같은 삶 앞에 내던져 놓고 있다. 시인으로서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이 엄청난 거리의 시공을 단숨에 무화시켜 버리는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근대의 끝물 위에 서서 근대의 끝물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이를테면 인간존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원시의 자연, 곧 인간과 자연이 혼연일치가 되어 있던 세계를 문득 자신의 발 밑에 내던져 놓고 있는 것이 시인 안도현인 셈이다. 인간과 자연이 미분화되어 있는 세계가 당위의 세계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의 경우 오늘의 후근대라고 하는 현존의 세계 앞에 이 당위의 세계를 우격다짐으로 내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를 가리켜 일종의 근대에 대한 저항,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도 할 수 있는가. 아니, 더 나아가 이른바 '대안적 근대'의 추구하고도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의 시가 지니는 모더니티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 시집의 시들만으로는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것이 표면적인 의지로 언표되어 있는 그의 글을 아직은 한번도 읽은 적이 없으니까.
어찌 보면 그의 시가 보여주는 이러한 세계는 한편으로 착종된 자아가 갖는 인식의 결과일 수도 있다. 일종의 미몽 혹은 몽상적 자아가 일상을 지배하는 데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인데, 사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서정적 자아의 원초적 모습이기도 하다. 판단의 정지로서 정직한 불투명성, 다시 말해 서정적 자아가 갖는 보편적 특징으로서 키츠가 말하는 '소극적 능력'이 그의 시를 이러한 세계로 이끌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특히 유년의 화자 혹은 유년의 시선을 많이 채택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해석과 상관없이 혹자는 그의 이 시집의 시세계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고 타매할 수도 있다. 그렇다. 이번 그의 시집 {바닷가 우체국}에 공공적 영역이 과도할 정도로 축소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엷게 정제된 주관적 정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약간은 낭만적인(얼마간은 감상적인) 정조가 주조를 이루면서 독자들의 사춘기적 심미의식을 건드리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지적에 대해 시인으로서 안도현은 눈 하나 꿈쩍 안 할 지도 모른다. 그 자신이 언제나 서정시의 본격성과 대중성이 이루는 아슬아슬한 경계를 밟으며 걷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도의 비판쯤이야 그로서는 침 한번 꿀꺽 삼키고 감내해 버리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좀더 깨어 있는 독자라면 그러한 비판보다는 왜, 어째서 이처럼 자족적인 세계를 행해 시인 안도현이 자신의 자아를 몰아가고 있을까, 하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시집의 시들이 이루는 정서들은 매우 낙천적이다. 무엇이 그의 시의 정서들을 이처럼 낙천적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화사하고 밝게 만들까. 이미 충분히 이룩한 시인으로서의 聲價 때문일까. 그러한 연유로 해서 도무지 결핍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언제나 대중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이미 마음을 비워버린, 아니 비워버릴 마음이 보이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욕심이 너무 크면 욕심의 눈에게는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물고기의 눈에 물이 보이지 않듯이.
어쨌거나 안도현은 이 시집에 이르러 지난 몇 권의 시집이 지니고 있던 백석風 혹은 백석套라는 평가, 즉 아류의 이미지로부터 스스로를 곧추세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몇몇 작품에는 아직도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말이다.
이 시집에는 뛰어난 표현, 경이감 있는 발견, 그것들이 만드는 번뜩이는 이미지가 특별히 눈에 띠기도 한다. 나로서는 [모과나무] [꽃]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숭어회 한 접시] [고래를 기다리며] 등의 시가 좋다. 짧은 시들, 이름하여 단시들의 경우 크게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13. 곽재구 시집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곽재구의 시집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지난 5월 27일에 발간된 그의 새 시집, 시집의 앞머리에 몇 자 적어 보내는 그의 마음이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곽재구의 이번 시집에서는 일단 먼저 김소월과 한용운의 정서와 어법이 느껴진다. 어법에 있어서는 만해, 정서에 있어서는 소월을 닮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이 시집의 아우라가 전체적으로 낡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왜, 무엇이 시인 곽재구로 하여금 20년대 중반의 국민 시인들에게로 달려가게 했을까. 국민…… '대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나라 국민들과 함께 하고 싶은 그의 의지가 그렇게 시켰으리라. 곽재구라면 충분히 그러한 정도의 욕심쯤이야 부릴 수도 있겠지. 그가 시인으로서의 꿈을 잃지 않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국민들의 세계에 가 닿는 것과 국민 시인으로 우뚝 서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곽재구가 지금 시행착오를 하고 있다는 것인가.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다.
이 시집에서는 제법 많은 시가 사랑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이들 사랑시가 모두 통속적인 연애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그리고 있는 '사랑'의 세계가 시인 곽재구의 적절하고 지고한 추상을 보여주고 있는 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사랑'의 의미가 그다지 폭넓은 관념을 펼쳐내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다.
이 시집에 담겨 있는 또 하나의 중심은 그가 집필 공간으로 마련한 '오막살이' 주변의 자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구례군 산동면 연화리의 자연이다. 물론 이 때의 자연은 시인에 의해 가공되고 상상된 구족하고 원만한 화해의, 즉 일치의 공간이다. 따라서 연화리와 그 주변의 풍물로부터 비롯된 세계는 그의 유토피아적 충동이 만든 환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일종의 대안적 이상세계인 것이다.
어쨌거나 그의 시의 기본 정조와 어법은 전통적이지만, 그만큼 낡았지만, 그것을 토대로 전개하는 시적 운산은 새로운 면이 없지 않다. 그가 그려내는 세계가 일응 오늘의 현실, 곧 후기 근대적 현실이 이루는 불협화음에 대한 미적 저항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는 그것이 얼마간 세기말의 일상에 대한 일종의 도피적 기제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인 혼자서만 상상 속의 마을, 즉 이상세계를 만들고 그곳에 신과 자연을 불러모아 원시적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고 해서 세상의 문제, 근대 후기의 제문제, 즉 자본주의적 후기 근대의 모든 문제가 제대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이러한 몽상이 오늘의 문명에 대한 일종의 근원적 경종이고, 솔선수범일 수는 있다. 연화리라는 상상공간을 실천하는 것 자체가 함부로 생태환경을 핍박하고 억압하는 오늘의 세계, 즉 자본주의적 근대 문명에 대한 우회적 비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서는 다소 낡았지만 그런 대로 뛰어난 작품들을 품고 있는 것이 이 시집이다. 이미지보다는 어법이나 리듬에서 정서를 산출하는 낭만적 상상의 시들이 대부분인 가운데에도 [산수유나무 아래서] [수제비족] [그리운 폭포] [연꽃잎 우산] [칠석날] [산수유꽃 필 무렵] 등의 시는 압권이다.
김용택, 안도현, 곽재구의 시들에게서 보여지는 자연을 중심으로 하는 유토피아적 충동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이들이 만드는 이상세계 중에서도 곽재구의 경우는 자연과 인간 이외에 神을 포함시키고 있다. 아마도 靈性에 대한 의지를 담아 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또한 곽재구 시의 상대적인 변별성일 것이다.
14. 이정록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어 살고 싶다}(문학과지성사)
시인 이정록은 이번 시집에서도 거듭해서 거죽이며 껍질에 대해, 안(속)이 아니라 밖(겉)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내용보다는 형식에, 정신보다는 육체에 눈길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몸의 시, 바디의 시를 쓰고 있는 셈이다. 첫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의 벌레의 집, 두 번째 시집 {풋사과의 주름살}의 주름살, 이번 시집 {버드나무 껍질에 세 들어 살고 싶다}의 버드나무 껍질이 모두 다 그러한 거죽의 세계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이번 시집에서도 주제나 사상의 시적 형상화보다는 형상화 그 자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표현 기법으로서의 비유나 이미지 그 자체에 집착하고 있는 셈이다. 비유와 이미지 등이야말로 시의 거죽이고 껍질, 나아가 육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 기발한 비유나 이미지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시를 밝고 화사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들 비유와 이미지는 전체 형상들로부터 고립되어 파편적으로 존재할 때가 많다.
그의 시들 중에서는 예의 의지를 담고 있는 시들보다 절실한 삶의 순간들을 애절하면서도 꼼꼼한 마음으로 포착하는 작품들이 훨씬 돋보인다. 가족들, 부모와 자식들 사이, 화자와 삼촌들 사이의 죽음을 초월하는 간절한, 애끓는 정들을 담고 있는 시들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숟가락] [눈사람의 상처], [감나무] [어머니는 독이다] [형광등] 등의 시에서 그러한 예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갈망과 사랑의 애틋한 정서는 그의 사람됨에서 나온다. 건강하고 구김 없는 밝은 마음의 그에게는 무엇인가(가난 혹은 욕망)로 어긋나 있는 자신의 과거의 가족사,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사람들의 모든 길이 안타깝고 안쓰럽다. 다정도 병이라고 하지만 아직 그의 다정은 씩씩하다. 그가 이 모든 것에 무엇보다 객관적 관찰의 자세를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들은 또한 생활 속의 자잘한 깨침을 담을 때 일정한 성취를 이룬다. 이 때의 생활의 공간은 그가 자라난 농촌이거나 자연인 경우가 많은데, 물론 그 곳은 오늘의 그의 삶이 이루고 있는 구체적인 관계의 영역 안에 자리해 있다. 섣불리 기존의 문명 비판적 시선을 들이대고 있는 작품들보다 생생한 삶의 공간으로부터 발견하는 깨침들을 담고 있을 때 그의 시들은 훨씬 높은 미적 성취를 얻는다. [파리] [피서] [밥상] [백살] [귤] [앗!] [숨쉬는 집] [진흙에서 찰흙으로] 등의 작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시에서 그는 시적 대상으로부터 어떤 의식(인식) 혹은 깨침을 발견하고, 그것을 시적 대상의 내부에 감추려고 노력한다.
선험적 관념이나 주어진 문명의 안목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세상을 시적 대상으로 수용하고 있을 때 그의 시는 과도하게 추상화되거나, 그것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이 질서를 잃고 마는 예가 적잖다. 이러한 방식으로 태어난 시들은 따라서 대부분 지리하거나 지겨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구체적인 생활 혹은 삶의 현상으로부터 심미적 지혜를 얻고 있는 시들은 감칠맛 있게 우리의 감성을 파고들어 온다. [청국장] [매미] [대동여지도] [가시연] 등의 시에서 그러한 예를 볼 수 있다.
시인으로서 이정록은 아직 미완의 그릇이다. 미래가 촉망되는 청년 시인이라고 과감하게 말해도 좋다. 그의 시에 지나치게 말이 많은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리라.
15. 덧말
마지막으로 조진태의 시집 {다시, 새벽길}(모아드림)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고 말을 맺고자 한다. 그의 이번 시집은 (노동)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상념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상념은 너무도 막연해서 살아 있는 감동으로 미처 떨쳐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현장성을 바탕으로 한 구체성을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다만 빠르게 흐르는 물결(리듬)에 실려 순식간에 읽혀지기만 할 따름이다. 원인이 불분명한, 상세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막연한 낭만적 정서는 상투적인 독서를 낳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조진태는 후기근대라는 이 기표의 시대, 기법의 시대를 향해 아직 출발조차 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그의 시들은 90년대라고 하는 시로서의 자기 시대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조진태의 이번 시집에는 그리움이니 기다림이니 하는 원초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시들도 매우 공허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러한 감정이 획득된 전후의 상황이나 배경에 대한 깨어 있는 묘사가 없어 상투화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대해서는 프로의식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 자신의 삶의 무게에 비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0년을 넘게 (노동)운동에 봉사해온 것이 그이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이 급박하고 부박한 세월이 그와 그의 시를 철저하게 소외시켜왔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스스로 이 천박한 90년대로부터 자신을 비켜 세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동안 (노동)운동에 주력해온 그로서는 그 자신의 시를 이 엄청난 퇴행적(?) 개인주의 시대의 여기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언제나 (노동)운동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희망에게] [겨울 무등 산행] [不在1] [소나기와 두통] [눈물] [그대를 보네] 등의 시가 좋았다. 이들 시에는 다소마나 시적 공간이 이루는 구체성이 자리해 있다.
자본주의 시대, 곧 근대는 시간의 시대이기보다 공간의 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이 근대의 특징으로 시간의 단축과 공간의 확장을 들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근대)에 대한 비판도 당연히 공간적 배경을 취하는 가운데 시도할 수밖에 없다.
우리 시대의 시를 분류, 구분하여 이해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모더니즘 이전의 시, 모더니즘에 걸쳐 있는 시, 모더니즘을 뚫고 나온 시로 나누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나는 현대의 시(정작의 리얼리즘 시)라면 당연히 모더니즘을 뚫고 나올 때 일정한 미적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예술사조 혹은 예술경향으로서 모더니즘은 기법(형식)의 시대를 불러왔다. 그러나 이 때의 기법(형식)에는 의미가 딸려 있다. 사실 모더니즘 시대에는 그 의미의 진실을 구현하기 위해 기법(형식)을 발달시킨 혐의도 없지 않다. 이 때의 기법이 기법의 유희, 다시 말해 기표의 유희로 치달려 가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러나 기법(기표)의 유희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는 아직 우리 시에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선취된 관념은 시인으로 하여금 미래를 살 수 있게는 하지만 동시대를 살 수 있게 하지는 못한다. 일단은 동시대를 살 수 시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시는 미래도 살 수 있고 과거도 살 수 있게 된다. 이기법의 유희가 아무런 반성도 없이 지금의 이 시대를 풍미하게 되면 자본주의 자체와, 그것에 기생하는 표피적이고 상업적인 대중문화를 도저히 견제, 비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의 우리의 시가 표피적이고 상업적인 대중문화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럴 마음이 있는 시인이라면 차라리 대중가수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