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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김씨 인물 1
김경삼(金景參. 호-蒿巖. 몽탄면 사창리. 나주인)
취암 김적의 6세손으로 천성이 바르고 총명이 과인하여 스승의 가르침이 없이 스스로 깨우치고 학문을 얻어 덕행과 도학으로 주변에 모범이 되었다. 17세에 아버지를 잃고 시묘살이를 함에 슬픔이 성인보다 더 하였다. 공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평생 중용을 거울 삼아 먼저 주경으로서 그 근본을 세운 뒤 궁리로서 그 知를 얻고 反躬으로서 그 實을 깨우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누차 벼슬길에 오르기를 천거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후진양성의 훈육에 몰두하며 자연에 묻혀 생을 마쳤다. 이에 사림이 공을 尊慕하여 列邑連章으로 사우에 향사할 것을 논의하였다.
김광형(金光衡. 초명-민형, 호-우산. 1912-1972. 몽탄면 사창리. 나주인)
몽탄면장을 했던 우명의 아들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경상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방송국기획조사실 사무관으로 출발하여 강릉 목포 남원 속초 등 방송국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 녹조소성훈장수상.
김기봉(金基鳳. 譜名-용봉, 자-문일. 1868 - 1894. 12, 12.)
동학농민군으로 배상옥, 김응문, 김효문 등과 고막원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후퇴하는 도중에 관군에게 체포되어 무안읍 불무제 아래에서 처형당했다.
김기서(金麒瑞. 자-성백, 호-예목재. 나주인)
공은 취암 적의 후손이다. 공은 항상 자리에 ‘구석진 곳에서도 부끄러움 없어야 한다.’ 라고 새겼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봉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침내 과거 보기를 포기하고 홀로된 어머니를 모셔 효도를 하였다. 예목재와 의분고를 세워 후손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게 하였다. 절목 4천여 조를 두어 이치를 모았다.
김기운(金基運, 1920-2018. 몽탄면 사창리 초당산. 나주인)
지독한 가난 때문에 서당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떼고 중학교에 갈 형편이 안 돼 보통학교를 1년 더 다닌 끝에 7년 만에 무안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열 여섯 나이에 월급 3원짜리 견습사원으로 의약품 도매업을 겸했던 '이토상점'에 취직해 일하며 약방을 열겠다는 목표로 약종상 시험을 준비했다. 스물 즈음 약종상시험 1, 2차에 합격(50명이 지원해 3명 합격)했지만 어리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불합격 돼 낙담했지만, 폐결핵을 앓으면서까지 다시 공부해 합격하여 1946년 8월6일 목포에서 백제약방 문을 열었다. 1952년 9월 합명회사 백제약방으로 이름을 변경하면서 도매업무를 겸업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 수도 서울을 재탈환하면서 유한양행, 종근당, 삼성제약 등 제약업자들이 서울로 돌아와 제약업을 재개한 시기다. 1968년 전남 강진군, 장흥군 일대 국내 최대 인공조림단지인 초당림을 조성하여 1,000만평의 야산을 개발해 편백 132만여 그루, 리기데다소나무(미국 삼엽송) 150만여 그루, 백합나무 30만여 그루, 삼나무 18만여 그루 등 경제 수림 17종 450만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다. 경기도 포천의 국립수목원 다음으로 크다. 물론 인공조림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다. 원래 이 지역의 일반적인 수종이 아니었던 백합나무를 잘 키워 이제는 경제성으로 주목받는 나무로 바꿔놓았다. 정부도 이 나무를 주목하고 널리 권장한다. 이렇게 조성된 초당림은 일반인은 물론 임학계의 관계자들마저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푸른 숲을 조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9년 학교법인 초당학원을 설립, 교육 불모지인 무안에 백제여자상업고등학교를 개교하고, 이어서 지역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초당대를 개교해 지역 고등교육 발전에 공헌했다. 1982년에는 제약회사인 초당약품(주), 1989년 병원 전문 도매업체인 백제에치칼약품(주)을 설립해 약업 보국의 정신으로 기업을 건설하고 투명하게 경영해 왔다. 2005년에는 복지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불우노인, 소년소녀가장 및 저소득층 학생에 대한 대학장학금을 지원하여 그 누계 액이 수십억 원에 달하는 등 복지사업에도 온 정성을 다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도 앞장서 왔다. 그는 또 백제여상에 핸드볼팀을 만들고 백제약품 계열사인 초당약품에도 실업팀(현재는 해체)을 만들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여자핸드볼 국가대표 선수 상당수와 감독이 초당약품 소속이었다. 푸른 숲, '초당림'을 이룬 공로로 5.16민족상과, 2003년 국민훈장동백장(교육부분), 2010년 모란장(보건부분), 2017년 금탑산업훈장(농림부분)을 수상했다. 초당약품·백제에치칼약품·백제고등학교·초당대학교를 설립해 인류 건강과 교육사업에도 크게 기여하는 제생의세(濟生醫世)의 삶을 살았다. 또 복지재단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인의 참모습을 보여주었고 2013년 한국 전문경영인이 선정한 세계 최장수 CEO상을 수상했다.
김기환(金錡煥. 호-추당. 1872,10-1944,10. 몽탄면 다산리 차뫼. 나주인)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명석하여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얼마나 우수했던지 이른바 광무개혁을 시도한 고종황제 재임시에는 나라에서 국가의 동량을 키우기 위해 전국 8도에서 인재를 1명씩 선발하였는데 거기에 당당히 뽑히기도 하였다. 특히 공은 한학과 금석학에 밝아 1923년 무안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했던 무안군지를 편찬하였으며 수많은 한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한학 실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위당 정인보 선생도 공에게서 학문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무안향교의 전교를 역임했으며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모두 나라의 동량이 되어 큰 역할들을 했다. 장남 용무는 미군정 당시 대법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차남 용기는 강진 여천 군수를 역임했고 삼남 용현은 제헌의원을 역임했다.
김덕구(金德九. 자 - 子文. 1868. - 1894, 12, 8. 몽탄면 다산리 차뫼. 나주인)
김덕구는 김자문으로 더 알려졌으며 동학접주인 김창구의 동생이다. 형인 창구와 영구 그리고 조카인 우신과 더불어 고막원전투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고막원전투가 패배로 끝나자 잠시 몸을 피하려고 집에 들렀다가 기다리고 있던 토벌대에 붙잡혔다. 그는 12월 8일 무안관아에서 처형을 당했다.
김덕수(金德秀. 자-득심, 호-사천. 1548-1609. 몽탄면 사창리. 나주인)
통훈대부 광주목사를 지낸 적의 아들이며 귀암공 김충수의 아우로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 선조 9년(1576년) 丙子 式年試 [진사]에 합격하였다. 선조24년(1591년)에 무옥이 일어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초야에 묻혀 형인 귀암공과 함께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암공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물리쳤으나 형이 순절하자 세사에 뜻을 잃고 방랑하다 생을 마쳤다. 난중일기 정유년 11월 28일에 ‘충무공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 있을 때 공이 쌀을 가지고 와 도움을 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김려해(金麗海. 자-사진. 나주인)
성균 직강 원의 후손이다. 공은 친구사이에 우정이 깊었고 형제간의 우애가 있었다. 학문이 깊어 널리 법전과 서책을 두루 읽어 안목이 높았다. 가난과 굶주림에 빠진 주민들을 자신의 재산을 풀어 진휼하였다. 주민들이 모두 공의 덕을 칭송해 마지않았지만 사사로이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김예수(金禮秀. 자 - 이칙, 호 - 규헌. 몽탄면 사창리 사창. 나주인)
공은 나주김씨 시조인 운발의 23세손으로서 고조인 우운은 능성현감을 증조인 철하는 공조좌랑을 조부인 수남(粹南)은 나주김씨 무안의 입향조이면서 승사랑교수를 아버지인 원(遠)은 성균직강을 역임하였다. 공은 5남4녀 중 3남으로 무안 대사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워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특히 文과 武의 재주가 뛰어났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주위의 칭송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비린 것을 멀리 하는 등 근신하며 늘 슬픈 모습으로 지내 주변을 감동시켰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분연히 떨쳐 일어나 향토결사단을 조직하고 골자기(鶻字旗-송골매가 그려진 깃발)를 앞세워 무주와 금산에 쳐들어온 왜병들을 무찔렀다. 목숨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의병활동을 하던 중 자형인 충의 최경회(忠毅崔慶會)공이 왜군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수세에 몰려있던 충의공은 공의 동참에 “내가 날개를 달았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으나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자 공은 자형인 충의공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세웠던 大義가 뜻대로 되지는 않았으나 구차히 벗어나지는 맙시다” 하며 자형의 손을 잡고 촉석루에 올라 쳐들어오는 왜병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六月 그믐이었다. 남편의 자랑스러운 죽음을 전해들은 영성정씨는 “남편이 이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나는 그러한 남편의 뒤를 따르는게 도리이다”며 스스로 목숨을 거뒀다. 이러한 사실들이 속수삼강록과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어 전한다.
김만형(金萬衡. 호-지송. 1919-2003. 몽탄면 사창리 사창. 나주인)
공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이어 주식회사 삼양사의 상무이사에 재임하면서 고향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김명탁(金明铎. 이명-김명택. 1916,7-1950,8. 몽탄면 몽강리. 나주인)
공은 1916년 몽탄면 몽강리에서 출생했다. 이명은 김명택이다. 일찍이 일본군에게 징집되었다가 탈영한 후 1942년 8월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였고, 1944년 9월 주 서안 중앙군관학교 제 7분교를 졸업했다. 1944년 10월에 주 서안 중앙군 제2지대 분대장을 맡아 활동하다 8.15 광복 후인 1946년 6월 귀국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육군에 가담하여 장교로 활동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선에 투입되었고, 1950년 8월 14일에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명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03년 6월 5일 국립대전현충원 장병묘역에 위패가 세워졌다.
김문후(金文後. 자-명선, 호-만호. 1573-1641. 몽탄면 사창리 사창. 나주인)
공은 사창리 입향조인 취암 김적의 손자이며 의병장 덕수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사리분별력이 뛰어났다. 또한 동년배 사이에서도 포부가 크고 출중한 재능이 있어 두각을 나타냈다. 공은 160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종사관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614년 천성보 만호 재직시에 침입한 변방의 오랑캐들을 대파하여 1619년에 어모장군에 올랐다. 통훈대부 어모장군으로 재직시에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모시킨 데에 대해서 의견을 물어왔다. 그때 공은 죽음을 각오하고 ‘무식한 무부가 어찌 마땅히 義를 알겠는가?’하며 우회적으로 광해군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했다. 이후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부모와 형제간의 천륜도 무시하는 온갖 모함과 음해로 얼룩진 세상에 환멸을 느껴 1622년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인 사창으로 내려왔다. 고향에서의 공은 조상의 유훈과 가르침에 따라 자연과 벗하며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공은 ‘언제나 가족간에 화목할 것이며 남이 나에게 횡포를 부리더라도 다투지 말 것이며, 들어주고 저주는 것을 알라’ 고 가르쳤다. 늘 옆에 서책을 두고 학문을 닦았으며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청빈한 삶을 추구하는 공의 가르침은 후학들의 학문과 인성을 높여주는 디딤돌이 되었다. 저서로는 만호집과 시가 전하고 있다.
김상길(金相吉. 자-중협, 호-삼희당. 나주인)
성균 직강 원의 후손으로 감찰 능해의 아들이다. 공은 지극 정성으로 부모를 섬기며 효도했다. 항시 외출할 때는 부모에게 고하고 들어올 때도 부모에게 먼저 말하고 들어갔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지성으로 슬퍼하며 애통해 하였다. 공은 일찍부터 학문에 눈을 떠 그 깊이가 있었다. 기쁘게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마땅히 가깝게 지내야 할 사람이 있어 과거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외세를 응징하기 위해 일어났다. 이에 나라에서는 공에게 정려를 내렸으나 받기를 거부하였다. 증 동몽교관에 제수되었다.
김상양(金相瀁. 자-윤오. 나주인)
성균직강 원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장성해서도 학문하기를 좋아하였다. 학생의 공부는 마음을 어둡지 않게 항상 일깨우는데 있다고 봤다. 일찍이 노사 기정진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공이 말했던 “맑은 강에 있는 백석을 보이며 백석도 맑은 강을 만난다”는 구절을 보고 노사선생이 감탄하며 공이 변화할만한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또 내외함양에 대한 소견이 탁월하였으며 문장이 담박하여 도에 가까웠다. 공의 시는 신묘하고 고아하였으며 은거하면서 지내도 근심을 하지 않았다.
김상칠(자-문겸, 1780-1838. 청계면 청계리 학유정. 나주인)
나주김씨 족보를 보면 학유정 마을 나주김씨 입향조는 몽탄면 사창리에서 넘어온 김상칠이다. 공은 마을유래지에서 입향조로 제시한 김용규의 할아버지로 그때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이다.
김상형(金尙衡. 호-정연. 1912,7-1992,12. 몽탄면 다산리 차뫼. 나주인)
공은 차뫼마을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경성고상(현재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경성방직에 경리과 직원으로 입사하여 후일 대표이사가 되었다. 이어 대흥산업 대륙고무 등을 설립하여 1961년부터는 이천물산회장으로 재직하였다. 정부에서는 공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제1차 민정조각(최두선총리)을 할 때에 상공부장관의 입각을 타진하였으나 공이 거절하기도 하였다.
김성권(金成權. 몽탄면 다산리 차뫼. 나주인)
몽탄면 차뫼 마을 사람으로서 김창구 형제와 함께 고막원 전투에 참여하였다. 고막원 전투에서 왜병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왔으나 오는 도중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 길가에서 죽었다.
김수남(金粹南. 무안읍 성동리 대사동. 나주인)
고려시대 대제학 김대경의 손자 김정준(?-1433)은 벼슬에 나가 해주·제주목사, 함길도관찰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3형제 중 김양은 해주목판관, 김증은 사온서직장으로 김종서의 사위, 김도는 계유정난의 공을 세워 금성군에 책봉되었다. 시조 21세이고 김양의 증손자인 김수남이 경학으로 천거되어 승사랑과 교수를 역임했다. 후에 장손 충수가 공을 세워 통훈대부 제용감정을 증직받았다. 무안에 입향해 승달산 자락 대사동에 터를 잡아 나주김씨 무안군의 입향조가 되었다. 공은 김적, 김원, 김향, 김순, 김선 등 5남을 두었다. 그중 둘째인 김원은 이언적의 문하로 성균관직강을 역임했다. 김원에게 인수·의수·예수·지수·신수 다섯 아들과 4녀가 있었는데 그중 첫째 사위가 최경회이다. 김예수, 김지수, 최경회 세 사람이 공신록에 올랐으며 일휴당 최경회와 김예수가 임진왜란시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했다. 논개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충의공 최경회는 화순 출신이다. 김수남의 장남인 22세 김적(1507-1579, 호는 취암)은 광주목사와 예조판서에 추증된 을묘왜변의 공신으로 무안 몽탄면 사창마을에 입향해 취암공파 종가를 열었다. 김적의 5남 중 장남인 23세 김충수(1538-1597)가 선무원종공신 1등 김덕수가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돼 우산사에 배향됐다. 정유재란 때 김충수와 함께 순절한 부인 금성나씨에게도 정려가 내려졌다.
김약화(金躍華. 호-지암. 몽탄면 사창리. 나주인)
취암공 적의 7대손으로 일찍이 여호 박필주 사문에 들어가 수업하고 학문을 함에 있어서 매양 窮理를 위주로 하여 충효를 근본으로 삼았다. 항상 포은 정몽주와 중봉 조헌의 절의를 숭상하고 스스로 호를 은봉이라 하기도 하였다. 천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고 喪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 애통함이 몸을 상할 지경에 이르니 향리 사람들이 공의 효성에 모두 감복하였다고 한다. 오로지 학문에 열중하여 그의 문장 도덕이 널리 알려지자 주변의 선비들이 공을 찾아 제자를 자청하였다. 호남의 名士중 많은 사람들이 그의 門弟子로서 이름을 날렸다. 순조 28년(1828년)에는 도백인 김달순이 공의 효행과 지절을 들어 포계하여 조봉대부동몽교관에 추증되고 유림의 제안으로 취암사에 제향 되었다.
김언호(金彦浩. 자-현지. 나주인)
대제학 月塘先生 대경의 후손이며, 군수 정석의 현손이다. 19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어머니가 집에 있어 어렵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인 이씨가 “네가 능히 저자에 들어가 소매를 걷어 올려 (물건을) 팔려고 하는데, 내가 어찌 장사를 말릴 수 있겠느냐. 내 염려는 하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공이) 마침내 힘을 떨쳐 이현과 태치 전투에서 여러 차례 功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익림랑부장을 제수 받았다. 난정공신으로 鐵券에 새겨졌다. 탁용(擢用)되는 것을 사양하고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했다. 군자가 말하기를 “칼날을 무릎 쓴 자가 능히 관직과 봉록을 사양하니 바로 이를 ‘강재교(强哉矯)’라고 이를만하다.”라고 했다.선무원종록과 절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김영구(金永九. 자 - 孝文. 1851 - 1894.12.12. 몽탄면 다산리 차뫼. 나주인)
김영구는 김효문으로 더 알려졌으며 동학접주인 김창구의 동생이다. 형인 창구와 동생인 덕구 그리고 조카인 우신과 더불어 고막원전투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고막원전투가 패배로 끝나자 잠시 몸을 피하려고 집에 들렀다가 기다리고 있던 토벌대에 붙잡혔다. 그는 12월 12일 무안관아에서 처형을 당했다.
김영후(金榮後. 자-휘광. 몽탄면 사창리. 나주인)
공은 취암 적의 손자로 병오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동추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혼정을 보고 자취를 감추었다. 공은 귀중한 것을 귀하게 여기면서 ‘짚신처럼 천하게 이름을 버려라’ 하고 말고삐를 채듯 낙향하여 자연과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김옥형(金玉衡. 호-백단. 1923,3-2009,1. 몽탄면 다산리 차뫼. 나주인)
공은 1923년 3월 3일 몽탄면 다산리에서 태어났다. 중동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무안 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총무처 차관을 거쳐 동광고(현 목포 홍일고)교장을 역임하였으며 1979년부터 1981년까지 한성대학교 총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