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의 태를 묻은 곳이니 生의 터입니다. 한개마을의 전통이 이어지는 活의 고장입니다. 성산고분군으로 대표되는 死의 안식처입니다. 그러니까 나서 살고 죽을 때까지 성주에만 있으면 다 됩니다.
그런데 이런 캐치프레이즈는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충효의 고장'만큼이나 허망한 얘기입니다. 이런 얘기 말고 좀더 피부에 와닿는 성주의 이름표는 '참외의 고장'입니다. 고속도로 성주나들목을 들어서면서부터 참외 캐릭터가 제일 먼저 보입니다. 성주 참외가 유명하다지만 우리나라 참외 생산량의 70%에 육박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깜딱!' 놀랐습니다. 성주에서 참외 파업하면 그해 여름엔 참외 먹기 글른 겁니다. '큰 거 하나에 만 원' ㅎㅎ
하지만 저에게 성주는 생활사도 참외도 아닌 '막창의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93년, 서태지 2집 하여가가 '길보드' 차트를 휩쓸던 여름, 저는 과(科) 동기를 따라 난생 처음 성주를 가봤습니다. 3박 4일간 놀러 간 거지요. 낮엔 주로 대구에서 놀고 밤엔 성주로 돌아와서 '어김 없이' 막창에 소주 한 잔! 막창은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었습니다. 뭔 기름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첫날엔 몇 점 먹지도 않았습니다. 3일째에는 어느새 막창 맛에 눈을 떴지만 서울에 와서는 찾아도 찾을 수가 없더군요. 그 뒤로 10년쯤 지나니 이 별스런 음식은 어느새 전국구 메뉴가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성주는 막창의 추억입니다.
'막창의 고장' 성주로 문화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속한 한국문화답사회의 정기 답사를 따라 갔다 온 겁니다. 여긴 참 저렴합니다. 당일 코스 35,000원! 실비가 확실하지요?
生의 고장 성주의 세종대왕자태실입니다. 세종대왕은 역대 27명의 조선 왕 중 자식이 가장 많은 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식이 많아야 성군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게 나도 셋 째를 낳고 싶었는데'
18남 4녀에 세종대왕 본인과 왕비 6명이 어디 나들이라도 가려면 우등버스 한 대로는 모자랍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운전대를 잡아도 한 석이 모자랍니다. 이 많은 18왕자 중 왕이 된 장남(문종)을 제외한 17왕자와 왕세손(단종)의 태를 안장한 곳이 세종대왕자태실입니다. 17+1=18인데 이곳엔 19기의 태실이 모셔져 있습니다. 군호가 없이 그냥 '당(塘)'이라고만 적혀 있는 태실이 '영해군 장(璋)'의 또다른 태실이라고도 하는데 유력한 추정일 뿐입니다. 추정이 맞다면 대군도 아닌 서자의 태실을 두 개씩이나 만든 연유가 궁금합니다. 역사는 본래 미스테리가 많습니다.
기단석 위로 석물 자리가 비어 있고 태실비도 없는 것은 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의 태실입니다. 이들은 형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했던 동생들로서 세조 당시에 모두 훼손했던 것을 최근에야 복원했다고 합니다. 맨 앞의 거북이 석물은 왕위에 오른 세조의 것으로서 태실과 구분하여 태봉이라고 합니다. 역대 왕조가 태실을 조성한 것은 백성들에게 왕가의 권위를 내세우고자 하는 의도와 더불어 출산의 흔적조차도 귀하게 여기는 생명존중 의식에서 비롯됐지만 가장 큰 목적은 '명당 찜'에 있었다고 합니다. 전국 도처의 명당 중에는 이른바 왕기가 서린 곳들이 있습니다. 그곳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 왕이 나온다는 명당 중의 명당을 왕가에서 먼저 차지하거나 묘가 있더라도 빼앗는 겁니다. 한 마디로 반역의 씨앗을 묫자리서부터 차단하겠다는 '왕가 수호'의 의지인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이곳은 사적 제444호입니다. 생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곳인데 번호가 좀 아이러니합니다.
점심은 참외포크숯불가든에서 먹었습니다. 참외의 고장에선 돼지도 참외씨를 먹습니다.
금산에는 인삼 먹인 돼지, 보성에는 녹차 먹인 돼지, 문경에는 약돌 먹인 돼지, 산청에는 한약 먹인 돼지, 급기야 성주에는 참외씨 먹인 돼지까지…
정말, 돼지 팔자 뒤웅박 팔자네요.
돼지에게 묻습니다. "사료에 주로 뭘 섞어먹는지 얘기해주면 네가 어느 동네 돼지인지 맞혀보마."
성주향교로 가는 길가의 어느 집 건조대에서 빨래 대신 곶감이 마르고 있습니다. 그리 정겹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건 색감 때문이겠지요? 건조대와 철망 기둥의 강렬한 원색이 곶감이 주는 수채화 느낌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 뭔가 어색해 보입니다.
성주향교(왼쪽)와 동방사지칠층석탑(오른쪽)입니다. 원래 9층이었다가 7층만 남았다고 합니다. 탑이 절을 놔두고 비닐하우스 앞에 서 있으니 좀 안돼 보였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 한개마을로 들어섰습니다.
'그럼 그 옆에는 두개마을이 있나?' 혹시라도 이런 썰렁한 농담하지 마시라고 한개마을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예전에는 마을 앞으로 내가 흐르고 거기에 나루터가 있어서 대포촌(大浦村)이라고 쓰고 '큰 나루'라는 뜻으로 한개마을로 불렀다고 합니다. 서울 마포(麻浦)의 옛날 이름이 삼개나루인 것도 마(麻)를 뜻하는 '삼', 포구를 뜻하는 '개'가 합쳐진 지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한개마을은 생겨난 지 600년 가까이 된 성산 이씨 집성촌입니다. 한주 이진상, 한계 이승희로 이어지며 영남유학의 큰 뿌리를 이루는 유서 깊은 마을이지만 사람이 상주하는 집보다는 주인이 가끔 찾아와 관리하는 집이 더 많은지라, 活의 고장을 대표하는 곳이라기엔 좀 무색합니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를 촬영한 집도 있는데 관광객들이 찾아와 너무 함부로 기웃거리는 통에 사는 사람이 많이 불편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집인지는 안 가르쳐 드리렵니다.
한주종택의 멋진 소나무,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진짜' 구들장입니다.
성주가 死의 고장인 것은 성산동 고분군을 두고 하는 말인데, 하루 일정으로 다녀오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이곳은 100기가 넘는 성산가야의 옛무덤이 모여 있는 사적 제 86호 문화재입니다.
이밖에도 성주에는 가볼 만한 곳이 많습니다. 성밖숲, 회연서원, 독용산성, 무흘계곡 등을 모두 돌아보려면 1박 2일, 혹은 그 이상의 일정으로 다시 한번 찾아야 할 듯합니다. 물론 저녁엔 '막창의 추억'을 즐겨야겠지요.
글을 마치며, 제 블로그를 읽어주시는 구리 꿈나무한의원 이종우 원장님께 가야산야생화식물원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식물원을 좋아하시는 원장님께서 설마 이곳을 모르시겠습니까마는… 저자의 예의라고 받아주세요.
"원장님, 매일 블로그에 매달려 있다보니 어깨가 아파요! 침 한 대 맞으러 갈까요?"
2012. 11. 10.
첫댓글 참외씨 먹은 돼지를 먹으면 혹시? ㅡ,ㅡ
두 달째 멀쩡합니다
음......그소리가 아니고 농담으로.........혹시 사람몸에서 참외씨가 밖으로 분출되는건 아닌가하는.....ㅡ,ㅡ
^^....막창...ㅎㅎ..급 먹고싶네용..ㅋㅋ..
이 재미난 글중에 막창만 포커스하다니...흐미..ㅎㅎ
성주=막창..은 아닌데..
찾아보고 저도 놀랐따는..성주에 생각보다 갈곳이 많구나하구요..
좋은정보 감사합니당...
내가 그 사진(?) 올리려다가 '꾹' 참았다. ^.^
아하....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한개마을 좋쵸 가까운데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데
모르는게 너무 많은거 같아요~~
이런 이야기들을 미리 접하고 가면 이전과는 다른 성주가 보이겠죠?
우리나라 모든 고장에는 다 나름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물론 간척지는 빼고... 기대와 설렘을 안고 이런 곳들을 찾아다니자는 모임이 산 너머 살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