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를 읽는 방법 - 작은 수의 이름 허 민(광운대학교 수학과교수)
일상생활에서는 정수, 실제로는 자연수만 사용해도 거의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다.
그렇지만 정밀한 측정을 위해 1분을 60초로 나누고 1초도 또다시 나누듯이,
길이와 무게 등의 작은 단위도 더 세분할 필요가 있다.
분수와 소수는 이렇게 작은 양을 나타내기 위한 수 표기법이다.
작은 수로 표현되는 양은 실생활과 자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다음은 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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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소수 123.456은 ‘(일)백 이십 삼 점 사 오 육’과 같이 소수점 이하는 수사(數詞, 수의 이름)를 붙이지 않고 숫자만 읽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소수를 읽게 된 것은 자릿값이 있는 인도․아라비아 수 체계의 효율적인 기수법에 따라
소수를 나타내는 방법이 발견된 뒤인데, 소수는 서양에서 16세기 후반에야 등장했다.
그 이전이나 다른 문명권에서는 작은 수를 나타내는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어야 했다.
우선, 일, 십, 백, 천, 만 등과 같이 큰 수를 위한 수사가 있듯이 작은 수를 위한 수사가 필요하다.
영어권에서는 tenth(0.1), hundredth(0.01), thousandth(0.001), millionth(0.000001) 등과 같이
큰 수의 수사에 ‘th’를 붙여 작은 수를 나타내는 데 만족했으며, 작은 수를 위한 별도의 수사는 만들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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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동아시아의 선조는 큰 수뿐만 아니라 작은 수의 이름을 만드는 데도 부지런했다.
동아시아의 전통 수학인 산학에서는 1 미만의 수를 소수(小數)라 한다.
소수(素數, Prime number)와는 다른 개념이니, 헷갈리지 말길 바란다.
소수의 수사를 작아지는 순서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
수유(須臾)부터는 불교와 인도의 영향을 받은 수사인데, 순식(瞬息)은 ‘눈 깜빡할 사이’,
탄지(彈指)는 ‘손가락을 튀길 동안’을 뜻한다.
소수는 통상 사(沙)까지만 주로 사용되었고, 그 미만의 수사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진(塵) 이하의 수사는 세월이 지남에 나타내는 값이 바뀌고, 수사 자체가 바뀌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19세기 중엽까지 분(分)은 0.1이고 리(釐)는 0.01이며 이와 같이 1/10씩 줄어들어 사(沙)는 0.00000001이고,
그 뒤부터는 1억분의 1씩 줄어들어 진(塵)은 10-16, 애(埃)는 , 10-24⋯, 정(淨)은 10-128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는 사(沙) 이하도 1/10씩 줄어들어 진(塵)은 10-9, 애(埃)는 10-10, ⋯, 육덕(六德)은 10-19이며,
허(虛)와 공(空)이 합쳐진 허공(虛空)은 10-20, 청(淸)과 정(淨)이 합쳐진 청정(淸淨)은 10-21을 나타내고 있다. | |
여기서 0.1의 수사인 분(分)은 ‘푼’으로 읽기도 했는데, 우리의 일상 언어에도 깊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실력을 십분 발휘하다”에서 ‘십분(十分)’은 ‘충분히’를 뜻하는데,
실제로 십분(十分)은 이므로 비율로 나타내면 100%이다.
‘거의’를 뜻하는 ‘팔구분(八九分)’ 은 말 그대로 ‘열로 나눈 것 중에서 여덟이나 아홉’을 나타낸다.
‘꽤 많다’를 뜻하는 ‘다분(多分)하다’가 있고, ‘팔푼이’와 ‘칠푼이’의 뜻도 수량적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위에서 나열한 수사를 이용해서, 예를 들어 소수 ‘0.56789’는 ‘오분 육리 칠호 팔사 구홀’로 읽고,
전자의 전하량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19세기 후반 이후 개화기의 우리나라 교과서들은 소수를 읽을 때 예외 없이 수사를 사용했는데,
이를테면 “0.345는 ‘기령[또는 콤마] 삼분 사리 오호’라 읽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 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세계적 추세에 따라 간단한 소수에 대해서는 소수점 이하는 수사를 붙이지 않고
그냥 숫자만 읽고 있다. | |
산학에서 도량형의 작은 단위명은 소수의 수사를 그대로 이용했는데,
기초적인 단위의 1/10, 1/100, ⋯에 해당하는 단위를 차례로 푼(分), 리(釐), ⋯로 나타냈다.
길이의 단위에서는 치(寸) 미만을 소수로 나타냈는데, 길이의 단위 사이에는 다음 관계가 성립한다.
참고로 1자(尺)는 현재는 약 30.3cm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23~24cm였다고 알려져 있다. | |
이런 단위명이 사용된 예로, “원의 지름이 1장이면 둘레는 약 3장 1자 4치 1푼 5리 9호 2사 7홀이다.”라는 산학의 기록이 있다.
넓이의 단위에서는 무(畝) 미만을 소수로 나타냈는데, 넓이의 단위 사이에는 다음 관계가 성립한다.
(넓이의 단위 畝를 ‘묘’로 읽기도 한다). 1무(畝)는 6000제곱자(尺)로 약 166.7평에 해당한다. | |
금, 은 등의 무게를 나타낼 때는 단위 전(錢) 미만을 소수 푼, 리, 호 등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참고로 1전(錢)은 현재의 1돈과 같다. | |
위에서 소수의 이름은 ‘분리호사⋯’라고 했는데, ‘할푼리’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분명히 서술하고 있듯이, ‘할푼리’는 수가 아니라 야구에서의 타율과 같은 비율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할푼리는 일본의 고유한 비율의 단위로 개화기에 우리나라로 전래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리(釐)를 약해서 리(厘), 모(毫)를 약해서 모(毛)를 나타냈다.
그리고 비율을 나타내는 1/10은 할(割), 1/100은 푼(分), 1/1000은 리(厘), 1/10000은 모(毛), 1/100000은 사(絲), 1/100000 은 홀(忽) 등과 같이 소수의 수사가 할푼리에서는 1/10씩 작은 값을 나타낸다. 소수는 1을 기준으로 했지만,
할푼리에서는 할을 기준으로 할의 1/10을 푼(分), 푼의 1/10을 리(厘), ⋯와 같이 정하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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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소수가 수를 나타낼 때와 비율을 나타낼 때를 엄밀하게 구분하려면, 그것을 읽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
예를 들어 ‘1의 1/8은 1/8이다’는 소수를 이용해서 ‘1의 0.125는 0.125이다’와 같이 나타낼 수 있는데,
가운데 0.125는 비율을 나타내고 마지막 0.125는 수를 나타내다.
그러므로 이는 ‘1의 1할 2푼 5리는 1분 2리 5호이다’와 같이 읽어야 한다.
할푼리와 함께 일본에서 유래한 수사의 예가 있다.
우리와 중국 문헌에는 가장 큰 수의 이름이 일관되게 무량수(無量數)로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무량대수(無量大數)라 한다.
또 10-25을 나타내는 허공(虛空)을 일본에서는 공허(空虛)라 한다. | |
프랙털(fractal)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프랙털의 차원이 ‘분수’라고 설명한 책이 있어서 이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이는 ‘fractional dimension’을 번역할 때, ‘fraction’을 분수로 해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보통 프랙털의 차원은 무리수이다. 아래 그림의 그림을 참고하기 바란다. | |
역사적으로 영어권에서 fraction은 ‘정수가 아닌 수’를 일컫는 데 사용했다.
정수가 아닌 수 중에서 분수는 common[또는 vulgar] fraction, 소수는 decimal fraction으로 구분해서 나타낸다.
fraction은 통상 분수를 뜻하지만 분명히 소수도 나타낸다.
이런 fraction에 대응하는 우리의 수학 용어가 없다.
‘정수가 아닌 수’보다는 좀 더 뜻 깊고 간단한 용어가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현재 소수점이 있는 수를 지칭하는 소수라는 용어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3.14도 소수이고 100000.2도 소수이다.
작음을 뜻하는 ‘소(小)’와 어울리지 않는다.
산학의 소수가 진짜 소수이다.
게다가, 약수가 2개인 2 이상의 자연수를 뜻하는 소수(素數)라는 용어와 혼동된다.
소수(素數)를 ‘솟수’로 나타내어 구별하는 것보다(‘소인수(素因數)’와 ‘서로 소(素)’라는 용어도 있으므로)
차라리 부적절한 용어 소수(小數)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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