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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836m)12문(백화사 → 의상능선 → 산성 주능선 → 백운대 → 원효봉 → 효자리)종주
2005년 5월 8일(일요일) 맑음
▶ 함께한 분들 : 신홍범 회장님. 권이수 고문님. 오승환님. 신영수님. 김철수님.
▶5월 7일(토요일)
*울산역 출발 : 21:14 무궁화 열차(24,900원)
▶5월 8일(일요일)
*서울역 도착 : 03:20
*조식 : 03:30 ~ 04:00(4,000원) 서울역 부근에서 국밥으로 해결
*중골 백화사 입구 도착 : 04:40(택시이용 : 1대에 전원 탑승 30,000원)
▶북한산 개요
우리나라에서 열다섯 번째로 지정된 북한산 국립공원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 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으며 , 그 속에 1,3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 문화유적과 100여개의 사찰, 암자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어 다양한 볼거리와 생태, 문화, 역사 학습장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북한산의 최초 명칭은 부아악(負兒岳)입니다. 부아악이란 명칭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국망봉)의 어느 암봉 뒤에 애를 업은 형상의 바위가 붙어있다 해서 불렀다는 설(說 )과 산봉이 뿔처럼 뾰족하게 생겨 불렀다는 (부아 →불→뿔)설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부아 또는 횡악(橫岳)으로 불렀던 북한산은 고려시대 성종(成宗) 이후부터 1900년대까지 약 1천년동안 정상의 세 봉우리를 의미하는 삼각산(三角山), 또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화산(華山), 화악(華嶽)으로 불렸습니다.
북한산이란 명칭은 1711년 조선 중기의 숙종이 축조한 북한산성을 염두에 두고 남한산(성)과 대비하여 "한강 북쪽의 큰 산" 이란 의미로 1900년대 초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건국 초에 무학대사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삼기 위해 북한산을 답사하였으며, 수양대군 (세조)이 천문관측을 위해 보현봉을 올랐고, 많은 신하와 선비, 승려들이 풍수지리, 학문 정진, 수도(修道)를 위해 출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도 한양이 점령당하고 왕이 멀리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된 이후 북한산성 축조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에 대한 오랜 기간의 찬반양론 끝에 숙종(肅宗)이 1711년 전란 시 피난처 및 방어지로 삼기 위해 단 6개월 만에 7,620보(步), 약 8.5㎞에 이르는 오늘의 북한산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이어 북한산성의 외성 (外城)으로 1713년 탕춘대성을 축조하기 시작했으나 신하들의 반대 의견이 많아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숙종 이후 북한산성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이 약화되어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한 방치와 전란 시의 화재, 자연재해 등으로 성곽을 비롯한 주요시설, 사찰들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 국립공원 북한산 사이트 및 서울시 관광 사이트에서 퍼옴 -
▶ 산행기
도봉산에서 우이동 계곡으로 내려오면서 한북정맥 장정을 마친 회장님, 철수, 승환형님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고 모두에게나 오르고 싶은 북한산 백운대에 대한 진한 여운을 풀고자 북한, 도봉산 완주를 목표로 계획을 잡기로 하였다. 울산이라는 지형적 한계로 서울까지 오고 가는 차편의 불편함으로 두 봉우리의 종주는 많은 무리가 있다는 판단을 하고, 지도를 펼쳐놓고 여러 사이트의 산행기를 통하여 참고 자료를 찾던 중 북한산성의 12문을 통과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주릉을 종주한 ‘한국의 산하’ 산행기를 접하고 동행키로한 원정 대원들의 동의를 얻어 접근 및 철수 계획을 세웠다. 대원 모두 오랜만에 타 보는 열차여행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여 야간열차가 울산 시내를 벋어나는 순간부터 취음재로 맥주와 소주를 곁들여 적당한 주흥으로 어린시절로 돌아가 기분을 내다 대전역의 불어터진 우동으로 해장을 하자며 잠이 덜었다. 적당하게 마신 술로 골아 떨어졌다가 눈을 떠니 영등포를 지나고 있다. 에이 그러면 대전역 가락국수를 못 먹었짜나!
-. 04:50 중골 백화사 입구 들머리 출발
함께 산행을 하신 신영수 회원님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마을이라 들머리 접근이 무척 쉬웠으나 중골에서 들머리를 잡다보니 첫 관문인 대서문을 통과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다. 많은 등반객이 이용하지 않는지 등로가 희미하다. 새벽이 열리면서 계곡의 암릉이 조망되며 서서히 북한산에 취하기 시작한다.
-. 05:55 가사당 암문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의 안부에 성벽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 문이다. 여명이 밝았다. 배낭을 벗어두고 맨몸으로 의상봉으로 향한다.
-. 06:03 의상봉(503m)
다시 왼쪽으로 대서문에서 오르는 등로로 되올라 의상봉 정상에 선다. 오늘 하루 운행 할 예정인 북한산 마루금이 한 눈에 들어오나 골짜기 끝인 문수봉에는 구름이 덥혀 있고, 폴짝 건너뛰면 올라설 것 같은 원효봉과 푸른 녹음에 쌓인 염초봉, 노적봉의 암릉 절벽은 가히 장관이다.
진행할 의상 능선 방향으로 용출봉을 오르는 길은 암릉이 천연의 성벽을 이루고 있다. 올랐던 길로 되돌아 가사당 암문으로 내려온다.
-. 06:10 가사당 암문
형수님이 정성으로 마련해준 권고문님의 통조림을 먹으며 잠시 휴식 후 전진이다.
-. 06:20 용출봉(571m)
가파른 오르막 바위에 말뚝을 박아서 굵은 쇠줄로 안전레일을 설치해 두어 힘은 덜지만 재미있게 오른다. 정상을 지나 철계단을 내려서 작은 안부를 지나 다시 암릉을 오르면 용혈봉과 증취봉을 연달아 지난다.
-. 06:27 용혈봉
-. 06:33 증취봉
-. 06:38 부왕동 암문
증취봉을 가파르게 내려서면 세 번째 문인 부왕동 암문이다. 여기도 성벽으로 이루어 진 문이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은 자연 성릉이 되고 안부에는 성벽을 쌓아 출입문을 만들었다.
-. 06:55 나월봉
다시 육산 길의 오르막이 암릉으로 변하며 가팔라진다. 젊은이 두 사람이 뒤따라 오르더니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앞서 오른다. 이른 시간이고 비교적 난해한 코스라 주말 등반 객은 쉽게 접근을 하지 않나 보다.
-. 07:22 상원봉(715m)
바위 틈 사이로 내려서 육산 길로 나한봉을 지나 별 특징은 없는 상원봉에 이르니 선두가 반대편에서 올라온 두 분과 현재 지점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 우리의 상대가 되겠는가? 행색은 제법 갖춘 서울 양반이지만 손수건에 그려진 지도를 펼치고 동문서답이니.
상원봉을 내려서면 곧바로 안부에 네 번째 문 청수동 암문이다.
-. 07:29 문수봉
가파른 오르막이다. 잠시 만에 마당 같은 평평한 바위 정상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문수봉이다. 이곳은 의상능선과 불광동 쪽에서 올라와 향로봉, 비봉, 승가봉을 지나서 오는 북한산의 주릉 비봉능선과 만나는 봉우리이다. 안개로 시야가 그리 멀지는 않지만 부부 한 팀이 조망을 즐기고 있다.
문수봉을 지나 소나무 숲으로 내려서니 삼거리에 이정표가 있다. 오른쪽이면 비봉능선이고 우리는 왼쪽 대성문을 향해 산성 주릉으로 접어 던다. 오른쪽에는 현대에 와서 보수한 성벽이 함께하고 등로는 산책로 같이 잘 정비되어 있어 지금까지와는 분위기가 판이하다.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등반 객들을 이따금 만난다. 완만한 내리막을 내려서니 다섯 번째 문인 대남문이다. 널따란 안부인 이곳의 성문은 누각이 있는 정문이다. 왼쪽 이면 북한산성 계곡이고 오른쪽으로 성문을 내려가면 종로구 구기동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기서부터 산성 주릉선 이다. 대남문을 지나자 작은 봉우리를 앞에 두고 왼쪽으로 우회로가 또렷하게 나있다. 게으름을 피운다. 혼자 후미로 가며 우회로를 따른다. 한 구비 돌아서니 생각보다는 달리 봉우리를 점점 멀어 진다. 이곳쯤에서 돌아 갈까? 고집이 있지 뒤돌아 갈 수야 있나. 그대로 종종걸음으로 달려 본다. 기어이 사고를 친다. 나무뿌리에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아휴 창피해! 두리 번 그리며 둘러보니 다행히 혼자다. 서너구비 돌아서 원로를 회복하니 회장님이 걱정을 했는지 대성문 앞에서 이름을 부르며 기다리고 있다.
-. 07:43 대성문
여섯 번째 대성문은 지나온 대남문과 비슷한 분위기로 이곳 역시 누각이 있는 성문이다. 오른쪽이면 형제봉 능선이고 정릉이나 평창동으로 내려갈 수 있다.
대성문을 지나자 큰 오르 내림 없이 평탄하게 진행한다. 오른쪽 성벽 너머로 서울의 시가지가 내려보인다. 서너 고개를 넘자 일곱 번째 보국문이다. 성벽의 암문이다. 성문을 나서면 칼바위 능선이다. 뾰족하게 하늘로 솟은 하늘선 마루금과 짙푸른 녹음의 조화가 인상 적이다.
-. 08:12 대동문
보국문을 지나 완만한 오르막을 지나서 평탄하게 성벽을 따라 진행을 하니 여덟 번째 대동문이다. 성 안쪽 누각아래 마당은 조회 터 이었는지 작은 연병장은 연상케 한다. 오른쪽 성문을 나서면 진달래 능선으로 수유리와 우이동으로 내려갈 수 있다.
선두가 내달리기 시작한다. 백운대 오름길에서 병목 현상으로 정체가 되면 하산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봐 서두르는 모습이다. 철수는 어디가지 갔는지 콧벵이도 보이지 않는다.
가족단위로 휴일을 보내는 산책객들이 점점 불어난다. 잠시 만에 중국 무림영화에서나 봄직한 동장대다. 시단 봉 정상의 동장대는 북한산성 내의 3기 장대 중의 하나이다.
장대는 장수의 지휘소로 성안의 지형이 높은 곳에 설치한 건물이다. 성안에는 각 군문별로 지정 장소를 선정하여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를 두었는데 그 중 동장대의 규모가 제일 크며, 행궁을 비롯한 성의 안팎을 모두 살필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동장대의 기단은 정사각형의 이중 구조로 외부기단은 장주형 초석 12개를, 내부기단은 원형 초석 4개를 세웠던 중층 건물 구조였으며 또한 외부기간 사방에는 장대를 드나들 수 있도록 계단이 각각 설치되어 있었다.
이 장대는 1915년 8월 집중 호우 때 무너진 것으로 추정되며 복원되기 전까지는 장주형 초석 12개와 중앙에 원형 초석 4개, 대다수 박석 및 돌계단 일부가 그대로 남아있어 전문가의 고증에 의거 본래의 위치에 다시 사용하여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1995년 11월부터 1996년 11월까지 서울특별시에서 정성을 다하여 복원하였다. 동장대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삼봉(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이 장관을 이루며 압도하듯 눈앞에 서 있고 팔도 도총섭을 두었던 중흥사터와 훈련도감 옛터를 아래로 내려볼 수 있으며 옛 용암사터인 북한산장이 지척에 있다.
또한 날씨가 좋은날이면 멀리 대남문과 문수봉 옆의 청수동암문도 보인단다.
-. 08:22 대피소
널찍한 산책로를 따라 잠시 만에 북한산 대피소 터이다. 지금은 많은 시설물이 철거를 하고 방갈로 마냥 긴급 대피소만이 있고 샘터도 있다. 오늘따라 질이 떨어졌다며 서울 분들이 투덜대지만 울산 촌놈들은 그래도 탁한 약수를 한바가지 떠서 목을 축인다.
참나무의 녹음 아래로 잠시 만에 아홉 번째 용암문이다. 용암문을 나서면 오른쪽으로 도선사로 내려간다. 별 특징은 없고 그대로 지나쳐 오솔길로 접어 덜어 모두들 모여서 간만에 간식을 먹고 휴식을 하며 일정을 조정한다. 철수는 지금쯤 백운대 정상에서 만세를 부를까? 지나온 여정과 앞으로의 도정을 볼 때 중식을 이곳 간식으로 때우고 효자리 하산지점에서 해결하기로 한다.
오른쪽에 만경대를 두고 그 아래로 우회로는 느들지대이다. 왼쪽으로 노적봉의 뒷모습은 아침에 의상봉에서 볼 때와는 판이하다. 만경대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회장님은 우리도 저 길로 가야 할 것을 우회한다며 길을 잘못 덜었다고 투덜된다. 과연 올려다보는 만경대 암릉구간은 탐이 난다.
(만경대를 우회하며 바라본 노적봉)
느들지대를 지나자 삼거리 작은 안부다 왼쪽이면 노적봉을 오르는 등로 이리라 직진을 하여 우측에 만경대 암릉 사면 길에는 쇠줄에 의지하여 미끄럽고 아찔한 구간이지만 왼쪽 아래로 펼쳐진 노적봉과 백운대 사이의 계곡을 바라보는 재미는 솔솔하다. 오고 가는 등반객으로 속도는 더디어 진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웅장한 암릉 장벽이 앞을 가로 막는다. 고개를 덜어 하늘을 보니 더디어 태극기가 펄럭이는 백운대가 시야에 덜어온다. 원효봉 능선 계곡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합류를 하여 제법 높은 나무계단을 올라서니 열 번째 위문 앞에서 철수가 불만스러운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다. “추워 죽겠는데 빨리 안 오고 머하요!” “내가 늦었나 니가 너무 빨리 와서 그러치!” 약을 올린다. 등반객은 더욱 많아져 명승지에 온 분위기다.
얼른 다녀오라는 철수를 남겨두고 위문을 통과한다. 그대로 내려서면 종주 코스인 백운 대피소를 지나 영봉, 우이령으로 내려가는 하산 등로이다. 왼쪽으로 나무계단으로 계속 오른다. 계단이 끝이 나고 본격적 암릉 구간이다. 이곳도 쇠줄에 의지하여 가파른 바위길을 오른다. 다행인지 병목현상은 걱정했던 것 보다 심하지 않다. 마지막 힘을 내서 힘차게 오른다. 이때쯤은 언제나 새로이 힘이 솟아 난다. 정상이 코앞이니, 더욱이 북한산 백운대가 아닌가! 마지막 경사구간을 지나서 정상위의 또 하나의 바위에 선다. 야호! 한양이 내 발 아래라. 안타깝게도 안개와 가스로 인해서 서울쪽 조망은 없다. 인수봉도 희미하게 윤곽만 나타난다. 다행히 우이령쪽으로 도봉산은 희미하게나마 조망을 한다. 그래 다음은 도봉산이다.
-. 09:24 위문
-. 09:34 약수암
-. 10:55 상운사 갈림길
다시 위문을 통과하여 오르던 계단을 내려서 원효봉 계곡으로 내려간다. 느들지대가 많다. 이 시간에 오르는 분들의 동경하는 눈초리에 우리 모두는 우쭐해하며 모두를 여유가 많다. 지난차주 정맥 산행시 식수가 모자라 애를 먹었던 경험도 있었고 초행의 산행이라 식수 형편을 모르는지라 많이 준비를 하였지만 날씨도 그리 더위가 없었고 땀도 흘리지 않아서 준비한 식수가 남아돌자 오르는 분들에게 필요하신 분들께 주겠다며 호들갑을 떨어보지만 계곡에 계곡수가 지천인데 말도 걸어오는 사람도 없다. 개인의 기도처 같은 볼품없는 약수암(그래도 조계종 소속이라는 간판은 있었음)을 지나 계속 내려가도 상운사 입구가 나타나지 않아서 신영수님이 고향동생에게 폰으로 물어본다. 고향이 여기지만 님도 북한산은 처음 이란다. 허긴 등잔 밑이 어둡지. 여기도 중국 무협영화에 나옴직한 현란한 대동사 입구를 지나고 계곡을 가로질러 내려서니 상운사 갈림길이다. 직진길을 버리고 상운사로 오르는 길로 계곡을 건너서 길을 잡는데 나이 많은 소탈한 모습의 아주머니 한 분이 상운사로 초파일을 앞두고 불공을 드리러 간다며 앞서 걷고 있다. 인사를 건네고 설설 시장기도 돌고 우린 자리를 잡고 휴식을 한다. 지나온 등로를 뒤돌아보니 노적봉이 내려다보고 있다. 난 아침에 올랐던 의상봉이라고 우기지만 신영수님의 점잔은 충고에 말문을 닫는다.
(원효봉에서 바라본 염초봉 암릉)
-. 11:25 북문
-. 11:30 원효봉
다시 가파른 오르막이다. 오른쪽으로 상원사 입구 등로를 보내고 통나무 계단을 오른다. 잠시 만에 인기척이 많이 나는 열한 번째 북문이다. 외곽으로 떨어져 있고 찾는 사람이 없어서 인지 돌보지 않아 허물어지고 있다. 오른쪽으로 염초봉으로 오르는 길도 또렷하다. 왼쪽으로 휘어지며 그대로 원효봉으로 오른다. 여기서 부터는 성벽의 분위기도 다르다.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의 경계로 고양시청의 안내 간판이 보인다. 육산길 소나무 아래로 마저 올라서니 평평한 암반의 마당 같은 의상봉 정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며 조망을 즐기고 있고 회장님이 한분에게 북한산 애찬가를 듣고 있다. 그러고 보니 건너편 의상봉 능선 하늘선이 한눈에 덜어오고 그 위로 비봉 능선의 하늘선도 또렷하게 조망된다. 지금은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 시킨 염초봉의 위용도 장관이다. 원효봉에서 염초봉, 백운대로 오른는 원효봉 능선 암벽 등로가 국내 제일의 암벽 등로 이지만 많은 인사 사고로 인하여 이제는 차단을 시켰단다.
원효봉의 가파른 내리막 암벽은 쇠줄을 잡고 내려온다. 확 터인 전망이 피로를 씻어 준다. 암릉 구간이 끝나면 오른쪽에 성벽을 따라 호젓한 하산길이다. 왼쪽 계곡으로 빠지면 북한산성 계곡 탐방로를 다시 만나지만 신영수님의 추천으로 직진을 하여 효자리로 향한다. 계곡을 내려다 보니 옹기종기 집들도 많다. 신영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예전에는 개인 종교들의 기도처 및 점을보는 점집들 같은 무허가 건물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많이 정화가 된 모습이며 지금도 철거를 계속 하고 있단다. 개인 사찰같은 작은 원효암을 지나는데 오솔길 옆에 연노란색의 야생화가 보여 사진기를 덜어대 보지만 아니 이게 말을 듣지 않는다. 아쉬웁지만 이름도 몰라 중얼대고 있는데 “현호색 이네요. 고개를 덜어보니 저만치 뒷모습만 보여주고 지나가는 아가씨다. 우찌거리 예쁘노! 이 꽃처럼 예쁘구만! 그러고 보니 계룡산에서 보았던 보라색의 현호색과 모양은 같고 색이 다르며 크기가 조금 작다. 솔 밭길을 따라서 얼마 만에 시구문 매표소의 공단 직원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내려선다. 오른쪽으로 열두 번째 시구문을 통해서 북한산성을 벋어난다. “아! ‘김두한’을 소재로한 티비 연속극에서 말하는 시구문이 여긴가?” “서울 시내에도 시구문이 있다. 시구문은 성안에서 죽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이라 카는 기라” 신회장님의 가르치심이다. 그러고 보니 지나온 여타 문보다 출입구가 작다.
(효자리에서 바라본 원효봉)
-. 12:05 효자리
시구문을 나서니 북한산성의 첫 번째 문인 대서문을 제외한 나머지 열한곳의 성문 탐방을 마친다. 소나무 아래로 호젓한 산책로가 이어 지더니 무덤을 지나고 묘목 밭과 잘 다듬어진 가든의 정원을 지나니 8차선 도로가 지나가는 효자리다. 신영수님의 누님댁 조카의 봉고차 에스코트를 받아 효자리에 있는 북한산(부근의 모든 상점의 상호는 그이가 북한산이 포함되어 있었음)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누님이 손수 밑반찬을 장만하여 운영하는 식당에서 돼지갈비로 하산주를 맛나게 했다.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에서 다음은 도봉산을 오르기로 마음을 모으며, 예정 보다 이른 하산시간을 활용하여 도보로 구파발 전철역으로 이동하여 명산 북한산의 산행을 마감한다.
-. 16:35 구파발 전철역(900원)
-. 17:10 서울역
-. 17:40 서울역 출발(새마을 36,900원)
-. 23:05 울산역 도착
첫댓글 언제 또가보것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