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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 "/home/jnilbo/public_html/banner_include.php3"; ?> 지리산은 덩치가 거대한 만큼 사방 팔방으로 우람한 골을 열고 있다. 이 가운데 문수골, 피아골, 화개골, 악양골 등은 모두 섬진강 중간 허리를 향해 내리면서 넓고 넉넉한 토지를 펼쳐놓는다. 이 골짜기들엔 대부분 하나의 면 단위 이상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 길이나 집들의 형색을 보면 윤기가 흐르는데, 이는 지리산이 큰 골짜기를 통해 내려주는 풍물이 풍성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문수골엔 여행객들을 위해 두 개의 명물이 있다. 하나는 운조루라는 옛 집이고 다른 하나는 문수사라는 작은 절이다. 문수골은 운조루에서 시작되어 문수사에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포장도로가 시작되는 들머리에 운조루가 들어서 있고 그 길 끝머리에 문수사가 막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엄사 쪽으로 급히 떨어져 멈춘 곳이다. '남한 최고의 명당' 또는 '노령ㆍ소백 최고의 명혈'이라는 등의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또 어떤 책에는 이곳에 3대 진혈(眞穴)인 금구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가 다 있다고 적혀 있다. 각각 상대(上台)ㆍ중대(中台)ㆍ하대(下台)라고도 하는데 이중에 하대를 최고의 길지(吉地)로 친단다. 그리고 이 혈을 잡아 집을 짓고 살면 그 터의 발복으로 천운의 도움을 받아 부귀 영달한다는 말을 듣고 예로부터 사람들이 많이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이 집은 문화 유(柳)씨 종가댁이다. 어떤 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ㆍ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이 집터가 금환락지라 하였고, 어떤 책(육관 도사의 풍수ㆍ명당 이야기 '터'ㆍ 도서출판 답게)에서는 금구몰니의 혈이라고 하였다. 어떤 책에서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유부천(柳富川)이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한다. 어떤 책에서는 유부천이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자 뜻밖에 돌거북이 나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터가 금구몰니의 혈이라고 한다. 그 뒤로 유씨 가문은 번영을 계속하여 이 지방 제일의 부귀를 누리게 되었으며, 어린아이 머리 크기만한 돌거북은 유씨 댁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금주령 위반으로 유배를 당하자 토지면으로 스며들어 운조루를 지었다고 했다. 운조루 상량을 올리면서 유배가 해제되자 유이주는 무릎을 탁 치면서 "과연 이 자리가 명당이다"고 탄복했다고 한다. 사랑채는 네 칸의 몸채에 뒤쪽으로 꺾어 이어진 두 칸의 날개가 달려 있다. 몸채 왼쪽 끝의 한 칸은 내루형(內樓形)으로 기둥 밖으로 난간이 둘러져 있다. 이 사랑채의 구성은 궁전 침전이 그렇듯이 완전한 누마루 형식을 취하였고 여기에 일반 대칭이 연립하여 있다.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어서 사람을 많이 친 집임을 말해 준다. 더구나 본 사랑채와 직교한 누마루에서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 있어 특이하다. 또 특이한 것은 행랑채에 있는 '가빈터'라는 실(室)인데, 가족 가운데 어른이 운명한 3일후에 입관을 하여 입관후 3개월 동안 이곳에 안치했다가 출상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탓에 지금은 이 거대한 옛집을 관리하기조차 힘들어 행색이 초라해지고 있다. 문짝 떨어져 나간 사랑채 골방엔 버려진 토종 꿀통이 나뒹굴고 있다. 사랑채 부엌에는 둘레 2m, 높이 1.5m짜리 대형 나무 절구통이 하나 있다. 제법 골동품다운 골동품 같은데, 너무 큰 탓인지 아직 사람의 손을 안 타고 내버려져 있다. 사랑채 마루 밑에도 크나큰 나무 수레가 우람한 두 바퀴에 잔해를 기대고 드러누워 있다. 그 동안에 지리산의 영봉들과 쪽빛 하늘, 그리고 저 아래쪽 누런 벌이 그려내는 신선하고 풍성한 가을 색깔을 만끽할 수 있다. '지리산 반달곰이 있는 곳'이라는 설명이 빠짐없이 적혀있어 호기심을 자극하며 사람을 유인한다. 그러나 그 곰은 '야생 적응용'으로 방사한 그 '지리산 반달곰'이 아니다. 문수사에 도착하니 들머리에 '반달곰 먹이 팝니다'라는 안내문이 있고, 절 안에 들어가니 우리에 갇힌 반달곰 3마리가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이다. |
첫댓글 원장님 설명을 들으며 갔던 오미리가 참 정겨운 마을이라는 느낌이 있었어요. 근데 오미리의 '오미'가 뭐였드랬죠? 들었지만 까먹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