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6일 어머님 제사, 6월8일 아버님 제사에 부득이 참석치 못하였다. 특히 아버님 기일은 금년이 30주년인데 가게에 매달리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옛날 아버님이 약국 하실 때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이해가 갔다.
당시에 아버님이 친기 제사에 참석치 못함을 애석해 하면서 죄송하다는 편지를 백부님께 보냈듯이 나도 큰형님께 메일과 전화로 사정을 이야기 하였고 큰형 역시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를 해 주니 참 고마왔다.
다음은 어머님의 제사를 앞 둔 4월15일 제사에 참석치 못하는 사정을 두 형님과 동생에게 보낸 메일 내용이다.
제목: 내일이 어머님 제사인데...(2007년4월15일 발송)
아직도 겨울인가 싶은 생각에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었는데 오늘 성당에 가서 정원에 핀 온갖 꽃나무를 보면서 그제서야 봄이 왔구나를 느낄 정도로 세상 모르고 지난 3월과 4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거리의 사람들은 반팔로 다니기도 하는데 현경엄마는 유달리 추위를 타서 아직도 마스크에, 내복을 입고 다닙니다.
그리고 가까운 산은 푸르게 물들었고 입고 있는 옷이 두터워 더워서 땀이 날 정도 였습니다.
승용차에 이상이 생겨 카센터에 갔더니 엔진오일 부족으로 인한 이상이라 하더군요. 꼼꼼한 성격이라 5천 킬로에는 꼭 갈고 차계부에도 기록해 왔는데 차계부는 어디 갔는지 없고 자주 가는 카센터에서 조회해 보니 1만 킬로가 넘었습니다.
가게를 시작한 지 오늘로 딱 4개월이 되었는데 정말 정신없이 보낸 4개월이었습니다.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을 때도 많았고 현경엄마는 감기 몸살에도 강행군의 연속 입니다.(체중이 5킬로 줄음)
3월엔 2천5백 정도 매상이었고 4월엔 오늘까지 약 1천만원 매상인데 물건을 많이 해 넣어 순수입은 정확히 알지 못 하겠습니다.
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에 상가내 기존 문구점 옆에 새로운 문구점이 하나 생겨서 매출에 영향이 많을 것 같습니다.
내일은 어머님 제사인데 아직도 신학기 특수가 진행 중이라 장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현경이 엄마 혼자서는 하루도 감당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며 더우기 저 혼자 다녀오면 하루 반이 날라가는 상황이라 죄송하지만 이번 제사는 부득이 결석 처리해 주시길 양해 드립니다.
다들 힘들게 살아가는데 저 혼자만 힘들어 하는 걸 표 내는 것 같아서 죄송하며 너그러운 이해를 바랍니다.
제수비용은 별도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만 6월8일의 아버님 30주기에는 바쁘더라도 필히 참석토록
하겠습니다.
내내 잘 지내시길 빌며 이만 줄입니다.
4월, 5월에도 하루 평균 매출이 60-70만원 되었고 6월에는 하루 평균매출이 50만원 되었다.
4월에는 3,4월 수익금 중 1천만원을 만들어 정기예금을 들기도 했다. 셋째처남 말로는 하루 평균 50만원만 팔면 순 수익 월 5백은 되고 아주 잘 되는 편에 속한다 하여 방학도 있고 하니 일단 목표를 연 매출 나누기 365로 하여 50만원이 되는 것으로 하였고 1차년도 결과는 목표가 달성된 1억8천3백만원이었다.
4월13일에는 이 동네가 장사가 좀 된다는 소문이 났는지 종합상가내에 문구점이 한 군데 더 생겼다. 주인이 나보다 3살 위이고 문구업계에 오래 종사한 사람이라 잔뜩 긴장을 했고 결국 두 군데 에서 세 군데로 갈라 먹기하는 형국이 되었지만 큰 욕심내지 않고 마음 편히 가지기로 하였다.
7월에도 하루 평균 매출이 45만원 정도 올라 왔고 8월만 여름방학이라서 적자재정이었으며 이틀간 쉬었는데 하루는 집에서 쉬고 또 하루는 방학이 되면 우선순위로 만나 보고 싶은 구미의 금박교 소장네에 가는 일이었다.
동대구역에서 경호형님과 우소장을 만나서 구미의 금박교 소장네에 다녀 왔다. 구미역에 도착하니 금소장이 나와 주었고 우리는 금소장 사무실에 가서 좀 있다가 세명이서 갹출하여 10만원 만들어 건네 주고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에 위치한 <옛날옛적에> 라는 오리고기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쏟아지는 여름비가 운치를 더해 주었고 저녁식사후에 청개구리 노래방에서 좀 놀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 왔다.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는 저녁식사 전에 다 함께 구미의 명산인 금오산에 가서 가벼운 산책을 했고 금오산 중턱에 있는 왕산 허위선생의 유허비를 직접 볼 수 있었다는 점 이었다. 존경하는 유림이자 의병장이었던 왕산 선생의 구미시 임은동에 있는 생가에도 가 보고 싶었는데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8월초에는 민주화운동정신 계승연대(이하 계승연대)에 전화하여 혹시 나의 경우가 보상금 지급대상이 되는지를 문의해 보았다.
나의 경우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약 7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기 때문에 이미 2003년도에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명예회복조치가 되어 있었고 그 외 금전적인 보상은 없는 상태에서 그 후 관련 법률이 개정되어 2006년도 연소득이 4인가족 기준 36,084천원 이하이면 구금일수에 40,180원을 곱한 금액을 생활지원금 형태로 지원해 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2006년3월에 회사를 퇴직하였기 때문에 법정 소득 이하에 해당되어 당연히 해당이 된다며 계승연대의 조광철씨가 참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회사에 계속 다녔으면 받지 못할 거금을 국가로부터 받게 되었다. 정확한 금액은 8,799,420원(구금일수 219일×40,180원)이었다. 세무서에 가서 소득증명원을 떼고 그 외 여러가지 서류를 준비하여 몇 차례 서류가 왔다 갔다한 후 10월 중순에 생활지원금 명목의 보상금을 받고 그 중 10만원은 계승연대의 조광철씨에게 수고비조로 보내주고 나머지는 후일을 위하여 10월달 가게 수익금 140만원과 합쳐서 정기예금을 해 놓았다.
집에서 가게를 다니기가 여간 힘드는게 아니었다. 또래문구 사장은 집과 가게는 아주 가까워야 된다고 했는데 아침에 출근할 때는 별 문제가 아닌데 중간에 휴식을 취한다든가 교대를 한다든가 할 때 여간 힘드는게 아니었다.
또한 현경엄마는 운전도 못하고 중간에 집안 일도 하려면 왔다 갔다 힘든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현경엄마와 결혼생활 24년중 11년이나 살았고 현경이와 민중에게도 정이 많이 들었던 시지를 떠나기로 했고 9월22일 가게가 있는 동네로 이사를 왔다. 집을 세 놓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서 살 만한 좋은 동네라고 생각하면서…
가게를 현경엄마와 같이 하면서 현경엄마는 늘 나의 옆에서 뒷바라지만 하고 또 거기에다 집안 일만 하다 보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른 여자들 처럼 놀러 다니고 돈을 써 가면서 취미생활을 할 스타일은 못 되는 상태였다. 어쩌면 그런 스타일이 못 되는 것이 아니라 여유 부릴 만큼의 재력이 없는 것이 보다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특히 여자가 오십이 넘어가면 갱년기가 오고 잘 못하면 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던 중 이러한 문제를 타개할 좋은 기회가 찾아 왔다. 장롱속에 있던 간호사 면허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현경엄마 친구의 친구가 부곡온천병원의 간호과장인데 일손이 부족하여 사정이 되는 데로 와서 일을 해 달라는 것이다. 많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내가 좀 힘들더라도 이 좋은 조건에 며칠간 집,가게 그리고 나의 구속으로부터 좀 해방된 생활을 누리면서 노인들에게 봉사도 하고 돈도 좀 버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현경엄마로서도 무척 고생스런 일이기는 하지만 10월 부터 일단 해 보고 힘들면 즉시 그만 두기로 하고 매주 금,토,일요일 3일 근무하고 월 120만원에 4대 보험 다 넣어주는 조건이었다. 물론 이틀은 거기서 자야 했다.
10월부터 3개월간 현경엄마에게는 혹독한 노동의 시간이었지만 큰 무리없이잘 했고 현경엄마가 워낙 일을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라 병원쪽에서도 좋은 평가를 내린 걸 보면 23년만에 다시 하는 병원근무가 생소한 가운데서도 오로지 전심전력을 기울인 현경엄마의 성향을 읽을 수가 있겠다.
가게는 순교 종형수에게 부탁하여 아침 시간 그리고 낮 시간에 도움을 받기로 했다. 지난 1년간 장사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는데 그 중 순교 종형수의 도움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임을 밝혀 둔다.
중국 어학연수를 마친 현경이가 12월28일 귀국하였고 12월30일 오랜만에 네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 자인암소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그리고 2007년마지막 날 집에서 네 식구 함께 아침식사를 함께 하면서 바쁘게 달려온 금년 한 해를 돌이켜 보았다.
금년 한 해는 몸은 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최상의 한 해였음이 분명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 나왔다.
우선 이 가게로 집안 경제를 꾸려갈 수 있음에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다음은 현경이가 어학연수를 잘 마무리했다는 것이며, 또 민중이가 원만하게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장학금을 계속 받고 있다는 것이다.
또 작은형이 9월4일 뉴욕총영사 라는 요직에 발령받아 뉴욕으로 출국했음도 금년의 희소식중 하나였다.
과연 나의 인생에서 2007년도 만큼의 행운은 일찍이 없었고 또 앞으로도 다시 올 것인가? 의문을 가득 남기면서 행운은 2007년으로서 만족하고 앞으로는 현상유지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다가오는 2008년에도 좋은 일만 가득하길 빌면서,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