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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누가복음 21장 34-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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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최후의 만찬을 나누기 바로 전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십니다. 무엇으로부터 조심하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다시 오는 그날, 재림의 날을 대비하여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36절의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는 말과 대구법 형식으로 연결이 됩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졸음 때문에 잠을 자지 않는 상태보다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서 아예 잠이 들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21장 20-28절에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인자되신 예수님이 다시 오는 그날에 일어날 무서운 환란을 예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요한 사도가 요한계시록에 기록한 그대로 다 이루어 질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산으로 도망가고 이방인에게 나라는 짓밟히고,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들도 재앙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은 떨어지고 환란과 재앙으로 땅의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사람들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약속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예수님은 심판과 영광의 주로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직 돌아가시기 전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실망하고 다 집으로 돌아가서 믿음이 없는 자로 살아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종말에 이런 끔찍한 재앙이 있을 것을 예언 하신 후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연이어서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의 둔감한 마음을 깨우쳐서 최고의 경각심을 일으켜 주시려는 의도였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말해 왔던 것이 실제로 곧 가까웠으니 허투루 듣지 말라고 직언 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증언하기를,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조심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깨어 있지 못한 사람들 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 스스로가 조심하여 잘하고 있고, 깨어있기도 하다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에서 모든 행위의 근본원인이 남탓이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생활에서 겪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한 결과입니다. 누리는 것과 누리지 못하는 것, 근심하는 것과 평안 가운데 있는 것, 낙심하는 것과 소망가운데서 살아가게 되는 것, 칭찬하는 것과 비판을 일삼는 것, 화평케 하는 것과 불화와 다툼을 일으키는 것, 대화로 소통하는 것과 고집불통으로 자기주장만 고집하는 것, 이 모든 생활 중에서 나쁜 쪽을 선택하는 근원은 내 자신 스스로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자각하고 인정하는 순간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도 문제가 없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다른 사름들이 나를 건드려서 일어난 일들이다, 다 남의 탓이다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멸망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목이 곧고 완악한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은 직선적으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씀이고 더 노골적으로는 “너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라” 예수님이 우리 면전에 대고 선포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이 말씀을 직역해 보면 “자신에게 주의하라”는 말로, 내 자신이 일을 그르치는 주범임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조심하는 사람은 인자가 구름타고 영광 중에 임하는 것을 볼 사람이고, 조심하라는 말씀을 흘려듣고 무시하는 사람은 멸망의 재앙을 피해갈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1절에, “조심하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경고합니다. 성경 구조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조건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구약성경은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조건을 둡니다. 무조건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 지키라는 조건을 완수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찾고, 두드리면 형통한 은혜가 임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조건은 순종, 신약의 조건은 믿음이 됩니다.
예수님은 조심하지 않으면 이라는 조건을 붙이시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둔하여져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을 준비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하면 예수님을 다시 볼 것이라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조건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말씀 안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조심하고 있는 부분을 가볍게 처신해서 남에게 자랑하거나, 혹은 조금 조심하는 것들로 있다고 해서 나는 다 조심하고 있다는 자만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이 말씀은 언급을 안 하신 것입니다.
조심하고 있는 부분은 일절 언급을 안 하시고, 조심하지 않으면 비참한 결과가 온다는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강조해서, 우리 각자가 시간이 바쁘거니 이런 저런 핑계로 못하고 있는 부분, 그리고 게으름과 나태함 때문에 안 하고 있는 부분이 불거져서 눈에 확연하게 보이도록 드러나게 해주십니다. 안 되고 있는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알려 주신 것은, 조심하는 것이 한 번으로 끝나는 과제가 아니라 일평생 싸워야 하는 힘든 일임을 알려 주시려는 속 깊은 배려입니다.
34절에서, 조심하지 않았을 때는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가 밀려옵니다. 세 가지 모두가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내가 주의하지 않아서, 내가 그렇게 만든 주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방탕하다는 말은,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어지러워 현기증과 두통을 일으키는 증상을 뜻합니다. 술취함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만취해서 사리분별을 전혀 할 수 없는 폭음 상태를 말합니다. 방탕함과 술취함은 성령 충만함을 방해하는 요소로 세상에서 즐기는 쾌락적인 요소나 지나친 음주 유흥을 즐기는 것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생활의 염려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 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나친 근심과 걱정 때문에 마음이 사분오열 되어서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불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방탕함과 술취함으로 시간을 다 보내고, 생활의 염려로 내일을 바라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당장 오늘 내일 살아가기도 바쁩니다. 이런 상황에서 머나먼 미래에 예수님을 만나려는 준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조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조차 단 한줌도 담고 살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어 가는 길인지 알지 못하는 불행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히 자신의 곁에서 가르침을 받고, 훈련 받은 제자들조차 스스로 조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것을 심히 염려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을 생애 며칠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하실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제자들의 앞날이 시온의 대로같이 크게 열려지길 원하시는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아껴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래야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하심과 무지한 제자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한 간절한 음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발생하는 이 세 가지 때문에 결국 우리의 마음이 둔하여 진다라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주님 안에 거하라고 하셨지만, 조심하지 않아서 즐기느라 바빠서 주님 안에 거할 시간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셨지만, 주님과 떨어져 있어서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무엇을 구할 생각조차 안 합니다. 하루하루 불안한 마음으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지도 못합니다. 결국 조심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염려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 땅에 육체로 안 계실 때에도 그들 모두가 참 제자로써 조심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열매 맺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있으면 육신으로는 이별해야 하는 것을 너무나도 아쉬워하시면서, “애들아! 먼 훗날에 나를 다시 만나려거든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라. 그래야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나는 너희들 모두를 다시 보기를 정말 원한다. 꼭 다시 만나자” 이 마음으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귀가 있는 자는 들었을 것이고, 흘려들은 자는 먼 길을 돌아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조심하지 않아서 마음이 둔하여진 상태로 허송세월하다가는,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 뜻에 벗어나 조심하지 않고 살아갈 때, 그때그때 마다 경고의 말씀을 해주시고, 때로는 정신 번쩍 들도록 혼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든지 우리에게 자율적인 선택권을 인정해 주십니다. 물론 조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는 그때마다 돌아오라고 말씀해 주시지만, 우리가 귀를 막고 살아서 듣지 못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날, 종말의 날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시 오시는 시간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시에 찾아옵니다. 때와 시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이라고 했으며, 그 날은 밤에 도둑같이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덫은 함정이나 올가미를 말하는데, 보이지 않아서 언제 어떻게 덫에 걸리고, 함정에 빠질지 대비할 수 없습니다. 조심하지 않는 사람은 즐기다가, 방황하다가, 염려하다가 일순간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영원한 멸망으로 가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 자리에, 30분 후에 오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려운 일입니다. 때가 되서야 후회하고 예수님을 불러도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모든 사람이 조심하여 하나님께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다리심이 언제까지 일지는 마무도 모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로 계획하신 그 날에 한 치의 오차 없이 오실 것이기 때문에 늘 조심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날은 개인적인 날이 아닙니다. 35절에 예언된 대로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는 사람에게 동시에 임하는 재앙과 심판의 날로 도망치고 숨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들도 다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당장 스스로를 조심하지 않으면 내일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날에 맞이할 재앙을 피하고 인자 앞에(예수님 앞에) 서려면 36절 하반절에,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이와 비슷하게 데살로니가전서 5장 6절에서도,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말씀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면 매사에 성령께서 우리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인도하십니다. 가지 말라는 곳에 가자고 하여도 거부하게 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눈을 돌려 버립니다. 듣지 말아야 할 말이 들리면 자리를 피합니다.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손을 감추어 버립니다. 비판하는 험담이 나오려 하면 입을 닫아 버립니다. 이렇게 삶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로 깨어있으면 내 육신의 몸과 마음이 방탕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에 절대로 묶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조심성을 잃게 되어서 방탕하고 술 취하고 생활의 염려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사람에게도 불화와 분쟁의 원인자가 되어 다투고 싸우게 만듭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폭탄 같은 사람이 되어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기 때문에 위험하고도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조심함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깨어 있어야 가능한 일이며, 깨어 있는 것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관계를 늘 유지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니 않는다”고 질책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는 밤낮으로 기도하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를 통해 스스로를 조심하는 행동을 보이지 못하는 모습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너희는 스르로를 조심하라”는 이 단락 다음에 나오는 22장의 시작이 가룟유다가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 기회를 찾는 장면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최악의 결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배반을 일으키는 경악할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탄의 먹잇감이 되고, 사탄은 우리를 조종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나중에야 가룟유다의 배신을 보고 반면교사로 삼았을 것입니다. 나도 기도하지 않으면 저렇게 망하는 길로 가겠구나 뼈저리게 실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항상기도하며 깨어 있으라”특별 당부의 말씀을 다하신후에, 이제는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37절에,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낮에 가르치셨다고 했는데, 낮이라는 말이 ‘매일같이’라는 말도 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면서도 3년 동안 사역하시던 그 모습 그대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가르치기를 계속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불과 삼일 후에 십자가에 매달리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수요일에는 베다니 시몬의 집에 거하셨고, 목요일에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고, 금요일에는 잡히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로 엄청난 고난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도 평정심을 유지하였다는 것은 보통의 담대함을 뛰어 넘으신 행동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의 화도 참지 못하고 어그러뜨리기 일쑤인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처럼 행동하기는 예수님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스스로에게 완벽한 조심성을 부여하고 유지한 분이셨습니다. 나중에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떠올리며, 예수님처럼 나도 그렇게 따라서 행동하자고 결심하였을지 모릅니다. 주님은 스스로를 조심하라는 말씀을 몸소 보여 주신 살아있는 완벽한 시범교사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밤에는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다”고 합니다. 쉬셨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조용하게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계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혼자 계시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12 제자들을 선택할 때도 기도하시러 산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드린 후에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틈만 나면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기 위해 군병들에게 잡히시기 전에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한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만 선포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함으로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자에게는 성령이 임하시기 때문에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능력으로 항상 깨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최상의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토록 모진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 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순절 십자가만 떠올리면 생각나는 영화의 장면이 있습니다. 패션오브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서 차마 눈뜨고는 보지 못하도록 잔혹한 채찍질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채찍질 당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아버지여! 준비되었나이다” 하시고 채찍질을 끝까지 이겨내십니다. “아버지여! 준비되었나이다” 이 말씀이 사순절 기간에 저에게는 꼭 한 번씩 영화 장면과 함께 생각이 납니다. 기도하신 후에 성령께서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셨기 때문이라 하여도, 보기만 하여도 떨리고 놀라운 광경입니다. 저에게는 이 장면이 생각 날 때 마다 한 없이 부끄러운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도의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기도함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로 사셨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를 늘 조심하여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음으로 성령에 힘입어 죽음까지 이겨내셨습니다. 조심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기도하면 조심하게 되고, 기도 없이는 조심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고, 깨어있고, 스스로를 조심하는 반복되는 기나긴 과정을 묵묵히 걸어온 사람들은, 드디어 그날에 이르러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는 말은 제자들과 헤어지면서 꼭 다시 만나자는 주님의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다시 만나고 싶으시죠? 그렇다면 깨어 있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신 후에는 스스로를 주의하여 매사에 조심하십시오. 이러한 삶이 일상이 되면 반드시 약속하신대로 그날에 우리 주님과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그날에 다 주님 앞에서 기쁨으로 만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시력이 좋지 않아서 갈라디아서 말미에 큰 글자로 썼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 마지막인 38절의 말씀이 큰 글자로 보였습니다. 모든 백성이라는 글자가 00교회 모든 성도들로, 그리고 성전이라는 글자가 00교회 예배당으로 큼지막하게 보였습니다. 큰 글자로 38절을 읽으면 “00교회 모든 성도들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00교회 예배당에 나아가더라”가 됩니다. 아멘.
정말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음으로, 그리고 우리 자신 스스로를 주의하여 살아가실 때, 말씀 듣는 것이 너무 기대되어서, 그리고 사랑하는 교우들 빨리 보고 싶어서 예배당에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나오는 풍경이 하루빨리 연출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죽음을 앞두시고 우리에게 특별히 당부하신 주님의 귀한 약속의 말씀을 꼭 붙드시고, 주님 오는 그날까지 승리하며 살아가시는 00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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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스스로를 조심하지 못하여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시고,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음으로 하나님께로 속히 돌이킬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사순절 기간 동안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음으로 스스로를 조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고, 죽음까지 이겨내신 기도의 능력을 본 받아 우리도 세상 유혹을 다 물리치고 그날에 다시 만날 주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쉬지 않게 하옵소서.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을 지키고 행하도록 도와주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60313 주일설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누가복음 21장 34-38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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