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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푸른 시의 방 원문보기 글쓴이: 강인한
[나의 비망록] 시인 50년 그 끝없는 싸움 / 이수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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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가 좋아서 덤벼들었다
그때는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 수도 없었기에 다른 사람이 쓴 시와 비슷하게 문장을 만들어갔다. 그러다가 2학년 1학기 때 시를 배울 기회가 생겼다. 당시 구필순 여자 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쳤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시 한 편을 써오라고 했다. 나는 나름대로 〈봄〉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제출했다. 그다음 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지난번에 제출한 시 가운데서 가장 잘 쓴 시를 소개해주겠다’고 하면서 바로 내가 제출한 시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내가 쓴 시가 가장 잘 쓴 시란 말인가. 나는 마음속으로 뛸 듯이 기뻤다. 그래서 ‘제발 그놈의 시를 그만두라’는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나는 줄곧 시에 매달려 있곤 했다. 나는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다만 좋아서 시를 썼다. 이름난 선생님이나 선배가 있다면 더 알기 쉽게 배웠을 테지만 그럴 수도 없고, 때때로 사 보는 《학원》이란 잡지가 가장 멋진 교재였다. 그리고 책방에 가서 신석정 선생이 시집으로 펴낸 《슬픈 목가》를 한 권 샀다. 거기엔 문장이 깔끔하고 소박하게 쓴 전원시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너무 어렵지 않게 시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작품 속에 담긴 언어를 마치 나의 것처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조그만 흉내가 내겐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되었으니까. 그리고 6‧25 당시 군에 입대해 장교가 된 형님이 휴가차 부산에 왔을 때 나를 위하여 앤솔러지 시집 한권을 사다 주었다. 여러 사람의 시인들이 대표작을 모아서 만든 시집이었다. 1956년 그 당시에 시인들이 그리 많지 않던 때여서 금방 이름을 대면 알 것 같은, 꽤 유명한 시인들이 들어 있어서 시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의 시에 대한 관심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되다가 대학 진학 관계로 쉬게 되는데, 그 이전에는 한글날 백일장이나 문예작품 모집에 더러 얼굴을 내밀곤 하였다. 내가 부산사범학교 2학년 때, 《학원》에 우수작으로 실린 나의 작품 〈낙엽〉을 여기에 소개한다. 2학년이 되자 정준섭, 유학영이 내게 “저쪽 문리대(인문대) 국문과 학생들과 우리가 같이 문학서클을 만드는 게 어떠냐?” 하고 물어왔다. 그리고 당시 문리대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김 훈, 안종관, 이영섭 등과 어울리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모임을 만든 우리는 정말 끈질기게 만나 각자의 작품들을 토론했다. 당시 이영섭의 부친이 의정부지청 검사여서 우리는 아현동에 있는 그 집 응접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일요일이 되면 주로 시와 단편소설을 준비해서 읽고 비평했다. 아침부터 만나 저녁 무렵까지 고되게 읽고 꽤나 진지하게 토론했다. 저녁이 되어 각자 집으로 돌아오면, 허전한 마음을 시로 적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열심히 시로 써온 걸 시험 삼아 신춘문예에 내기로 했다. 〈동아일보〉에는 이미 써둔 〈당신께 드리는 나의 노래〉를 접수시켰다. 그러고 나서 〈서울신문〉에 다시 새로운 작품을 써서 내기로 하고, 하루 종일 다섯 편의 시를 만들어서 마감 직전에 제출했다. 겨울방학을 맞아 나는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1963년 1월 1일까지도 〈동아일보〉나 〈서울신문〉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질 않아 ‘나는 떨어졌구나’ 하고 생각하고 거리에 나가서 신문을 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동아일보〉 가작 입상에 내 이름이 붙어 있고, 서울신문에는 당선작으로 뽑힌 것이다. 그리고 〈서울신문〉에는 내가 보내지도 않았던 당선소감까지 실려 있었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당시 〈서울신문〉 문화부에 근무하던 박성룡 선생이 나와 연락이 되질 않아 나 대신에 당선소감을 써준 것이었다. 그때의 〈서울신문〉 심사평에는 이런 글들이 적혀 있다. “〈고별〉 〈편지〉의 이수익은 언어를 세공하는 재간이 비상하다. 차분히 가라앉히고 실수 없이 한 자 한 자 박아가는 균정미와 무리 없는 언어의 구사는 믿음직했다. 다만 스케일이 너무 작아지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박남수) 이수익으로 말하면 그 시어의 밝혀진 푼수로 높이 평가 았다. 시어들이 아직도 실생활어와 동떨어진 어려운 특수문화어로서 많이 쓰이고 있는 속에 이 시인의 시어 탐구는 실생활어에 뿌리를 박은 점 마음 든든히 느껴진다.(서정주)” 이렇게 해서 나는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김원호와의 만남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지낼 것이 아니라, 열심히 발로 뛰면서 또 다른 시단에의 지평을 열어가자는 것이었다. ‘신춘시’ 동인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 1963년도에 〈조선일보〉에 당선한 박응석, 〈동아일보〉에 당선한 신명석, 〈서울신문〉에 당선한 내가 있고 그 앞 해에 〈동아일보〉에 당선한 김원호, 〈한국일보〉에 당선한 박이도, 〈조선일보〉에 당선한 신세훈 등이 있어 1962년과 1963년 당선자들만 모여도 여섯 명이나 되었다. 신문사가 어렵게 신춘문예를 통해 인재를 배출해 놓아도 이들을 일일이 뒷받침해줄 수 없는 현실이었던 데다가, 당시로서는 《현대문학》 《사상계》가 발행될 뿐이어서 작품을 써놓고도 발표할 지면이 없다는 것이 젊은 시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김원호와 나는 청파동에 있던 기독교 기숙사로 가서 박이도를 만나고 신세훈과도 인사를 나눈 다음, 부산으로 가서 박응석, 신명석 등과 만나 ‘신춘시’ 동인이 되자는 것을 약속했다. 그리하여 나는 ‘신춘시’ 동인이 되어 그 첫 번째 동인 시집에 〈별부(別賦)〉 〈저 슬픈 함잉은〉 〈귀향〉 등을 발표했다. “첫째, 좋은 작품을 보내시면 수록하겠습니다. 둘째, 원하시는 분은 《현대시》 집필자의 평을 보내 드립니다.” 등이 눈에 띠었다. 그리고 ‘서울 중구 동자동 39 문선각 《현대시》편집계’ 라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정말 좋은 기회구나 싶었다. 집에 돌아와 그동안 써둔 몇 편의 작품을 《현대시》 편집계로 보냈다. 그리고 그 일은 한참 잊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서울신문〉에 등단한 후 처음으로 신문사에 나가서 인사를 드리는 자리에서 그곳 편집부의 임진수 선생이 반갑다는 듯이 나를 맞이했다. “이형, 내가 《현대시》 편집을 하고 있는데 전에 보내준 작품을 잘 받았어요. 그리고 신춘문예 당선을 축하해요.” 이렇게 해서 임진수 선생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다음 광화문 뒷골목의 〈아리스〉 다방으로 나가 박남수, 전봉건 씨에게 소개되고 김광림, 김종삼, 김요섭, 장만영 선생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 후로 박목월, 조지훈, 정진규, 김수영, 허만하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시단의 유명 인사들을 저녁마다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크고 엄숙한 복이었던가. 박남수 선생님한테서는 ‘앞으로 《현대시》에 들어와서 열심히 작품을 발표하라’는 고마운 말씀도 들었다. 그리고 부산에 내려온 나는 그동안 써둔 몇 편의 시를 박남수 선생님께 보내고 며칠 후 이런 엽서를 받았다. “혜서(惠書)와 작품 받았소. 참 질(質) 고운 언어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세 편 다 괜찮습니다. 더 많은 작품을 계속 쓰시오. 동봉한 작품은 《현대시》에라도 주도록 합시다. 3집은 머잖아 책이 돼 나오는 모양이니 4집쯤에. 그러나 더 좋은 작품이 쓰이면 그동안 바꾸기로 하고. 건강하십쇼.” 이런 내용이었다. 문제는 《신춘시》와의 관계였다. 분명히 《신춘시》 1집에 작품을 보냈는데 앞으로 《현대시》에 작품을 발표한다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신춘시》는 신춘문예 출신들이 모여서 처음 창간하는 동인지인 데 비해 《현대시》는 정작 동인지라기보다는 한국시인협회 소속의 몇몇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화집 같기도 하고, 반(半)동인지 같은 성격을 지닌 그런 잡지였다.(제1집부터 3집까지는 박남수, 조지훈, 유치환 3인을 편집위원으로 세우고 전봉건 씨가 저자대표로 되어 있는데 4집과 5집에는 박두진, 박목월, 서정주, 장만영 씨가 새로 편집위원으로 추가되었다.) 《신춘시》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현대시》에 작품을 추가 발표할 수가 있었지만 그것도 불편스럽고 해서 나는 《현대시》를 택하고 김원호, 박이도 등 《신춘시》 동인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현대시》 4집에 처음으로 〈남은 悲歌〉 등 5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것은 내 생애 가장 빛나는 날이기도 했다. 1963년 11월이 되자 나는 〈신인특집〉이란 타이틀을 떼고 《현대시》 5집에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후, 《현대시》는 나이 든 세대는 물러나고 젊은 세대들에게 동인지 제6집을 물려주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인은 주문돈, 허만하, 김영태, 이수익, 정진규, 이승훈, 황운헌, 이유경, 민웅식 등이 되었다. 이 6집에 발표한 나의 〈강변에서〉를 소개한다. 1966년 3월 《현대시》 9집에 〈우울한 샹송〉을 발표하면서 나는 30개월의 군복무에 들어갔다.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소령급 이상의 장교들이 이곳으로 와서 군사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배우는 곳이어서 바쁠 때는 엄청나게 바빴지만 다소 여유가 있을 때는 작품이라는 것을 기웃거려 볼 수도 있었다. 진해 시절, 특히 고(故) 황선하 시인과의 만남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육군대학에 있는 것을 알고 황선하 시인은 자기 집이 있는 창원으로 초대했다. 나는 번지만을 들고 낯선 창원 땅을 헤맨 끝에 그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마을 중국집으로 가서 술을 꽤 마셨던 것 같다. 정신을 잃은 채, 자고 난 다음 눈을 떴을 때는 벌써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입맛과 술이 그리웠을 젊은 날에 잊을 수 없는 우리의 만남이었다. 황선하 시인은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진해와 창원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성격이 워낙 차분하고 깔끔해서 만날 때마다 조심스러워했지만 천성이 워낙 고결한 분이었다. 그리고 진해에서 강계순 시인과의 만남도 잊히지 않는다. 마침 진해에 근무하고 있던 영관급 해군장교의 아내였던 강 시인이 이미 그곳에서 동장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서른 살이 갓 넘은 젊은 시인이, 그것도 아리따운 미모를 갖춘 여성이 동장을 한다는 것은 제법 화젯거리였다. 강계순을 만나서 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진해해군사관학교를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그가 부르는 청아한 노랫소리에 흠뻑 빠져들곤 했다. 또한 진해 시절엔 〈한글날 백일장〉 심사위원이 되어 푸른 군복을 입고 진해여고 교정에서 심사를 보기도 했다. 내가 시인이라는 것을 알고 진해문인협회 같은 데서 추천을 해서 생긴 일이었다. 그 시절, 〈흑백다방〉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진해 로터리에 자리 잡고 있던 이 다방은 얼굴이 호방하게 생긴, 서양화가 유택열 씨가 주인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던 다방, 그곳 문화예술인들이 모여앉아 어제의 행사를 거론하고 내일 해야 할 일을 함께 다독여주던 곳이 바로 〈흑백다방〉이었다. 이제는 다방이 없어지고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 아쉽다. 어쨌든 그런 낭만이 있어서였든지 군복무를 마칠 때 나온 《현대시》 16집에까지, 나는 꾸준히 시를 발표할 수가 있었다. 다만 동인지 12집에는 유일하게도 작품을 싣지 못했다. 김규태 시인과는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나서 신문사로 찾아가 인사했고, 1965년에 《현대시》 동인이 되고 나서 더욱 가까워진 사이였다. 필요 없는 말을 잘 하지 않는 그는, 반드시 해야 할 말은 꼭 하고 마는 소신과 기질이 있어서 우리는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다. 오랜만에 그를 만나면 만남도 즐거웠고 마치 큰형을 대하듯 자연스러웠다. 그는 참으로 마음이 크고 묵직한 인물이었다.
얼마 후, 나는 한국시인협회 소속으로 아직 한 권도 시집을 발간하지 못한 시인을 골라 처녀시집을 내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돈이 모 여사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국시인협회 박목월 회장이 좋은 일에 쓴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시집을 출간했다. 젊은 날 문학으로 번민하고 희열하던 그 시절의 뜨거운 고뇌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시집이었다. 나는 《우울한 샹송》이라고 시집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970년부터 부산의 젊은 세대인 이달희, 박지열, 정영태, 이병구 등이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부산대학교 재학생인 이들과는 가끔 방송국 옆 다방에 모여서 그들이 써온 시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는 허만하, 김규태 선생과도 어울려 자갈치 목로에서 정겨운 시간들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이들은 신춘문예와 문예지를 통해 문단에 등단했는데, 그중에서 계간문예지 《시와 사상》을 창간한 정영태가 가장 돋보이는 활동을 하던 중에 뇌졸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1974년에는 청마 유치환 씨가 부산에서 심야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지 7주기를 맞이하면서 부산의 문인들이 청마 시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시인 손경하 씨가 회장을 맞고 내가 총무가 되어 시인과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석 달 만에 제막하게 되었다. 땅 소유자 백광덕 씨의 도움을 받아 사하동 에덴공원 산마루에 서게 된 이 시비는 향파 이주홍 씨의 글씨로 〈깃발〉이라는 시가 새겨져 펄럭였다. 1974년 2월 13일의 시비 제막식에는 고인의 미망인과 회장의 제막, 김규태 씨의 비문 낭독, 허만하 씨의 헌시, 부산문화방송 어린이합창단의 청마 작시 〈메아리〉 합창 등이 진행되었다. 그 시절, 김규태 시인과 허만하 시인을 생각하며 서울에서 내가 썼던 시 〈그리움에 기립(起立)하다〉를 다시 읊어본다. 그래서 술자리엔 김규태, 허만하, 이형기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어울리는 풍경이 자주 만들어졌다. 시인 등단 경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한참 격이 떨어지던 나는 큰 형님을 모시듯 이들 곁에 조용히 앉아서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이들 세 사람의 대화는 참으로 끝이 없었다. 유달리 말이 빠른 이형기 선생과 여기에 질세라 재빠른 언변으로 대화하던 허만하 선생, 천천히 말을 풀어내던 김규태 선생이 남포동과 광복동의 술집을 문화의 거리로 변모시켰다. 나이로 따지면 허만하 선생이 1932년생, 이형기 선생이 1933년생이고, 김규태 시인이 1934년생이어서 비슷비슷한 연령이었다. 1976년에는 이해인 수녀님이 〈민들레의 영토〉라는 시집을 내었다. 그 당시 부산MBC의 오후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던 나는, 젊은 수녀님이 시집을 낸 사실이 무척 새롭고 신선했다. 그래서 수녀님께 전화를 하고, 우리가 함께 방송할 날짜를 잡았다. 하얗고 검은 수녀복으로 나타난 이해인 수녀님은 조용하고도 단정하게 하느님께 바치는 오랜 침묵의 기도를 들려주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간 것일까. 마침내 수녀님의 〈민들레의 영토〉는 국내 출판가를 뒤흔들며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민들레의 영토〉에 담긴 뜻이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가는 데,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문예진흥원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두 번째 시집 《야간열차》를 준비하게 되었다. 1969년 《우울한 샹송》 후 9년 만에 내는 시집이었다. 나는 43편의 시를 준비하고, 김영태에게 표지화를 부탁했다. 김영태는 독일 병정처럼 날카롭게 서 있는 나의 인물화를 펜화로 그려 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당시에는 문예진흥원은 문공부 산하기관이었는데, 내가 실리기로 한 작품 〈젊은 사자(獅子)의 추억〉이 반정부적이라 하여 ‘빼라’는 지시가 문공부에서 내려왔다. 그 당시에는 구 상 선생님이 (문예진흥원)에 계셨다. 시집 편집을 맡은 전봉건 씨가 구 상 선생님에게 부탁하여 ‘그 작품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들려주었지만 문예진흥원 담당자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문예진흥원 기금을 받지 않기로 하고 그 작품을 작품집의 맨 첫머리에 실었다. 작품 한 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가져오는 터무니없는 결과를 맛보았던 것이다. 4‧19를 소재로 다룬 〈젊은 사자의 추억〉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1983년 고려원출판사에서 시문학 총서를 기획하면서 나의 세 번째 시집이자 시선집인 《슬픔의 핵(核)》을 내게 되었다. 조병화 시인의 《벼랑의 램프》, 전봉건 시인의 《새들에게》, 박의상 시인의 《오늘은 내일》에 이어서 나의 《슬픔의 핵》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동안 시에 대하여 조금씩 알아가던 중 제법 커다란 시선집을 마련하게 되니까 기쁨이 컸다. 또한 고려원에서는 나의 네 번째 시집을 함께 만들어 보자고 했다. 1986년 겨울에 내놓은 시집 《단순한 기쁨》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집으로 이듬해, 1987년에는 현대문학상을 받게 되었고, 1988년에는 나의 다섯 번째 시집 《그리고 너를 위하여》(문학과비평사)를 펴내 대한민국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오랜만에 상복이 터진 셈이었다.
현대시 동인들은 1994년 문학세계사에서 시선집 《현대시 94’》를 만들면서 이듬해인 1995년부터 매년 한 사람씩 현대시 동인의 이름으로 ‘현대시 동인상’을 시상하기로 하였다. 시인이 된 지 5년 이내의 신인 중에서 ‘지난해부터 올 5월까지’ 발표한 시들을 두고 동인들 각자가 심의한 결과를 가지고 거침없이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현대시 동인이 선배 시인답게 좋은 후배들을 길러내는 이 일이 정말 바람직스러웠다. 그래서 제1회 수상자로 강연호, 제2회 박상순, 제3회 이대흠, 제4회 연왕모, 제5회 김 참, 제6회 권혁웅, 제7회 조말선, 제8회 심재휘, 제9회 손택수, 제10회 길상호 등이 선정되었다. 이 일이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는 사업이어서 더 오래 지속될 수도 있었겠지만, 동인들의 사정이 넉넉지 못해 그만두게 된 점이 아쉬웠다.
2001년이 되자 협성대학교 최문자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더러 시간을 좀 내서 문예창작학과에서 시창작을 강의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수업이지만 열심히 준비해서 강의를 했다. 이듬해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김현자 교수가 시창작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해서 그렇게 했고, 2003년도에는 다시 협성대학교에서 부탁을 해와 강의를 맡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려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갑작스럽게 시창작 강의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오탁번 교수의 청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지금까지 그 시간을 맡았던 임영조가 타계해서 생겨난 자리였다. 그래서 시작한 고려대학교 사회교육원 시창작반 자리는 시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사람들과 내가 한자리에 만나 어울리는, 조그만 사랑방 같은 모임이었다. 5년 동안의 만남을 통해 직간접으로 10여 명의 신인을 배출했다. 그리고 2004년부터 2006년까지 2년 6개월 동안에는 최동호 교수가 맡고 있는 ‘시사랑문화인협회(지금의 문화 아카데미)’에서 시창작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2007년 11월 18일, 뜻밖의 일로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정맥 질환이 생겨난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해서 곧바로 시술을 받았다. 그것이 공식적인 사회생활의 마지막 일정이 되고 말았다.
—《유심》55호,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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