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1487년)때 문신 최부가 제주에서 근무하던 중 부친상을 당해 제주를 떠나 육지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그 일행이 겨우 중국 절강성에 이르러 천신만고끝에 운하수로를 거쳐 북경, 요동을 통해 조선으로 귀국하는 동안에 있었던 일에 대해 성종의 명을 받들어 기록한 책입니다.
'표해(漂海)' 그러니까 바다에서 표류한 것을 제목으로 삼고 있는데,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게 된 것은 큰 일이나 이 책의 중요성은 바다에 있지 않습니다. 바다에서 표류한 부분도 전체적으로 보면 비중이 낮지요. 이 책이 인기있는(?) 이유는 당시 명나라의 산천과 풍속 등에 대해 두루 적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인이 아닌 자가 중국남-북부를 구경한 예는 당대에 매우 드문 것이었기 때문에 왕명으로 그간의 내용을 적도록 한 것이지요. <표해록>은 그의 사후에도 여러차례 출간되었으며, 언문번역본까지 출간되는 등 선비계층은 물론 일반 민중에게도 인기있었던 당대의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의 서적을 약탈해간 일본에서도 원문을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여 출간 보급하였습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잠깐 잊혀졌던 <표해록>은 다시 학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여, 1965년 미국 존 메스킬 교수가 영역하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국역본이 더 늦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꽤 많은 출판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여 내놓기도 하는 모양이더군요. 제가 <표해록>에 대해서 알게된 것도 2005년 이후이고, 그 내용을 먼저 들여다보게 된 것도 <표해록> 자체가 아닌 중국에 관한 서적에서 인용한 부분이었습니다. 미국교수가 쓴 중국에 관한 책이었지요. 조선선비가 위기를 겪지만, 높은 학식을 드러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안전하게 귀국길에 오르고, 조선선비가 고고한 자세로 중국을 나무란다는투의 평가가 재밌었습니다. 요즘식으로 평을 한다면 '대륙에 표착한 조선선비의 위엄.TXT'정도가 되겠지요.
<표해록>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읽히게 된 이유는 최부의 여정이 중국 남부에서 북부를 관통하는 것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최부가 학식있는 선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부 이전에도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중국에 도착하여 육로를 통해 조선으로 귀국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1482년(성종13년)에 정의현감 이섬이 풍랑으로 인해 중국에 표착하여 이듬해에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귀국하였지만, 풍랑으로 인해 사람도 많이 죽고 여행기라 할 정도가 아닌 간단한 보고서정도로만 끝났기에 주목받을 것이 없는 것이지요. 성종이 왕명을 내려 일기를 써내도록 한 것은 이섬의 보고서가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종연간에 제주에서 육지로 이동하는 동안 중국으로 표착하여 육로로 귀국한 두 번째 사례(관리)가 되다보니 좀더 심도 있는 기록을 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시작부분부터가 '喪人 臣 崔簿..'로 되어 있습니다. 본인에 대한 지칭이 신(臣)으로 되다보니 최부 본인도 일기의 내용을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적어 올렸을 것입니다. 군왕에게 올리는 글이니 허투루 적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과거에 급제한 조선 고급 관리인 최부는 비록 명나라 원어민(?)과 중국말로 회화를 할 수 는 없었지만, 한문에는 통달했기 때문에 필답을 통해 현지인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발음은 못해도 문법만은 통달했다던 초기 미국 유학생들의 무용담(?)이 생각나는 대목이죠. 사서를 통해 중국의 지리, 역사에도 박학했던 최부는 표착 초기에 왜구로 오인받아 심문을 받을 때에도 '어떻게 이 지방산천(명칭과 그에 얽힌 고사)에 대해 그리 잘 아느냐?'는 의문이 들게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선비들이 보는 서적들이 전부 중국을 중심으로 한 것들이니 그것을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언급되고 있는 외국의 명칭이나 산물들의 이름들을 볼 때 최부가 특히 지리학에 관심이 꽤나 높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여행기에서 많은 지역에서 옛 고사를 떠올려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합니다. 이래서 배경지식이 많이 요구되기도 합니다만, 당시에 글줄깨나 읽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요구되는 교양수준이겠지요. 덕분에 현대의 <표해록> 출간본에는 많은 각주가 필요합니다.
< 본문보다 각주가 더 많은 상황 >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극적인 재미'는 초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후반부는 조선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안정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위급한 전개가 나오지 않지요. 최부가 제주에서 부친상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가려는 차에 풍랑을 만나 의욕을 잃은 사람들을 독려하고, 식수와 식량부족을 해결하는 장면 등이 나옵니다. 상황이 점점 위태로워지는 차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자는 뭇사람들의 요구에 '성리학자'의 도리로 이를 거부하는 일도 나오는데, 이 때문에 뱃사람들과 빚어지는 갈등도 극화하기에 좋은 소재로 보입니다. 더 큰 극적인 전개는 중국에 표착한 직후에 나오게 되는데, 천신만고 끝에 만나게 된 선박이 다름아닌 도적떼의 배. 의복과 식량을 빼앗기고, 목숨마저 위태롭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최부는 결박당해 작두에 목이 썰릴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생각건대, 이들은 어업과 운송업에 종사하다가 조선선박의 사정이 좋지 않음을 보고 해적으로 돌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구를 비롯한 해적들이 대개 이렇지요. 뒤이어 만난 선단은 다행히 관부의 배로서 최부일행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는데......는 훼이크고(...) 이들도 최부일행에게 재물을 요구하고 음험한 의도를 드러내자 최부일행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납니다. 왜구의 출몰이 잦았던 시대라 이 지역민들로부터 왜구로 오인받고 관부에서 며칠동안 변경을 침범한 왜구인가의 여부를 추궁하는 심문을 받기까지합니다. 최부일행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난 것은 매우 올바른 선택이었는데, 그 들이 왜구로 무고하여 무조건 참수하여 수급으로 공을 얻고자하는 의도가 뒤이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최부는 심문과정에서 일관된 진술을 통해 혐의를 벗고, 비로소 귀국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조난당하면서 위급한 형세가 계속 이어져서 최부일행이 관부에 끌려가 혐의를 벗는 과정까지의 전개는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진진하게 합니다. 그리고 관부에서 작성한 공술서에서 '도적을 만난 일과 군인복장을 한 자들에게 핍박을 받은 일'을 공술서에서 지워달라라는 요구를 처음에는 불응하다가 '그건 너님을 위한 것임. 사단을 일으키면 너님 집에 가기 힘들어질것임'이라는 추가설명을 듣고 'ㅇㅇ 다시 쓰겠음' 하고 공술서를 새로 작성하는 이야기가 솔직하게 적혀있어서 더욱 극적으로 다가옵니다. 여기까지의 부분을 좋아했을 독자들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이후에는 명나라 관원의 호송으로 대운하를 통해 북경으로 향하는 여정이 펼쳐집니다. 이제부터는 극적인 재미가 아니라 중국 산천과 고사가 얽힌 즐거운 지리&역사학시간입니다. 운하의 제방과 수문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중국 운하사의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고 하지요. 여정도중 '미산만익비'의 비문을 옮겨적기도 했는데 이 비석이 나중에 유실되어 이 비문을 다룬 현존하는 유일자료라고 합니다. 지나치는 산천, 교량, 제방, 수문 등에 대해 일일이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풍속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합니다. 관광이 아니고 북경으로 호송되어 가는 길이 때문에 어떻게 보면 주마간산의 느낌이 강한데, 어쨌든 이론으로만 접했던 고사의 역사현장을 실제로 지나치게 되니 조선 선비에게는 자못 성지순례의 느낌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방관과 문사들과 필답을 하며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분도 상세하게 이루어져있어서 당대 일본의 독자들에게는 '한중' 양국에 대한 공부가 되는 책이었을 것 같습니다. 조선의 관리인 최부가 말하는 조선의 역사와 풍속은 곧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크게 다를바가 없으니 최부의 설명은 당대 조선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대가 만약 조선인이라면 역사와 제도에 대해 자세히 상술하라'는 말에 대답하길, "연혁과 도읍으로 말하자면 단군으로 당요의 시대와 같았고, 국호는 조선이며 도읍은 평양으로 대대로 천여 년동안 다스렸고. 그 후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한 뒤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8조로써 백성을 교화했소. 지금 조선사람이 예의로써 풍속을 이룬 것이 이때부터요. 그 후 연인 위만이 망명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기자의 후예인 기준을 축출하니 기준이 마한으로 달아나 그곳에 도읍을 정했소....당나라 고종때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삼국을 합했소. (원문에 통일이라는 용어는 없으며, 합(合)이라는 단어을 씀.)...다시 고려가 재합하여 개성에 도읍을 정하여 역사가 전해온 지 거의 500년이 되었소. 지금은 역성혁명을 이루어 조선이 되어 한양에 도읍을 정한지 100년 쯤 되었소. 산천으로 말하면 장백산이 동북에 있는데 일명 백두산이라고 하며....(원문에도 일명백두산이라고 함.) 인물로 말하자면 신라 김유신, 김양, 최치원, 설총. 백제 계백, 고구려 을지문덕, 고려 최충, 강감찬, 김취려, 우탁, 정몽주.........라는 식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관해 물어보는 것만으로 최부가 진짜 조선인인지 판단하지는 않고, 조선의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등'의 관직을 물어보고 그에 대한 답변까지 받아 조서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네 나라는 무슨 비결이 있어서 수당의 군세를 물리칠 수 있었소?'라는 질문도 있는데..중국인들이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을 만만찮은 동네로 인식하고 있던 것을 짐작케합니다. 이로부터 100년 후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터져서 이런 인식은 사라지게 되겠지만요. -_-;
당시의 언어생활에도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필답중에 '작고(作古)'라는 말이 나오는데, 최부는 이 '작고'라는 말을 모른다고 합니다. 중국에선 이미 고인이 된 것을 작고라고 한다고 하자, 최부는 우리 조선에서는 '물고(物故)'라는 말을 쓴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일을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하지요. 왜구로 오인하고 일본어 '오야지'를 음차한 '오야기(烏也機)'의 뜻을 묻는 장면이 있기도 하고요. 중국인들은 이미 '명'으로 국호가 변경되었음에도 공공연하게 '당'이라고 부르는 일이 많습니다.
최부는 성리학자의 면모를 종종 드러내는데, 호송관리의 무도함을 '대명률'에 어긋난다면서 도리어 따진다거나 불교와 도교를 숭앙하는 명나라의 풍속을 꾸짖는 일이 있습니다. 강을 건널때도 사당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고, 괴수의 형상을 그려 물살의 험난함을 면한다는 이야기는 도리에 맞지 않아 믿을 수 없다고 초를 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북경에서 입궐할 때도 '상중'임을 내세워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어야겠다고 고집하기도 합니다. (결국엔 잠깐 갈아입는 것으로 예부와 타협함;) 조선이 이런 것으로 정치적인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으니 그리 낯선풍경은 아니지요. 이런 최부 본인도 왕명이라지만 '상중에 견문기를 썼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했으니...조선 성리학이 좀 무섭긴 무섭지요 -ㅠ-; 아..이쯤되면 최부의 당시 나이가 궁금해질 수 도 있는데 당시 나이는 35세였습니다. 젊은 나이지요. 뭐랄까...이론으로 정립한 '중화'의 실체를 보게된 젊은 선비의 실망감도 좀 읽혀집니다. 이론상의 중화와 현실상의 중화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타지여서 더욱 고지식함을 발휘했던 것이 아닐까...대국에 대한 실망감에 따른 반발로 더했던 것은 아닐까...그런 생각이 듭니다.
< 대운하의 우월함을 입증 >
최부일행은 43명이 모두 살아서 조선으로 귀국합니다. 천자로부터 상까지 받았지요. 이런저런 행동들도 훌륭하게 보이지만, 이런 것들이 돋보이는 이유는 최부가 모두 기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조난을 당하고 의지할 곳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이 그의 최고의 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보탬이 되는 저술을 남긴 것은 실로 기록 정신의 소산인 것이죠.
첫댓글 표해록 한번도 안 봤었는데, 한번 읽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