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품은 뜻을 진화시켜라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퇴한 것이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의 학벌이었다. 그는 10세 때부터 화로가게, 자전거가게, 시멘트회사, 전등회사를 전전하다가 23세이던 1917년 먹고 살려고 마쓰시타 전기제작소를 창업했다. 부침을 거듭하면서 회사를 경영하던 중, 37세이던 1931년 고모리 건전지를 인수해 제8공장으로 만들면서 그는 회사의 덩치를 크게 불릴 수 있었다.
그 무렵, 사업가의 진정한 사명에 대한, 그의 고민도 병행됐다. 매일 밤늦게까지 씨름한 끝에 사업가의 사명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누가 길가의 수돗물을 마신다고 비난받지 않는다. 수돗물이 공짜인 것은 아니지만 물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사업가의 사명은 물자를 풍족하게 생산해 세상 사람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난을 이 세상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렇게 사업가의 사명을 각성한 1932년 5월 5일을 그는 창립기념일로 다시 정했다. 그는 이 사명달성 기간을 장장 250년으로 잡고 1기 25년씩 달성해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소한 사업동기가 큰 뜻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내쇼날, 파나소닉, JVC, 빅터 등 굴지의 브랜드들을 자랑하는 마쓰시타 그룹을 경영하면서 ‘번영을 통한 평화와 행복’을 연구하고 전파하려고 PHP연구소도 아울러 차렸다.
57세이던 1951년 1월 그는 미국을 여행하고는 미국의 풍요로움에 놀랐다. 특히 뉴욕의 센트럴역이 온통 대리석으로 깔린 데다 타임스퀘어의 전기가 온종일 꺼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에 비하면 일본이 비교가 안 되게 초라하지만 반드시 미국을 능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바로 번영주의라고 결론짓고 그런 민주주의 사회를 일본에도 정착시켜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듬해 그는 올바른 민주주의 발전과 보급을 통해 번영한 일본사회를 건설하자며 신정치경제연구소를 발족했다. 그의 뜻이 더 커진 것이다. 1952년 그는 일본 업계의 기술발전을 위해 네덜란드의 최첨단기업, 필립스와의 제휴를 가까스로 성사시켰는가 하면 1959년부터 불어온 무역과 외환 자유화의 물결을 앞장서 받아들임으로써 일본 경제가 개방체제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불황기임에도 불구하고 1965년 주5일제의 근무도 단행했다. 직원들에게 휴식과 함께 공부할 시간도 주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의 뜻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79세이던 1973년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그는 아시아 시대를 대비한 인재 양성자로 거듭났다. 경제가 아무리 발전해도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진정한 번영은 찾아오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86세이던 1980년 마쓰시타 정경숙(政經塾)을 세웠다.
지금껏 200여 명이 여기를 졸업했고 국회의원 30명을 비롯, 100여 명이 정치권에 진출해 일본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처지는 초라했다. 초등학교 성적이 100명 중 45등이었고 그마나 4학년 중퇴로 마감하고 10세 때부터 점원으로 타향살이를 시작해야 했다. 30세 전에 7명의 형제자매를 다 잃는 아픔을 겪었고 외아들마저 사망하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군수물자 생산을 통해 전쟁을 도왔다는 이유로 회사경영이 묶이고 대대적인 인원감축과 세금체납 1순위의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장애물에 좌절하지 않고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안주하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했으며 늘 자신을 낮추고 열린 마음으로 배우고자 했다.
“나는 배운 것도 적고 재능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경영을 잘 한다거나 인재를 잘 활용한다고 말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한 가지 짚이는 게 있다. 내 눈에는 모든 직원들이 나보다 위대한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김종춘 지혜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