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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별 임태수박사 회갑논문집 편집위원회 편,『제2종교개혁을 향하여』(민중신학연구소, 2004), 91-146에 수록.
구원의 과정에서의 믿음과 선행의 관계
-존 웨슬리의 입장을 중심으로-
김홍기 교수 (감신대/역사신학)
들어가는 말
웨슬리는 믿음과 선행의 변증법적 긴장관계와 통전적인 조화 속에서 구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의롭다 하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화의 과정에서는 사랑과 선행을 배제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가톨릭적 전통을 수요함으로써 가장 에큐메니칼적인 구원론을 전개하였음을 본 논문에서 보여 주고자 한다. 그래서 1999년 루터교회와 가톨릭교회가 칭의에 관한 공동선언문을 선포한 것은 지극히 웨슬리적인 것임을 이 논문에서 밝히고자 한다.
몸말
I. 루터와 칼빈의 한계를 극복한 웨슬리의 구원론:
A. 루터의 한계를 극복한 웨슬리의 구원론:
웨슬리는 성화의 출발점에 대하여는 루터의 해석을 받아들인다. 루터는 신도가 의인화의 은총을 받는 것을,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으나 아직도 죄 지을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태(simul justus et peccator)로 해석한다. 웨슬리 역시 거듭난 성도라도 죄지을 가능성이 계속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웨슬리가 루터와 다른 점은 죽기 전에 완전한 의인화와 성화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죽은 날까지 완전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루터의 의인화 신학에 영향받은 모라비안 교도들은 순간적인 성화, 곧 거듭나는 순간에 순간적으로 성화가 주어짐(imputation)을 믿었으나, 웨슬리는 순간적으로 부어지는 성화가 성화의 출발점이지만, 그 후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는(impartation) 과정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모라비안 교도와의 분열이 생기게 된 결정적 논쟁에서 바로 이러한 순간적 성화가 의인화의 순간과 동시에 전가됨을 웨슬리는 비판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모라비안의 조용함(stillness)을 비판한다. 모라비안들은 의인화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아무런 노력이나 행동도,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도 필요 없고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웨슬리는 의인화가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은총이기는 해도 그 은총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은총의 수단들-기도, 금식, 성경 읽기, 집회 출석, 성만찬 참여 등-을 활용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B. 칼빈의 한계를 극복한 웨슬리의 구원론:
루터는 의인화의 은총만을 강조하고, 칼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주는 의인화와 성화의 두 차원적 은총을 말한다. 웨슬리는 칼빈이 이해한 성화의 교리를 더욱 발전시킨다. 칼빈은 성화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은혜라고 해석했지만, 웨슬리는 의인화는 그리스도의 은혜요, 성화는 성령의 은혜라고 해석한다. 칼빈의 성화론은 성령의 역사로서의 선행, 곧 하나님 100%, 인간 0%를 강조함으로 인간 의지의 노예 신세를 주장하나, 웨슬리의 성화론은 하나님 100%, 인간 100%의 복음적 신인협조설을 주장한다.
웨슬리는 루터주의자들과만 성화론 논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자들과도 평생 논쟁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칼빈은 성화의 채찍질로서의 율법의 제3의 용법을 강조했는데,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 운동을 시작했으나 나중에 갈라서게 된 조지 휘트필드를 비롯한 칼빈주의자들은 행동을 배격하는 예정 신앙을 성화 신앙보다 더욱 강조하였다. 인간의 의지는 노예 상태이며 한순간에 예정된 자에게 부어지는 의인화와 성화를 믿었던 칼빈주의자들은 자유의지의 참여에 의한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과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거룩함의 본성으로 변화한다는 웨슬리의 성화론을 비판했다. 결국 루터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들의 하나님의 즉흥적 행위로서의 성화 사상은 웨슬리의 점진적 신인 협조의 성화 사상과 논쟁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와 칼빈은 죽기 전에 온전한 성화가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웨슬리는 가능하다고 해석한다. 또한 루터나 칼빈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의 본성으로 바꾸기가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웨슬리는 이러한 본성에 동참하는 동반자가 된다고 이해한다.
II. 믿음에 의한 의인화(義認化)와 선행에 의한 성화(聖化)의 관계:
웨슬리의 행동주의 신학은 루터의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와 정숙주의(quietism, stillness)를 비판하면서 형성된다. 웨슬리의 올더스케잇 체험은 마르틴 루터와 강한 연속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웨슬리가 루터주의 경건운동파인 모라비안 교도들의 올더스케잇거리 집회에 갔다가 모라비안 청년 -홀랜드(William Holland)였을 것으로 역사가들이 추측함- 이 읽는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다가 마음이 이상하게 뜨겁게(strangely warmed)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회심이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루터적 신앙 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신학에 의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의 동생 찰스(Charles Wesley)도 모라비안 목사 피터 뵐러(Peter Böhler)에 의해 그보다 먼저 회심하였고 뵐러와 가장 많은 신앙상담을 존 웨슬리도 하고 있었다. 또한 회심하자마자 뵐러와 함께 페터래인 신도회(Fetter Lane Society)를 조직하기도 하였다.그러나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에 관하여”(On God's Vineyard)에서 루터의 구원론을 비판한다. 루터가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성화에 무관심하였다고 비판한다. 루터는 의인화만을 강조하다가 성화에 관심 없었으나, 로마 천주교는 성화를 강조하다가 의인화에 무관심하였다고 웨슬리는 지적한다. 특히, 웨슬리는 루터주의 경건운동파인 모라비안교도들의 센터 헤른후트(Herrnhut)을 방문한 후, 루터적 모라비안주의의 신앙지상주의(solafideism), 정숙주의(quietism), 법적 의인화(imputed justification), 율법폐기론적 경향(anti-nominianism)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루터에게서 선행은 의로워진 크리스천의 자동적 결과이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듯이,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면 선행의 열매는 저절로 맺힌다고 루터는 해석한다. 그래서 루터는 로마서를 강조한 나머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복음이라고 평가절하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로마서의 신앙과 함께 야고보서의 선행을 동등하게 중요시 여긴다. 웨슬리는 해석하기를, 로마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75세 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의 믿음이요, 야고보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행함은 그 후 25년 만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의 행함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야고보서가 말하는 의인화는 로마서가 말하는 의인화와 다르다고 해석한다. 로마서의 의인화는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 것, 곧 객관적으로, 수동적으로, 법정적으로 전가되는 의인화(義認化: impartation)를 말하고, 야고보서의 의인화는 실제로, 본성적으로, 주관적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의인화(義人化: impartation)을 말한다고 야고보서 2장 주석에서 웨슬리는 분명하게 강조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미에서는 아브라함은 그의 선행에 앞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즉,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 accounted righteousness). 야고보의 의미에서는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에 뒤따르는 선행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즉, 義人이 되는: made righteous)
다시 말해서 웨슬리는 로마서의 믿음과 야고보서의 믿음이 똑같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산 믿음을 말하고, 야고보가 비판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의 선행과 야고보서의 선행이 똑같은 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이 비판한 선행은 믿음보다 앞서는 선행이고, 야고보가 강조하는 선행은 믿음에 뒤따라오는 선행을 말한다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그리고 선행은 믿음에 생명을 주지 못하나, 믿음은 선행을 낳고 선행으로 완성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웨슬리가 선행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성화를 추구(persuit)하는 점을 루터적 모라비안들이 오해한 것이다. 모라비안 지도자 진젠도르프와 웨슬리가 1741년 9월 3일(목) Grace's Inn Walks에서 라틴어로 논쟁할 때 이 문제가 나타났다. 진젠도르프는 믿음으로만 성화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한 반면에, 웨슬리는 믿음만 아니라, 사랑과 선행으로 성화가 이루어짐을 강조하였다. 이 논쟁 이전에 1741년 6월 15일(월) 일기에서 웨슬리는 루터의 「갈라디아서강해」(Comment on the Epistle to Galatians)를 읽었을 때 이미 이러한 문제를 느꼈다. 그래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여기가 모라비안들의 커다란 오류가 일어나는 근원이라고 이해한다. 그들은(모라비안들) 더 좋을 때든지, 더 나쁠 때든지, 루터를 따른다. 여기서부터 그들은 "선행을, 율법을, 계명을 거부한다. 당신들이 율법을 악하게 말하는 자들이 아닌가? 율법을 판단하는 자들이 아닌가?"
(Here (I apprehend)is the real spring of the grand error of the Moravians. They follow Luther, for better, for worse. Hence their "no works; no law; no commandments." But who are thou that "speak evil of the law, and judge the law."
진젠도르프는 오직 신앙만이 복음적인 성화라고 강조한다(Sanctitas evangelica est fides.). 그는 사랑을 더 많이 한다고 더욱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고, 덜 사랑한다고 덜 거룩하여지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Non magis sanctitas est, si magis amat, neque minus sanctus, si minus amat.). 그러나 웨슬리는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한편, 또한 거룩함 안에서 성장한다고 해석한다.(dum crescit in amore, crescit pariter in sanctitas.) 참 성도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매일 자라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Nonne vero credens crescit indies amore Dei?)고 강조한다. 진젠도르프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는 그들의 거룩함을 위하여 아무것도 행하여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강조하나(Sed istud donum Spiritus sanctitatem ipsorum non respexit.), 웨슬리는 “나는 너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자아부정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더욱 더욱 죽어지고 하나님께 대하여 더욱 살아야 하지 않는가?”(fortasse te non capio. Nonne nos ipsos abnegantes, magis magisque mundo morimur, ac Deo vivimus?)라고 반문한다.
루터신학에 기초한 모라비안들의 독일 경건주의와 웨슬리 경건주의의 수동적 영성(imputation)과 본성적 영성(impartation)의 차이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웨슬리의 경건주의는 독일의 경건주의처럼 루터의 노예의지론에 기초한 수동적, 법적 의로움(passive forensic righteousness)과 수동적으로 전가되고 옷 입혀지는 거룩함(imputed holiness)만을 말하지 않고, 동방교회 교부들(Gregory of Nyssa, John Chrysostom, Macarius the Egyptian)과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의 영향으로 자유의지의 역할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강조하는 복음적 신인협조설(Evangelical Synergism)을 주장한다. 또한 능동적, 본성적 의로움과 거룩함(active imparted righteousness and holiness)까지 주장한다.
둘째로 독일의 경건주의는 루터의 인간본성의 비관주의(pessimism of nature)에 기초하여 죽기 전에 완전성화(entire sanctification)가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웨슬리의 경건주의는 당시의 영국성공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신비가들(Jeremy Tayler, William Law, Thomas A Kempis)의 영향과 동방 교부들의 영향으로 죽기 전에 완전성화가 가능하다는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를 주장한다.
셋째로 독일의 경건주의는 루터의 신앙 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 사상에 기초하여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나 정숙주의(quietism)적 경향을 보임으로써 소극적 선행(good works)을 주장하고 사회봉사(social service)의 차원에만 머물렀으나, 웨슬리의 경건주의는 적극적 선행을 주장하고 사회봉사뿐 아니라 사회변혁(social transformation)의 차원에까지 이르는 사회적 성화(social sanctification)를 전개하였다.
웨슬리는 또한 “형식적 크리스천”(Almost Christian)이란 설교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참 크리스천은 믿음을 통한 은총의 신학에 서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윤리에 서서 사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faith working with love)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구원받은 믿음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믿음을 갖고 사랑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참 크리스천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은 믿음으로만 이루어지지만,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행함과 선행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루터와 루터주의자들,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이 무관심하였던 선행과 사랑에 의한 성화가 구원의 완성임을 웨슬리는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곳에서 언제나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하여 선행을 실천할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Rules for Christian Living(크리스천 삶의 원칙)
"Do all the good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라),
By all means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In all the ways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In all the places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At all the times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시간에),
To all the people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As long as ever...you can!(네가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III. 믿음과 선행을 통한 인격적 성화(personal sanctification):
웨슬리의 구원론의 핵심은 성화다. 회개는 종교의 현관(porch)이요, 믿음은 종교의 문(door)이라면 성화는 종교 자체(religion itself)이다. 특히 웨슬리의 성화론은 믿음과 선행을 통하여 성화를 추구해 가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 가는 것(벧후 1:4) 곧 인격의 변혁(impartation)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의로움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엡 4:24). 웨슬리는 히 12:14을 근거로 거룩함이 없이는 구원의 완성을(final salvation) 이룰 수 없음을 강조한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독일경건주의처럼 수동적 의인화 거듭남의 영성을 많이 체험하여 왔고, 성령의 능력을 은사체험운동으로 많이 경험하였으나, 성령의 인격 안에서 인격적으로 성숙해 가는 성화는 많이 체험하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웨슬리적 성화운동을 한국교회의 21세기 영성운동으로 발전시켜 가야 한다. 웨슬리의 속회의 목적도 단지 행정적인 조직이나 양적 성장(growth)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화훈련이라는 질적 성숙(maturity)을 도모하는 목회적이고 신앙적인 동기에 있었다. 모든 속도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들을 간증형식으로 고백하고 나눔(sharing)으로써 서로 권면하고, 돌보며, 격려하고, 위로하는 영적 책임의식(accountability)을 가졌다.
이러한 성화의 책임의식과 연대의식인 'accountability'를 직고(直告)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속회를 통하여 소규모 단위의 성경공부, 기도회, 그리고 신앙적 담화를 위한 좋은 장이 마련되었다. 이 속회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이 파선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삶을 통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 또한 은혜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랑의 선행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속도들이 속회공동체를 통해 공동의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강제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조하고, 서로 응답하며, 서로 격려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속회를 통한 공동체적 성화 생활을 강조한 반면에, 개인적, 수도원적, 신비주의적, 은둔적 성화 생활을 비판했다. 고독하고 은둔적인 종교를 만들려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웨슬리는 못박아 얘기한다.
성화훈련의 중요한 세 가지 요소는 첫째로, 내면적 개인적 경건을(personal piety) 힘쓰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도와 금식과 성경읽기와 일기쓰기 등 경건의 선행(good works of piety)을 힘쓴다. 둘째로, 상호협동적 영성훈련(mutual corporate discipline)을 힘쓴다. 이를 위해 서로가 권면하고 격려하고 충고하고 상담하는 크리스천 컨퍼런스(Christian conference)를 가진다. 셋째로, 악행을 금지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비의 선행(good works of mercy)을 힘쓴다.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갇힌 자와 나그네와 신체장애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선행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사회적 성화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속회의 영성수련에서도 이렇게 세속성으로부터 분리되는 경건의 선행과 함께 세상 속으로 성육신화해 가는 자비의 선행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이러한 속회의 본래의 목적을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한다. 성화훈련을 집중시킬 수 있는 지도자의 영성수련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지도자의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영국과 미국 감리교회의 속회가 죽어가게 되었다. 한국감리교회가 이러한 철저한 지도자 훈련에 의한 성화 중심의 속회로 돌아가야 한다.
거듭남의 순간에 겸손하나 온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성도의 겸손은 자만과 섞여 있다. 거듭난 성도는 온유하나 때때로 분노가 그의 온유를 부숴 버린다. 그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용해되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거듭남이 순간적 탄생이라면, 성화는 태어난 아기가 계속 자라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계속 성장하고 성숙하지 아니하면 온전한 겸손, 온전한 온유, 온전한 순종은 불가능하다. 웨슬리는 거듭남과 성화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감리교인들은 인간이 의로워지는 동시에 성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롭다 인정받을 때, 그는 ‘거듭 나고,’ ‘위로부터 태어나며,’ ‘성령으로 나는 것’인데, 그것이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 성화의 전 과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성화의 입구임은 의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충분한 견해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신생(new birth)이 영혼의 큰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이 여인에게서 태어날 때 몸을 입고 만들어지듯이, 성령으로 태어난 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단지 외적인 변화, 술취함으로부터 깨어 있는 상태로, 강도 짓이나 절도로부터 정직함으로 바뀌는 것(이는 참된 종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쌍하고도 메마르고 가련한 생각입니다)만이 아니고, 내적인 변화, 즉 모든 불경건함으로부터 모든 경건한 기질로, 교만함으로부터 겸손함으로, 급한 성미로부터 온유함으로, 투정과 불만으로부터 인내와 자기 포기로 바뀌는 것 -- 한 마디로, 속세의 음란한 악마 같은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고인이 된 아주 유명한 작가가, 신생(regeneration)에 관한 그의 비상한 논문에서, 신생이란 온전하고도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이라고 가정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화의 문턱에 불과합니다 -- 즉 입구에 해당될 뿐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 인간이 단번에 태어나서 점차 키가 자라고 힘이 세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출생에서도 인간은 단번에 태어나서, 그 후에 영적인 크기와 힘이 점차 증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생이란 성화의 첫 지점이 되는 것이며, 완전한 날이 이르기까지 점점 더 증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웨슬리가 어떻게 의인화와 성화의 관계를 해석하는지 몇 가지로 분석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웨슬리는 감리교 역사와 교리를 요약적으로 설명하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의인화와 성화를 비교하여 설명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큰 축복이란, 그들이 칭의에 대해서 그것이 성화를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처럼, 성화에 대해서도 그것이 칭의를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은 점입니다. 감리교인들은 전자와 후자를 똑같이 강조하면서 각각에 그 위치를 유지시키는 데 유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둘을 함께 맺어 주셨지만, 인간이 그것들을 떼어놓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리교인들은 동등한 열성과 부지런함을 품고, 한편에서는 자유롭고, 충분하며, 즉각적인 칭의의 교리를 옹호함과 아울러, 다른 한편에서는 마음과 삶에 있어서의 전적인 성화의 교리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 신비주의자처럼 내적인 성결을 고집하면서도 바리새인처럼 외적인 성결도 중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의인화는 우리를 위해 객관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에 주어지는 은총이지만, 성화는 우리 안에서 주관적으로 갱신케 하고 성화케 하는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의 본성이 변화 받는 은총이다. 다시 말해서 의인화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제1 아담의 죄로 진노와 심판의 자녀가 된 모든 인간이 제2 아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된 은총이라면, 성화란 의인화와 동시에 일어나는 거듭남을 계기로 새롭게 태어난 영혼이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하여 성화하는 은총이다. 곧 의인화는 상대적 변화요, 성화는 실제적 변화이다. 의인화가 우리 밖에서(extra nos) 우리에게 주어지고 전가되는 은총(imputation)이라면, 성화는 우리 안에서(in nos) 우리의 본성이 변화하는 은총(impartation)이다. 의인화가 의롭다고 인정하는 법적 의인화라면, 성화는 의인이 되어 가는 것이다.
둘째, 의인화가 용서함 받는 것이라면, 성화는 사랑이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부어지는 것이다. 의인화는 용서와 사죄의 다른 표현이다. 영적으로 병든 인간들이 치유 받고 용서함 받도록 영적 의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과거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보여 주시는 사건이 의인화이다. 반면에 성화는 의롭다 함을 얻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서 은혜에서 은혜로 날마다 성장하여 완전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것이다. 의인화의 은혜를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 없지만, 성화의 과정에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믿음,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이 성화의 단계에서는 필요하다.
셋째, 의인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의인화는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서 화해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되어 양자와 양녀가 되는 것이다. 성화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성도, 곧 죄악 된 본성이 변하여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란 의로움과 참 거룩함이다. 성화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이것이 가능하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의인화가 관계적, 외형적 변화라면, 성화는 실제적, 내면적 변화이다.
넷째, 의인화가 행위의 죄들을 사함 받는 것이라면, 성화는 내면적 죄를 사함 받는 것이다. 의인화의 순간 과거에 지은 모든 행위의 죄들은 사함 받지만, 죄의 뿌리 혹은 원죄라고 일컬어지는 내면적 죄는 남아서 신자들을 괴롭힌다. 그런데 이 남아 있는 내적 죄악성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는 경건의 훈련이 없으면 다시 행위의 죄를 범할 수도 있다. 마치 베드로나 다윗이 실수한 것처럼, 타락할 수도 있기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성화의 과정에서 모든 교만, 자기 의지, 분노, 불신앙, 욕망 등의 내적 죄악성이 뿌리째 뽑혀야 한다. 죽기 전에 모든 내적 죄악성이 뿌리뽑힐 수 있고, 제거될 수 있다고 웨슬리는 믿는다.
다섯째, 의인화는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가능하고, 성화는 믿음과 선행으로 가능하다. 믿음만이 의인화의 유일한 조건이다. 이 믿음은 인간적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이전에는 영국 성공회의 교리대로 믿음과 선행에 의하여 구원 얻기-의인화하고 거듭나기-를 열망하였다. 그러나 신비주의적 노력과 공적으로는 불가능함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루터적 신앙의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또한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하여 의인화할 수 없음을 확신한다.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러나 신앙의인화를 얻기 위한 행위-기도와 성경 읽기 등-를 무시할 수 없음을 웨슬리는 또한 강조한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과 공로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웨슬리에게 경건의 선행(works of piety)과 자비의 선행(works of mercy)은 믿음의 연속성과 믿음의 증가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웨슬리는 루터주의자들 혹은 칼빈주의자들과 더욱 큰 믿음, 더욱 깊은 믿음에 대해서 항상 논쟁했다. 루터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이 의인화의 순간에 한 번 주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자라거나 깊어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나 웨슬리는 의인화 이후에도 선행에 의하여 계속 자라고 계속 깊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구원의 확신을 위해 필요하다. 선행은 믿음의 증거이다. 믿음의 본질은 내면적이지만, 믿음의 증거는 사회적이라고 웨슬리는 이해한다. 선행은 믿음의 증거일 뿐 아니라, 믿음의 열매이다. 참 믿음은 선한 생활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믿음을 근거로 일어나지 아니하는 선행-인간 본성의 노력으로 행해지는 펠라기우스적, 반펠라기우스적 선행-을 거부한다. 그러한 도덕적 선행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서 선행과 사랑은 저절로 맺히는 열매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적 참여에 의해 신인협조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따라서, 웨슬리는 도덕적 행동을 강조하는 산상수훈도 야고보서처럼 중요한 설교본문으로 선택하였다. 산상수훈 설교는 그의 성화신학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의 기록된 설교 152편중 무려 13편이 산상수훈 해설 설교다. 그가 브리스톨에서 제일 처음 옥외설교를 할 때에(1739년), 예수님도 예배당 밖 옥외산상에서 설교하였듯이 자신도 옥외에서 설교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산상수훈을 본문으로 선택하여 설교하였다. 특히, 그는 산상수훈 강해에서 사회적 성화개념과 지상의 하나님 나라 실현을 아주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렇게 산상수훈 등을 성화생활의 기준으로 생각한 것은 칼빈의 율법이해와 상통한다. 칼빈은 루터보다 율법을 적극적으로 이해하였다. 루터는 율법의 제1용법, 즉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과 제2용법, 즉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악한 무리들을 다스리는 공민법적 역할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의 제3의 역할(tertius usus legis)로써의 성화생활의 채찍질과 선생을 말한다. 곧 율법을 통해 자아부정과 영성훈련을 실천함으로써 더욱 경건하고 성화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율법이해가 웨슬리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칼빈의 선행-율법을 준수하고 복종하는 행동-은 성령의 역사다. 인간은 다만 노예 신세일 따름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선행이해는 성령의 역사와 거기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적극적 응답과 참여로 표현되어 있다.
IV. 자유의지와 선행 성화의 관계:
웨슬리의 성화신학이 칼빈의 성화신학보다 더욱 행동주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복음적 신인협조설(evangelical synergism)에서 나타난다. 칼빈에게 있어 성화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서 인간 속에 전권적으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노예 신세이다. 거기에 반하여, 웨슬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성령이 먼저 역사(役事)하지만 거기에 인간이 자유의지로 응답함으로써, 곧 신인협조로, 성화가 이루어진다. 신앙의인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으로만 이루어지고 그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거듭남도 성령의 내재의 은총으로 되어지지만, 성화는 믿음(하나님의 선물)과 사랑(인간의 선행적 참여)으로 이루어진다고 웨슬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인간의 선행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지는 본성적으로 -자연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재적(先在的) 은총(Prevenient grace)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펠라기우스(Pelagius)나 중세 가톨릭의 반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의 자유의지론 -본성적으로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남- 과 다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은 모두 원죄를 갖고 태어났다. 그런데 성령의 선재적 은총으로 믿는 성도나 안 믿는 자연인들 속에도 부분적인 자유의지의 회복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이 선재적 은총은 자유의지뿐 아니라 양심과 이성으로도 나타난다. 이 선재적 은총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여명으로서 구원을 향해 -은총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구원의 은총을 열망하는 열심과 사모하는 마음도 의미한다.
웨슬리는 선재적 은총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 100%요, 인간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인간의 열심 100%임을 그의 설교 “성서적 구원의 길”(Scripture Way of Salvation)에서 강조한다.
본성적 양심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보다 적당하게는 선재적 은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모든 이끄심이요,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입니다. 곧 우리가 열망하면 할수록 그 열망은 더욱 증가하는 것입니다. 또한 선재적 은총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을 계몽시키는 참 빛을 말합니다. 곧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도록 하시는 것입니다(미가서 6:8). 또한 이 선재적 은총은 성령도 때때로 모든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어 깨닫게 하시는 모든 확신입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가능한 한 억누르거나(stifle), 후에 잊어버리거나(forget), 부인하기(deny)까지 하지만, 선재적 은총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 타종교인들이나 불신자들에게도 선재적 은총은 일반계시적으로 임하지만, 그들이 이 다가오는 은혜를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거나 억누르거나 부인하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 선재적 은총에 자유의지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응답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선재적 은총을 활용함으로써 구원의 여명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웨슬리는 선재적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일반계시적 성령의 역사이며 선행을 열망하는 양심적 열심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자연상태에 머물러 있는 인간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을 꺼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 밖에 홀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살고 있는 사람 치고 보통으로 말하는 자연적 양심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양심이란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선재적 은총입니다. 모든 사람이 많고 적건 이 선재적 은총을 지니고 있습니다...인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든지 선행의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기를 전혀 없애버리는 사람이 많다고 하여도 이 선행의 열망이 모든 인간에게 있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그러므로 사람이 은총이 없어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은총을 활용하지 않는 까닭에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재적 은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첫 소원(the first wish)을 포함하여, 그의 뜻을 깨달아 아는 영적 빛이 비취는 첫 여명(the first dawn)이고, 구원과 생명에 이른 어떤 경향성(some tendency toward life, some degree from salvation)이다. 따라서 먼저 성령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적 응답과 참여에 의해 구원이 완성된다. 이것의 순서가 바뀌면 안된다고 웨슬리는 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관하여”에서 힘주어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신협조설(human-Divine cooperation)이 아니라 신인협조설(Divine-human cooperation)이다. 이를 가르켜 복음적 신인협조설(evangelical synergism)이라고도 한다. 펠라기우스주의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그냥 신인협조설(synergism)이라고 한다. 이러한 웨슬리의 복음적 신인협조설은 동방교회의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영향, 서방교회의 어거스틴(Augustine)의 영향, 그리고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의 영향 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자유의지의 양면성이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나지만, 웨슬리에게서는 회개는 자유의지의 결단으로 일어나지만, 믿음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역사로,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이 은혜의 선물로 다가오지만, 그 은혜가 임할 때까지 선재적 은총으로 일하는 자유의지를 통하여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 곧 성경읽기, 금식, 기도, 선행의 실천 등을 사용할 것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모라비안들의 정숙주의(stillness)를 비판하면서 한 여인이 아직 의롭다함을 얻기 전에-거듭나기 전에-성찬을 받다가 거듭남을 체험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선재적 은총으로 회복된 자유의지를 통하여 이러한 은총의 수단을 사용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선희 교수는 필자의 선재적 은총 해석을 반펠라기우스주의로 오해하고 있다. 필자는 반 펠라기우스적 인신협조설(Human-Divine cooperation)을 철저히 반대한다. 오히려 웨슬리는 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관하여”(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에서 이러한 인신협조설(인간 50% 하나님 50%)을 비판하면서,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면서 신인협조설(하나님 100% 인간 100%)을 말한다: “우리 없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Qui fecit nos sine nobis, non salvabit nos sine nobis.). 필자는 웨슬리처럼 어거스틴주의자이지 펠라기우스주의자나 반펠라기우스주의자가 아니다. 창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대로 만드셨지만, 구원은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역사하지만 우리와 더불어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고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웨슬리는 강조한다. 그런데 이선희 교수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관하여”란 설교를 언급하면서도 하나님의 주도권에만 집중하였지, 인간의 응답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의인화와 거듭남 이전에는 자유의지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러면 선재적 은총은 무엇인가? 이 교수는 칼빈주의적으로 해석해 버리는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나 셀(Croft Cell)과 같이 해석한다.
우리가 먼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면서 우리와 더불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전혀 배제 되어버린 칼빈주의적 해석을 이선희 교수는 계속 강조한다. 똑같은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관하여“에서 웨슬리가 아주 좋아하는 성경구절 요 5:17(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를 이 교수는 아주 쓸모 없는 구절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웨슬리가 힘주어 강조하기를 ”우리가 신앙의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의 의지가 응답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수는 의인화와 거듭남 이전에는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전혀 없다는 앞의 주장과는 전혀 모순되게 아이러니칼(ironical)하게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역사에 응하며 나가면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되고, 여기에 응하지 않고 소위 거역할 때는 불안을 느낀다고 해석한다. 응하는 것도 자유의지의 결단이요, 응하지 않는 것도 자유의지의 결단이 아닌가? 이선희 교수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본다.
모든 사람들이 많건 적건 간에 이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역사를 느끼는 것인데, 여기에 응하며 나가면 전도라든가 교회라든가 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응하지 않고 소위 이 양심의 빛, 정확히 말하여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거역할 때는, (다소간에 차이는 있을지라도)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아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이미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활용하지 않는 까닭에 범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사랑)과 인간의 열심(자유의지)의 양면성을 말한다. 이 교수의 결정적인 오해가 여기에 있다. 선재적 은총을 이 교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만 이해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는 열심 100%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열심 100%도 선재적 은총은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의지하도록(to will), 일하도록(to do) 먼저 일하신다고 웨슬리는 강조한다. 먼저 일하셔서 우리도 일할 수 있게 되고(can),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must)고 강조한다.
이 교수의 말대로라면 유명한 성화 “문 두드리는 예수님”(헐만 훈트)의 문고리가 그 문에 달려 있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마음의 문을 열 수가 없고 주님만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다고 이 교수는 생각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성화에는 문을 여는 문고리가 없다. 왜냐하면 주님이 열심히 문을 두드리지만 나의 자유의지가 안에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성화는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을 잘 말해 주는 그림이다. 뿐만 아니라 모라비안 정숙주의(Quietism)나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처럼 은총의 수단을 아무것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국교회가 부흥회에서 자유의지의 결단을 통하여 은혜를 갈망하는 열심을 강조하고, 다양한 은총의 수단을 사용하도록 주장하는 것은 루터나 칼빈보다 더 웨슬리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부흥운동 역사에서 에드워드(J. Edwards), 피니(C. Finney) 등이 칼빈주의자들이면서도 모두 웨슬리적 결단을 촉구하는 부흥운동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한국교회부흥운동도 웨슬리적 결단을 촉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여 왔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셀(Croft Cell)은 그의 저서 「존 웨슬리의 재발견」(Rediscovery of Wesley)에서 이 교수와 비슷하게 웨슬리를 칼빈적 관점에서(하나님 100% 인간 0%: monergism) 해석하였다. 인간 의지의 노예신세를(Servum Arbitrium) 강조한다. 이러한 셀의 해석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알랜 카페지(Allan Coppedge)이다. 카페지는 캐논(Cannon)과 린드스트롬(Lindstrom)은 신인협조적으로(synergistic) 해석하지만, 셀(Cell)과 어슨(Ireson)은 하나님만의 에너지(monergistic)로 해석한다고 지적하면서, 신론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만의 에너지로 해석할 수 있고 인간론적으로 해석한다면 신인협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카페지는 셀이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의 관점에서만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과 완전론을 이해하려고 한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이 이미 선택의 가능성으로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은총을 역사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책임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사이의 의미심장한 종합적 상관관계로 이해해야 함을 주장한다.
랜디 매독스(Randy Maddox)도 그의 저서 [응답하는 은총](Responsible Grace)에서 웨슬리를 셀(Cell)이 하나님만의 에너지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 사람(monergist)으로 해석한 것을 소개하고, 캐논이 웨슬리를 신인협조설자(synergist)로 해석한 것도 소개하면서 자신은 응답하는 은총(Responsible Grace)을 강조한 웨슬리로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먼저 선재적 은총으로 다가오신 이유는 의지하고(to will), 행동하도록(to do) 하시며, 하나님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나님이 일하시니 일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결국 스타키(Strakey)의 복음적 신인협조설적(evangelical synergism)으로 해석한다.
어쨌든 웨슬리는 신자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어거스틴이나 칼빈의 견인의 은총론을 부정한다. 아무리 의인화와 거듭남의 은총을 받은 성도라도 자유의지에 의하여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다(빌 2:12-13).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니 우리도 일할 수 있고(can),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니 우리도 일하지 아니하면 안된다(must). 그 때문에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고, 푯대를 향하여 뒤돌아보지 아니하고 계속 달려가야 한다.
또한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께로서 태어난 자들의 특권”(The Great Privilege of Those Who Are Born of God)에서 타락의 가능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죽음과 지옥보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타락케 하는 죄를 더욱 무서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권면한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두려워하라.”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 영혼 속에서 계속 행동하지 않으신다(God does not continue to act upon the soul unless the soul reacts to God). 또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호흡하지 아니하면, 그분께 우리의 사랑과 감사와 기도를 돌리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 영혼을 향하여 계속 호흡하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경고하심에 따라 끊임없이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사랑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 바나바가 성령의 뜻을 거스르고 조카,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려 함으로 바울과 나뉘어진 것처럼, 성도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과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든 외적 죄악과 내적 죄악을 배제할 수 있다. 그런데 성령의 경고와 탄식을 외면할 때 점점 내적 죄악에 빠져들고 신앙도, 사랑도 상실하게 되고, 급기야 외적 행위의 죄들까지도 범할 수 있다고 웨슬리는 경고한다. 그 예로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바울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들어오니까 일어난 경우를 든다. 가장 적절한 예로 다윗을 또한 언급한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죄를 범한 것과 그녀의 남편을 살해한 죄를 범한 것을 지적한다.
웨슬리는 은혜에서 행위의 죄로 떨어지고 타락하는 여덟 가지 단계를 말한다. 1) 죄를 범하지 않는 은혜의 생활, 2) 유혹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 3) 하나님의 성령이 죄가 가까이 있다고 경고함, 4) 유혹에 넘어가지 시작함, 5) 성령이 탄식하지만, 신앙이 약해지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어두워짐, 6) 성령이 “이것이 바른 길이다. 그 속에서 걸어라”고 날카롭게 질책함, 7)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성화 훈련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고 유혹자의 즐거운 음성에 귀를 기울임, 8)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떠날 때까지 악한 욕망이 그의 영혼 속에 들어오고 퍼져서, 마침내 외적 행위의 죄들을 범하게 되고 주님의 능력이 완전히 그를 떠나게 된다. 웨슬리는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며, 우리의 품속에 누워 있는 들릴라에 대항하여, 악한 본성에 대항하여,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죄악성으로부터, 우리의 말과 행동이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된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나 오직 그리스도-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신-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는 위대한 의사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만 성결을 받는다. 회개와 신앙이 우리의 구원의 출발일 뿐 아니라 구원의 계속적인 성장으로, 하나님 나라로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시작되고, 계속 성장하고, 완성된다. 이 때문에 온전한 성화를 죽기 전에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계속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거룩함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계속 회개가 요청되는 것이다.
웨슬리는 로마서 7장을 주석하면서, 사도 바울처럼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에게도 은총과 본성, 육체와 영,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사이에 갈등이 있음을 지적한다. 속 사람으로는 원하지 않지만, 겉 사람이 악을 행하게 됨을 탄식한다고 보았다. 즉 의로워진 사람도 범죄 가능성(posse peccare)이 남아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은혜 받기 전에 갇혀 있던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 captivatum)가 해방되어 범죄 가능성과 죄짓지 않을 가능성(posse non peccare)을 동시에 갖게 된다고 어거스틴이 본 것처럼, 웨슬리도 자유의지의 회복을 해석한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은 은총 받기 전에는 악령의 노예 의지요, 은총 받은 이후에는 성령의 노예 의지라고 해석하기에 자유의지를 인정치 않는 점에서 마니교적, 혹은 스토아적 운명론의 경향을 띤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롬 7장의 인간 실존의 갈등에 대한 웨슬리의 해석은 흥미롭다. 이 본문을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의 상태라고 해석하는가? 아니면 거듭난 이후의 상태라고 해석하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의롭다 하심의 은총을 받기 이전의 상태인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후의 상태인가? 이 본문은 역사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된 본문이다. 바르트와 불트만의 논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웨슬리는 이 본문을 양면적으로 해석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듭나기 전의 인간의 실존 상태를 묘사할 때는 ‘율법 아래 있는 인간’(man under the law)이라고 표현한다. 율법을 깨닫기 전에 ‘본성적 인간’(natural man)으로 살 때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인간이었다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 하나님이 두렵고 떨리는 심판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죄의식을 깊이 느끼며 탄식하게 된다. 그러나 죄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죄의 노예가 되고 죄의 종이 될 뿐이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괴로워하는 공포와 전율이 찾아온다.
그것은 키엘케골의 ‘도덕적 실존’과도 유사한 해석이다. 키엘케골 역시 ‘미적 실존’ 속에서는 돈판처럼 욕망과 향락을 즐기다가 도덕적 실존이 되면서 도덕적·율법적 명령에 의해 자신의 추악함을 발견되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 곧 절망에 빠지게 된다고 해석한다. 이 사망의 몸에서 구할 자가 아무도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웨슬리와 키엘케골은 ‘은혜 아래 있는 인간’(man under the grace)과 ‘종교적 실존’ 속에서 해방을 선언한다.
오직 믿음의 도약으로만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내적 확증을 통해 자녀로 양자와 양녀 되었음을 확신하게 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의 요구를 따라 성화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총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났다 할지라도, 오늘 본문과 같은 실존적 상황이 또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의롭다 함을 얻는 순간, 모든 말과 행위의 자범죄(actual sins)에서 해방되었고 죄의식(guilt)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할지라도, 거듭나는 순간 내적 죄악성(inner sin, roots of sin, original sin)이 파괴되기 시작함으로 이제는 더 이상 죄의 능력(power of sin)이 나를 지배하지도 않고 다스리지도 않고 컨트롤하지도 않을지라도, 죄악성(inner sin)이 계속 남아서(remain) 내 속에서 나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지 않으면,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지 않으면, 천국을 침노하지 않으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손을 굳게 붙들지 아니하면, 항상 내적 죄악성이 다시 자범죄(actual sin)를 저지르도록 실수할 수 있고 심지어 다윗처럼, 가룟 유다처럼, 베드로처럼 타락할 수도 있다고 웨슬리는 경고한다. 까닭에 항상 날마다 자신의 욕심을 비우고, 자신의 교만을 비우고, 자신의 거짓을 비우고 예수님처럼 빈 마음(singleness and simpleness)을 만들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 생활이 진보할 수 없고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분명히 루터나 칼빈의 한계를 넘어선다. 성화의 행동은 루터나 칼빈처럼 하나님 100%, 인간 0%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 100%, 인간 100%로 됨을 강조한다. 요 5장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성령이 100% 일하면 나도 100% 일할 수 있다(can). 성령이 100% 일하시니 나도 100%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must). 그리고 행함은 우리의 상급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해석한다. 구원의 출발(initial salvation)은 믿음으로 되지만, 구원의 완성(final salvation)은 믿음과 행함으로 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지고 우리의 믿음이 완전해지기 위해서 행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까닭에 보다 풍성한 영성, 보다 성숙한 영성, 보다 완성된 영성을 위해서는 행함 있는 믿음이 요청되는 것이다.
V. 성화의 내면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
웨슬리의 성화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다. 그는 ‘사회적 성화 아닌 성화를 모른다’고 말하며 ‘사회적 종교 아닌 기독교를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감리교회는 어떤 새로운 종파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to reform the church), ‘민족을 개혁하기 위해서’(to reform the nation)라고 힘주어 웨슬리는 강조한다. 교회개혁과 민족개혁이 감리교정신이다. 기독교를 은둔자의 종교, 기도하고 명상하는 종교로만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행위로 본다.
그래서 웨슬리 신학자 아우틀러(Albert Outler)는 수직적이고, 내면적인 구원만을 강조하고 개인적 성화만을 강조하는 것은 불건전한 복음주의(Unhealthy Evangelism)이라고 해석하고,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수평적 외향적 성화를 모두 강조하는 것은 건전한 복음주의(Healthy Evangelism)이라고 해석하면서 웨슬리의 사상은 바로 건전한 복음주의라고 풀이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신앙의 본질(essence of faith)은 내면적(inward)이지만, 신앙의 증거(evidence of faith)는 사회적이라고 아우틀러는 해석한다. 마음의 성결과 생활의 성결(holiness of heart and life)을 웨슬리는 강조하고, 내적 성결과 외적 성결을 강조한다(inner and outward holiness). 마음의 성결과 내적 성결은 인격적 성결을 말하고, 생활의 성결과 외적 성결은 사회적 성결로 연결되어진다.
웨슬리의 개인적 성화는 성결적 요소(holistic factor)로서 히브리어 카도쉬(kadosh)와 희랍어 하기오스(αγιοσ)로 표현된다. 곧, 세속성과 죄악성으로부터의 분리(separation)와 성별을 뜻한다. 그것은 외적 행위죄들(actual sins)뿐 아니라 내적 죄(inner sin)까지도 사함 받는 죄 없음(sinlessness)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둘째로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는 성육신적 요소(incarnational factor)로서 세속성으로부터 분리된 성별의 힘을 갖고 세속을 찾아가는 성육신의 참여 곧, 사랑의 적극적 행위를 세상 속에서 실천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결은 소극적 성화의 방법이고 사랑은 적극적 성화의 방법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믿음-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산 믿음이다.
따라서 웨슬리의 종교는 사회적이어야 하고, 웨슬리의 성화는 사회적이어야 한다. 그는 사회적 종교 아닌 기독교를 모르고, 사회적 성화 아닌 성화를 모른다고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내면적 경건과 사회적 개혁, 인격적 성결과 사회적 성결의 생동감 있는 조화를 그의 「찬송가 서문」(Hymns and Sacred Poems(published in 1739))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독한 종교는 복음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거룩한 고독은 ‘거룩한 간음행위’ 이상이 아님을 복음은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 종교(social religion) 아닌 종교를 모른다. 사회적 성결(social holiness) 아닌 성결을 모른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크리스천 완전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더하여 준다. 참으로 그의 형제들을 말로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자는 선행들을 열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의 영혼 속에서 선행들을 실천하기 위해 타오르는 끊임없는 갈망이 이글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주님처럼 매사에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웨슬리는 또한 그의 “빛과 소금” 강해에서 기독교를 사회적 종교로 해석하고,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바꾸려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산상수훈강해 VI]에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는 이 지상에서의 은혜의 왕국의 연속성과 완전성 속에서 이어짐을 강조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은 이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기쁘게, 완전하게 실현되어 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선희 교수는 사회적 성화를 마치 사회도 인격체처럼 회개하고 인격체처럼 항상 기뻐하는 성화를 경험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기괴한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사회적 성화라 함은 사회를 인격체로 보고 구원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다. 의로움과 거룩함이 인간 속에 이루어졌다면, 그는 사회 속에서 의로운 사회와 거룩한 사회를 만드는 사회적 성화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가 그의 내면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되었다면 그리스도가 사회 속에서도 통치하시는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기도문대로 하나님 나라가 사회와 국가 속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사회와 국가 속에 임하도록 사회적 성화운동을 일으킴을 의미한다. 그러나 19세기 자유주의나 사회복음처럼 지상의 유토피아만을 꿈꾸는 것이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가 아니다. 겨자씨 한 알처럼 마음과 사회 속에서 자라는 하나님 나라가 초월적으로 미래적으로 완성되어 감을 믿는 것이다. 1738년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한 웨슬리는 1739년 브리스톨의 탄광 지역 광부들, 농부들, 노동자들 곧 민중들을 찾아가 다양한 사회적 성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운동은 지상 천국실현의 희년운동으로 발전한다. 그의 천국사상은 루터와 칼빈의 천국관을 수용하면서도 루터와 칼빈을 능가한다. 루터는 어거스틴적, 중세 가톨릭적 무천년설(amillenium)을 받아들였다. 역시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을 역사의 마지막에 도래하는 것이 아닌 오늘의 교회로 이해하였다. 그러면서도 중세 가톨릭과는 다르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였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를 영광스럽게 찬양하고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한 공동체로 이해하였으나, 루터는 하나님의 교회의 숨어 계심과 섬기는 형태를 강조하였다. 중세 교회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속을 통치하는 것을 강조하였으나, 루터는 그리스도처럼 세속 속에 성육신하는 것을 주장했다. 중세 교회는 하나님을 영광과 능력 중에 계시는 분으로 이해하였으나, 루터는 십자가의 고난 속에 계시는 분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은 창조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신 아픔과 수난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중세 교회는 그리스도를 세속 문화와 정치 위에 군림하는 분으로 이해하였으나, 루터는 그리스도를 가난한 자, 비천한 자, 겸손한 자, 소외된 자 속에서 아파하시고 그들을 높이시는 분으로 마리아 찬양 주석에서 해석하고 있다.
루터의 그리스도는 역사 변혁자, 교회 변혁자(transformer)이시다. 루터는 교황청을 교회 안에 있는 적그리스도요, 사탄이라고 보았다. 그는 중세 기독교 사회를 위협하는 셀주크 터키 족이나 마호멧을 적그리스도로 보지 않고 교황청을 적그리스도로, 교회 안에 앉아 있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악마라고 지적하였다. 종교개혁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분명한 역사 의식을 갖고 세계사의 한복판에 서 있는 그들의 위치를 바로 알았다. 그러한 역사 의식 속에서 마지막 그리스도의 날을 기다렸다. 그 날은 사탄을 정복하는 기쁨의 날이었기에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초대 교회의 희망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중세 교회 교인들은 최후의 날을 분노와 심판의 날로 두려워하였다. 초대 성도들과 종교개혁 시대의 개신교 성도들은 가장 즐겁고 행복한 날로 기다렸다. 그러나 루터의 기다림은 역사 의식을 상실한 묵시문학적 몬타니즘적 기다림이 아니었다. 루터는 종말론적 사건을 현재의 역사의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내일 종말이 온다고 해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세속 직업 속에서 성실한 직업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어떠한 직장이나 사업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소명(vocation)이라고 생각하여 그 일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루터는 야고보서와 함께 요한계시록을 평가 절하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교회가 하나님의 오른손 왕국이라면 국가는 하나님의 왼손 왕국이다. 국가를 악마적 세속 도시로 보지 않았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이 왼손으로 쓰시는 왕국이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쓰시는 왕국이다. 따라서 교황이 세속 왕국에서 손을 떼고 영적인 일-오른손 왕국의 일-에만 관여하도록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국가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에(롬 13장), 그것이 악하고 불의한 권세라 할지라도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두 왕국설은 히틀러의 파시즘 통치하에서도 독일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는 다르다. 칼빈도 정치와 종교의 영역이 구분되고 그러면서도 상호 협력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세속 권력에 복종해야 함을 말했으나, 두 가지 예외가 있다. 최고 권력을 가진 왕이 불의를 행하였을 때 그 밑에 있는 관리들(lower magisters)이 백성의 편에 서서 백성을 대변하여 그 불의와 악을 고발하고 정의를 외쳐야 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두 번째 예외는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왕권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님이요, 왕이기에 그리스도의 법과 뜻에 거스르는 시민법을 요구하거나 강요할 때 복종을 거절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때문에 칼빈은 루터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하나님 나라를 역사 속에 실현하는 행동주의를 강조한다. 그래서 제네바 시가 구약의 신정 정치(Theocracy)가 실현되도록 철저한 성화 생활의 규범(discipline)을 요구하고 가르쳤다. 루터에게는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밖에 없었지만, 칼빈은 성화를 위해 성도를 채찍질하는 율법의 적극적 역할(positive function)을 강조하는 율법의 제3의 용법을 주장하였다. 제1차 제네바 시 성화 운동은 실패했으나, 1541년부터 다시 시작한 제2차 성화 운동은 성공하였다. 제네바 시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신국 실현 운동에 승리한 셈이다.또한 한 개인이 성화된 크리스천의 삶을 세속 직업 속에서 실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어떤 세속 직업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소명이라고 확신하고 그 직업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 직장을 거룩하게 성화시켜 천국을 만드는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루터의 직업 의식-소명 의식-보다 더 철저하였다.
루터는 성실한 직업인이 될 것을 강조했으나, 칼빈은 그 직장을 성화하고 하나님 나라로 만들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소명 의식은 근면, 검소, 절약의 생활을 이룩하며 마침내 칼빈의 엄격한 소명 의식과 직업관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특히 베버(Max Weber)가 그의 저서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의 하나님 나라 이해는 초월적, 내세적 차원이 있으면서도 역사적, 현실적 차원이 더욱 강조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칼빈도 요한계시록이 너무 신비하여 주석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성경 66권을 모두 강해하였지만,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담고 있는 요한계시록 해석을 망설였다. 따라서 종교개혁 시대의 하나님 나라 이해는 내세적, 초월적, 묵시문학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 내재적이라고 볼 수 있다. 파루시아가 밀라노 칙령 이후 지연되면서 역사 속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어거스틴의 무천년설 이후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중세에는 세속 세계를 제패하고 군림하는 하나님 나라 이해로 바뀌었다가 종교개혁 시대에는 세속 역사를 섬기고 성육신화하여 나아가 세속 역사를 변혁시키는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웨슬리의 천국이해도 이러한 종교개혁전통에 서서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주장한다.존 웨슬리는 18세기 경건주의와 자유주의의 중간에 위치한 신학자다.
따라서 경건주의의 저 세상적 종말론(the other worldly eschatology)과 자유주의의 현세적 종말론(the this worldly eschatology) 사이에 시대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중간 위치에 있었다. 독일의 프랑케(A. H. Francke)나 스페너(P. J. Spener)에 의해 시작된 경건주의(Pietismus)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운동(Ecclesiola in Ecclesia)으로 기도와 성경 공부 형태로 나타났는데, 할레(Halle) 대학교를 중심으로 전공 과목보다는 성경 공부에 몰두하고 세속 직업과 직장 생활을 무시하고 오직 영적 생활과 전도 사업만을 중요시하는 영육 이원론적 구조를 가진 신학 운동이었고, 따라서 저 세상의 구원, 개인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선교 운동이 일어나 할레 대학교는 2만여 명의 해외 선교사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까닭에,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이 주장했던 전인구원론과 직업 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 운동보다는 내세 지향적 철저 종말론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경건주의 신학을 가진 아펜셀러와 언더우드가 한국 교회 초대 선교사들로 왔기에 한국 교회는 비정치화, 비문화화, 비사회화하는 개인 영혼 구원 운동과 내세 지향적 천국 운동의 영향을 100년 동안 받아 온 셈이다. 이 경건주의식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자유주의 신학에 크게 반발하고 나온 근본주의 신학 속에서 예수 재림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형성된 이 근본주의적 종말론은 현재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과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 속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웨슬리의 부흥 운동은 이러한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의 바람을 타고 일어난 한편, 19세기 자유주의 신학 이전에 일어난 운동이다. 웨슬리 이후에 나타난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미래의 천국을 믿지 않는다. 칸트 철학에 영향받은 도덕 신학으로서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 않고 선하며 선한 도덕성을 개발시킬 때 이 역사 속에 도덕 왕국, 선하고 낭만적인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학 운동이 극단에 이른 경우가 라우센부시(Walter Rausenbush)의 사회 복음 운동(social gospel movement)이다. 사회 복음 운동은 인간의 타락과 죄인 본성을 인정치 않고 이 세상의 제도만을 개혁하면 천국이 실현된다고 보는 유토피아주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 천국관은 1,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퇴조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선한 줄 알았는데, 무서운 전쟁을 일으키는 죄악된 인간이며 타락한 인간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위기를 지적하는 위기 신학 혹은 신정통주의 신학(Neo-orthodoxism)에 의하여 자유주의 신학이 도전받기에 이르렀다.
경건주의와 자유주의의 중간기에 형성된 웨슬리 신학과 웨슬리 부흥 운동은 아주 흥미 있고 독특한 천국관을 표현해 주고 있다. 웨슬리는 한편으로는 경건주의적 요소를 갖고 인간의 타락한 죄악성을 지적하고 개인 영혼의 내세 구원과 개인적 성화를 강조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경건주의식 내세 지향적 천국관에만 머무르지 않고 후기 자유주의에서 나타난 현세적 천국을 실현하는 사회적 성화(social sanctification)를 주장한다. 웨슬리는 인간 본성의 타락과 원죄를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칼빈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죄악의 깊이보다 은총의 높이가 더욱 큰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를 역설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칼빈과는 달리(그들은 인간 욕망(concupiscentia) 때문에 죽기 전에 완전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크신 성화의 은총에 의하여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 완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perfection)가 가능하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완전의 교리는 개인 영혼 구원의 완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성화의 완성에로 이어진다.
웨슬리는 역사의 궁극적 목표를 영원한 하늘나라의 구원으로 정의하면서도, 그는 자주 ‘하늘 저쪽’(heaven above)뿐 아니라 ‘하늘 이쪽’(heaven below)도 언급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총체적 사회 프로그램 혹은 역사 속에서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의 세 가지 경제 원리에서 “돈을 잘 벌어라”(gain all you can!), “돈을 잘 저축하라”(save all you can!), “돈을 잘 사용하라”(give all you can!)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돈을 잘 사용하라”이다. 돈을 열심히 벌고 열심히 저축하는 것은 오직 열심히 나누어 주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경제 분배에 강조점을 둔 것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
웨슬리의 천국적 희망은 강하게 샬롬(shalom)과 희년(jubilee)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레위기 25장에 나타난 희년의 모습대로 웨슬리는 빚진 자를 탕감하고 포로된 흑인 노예를 해방시켜 주고, 굶주린 민중들에게 먹을 것을 제대로 나누어 주고, 부당하게 분배된 부를 공평하고 정의롭게 나누어 주고, 상속할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고, 가난한 민중에게 힘에 겨운 세금을 부과하지 말고, 부자들이 사치하고 음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하며, 일거리 없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제도의 개혁을 주장했다. 또한 희년적 생활은 마태복음 25:35-40의 소자-갇힌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헐벗은 자, 나그네 등-에 대한 사랑임을 역설한다. 또한 눈먼 자에게 눈이 되어 주고,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며,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희년의 성도가 되려면 돈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됨을 여러 설교에서 강조하였다. 하나님께 꾸어 주기를, 저축하기를 10분의 1도 10분의 3도 아닌 전부를 하라고 강조하는가 하면, 참 크리스천은 자기 수입 중 필수품 사용 이외에는 모두 나누어 주는 것이요, 10분의 1만 주면 유대인밖에 안되고 10분의 2만 주면 바리새인밖에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하늘에 보물을 저축하는 것은 헌금만 의미하지 않고 이웃에게 구제하고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재산 상속은 사회적 죄악이라고 지적한다. 고용 제도의 개혁과 세금 제도의 개혁까지 주장하였다. 현대 교회가 헌금 축적을 위해 이 구절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웨슬리의 해석을 통해 회개해야 한다.
초대 감리교도들은 현재의 역사 속에 실현된 종말론을 노래했다. 찬송가 가사의 내용이 “Enter into Thy promised rest, the Canaan of Thy perfect love,” 혹은 “Bring Thy heavenly Kingdom in” 등 현재적 신국론이다. 그는 주기도문 해설에서 실현된 종말론의 사상을 말한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지상의 은혜의 왕국의 연속과 완성인 하늘의 영광의 왕국, 영원한 왕국이 오기를…….” 웨슬리는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역사 안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계속적으로 기쁘게, 완전하게 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주기도문 해설에서 계속 강조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지상에서 시작했다. 신자의 마음속에 이미 이루어졌다.” 그의 완전의 교리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이 역사 안에서, 지구 안에서 시작되었다고 강조한다. 이 점에서 웨슬리는 루터보다, 아니 칼빈보다 더욱 현재적 실현된 종말론(present realized eschatology)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웨슬리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 신약성서 노트(notes on the New Testament)에서 마태복음 3:2,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를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의 사회는 먼저 지상에서 형성되지 않으면 안된다. …… 그리고 나서 영광 중에 하나님과 함께 성서의 어떤 구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영광스러운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둘 모두를 포함한다.” 바로 이 점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약점인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초월성 개념이 웨슬리에게는 상실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사실 웨슬리의 이런 하나님 나라 이해-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으나 상대적 완성도 가능하나 절대적 완성은 역사를 초월하여 실현된다-는 그의 완전의 교리에서부터 나온다. 그가 말하는 완전-개인적 차원이나 사회적 차원이나-은 상대적 완전이다. 또한 동적 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적으로 진행되는(process) 완전이다. 계속적인 진행 과정이다. 그것은 빌립보서 3:12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완전의 은혜를 받은 자도 무지, 연약함, 실수, 유혹이 계속 남아 있고 의식적인 죄(voluntary sin)는 안 짓지만 무의식적인 죄(involuntary sin)는 지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계속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웨슬리의 실현된 종말론은 어거스틴, 루터, 칼빈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해방 운동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해방 운동이 종말론과 연결된 것은 12세기의 요아킴(Joachim of Floris)과 16세기의 뮨쳐(Thomas Müntzer)에게서도 나타났으나 그들의 종말론은 무정부적(anarchistic) 폭력 혁명에 의한 해방 운동으로 나타났다. 뮨쳐에게 있어서 완전한 하나님 나라 실현의 바람직한 방법은 의로운 기드온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럽(Gordon Rupp)이 지적했듯-뮨쳐는 최초의 감리교도-이 뮨쳐도 웨슬리와 유사한 성화적 영성 운동을 강조했다. 또한 웨슬리처럼 뮨쳐도 구원의 이중성을 강조한다. 내적 신비주의와 외적 행동주의가 두 사람 모두 비슷하다. 바로 이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상 실현 운동으로서의 해방 운동을 두 신학자 모두 강조하지만, 웨슬리는 비폭력적 평화적 성령 해방 운동을 주장한다. 또한 성령의 해방을 뮨쳐는 ‘impartation’ 곧 우리 안에서(in nobis) 체험되어지며 우리의 본성이 신적 본성으로 성화해 가는 차원에서 풀어 가지만, 웨슬리는 imputation-우리 밖에서(extra nos) 선물같이 부어지고 전가되는 성령의 사역-을 전제한 impartation을 강조한다.
따라서 뮨쳐는 말씀(객관적 은총의 요소: 들음으로 주어지는 믿음)보다는 영적 신비적 체험(주관적 은총의 요소: 환상, 예언 등)을 더욱 강조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체험을 강조하는 신학을 수립-네 신학 기준은 성경, 전통, 이성과 체험-했지만 체험보다는 말씀을 더욱 강조했다. 말씀을 더욱 원초적인 신학 자료와 기준으로 보았다. 따라서 뮨쳐는 몬타너스 파처럼 체험을 중요시하는 종말론적 위험에 빠져 있다. 몬타너스 공동체는 철저히 기다리는 종말론이요, 뮨쳐는 해방과 혁명 운동을 통해 철저히 실현하는 종말론이지만, 영적 체험과 신비적 황홀경을 신학적, 종말론적 기초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무정부적인 역사 변혁을 거부한다. 정치적 신비주의를 통한 신국 실현도 거부한다. 웨슬리는 비폭력적인, 평화적인 신국 건설을 주장한다. 또한 그가 영국 사회에서 실현한 희년 운동은 유토피아적 천년왕국설을 넘어선다. 철저히 희년 사회가 실현되는 천국 건설 운동을 전개하는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하면서도 지상에서 이루는 희년 운동의 상대성을 인정하면서 그것이 미래적 초월적 하나님 나라로 영원히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은총의 낙관주의에 의해서 사회적으로도 지상의 천국을 실현할 수 있다고 웨슬리는 믿는다. 물론 절대적 신국의 모습은 초월적, 미래적이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 웨슬리는 지상의 천국을 믿는다. 그것이 곧, 그의 희년 사상(jubilee)으로 나타난다. 웨슬리는 희년 실현을 위해 세금 제도의 개혁, 고용 제도의 개혁, 노예 해방, 여성 해방, 청지기 의식에 의한 경제적 분배와 나눔, 재산 상속 반대, 광부와 농부와 산업 노동자의 노동조합 운동 등을 실천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감리교를 반대하는 존 프리 박사(Dr. John Free)에게 감리교를 변증하는 편지에서 감리교가 발전한 뉴캐슬(New Castle), 콘월(Cornwall), 킹스우드(Kingswood) 지역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wonderful work), 위대한 일(great work)을 이미 지상에서(upon earth) 시작하신 희년 사회가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실현될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믿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브리스톨에서 옥외 설교를 시작한 첫날(1739년 4월 1일), 산상수훈 강해를 설교-예수께서도 옥외 산상에서 설교하신 것처럼-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실존적으로 사회적으로 경험하는 복음을 선포하였고, 둘째날(1739년 4월 2일) 옥외 하이웨이에서 눅 4:18-19의 본문을 설교하였다. 그는 가난한 자, 눌린 자, 고통당하는 자, 갇힌 자, 병든 자, 나그네, 고아, 과부, 신체 장애자들을 해방케 하는 희년의 복음을 브리스톨 탄광 지역의 민중들에게 선포하였던 것이다. 웨슬리는 그의 「신약성서 주해」(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에서 눅 4:18-19을 해석하기를 “은혜의 해”는 희년이라고 풀이한다. 모든 빚진 자들과 종들이 자유를 얻는 희년이라고 말한다.
그는 주기도문 해설 설교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 지상에서(below) 시작되었다. 성도의 마음속에 세우신다.”고 해석한다. 회개하고 믿을 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성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영생의 모습으로 임재한다. 그는 “성서적 구원의 길”(The Scriptural Way of Salvation)에서 구원은 미래에서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현재적임을 강조한다.
구원이 무엇인가? 구원은 하늘나라에 가는 것, 영원한 행복이라는 말로 흔히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품속을 의미하는 낙원(paradise)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죽음 저편에서나 혹은 저 세상에서 누리는 축복이 아니다. 본문 자체(엡 2:8)의 참 말씀은 이 모든 질문을 넘어선다. 너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you are saved). 그것은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를 통해 네가 소유하는 현재적 축복이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은 너는 구원받았다(you have been saved)는 것과 똑같은 처지로 여겨진다. 그래서 여기서 말해지는 구원은 네 영혼의 첫 여명에서부터 영광으로 완성되는 때까지의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로 확장되어짐에 틀림없다.
또한 웨슬리는 그의 신약성서 주해에서 마 3:2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서 형성되고 후에 영광 속에 완성된다고 보며, 성서 속에는 지상의 모습을 말하는 구절들도 있고 영광된 상태로 표현된 부분들도 있으나 대부분의 말씀은 양면이 모두 있다고 해석한다. 까닭에 웨슬리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의 자람처럼 현재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완성을 향해 자라간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저 세상에서의 미래적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의 현재적 천국 개념과 희년 사상은 그의 완전 교리와 연결된다. 역사 속에서도 완전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는 신앙은 모든 창조의 개혁과 재창조의 꿈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성서적 기독교”에서 감리교회는 완전한 사랑의 승리를 믿는다고 강조한다.
때가 찼음을 생각하라. …… 전쟁은 지상에서 끝나고 다시는 형제가 형제를 대적하지 아니하고 나라와 도시가 나뉘어지지 아니하고, 다시는 가난한 자를 강탈하지 아니하며, 도적도 강포도 불의도 없으리라.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소유한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리라(시 85:10). 정의가 땅에서부터 흘러 넘치고 평화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다. …… 아무도 그가 소유한 것이 그의 소유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 중에는 아무도 궁핍한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의 이웃을 그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그의 동생 찰스와 함께 “만 입이 내게 있으면”(O for a thousand tongues to sing)을 샬롬과 희년의 환상으로 찬송한다. 제5절에 신체장애자가 회복되는 환상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너 귀머거리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 너 벙어리여 너의 굳은 혀가 풀려 그를 찬양하라, 너 눈먼 자여 너의 구세주가 오심을 보라, 너 절름발이여 기쁨으로 뛰어라.” 제4절에서는 해방과 자유가 보여지고 있다. “그는 말소된 죄의 권세를 깨뜨리신다. 죄인을 자유케 하신다…….”고 노래한다. 또한 제9절에서는 하늘나라를 여기 지상에서 기대하라고, 사랑을 소유함이 곧 하늘나라라고 노래한다.
웨슬리는 레위기 25장에 나타난 희년의 모습대로 빚진 자를 탕감하고, 포로 된 흑인 노예를 해방시켜 주고, 굶주린 민중들에게 먹을 것을 제대로 나누어 주고, 상속할 재산의 대부분은 사회에 환원하고(자녀들에게 필수적인 것은 상속할 수 있지만), 가난한 민중에게 힘에 겨운 세금을 부과하지 말고, 부자들이 사치하게 음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하며, 일거리 없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제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희년 생활은 마 25:35-40의 소자-갇힌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헐벗은 자, 나그네 등-에 대한 사랑임을 역설한다. 또한 눈먼 자에게 눈이 되어 주는 것, 발 없는 자에게 발이 되어 주는 것,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는 것,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웨슬리의 희년적 꿈은 통일 희년의 꿈과 통한다. 바로 이러한 신학적 통찰이 한국의 통일 희년 운동의 신학적 기초가 될 수 있다. 웨슬리가 오늘 한국에 다시 온다면 그는 이런 희년 사회가 실현되기 위해 열심히 통일 운동에 앞장설 것이다. 이런 희년 운동의 프락시스를 한국적 상황 속에 다시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웨슬리의 사회적, 행동주의적 요소는 해방의 희년 사상으로 나타난다. 그의 성화 개념은 역사 속에 성육신하는(incarnational) 사랑 운동으로 역사 속에 억눌려 있는 광부, 농부, 노동자, 여성들을 해방시켜 가는 희년 운동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웨슬리에게 성화는 성결과 사랑을 뜻할 뿐 아니라,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웨슬리 사상에 있어서, 성화의 교리에 의해 발전된 사랑의 사회윤리가 조직적으로 응용되었다면, 사회 질서 자체가 완전해질지도 모른다. 그 당시 가난한 자들의 투쟁은 신앙의 확신에서부터 나왔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은 해방의 신앙, 자유케 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치적 실천과 신앙의 표현 사이에는 아무런 거리감도 없었다. 정치적 각성과 정치적 행위-노동 계층을 위한-는 감리교가 가르치는 갑작스러운 회개와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회심 이후에 즉각적으로 시작되었다. 거듭남은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형상으로 갱신되는 성화가 필요하다. 성화는 도전을 받아들이고, 삶의 풍성함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보이는 현세에서 실현하는 투쟁을 향해 모험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정의의 왕국이다. 우리는 정의를 위한 목적이 이 땅 위에 실현되기까지 투쟁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1794년 찬송가에서 해방의 개념이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멍에를 지금 부러뜨리자. 폭군의 멍에를 거부하라!” 또 다른 찬송에서 감리교도들은 노래했다. “그는 영광스러운 자유 속에서 걷고 있다.” 1741년 찬송가 편집에서 웨슬리는 힘있게 자유를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지옥 권세에서 영광스럽게 자유하였네.” 주님의 영은 자유의 영이시기에 성령 안에서의 완전한 성화는 자기 의지, 악한 생각, 그리고 모든 내적, 외적 죄악에서 자유하는 것을 뜻한다. 이 완전한 성화에서부터 오는 자유는 사회적 변화의 유토피아적 꿈을 발전시켰다. 과격한 회심의 경험은 영국의 산업 혁명의 과정에서 과격한 사회적 해방 운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회심 개념은 내면적(imputation)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impartation)인 변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죄에서의 해방은 내면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죄에서의 해방을 위해 수동적으로 의로움이 주어질 뿐 아니라(imputed passive righteousness), 능동적으로 의로움의 실천을 통해 의로운 사람과 의로운 사회까지 만들어야 한다(imparted active righteousness). 따라서 개인적으로 내면적으로 얻어진 의로움은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사회적 정의의 완성이라는 희년 사회의 실현을 위해 행동하는 완전 교리의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웨슬리의 완전 이해는 그리스도의 의(righteousness of Christ)의 실현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현이다. 크리스천의 완전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연결시키는 응용에 웨슬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분리시킬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웨슬리가 말하는 사랑은 모든 계급과 모든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완전의 교리는 심오하게 신학적이면서 동시에 윤리적이다. 이 교리는 그의 생각을 정치적, 사회적 개혁의 문제로 이끌었다. 사랑의 개념은 사회적, 정치적 비판으로 인도했다.
VI. 웨슬리의 시각에서 본 “칭의론에 대한 공동선언 1997/1999” (루터교회세계연맹과 그리스도인의 일치촉진을 위한 교황청평의회):
1999년 10월 31일에 루터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공동발표한 "칭의론에 대한 공동선언“(이하 ”공동선언”이라고 표기함)은 칭의, 성화, 믿음, 그리고 선행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 아주 웨슬리적이다. 18세기에 웨슬리가 이미 해석한 믿음과 칭의의 관계, 선행과 성화의 관계를 1999년 공동선언도 표현하고 있다. ”공동선언” 제19조(4장 칭의에 대한 공동이해의 진술, 1절 칭의에 직면한 인간의 불가능성과 죄)에서 다음과 같이 공동으로 고백한다.
인간은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함께 고백한다............ 즉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여 있으며, 따라서 어떤 공로도 치를 수 없으며, 자기 고유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 칭의는 은혜로부터만 일어난다.
이러한 인간의 공로를 배제시키는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의 사상은 웨슬리가 그의 의롭다하심에 관한 설교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믿음으로 의롭다하심“ 등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바이다. 이것은 일찍이 루터가 강조한 것이고, 칼빈이 발전시켜 프로테스탄트신학의 중심을 형성한 사상이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적 입장을 로마가톨릭교회가 공동으로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더욱 나아가서 로마가톨릭교회가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의 사상을 수용한 것도 괄목할만하다. 웨슬리도 바로 이 점에서 루터가 강조했던 신뢰하는 믿음(fiducia)에 의한 의롭다 하심을 의인화의 핵심으로 수용한다. 그러한 내용이 잘 나타나는 “공동선언” 제25조(4장3절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을 함께 고백한다: 이 구원은 그 죄인에게 세례 가운데서 성령에 의해 그의 전 그리스도교적 삶의 기반으로서 주어진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안에 포괄되어 있는, 곧 의롭게 하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신뢰한다. 이 의롭게 하는 믿음이 사랑 안에서 역사한다: 따라서 행위없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인간 안에서 믿음의 자유로운 선물에 앞서가고 뒤따르는 모든 것은 칭의에 대한 근거가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칭의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아예 공로를 치루고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로가 아닌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하면서도 이 25조에서도 믿음은 사랑 안에서 역사함을 강조한다. 행위없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한다. 이 점은 로마가톨릭적 요소가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루터도 “기독자의 자유”나 “선행론”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이 열매로서 따라옴을 강조한다. 그러나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웨슬리가 야고보서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행함으로 성숙하여 지는 믿음을 루터보다 더욱 강조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의 설교 “하나님의 포도원에 관하여”에서 루터는 신앙의인화에 대하여 강조를 한 반면에 선행에 의한 성화를 무관심하고, 로마가톨릭교회는 선행에 의한 성화에 강조를 한 반면에 신앙에 의한 의인화에 무관심하였다고 비판하면서 감리교도들이 이 둘을 가장 잘 조화시킴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동선언”은 웨슬리적이다.
선행에 관하여는 “공동선언” 제37조(4장7절 의롭게 된 자의 선행)에서도 계속 취급되고 있다. 곧 선행은 칭의를 뒤따르는 칭의 열매라고 본다. 동시에 선행은 칭의를 얻은 성도들의 평생의 의무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동선언에 대한 가톨릭의 이해가 표현된 제38조에서는 “공로성“(die Verdienstichkeit)을 강조하고, 루터교회의 이해가 표현된 제39조에서는 공로성을 부정한다. 믿은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고만 표현한다. 그럼에도 신자의 성장과 그리스도의 의에로의 본성적 참여를 위해서 선행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루터교 교인들도 은혜의 보존과 은혜와 믿음에 있어서의 성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나님에 의한 받아들임으로서의 의와 그리스도 의에의 참여로서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항상 완전하다는 것을 그들은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차이는 웨슬리 안에서 극복될 수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의 명령이기에 선행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인간행위에 대한 자유의지의 책임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책임적 행위는 어디까지나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그런데 “공동선언” 로마가톨릭적 입장 제38조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러한 웨슬리적 요소를 언급하고 있다.
가톨릭교인들이 선행이 갖고 있는 ”공로성“을 고수한다면 그것은 이 행위가 성서적 증언에 따라 하늘에서의 보상이 약속되어졌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에 있다. 이것은 다만 가톨릭교인들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명시하고자 함인 것으로써 그들은 선행이 갖고 있는 은사적 성격을 문제시하거나 칭의 그 자체가 항상 공로의 대가를 치르고 획득할 수 없는 은사로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더구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용납의 의(imputation)와 그리스도 의에의 참여(impartation)는 “공동선언” 제28조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다. 객관적으로 법정적으로 전가되는 의로움(objective, forensic and imputed righteousness)을 넘어서서 “공동선언”은 주관적으로 실제로 변화되는 의로움(subjective, real and imparted righteousness)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루터교회에서 양보하고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물론 루터도 그의 설교 “두 종류의 의”에서 법정적 의와 실제적 의의 양면성을 말하지만 그래도 법정적 의를 더욱 강조하였다. 이 양면적 의로움을 강조한 학자가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역시 웨슬리다. 칼빈도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실제적 의를 말하기는 하지만 웨슬리만큼 철저히 말하지 않는다. 앞에서 웨슬리 당시의 칼빈주의자들과 루터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이 양면적 의로움을 웨슬리가 얼마나 강조한 것을 이미 소개하였다. 웨슬리에게는 의인화(義認化: imputation)와 의인화(義人化: impartation)의 총체적 이해가 강조된다. 이러한 총체적 이해가 ”공동선언“ 속에서 제28조(4장4절 의롭게 된 자로서의 죄인인 존재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성령은 세례 가운데서 인간을 그리스도와 결합시키고 의롭게 하며 그 인간을 실제로 새롭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함께 고백한다. 그렇지만 의롭게 된 자는 아무런 조건 없이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평생 동안 끊임없이 의존되어 있다................... 그에게 거듭 용서가 보장되어 있다.
이러한 루터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적 합의는 트렌트공회의 신학적 정죄와 심판 이후 처음으로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선언으로서 역사적 의미와 의의를 지닌다. 그런데 아직도 남아 있는 차이점이 극복되려면 성화론을 칭의론과 함께 취급하여야 하며, 칭의론과 성화론을 가장 잘 총제적으로 종합한 웨슬리신학에 근거하여 대화를 계속 추진하여 갈 때 신교와 구교간의 에큐메니칼적 합의를 도출하여 낼 수 있을 것이다.
나오는 말
본 논문에서 필자는 웨슬리의 믿음과 선행의 조화를 통한 구원이해가 오늘날 한국교회를 갱신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됨을 밝혔고,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가 에큐메니칼 일치를 추구하는 것에 웨슬리 구원론이 얼마나 큰 공헌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위에서 논의하였던 것을 다시 요약하여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축약하여 언급할 수 있다.
첫째로, 한국교회는 루터와 루터주의자들,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이 무관심하여 왔던 성화론을 웨슬리처럼 구원론의 중심으로 끌여들여야 한다. 구원의 출발-의인화와 거듭남-보다는 오히려 구원의 과정과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의미하는 성화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회개와 거듭남을 강조하는 영적 탄생의 부흥운동은 20세기 동안에 많이 일으켜 왔으나 영적 성숙을 의미하는 성화는 전혀 강조하여 오지 않았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성화중심의 영성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잘 훈련시켰으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잘 훈련시키지 못하였다. 21세기에 한국교회는 그러한 성화 중심의 영성운동을 집중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그럴 때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같은 사건이 안 일어나는 한국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둘째로, 성화 중심의 한국교회가 되기 위해서 신앙지상주의 혹은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에서 행동주의 신앙으로,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는 산 신앙으로 거듭나야 한다. 신앙의 생활화, 신앙의 사회화가 일어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경제적으로 섬기고 나눔을 실천하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행함은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게 한다고 가르쳐 왔으나, 웨슬리의 가르침대로 구원의 출발(initial salvation)은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구원의 완성(final salvation)은 선행과 사랑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해야 한다. 구원의 필수조건은 믿음이지만, 구원의 충분조건은 선행도 포함되어야 함을 주장하여야 한다.
셋째로, 선행의 실천은 성령의 은총으로만 이루어지고 인간은 노예신세라는 루터적, 칼빈적 해석을 넘어서야 하며, 동시에 선행은 인간의 공로라는 중세 가톨릭적 공로주의도 넘어서야 한다. 웨슬리처럼 선행의 출발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적 참여로 선행과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짐을 강조하여야 열심히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한국교회로 만들 수 있다. 성령의 역사 100%, 인간 의지의 참여 100%로 선행의 실천이 이루어 진다는 웨슬리적 해석이 한국교회를 행동하는 교회로 성숙시킬 수 있다.
넷째로, 1999년 루터교회세계연맹과 로마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공동선언한 칭의에 관한 신학선언이 더욱 잘 발전하려면 웨슬리적 가르침을 잘 활용하여야 한다. 칭의만 아니라 앞으로 성화에 관한 공동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칭의와 성화의 에큐메니칼적 신학의 발전을 위해서 웨슬리적 구원이해에 현대교회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칭의는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성화는 믿음과 동시에 선행과 사랑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하여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가톨릭교회가 공로는 어디까지나 인간적 노력에 의해서 나오지 않고 성령의 은사적 역사로부터 출발한다고 중세 가톨릭적 가르침을 수정한 것은 웨슬적임을 살펴 보았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루터교회가 루터보다 구원의 은총에 대하여 인간의 자유의지적 응답을 더욱 강조한 것은 또한 웨슬리적임을 필자는 강조하였다. 이러한 웨슬리의 구원이해가 앞으로 에큐메니칼 칭의론, 성화론, 구원론에 많은 기여를 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