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공(문제공)이신 치암박선생(恥庵朴先生)의 단비명(壇碑銘)
서문(序文)도 병기(幷記)함
함양군(咸陽郡) 서상면(西上面) 대남리(大南里)는 옛날에 노천(蘆川)이라고 호칭하였다. 이 지역에 새로운 단(壇) 이기(二基)가 상하(上下)로 우뚝하게 있는 것은 선생의 선고(先考)이신 군부총랑공(軍簿摠郞公) 및 선생의 단(壇)이다.
삼가 살펴보니 선생의 휘(諱)는 충좌(忠佐)요 자(字)는 자화(子華)며 호(號)는 치암(恥庵)이요 성(姓)은 박씨(朴氏)며 본관(本貫)은 함양(咸陽)이다. 박씨(朴氏)는 본래 신라종성(新羅宗姓)이었으며 휘(諱) 언신(彦信)에 이르러 속함대군(速咸大君)에 봉하여졌으니 속함(速咸)은 즉 함양(咸陽)의 구호(舊號)이며, 이 분이 본관(本貫)을 얻은 선조(先祖)이다. 휘(諱) 선(善)에 이르러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추증(追贈)되셨으니 이 분이 시조(始祖)이시다. 휘(諱) 인정(仁挺)을 낳았으니 예부상서(禮部尙書)이셨고, 휘(諱) 신청(信淸)을 낳았으니 예부상서(禮部尙書)이셨는데 이 분이 오대조(五代祖)가 되신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윤정(允禎)이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판호부상서(判戶部尙書)와 대부경(大府卿)이셨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신유(臣유)니 판이부상서(判吏部尙書)와 추밀원사(樞密院事)로 응천군(凝川君)에 봉하여지셨고 시호는 충질공(忠質公)이시며, 조(祖)의 휘(諱)는 지빈(之彬)이니 위위윤(衛尉尹)이셨는데 문원공(文元公)의 증시(贈諡)를 받으셨고, 고(考)의 휘(諱)는 장(莊)이니 군부총랑(軍簿摠郞)이신데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추봉되셨으며, 비(비)는 고성이씨(固城李氏)이시니 중서좌상시(中書左常侍)였던 존비(尊비)의 따님이며, 국자제주(國子祭酒)와 보문각(寶文閣)의 직학사(直學士)였던 익주(益州) 이행검(李行儉)의 외손녀(外孫女)로 규뮨의 범절(凡節)이 있으셨다.
충열왕(忠烈王) 정해(丁亥:一二八七)년에 선생은 안의(安義)의 옛 집에서 태어나셨다. 천성적인 자질이 똑똑하고 재주와 슬기도 동료보다 뛰어나니 선공(先公)께서 원대(遠大)하게 되리라고 기대하셨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빨리 가정의 교훈을 받아 능히 양친을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았으며, 장성하게 되어서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더불어 이재(彛齋) 백이정(白이正)의 문하에서 수업(受業)하여 성리학(性理學)의 종지(宗旨)를 얻어 들으셨으니, 이재(彛齋)는 즉저의 선조이신 회헌부자(晦軒夫子)의 높은 제자로써 세상에서 육군자(六君子)라 칭송하는 분의 한 사람이시다.
충숙왕(忠肅王)의 조정에 급제하여 전라도를 안렴(按廉)하였더니 왕에게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인 박연(朴連)이란 자가 있는데 내지(內旨)를 전하며 양민(良民)임을 인식하고도 노예(奴隸)를 삼기에, 선생이 잡고 허락하지 않았더니 연(連)이 참소하며 말하기를 『안렴사(按廉使)가 공경스럽지 않아 왕지(王旨)를 폐지(弊紙)와 같이 버렸습니다. 』라고 하니, 왕(王)이 성을 내어 곤장을 치고 해도(海島)로 유배(流配)하였다가 후에 소환하여 감찰(監察)과 지평(持平)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병(病)을 핑계대고 나가지 않으니 예문관(藝文館)의 응교(應校)로 바꾸어 경상도의 염세(鹽稅)를 감독하도록 명하셨으나 또 나가지 않으셨다. 잠시 후에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옮기셨고 여러 차례 전보(轉補)되어 밀직제학(密直提學)과 개성윤(開城尹)이 되셨으며 공로(功勞)로써 함양군(咸陽君)에 봉하여지셨다.
충혜왕(忠惠王) 五년(一三四四)에 지공거(知貢擧)로써 동지공거(同知貢擧)인 이천(李천)과 더불어 진사(進士)하을지(河乙址)등 三十三人을 뽑았다.
충목왕(忠穆王) 초기에 전민도감(田民都監)의 판사(判事)가 되셨고, 四월에 찬성사(贊成事)에 배임(拜任)되셨으며 六월에 한종유(韓宗愈)·이제현(李齊賢)·김윤(金倫)·안보(安輔)·민사평(閔思平)·이달충(李達衷)의 제현(諸賢)들과 더불어 경연(經筵)에 들어가 임금을 보시고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론(講論)하셨다.
을유(乙酉:一三四五)년 正月에 다시 정방(政房)을 설치하자 찬성사(贊成事)로써 김영후(金永煦)와 함께 제조(提調)가 되셨고, 四월에 판삼사사(判三司事:三司의 判事)이셨다. 왕(王)이 일찌기 원(元)나라에 있었는데 사부(師傅)인 박인간(朴仁幹)이 죽자 왕(王)이 손수 쓰시어 선생 및 김인연(金仁沇)·김영후(金永煦)등을 기용(起用)하여 들어가서 모시게 하였으나 재추(宰樞)가 허락하지 않았다.
四월에김윤(金倫)·이제현(李齊賢)과 더불어 상소(上疏)하여 강윤충(康允忠)의 죄를 논(論)하여 선왕(先王)의 치욕(恥辱)을 씻었으며 전대(前代)의 사건을 밝혔더니, 왕(王)과 대비(大妃)께서 감동하고 깨달아 원(元)나라 올렸으며, 벼슬은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과 삼중대광(三重大匡)과 판삼사사(判三司事)와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이르셨다. 성품이 온후(溫厚)하고 검약(儉約)하여 비록 경상(卿相)이 되셨으나 거처하는 집과 의복은 평민 때와 같았으며,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하여 비록 연노(年老)하셨으나 걷어 치우지 않으셨다.
충정왕(忠定王) 원년(元年)인 기축(己丑:一三四九)년 윤칠월(閏七月) 정축일(丁丑日)에 병환(病患)으로써 돌아가셨으니, 향년(享年)은 六十三세 이셨고, 문제공(文齊公)의 시호(諡號)가 추증(追贈)되었으며, 남해(南海)의 난곡사(蘭谷祠)에 배향(配享)되셨고, 또한 선조조(宣祖朝) 경오(庚午:一五七○)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선생(先生)으로써 또한 후세의 귀감(龜鑑)이 될 분이라고 추천하시어 이에 역동서원(易東書院)에 배향(配享)을 하였으나 훼철(毁撤)된 후로 사림(士林) 및 여러 후손들이 서로 더불어 의논하며 말하기를 『그 열향(列享)을 하는 것 보다는 선생을 위하여 독향(獨享)함이 더욱 좋겠다.』고 하고는, 이에 금곡서원(金谷書院)을 예천군(醴泉郡) 용문면(龍門面) 금곡리(金谷里) 오미봉(五美峰) 아래에 건립하고 매년 춘추(春秋)로 봉향(奉享)한다.
부음(訃音)을 듣고 이익재(李益齋) 문충공(文忠公)께서 만사(輓詞)를 지어 통곡하며 말씀하셨기를 『눈이 어두워도 오히려 복희서(伏羲書:周易)를 즐기었고, 몸이 귀하게 되어도 능히 제갈량(諸葛亮)의 집(초가)을 편안히 여겼네. 아! 슬프다. 민지(민池) 위의 물을, 한 잔도 인상여(藺相如)에게 구걸(求乞)하지 않았노라. 함께 고문(顧問)으로 받들며 경연(經筵)에서 모셨는데, 비가 흩어지고 구름이 뒤집히니 백발의 나이였네. 선생(先生)을 얻어 보았음은 참으로 큰 다행이었고, 군(君)을 보내고 무슨 일로 혼자서 머무를까?』라고 하셨으니, 동문(同門)의 정을 펼치셨던 것이다.
오남이녀(五男二女)를 두셨으니, 아들은 소(소)이고 정(珽)은 찬성(贊成)으로 함양군(咸陽君)에 봉하여졌으니 후손은 이천(利川)·수원(水原)·평산(平山)·봉산(鳳山) 고양(高陽)·진천(鎭川) 등지에 살고 경(瓊)은 판서(判書)인데 후손은 옥천(沃川)·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에 살며 번(번)은 지평(持平)인데 후손은 순천(順天)·구리(九里) 등지에 살고 전(琠)은 지신사(知申事)와 함양군(咸陽君)인데 후손은 예천(醴泉)·상주(尙州)·문경(聞慶)·성주(星州)·칠곡(漆谷)·영해(寧海)·진주(晋州)·하동(河東)·함양(咸陽) 등지에 살며, 딸은 중랑(中郞)인 최자경(崔自敬)과 좌찬성(左贊成)인 홍유룡(洪有龍)에게 시집갔다.
정(珽)의 아들은 기(杞)니 호군(護軍)이요, 경(瓊)은 二男이니 거실(居實)은 우윤(右尹)인데 영상(領相)에 추증(追贈)되었고 문영(文楹)은 좌윤(左尹)이며, 번(번)도 二男이니 정(靖)은 전서(典書)이고 설(설)은 감찰(監察)이며, 전(琠)은 三男이니 문명(文命)은 재신(宰臣)이요 문무(文茂)는 지중추(知中樞)며 문재(文재)는 지밀직부사(知密直府事)이다.
기(杞)의 아들은 연(衍)이니 군수(郡守)요 거실(居實)은 五男이니 희문(希文)은 좌상(左相)에 추증(追贈)되었고 희부(希傅)는 학행(學行)이 있었으며, 희주(希周)와 희석(希奭)은 현감(縣監)이며 희영(希榮)은 학행(學行)이 있었다. 문영(文楹)의 아들은 이(이)리 감사(監司)요, 정(靖)은 二男인데 가연(可衍)은 판관(判官)이고 가문(可文)은 판서(判書)며, 문명(文命)의 아들은 부(富)니 판사(判事)며, 문무(文茂)는 六男이니 거(거)와 연(連)과 손(孫)과 성온(成溫)과 성필(成弼)과 규(珪)이다. 문재(文재)는 三男이니 원택(元擇)은 개성부윤(開城府尹)이고 안택(安擇)은 상장군(上將軍)이며 흥택(興擇)은 판도판서(版圖判書)이다.
연(衍)의 아들은 인숭(仁崇)이니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고, 희문(希文)의 아들은 분(분)이니 사헌부(司憲府)의 집의(執義)며, 희주(希周)의 二男은 자현(自賢)과 자견(自堅)이고, 희석(希奭)의 아들은 담(譚)이며, 희영(希榮)은 三男이니 성(誠)과 인(認)과 회(誨)요, 이(이)의 아들은 숭탕(崇湯)이니 도사(都事)며, 가연(可衍)의 아들은 행(行)이니 참의(參議)요, 가문(可文)의 아들은 명근(命根)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며, 부(富)의 아들은 유근(有根)이고, 거(거)는 二男이니 숙진(叔珍)과 용진(用珍)이며, 연(連)의 아들은 성길(成吉)이고 규(珪)는 二男이니 보(甫)요 춘흥(春興)은 현감(縣監)이며, 원택(元擇)은 二男이니 규(規)는 공조판서(工曹判書)요 구(矩)는 예조참의(禮曹參議)였는데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효행으로 정여(旌閭)를 받았다. 안택(安擇)의 아들은 전의(全義)니 판사(判事)요, 흥택(興擇)의 아들은 광민(光敏)이며,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노라.
아! 선생의 세대(世代)가 이미 七白여년이나 오래 경과하여 창해(滄海)가 상전(桑田)으로 여러 번 변하니 능선(陵線)과 계곡(溪谷)이 옛날과 다르고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를 모두 실전(失傳)하였으니 후사(後嗣)가 된 자의 슬픔과 답답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느냐?
그러나 이익재(李益齋)·이가정(李稼亭:穀)의 제현(諸賢)과 더불어 성자(姓字)와 휘자(諱字)가 아울러 송도(松都)의 남루(南樓) 위 대종(大鍾)에 새겨져 있고 또한 도학(道學)의 연원(淵源)과 조정(朝廷)에 벼슬하였던 치적(治績)의 줄거리가 간략하게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으니 이것은 가히 이정(彛鼎)에 새겨지고 기린각(麒麟閣)에 그려져 있다고 하리라.
시문(詩文)이 동문선(東文選)에 많이 실려 있으며, 만경루(萬景樓)를 쓴 시(詩)에 말씀하셨기를 『백연사(白蓮寺)는 경치좋기로 유명하고, 만덕산(萬德山)은 산이맑기로 제일이네. 문(門)이 고요하니 소나무 그늘에 닫혔고, 손님이 와서 풍경소리를 듣네. 배는 해상(海上) 위로 따라서 가고, 새는 꽃 사이를 향하여 우네. 오랫동안 앉아 돌아갈 길도 잊었으니, 매우 티끌진 세상의 정(情)은 없구나.』라고 하셨으니, 이것으로써 그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할 수 있으리라.
또한 덕망(德望)과 관작(官爵)과 연치(年齒)가 모두 높으셨으니 선생은 진실로 삼달존자(三達尊者)이리라.
어느날 선생의 二十二代孫인 우식(宇植)선비님이 나를 방문하여 단비명(壇碑銘)을 책임지우기에 내가 비록 그럴 사람은 못되지만 돌이켜보니 선세(先世)에 구계(舊契)가 있었고 이미 또한 군부총랑공(軍簿摠郞公)의 단(壇)에 명(銘)도 지었기 때문에 드디어 외람됨을 잊고서 우(右)와 같이 서차(序次)를 하였으며, 잇따라 명(銘)하여 말하였노라.
함양(咸陽)의 박씨(朴氏)는 우리 동방(東方)에 으뜸이네. 세세(世世)로 계속하여 명경(名卿)과 거공(巨公)이 끊임이 없었네.
선생(先生)도 계속 태어나시어 재주와 슬기가 뛰어나게 총명(聰明)하였네. 이제공(彛齋公)을 스승으로 섬겨 유림(儒林)의 기풍(氣風)을 진작(振作)하셨네.
넷 왕조(王朝)를 거쳐가며 벼슬하여 국가에 충성(忠誠)으로써 보필(輔弼)하셨네. 연치(年齒)와 덕망(德望)이 함께 높은데 문장(文章)도 또한 풍부하셨네.
작위(爵位)가 경상(卿相)에 있으면서도 먼저 몸소 검소하셨고, 벼슬을 역임(歷任)한 이력(履歷)이 간략하게 역사(歷史) 가운데 실려있네.
누가 감히 더불어 짝하랴! 위대한 업적(業績)과 훈공(勳功)을. 내가 단비(壇碑)에 명(銘)을 지었으니 천지(天地)와 더불어 시작과 마침을 함께 하리라.
갑신(甲申:二○○四)년 九월 중순(中旬)에
순흥후인(順興后人) 안종식(安琮植)은 삼가 지음
이심사대손 치대(治大)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