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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변의 주역들이 일본 망명 중 찍은 사진. 오른쪽부터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Philip Jaisohn)은 한인 최초로 미국 시민이 된 사람으로 미주 한인 사회의 상징적 존재이다. 그가
1925년부터 1951년까지 살았던 집이 필라델피아 부근 미디어(Media) 시에 남아 있어 1990년부터 ‘서재필 기념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 중이다. 구한말부터 해방 직후까지 역사적 시련기 속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서재필은 오늘날 미주 한인
동포들에게 많은 이야기 거리와 교훈을 남기고 있다.
출생에서 성장까지
서재필(徐載弼)은, 고종이 왕위에 즉위한 해인 1864년, 서광효와 성주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가는 충남
논산이었으나 출생지는 외가가 있던 전남 보성이다. 그래서 현재 보성에는 당시의 외가를 복원한 ‘서재필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재필이 태어나던 해, 아버지 서광효가 진사 시험에 합격하자, 경사가 겹쳤다하여 서재필의 아호를 ‘쌍경(雙慶)’이라 정하였다.
하지만, 서재필은 부모와 그리 오래 지내지 못하였다.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한 사람인 서광하가 아들이 없자, 서광효는 7살의
서재필을 서광하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 서광하의 부인이자 서재필의 양어머니는 세도가문 안동 김씨 출신이었는데, 서재필을 입양한지
얼마되지 않아 서울에서 이조판서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김성근의 집에 서재필을 보낸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김성근의 집에 머물면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고, 18세 되던 1882년 과거에 급제한다. 처음 받은 직책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였다.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서재필은 먼 친척 뻘되는 서광범을 통해서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과 조우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당시 개화파는 서울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는데, 부산 출신인 이동인은 어려서 일본말을 배워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일본에서 들여와 당시 개화파들에게 제공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유길준, 이동인 등은 모두 한 때,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생들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후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봉원사에 비밀리 모여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당’을 형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이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일본 유학과 갑신정변
개화파를 이끌던 김옥균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하여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특히, 김옥균은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조선의 자주권을 확립하려면 국방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1883년 김옥균은 고종을 설득 서재필과 동생 서재창을 비롯한 17명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보내 근대식 군사기술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 일행은 6개월 간 일본의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세운 게이오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6개월 간은 토야마 군관학교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1884년 조선으로 돌아온 사관생도들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청하였고, 고종은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삼아 조련국(操鍊局)을 만들 것을 윤허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청나라와 손을 잡고 있던 명성황후 세력이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들을
궁궐수비대로 편입시켜버린 것이다.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집권파 세력과 긴장 관계에 있던 개화파는 1884년 12월 마침내 행동을 감행하여, 그 유명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다. 오늘날 체신부에 해당하는 ‘우정국’의 설립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던 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그리고 우정국 총판 홍영식이 사전에 모의하여 축하연에 참석한 수구파 집권세력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우정국 주변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이 당황한 틈을 타 무력으로 집권 세력의 주요 인사들을 제거하였다. 여기에 행동 전위대로 나선
것이 서재필을 비롯한 토야마 군관학교 출신 사관생도들이었다. 개화파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복궁 대신 규모가 작아 수비가 수월한
경우궁으로 옮기고, 갑신정변의 이념을 담은 ‘혁신정강 14조’를 선포하였다. 혁신정강에서 개화파는 청나라에 잡혀있는 대원군의
복귀, 청나라에 대한 조공 폐지, 문벌 폐지 및 인민 평등권 수립, 탐관오리 처벌, 국가 재정 재건 등을 주장하였다.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운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정령관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3일을 넘기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명성황후 측에서 청나라 총독 위안스카이에게 편지를 보내 개입을 요청함으로써, 청나라 군사 1,500명이 갑신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다. 청나라 군대 1,500명을 맞아 싸울 수 있었던 개화파의 군사는 사관생도를 중심으로 한 150명에
불과하였고, 개화파를 군사적으로 도와주기로 약속한 다케조 공사의 일본 군대도 쉽게 퇴각해버렸다. 군중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
홍영식을 제외한 갑신정변 주역들은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해있다가 인천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가족의 참사
갑신정변 직후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을 역모로 규정하였고, 갑신정변 주모자들을 대역죄인으로 공표하였다.
역적죄인을 다스릴 때 삼족을 멸하던 국법에 따라 조선 정부는 서재필 일가를 몰살시켰다. 서재필의 부모와 두 형은 자결하였고 옥에 갇혀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당시 서재필에게는 두 살난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굶겨서 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어머니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있던 독이 아이 몸 속에도 퍼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동생 서재창은 군대 있었는데 처형이 되었고 큰누나는 시집을 갔기 때문에 출가 외인이라하여 화를 면했고 출가전인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함경도로 피신하여 신분을 속이고 살다가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살았다.
막내동생 17세 서재우는 나이가 어리다 하여 처형을 모면하고 살아남았다.
나중에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서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는데,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서재필의 활동을 보면 이 두 가지 각성이 서재필에게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George Washington Univ Graduation
미국에서의 교육과 결혼
망명한 갑신정변 주역들은 일본에서 냉대를 받았다. 조선 정부가 갑신정변에 다케조 공사가 연루된 점을 항의하자,
일본은 갑신정변 주역들을 조선으로 송환할 것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갑신정변 주역들은 일본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 일본에 많은 지인을 두고 있던 김옥균을 제외하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다. 1885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들은 각자의 살 길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영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서재필이 처음 구한 일자리는 가구점의 전단지를 붙이는 일이었다. 서재필은
다른 노동자들이 하루 5마일을 다닐때 10마일을 뛰어 다니면서 일했다. 저녁에는 YMCA야간학교를 통해,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서재필은 어느 교회 신자를 통해 홀렌벡(John W. Hollenbeck) 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는다. 펜실베이니아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1886년 서재필은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 윌크스
배어(Wilkes-Barre)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서재필은 해리 힐만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하고, 졸업식에서는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서재필은 교장 집에서 집안 일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 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서재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홀렌벡은 서재필을 불러 놓고,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라파예트(Lafayette)
대학에서 일단 공부를 마치고 그 다음 프린스턴 신학대를 졸업하여 조선에 선교사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더 서재필을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역적의 신세에 묶여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홀렌벡의
서면 약속 제안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을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으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육군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컬럼비안 대학 (현 조지워싱턴대학의 전신) 야간학부에 입학, 1892년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의학사(M.D.)가 되었고,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그리고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1890년 6월 10일 한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었는데, 황인종에게 시민자격을 부여하지 않던 당시의 제도에
비추어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서재필은 1894년 한 호텔에서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을 만나 연애를
시작, 같은 해 6월 결혼식을 올렸다. 뮤리엘은 남북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했던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로 그 아버지는 이미 작고한 상태였지만, 의붓아버지가 워싱턴에서 유명 인사였던 탓에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서재필과 뮤리엘 암스트롱은 두 딸
스테파니(Stephanie Jaisohn)와 뮤리엘(Muriel Jaisohn)을 두었다. 서재필은 의사 개업을 하였으나,
인종차별로 생계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신혼 살림도 워싱턴에 있던 조선공사관에 방을 빌려 차렸다. 1895년 가을,
서재필은 10년전 헤어졌던 박영효를 워싱턴에서 만나게 되고, 그의 권유로 같은 해 12월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Muriel Armstrong
독립신문 시절 서재필
독립신문 발행과 독립협회 건설
서재필이 미국에서 지내고 있던 10년 동안 조선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조선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은 청일전쟁(1894)이다. 동학농민봉기를 두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청나라에
기대고 있던 명성황후 일족이 실권하고, 일본의 지지를 받는 개혁 내각이 들어서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에 맞서다 피살 당하였고, 고종은 이른바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조선에 도착한 서재필에게 개혁 내각은 관료로 입각을 제의하였으나 서재필은 이를 거절하고 신문발행 작업에 착수하였다.
갑신정변 실패가 민중의 동의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을 바로 세우기 위한 근본적인 개혁은 바로 민중의 정치의식을
일깨우는 교육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 신문 창간호를 발행하는데, 이 신문이 바로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The Independent)’이다. 엄밀히 말하면, 독립신문이 조선에서 발행된 최초의 한글 신문은 아니다. 이전에
일본인들이 한글과 일본어로 발행하던 ‘한성신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재필이 독립신문 발행 계획을 추진하고 있을 때, 일본인들은
독립신문이 한성신보에 대적하여 조선의 독립과 이익을 지키는 주장을 할 것을 우려하여 서재필에게 암살 위협을 하였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정치적 중립을 천명하고, 조선 인민이 남녀, 상하, 귀천의 구별을 떠나 조선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알게 됨으로써
조선인의 지혜가 진보할 것이라 선언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 교육, 민주주의, 산업개발의 중요성과 여성평등,
악습폐지, 공중보건 개선을 설파하고, 조선에서 이권다툼을 벌이던 외세와 탐관오리들의 부정축재를 비판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서재필은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나아가 목요일마다 세계사, 정치학, 세계지리 등을 강의
하고, 배재학당 내 학생 토론회 조직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 중에는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등이 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영어를 배우려는 목적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으나, 서재필로부터 영어보다 훨씬
중요한 정치적 자유의 사상을 배우게 되었다고 회고하였고, 신흥우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이 서재필이라고
말하였다. 주시경은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독립신문사에 취직하여 한글 조판을 담당하면서, 나중에 그가 만든 ‘조선어 문법’의 토대를
쌓았다.
서재필은 조선의 독립 의지를 공표하기 위해 ‘독립문’을 세우고 그 옆에 독립공원을 조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897년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델로 독립문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독립문은 바로 중국에서 온 사신들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독립문 뒤 쪽으로는 독립관이 들어섰는데, 독립관 자리에는 중국을 사모한다는 뜻을 가진
‘모화관(慕華館)’이 있었다. 그러나 서재필이 말하는 독립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구주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업들을 추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가
‘독립협회’다. 초기 독립협회에는 안경수, 이완용, 이상재 등이 중심 인물로 참여하여 독립문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고,
나중에는 대중 토론회도 개최하였다. 토론회는 서양의 의회 민주주의를 모델로 행해졌는데, 어떤 주제를 두고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좌우 양편으로 갈라 연설을 한 후, 토론의 승부는 방청객의 박수 소리 크기로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독립협회 토론회가 많은
호응을 불러일으키자, 서재필은 토론회를 한 단계 발전시켜 1898년 2월부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만민공동회는
독립관에서 열렸던 토론회와 달리 서울 종로 한 복판에서 열려 일반 대중이 대규모로 참여할 수 있게 하였으며, 토론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정치적 요구를 하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대중 집회였다. 당시, 만민공동회는 러시아, 일본, 프랑스 등의 이권 침탈을
저지하는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가 절영도를 대여하여 쓰겠다는 요구를 좌절시킨 것이다. 만민공동회가
이렇게 성공하자, 그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는데, 서울에 와서 만민공동회를 보고 감명을 받아 평안도 만공공동회 지부장을
맡아 활약한 인물이 도산 안창호이다. 서재필과 안창호는 그 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우의를 계속 이어나갔다.
이렇게 서재필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조선의 보수파들이 앞장서서 서재필 추방 공작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고종에게 서재필 추방 압력을 가하였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통해 서재필을 소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도 역시
미국 정부에 서재필 추방을 요청하였다. 미국의 알렌 공사도 서양열강의 이권침탈에 반대하는 서재필을 멀리하고 있었고 서재필의
추방에 협조적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서재필은 1898년 5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 서재필은 미국에서
날아온 전보 한 통을 받는데, 발신인은 미국인 장모의 이름으로 되어있었고 내용은 자신이 위독하니 죽기전에 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서재필은 미국에 돌아와서 장모를 찾아가 만났는데, 그런 전보를 장모가 보낸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추적한
끝에, 러시아 측이 미국인 한 명을 매수하여 전보를 조작한 사실을 밝혀낸다.
서재필 부부
독립신문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서재필은 미국에 돌아와서 군의관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에 잠시 참전한 후,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몇 년간 연구원 생활을 하였다. 1905년부터는 고등학교 동창생과
동업으로 출판 및 인쇄 사업을 시작하여, 70명의 직원을 둔 사업체의 사장으로 성공하였다. 서재필은 이 무렵 조지메이슨 및
전미안보동맹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필라델피아 시장을 비롯한 많은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들과 교분을 쌓고 있었다. 서재필이 사업을
시작한 1905년은 조선이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맺어 외교권과 군사권을 일본에 넘긴해이기도 하다. 을사조약 체결 직후 이승만과
윤병구가 서재필에게 찾아와 조선 독립을 보장해달라는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겠다고 하자, 서재필은 이들과 함께 청원서를
완성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재필의 회고에 따르면, 서재필은 젊은 청년들이 조국을 구하겠다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자신이 뿌린 독립의 씨앗이 열매를 맺고 있다는 감동을 받았으며, 조국을 위해 장차 무슨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적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한국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난 1919년 부터이다. 삼일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이승만, 정한경과 더불어 필라델피아에 한인들을 소집하여 ‘한인자유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였다. 리틀극장(Little Theatre 현재는 Plays and Players Theatre)에서 4월 13일에서
15일까지 사흘동안 열린 이 대회에는 140 여명의 한인들을 비롯해서, 서재필이 초대한 여러 명의 미국인들이 참석하였다. 그
중에는 매일 대회 시작 직전 기도를 한 톰킨스(Floyd Tomkins) 목사, 제임스 딘(James Dean) 빌라노바 대학
총장, 버코위츠(Henry Berkowitz) 유태교 랍비 등이 있다. 서재필과 친구처럼 지내던 스미드 필라델피아 시장은
리틀극장을 주선해주었으며, 자유대회 직후 한인들이 비를 맞으며 필라델피아 시내를 행진할 때 시악대를 보내 격려해주었다. 이
대회에서는 한국이 독립을 달성한 뒤에는 공화정 (republic)을 수립할 것을 결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과
미국민 및 미국 정부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였다. 대회 명칭은 ‘한인’ 대회라고 하였지만, 실제 대회의 성격은 미국에서
한국문제를 여론화시키기 위한 대외선전의 성격이 강하였다. 특히, 서재필은 한국을 도와줄 수 있는 미국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라고
믿었고, 미국 기독교 인사들에게 삼일운동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국인의 90%가 기독교인이고 삼일운동은 일제의 기독교 탄압에 맞서
종교의 자유를 찾기 위해 발생한 것이라고 과장을 섞어 설득하였다.
서재필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 친우 동맹(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이라는 조직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톰킨스 목사를 회장으로 1919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결성된 이 조직은, 이 후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워싱턴 같은 대도시를 비롯하여 오하이오, 미주리, 오레곤, 미시건 주의 중소도시에도 세워지기 시작하여 미국내 21개 도시에 최소
3,000명 많게는 10,000명에 이르는 회원을 가진 조직으로 발전하였으며, 나중에는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서도 각각 하나씩
지부가 세워졌다. 친우동맹에서는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강연회를 개최하고 국무장관이나 상원의원 같은 영향력있는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일들을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서재필은 필라델피아 자신의 사무실에 ‘한국홍보국(Korean
Information Bureau)’을 설립하고, 매월 2000부가 넘는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발행하여
정부기관, 대학, 교회 등지에 배포하였는데, 한국평론에도 여러 명의 미국인들이 필자로 참여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선전하였다.
한편, 1921년 서재필은 당시 대통령 당선자인 하딩(Warren Harding) 및 국무장관 내정자 휴즈(Charles E.
Hughes)와 직접 면담을 통해, 워싱턴에서 열릴 군축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군축회의 대표로 파견되어, ‘한국인의 호소’ (Korea’s Apeal)라는 문건을 제출하였는데, 워싱턴 회의에서는
일본의 방해로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대신 미국 상원에서 공식 문서로 채택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워싱턴 군축회의가 끝날 즈음, 서재필은 심각한 재정적 곤란을 겪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각지로
뛰어다니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체를 돌볼 겨를도 없었고, 개인 재산도 독립운동을 위해 많이 지출했다. 무엇보다도 독립운동을
하면서 자금이 부족하자, 모금운동을 통해 갚을 생각으로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았는데, 모금운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서재필
개인이 모든 채무를 지게 된 것이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서재필은 자신이 지출한 사재가 당시 돈으로 70,000 달러가
넘는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사업이 심각한 곤란을 겪자 서재필은 1922년부터 사업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1924년 결국 파산 신청을 하게 되었다. 필라델피아 시내에 있던 집도 저당잡힐 위기에 처하자 집이나마
건지기 위해 부인과 법적인 이혼을 했다는 설도 있다. 서재필은 1925년 필라델피아 인근의 소도시 미디어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미디어에 소재하고 있는 이 집이 현재의 서재필 기념관(Philip Jaisohn Memorial House)이다. 서재필은
1925년 1년동안 유일한과 동업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였으나 이 사업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유일한은 서재필과 하던 미국 내
사업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유한양행을 설립했는데, 유일한이 떠날 때 서재필은 ‘버드나무처럼 비바람에 굳건이 버티라’는
의미로 딸을 시켜서 목곽판에 버드나무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 후 유일한은 이 버드나무 그림을 유한양행의 로고로 사용하였다.
한인 자유대회 참석자들
한인자유대회 참석자들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 앞에서
의사 생활의 재개
생계 유지가 곤란에 처한 서재필은 1926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특별학생으로 입학하여 오랫동안 손에서 놓고
있었던 의업을 재개하였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을 담보로 2,000달러의 빚을 얻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벌써 62세
였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서재필은 당장 개업할 돈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큰 병원에서 근무하기 위해 병리학을
전공하였다. 병리학자로서 서재필은 영국왕립의학저널을 비롯한 여러 저널에 연구 논문 5~6편을 발표하였다. 개업을 향한 꿈을 갖고
몇 년동안 꾸준히 번 돈을 증권 시장에 투자하였지만, 1929년 대공황이 몰아닥치면서 증권에 투자했던 돈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리고 1934년에는 과로로 폐결핵 진단을 받아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외롭게 지내야만 했다. 1936년에야 비로소
개인 사무실을 개업했는데, 이 때 나이가 72세였다. 50년 가까이 서재필과 파란만장한 인생을 같이 했던 부인은 1941년 먼저
곁을 떠났다.
이렇게 생계의 곤란을 겪고 의업에 매진하면서도 서재필은 결코 한국을 잊지 않았다. 1926년 하와이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부각시킨 것을 비롯하여, 꾸준히 신문, 잡지에 글을 기고하였고, 많은 독립운동
지사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서재필이 이제 한국 문제를 잊고 생계에만 신경쓰기를 바랬지만, 자신의 사무실에
찾아온 한국 손님들을 부인 모르게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1941년 미국-일본 간에 태평양 전쟁이 나자 서재필은 징병검사관으로
3년 남짓 자원 봉사하였다. 미국-일본 간의 전쟁에서 미국의 승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미국이 일본을 이기면 그것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바램이 있었다. 미국 의회는 1945년 서재필의 공로에 훈장을 수여하였다.
Floyd Tomkins 목사
하와이 교민들과 (1926)
인천항 입국 (1947)
마지막으로 고국에서 보낸 날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패망하면서 한국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만들어 남북을 갈라놓고 있었다. 남한에는 미군정이 들어와 통치를 하고 있었고, 군정책임자는
하지(John Hodge) 중장이었다. 남한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과 같은 해외 독립지도자와 여운형, 박헌영 등의 국내파가
엉켜 혼란스런 시국이 계속되었다. 특히,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 문제를 두고 격렬한 갈등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당시 미군정은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논의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고, 이승만은 이에 반대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으로 맞서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한 시국을 수습할 목적으로 과도입법의회 의장을 맡고 있던 김규식은 서재필의
귀환을 추천하였고, 하지 장군이 이를 받아들이자, 서재필은 1947년 7월 1일 미군정 최고고문 자격으로 50년만에 고국에
돌아가게 된다. 처음에 초청을 받고 서재필은 ‘나는 지위도 원치않고 명예도 바라지 않는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국민 교육에
있다’는 말로 그의 뜻을 밝혔다. 고국에 돌아온 서재필은 미소공동위원회에 미국측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한국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서재필의 귀국을 원치 않았던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미 한인자유대회 시절부터 서재필과 이승만 사이에는 조금씩
감정의 골이 생기고 있었는데, 이승만은 서재필이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1948년 초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백인제, 최능진을 중심으로 서재필 박사 대통령 추대운동이 일어났다. 젊은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서재필에게 미국 국적을 버리고 영도자로 조국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84세 노령의 서재필에게 이
요구는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서재필은 정치에 뜻이 없었고, 무엇보다 정국이 우선 안정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으로 초대 정부가 세워지자 철수하는 미군정을 따라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서재필은 국민들이 원해서 자신의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 뜻을 따르겠다고 여운을 남겼지만, 실현되지 못하였다.
1949년 삼일절 날 서재필은 기념사를 녹음해서 한국으로 보냈는데, 여기서 서재필은 남북이 조속히 통일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의 마지막 염원은 정반대의 현실로 나타났다. 1950년 6월 남북간의 전쟁이
터지자, 서재필은 큰 충격을 받았고,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부근 노리스타운의 한 병원에서 87세의 생을 마감했다.
서재필과 하지 장군 (1947)
과도입법의회
서재필 근영
미디어 소재 서재필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