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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2012년 2월 29일(음2월 8일)
약사재일 & 출가재일법문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약사재일이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출가재일입니다.
불자라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무엇때문에, 어떤 과정을 거쳐서 출가를 하셨는지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원전 6세기 인도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국을 다스리고 있었던 정반왕이 아들을 얻은 것은 그의 나이 마흔 다섯이 되었을 때입니다. 열 살이 조금 넘으면 결혼을 했었던 당시 인도의 풍습으로 보면 중년이 되도록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무척 늦은 것이고, 그런 만큼 아들의 탄생은 경사 중의 경사였습니다. 그러나 산고(産苦)로 부인을 잃었던 정반왕은 신생아가 어떤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 알고 싶어 아시타라는 점성가로 하여금 점을 치도록 했습니다. 점성가 아시타는 신상아를 주의 깊게 관찰한 다음 말했습니다.
“장차 보위를 이으면 만인이 우러러 볼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나, 32지상을 구비한 고로 출가하면 붓다가 될 것입니다.”
전륜성왕은 인도인들이 간절하게 바라는 메시아로써 성군의 표상입니다. 이는 마땅히 기뻐할 일이나 출가하여 붓다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정반왕을 고민에 빠트리게 하였습니다. 정반왕은 아들에게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인도말로 싯다르타는 성취라는 의미입니다. 즉 모든 것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보위를 이어 태평성대를 이루는 전륜성왕이 되기를 바라며 지은 이름입니다. 성이 고타마이므로 부처님의 속명은 고타마 싯다르타입니다.
정반왕은 두 명의 스승으로 하여금 아들인 고타마 싯다르타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한 명은 학문과 역사와 교양 같은 것을, 다른 한 명은 무술과 통치자로써 갖추어야 하는 자질과 기능을 가르쳤습니다. 이 무렵을 학습기라고 합니다. 이때는 자유롭게 외출할 수도 없으며 면학과 심신 단련에 전력을 기우려야 합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성인으로 대접하여 결혼도 시키고 외출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는 가주기(家住期)를 맞이하게 됩니다.
싯다르타가 학습기를 막 끝냈을 무렵이니 12세라고도 하고 어떤 경전에는 15세라고 적혀 있기도 하는데, 어쨌든 이 무렵 어느 날 정반왕은 태자를 선농제에 데리고 갑니다. 당시의 인도는 농경국가로써 광활한 대륙에다 농경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것으로 국가 경제를 도모하던 때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인도를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중국이나 미국만 대륙이 아니라 인도도 이에 못지않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땅덩어리입니다. 드넓은 땅을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고 경작하는데 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소를 잡아 식용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풍습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임금들이 봄이 되면 농경지가 있던 전농동으로 납시어 제를 올리는 것으로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했었는데, 같은 농경국가다보니 인도에서도 그런 풍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장차 보위를 이를 아들에게 선농제를 어떻게 지내야 하는 것인지 알려줄 필요도 있어 대동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때 고타마 싯다르타는 쟁기질을 하는 농부들의 얼굴이 구릿빛으로 검게 타서 찌들어 있었습니다. 나라에 세금을 바치기 위해서 죽도록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에게서는 기쁜 표정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호화롭게 궁중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농부들의 그런 희생 덕분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누린 풍요가 농부들의 피와 땀을 착취한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 태자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농부는 힘에 부쳐 헐떡이는 소를 향해 사정없이 채찍을 내려쳤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쟁기를 끌고 있는 소의 큰 눈에 번지는 물기가 곧 소의 울음처럼 여겨졌습니다. 소의 고통 속에 농부의 편함이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충격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쟁기의 보습이 지나가면서 뒤집어진 땅에 나타난 벌레를 보고 깊은 연민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때 새가 잽싸게 날라들어 그 벌레를 먹잇감으로 채가는 것을 보고 또한 충격을 받습니다. 새의 삶이 벌레의 죽음을 담보로 보장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숲속으로 들어갔고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서 깊은 명상에 빠져 들었습니다. 공존해서 함께 살고 함께 풍요를 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모든 사람이, 모든 생명체가 같이 행복해 질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것이 태자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때 나무 가지가 늘어지며 그늘을 만들어 햇볕을 가려주었다고 합니다, 정반왕은 태자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다가 명상에 잠겨있는 태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왕은 너무도 엄숙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명상에 잠겨있는 태자의 모습에 감응하여 차마 선농제 의식을 외면한 아들을 야단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려 우리 약선사 벽에 걸려있는 반가사유상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저 반가사유상은 일당 김태신 스님께서 그리신 것입니다. 일당 스님은 올해 세수 92세로써 일찍이 동경제국미술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신 다음 일본화단에서 활동했던 화백이십니다. 비구니계의 큰 별로 회자되는 김일엽스님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신 분으로 어머니 스님의 뒤를 이어 불문에 귀의하신 화승입니다. 저 반가사유상은 백제에서 처음 그려져 일본으로 전래되었고, 일본의 국보 1호가 된 불화를 참조하여 일당스님께서 그리신 것으로써 태자시절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명상 사유하고 계신 모습이 모델입니다. 미륵부처님이라는 설도 있지만 반가좌로 사유하고 계신 태자시절의 부처님 모습이라는 견해가 더 지배적입니다. 진지하고 그러면서도 온화하고 경건합니다. 선농제에 참석했던 고타마 싯다르타가 저런 자세로 명상하셨다고 여기시면 될 것 같습니다.
궁으로 돌라온 싯다르타는 스승에게 선농제에서 목격한 것들을 들려준 후 누구의 희생을 통해 보장되는 행복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평화 속에서 공존할 방법은 없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스승은 그것이 자연의 섭리, 우주의 질서라고 한 다음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여 다스리고 소유할 수 있는 지혜와 방법을 배워야한다고 말했지만 태자로써는 납득할 수 없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태자는 자신이 갖게 된 의문을 풀기 위해 시간만 나면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부왕은 아들이 전륜성왕이 되지 않고 출가하여 붓다가 될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즐거움에 탐닉할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혹서기와 우기 혹한기를 잘 견딜 수 있도록 세 장소에다 태자궁을 짓고 철이 바뀔 때마다 옮겨 다니며 아름다운 미희들에 둘러싸이도록 했지만 태자는 결코 향락에 탐닉하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어느 날 태자는 동서남북의 문을 나와서 세속과 접하게 되는데 이것을 사문유관이라고 합니다. 사문유관(四門遊觀)은 글자 그대로 네 문을 나와 거닐면서 목격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태자는 무엇을 목격한 것일까요. 처음 동쪽 문으로 나왔다가 본 것은 늙은 사람입니다. 남문 밖에서는 병든 사람을 만났고, 서문 밖에서는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도 언젠가는 참혹한 노병사(老病死)의 실상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자각은 선농제때 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제 노병사에서 비롯되는 고를 해결할 방법이 태자의 새로운 화두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북문을 나갔다가 출가사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로부터 바로 노병사를 해결할 방법을 깨우치기 위해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태자도 출가가 자신이 갈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로부터 부처님의 일대기를 회화로 표현한 것 가운데 팔상도(八相圖))가 있는데,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 설산수도상, 수하항마상, 녹야전법상, 쌍림열반상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그 중에서 사문유관상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출가 동기를 회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태자께서는 한번 태어난 생명체가 노병사의 고에 시달리는 것을 멈출 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출가를 결심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생로병사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참다운 행복의 즐거움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어느 날 부왕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생로병사를 해탈하고 무고안온(無苦安穩)의 열반(涅槃)을 얻어 일체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출가를 하고자 합니다.”
정반왕은 보위를 이어야 할 왕자의 출가를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출요경에 보면 완강하게 반대하는 부왕에게 태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 실려 있습니다.
“저는 세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게 해주신다면 출가를 포기하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대를 이을 왕손을 생산한 후에 출가하도록 하라.”
부왕의 뜻을 거스르기 어렵다고 판단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아소다라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는데, 라훌라는 인도말로 장애라는 뜻입니다. 아들이 성불하는데 장애가 될 것이라 여겨 그렇게 작명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그의 나이 29세사 되던 해 2월 8일 마침내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출가를 결행합니다. 부인과 아들이 함께 있는 방 앞으로 가서 문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돌아섰고, 반달이 고요하게 비치는 가운데 궁을 나와 백마를 타고 카필라성을 나욌습니다. 이때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날 것을 염려하여 말의 발에다 헝겊을 싸서 신켰다고 합니다.
불본경에 보면 이때 고타마 싯다르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열반을 구하는 까닭에 궁성을 버리고 출가를 하노라. 나는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다시는 카필라성에 들어가지 않으리. 설산이 자리를 옮기고 바닷물이 마르고 허공이 땅에 떨어질지라도 내가 세운 서원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밤새 남쪽으로 170리를 달려서 아누피야 마을의 아노마강을 건너 숲속에 이르렀습니다. 인도는 대개 강으로 국경을 정했었었습니다. 아노마강을 건넜다는 것은 국경을 넘어 타국 땅에 진입했기 때문에 군대를 출동시켜 찾는 추격권을 벗어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노마는 ‘숭고한 강’이라는 의미입니다. “출가는 숭고한 것이니 나는 숭고한 강가에서 출가사문이 되리라” 고 생각한 다음 고타마 싯다르타는 보관과 패물을 마부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궁성으로 돌아가서 나의 출가를 알려라. 나는 생사를 해탈하지 않으면 궁성을 밟지 않으리라."
그 직후 번뇌가 소멸하기를 발원하며 스스로 머리를 삭발한 후 화려한 태자의 옷을 지나가던 사냥꾼의 낡은 옷과 바꾸어 입었습니다. 인도 뉴델리 국립박물관에는 부처님께서 출가할 당시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말을 타고 출가하여, 삭발을 하고, 마부 찬타카에게 보석과 옷가지들을 건네주는 모습.......등등을 아주 실감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마부가 떠난 뒤 고타마 싯다르타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간절한 발원합니다. 화엄경에 그 내용을 게송으로 함축해 놓았습니다.
영리번뇌(遠離煩惱) 영원히 번뇌를 떠나서
구경적멸(究竟寂滅) 구경의 적멸을 얻을 것이며
동불출가(同佛出家) 제불과 같이 출가하여
구호일체(救護一切) 일체중생을 구호하리라.
여러분!
위 게송에 나타나 있듯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로병사의 고로부터 일체 중생을 구호하기 위한 자비심의 발로에서 출가를 결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출가를 하는 사람은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자신만을 구제하는데 목적을 둔 출가를 해서는 안 됩니다. 성불을 이루고, 그것을 중생구제를 위해 회향할 때만이 비로소 출가 성불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포기한 것이 아니며, 나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성불할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위와 부귀영화와 부인과 지식까지 다 포기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한 그런 것들을 포기할 때만이 중생을 구제하는 깨달음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 텔레비전의 어느 프로를 보니까 '암자-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던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참된 자신을 찾는데 목적을 두고 절이나 암자를 찾아간다고 생각하면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자가 머무는 공간은 나를 찾는 작업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는 노력을 하는 공간입니다. 자신을 버리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나라는 아상과 내가 누리는 평온과 행복, 나를 위한 기도, 내 가족이 잘되기를 바라는 불공은 모두 나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 구복행위로써 부처님은 그런 것을 가르쳐 주거나 이룰 수 있도록 해주는 분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불경을 줄줄 외이고 자신을 공경하고 경배를 올리는 사람은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불제자가 아니라 부처님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처럼 깨닫고 그 깨달은 것을 중생을 위해 회향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신의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재일이 무슨 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관음재일 약사재일 지장재일……. 이런 날들이 불보살을 찾아뵙고 그분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경배를 드리고 소원을 발원하는 날이라고 알고 계시지요?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재일은 출가자가 아니라 재가불자들이 절을 찾아가 출가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 이 날만은 출가자처럼 자신을 다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도 내려놓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도 잊고 출가자처럼 수행 정진하는 날입니다. 재일은 복비는 날이 아니라 업장을 소멸시키고, 진정한 부처님 제자가 되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그 성원을 실천에 옮기는 날입니다. 재일날 절을 찾아와서 공양을 아무리 지극한 마음으로 올려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불공만을 드린다면 진정한 불제자가 아니라 부처님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열심히 “주세요.”하는 기도를 하는 것 같더군요. 성공하게, 합격하게,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심지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솔직히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용서해 주세요. 하면 용서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요.
불제자들은 “주세요.”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을 이루도록 해달라고 빌지 말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저지른 업장은 그것을 소멸시키는 노력을 해야 소멸되는 것이지 용서해 달라고 해서 신이 용서해주고, 그래서 업장이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하고, 닦아서 스스로 소멸시키고, 깨닫고, 이룩하는 것입니다. 불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수행을 하겠다는 것을 맹세하고 실천에 옮겨 마침내 깨닫고 그것을 중생을 위해 회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문유관을 통해서 싯다르타 태자가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니까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가요? 경전에 나오는 것을 비유로 들어 인생의 덧없음과 어리석어 저지르는 우(愚)에 대하여 몇 말씀 드려볼테니 그래도 실감이 가지 않는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백 명의 식솔이 살고 있는 넓고 호화로운 집을 가진 장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자신의 집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깜짝놀라 불타는 집으로 달려간 장자가 아들들에게 빨리 집에서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아들들은 노는데 정신이 팔려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불타는 집은 생로병사와 근심과 슬픔의 고뇌(憂悲苦惱)로 점철된 이 세상을 뜻합니다. 이 세상, 즉 삼계(三界)를 태우는 불길은 지배욕이나 소유욕과 같은 '욕망' 혹은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런 욕망의 달성을 위하여 자신을 내던진 나머지 자신이 불타고 있는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열이 자신을 파멸시키리라는 지엄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집에 불이 난 줄도 모르고 놀이에 몰두해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법화경에 나오는 것으로써 간단하게 화택락착(火宅樂着)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 대부분이 불타는 집에서 즐거움에 집착해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믿기지 않습니까?
그럼 빈두루 존자가 우타연왕에게 한 법문인 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에 나오는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타연왕이 빈두루 존자에게, 세상에서 좋은 일이 많은데 왜 출가해서 도를 닦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빈드루 존자가 대답합니다.
"대왕이여, 옛날 어떤 사람이 광야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 때 크고 사나운 코끼리를 만나 쫓기게 되었습니다. 미친 듯이 달렸으나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언덕 위에 있는 우물을 발견한 그는 그 우물 속으로 드리워진 나무뿌리를 잡고 피신을 했습니다. 우물 밑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잡고 있는 나무뿌리를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이빨로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나무 가지가 잘라지면 우물 밑으로 떨어져 독사의 먹잇감이 될 판인데 이때 나뭇가지의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 똑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꿀맛이 어찌나 달콤했던지 거기에 취해 그만 자기가 곧 죽을 지경에 놓여있다는 것을 잊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코끼리는 무상한 세월을 의미합니다. 나무뿌리는 사람의 생명이고 독사는 죽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이빨로 나무뿌리를 갉아먹고 있는 것은 낮과 밤이 바뀌면서 생명이 차츰차츰 없어져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때 떨어진 꿀 한 방울, 이것을 우물 속 나무의 꿀맛 즉 정수미밀(井樹味蜜)이라고 하는데 그게 무엇일까요. 꿀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취하게 만드는 세상의 향락입니다. 명예, 부귀, 권력, 사랑, 평온 이런 것이 다 알고 보면 꿀입니다. 그 꿀맛에 취해 여러분들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뿌리에 매달려 있는 우물 속 사람인 정수현인(井樹賢人)이 어떻게 하면 살아나올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화두로 삼고 출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더 이상 꿀에 취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꿀맛에 취해 있는 동안 밤낮이 교차하면 미구에 독사가 우글거리고 있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제는 조금 다급한 마음이 드십니까? 그래도 낚시를 무는 고기는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끼인줄도 모르고 그것을 먹기 위해 덥석 물면 바로 사망입니다. 낚시를 물면 꿀맛에 취해 있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낚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결혼해서 2-3십년쯤 살다보면 남편은 아내에게 심드렁해지는 모양입니다. 아내도 사랑해서 남편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 때문에 그냥 살아주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자신을 구원해줄 새로운 사랑인 줄 알고 다른 여자를 만나거나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하면 이게 바로 낚시를 무는 것입니다. 낚시 바늘을 물어서 살아나는 고기는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절대 낚싯바늘을 물지 마십시오. 이뿐만 아니라 오계를 범하면서 얻고자하는 것은 모두가 먹잇감으로 위장되어 있는 낚시지 자기를 살려줄 진정한 먹잇감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출가는 나를 버리고 수행할 장소를 찾아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부처님처럼 또는 저 같은 스님들처럼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제자가 된다는 것은 출가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를 깎았어도 부처님 말씀을 줄줄 외우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지극 정성으로 경배해도 다만 거기서 그치면 부처님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에 불과합니다. 어디에 있던 부처님처럼 수행하여 성불하고 그런 다음 중생을 위해 회향하면 그것이 진정한 불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재가자들은 재일을 이용하여 출가자들처럼 업장소멸을 위한 노력을 기우리고 수행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불타는 집에 있습니다.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며 갈아먹고 있는 나무뿌리를 잡고 꿀맛에 취해 있습니다. 급해도 미끼가 달린 낚시 바늘을 물지 말고 수행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버리십시오. 지금 당장 버리는 연습을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버려가다가 마침내는 모두 버리시기 바랍니다.
버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첫댓글 버리고,버리고 그리고도 남아있으면 또 버리고....부처님처럼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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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라면 꼭 머리속에 기억해놓아야겠습니다 스크랩해서 갑니다 ()()()
불법의 큰뜻을 다시금 새기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 목적을 다시금 새겨 담습니다...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잘 보고 갑니다 ()
처음와서 많은것을 배우고갑니다. 버리고 또 버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