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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는 6000여년에 이르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만들어진 우리 문화 유산의 하나로서 각시대 사람들의 삶과 꿈, 아름다움을 담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도자기에는 한국인의 특질이 솔직하고 꾸밈없이 나타나 있어 주목되고 있다. 우리가 흔히 토기·자기라고 불렀던 그릇들은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질그릇,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질그릇, 삼국시대의 고문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유형의 질그릇 들이며 또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분청자와 백자가 있다. 먼저 우리 그릇의 기원이 되며 인류와 더불어 같이한 토기, 도자기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여 보자.
토기의 시초는 선사시대 인간이 생활에 필요한 용구를 갖기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토기는 흙으로 빚어 유약(잿물)을 바르지 않고 700℃에서 1000℃까지의 온도로 구워 만든다. 흙(태토)은 철분이 함유된 사토 점토를 가지고 만들었으며 굽는 방법은 처음에는 가마 없이 평평한 땅위에서 만들다가 차츰 발전하여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서 굽게 되었다.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양도 많아지지만 그릇의 종류도 많아 접시 단지(항아리)잔, 시루, 고배, 이 형토기(인형, 동물형 토우, 집, 벼루, 방울잔, 가배 등) 등이 눈에 띈다. 모양은 물레를 사용하여 이 시대 의 그릇은 세련되고 솜씨가 매우 우수하였음을 보이고 정성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고구려 토기는 점점 소성온도가 높아져 1000℃이상의 고화도로 구워 졌으며 태토는 극히 치밀하여 느낌으로 볼 때 우직하고 소박한 맛을 지니고 있다. 특히 고구려 토기를 많이 접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백제토기는 모습으로 볼 때 연질성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것이 많으며 화도는 1000℃이상 높여 만들었 음을 보여주고 그 종류로는 원저장 경호, 편저장경호, 기대(받침대) 떡시루, 고배, 벼루 등이 있고, 문양 은 연꽃무늬, 승석무늬, 입체줄무늬, 기하학적무늬 등이 눈에 띈다.극소수이지마는 유약(잿물)이 발려진 그릇도 있다.
신라토기는 경상도 지방에서 김해식토기가 잘 발전하여 만들어진 회청색경질 토기를 주로하고 1000℃ 이상 고온에서 소성되었으며 등요를 이용하였다. 태토는 풍질이 좋은 점토를 사용하였고 색조는 갈색이 가장 많고 회색계통도 다수 있으며 연질성과 경질성 두가지 모두 볼 수 있다. 그 종류(형태)는 다양하여 토우장식장경호, 무개(뚜껑없는)고배, 유개고배, 파수부잔, 토기주전자, 기대(받침), 단경호, 장경호, 대호 (큰<토기 토우 장식 장경호> 항아리), 이형토기[기마형토기 배 수레(차) 가형토기(집) 토우(인물상, 동물 상이 있음) 토제증잔] 등 많은 형태의 토기가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태토는 거의 같으나 형태면에서 달라진다. 토기의 전부가 굽이 달리고 이형토기가 줄 어들고 실용적인 그릇으로 변화하고 불교의 영향으로 골호를 많이 만들었다. 유약이 자연스럽게 발라진 토기가 눈에 자주 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삼채고배는 연유(연단과석영+잿물)를 발라 만들었으며 당나라의 삼채와는 색조가 다르다. 화려하지 않고 전체적으로는 황색을 띄고 일부 녹색이 보인 이러한 토기가 장차 도자기에 튼 영향을 주게된다.
도자기는 도기, 석기, 자기의 합성어로 되었으며 이것은 굽는 온도에 따라서 구분된다. 도기는 1200℃ 이상에서 소성되고 자기는 1300℃ 이상에서 소성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의 구분은 전문가라도 잘 구분하기 어려워 도자기라고명칭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 수천년에 걸쳐 구워오던 토기가 유약을 발견하게 되어 도자기로 전환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음을 볼 수 있다. 우선 태토가 점토에서 자질태토(백토)와 잘 수비된 고령토, 이차점토 등으로 바뀌어 졌으며 기초유약(잿물)과 장석계의 고급유약을 사용하 게 되었다. 화도는 1300℃까지 구워 자기의 성질을 완벽하게 갖추게 된다.
청자 란 푸른색의 자기를 말하는 것으로 몸체를 이루는 회색의 태토 위에 씌워진 푸른색의 유리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청자의 유약에는 실리카(SiO2)와 알루미나(Al2O3)가 주로 포함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칼륰·칼슘·나트륨 등의 성분이 미량 포함되어 반짝이는 유리질의 성분을 이루고 있고 그 안에 푸 른색의 빛깔을 내는 산화철(Fe2O3)미량 포함되어 있다. 청자는 보통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는 가마의 분위기 속에서 구워지는 경우를 산화염이라 하며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 가마의 분위기 속에서 가마 안의 나무가 탈 떄 나무가 산소를 더 필요로 하기 때 문에 도자기의 몸체인 태토나 유약 속에 있는 산소를 빼앗아가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제2산화철(Fe2O3) 의 산소를 빼앗겨 원래의 제1산화철(FeO)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러한 가마의 분위기를 환원염이라고 한다. 이러한 환원염으로 구워질 때 유약 속에 포함된 미량의 철분이 작용해서 푸른색을 띄게 된다. 즉 유리 질의 성분과 색깔을 내는 철분의 미묘한 조화 그리고 그것이 태토의 바탕 위에서 마치 비취옥과 같은 푸른색을 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철분은 유약에 3%정도가 포함되어 있을 때 가장 비취색에 가까운 청자색을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만일 철분이 5%정도이며 암흑색을 띄게 되고 8∼9%가 되면 흑 갈색을 띄게 되어 유약 속에 포함된 철분의 미묘한 변화가 청자의 색깔을 가름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기 순청자시대(1050 - 1150) 순수한 청자색을 지녔으며 이것은 유약과 태토와의 결집력에서 생겨난 비색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러한 결과는 여러 가지 나무재로 유약을 만들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제조된 청자가 그 당시 중국 에서 천하제일인 월주 찻잔을 낳게 되었다. 우리나라 청자의 시초는 10세기말이라고도 하고 11세기초라고도 한다. 그것은 더 연구 조사가 필요하 며 비색청자는 그 색깔이 은은하고 아름답고 고운 빛을 띄우고 있으며 지금도 그 색조를 재현하지 못하 고 있는 실정이다. 문양은 당초문, 보상화문, 연판문(연꽃문), 초화문 그 이외에도 동물로 조각한 것도 있고 과일모양으로 만든 것을 볼 수 있다. 기법은 음각과 양각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 시대의 작품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인종(1123∼1146)의 장능에서 출토된 국보 94호 청자소문과형병과 청자유개합청자연적이 있고 청자연판문 대접, 청자과형병, 청자무문유개합, 청자유기사발, 청자음각국화문합, 청자접시 등 다양하다.
제2기 상강청자시대(1150 - 1250) 상강기법은 도가기를 성형하여 그것을 약간 마르게 한 다음 문양을 음각하고 그 음각한 부분에 다른 태토를 메꾸어 다른색의 문양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색깔은 흑상감, 백상감 두가지가 있다. 흑상감은 음각부분에 산화철을 메워 넣고 백상감인 경우에는 백토를 메꾸어 넣는다. 이 상감법은 아마도 다른 예 술품 목기나 금속기의 상감법을 응용하던 것을 인용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문양으로는 운학문, 보상화 문, 국화문, 당초문, 석류문, 양유문, 문자문, 극소수이지만 화금청자가 있다. 대표적인 상감청자는 상감청자보상화문사발, 이화여대 소장품인 상감청자죽문병, 상감청자무란문매병, 상감청자‘상약국’명유개합, 상감청자운학문합, 상감청자‘기사’명대접, 상감청자국화문대접 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이 있다.
제3기 쇠퇴기(1250 - 1400) 이 시대는 국론이 어지럽고 전국이 몽고의 침입에 의하여 질병과 기아에 허덕이던 시대이다. 따라서 모든 문화면에서도 침체하게 마련이었으며 고려뿐 아니라 중국에도 송에서 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 분야가 쇠퇴하고 있었다. 청자의 기술이 퇴보하면서 청자의 전통 소성방법인 환원염이 산화염으로 바 꾸어지고 그 색깔이 누런 황색을 띄우게 되며, 그 면은 거칠고 그릇은 투박하여지고 문양도 섬세함에서 기계적으로 도안한 상감문양이 많아지게 되었다. 후일 이러한 과정이 조선조의 대표적 작품인 분청사기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은 상감기법을 사용한 인화문 기법을 많이 써왔고 표면은 거칠어졌으며 기계적 감각을 느끼게 하여준다. 청자사발, 청자대접, 청자접시, 청자매병 등 다수가 있다. 이들 이외에도 진사를 입힌 청자가 있고 연리문 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색깔을 띄운 것도 있으며 철화문을 도식없이 간결하고 순수하게 처리한 청자철 화문병 같은 것이 많이 있다. 절대년대를 측정할 수 있는 청자는 청자 '경인' 명당초 문병 제 18대 의종 때 문공유의 묘에서 출토된 청자상감보상화당초문사발, 제 19대 명종의 지능에서 출토된 청자음각연꽃문 사발, 청자상감국화문사발 등 다수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청자의 뒤를 이어온 분청사기와 이조백자로나누어 보기로 한다. 분청사기는 태토는 청자 것보다 약간의 철분이 더 함유되고 유약은 여러종류의 나무재를 사용하고 나무재와 장석의 비율을 4ː6으로 하였고 유약에는 거의 철분이 없고 소성은 청자와 마찬가지로 주로 환원염을 이용하였다. 또 백토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백토를 태워 그것을 물에 녹힌다음 그릇에 바르기도 하고 그릇전체에 입히기도 하였다. 태토는 점토, 고령토 등을 사용하였으며 백토를 분장처리하여 여러 가지 문양을 만들어냈다. 당시의 풍부한 원료수급으로 질좋고 당당한 작품을 양산하였음을 알수 있다. 분청사기의 종류로는 인화 문이 도안된 분청사기, 인화문대접, 분청사기귀얄 <분청사기인화문 [진해] 명완> 문완, 분청사기당초문호, 분청사기덤벙문접시, 분청사기음각당초문장군(호), 분청사기철화문호, 분청사기박지국화문병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이러한 아름다운 조선이 개발한 분청사기가 임진왜란(1592)을 계기로 하여 그 맥이 끝나고 말았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가장 많이 쓰여진 백자는 은은하고 안정되고 우아하며 보수 적인 색감을 띄우고 있어 한국적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였음을 느낄 수 있다. 백자는 순백자, 청화백자, 진사백자, 철화백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순백자는 철분을 빼낸 백토, 고령 토 등을 가지고 투명유약을 입힌다음 1250℃ 이상 고온에서 소성하여 만든다. 종류로는 백자접시, 백자 호, 백자사발, 백자제기(제사용구), 백자명기(부장품)등 다수가 있다. 청화백자는 코발트색이 나는 회회청(산화토발트)을 가지고 백자에 그림을 그려넣은 도자기를 말한다. 이 산화코발트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이나 멀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입하여 사용 하였으므로 제한적으로 사용하였다. 청화백자에 나오는 그림은 궁중의 우수한 화원(화가)들이 그렸고 이 러한 까닭에 조선조 초기 작품들은 그 수량도 적었고 희귀성도 대단하다. 오늘날 조선초기의 청화백자가 보물급에 해당하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조선초 후기에 '분원'에서 궁중사용품을 만들었고 이곳에서 제작된 청화백자의 질은 매우 좋았다. 주로 문방구(청화백자연적,청화백자필통, 청화백자필세, 청화백자쟁반)류와 청화백자용항아리, 청화백자완구 등 다수가 있다. 진사백자는 백자의 표면에 붉은색을 띄우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진사는 산화동을 바르고 소성하여 만드는 백자를 말한다.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유행치는 않았고 관료계통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자표면에 붉고 선명한 무늬가 조화를 이룰 때 그 느낌은 매우 인상깊게 배려되어도 좋다고 생각된다. 작품의 수는 매우 적고 광주요에서 제작된 것과 개성에서 제작된 것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진사연적, 진사병, 진사완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백자철화문자기는 백자에 산화철로 그림을그려 넣은 것을 말한다. 대부분 용그림에 많이 이용되었고 당초나 꽃문 <백자철화매죽문호>양 같은 도안에도 이용하였다. 우리의 도자기는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더 가치가 크며 매우 독창적이다. 인간의 모습이 다르듯 그 도 자기 색깔 모두가 다르며 그것만의 특색을 지니고 있음으로 더욱 그 빛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도자기를 보고 그 그릇에 한 잔의 차를 마실 때 한층 더 품격을 높일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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