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은 형제애, 가난과 “더욱 작음(minoritas)”, 관상, 복음화, 그리고 정의평화와 창조질서보존을 고유의 프란치스칸 은사로 삼아, 이것을 실행하고자 한다.
카푸친들은 회칙을“문자 그대로”준수하려는 이상 즉, 성 프란치스코의 실제 모범과 알려진 의도, 특히 유언에서 표현한 의도로서 회칙을 해석해서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번째 동료들을 엄격하게 닮고자 하였다. 1528년 7월 3일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대칙서‘Religionis Zelus’에 이어, 1619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작은 형제회”세 개의 가지 - 작은 형제회(OFM),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OFMConv),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Cap) - 중의 하나로 인가되었으며, 독자적인 총봉사자라는 총장을 허락받았다.
개혁의 기원
1525년 그 당시의 작은 형제회의 두 개의 가지 중의 하나였던 준수회(Observantes)의 이탈리아 마르케(Marche) 관구에 속한 바시오의 마태오 형제가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회칙을“문자 그대로”준수할 허락을 구두인준을 받으면서 카푸친 개혁은 시작되었다. 포솜브로네의 루도비코 형제와 그의 동생 라파엘 형제는 이 생활양식을 함께 하게 되었다. 준수회 장상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 카메리노의 공작부인, 카타리나 치보의 보호를 받았다. 결국 공작부인의 중개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1528년 7월 3일에 Religioniszelus라는 대칙서로 루도비코의 계획을 인준하여, 카푸친 개혁운동이 교회법적인 존재가 되었다.
첫 번째 총회가 알바치나에서 1529년 4월에 열렸고 바시오의 마태오를 총대리로 선출하고 최초의 정관을 제정하였다. 이 첫 번째 정관은 은둔소에서 기도와 관상 생활을 강조하면서 성 프란치스코의 회칙을 엄격하게 지키기로 하였다.
준수회의 장상들이 엄격하게 살려는 회원들을 억압하자, 수많은 이 형제들이 1533-4년 사이에 카푸친 개혁운동으로 옮겨갔다. 이 중에는 설교자와 신학자로 유명한 형제들이 있었는데 이들 덕분에 형제들이 1535년 로마에서 열린 총회에서 새로운 회헌을 작성하였다. 1536년에 인준을 받았던 이 회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여러 회헌들의 근간이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를 1536년 9월 8일에 장엄하게 승인하였으나, 이듬해 카푸친들이 이탈리아 밖에 진출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1574년까지 연장하였다. 1535년에 총대리로 선출된 아스티의 베르나르디노가 수도회를 내적이나 외적으로 잘 조직하였다. 이어서 베르나르디노 오키노를 총대리로 선출하였으나, 1542년 개신교 개혁자들에게 합류하였다. 이 큰 위기를 새로 선출된 총대리 예시의 프란치스코의 용기있는 지도력으로 극복하였다.
활동 내용
1536년 회헌은 프란치스칸 이상인 혼합된 삶(vita mixta)에 따라서 활동과 관상 사이에 완전한 균형을 목표로 하였다. 열렬한 내적 삶을 위해서, 은둔소 형태를 지닌 형제회를 도시 밖에 짓도록 명시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를 닮음에 있어 회칙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려는 열망에서 초기 형제들의 수도복은 가장 싼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형제들은 맨발로 또는 샌들만 신고 다니며 미래를 위해 무엇이라도 저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을 물건으로만 받으며 매일매일 동냥을 통해서 빈약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카푸친의 엄격하고 터프한 생활과 외모는 르네상스의 약하고 타락한 사회에 전체적으로 자극을 주었다.
형제들은 교회 사도직의 주류에 뛰어 들어서 스스로를 모든 계층, 특히 일반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의 구원에 헌신하였다. 개신교의 확산을 막고 신앙을 잃어버린 지역들을 되찾는 데에 카푸친은 예수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1572년 카푸친들은 알프스 지방에서 설교직을 시작하여, 1625년까지 프랑스, 스페인, 플랑드르, 스위스, 티롤 지방, 오스트리아, 스티리아, 독일의 알프스 북쪽(Ultramontane) 카푸친 관구 19개를 설립하였고, 거기다가 보헤미아, 헝가리, 아일랜드, 영국, 네덜란드에 선교센터를 설립하여서 개신교에 대항해서 신뢰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을 1622년 설립하자, 카푸친들은 첫 번째로 수많은 선교사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식마링겐의 성 피델리스가 스위스에서 살해되어서 포교성성이 첫 번째 순교자를 얻었다. 1587년 터키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4명의 형제들이 들어가려는 시도로 교회의 주요한 선교 수도회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18세기 중기에 카푸친들은 레바논, 아라비아, 페르시아, 아프리카, 인디아, 신세계, 티베트, 벵골, 부탄, 네팔에까지 선교센터를 설립하였다.
카푸친들은 사랑과 사회복지 활동으로 존경 받았으며 특별히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조건 없는 봉사가 두드러진 면이었다. 카푸친들은 곳곳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는 동안 보여준 영웅적인 활동으로 기억되었다. 16세기에 군종사제와 영적 지도자로서 많은 카푸친들이 임명되었으며, 외교활동도 자주 맡았다. 하느님의 말씀 선교는 카푸친 개혁의 본질적인 특징이었으며, 성경에 근거해서 대중적인 언어로 단순하게 강론을 하였다. 강렬하고 설득력 있는 신심으로 설교하였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카푸친들은 1753년부터 교황청의 사도좌 설교자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물론 사제들만이 이 사도직들을 수행한 것이 아니었다. 첫째로 시성된 카푸친 형제,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때부터 평형제들도 특히 동냥하면서 간단한 교리와 영성지도로 민중을 복음화시켰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로 하였으며 병원과 병자의 집에 병문안하여 자주 직접 병자들을 간호하기도 하였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가 자치권을 얻었을 때, 이미 형제들의 숫자는 64개 관구에 34,000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18세기말부터 박해 때문에, 형제회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였는데 형제 숫자가 7,628까지 감소하였다. 그러나 19세기말부터 회복이 시작되었는데 2006년 12월 현재 11,000명의 형제들이 전 세계 99개국에 현존하고 있다. 19와 20세기에는 카푸친 영성을 따르는 여러 남녀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시성된 카푸친 형제들은 14명인데, 제2회인 카푸친 글라라 수도회에는 베로니카 쥴리아니 성녀도 있다. 교황 요한 23세는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2002년에 시성된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의 성 비오는 교회 역사상 사제로서는 최초로 주님의 오상을 받았으며, 고백성사와 미사를 거행하고 영성지도를 주며 기도모임을 조직함으로써 영혼들을 치유했고 또 병원을 설립하여 어려운 사람들의 육신의 치유도 촉진시켰다.
영성
교회와 교황청으로부터 공식적이며 영구한 승인을 받은 프란치스칸의 개혁운동으로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전체 지향은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 정신에 따라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완전히 따르는 것이다.
이 지향에 따라 형제들은 형제애, 가난과“더욱 작음(minoritas)”, 관상, 복음화, 그리고 정의평화와 창조질서보존을 고유의 프란치스칸 은사로 삼아, 이것을 실행하고자 한다.
형제애 - 카푸친 작은 형제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아들들로서 형제생활을 함께 한다. 이리하여 형제회의 일을 공동으로 토의하고, 복음과 회헌에 따라 성직자이든 평수도자이든 모든 회원들이 구별 없이 형제라고 불리며 서품으로 유보된 일 외에는 모든 일에서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가난과 더욱 작음 -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형제들은 가난과 더욱 작음을 실천으로 옮겨 가난한 이들에게 가까운 생활을 하고자 한다. 돈과 물품에 사용에 있어서 다음의 원칙을 삼는다“. 최대가 아니라 최소.”민중의 형제들로 알려진 카푸친 형제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이 살며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도 나누고 자선으로 도우려고 한다. 모든 점에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닮으려고 봉사만 하려는 더욱 작은 이의 자세로 생활양식과 사도직을 실행하고자 한다.
관상 - 형제들은 성령의 영감에 응답하여 기도와 관상의 정신을 기르도록 노력한다. 온 교회와 일치하는 마음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카푸친 형제들은 또한 정신적 기도, 즉 마음의 기도도 그들의“스승”으로 본다. 성령의 활동으로부터 우러러나는 사랑의 숨인 기도를 통해서 각각 형제는 자연과 역사, 다른 사람들과 자기 양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들려오는 제 마음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신비를 마음에 새기신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카푸친 형제는 늘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행하도록 노력한다.
복음화 - 형제들은 내적인 삶을 세상의 모든 이와 나누기 위해, 말과 행동으로 만민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다. 설교와 성사의 거행, 성경의 사도직과 영성지도, 상담 등과 같은 여러 가지의 사도직과 봉사를 통해서 복음화를 수행하는데 무엇보다도 복음화의 근간이 되는 사랑의 실천과 자선과 증거를 하면서 형제적 생활양식을 통해서 만민의 복음화를 촉진시킨다.
정의 평화와 창조 질서 보존 - 카푸친 형제들은 성 프란치스코처럼 만민만물을 형제로 삼아, 여러 가지 사도직과 회개하려는 태도와 생활을 통해서 평화와 정의를 북돋우며, 창조의 질서를 보존하며 사랑한다.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삶이요, 우리의 기도요, 우리의 활동이다’(카푸친 회헌 3장). 기도 중에 형제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유에 누우신 그분의 가난을 기억하며, 성체성사 안에서 그분의 겸손을 관상하여 마음의 어두움과 직면한다. 그러므로 형제의 기도는 현실을 도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 프란치스코를 본받아, 기도하는 형제는 가난하고 겸손하시며 고생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웃의 얼굴 안에서 보고,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그분을 섬기며 사랑하도록 노력한다.
한국 진출 과정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초청으로 1986년 7월 16일 아일랜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 파트리시오의 관구 소속 4명의 형제가 입국하여 작은 형제회 정동 수도원에 머무르면서 한국의 카푸친 현존이 시작되었다. 1993년에는 한국 카푸친의 첫 번째 한국인 청원자를 받게 되었다. 1995년 서울 청파동에서 수련소가 시작되었고, 1996년에 4명의 한국인 형제들이 유기서약을 했으며, 1996년 6월 24일에는 효창동에 천사들의 성 마리아 형제회가 설립되었고, 1997년에는 수련소가 춘천교구 가평으로 옮겨졌다. 1999년에는 첫 2명의 한국인 형제가 종신서약을 했다. 2000년에 가평에 칸탈리체의 성 펠리스를 주보로 하는 수련원을 봉헌하였다. 2002년도에는 인천 교구의 강화도에 신학생들을 위한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형제회를 설립하였다. 2005년 1월 29일에 총봉사자 요한 코리버 형제가 관구봉사자 베드로 로제르스가 참석한 가운데 한국 보호구를 설립하였다.
양성 과정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고유 수도성소를 철저히 키우기 위해서 종신서약 때까지 사제 지망자와 평수도자 지망자를 구분하지 않고 1-2년간의 청원기와 1년 간의 수련기와 적어도 3년 간의 유기서약기에 걸쳐 인간적, 수도자적 카푸친 프란치스칸 양성을 받는다. 유기서약기 중의 일년 정도의 기간 동안에 다른 나라의 카푸친 형제회에서 프란치스칸 문화체험과 양성을 받을 수도 있다. 이 초기양성 끝에 형제는 본인과 수도회의 의사에 따라서 종신서약하고 전문양성을 시작합니다. 사제가 되려는 형제는 신학교에 다니며 평형제가 되려는 형제는 미래의 봉사를 위한 전문 양성과 교육을 받는다.
사도직 현황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지역 교회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서 성사의 거행과 기도와 성경 공부의 모임, 영성지도, 상담, 어려운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고 노인의 이동목욕, 강의, 요리와 집안일 등과 같은 다양한 사도직에서 활동하고 있다. 각 형제는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 백성의 선익을 위해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려된다. 형제들은 어렵고 하기 싫은 일도 기꺼운 마음으로 하고 있고 또 해야 한다.
회원수
현재 한국에는 13명의 종신서약 형제들과 1명의 유기서약 형제들이 서울, 가평, 강화도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증거하며 더욱 작은 자들로 살고 있다.
성소 문의 및 연락처
성소담당자 : 황진혁 베르나르디노 형제
효창동 형제회 : 02-701-5727
강화 형제회 : 032-937-6378
가평 형제회 : 031-582-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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