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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강: 죽음과 호적
1. 모친 회고와 생명의 고귀함
EBS에서 노자(老子) 강의가 끝날 때 어머님을 모셔 와서 절을 하면서 끝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상당히 감동적이었다고 하면서 저를 만날 때마다 많은 사람이 어머님의 안부를 묻는다.
그런데 지난주 4월 5일 향년 95세로 유명을 달리 하셨다. 1910년생이니까 20세기를 거의 완벽하게 채우신 분이다.
홍승숙(洪承淑 일명 喜男) 1910-2004
우리 민족사의 모든 고난과 영광을 역사와 더불어 사신 분이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을 하나만 말씀드리겠다. 거의 혼수상태로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깨끗하게 늙으셨는데, 살결도 백옥 같았고, 숨이 ‘딸깍’하는 순간에도 육신을 보면 완벽하게 살아 생전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딸깍’하고 숨이 넘어가기 전과 후의 느낌이 너무도 달랐다. 한의학적으로 말하면 살아 움직이는 경락이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돌아가신 후의 느낌이 정말 달랐다.
몸도 따끈한 그대로였는데, 가슴에 귀를 대어보니 심장은 안 뛰고 피가 응고되는지 피가 흐르는 소리가 ‘뚜루루’ 들렸다. 그 순간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제가 막내라서 엄마 젖을 오래 빨았다. 국민학교 때까지도 젖을 빨았던 기억이 있다. 젖도 안 나오는데 젖을 빨았던 생각이 났다. 막내라서 정이 더 깊었다.
내가 거기서 느낀 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생명을 가지고 살다가 죽기직전까지의 변화는, 인간의 생애에 있어서 0.01%의 변화도 안 된다는 것이다. ‘딸깍’하는 순간의 변화가 99,999%의 변화였다.
인간의 손 하나가 시체로 있는 것하고, 손 하나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손가락이 움직이려면 근육, 신경, 움직이려고 하는 뇌의 의식 상태, 이 모든 게 기막히게 연결되어 움직여야 한다. 이게 바로 생명이다.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는 것은 그게 전부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변화는 너무나 미미한 변화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싸우고, 늙는다고 한탄하고, 젊은 시절을 회고하고, 이러는 데 이런 것들이 다 우습게 보였다.
인간이라는 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렇게 귀하고 평등한 존재일 수 없다.
인간이 생명을 보유하고 있는 한, 삶의 사실은 모든 현상이 평등하다.
생명이 있고 없고 그것이 그야말로 인간의 전부이다. 우리가 생명을 갖고 사는 것의 고귀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겠다.
2. 모친과 종교
저희는 돌아가신 자리에서 시신을 옮기지 않았다. 요새는 돌아가시면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서 냉동실에 넣은데, 우리는 그런 게 싫어서, 전통적인 예식대로 그 양반이 사신 곳에 그대로 모셨다.
백(魄)은 그대로 가라앉고 혼(魂)은 그대로 날아가는 게 원칙이라서, 시신을 그렇게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자기 삶의 터전인 그 자리에서 염(殮)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 삶의 코스모스에서 혼(魂)은 하늘고 가고, 백(魄)은 땅으로 스민다.
빈소는 영안실을 빌려서 차렸어도, 시신은 옮기지 않았다. 거기서 다음날 염을 하고 입관을 했다.
누나가 큰 함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열어 보고 놀랐다. 당신이 입고가실 수의를 10여년에 걸쳐서 직접 만들어 놓으신 거였다. 아마 우리 어머님이 입고 가신 수의가 우리 민족사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쓰인 전통적 조선 왕조의 수의라고 생각된다.
거기에서 옛날 다홍치마가 하나 나왔다. 당신이 80여년전에 시집 올 때 입고 온 다홍치마를 그대로 간직하고 계셨다. 그 다홍치마와 연두빛 저고리를 입고 가시겠다는 뜻이었다. 난 그걸 보관하고 싶었지만, 그대로 입혀드렸다. 장의사 분이 오셔서 ‘이렇게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수의를 처음 보았다.’고 했다.
옛날 분들이 사신 모습은 요새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그런 게 있다.
나는 굉장히 철저한 기독교 신앙 속에서 자란 사람이지만, 철학을 공부하고, 사상을 공부하면서 기독교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이 인류 문명을 다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신앙의 영역을 넓혀갔다.
나의 행동이나 사상이 기독교도 입장에서 보면 엄청나게 이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 같이 보일 수 있다. 나는 빈소에 스님이 찾아오면 염불을 하게 하고, 교회에서 조문객이 오면 앉아서 찬송가를 부르고 가게 했다. 당연한 거다.
어머님은 평생을 기독교의 신앙으로 사셨어도, 일체 도올 김용옥의 사상에 대해서 개입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어떤 사상을 읽다가 깨달으면 서재에서 공부하다가, 어머니가 제일 가깝고, 좋은 분이니깐 기쁜 마음에 내려와서 어머니한테 그 이야기를 다 했다.
나는 이 세상에 있는 아무리 어려운 이야기라도 우리 어머니한테 다 했다. 어머니는 그걸 재미있게 들어주셨다. 내가 깨달은 임마누엘 칸트나 헤겔의 이야기해도 몇 시간이고 우리 어머니는 들어주셨다. 우리 어머니처럼 나의 강의를 잘 들어 주신 분이 없다.
우리 어머니는 나처럼 공부를 하신 분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어려운 생각을 새롭게 개발해도 그것을 다 이해해주셨다.
그러나 내가 한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어머니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이야기였다. 오늘날, 우리 형들은 나를 이해 못한다. 이단이라 할지 몰라도, 우리 어머니는 100% 나의 사상을 이해하고, 한 번도 내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기독교의 참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를 죽이려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나를 좋아하는 놈을 좋아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오늘날 우리가 선거를 앞두고도, 내가 좋아하는 놈만 좋아 한다,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선거의 당락만 생각하다 보면 우리 사회의 본질과 대의는 잊어버리게 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기독교는 증오의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구약이 인간에게 증오를 가르쳤다면, 신약은 철저하게 사랑을 가르쳤다. 이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인 한에 있어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는 모든 인간이 평등한 것이다. 그것이 귀한 것이다. ‘딸깍’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인간은 고귀한 것이다.
나도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젊은이가 부럽기도 하다. 내가 벌써 공부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렇게 늙어 가는구나 하고 한탄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고귀하고, 이것이 기쁨이고, 이것이 위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 조선시대의 호적
앞으로 동학을 강의할 예정인데, 동학사상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우리 민족의 중요한 바이블(Bible)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학사상의 모든 사상적 가능성이 동학 이전에 최한기(崔漢綺)라는 사상가에 의하여 시대정신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오늘은 이 최한기라는 걸출한 사상가에 관한 아주 재미나는 문헌이 최근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그분의 족적을 한번 보기로 하겠다.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이 귀중한 문헌은, 요새로 말하면, 호적등본과 같은 것이다. 옛날에는 호적등본 하나가 이렇게 어마어마했다. 물론 양반집 호적이었다.
이것은 정확하게 부르면 ‘준호구(準戶口)‘라고 한다.
준호구(準戶口)
이전의 호적과 대조하여 비준한 호적등본이라는 뜻으로 법적 효력을 가지는 문헌.
옛날에도, 나라라는 것은 그저 허술하게 있는 게 아니었다. 조선왕조를 우습게 아실지도 모르지만 조선왕조는 대단한 나라였다. 한 나라를 통치하려면, 도대체 국민이 누군지 물리적으로 알아야 했다. 그래서 조선은 3년마다 호구조사라는 것을 했다. 식년마다 호구조사를 했다.
식년(式年)
갑자에서 子, 卯, 午, 酉가 들어가는 해. 만3년마다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새로 태어난 사람, 이주한 사람, 사망한 사람을 조사했다. 그걸 호적중초라 했다.
호적중초(戶籍中草)
정식 호적을 만들기 위한 전단계의 기초 자료
지금 호적이라고 하면 호주제를 생각한다. 호주라는 말은 일제시대 때 생긴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호주라는 말이 없다.
호주(戶主) 제도는 우리나라의 고유한 풍습이 아니다. 오늘의 호주제도는 일제시대 때 정착된 것이다.
호주라는 말은 없고, 주호(主戶)라 했다.
주호(住戶)
호주의 개념이 아닌 국역(國役)을 담당할 그 집의 대표
주호라고 하는 것은 그 호의 주인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 기본적으로 국역을 담당할 대표적 인물을 말하는 것이다. 국역은 부역이나, 군대 가는 거, 용역 같은 여러 가지 국가적인 일을 말한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16세부터 60세 이하가 전부 정(丁)에 들어간다. 정(丁)이 부역 대상에 들어갔다.
정(丁) : 16~60세
모든 집에서 호적중초를 다 썼다. 자기 집안의 상황을, 쓰는 형식에 따라 모두 써서 제출했다. 지방에서는 말단 관청인 향청이라는 곳에, 최한기는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한성부로 갔을 것이다.
향청(鄕廳)
지방의 최말단 행정기구
한성부(漢城府) : 서울 시청
한성부는 서울 사람들의 호적만 관리하는 게 아니라, 전국의 호적을 다 관리했다. 그래서 호적을 보관하는 호적고라는 어마어마한 창고들이 있었다.
호적고(戶籍庫)
호적을 보관하는 관청의 창고
호적단자라는 게 있는데, 자신들의 것을 써서 제출했다.
호적단자(戶籍單子)
주호(住戶)가 손수 써서 향청이나 한성부에 제출하는 호적문헌
호적단자를 받으면, 도장을 찍고, 관청에서 보관한다.
옛날에도 호적등본이 필요했다. 과거를 보러갈 때, 호적이 없으면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조상이 어떠한지 다 입증해야 했다. 또는 송사를 할 때도 필요했다.
4. 최한기의 호적
구체적으로 보면서 이야기를 한다.
이 문헌은 주호가 작성한 호적단자가 아니라, 관청에서 직접 작성하여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이다. 공식적 효력을 갖는 공문서이다.
▶ 咸豊二年 月 日 漢城府
함풍(咸豊) 2년이라는 중국 연호를 썼는데, 1852년이다. 함풍 2년 몇 월 며칠 한성부에서 발행했다는 뜻이다.
▶ 考壬子成籍, 戶口帳內,
[임자성적, 호구장내를 상고하건데,]
그 다음 주소가 나온다.
▶ 西部, 養生坊, 松峴契, 第三統, 第三戶住.
[서부, 양생방, 송현계, 제3통 제3호에 사는]
정도전이 태조 5년에 서울을 5부 52방으로 나누었다. 5부라는 것은 북부, 서부, 남부, 동부, 중부였다. 지금도 중부경찰서가 있다. 그 중부이다.
태조 5년(1396) 정도전은 서울을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었고 그 이름을 모두 만들었다. 조선말까지 이 대체적 윤곽이 유지되었다.
그 다음의 단위가 방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동보다 조금 큰 것이다. 적선방이니 황하방이니 하는 것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양생방이다.
部 〉坊 > 契
방 다음의 단위가 계이다.
▶ 生員 崔漢綺, 年五十, 癸亥(1803)生, 本朔寧,
그 다음에 생원(生員) 최한기(崔漢綺)가 나온다. 그래서 이 사람이 성균관 생원까지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원 : 문과에는 대과(大科)와 소과(小科)가 있다. 소과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뉜다. 생원시 초시(初試)를 거쳐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자를 생원(生員)이라 부른다.
그 다음에 나이가 나온다. 생원 최한기의 나이는 50이고, 계해생이라고 나온다. 계해생은 1803년이다. 본관이 삭녕이라고 했다. 그래서 삭녕 최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삭녕 최씨 가운데 유명한 사람은 세종조의 최항이라는 사람이다. 한글학자였다.
최항(崔恒:1409~1474):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훈민정음해례> <경국대전> 등 찬진.
▶ 父通政大夫, 行昆陽郡守, 兼晋州鎭管, 兵馬同僉(첨)節制使, 光鉉.
광현(光鉉)은 최광현이고, 광현 앞에 있는 것이 다 벼슬이름이다. 이것은 무관벼슬이다. 이 아버지는 친 아버지가 아니고, 양자로 들어간 아버지다. 큰아버지다. 그 다음에 생부가 나온다.
▶ 生父, 學生致鉉.
생부는 학생 치현이라고 했으니깐, 아버지는 벼슬을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적등본에는 4조를 쓴다. 4조는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를 말한다. 이 4명을 4조라고 한다. 4조는 반드시 기입해야 했다.
사조(四祖)
아버지(父), 할아버지(祖), 증조할아버지(曾祖), 외할아버지(外祖)
▶ 祖, 學生配觀.
할아버지는 학생 배관(配觀)이었다. 최배관이었다.
▶ 曾祖, 成均生員之嵩.
증조부는 성균생원 지숭(之嵩)이었다. 즉 증조부도 벼슬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外祖, 學生金○薄, 本安東.
○ 부분은 뜯어져서 읽을 길이 없다. 그런데 종이를 보면, 교지에 비해 더 많이 삭아 있다. 호적등본은 너무 많이 떼어주기 때문에 호적지라는 싸구려의 얇은 종이를 썼다. 교지에 쓰는 종이가 좋기 때문에 보존이 잘 되었다.
호적지(戶籍紙)
호적등본을 위한 싸구려 종이
▶ 娶朴氏, 齡五十三, 庚申生, 籍蕃南.
주호의 4조가 들어가고, 그 다음에 부인이 나온다. 반남 박씨를 취했는데, 부인의 나이가 53살이니깐 최한기보다 3살 위였다. 경신생이고, 적(籍)은 반남(蕃南)이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하실 것은 요즘 호주제에 대해 자꾸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호주라는 말을 거부하는 이유는, 호주라는 말 자체가 남성 중심이다.
미국은 여자가 결혼하면 여자의 성(姓)이 없어진다. 남자 성을 받는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여자 성이 없어지지 않는다. 결혼을 해도 성이 변하지 않는다. 우연히 이렇게 된 게 아니다.
우리나라 호적제도는 완벽하게 양성 평등이었다.
우리나라 호적전통은 양성평등(兩性平等), 즉 남녀평등이다.
여기에 기록한 태도를 보면, 남자 쪽의 4조가 들어가고, 그 다음에 부인 쪽 4조가 그대로 나온다.
최한기 부인의 4조
父, 學生宗赫. 祖, 學生經源. 曾祖, 學生師完. 外祖, 通訓大夫, 行魯城縣監, 公州鎭管, 兵馬節制都尉 李集明, 本慶州.
남자가 죽으면, 지금은 아들이 호주가 되지만, 옛날의 우리나라 호적제도에서는 부인이 바로 승계한다. 일제 시대 이후의 호주제도를 가지고, 사람들이 자꾸 이야기를 하는데, 역사의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회는 거의 남녀가 평등한 사회였다.
조선조의 성립(1392)
고려사회 ---> 17세기 중엽 ---> 유교의 종법사회 --->
세계적으로 드문 케이스다. 17세기 이후부터 장자 상속제가 발달한다. 이 문헌은 19세기 말엽의 것인데도 기재방식은 완전히 양성평등이다.
▶ 率子幼學柄大, 年三十四, 己卯(1819)生.
본인 쪽 4조가 나오고, 부인 쪽 4조가 나오고, 그 다음에 자기가 데리고 있는 아들이 나온다.
유학(幼學)이라고 했는데 아직 벼슬을 안해서 유학이다. 아들 이름이 병대(柄大)였다. 나이가 34세고, 을묘생이라고 했으니깐 최한기랑 16살밖에 차이가 안 난다. 부인이 19살 때 낳은 것이다.
그런데 이 아들이 43살에 문과급제를 한다. 그래서 큰 벼슬까지 한다. 16살밖에 차이가 안 나서, 최한기라는 사람은 아들이 평생의 친구였다.
모든 문장을 쓰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니깐 자기 아들하고 웃으면서 서로 담론했다. 그래서 최한기의 중요한 책들의 서문은 전부 아들이 쓴 것이다.
두 부자가 양한정에 앉아서 매일 담소하면서, 아버지가 쓴 것을 베껴서 옮기기도 하고, 이러면서 사이좋게 살았다.
▶ 娶申氏, 齡三十七, 丙子生, 籍高靈,
병대의 부인이 신씨인데, 나이가 37세고, 병자생이고, 고령 신씨였다.
이 당시 병천이라는 아들도 있고, 딸도 있었는데 여기에는 안 들어있다. 다른 아들과 딸들은 어딘가 딴 호적으로 올라가 있는 것이다. 없는 게 아니다.
정부에서는 될 수 있는 한 호구를 늘리려고 애를 썼다. 쓰고, 어디든지 있으면 그걸 따로 해서, 호구 단위를 많이 만들려고 했다. 그래야 세금을 더 많이 부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호적을 만들 때, 사람들은 될 수 있는대로 이름을 안 올리려고 애를 쓰고, 정부에서는 될 수 있는대로 호구를 많이 늘리려고 했다.
이것이 조선의 호적의 문제점이다.
▶ 己酉(1849) 戶口相準者
기유년은 1849년으로 3년전 조사한 것과 비교해 보니, 틀림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준호구라고 한다. 이 말이 들어가 있어야 호구단자가 아니고, 준호구이다.
호적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양반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지만,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노비를 적는 것이다.
노비는 조선 양반들의 중요한 재산이었기 때문에 이게 노비 문서가 된다. 그래서 노비를 아주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여기에는 24명이나 나온다.
노(奴)라는 것은 남자 하인이고, 비(婢)라는 것은 여자 하인이다.
노(奴): 남자 하인
비(婢): 여자 하인
▶ 率奴婢秩:
데리고 있는 노비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는 뜻이다.
▶ 婢, 五月, 年庚子生,
비의 이름이 오월이다. 경자생이라고 나와 있다. 이 다음에 부모가 들어간다. 왜냐하면 노비 하나하나의 부모를 알아야만, 신원이 확인된다. 그래야 딴 데로 도망갈 수가 없다.
▶ 父, 不知, 母婢一分, 一所生.
아버지는 모른다고 나온다.
노비들은 아버지를 모르고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천자수모법이라고 해서,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법이 있었는데, 여자가 노비인데, 양인하고 결혼하면, 거기서 나온 소생들은 아버지를 밟아서 양인으로 승격이 되면 좋은데, 무조건 노비가 되었다. 천자(賤子)는 전부 엄마를 따르게 되어 있었다.
천자수모법(賤子隨母法)
1039년 처음 제정된 고려시대로부터의 풍습. 엄마가 천인이면, 비록 아버지가 양민이라 할지라도, 엄마의 신분을 따라 천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인구비례 상, 그렇게 섞어져서 결혼을 하면 할수록 노비의 비율이 많아진다. 그러니깐 이 법은 양반놈들이 노비를 많이 거느리기 위한 악법이다. 노비의 숫자가 늘어가고, 양인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국가적으로 문제가 된다.
이게 양반들한테는 좋은데, 국가한테는 손해다. 왜냐하면, 노비들은 국가에 직접 세금을 안 내도 된다. 그러니깐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조의 아주 큰 문제였다.
그래서 노비제도를 폐지하려고 했지만, 양반들이 반대해서 못했다.
이 노비제도는 동학 때문에 갑오경장(甲午更張) 때나 되어서야 없어진다. 동학혁명에서 요구한 것이 노비제도를 폐지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로소 노비제도가 없어진다.
17, 18세기만 해도, 확실하게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였다. 그러니깐 여러분 중 반은 노비 출신이다. 지금 호구가 정확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속일 수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지금 와서 양반 상놈 따지는 것은 모두 사기이다.
그 다음으로 맹금이, 관옥이 등 노비 이름이 쭉 나온다. 그 뒤로 가면, 좀 이상한 글자가 나온다. 노비 이름이 ‘이뿐이’면, 伊分伊이라고 썼다. 옛날 노비 문서에 나오는 한자 이름이 아주 재미있다.
이뿐이=伊, 分+口匕, 伊
개똥 = 介, 同+口匕
칠돌 = 七乭
그리고 여기 당상관이 나온다. 한성부의 당상관이면 정3품 이상이다. 요새로 말하면 국장급이다.
당상관(堂上官) : 정3품 이상, 국장급.
우리는 보통 서양에서는 싸인을 하고, 우리는 도장을 찍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나라 관공서에서도 최근까지 도장을 찍다가 고친다고 하는데, 웃기는 이야기다.
우리는 옛날에 전부 수결로 했다. 도장은 일제 시대 때 생긴 것이다.
수결(手決)
손으로 직접 싸인하는 것. 서압(書押)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관공문서는 전부 싸인이었다. 그런데 이 문서를 잘 들여다보면 도장으로 찍은 것처럼 보인다. 한성부는 워낙 많은 사람이 호적을 요구하니깐 당상관이 그걸 다 싸인하는 게 귀찮았다. 그래서 싸인을 도장으로 만들어서 찍었던 것이다.
5. 최한기의 말년
후에 나오는 자료를 보면, 이렇게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던 최한기는 말년에 엄청 가난하게 살았다.
저술을 하는데 종이 살 돈이 없어서, 옆집에 가서 사정사정해서 쌀을 외상으로 꾸어다가 종이를 사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책을 사다가 망한 것이다. 너무도 책을 많이 사서, 장안의 모든 서적상이 최한기한테 안 간 사람이 없다고 한다.
외국에서 희안한 책이 들어오면, 최한기가 다 사주었다. 책을 잘 사준다고 하니깐 세계만국의 책을 수집한 사람이 와서 전부 최한기한테 팔았다. 최한기는 책을 사기 위해서 집까지 팔고 나중에는 거지가 된다.
최한기가 써놓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패가망신하면서까지 책을 사서 되겠냐고 하니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 或言求書費多者(혹언구서비다자), 惠岡曰(혜강왈): 假令此書中人(가령차서중인), 竝世而居(병세이거), 雖千里(수천리), 吾必往.
[어떤 사람들은 책을 사는데 돈을 많이 쓴다고 하는데, 혜강이 말하길, 가령 이 책 속의 사람이 이 세상에 같이 있다면, 비록 수 천리라도 나는 반드시 갈 것이다.]
내가 이렇게 책을 살 수 없는 그러한 시점이라면, 내가 이 사람을 만나러 그 머나먼 여행을 하고, 행장을 꾸리고 수천리 길을 갔다 와야 할텐데, 그러면 돈이 몇 천배 더 든다는 것이다.
▶ 今吾不勞以座致之(금오불로이좌치지), 購書雖費(구서수비), 不猶愈於齎糧而適遠乎?(불유유어재리이적원호)
[지금 나는 힘 안 들이고 앉아서 그 사람을 볼 수 있으니 책을 구하는데 비록 돈을 썼지만 양식을 들고 다니며 먼 곳을 가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낫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렇게 많이 책을 사서, 죽을 때까지 공부하면서 결국 가산을 탕진하고 한국은행 본점짜리 집을 다 팔아먹고 굉장히 초라하게 죽는다.
혜강은 그만큼 죽을 때까지 학문에 대한 열정 속에서 살았던 분이고, 이런 분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개명된 세상에 살고 있다. 내일 모레 한분도 빠지지 말고 투표장에 모두 가서 우리의 개명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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